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생사의 길에 지금 내가 살아있다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질긴 이승의 삶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스스로 감겨드는 무저항의 저 노을빛 그 빛 속으로 깊어지는 머 언 우주공간 화해의 빛살 한 올 오늘 다시 쓰는 일기 새벽의 향기 품어 어둔 하늘 별무리로 흐른다. 김경숙 ‘한국시학’으로 등단. ‘시인마을’ 동인
속살 드러난 솔길을 바람이 지나간다 가진 잎 지고 난 뒤 비로소 바람이 산을 내려간다 새도 날지 않는다 앙칼진 독백으로 산이 외롭다 뒤돌아보니 숲이 온통 속살 드러내고야 산이 겸손하게 겨울을 맞는다 최복순 화성 출생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시 쓰고 노래하던 시 창작 수료식이 인터넷에 올랐네, 기왕이면 내 얼굴도 사진 한 장 올릴 걸 연륜 지나 늦깎이로 총총이 글을 실어 논다랭이 모 심듯이 내 얼굴 주름살이 행이 되고 연이 된다 세월 먹고 늘어나는 내 삶 속에서 시어들이 고목에도 글 꽃 피운다. 이병희 시집 ‘병원’, 수필집 ‘무중생유’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 마주 보고 있어야 노란 열매 달린다 소나무 한 그루 목수를 만나면 목재가 되듯 인생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열매의 색깔이 달라진다 열매가 맺힐 때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순리를 배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 무엇을 흘리고 가는지 조금씩 흘리는 느낌 당신과 나는 너무 긴 터널을 지나 걸어오다 기어 오고 있다 인생살이 열매가 맺히는 가을날에 흐린 날과 맑은 날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 조각 구름이 된다. 장경옥 시집 ‘파꽃’, 제2회 ‘시인마을 문학상’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독대 위로 감꽃비가 우수수 쏟아진다 제 살갗을 여러 겹 드러내고 있는 감나무 그런 감나무를 꼭 닮은 할머니가 감꽃비를 털어내며 생각을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우리 아그들 주려믄 달큰히야 헐틴디 까치밥 몇 알을 남겨두고 할머니는 소쿠리 한가득 감을 담아 머리에 이고 구부정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겨우 앉는다 할머니만큼이나 닳아버린 무딘 칼로 감 껍질을 한 시름 벗겨내면 할머니의 손톱엔 온통 노을이 진다. 꼭지 끝에 명주실을 달아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처마 밑에 대롱대롱 감을 널어놓는 할머니는 기억이 들쑥날쑥 할 때마다 곶감에 자신의 지문을 여러 겹 덧입힌다 바람이 성긴 가지 끝을 맴돈다 제때 따지 못한 감들이 장독대 위로 툭, 툭 제 몸을 떨군다 강세희 1985년 충북 옥천군 출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2022 제11회 정조대왕숭모 전국백일장 일반부 장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센치함으로 깊어가는 가을 불타는 가을산 단풍 여행 떠나고 싶은 충동 지그시 누르면 스산한 바람 옷깃 여미게 하는 11월 분주하기만 하다 여름에 심어놓은 배추 150포기 소금에 절여 씻고 고춧가루 물들인 무생채 갖은 양념 정성껏 버무리다 잡념도 꺼내 빨갛게 물들인다 이웃사촌들 평상에 둘러앉아 싱거울까 짤까 맛 보며 빠른 손놀림으로 일년 양식 준비 하는 날 모락모락 김 나는 수육 한 점 속배추에 싸서 한 입 넣어주는 정겨움 펄펄 끓어오르는 구수하고 진한 국 냄새 온 집안 가득하다 아직도 시골인심은 살아 숨쉬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김치도 맛깔나게 천천히 숙성되어 간다 인생의 가을 시계 앞에 서성이면서 그렇게 익어가고 싶다 이성란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새파랗고 떫은 시절도 있었다 병아리 깃털처럼 노랗던 햇살에 기댄 봄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여름날의 열기 홍시는 말랑하고 잎은 고운결로 물들었다 모두 비어내어 긴 동면을 준비하는 등 굽은 감나무 곱게 물 들였던 이파리들 미련없이 흙으로 돌려 보낸다 감잎 하나 주워 가을하늘에 비춰본다 그동안 나는 어떤 빛깔의 이파리를 직조했을까 헛된 욕망으로 짠 수북한 회색 이파리들 초가지붕 위에 열린 하얀 박처럼 소박한 빗자루로 모두 비워내고 감잎 닮은 고운 내 가을의 잎을 차곡차곡 쌓으며 하뭇뭇한 하얀 겨울을 기다린다 황영이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 보이지 않아도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존재를 강약으로 전하기 위해 초목을 통하여 그 흔들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한다. 긴 그리움을 무한의 허공으로 담아 ‘보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방(四方)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도 보고 싶지만 내 존재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속삭임만을 들으며 마음을 태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이 무겁고 힘들 때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고 내 삶이 희망과 환희로 넘칠 때면 춤을 함께 추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가는 너를 오늘도 느끼고 싶다. 배수자 시인, 문학박사.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등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가만히 만져 봅니다 손등으로 내려 앉는 가을 햇살을 낮달이 숨어보던 골 깊은 가르맛길 별 등을 하나 둘 매달던 그곳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채색되어 가는 들국의 눈빛으로 들꽃 한 아름 꺾어주던 애틋한 체온 짓궂게 놀려대던 그 머슴아이 바람결에 다가와 귀엣말 주고 갑니다 가슴속 뛰놀던 고향 길 냇가 희끗 히끗 정수리에 서리꽃 피어나고 까르르 웃음소리 들리는 듯 저만치 가다 뒤 돌아보면 잠시 앉아 쉬어가라고 송이 송이 들국되어 꽃등을 밝혀 줍니다. 조병하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소한 아침에 눈 시리게 맑더니 국화 한 송이 세상 속에 그림같이 피었다 천년 회상의 향기인 양 기다린 인내의 세월 속에서도 그 자태 찬연하다 그리움 하나 향기 속 노래 위에 날개를 달며 순백의 사랑은 샛바람을 타고 무리 지어 날고 돌인 듯 침묵한 꽃송이 한가운데 눈감고 짚어보는 지난 세월이 갈래 없다 가랑잎 구르는 인생의 갈급한 시간에 곱게 모은 결곡한 자태는 불현듯 가슴 치는 은혜의 빛 한줄기에 국화 향기 속에서 소망의 하루를 연다 민병일 수원 출생. ‘한국시학’으로 등단. 저서 ‘예술에 혼을 담다’, ‘민병일컬렉션’ 부산광역시문화상·봉생문화상·해운대문학상 수상. 부산시인협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좀벌레 퇴색한 가을빛을 띤 오래된 책갈피 사이로 숨 멎은 고요가 흐른다 묵은 햇살과 습기가 켜켜이 고여 들어 빛나던 시절은 누렇게 변해버리고 누군가의 손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짧은 시선조차 붙들 수 없는 닫힌 공간 속에서 아직도 푸른 나뭇잎 젖은 향기 붙들고 첫 인연의 만남을 수줍게 간직한 정지된 시간들 잊혀지던 슬픔은 낯선 손길을 기다리며 오래 묵은 인내의 참았던 숨길 열어 새로운 날갯짓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고은숙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사무차장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눈치 빤한 첫째 친정에 맡기고 아이는 둘인 척 문간방 이사하던 날 찬바람 잦아 들었다 석 달 뒤 첫째 등 뒤로 숨겨 슬그머니 들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으나 집 주인 알면서 모른 척 눈 감아준 걸 그 해가 다 가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오른 집은 아예 현관 손잡이 안으로 바꾸어 달고 고공 놀이에 취해 비틀거린다 코인 시장에 뛰어들어 미친 듯 광맥을 파 뒤집어 봐도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고 출구는 빙판이다 공연한 심사로 걷어찬 개미집 식솔들 쏟아져 나와 떼로 덤빈다 개미는 집도 잘 짓고 새끼도 많이 낳아 잘도 기르는데 개미보다 더 휘어져가는 허리 대출 통장만 새끼를 키운다 등뒤로 아이 하나 감추고 싶다 최스텔라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폐사지 너머 동백 숲 그대 버리고 온 꽃 지던 숲에서 나는 아직 살고 있는 것 같아 봄꽃이 피었다는데 오래전 어느 하룻밤 불타 사라져 주춧돌의 자취도 희미해진 이름을 잊은 절터에서 때 늦은 눈보라를 혼자 다 맞던 사월 동백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소리가 하늘을 출렁일 때 눈 내리는 숲에서 울었지 동백꽃의 절명이 아파서 우는 거라고 꽃 지는 걸 못 견디겠노라고 오래 울었지 붉은 울음의 힘이 불탄 기둥 불러와 세우고 바람벽 둘러 만든 바람 사원의 기도 풀잎이나 물방울처럼 작아져 어디에 뿌리내려도 어디로 흘러가도 좋아 화엄의 구슬이 서로를 비추는 세상 어디쯤의 무엇이어도 좋아 산맥이 돌아눕는 겨울 폭설 속에 동백꽃이 피어나는 것은 바람 사원 한 채 우뚝 서기 때문이지 백향옥 강원 양구 출생 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푹푹 찌는 팔월에 비가 삼 일 밤낮으로 퍼붓다가 먹구름이 갈라져 햇빛 내리면 매미 울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이끌려온 새들이 보이고 눅눅한 빨래를 햇볕에 널어두는 손들이 거룩하고 텃밭에서 상추와 쑥갓과 풋고추 따 밥상 풍성하고 당신은 바뀌는 괜찮은 징조의 풍경들을 묘사하고 묘사된 시를 읽으며 이 보물 같은 서정을 저장하고 시의 내용 이해했어도 간직하지 않으면 가치 없고 그것은 이 영원의 빛을 잘못 이해된 흔적일 뿐이고 그때 햇빛 속에서 새들과 매미가 내게 노래해주자 마치 물속으로 무거운 불행이 가라앉듯이 사라진다. 김영진 2017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붉은 수염의 침대에서 자다’. 아라작품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보고싶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끄응 끙 앓으며 살아온 지난날 지나는 가을바람이 상사화라 했다던가 뎅그랑 뎅그랑 그윽한 풍경소리 행여나 그 님일까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빨간 그리움으로 타오르는 연정이여 김수기 ‘문예비전’ 등단 시집 ‘어머니의 세월’. 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교육이사 역임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침을 깨워 드럼 치는 자 누구인가 귓전을 울리는 신기한 산 메아리 저 앞산 나무숲에서 열심히 연주한다 조용한 산속에서 신나게 뚜 뜨르르 공짜로 듣고 있는 나만의 음악 감상 자연을 노래하는 소리 연주자 딱따구리 조그만 숲속에는 새들의 야외무대 벅차게 숨차 오른 연둣빛 삶이 있어 청정한 자연의 풍경 공존함이 경이롭다 김순덕 『순수문학』, 『월간문학』 등단. 시집 『너는 해바라기 나는 바람』 외 2권. 홍재문학상 외 다수 수상.
오어사를 휘감고 있는 오어지 대장경이 켜켜이 꽂혀 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아오를 듯 꿈틀거리는 검푸른 서기 지난날이 떠오르며 온몸이 오그라든다 두 손을 마주한다 경전들이 펼쳐지고 법문이 들린다 무애가를 부르는 원효가 보이고 삼태기를 쓰고 춤추는 혜공이 보인다 깊은 골짜기에 운무를 두르고 신화를 쓰는 운제산도 어른거린다 어느 날 사라졌다는 원효의 긴 칼이 물속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물을 베고 있는지 법문 소리 낭랑하게 들린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오어지를 휘돈다 범종 소리가 가슴을 탁 친다 조영실 <한국시학>으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문인협회 회원 중봉조헌문학상 수상
떨어지는 맛을 봐야 세상을 안다 바닥까지 치고 올라오는 공포에 맞서야 쫄깃한 세상을 본다 감당할만한 고통의 끝이 어딘지 온전히 나를 내어 맡기는 체념의 자리에 가봐야 세상을 안다 어긋나 아팠던 날들이 제자리를 헛돌아도 무게는 이미 허공의 것 중심 잡을 때를 기다려 볼 일 맞장 뜨는 마음가짐으로 내 몸 아닌 듯 멈춰질 때까지 던져보면 알 수 있을 삶의 무게 다시 사는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내가 허공을 뒹굴다 멈춰진 중심 이승용 강원도 영월 출생.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춤추는 색연필’, ‘꽃이 피다’ 등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몇 시인가. 낙엽 쌓인 거리는 햇살 걷히고 시계 바늘은 마냥 헛돈다.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그 누가 어지럽게 돌려대는지 한 가닥 줄도 잡지 못했다. 팽팽하게 태엽을 감고 구두끈 질끈 묶고 종소리 기다려도 언제나 한걸음 늦어버린 시작 등 뒤에 박수 소리만 듣는다. 사방으로 뻗은 갈래 길에 앞서가는 걸음들 따라 숨 가쁘게 뛰다가 쉴 곳을 찿는다. 이제 몇 바퀴나 남았는지 머리끈 동여매도 눈앞은 뿌옇기만하다. 그대 시간은 몇 시인가. 헛 도는 내 시계 바늘은 오늘도 시간은 맞질 않는다. 한희숙 1985년 전국주부백일장 대상, <문파문학>, <경기수필> 등단. 경기여류문학회·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문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과 사물을 잠들게 하며 조용히 흐르는 물 어렵고 힘든 것이 인생사라는 것을 느낌조차 모른다 산전수전 겪는 것이 시간 속의 운명인 것을 그대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겸손함 내 목마름에 바가지가 된다 장경옥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제2회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파꽃>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