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록거울> 광대 김덕수

그것은 부자(父子)가 감행한 '합동 가출작전'이었다. 아내가 한사코 반대했으나 매정한 남편은 아들을 기어코 자신이 몸담아온 남사당 걸립패에 끌어 들이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사회가 어수선하던 1950년대 중반에 이 어린 광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사당패 일원이 됐다. 그는 훗날 김덕수사물놀이패로 명성을 날린 김덕수였다.

그가 예인의 길을 걷게 된 건 어쩌면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집안이 대대로 사당패와 인연을 맺어왔던 터라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도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난 김덕수의 가계 내력은 이렇다. 할아버지 김봉학의 집은 마을 농악꾼들의 집합소였고,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버지 김문학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온 뒤 남사당 걸립패와 어울리더니 벅구놀이의 명인이 됐다.

아버지는 아들 덕수가 태어나기 전에 사당패 친구들에게 약조했다. 아이가 사내라면 사당패에 내놓겠노라고. 이런 약조 때문인지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왔고, 아들은 '합동 가출작전'에 신바람이라도 난 듯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엄마 품을 떠난 이 아이는 사당패들이 깜짝 놀랄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장구를 기가 막히게 다뤄 사당패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1957년 이리난장에서 남사당 인간문화재였던 남운용의 어깨에 올라 광대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고작 일곱 살이던 1959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였으니 '장구 신동'이라는 별명이 그저 나온 게 아니었다.

줄탁동기(卒啄同機ㆍ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라는 말처럼, 김덕수는 자신의 타고난 재주와 주변의 훌륭한 스승에 힘입어 한국 최고의 광대로 쑥쑥 자랐다. 양도일(장구.소리), 남운용(대잡이.덜미), 김재원(버나.장구), 송순갑(살판.쇠), 김복섭(비나리.장고), 송창선(호적), 이돌천(수벅구), 최성구(쇠), 민창열(장구), 정일화(열두발 상모), 지수문(북) 등이 그들이었다.

잘 아는 바처럼 1978년에 첫선을 보인 사물놀이는 김덕수 자신을 최고의 예인반열에 올려놓은 장르이자 한국전통음악을 세계화하는 선두주자였다.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이 의기투합해 농악, 판굿 등에 흩어져 있던 우리 전통장단을 한데 모아 무대음악으로 새롭게 승화시켰던 것이다. 꽹과리, 징, 장구, 북만으로 세계를 쩡쩡 울리게 될 줄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볕이 강하면 그림자 또한 짙은 법인가. 출범 6년 만에 내부진통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10여년 만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해체되고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개척했다. 선배와 후배이자 스승과 제자로 똘똘 뭉쳤던 이들이 견해차로 떠나갈 때 그의 마음고생은 퍽이나 심했다고 한다.

김덕수패는 사라졌지만 사물놀이 자체는 대표적 연희양식으로 꿋꿋이 살아 남아 저변을 넓혀갔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물론 남북화합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0년 남북음악교류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사물놀이가 공연돼 북한동포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 그 한 예이다.

김씨는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모태로 1993년 ㈔사물놀이한울림을 창단해 민족 고유의 힘찬 몸짓과 호흡으로 우리 문화를 부흥시키고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더불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후학양성에도 애쓰고 있다. 다시 말해 무대와 교단을 오가며 중년의 예술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올해로 예인인생 50주년을 맞았다니 본인은 물론 한국음악계로서도 감회가 깊다. 나이 55세의 예술인이 무대인생 50주년을 맞는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지만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데뷔했음을 상기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반세기 동안 걸어온 광대의 길은 우리 가슴에 신명을 일으키며 지금도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데뷔 50주년을 계기로 3월 12일과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련되는 대규모 기념공연의 의미는 그래서 더 각별하다고 하겠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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