왜 가톨릭 교회는 사회정의에 적극적인가?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의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음까지도 불사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원죄로 인해 세상은 우리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선포하신 진리, 즉 가야할 길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영원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둘째는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경을 통해 전해 주십니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와 평화 그리고 평등한 사회입니다.위의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하지만 이것을 구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때론 어는 나라에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전파될 때는 그 사회의 기존 질서와 마찰을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가톨릭이 처음에 로마를 중심으로 전파될 때엔 상상할 수 없는 길고 긴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로마의 사회질서의 모순에 대해 항거하였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만이 선민적 특권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때에 우리 교회가르침은 하느님안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300여년경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잘 관찰하다 보니 이들은 정직하고 서로 사랑하고 평등한 삶을 추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공경이 남달라서 이들에 감화되어 신자가 되는 대 사건이 이뤄집니다. 이때부터 우리 교회는 엄청나 변화를 맞게 되는데 무서운 박해중에 있던 교회가 갑자기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과 금권도 거머쥐게 되는 일대의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 유럽이 교회의 손에 들어오게 되니 이때부터 우리 교회는 부패의 아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때에 프로테스탄이란 이름으로 여러 개신교가 탄생이 됩니다. 이 때 우리 교회는 성프란치스꼬 같은 성인들에 의해서 교회쇄신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정권과 금권에 대해 우리 교회는 신중한 자세를 갖기 시작하면서 봉사의 중심에 있는 성직자들에게 철저한 생활 규칙과 재산에 대한 사용과 정치권력과의 야합이나 금권에 대한 철저한 규제를 하게 되면서 말 그대로 환골탈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상을 위해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어느정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유물사관의 대표격인 공산주의의 태동도 엄밀히 생각해 보면 유럽교회가 기득권층과 야합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지금 통렬히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런 정치권력과 금권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자연파괴에 대항해서 사회의 올바른 가치관을 지키고 펼치기 위해 때론 사제들이 좌경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까지도 세상을 향해 사회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리서치 기관에서 우리 가톨릭 교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집단으로 늘 인정해 주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온 국민을 울고 웃게 했던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노래 제목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못났다고 한 덕에 코미디의 황제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으니 대단한 인생역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우리나라 위인(偉人) 중에도 스스로 못났다고 고백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백범일지에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하거나 부자와 같은 좋은 관상이 아니고 천하고 가난하고 흉한 관상뿐이다라고 썼는데 자기 PR시대라고 하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가히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범 선생께서는 대일독립전쟁의 최고 지도자가 되셨습니다.두 분은 얼굴 못 생긴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했을 까요? 이주일씨는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라고 노래를 했고 백범 선생께서는 백범일지에 관상공부를 하던 중에 책에서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는 글귀를 보고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기로 했다고 썼습니다.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보면, 이 글귀는 당나라 때 마의선인(麻衣仙人)이라는 사람이 펴낸 관상책 마의상서(麻衣相書)의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이 글귀가 책의 마지막에 나오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렇습니다.마의선인이 길에서 만난 총각머슴을 보고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낙심을 한 총각머슴이 물가에 앉아서 탄식을 하고 있는데 나무토막이 떠내려 왔고 그 나무토막에 수많은 개미들이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우왕좌왕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총각머슴은 자신의 처지와 같은 개미들이 불쌍해서 나무토막을 건져 개미들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곤 며칠 후 마의선인이 또 총각머슴을 보게 되었는데 곧 죽을 듯했던 총각머슴의 관상이 장수하며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으로 바뀌어 있더랍니다. 총각머슴에게 개미를 구한 얘기를 들은 마의선사는 자신이 공부한 관상법이 완전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마의상서 마지막에 그 글귀를 추가했다고 합니다.이와 같이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진리는 원효대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모든 것이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一切唯心造)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것입니다.매년 대입수학능력시험 때가 되면 스스로 목숨을 버린 학생들의 얘기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미국의 CNN에서까지 한국에서 고3 기간은 지옥의 해라며 대학입시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문제를 다뤘다고 하는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 학벌위주의 사회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부모들, 기성세대라는 점입니다. 청소년들의 애꿎은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 탓만 하지 말고 부모 자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반드시 자식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탐(貪) 즉 욕심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 만을 세상의 잣대인 것처럼 자식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이는 세상을 경계와 경쟁의 눈으로 보는 진(瞋), 즉 세상의 향한 노여움일 뿐입니다. 또 자신의 자식을 약간의 노력이 부족한 잠재적 슈퍼맨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치(痴), 즉 어리석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탐진치를 지혜로 바꾸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3가지 독(毒)이라고 말합니다,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 있는 자식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에게 잘하라는 얘기를 하기 전에 자신은 잘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영담 조계종 총무부장불교방송 이사장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

박성민 목사는 그의 책 완전 소중한 비밀에서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통념을 뛰어넘는 넓은 관점으로 보라!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당시 통념이라고 여기던 사실을 절묘하게 뒤집은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먼저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당시 존경받은 랍비 할렐은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면서 남이 너에게 했을 때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차이를 알겠는가? 할렐은 피동적이며 대응적이고 소극적이다.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능동적이며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다. 남이 나에게 해주었을 때 좋을 만한 것을 남에게 행하라고 가르친다. 다음으로 누가복음 9장 50절을 보자.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우리를 위하지 않으면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이라는 논리를 가진 세상은 이 기준으로 늘 편 가르기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한다. 즉, 영어의 against와 for의 차이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우리 편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리 편의 범위가 다르다. 흔히 도덕적 위안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정도의 선행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시켜 보려는 의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하지 않으면 왠지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의 기준을 세운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자기중심적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에서 보라는 것이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라는 책에서 피터 싱어는 지금 일어나는 기부문화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를 묻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기부의 사람 빌 게이츠가 빈곤 퇴치를 위해 290억 달러를 내 놓았다는 말에 세상은 감동한다.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는 매년 50만 명의 어린이가 로타바이러스(아동의 설사를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죽어간다는 보도를 보고 모든 생명은 그들이 어떻게 살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라고 선언하며 자선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해도 카네기나 록펠러가 평생 동안 기부한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액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시애틀 근교 호반에 1억3천5백만 달러에 달하는 집에 산다. 매년 그 집에 대한 재산세만 1백만 불이 넘는다. 게이츠의 소유 중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쓴 대서양 법전이라는 책을 1994년에 3천 8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다. 그가 그렇게 많은 기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사치를 누리고 살 자격이 충분히 있는가? 물론 그는 다른 어떤 부자보다 훌륭하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오러클의 CEO 래릴 엘리슨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순위에서 14위인 250억 달러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2007년에 3천9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굉장히 큰 액수 같지만, 그렇게 매년 기부해도 600년이 지나도 10억 달러가 수중에 남는다. 그 역시 2억 달러짜리 집에서 살고, 2억 달러짜리 요트인 라이징 선이 있으며 자가용 비행기와 제트기까지 소유하고 있다. 심각한 것은 그 요트 하나가 1시간 움직이려면 기름이 2천192갤런이나 사용되는데, 제타라는 승용차 한 대를 20년 몰아야 배출되는 산화질소의 양이다.각자 자신의 기준에서 행하는 일이 마음의 위안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가릴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서 산다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그래서 늘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영웅 안중근 의사 성인(聖人)으로 모시기

우리 천주교회에선 인류를 위해 신앙을 위해 모범적 삶을 사신 분들을 특별히 기리면서 우리도 이분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본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이런 분들을 성인품(聖人品)으로 올려드려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이중에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 분의 삶에서 우리는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영원한 세상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경에서나 성전 즉 구비문학 등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공경을 드리고 본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큰 사상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곳에선 많은 분들이 순교 즉 목숨을 바쳐 세상의 등불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최근엔 복자품에 오르신 마더 데레사 수녀입니다. 복자품(福者品)이란 성인품에 올려드리기 전 단계를 칭합니다. 현대는 신 자유주의 같은 경제우월 주의가 팽배하다 보니까 빈부의 차이는 물론 가진자들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세상을 향해 힘차게 외칩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우리 인류가 골고루 배부르게 먹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배려해 주셨지만 우리 인간들의 탐욕이 이를 파괴시켜 세계의 수십억의 인류가 기아와 질병과 인권을 침해 당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외치십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 분을 성인품으로 올려 모든 인류가 서로 함께 잘 살아가도록 이분의 큰 뜻을 외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얼마전부터 우리 교회의 수장이셨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인품으로 올려드리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현대인에게 외쳤던 것은 무신론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유물사관의 허점과 이를 통한 인류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지적하셨고 또한 유태인의 비극을 몸소 겪으시면서 국수주의의 무서운 사상을 지적하셨으며 또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수많은 종교의 역할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원천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인류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하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세계의 모든 종교 집단들이 각자의 문화권 안에서 가치를 부여하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자는 평화주의를 외치셨습니다. 요새 한국 천주교회에선 민족의 영웅이신 안중근 의사(세례명 도마사도)를 성인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사셨습니다. 이분이 거사를 하셨던 사건은 어떤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에게 증오를 느껴서가 아니라 이 사람에 의해서 동양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을 정확히 간파하시고 그의 행보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이 분이 감옥에 있으면서 비록 미완이지만 동양 평화론을 서술하였습니다. 요새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고 하는 미국의 행보는 자못 궁금합니다. 이상하게도 미국이 전쟁을 하고 있을 때는 미국의 경제가 호기를 만나고 전쟁이 없을 때엔 경기가 불황을 겪는 것을 보면 세계의 힘의 균형이 지금은 어떤 지경인지 걱정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미국의 새로운 군부대를 건설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전쟁의 전초진지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미국의 국방 정책을 역사안에서 보면 고개가 끄덕여 지게도 합니다. 중국과의 관계안에서 어떤 힘의 대결을 우리 나라에서 겨뤄보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웅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을 새롭게 거론하면서 어떠한 모양으로든 우리 나라가 이제 전쟁의 현장이 되지 말아야 되겠기에 이 분께서는 신앙인으로서도 완벽한 삶을 사셨기에 이분을 성인(聖人)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나눔은 종교인의 일상적 책무

어느덧 10월도 반이 지났습니다. 황금 들녘은 추수가 시작됐고, 높고 높은 푸른 하늘에는 겨울 철새 때가 무리지어 남쪽을 향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뜨입니다.TV보도를 보니 어떤 곳은 20여일이나 철새가 빨리 찾아왔다고 합니다. 겨울 철새가 빨리 오면 겨울도 그만큼 빨리 온다고 하는데 올 겨울은 빨리 오려는 모양입니다. 겨울이 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고 또 해마다 겪는 것이니 웬만하게 사는 이들은 겨울이 빨리 오든 늦게 오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그런 겨울을 힘겹게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긴 장마로 인해 홍수 피해를 당한 수재민들과 저축은행 사태로 인한 피해자들, 지난 5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 부양의무자 확인조사에 따라 수급비가 삭감되거나 수급자에서 탈락한 사람들, 지난 9월에 서울역에서 강제 퇴거를 당한 노숙인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힘겨운 겨울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또한 유럽의 재정위기에 따른 경제 불안과 공공요금 인상, 장바구니 물가의 상승, 빈부격차의 심화, 10월의 선거부터 총선, 대선으로 이어질 정치권의 사활을 건 대 격돌 등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예로부터 춥고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큰 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춥고 배고픈 설움의 근본적 원인인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납은 종교계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2천500만명이 넘습니다. 사찰과 교회, 성당의 수를 합하면 복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의 수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면 어느 종교이든 나눔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눔을 불경에서는 자비라고 하고 성경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또 불경은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하여 모두에게 부처님의 마음과 자질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고 성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하여 모두에게 하느님의 본성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인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는 듯합니다.부처님과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듯이 우리의 자비와 사랑이 일상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자비와 사랑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나 명절 때, 연말연시 등과 같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얼마 전 우리는 언론보도를 통해 살아계신 부처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지난 9월말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김우수씨입니다. 50대 중반이었던 김우수씨는 홀몸으로 중국집 배달부를 하며 고시원 쪽방에 살았지만 70만원 안팎의 월급에서 매달 5만10만원씩을 내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후원했고 4천000만원의 보험까지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후원단체 명의로 들었다고 합니다. 김우수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소납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뼈저리게 참회하고 또 참회합니다. 모쪼록 올 겨울은 모든 종교인, 종교계의 참회와 회개를 통해 온 누리가 빠짐없이 따뜻해지기를 기원합니다.영담 조계종 총무부장ㆍ불교방송 이사장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이자 새들백 교회를 담임하는 릭 워렌 목사는 20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삶을 뒤흔들어 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 작고 낡은 교회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25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본 것이다. 워렌은 그 교회가 하는 일이 자신의 심장에 꽂혔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목회하는 거대한 교회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하는 그 작은 교회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 후에 워렌은 교인들과 자신의 가슴 뛰는 비전을 나누게 되었다. 현재 새들백 교회 신도의 7천500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개발도상국에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고 있다.어느 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라는 책이 필자의 심장에도 꽂혔다. 릭 워렌의 이야기도 그 책에서 소개된 내용이다.아주 쉬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누군가 출근길에 혹은 바쁜 일로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 깊지 않는 물이지만, 어린 아이는 곧 꺼내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주위에는 이 아이를 꺼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당신이 그 아이를 구한다면 약속 시간에 늦을 수도 있고, 당신의 옷과 신발은 다 젖을 것이다. 당신은 그 아이를 보았을 때 물에 뛰어들겠는가?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아이를 구해야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위해 당신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손해(약속도 깨지고 당신의 옷과 신발도 엉망이 되는)를 감수해야 한다.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1달러 25센트를 가지고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절대적 빈곤층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숨 쉬는 세상에 14억 명 이상이 있다. 바로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어린이, 그리고 이제 지구상에서 살아졌다고 생각하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이 있다.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 아이들이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죽어간다. 결국, 그 죽음은 질병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이다.이 땅에는 절대적 빈곤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그의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라고.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것. 옷을 사 놓고 입지도 않는 것,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취미 생활, 우리가 먹으려고 샀지만, 뜯지도 않은 채 버려지는 음식. 그것만 가지고도 이 땅의 모든 아이를 살릴 수 있다. 물에 빠진 아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허우적거리고 있다. 단지 우리의 옷이 젖고 신발이 젖는 것쯤을 감수한다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tzedakah)이라는 말이 무려 3천 번 이상 언급된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권리만을 누리고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은 불의다.누가 우리의 형제인가? 우리의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도 동일하게 보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심판받을 자로 보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자식으로 보인 것이다.아마도 우리에게 보이는 형제와 자매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형제를 위해 움츠렸던 손을 펴야 한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작은 헌신이 누구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9월은 순교자 성월

한국 천주교회에선 9월을 순교자 성월(聖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한국의 순교자들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 행적을 기리는 달입니다. 이 성월은 한국의 순교 선열들을 현양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그들의 정신과 삶을 본받아 시대가 요구하는 순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한국천주교회는 18세기부터 중국으로부터 전해온 천주교의 서적과 교회정신에 대한 연구가 양반층에서 조심스럽게 연구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조정에선 당파 싸움으로 끊임없는 암투와 피의 보복이 자행되었고 권력을 이어가기 위한 족벌 정치가 무섭게 뻗치게 되면서 산골 오지에 까지 권세가 등등하게 퍼지다 보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여러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양식있는 많은 지식층인 선비들이 특히 성호 이익이 주창하고 있는 실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벽,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등도 이분의 제자들로서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천주교를 학문으로 접하게 됩니다. 후에 이분들이 천주학을 신앙으로 받아드리고 천주교의 실천가로 승화하게 됩니다. 당시 서양에선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는 학풍이 돌기 시작하면서 마침 서양 특히 독일에서 온 중국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과학 등의 실증적 학문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리도 갖고 오게 됩니다. 천주교 창립의 주역 중에 한분이셨던 다산 정약용이 주축이 되어 수원 화성을 설계, 축조할 때에도 노동력의 보다 효과적인 방법, 즉 성과제나 할당제나 임금직불은 물론 거중기같은 건축 장비 등을 개발하여 사용함으로써 건축기간을 단축하였을뿐만 아니라 견고하면서도 아름답고 실용적인 성이 축조되었습니다.여기엔 좀 색다른 건축 양식이 있는데 방화수류정의 서쪽 벽에는 십자가가 잔뜩 박혀 있어 해질 무렵엔 그 현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당시에 정약용은 온 집안들이 천주교에 심취되어 있었던 때라서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을 벽에 문양으로 은밀이 표현하고자 한 뜻은 아니었는가 묵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서학 즉 천주학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이런 사상을 받아드린다면 틀림없이 멋진 나라가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상 즉 사랑과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 그리고 용서의 마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엔 이런 사랑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양반과 천민등 계급사회가 사회의 틀이었고 복수는 끊임없이 이어졌었기에 바로 이 때에 예수님의 사상을 받아드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많은 선비들이 천진암 등에서 강학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새로운 조선을 계획했습니다. 후에 이들은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이 됩니다. 물론 신앙으로 승화되어 내세라는 확신을 깨우치게 되면서 신앙의 틀이 형성되고 드디어 우리나라에 명실공히 천주교회가 시작됩니다. 당신 조정에선 이런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엉뚱한 착각을 하게 되고 특히 정조대왕 이후로 무선운 박해가 여러차례 일어나게 됩니다. 조정의 당파싸움에서는 그 화풀이를 모두 천주교 신자들에게 덮어씌우는 자행을 하게 됩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100여년간 모질고 무서운 박해를 겪으면서 그동안 약 1만 여명이 훨씬 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수원화성에선 더 혹독한 박해가 일어나면서 약 1천 여명 이상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분들 중에 순교하신 자료가 충분한 103분을 교황께서 지난 1984년 우리나라에 오셔서 전 세계가 공경을 드릴 수 있도록 성인(聖人)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지금도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사회곳곳에서 때론 힘차게 그리고 꾸준히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순교자분들을 우리 교회에선 어떤 분들보다 더욱 소중하게 모시고 있으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크신 사상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나라나 집단은 그 만큼 살기좋은 행복한 곳이 됩니다. 이렇게 매해 9월은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수원순교성지를 비롯하여 방방곡곡 100여곳이 넘는 순교성지를 찾아 그 뜻을 기리고 순교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대리구장

우리 시대 종교인의 책무

올 초에 우리 조계종에서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해서 총무원 전 직원이 함께 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삶을 다룬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었습니다.영화는 우리에게 사랑과 헌신, 함께하는 행복은 물론이고 지금도 아파하는 지구촌의 우리와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 그 모두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스러웠습니다.소납은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이야말로 숭고한 인간의 가치와 의지를 우리에게 온몸으로 가르쳐준 우리 시대의 귀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이처럼 종교인은 오탁의 시대에 소금이 되고 혼란과 고통의 세계에 등불이 될 때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종교가 소금과 등불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구촌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갈등과 다툼의 빌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퓨포럼(the Pew Forum)이라는 미국의 종교문제 연구단체에서 발표한 리서치 결과를 보면 전 세계 인구의 1/3인 22억명이 종교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고 전 세계 198개국 중 72%인 142개국에서 종교적 편견과 혐오로 인한 범죄와 폭력사태 등이 발생해 종교간 갈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후쿠오카 마사유키라는 사람은 자신의 저작 21세기 세계의 종교분쟁의 서문에서 다양한 종교와 인종간의 분쟁보다 과거의 동서독이나 현재의 남북한의 경우처럼 동일한 민족의 이념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훨씬 희망적이라고 말했겠습니까?우리 사회의 경우도 종교편향과 종교갈등의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민족전통문화가 일부 외골수 정치인과 종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무참히 훼손당하고 있고 가정사에서는 여전히 종교갈등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신문 사회면에 종교차이와 제사문제로 인한 이혼기사가 등장하는데 가족 내의 종교갈등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예라 하겠습니다. 사랑과 화목, 마음의 평강을 주어야할 종교가 가정 파괴의 빌미가 된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문 다원화된 종교가 있는 국가입니다. 더구나 근래에는 다문화가정과 외국인 노동자가 늘면서 소수종교인의 숫자도 제법 그 수가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종교 현실을 보면서 최근 양식이 있는 많은 분들은 종교간 소통과 화평을 주문하고 이젠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그렇다면 우리 종교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소납은 그 답을 결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과 함께 믿음을 같이 하는 분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항상 낮은 데로 임하시고 한마리 길 잃은 어린 양까지 구하신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답이 아닐까요?그리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부처님 가르침과 지옥이 텅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은 소납과 같은 길을 가는 분들의 답이 될 것입니다. 영담 조계종 총무부장ㆍ불교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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