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그네스… 여성이기 때문에

국내 첫 저작권 계약… 원작 충실 박정자·손숙 15년만의 재회 ‘눈길’ 무릇 역사는 남성 중심으로 흘러 왔다. 물론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때는 모계사회도 잠깐 이어졌지만, 장구한 인류사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도 사정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들…. 이같은 여성들의 수난사를 가장 경제적으로 압축한 작품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이같은 물음에 수녀가 임신했다는 팩트로 시작되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국내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아직까지도 유효한 여성문제들이 총망라된 백과사전이기 때문이다. 지난 92년 당시 연극계 최고의 스타 박정자와 손숙이 호흡을 맞췄었다. 이들이 15년만에 다시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서 재회한다. 도내 순회공연을 통해 전혀 녹슬지 않은 연기실력을 발휘하는 열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성가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젊은 수녀가 몰래 낳은 아기를 탯줄로 목졸라 살해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신에 대한 믿음과 기적의 의미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미국의 인기 희곡작가 존 필미어의 작품. 아그네스 수녀, 리빙스턴 박사, 미리암 원장 수녀의 관계와 논쟁, 갈등 등을 시적인 대사를 통해 섬세하게 엮어 오늘을 사는 현대 여성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해 주고 있다. 지난 82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여성들의 에쿠우스’로 불리며 영화로도 제작돼 여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 대결로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선 지난 83년 초연 이후 윤석화·차유경·신애라·김혜수 등 수많은 배우들이 열연, 매 공연마다 매진사례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 연극으로 자리를 매김했으며 현재까지도 고정 레퍼토리로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선 지난 92년 함께 호흡을 맞춘 박정자와 손숙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 아그네스의 순수성을 지켜주려는 미리암 원장 수녀와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으로 다시 한번 의기투합, 한 무대에서 40여년동안 쌓아온 실력을 모두 쏟아붓는다. 특히 지난 83년 국내 초연 이후 25년 되는 올해 원작자 존 필미어와 정식으로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 원작에 충실한 연극을 위해 원문을 최대한 보존하는 번역작업을 통해 새로운 대본을 완성했으며 등장인물간의 내면적 갈등과 대립으로 전개되는 원본 그대로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연극 ‘냉정과 열정 사이’, KBS TV ‘불멸의 이순신’ 등에서 분위기 있는 기생 청향 역으로 연기력과 스타 가능성을 선보인 TV탤런트 전예서가 공개 오디션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그네스 역으로 발탁돼 전임 아그네스인 윤석화·차유경·신애라·김혜수에 이어 어떤 이미지의 아그네스를 보여줄 지 기대된다. 2007 신의 아그네스는 원작에 보다 충실하게 접근해 아그네스 수녀가 미리암 원장 수녀와 닥터 리빙스턴에게 끼치는 영향, 리빙스턴 박사와 원장 수녀의 갈등, 대사의 시성에 초점을 맞춰 대사가 갖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데 연출을 초점을 맞췄다. 문의(02)3272-2334 다음은 순회공연 일정. ▲3월2일~4일 성남아트센터 ▲6월8일~9일 노원문화예술회관 ▲6월15일~16일 안산문화예술회관 ▲6월22일~24일 고양 덕양어울림누리 ▲6월29일~30일 의정부예술의전당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오페라의 변신은 '무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은 지난해 이번 시즌 개막작을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의 빌딩 전광판을 통해 생중계했다. 오페라 관객이 갈수록 줄어들자 메트 극장이 들고나온 색다른 시도였다. 오페라 관계자들의 저변 확대 노력과 맞물려 목소리는 물론 외모와 연기 3박자를 고루 갖춰 대중성을 확보한 러시아 출신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35)는 최근 연일 상한가를 치고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반대중을 오페라 애호가로 끌어들이려는 다양한 시도의 공연이 꾸준히 마련되고 있다. 3월17일부터 5월6일까지(오후 1시,4시.월요일 공연없음) 롯데월드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세비야의 이발사'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오페라다. 만 6세 어린이의 평균 집중 시간이 보통 30분인 점을 감안해 총 2시간이 넘는 공연을 50분으로 줄였다. 또 공연 전 시드니국립오페라단 전속단원으로 10년 넘게 활약한 임한성 씨가 나와 10여 분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작품 설명을 하고, 20분간의 뒤풀이 공연도 마련된다. 3만5천원. ☎02-3448-4340. 다음달 9-10일 서울 압구정동 장천아트홀 무대에 올려지는 오페라 '라 보엠'에는 미술관에나 있는 도슨트(docent)가 등장한다. 오페라 전문 지휘자 채지은 씨가 도슨트로 나서 '라 보엠'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대에 소품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기법까지 도입한 것도 특징. 임정현(로돌포 역), 이지연(미미 역), 박경종(마르첼로 역), 노선호(쇼나르 역) 등이 출연한다. 공연시간 3월9일 오후 8시/10일 오후 7시. 1만-7만원. ☎1588-7890. 삐우앤삐우클래식(대표 홍상의)이 여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오페라 전막을 공연하되 군더더기 없는 연출, 전속가수와 전용극장 등으로 입장권 가격을 대폭 낮춰놓고 일반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서울여대 인문사회학부에 출강하고 있는 오페라연출가 홍석임이 연출을 맡았고, 소프라노 이은미 박성희, 테너 정영수 채신영, 바리톤 김성일 김수찬 등이 출연한다.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담은 스코틀랜드 판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23일부터 3월17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떼아뜨로삐우에서 열린다. 공연시간 매주 금요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4시, 8시. 3만-5만원(저녁식사 포함 5만-7만원). ☎02-3442-7466. /연합뉴스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라면…

◇백남준 1주기 추모전 다음달 23일부터 오는 5월6일까지 고인의 비디오아트 이전 작품과 비디오아트 초기 작품들까지 포함해 거장의 비디오아트가 변모해온 과정들을 선보인다. 지난해 1월29일(미국 시각) 타계한 현대미술의 거장 백남준의 사후 1주기를 맞아 작가를 추모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되짚어 보는 자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물로 모니터 1천3개로 구성된 백남준의 초대형 비디오 설치작 ‘다다익선’(多多益善·1988)을 비롯, 그의 흔적들을 담은 비디오 영상도 상영된다.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 중인 프랑스 예술가. 서울대 미술관 야외 공간에 건축용 철근을 원형으로 만든 ‘세 개의 불확정한 선들’이란 작품을 통해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20세기 조각의 특징인 전시 받침대를 버리고 벽과 바닥을 작품의 요소로 활용, 기존 틀에 짜여진 구조와 질서 등을 과감히 벗어던진 조각들을 만들고 있다. 이번 회고전은 조각, 회화, 사진, 소리작업, 퍼포먼스 등 초기작부터 근작까지의 대표작 5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 예정 4∼5월. ◇올해의 작가-정연두 한국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작가들을 선정한 ‘올해의 작가’ 정연두(39)는 사진은 물론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90년대 후반 음식 퍼포먼스, 지난 2002년 광주비엔날레의 ‘보라매 댄스홀’, 타인의 꿈을 사진 속에 담는 사진 연작 시리즈 ‘내사랑 지니’,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을 구체화시킨 ‘원더랜드’(지난 2004년), 그리고 실제의 자연 풍경과 가공된 무대를 혼합하거나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가. 전시 4∼5월. ◇게오르그 바젤리츠전 지난 70년대 부상한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표 작가. 이번 전시는 과거 러시아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경험이 담긴 일련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5월.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 중국현대미술 8~10월 한·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해 열린다. 중국 북경 소재 중국미술관과 상호교류전으로 추진된다. 중국 미술현장을 주도하는 중견 작가들을 중심으로 중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적 상황을 진단한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이동규&임선혜 러브듀엣 콘서트

사랑을 노래하는 수많은 성악곡 중 비발디, 바흐, 헨델, 모차르트 등 역대 천재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세이크리드 러브(Sacred Love:종교적 사랑)’의 곡들로 프로그램한 성악 앙상블 공연이 다음달 3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을 찾아온다. 이동규·임선혜 러브 듀엣 콘서트 2007이 그것. 종교적인 사랑을 배경으로 고난과 비탄, 믿음, 사랑, 소망, 용서, 찬양과 경배 등의 카테고리에 엮인 내용을 담은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 바흐의 ‘요한 수난곡’·‘마태 수난곡’, 헨델의 ‘메시야’, 모차르트의 ‘엑술타테 유빌라테’, ‘c단조 미사’ 등이 선곡됐다. 기독교 사순절을 맞는 시점에 열리는 이번 음악회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성악가들의 목소리로 종교음악 성악의 에센스를 주제별로 만나볼 수 있다. 훈련으로 여성의 높은 음역을 노래하는 남자 가수 카운터 테너 이동규는 열일곱살 때 영화 ‘파리넬리’를 보고 카스트라토가 노래하는 헨델의 ‘울게하소서’에 크게 감동받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8세에 헨델의 ‘메시아’로 프로무대에 섰고 19세에 첫 오페라 주연, 지난 9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 최연소 입상했다. 소프라노 임선혜는 지난 98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에서 고음악계 거장 필립 헤레베게의 눈에 띈 것을 계기로 지휘자 르네 야콥스, 켄트 나가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윌리엄 크리스티, 지기스발트 쿠이켄 등 바로크 음악계 권위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R석 7만원, S석 5만원, A석 2만원. 문의(031)783-8000 /김효희기자 hhkim@kgib.co.kr

<볼록거울> 광대 김덕수

그것은 부자(父子)가 감행한 '합동 가출작전'이었다. 아내가 한사코 반대했으나 매정한 남편은 아들을 기어코 자신이 몸담아온 남사당 걸립패에 끌어 들이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사회가 어수선하던 1950년대 중반에 이 어린 광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사당패 일원이 됐다. 그는 훗날 김덕수사물놀이패로 명성을 날린 김덕수였다. 그가 예인의 길을 걷게 된 건 어쩌면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집안이 대대로 사당패와 인연을 맺어왔던 터라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도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난 김덕수의 가계 내력은 이렇다. 할아버지 김봉학의 집은 마을 농악꾼들의 집합소였고,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버지 김문학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온 뒤 남사당 걸립패와 어울리더니 벅구놀이의 명인이 됐다. 아버지는 아들 덕수가 태어나기 전에 사당패 친구들에게 약조했다. 아이가 사내라면 사당패에 내놓겠노라고. 이런 약조 때문인지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왔고, 아들은 '합동 가출작전'에 신바람이라도 난 듯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엄마 품을 떠난 이 아이는 사당패들이 깜짝 놀랄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장구를 기가 막히게 다뤄 사당패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1957년 이리난장에서 남사당 인간문화재였던 남운용의 어깨에 올라 광대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고작 일곱 살이던 1959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였으니 '장구 신동'이라는 별명이 그저 나온 게 아니었다. 줄탁동기(卒啄同機ㆍ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라는 말처럼, 김덕수는 자신의 타고난 재주와 주변의 훌륭한 스승에 힘입어 한국 최고의 광대로 쑥쑥 자랐다. 양도일(장구.소리), 남운용(대잡이.덜미), 김재원(버나.장구), 송순갑(살판.쇠), 김복섭(비나리.장고), 송창선(호적), 이돌천(수벅구), 최성구(쇠), 민창열(장구), 정일화(열두발 상모), 지수문(북) 등이 그들이었다. 잘 아는 바처럼 1978년에 첫선을 보인 사물놀이는 김덕수 자신을 최고의 예인반열에 올려놓은 장르이자 한국전통음악을 세계화하는 선두주자였다.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이 의기투합해 농악, 판굿 등에 흩어져 있던 우리 전통장단을 한데 모아 무대음악으로 새롭게 승화시켰던 것이다. 꽹과리, 징, 장구, 북만으로 세계를 쩡쩡 울리게 될 줄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볕이 강하면 그림자 또한 짙은 법인가. 출범 6년 만에 내부진통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10여년 만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해체되고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개척했다. 선배와 후배이자 스승과 제자로 똘똘 뭉쳤던 이들이 견해차로 떠나갈 때 그의 마음고생은 퍽이나 심했다고 한다. 김덕수패는 사라졌지만 사물놀이 자체는 대표적 연희양식으로 꿋꿋이 살아 남아 저변을 넓혀갔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물론 남북화합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0년 남북음악교류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사물놀이가 공연돼 북한동포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 그 한 예이다. 김씨는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모태로 1993년 ㈔사물놀이한울림을 창단해 민족 고유의 힘찬 몸짓과 호흡으로 우리 문화를 부흥시키고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더불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후학양성에도 애쓰고 있다. 다시 말해 무대와 교단을 오가며 중년의 예술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올해로 예인인생 50주년을 맞았다니 본인은 물론 한국음악계로서도 감회가 깊다. 나이 55세의 예술인이 무대인생 50주년을 맞는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지만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데뷔했음을 상기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반세기 동안 걸어온 광대의 길은 우리 가슴에 신명을 일으키며 지금도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데뷔 50주년을 계기로 3월 12일과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련되는 대규모 기념공연의 의미는 그래서 더 각별하다고 하겠다. /연합뉴스

<공연리뷰>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그것은 피아노 소리가 아니었다. 피아노로 구현된 꿈과 환상이었다.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르웨이의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리사이틀에 참석한 청중은 그의 피아노가 창조하는 달콤하고도 낯선 상상의 세계를 공유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체험이었다. 베토벤에서부터 무소르그스키까지, 소나타에서 모음곡까지, 시대와 형식을 넘나드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이 음악회에서 안스네스는 자유롭고 다채로운 자신의 판타지를 펼쳐 보였다. 그의 피아노연주는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지만, 꿈결 같이 부드러운 음색과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그리고 곡의 구조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인해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첫 곡으로 연주한 그리그의 '노르웨이 민요에 의한 변주곡 형식의 발라드'와 슈만의 '4개의 피아노 소품'은 일반적인 연주회 무대에서는 거의 들어볼 기회가 없는 희귀 레퍼토리다. 음반으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이 두 작품에 대해 대개의 청중은 작곡가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선입견 이외에 아무런 예비지식 없이 안스네스의 연주로 이 곡을 처음 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곡의 낯선 작품들이 즉각적인 청중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안스네스의 잘 다듬어진 톤의 매력과 설득력 있는 음악해석 덕분이다. 그리그의 발라드에서는 소위 '북구의 청정함'이라 불리는 안스네스 특유의 음색이 빛났다. 마치 약음기를 낀 현의 음색과도 같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그의 피아노 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음색 뿐만이 아니었다. 안스네스는 이 곡의 주제와 변주, 주선율과 장식음형 등의 위계 구조를 피아노의 음색과 강약의 차이로 뚜렷하게 구분해내며 마치 종류가 다른 여러 악기들이 서로 어울려 앙상블을 하는 듯한 연주를 선보였다. 피아노를 통해 오케스트라 소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꿈을 그는 이미 실현해내고 있었다. 음악회 전반부에 청중에게 다소 생소한 작품들이 안스네스의 호소력 있는 연주로 호응을 얻었다면, 후반부에는 그 반대의 이유로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슈만의 소품에 이어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32번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명곡이다. 그러나 그토록 유명한 명곡은 안스네스의 손을 거치면서 낯설고 매혹적인 새로운 음악으로 탄생했고, 청중은 그가 새롭게 제시하는 베토벤과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놀라운 상상력에 경탄했다. 특히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인 제32번의 연주는 매우 새로웠다. 자유로운 토카타나 환상곡을 연주하듯 리듬과 템포를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페달을 많이 밟아 음의 명료함을 의도적으로 흐리는 등, 일반적인 베토벤 연주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그러나 1악장을 지나 2악장이 이어지자 그 몽환적인 피아노 음색을 통해 마치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듯한 영원의 세계가 펼쳐졌고 그 자리의 청중 모두 그 음악에 그대로 설득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연주에서는 각 그림에 대한 음악적 묘사도 훌륭했지만, 각 곡들 사이의 짧은 삽입곡인 '프롬나드'를 다음 곡과의 연계성을 살려 표현함으로써 음악적 논리를 구축한 점이 돋보였다. 오케스트라 금관악기군의 포효와도 같이 당당하게 울려 퍼졌던 '키예프의 대문'의 웅장한 마무리로 음악회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고,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안스네스는 몸포우의 소품과 리스트의 즉흥왈츠, 멘델스존의 무언가 등, 최근에 발매한 앨범 '호라이즌'에 수록된 곡을 중심으로 네 곡의 앙코르 곡을 연주해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날 청중의 대부분은 20-30대의 젊은 클래식 마니아들이나 피아노 전공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근래 보기 드문 집중력 높은 관람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회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1층 좌석도 다 차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간혹 청중은 많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클래식 음악회가 있다. 이런 경우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초대 손님이 청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 음에 깃든 미세한 뉘앙스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한 청중에게 초대 손님이 많은 이런 음악회는 별로 반갑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안스네스 리사이틀의 청중은 클래식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상적인 청중이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에서 클래식음악을 듣는 진지한 청중의 숫자가 과연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인가 하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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