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건 목을 빼는 일이다 햇살이 산 등 살에 눌려 수축하는 저녁 발걸음 소리가 나면 담 너머로 귀가 쫑긋해지는 것이다 어둑한 골목, 지상의 별자리 하루를 버겁게 문대고 귀가하는 가장은 거북목으로 정년을 넘겨야 하고 이력서 한 칸을 채우기 위해 곱사등을 한 청년은 밤의 칠 부 능선을 힘겹게 넘는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별로 살면서 고개를 숙이는 이유라면 어둠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돌부리에 걸려 쓰러지지 않기 위함이다 정유광 1955년 광주 출생. 2016 국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2018년 시조 시학 등단 전국 시조백일장 대상 자랑스러운 수원 문학인상 수상. 시조집 가슴에 품은 꽃 시집 가슴에 품은 진주 현 수원 문인협회 부회장.
[시(詩)가 있는 아침] 봄 비 겨우내 참았던 눈물을 드디어 쏟아낸다. 회색빛 세상 속 나 혼자 외로웠다고 그 힘든 계절을 버텨줘 고맙다고 거친 땅 헤집고 올라와 환한 미소 전하는 여리고 순진한 생명들에게 뚝뚝뚝 마음을 전한다. 이제는 내 눈물 받아 줄 친구들 생겼다며 말갛고 고운 얼굴들 위로 마음껏 눈물을 흘린다. 조윤수 제 34회 경기여성기예 경진대회 백일장 시부문 최우수작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두 모퉁이 돌고 돌아 모아진 뜨거운 물 에움길 돌아 구릉길 너머로 제멋대로 하염없는 지평선을 향해 흐른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의 어긋난 마음 물의 숨통을 연다 흔들리며 끓어오르던 붉은 용암처럼 잠시 얽은 자국 보이고 다시 마음의 늪으로 돌아가 생명의 물줄기 모은다 장선희 문파문학으로 등단. 제15회 동남문학상 수상. 문파문인협회, 동남문학회, 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봄을 입고 생기 움트는 겨울나무처럼 우리, 변신하러 가자. 꽁꽁 여민 가슴 봄비로 풀어 헤치고 시냇물 되어 강물 되어 바다로 가자. 천년 바위로 야위어 버린 고독한 망부석아 눈부신 봄빛 머금고 녹아 흘러보자. 이 봄이 가면 여름 갈 지나 또 앙상한 겨울이 오고 말테니 우리, 한번쯤은 봄의 향연에 주저 없이 변신하러 가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폭죽 터지 듯 피어나는 꽃 잔치 한껏 부풀은 여인들 구례 벚꽃 길에 나섰다. 섬진강 물길 따라 흘러가는 십리 벚꽃 뭉게뭉게 꽃구름 피고 개나리 진달래 일렁이는 고운 빛에 꽃물이 든다. 깃털 털 듯 하르르 흩날리는 꽃비, 함께한 여인들의 볼에서 꽃잎 같은 탄성이 튀밥 튀듯 폭발한다. 깍지 낀 손마다 연분홍 그리움 지긋이 고이고 꽃잎 같은 사랑 겹겹이 파고드는 가슴 안고 아쉬움 디디며 돌아오는 길에 섬진강 꽃바람이 따라 나선다. 양길순 한국문인으로 등단. 경기여류문학회.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은빛 물결이 살아 온 흔적만큼 살랑거린다 맛집 나루터매점에서 카푸치노 마시며 존바에즈의 더리버인더파인을 듣는다 마법에서 풀린 듯 되살아나는 지난 시간들 색 바랜 원천유원지 안내판이 흐릿하게 보이고 사라졌던 추억들이 호숫가를 맴돌고 있다 수천광년을 달려와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 범바위집과 가오리와 방패연, 언덕위 카페촌, 오리배 아직도 저수지속에서 단꿈을 꾸고 있다 푸른 웃음으로 가득한 호수 그리움 잔뜩 배인 저녁노을이 매점 앞 나루터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정겸(본명 정승렬) 화성 출생. 경희대대학원 사회복지학 전공.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공무원문예대전 시부문,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칼럼니스트로 활동
대낮보다 더 환히 흔들리는 벚꽃에 안자가 가려져 보이다 말다 한다 이 지독한 안개를 고무 지우개로 지우고 싶다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자동차 매캐한 매연이 상상력의 질감을 울퉁불퉁하게 치대놓을 때 여기저기 개들끼리 컹컹대는 개다발지역 개잦은지역 안개 속에서 빼꼼히 벚꽃 구경하는 수많은 개지역들 밤에도 빛나는 저 푸르른 야생의 눈빛들 얼핏얼핏 드러나는 붉은 잇몸 사이 번쩍이는 날카로운 덧니들 그 덧니들에 찍히고 찢어질 삶과 죽음 사이 너는 4기통 나는 6기통의 본능을 갖고서 낮고 느리게 짖어대는 끝날 줄 모르는 욕설들 점점 지축이 흔들린다 들개 한 마리 로켓포 추진기 발사체가 된 엉덩이 뒤로 바짝 뒤쫓던 들개끼리 엎치락뒤치락 지우려고 용쓰다 지우지 못해 더 지저분해진 사고 다발지대의 백내장 걸린 감시카메라 속에 사자의 서가 누워있다 개다발지역 너머 졸음휴게소 너머 십자가를 짊어진 견인차 줄줄이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김은옥 2015년 시와문화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 우리시, 현대시학회, 청미래 회원.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면 살아 계실 때가 생각난다. 조용한 성품에 말씀이 없으시고 오랜 세월 지병을 앓으셨고 친구도 별로 없으셔서 스님처럼 하루해를 지내셨다. 그 외로움 얼마나 깊으셨을까, 바다 속만큼 깊으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셨다 인생은 풀잎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정 꽃이라고 햇살이 퍼지면 사라지는 물방울이라고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풀잎의 이슬이 떠오른다. 장경옥 국보문학으로 등단.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청매 톡톡 터지는 신新새벽 꽃샘 찬바람 속으로 언약의 가락지를 끼고 봄나들이를 하네. 달은 기울어 청아한 여명의 눈을 부비며 청매꽃잎처럼 수줍은 옷깃을 여미고 잊지 못하여 가슴 아리는 서러운 봄맞이 언약의 가락지를 끼고 청매맞이 나들이를 하네. 경남 하동 출생. 부산시인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34대 부이사장, 동명대학교총장,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대문학100주년기념문학상, 한국시학상 수상. 시집 시는 꽃인가 조선 징소리 사랑 등 다수. 현재 한국경기시인협회 부이사장.
해 뜨는 동방의 너른 벌판 아사달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 금수강산 산길 들길엔 봄꽃이 만발했다 총칼로 무장한 왜구들의 난장질에 아낙네도 노인네도 삼삼오오 손을 잡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백년의 함성이여 내 나라를 찾는 일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목숨 던져 불러보던 대한독립 목메인 만세 소리가 이 강산을 지켜냈다 인간존엄 되찾으려 활활 태운 나라사랑 맨몸으로 저항하던 불굴의 그 의지가 누군가의 넋으로 다시 피는 이 봄날 동방의 불꽃으로 한 목숨을 사르시고 이 겨레 지켜내신 이름 없는 영웅들이여 편하게 잠드소서, 한반도의 봄 언덕에 임애월 제주도 출생. 시집 지상낙원 등 4권. 경기시인상, 경기PEN문학 대상, 한국시원시문학상 등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이사. 계간 『한국시학』 편집주간.
벙어리 낡은 몸피 수년 그리 살아왔나 저체온증 배 맞대고 온기 나눠 여는 길목 철조망 농섬이 웃고 상처로 핀 쑥부쟁이 깊은 밤 잠 못 들어 환히 피던 조명탄 빛 훌쩍 지난 긴긴 세월 벽화로 남아있다 썰물이 싹 쓸어가도 속도 깊은 저 갯벌 해안가 철조망 따라 들며날며 오가던 새 감자밭 흰 꽃 필 즈음 창문 걸어 닫았다 고온리 마을 입구에 널브러진 덧난 상처 촛농은 탑 쌓으며 살풀이로 녹이는 한(恨) 밤새껏 그적거리며 이적(移積)을 꿈꿔본다 멀리서 새벽을 몰고 들어서는 아쟁소리 송유나 월간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울사회복지대학원 교수. 매향리 :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미군 사격장. 이제 사격장은 문을 닫고 탄피만 수북이 쌓여 있다.
달빛 한줌 당겨놓고 펼쳐진 책 위를 걷는다 빈 행간을 채울 수 있는 삶을 깨어진 무릎이 시려오는 저녁 삶이 이만큼 아팠을까 허공으로 남아있는 빈집 안간힘 더듬이로 짚어가며 접어둔 나를 꺼내어 시를 꿰맨다. 조병하 충남 청양 출생. 월간 국보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 월간 국보문학 회원. ㈔한국여성소비자연합 수원시 부지부장, ㈔한국국보문인협회 정회원
내 안에 너를 맞기에는 아직 이른데 얼음장 밑에서도 달려 왔나보다 창문을 열면 커다란 날갯짓 백목련은 품안으로 연거푸 날아들고 눈 돌리면 미소 머금은 살구꽃 꽃망울이 초롱초롱하다 쓰나미처럼 밀려와 덥치는 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서 문소리 잦아들자 계단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저마다 앓는 봄
화톳불 놓았던 자리에 올 봄 앉은뱅이꽃 여러 포기 피었다 몸을 낮추어야 보이는 꽃 무릎을 접고 비상하기 전 낮은 자세로 돋움 하는 접힌 날개를 본다 꽃싸움에 걸었던 목을 빼고 낯설고 견고한 수행을 치른 빛 아직 서리 남은 봄 들길에 발을 붙잡는다 뜨거웠던 자리에서 따뜻한 꽃이 피었다 어느 절의 공터에서 본 그 자리 같은 그곳에 파르르 다비식 불꽃 다시 일어나고 몇 알의 보라색 사리들 불립문자로 읽히는 결정체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는 사리꽃, 재로 남은 흔적 딛고 검불 속 수행이 고운 합장을 하고 있다 정연희 전남 보성 출생. 전북일보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4회 생명문학상 장원. 신석초, 김삿갓 전국 시낭송대회 금상 수상. 용인문학 회원
아직 남은 어둠이 입안에 자란 이끼 같은 말을 물고 하늘꽃 붉디붉은 노을 제 모습으로 눈이 부시다 물든다는 것은 하루가 저무는 어느 한순간 멈춘 듯 시간은 흐르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뜨거운 목숨이다 살아가는 내내 흐름 속에 삶은 의미가 되고 물든다는 것은 꽃집 앞을 지나며 물속 가득 담겨 있는 장미 뿌리가 된 줄기를 기억하는 것 우리 꽃으로 저문 날 내가 네가 되어서 또 누군가 노을을 바라보며 한 문장으로 밑줄을 긋는다 유회숙 충북 충주 출생. 1999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흔들리는 오후 꽃의 지문을 쓴다 나비1 나비3 외. 서간문집 편지선생님.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편지가족고문. 손편지 강사, 인지개발교육지도사.
온몸의 실타래 한 올 한 올 다 풀려나가 심지 하나만 달랑 울 엄마 가슴에는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아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아들 목소리를 들어야 밥숟가락을 뜨시는 자식 품에 녹아들고 싶은 노을 진 석양녘에 저무는 꽃 한 송이. 조국형 수원 출생. 시사문단으로 등단. 전 서원대학교, 오산대학교 겸임 교수. Y. E. S. 관세사무소 대표관세사. 시집 살포시 그대 품에 안기고 싶다
재똥밭 바위틈 연초록 입은 돌나물 모여 향기 뽐내면 소쿠리에 담긴 돌나물 울 엄마 새콤달콤 무치셨다 텃밭 산자락 싱그런 돌나물 이젠 내가 식탁에 올려야지 울 아들 봄이 오는 소리 들을거야 봄 이야기 가득할거야. 전남 담양 출생.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문예비전으로 등단. 경기대 다문화교육센터 다문화감수성 전문 강사. 해랑 어린이집 원장.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이 곳곳에 박혀 빛나는 시간 멀리 이는 파도와 새겨진 발자국을 보며 걷는다 너는 사랑하는 사이는 예절이 필요하다는 듯 영리하게 적당한 예의와 간격을 유지하며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흑백의 사진은 과거를 부른다 파도에 씻긴 상처 포말 같은 인연들 악다구니치고 젊다는 무기로 만용을 부리던 미숙의 시간들 과거를 끼고 오늘을 걸으니 앞설 필요도 뒤쳐져 불안할 이유도 없다 떠오르는 태양에 인사하고 묵묵히 걸을 뿐 그리고 사랑하기에 너와 함께 걷는다. 전혜진 성남 출생.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너랑 같이 갔던 길은 혼자 가는 길이 낯설다 문득 네가 갔던 종점에서 겨울밤을 맞는다 그래서 춥다 그때도 추웠지만 너와 같이여서 체온을 유지하고 곧 종점에 다다르기 전 번복할 것이라는 슬픈 기대를 억누르고 종점에서 막차를 태워 보내는 것으로 이별을 약속했다 막차를 탄 지도 확인치 못해 두려웠던 밤 온통 그 밤도 다음 다음 밤도 기억은 회색의 그림자로만 정박했고 거짓말 같이 낮과 밤이 갔다 일 년이 온통 추운 겨울이면 좋겠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머물고 싶다. 최복순 서울문학으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벌목장, 땅은 쓰러지는 나무를 큰 울림으로 끌어안았다 철길 위 기차는 목청껏 땅을 울리며 지나갔다 어둠속 저 멀리서 수천 만 마리의 말발굽소리가 달려왔다 그 예감은 마치 어둠 속에서 덮칠 듯 노려보는 맹수의 울음이었다 그때 몸은 공명통이 되어 땅의 울음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꼬리가 불안하다 판의 경계가 멀어 안전지대라 배운 지식을 삭제시킨다 불의 고리가 뒤척일 때 진앙지에서 달려온 땅울림이 육지로 번지고 아파트가 피사의 탑처럼 기운다 땅이 운다 그들의 부호를 알 수가 없다 임향자 충남 보령 출생. 2016년 창작21 시부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