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경기도립극단의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사랑의 메시지에 어느새 눈물을 훌쩍이고 연극이 끝났을 때는 “브라보”와 함께 기립박수로서 도립극단 단원들의 연기에 감사를 표하게 만든다. 여기에 전무송 도립극단 예술감독의 무게와 연기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그래서 “역시 전무송”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연극 한편을 만나는 기쁜 하루였다. 경기도립극단이 구랍 28~3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공연장 무대에 올린 연극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원작 아서 밀러·연출 장용휘)’은 이같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느껴보기에 충분했다. 극은 시작부터 삶의 무게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피아노 선율이 관객들의 귓전을 때리며 흐르는 사이 엷은 막을 배경으로 차량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속을 삶의 무게에 짖눌려 지칠대로 지쳐버린 아버지 노만수가 양손에 가방을 든 채 무거운 발검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온다. 도시의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한옥 노만수의 집.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 것은 어둠 뿐이다. 출장 중 바람을 피운 아버지에 대한 불신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밖으로 떠돌던 큰아들 준형이 오랜만에 돌아온다. 가족들은 헬스클럽을 차려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준형을 격려하며 꿈에 부풀지만 이들 가족에겐 되는 일이 없다. 노만수는 36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겨나고, 준형도 꿈을 이루지 못한다.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화해하려던 준형은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식당을 뛰쳐나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준형은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자신을 말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준형, “아버지 전 싸구려예요. 아버지도 싸구려구요! 저는 쓰레기예요! 인간 쓰레기! 쓰레기라구요”라고 말하며 아버지 품에 안겨 울음을 삼킨다. 준형을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노만수는 “그놈이 울었어. 애비한데 안겨 울었다니까”라고 말하며 흥분하고, 이윽고 노만수는 준형에게 보험금 1억원을 남겨주기 위해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달려나간다. 곧이어 들려오는 자동차 파열음…. 연극에 빠져든 관객들은 준형이 “전 쓰레기예요”라고 외치며 아버지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기어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 만다. 기자도 어둠이 짙어질 때 재빨리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부인의 독백에 이어 공연이 모두 끝나고 무대가 다시 밝아지면 객석 곳곳에서 “브라보”가 터져 나오고 도립극단의 멋진 연기에 기립박수로서 화답하는 관객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20대부터 40~50대, 60대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 관객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경기도립극단의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고 난 뒤의 첫 감흥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잘 그려내 우리의 아버지란 존재적 가치를 한번쯤 더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사흘 동안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8번의 공연 모두 만원사례를 이룰 정도로 예전 도립극단이 무대에 올렸던 그 어느 작품보다 성공적이었다. 그 성공의 뒤에는 공연시간이 3시간이 넘어 지루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원작을 1시간 50분 정도로 줄였는데도 깔끔한 연출로 전혀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감동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장용휘 연출가의 연출력이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의 성공을 이끈 주역은 단연 아버지 노만수 역을 맡아 열연한 전무송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그의 관록의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아버지 품에 안겨 울며 용서를 비는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을 짜낸 준형 역의 한범희 연기도 빛이 났고, 부인 역의 김미옥 지도위원, 동생 준제역의 심완준, 그리고 비록 단역이긴 했지만 이승철(백부 역), 김종칠(병춘〃), 김길찬(달수〃), 이찬우(하원두〃), 윤상정(정부〃), 서장호(웨이터〃), 한수경(소영〃), 강혜련(가희〃), 임미정(미스조〃) 등까지 도립극단 단원들의 무르익은 연기는 극의 맛을 살려주는 조미료요 청량제였다. 도립극단은 전무송 예술감독이 취임한 이래 2007년 한해동안 많은 실험과 수련과정을 거쳤다. 러시아 연출가를 초빙해 러시아의 연극기법을 몸에 익히는 수련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물로 ‘엘리자베타 밤’과 ‘미운오리새끼(덴마크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국내 관객들에게 호평받았으며, 새롭게 다듬은 ‘눈물꽃 기생’으로 러시아 관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이번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을 위해 3개월 동안 노력한 결실로 나타났다. 이번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리들의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원작의 줄거리는 그대로 가져왔지만 상황이나 배경 등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한국적 상황이 잘 녹아져 있다. 그러면서 푸근하면서도 한국적 정서에 맞는 잔잔한 감동까지 전해 주고 있다. 무대 세트 또한 극의 맛을 잘 살려주고 있다. 사방이 높은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은 노만수의 아름다운 한옥집은 물론 창살문은 한국적인 미를 잘 살려줘 정답게 다가왔고, 1~2층으로 구분된 세트는 극의 무대를 양분하면서도 극 전체의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여기에 조명은 극의 맛을 살려주는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아마도 이번 ‘세일즈맨의 죽음’ 성공은 이같이 각계에서 내로라 하는 실력가들이 총출동해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는 3월 의정부 공연에 이어 한해 동안 도내를 순회하며 멋진 공연을 펼쳐주기를 기대하면서 다시한번 도립극단 단원들의 활약에 박수를 보낸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문화현장을 가다/극단 秀 ‘나생문(羅生門)’

어둠이 가득한 공간, 어둠 속에서 격렬한 북소리가 관객들의 귀청을 때리며 공연장 안을 가득 메운다. 무대의 불이 밝혀지면 무대 뒤편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드러나고 허물어져 가는 작은 암자에는 세명의 인물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웅크리고 앉아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있다. 지난 7일 안산문화의전당 별무리극장 무대에 오른 극단 수의 ‘나생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느날 대나무 숲을 지나던 무사의 아내가 산적에게 유린당한다. 그리고 무사는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건은 너무도 명백하다. 사건의 진실은 감출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 4명 모두 각기 다른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들의 거짓말에 진실은 점점 꼬여가기만 가고 무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놈의 바람 때문에….” 그 놈의 바람 때문에 부인을 성폭행하고 그의 남편인 무사를 살해했다는 산적 타조마루. 관헌에게 붙잡혀 재판장에 선 그는 우연히 만난 무사의 부인이 너무 아름다워 흑심을 품고 강간했지만 무사와는 당당히 결투를 벌여 살해했다고 얼토당토 않게 진술한다. 그는 왜 성폭행과 살인을 자인하고 죽음을 맞으려고 하는 것일까? “네. 그래요. 제가…. 제가 죽인 거예요. 제가 사람을 죽인 거예요.” 하지만 무사 부인의 진술은 다르다. 부인은 법정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진술, 남편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회피한다. 타조마루는 자신을 성폭행한 뒤 떠났고 정조를 더럽힌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서 모멸감을 느껴 잠시 혼절한 사이 그녀가 들고 있는 단검에 남편이 찔려 죽었다고 진술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손쉬운 진술인가. “지금까지도 귓가에 떠나지 않는 그 끔찍한 소리, 여자의 변심….”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무사의 진실은 또 다르다. 타조마루에게 성폭행당한 부인이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데 환멸을 느껴 그 자리에서 명예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구. 모조리 거짓말이라구요….” 이 사건을 목격한 나뭇꾼은 세명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뭇꾼의 주장도 “나뭇꾼 또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발장수의 말 한마디에 진실성을 의심받게 된다. 죽음을 앞에 둔 산적의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남편을 잃은 부인의 말이 진실인가. 죽은 남편이 영매를 통해 한 말이 진실일까. “모든 게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건을 목격한 나뭇꾼의 말이 진실일까? 이 작품은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허무적 색채가 짙은 ‘랴쇼몽(羅生門)’과 ‘덤블 속’이란 두 단편을 엮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을 각색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세가지 시간대의 존재와 회상화면 구조를 처리하는 과감한 방식으로, 특히 환상적인 무당의 접신장면과 마치 관객들이 재판관인 것처럼 말하는 법정에서의 정면구도가 명장면. 연출가 구태환은 세겹의 구조와 각 장면들마다 표현양식을 변화시키는 시도를 통해 사실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특성을 갖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연극을 보다 보면 타악기를 통한 장면전환이나 구체적인 음향효과부터 전체적인 이미지 창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게 엿보인다. 여기에서 네가지 에피소드를 드라마틱하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고리는 타악기. 타악기는 극에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관객들도 타악기 소리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바뀌는지 상상하는 등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는 훌륭한 매체가 됐다. 악사 한명이 무대 뒤 대나무 숲 속에 은밀하게 숨어 악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막과 막 사이의 긴박한 장면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극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줬다. 여기에 무대의상 부분에서도 일본 전통 의상 기모노와 무사 복장의 현대화, 또는 동양적인 이미지로 바꿔줌으로써 관객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했고, 이와 반대로 신분과 상황에 따라 배우들의 팔과 얼굴 등에 상징적인 문양을 분장함으로써 극 분위기를 살리고 다양한 조명 색으로 각 장면마다의 특성을 잘 표현해냈다. 이번 연극에선 출연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한몫 했다. 처음 대관한 공연장의 사정으로 공연장을 변경하면서 일부 출연진이 바뀌었지만 새로 투입된 배우들은 탄탄한 연기력을 갖췄다. ‘에쿠우스’와 ‘아일랜드’ 등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승호가 나뭇꾼으로 출연했고 ‘웰컴투 동막골’과 ‘라이방’ 등에서 호연한 이서림이 부인역을 맡아 열연하는 등 극을 더 짜임새 있게 만들어냈다. 산적이 부인을 성폭행하는 장면에선(극의 흐름상 있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이었지만) 과장된 몸짓이 아닌 실체적인 흐름으로 표현, 관객들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배려도 좋았다. 하지만 몇가지 부분에서 미흡한 점들도 눈에 띈다. 산적과 부인, 무사의 대사를 위한 상황 전환을 위한 암전 등이 자주 반복되면서 약간의 혼란감을 주기도 했고 관객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기 보다는 단지 극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하는 역할에만 머물러 아쉬움을 줬다. 부분적으로 약간 미흡한 면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지역 소극장 무대에서 오랜만에 스토리가 탄탄한 작품 한편을 만나 연극의 재미를 느끼게 된 점은 큰 수확이었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전문가 비평-안경모 연극평론가 /외피에 감춰진 속내 들여다보기 극단 秀가 공연한 ‘나생문(羅生門)’을 ‘나생문’식으로 들여다 보자. 먼저 관객으로 참여한 A씨의 진술. 그는 우선 ‘진실에 대한 논란으로 인간의 허식과 이기심’을 해부한 원작자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작가정신, 그리고 이를 영화화, 세계적인 유산으로 남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공을 높이 샀다. 또한 이를 연극적으로 풀어낸 극단 秀의 예술역량에 박수를 보내며 경기지역에서 공연된 많은 작품들 중에서 당연 수작(秀作)임을 내세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B씨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B씨는 평소부터 문화적 지역주의를 주장하던 이였다. 작품이 좋았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이 공연은 이미 지난 2003년부터 극단 秀가 제작해 온 레퍼토리다. 경기도가 연고가 아닌 서울 극단의 공연이 경기문화재단의 무대공연작품 제작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것 자체부터 문제다. 서울의 한 극단과 기획사의 투어공연에 왜 경기도민들의 혈세가 들어가야 되는가. 이처럼 경기도에서 공연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이 이뤄진다면, 경기도는 결국 서울의 문화적 ‘위성’ 역할 이상을 넘어서질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건 수작(酬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B씨의 의견에 대해 C씨가 발끈했다. 아니 그런 해묵은 지역주의가 경기도의 문화수준을 얼마나 낙후시켰는지 모르냐며, 상대적으로 문화역량이 연약한 경기지역 문화주체들이 현재 경기도 관객들의 예술적 기대감과 충족감을 전부 채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관객들을 실망과 허탈로 극장 밖으로 몰아낼 게 아니라 좋은 작품들로 끊임없이 관객들을 극장 공간과 친숙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냐고 했다. 더불어 경기도 혈세로 서울 시민들을 위해 공연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냐. 경기 도민들의 문화적 갈망을 채우는 게 더욱 중요한 게 아니냐며 역설했다. 게다가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극단들 중 절반 이상이 경기지역 문화주체들이라고 주장했다. B씨와 C씨의 논란은 경기도와 서울을 넘어 로컬리즘(지역주의)과 글로벌리즘(세계화주의)에 대한 논란으로 확대됐고, 급기야 글로컬리즘(글로벌 로컬리즘)으로까지 번져갔다. 일본문화에 대한 수용방식과 비교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쟁까지 거치더니, 끝내는 경기지역 문화주체에게 경기문화재단 지원의 일정 비율을 항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지원-쿼터까지 그 논쟁을 이어갔다. 지켜보던 D씨 또한 이 논쟁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이 문제는 어쩌면 지원 자체의 모호함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 문화 주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원인지 경기 도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한 지원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했어야 했고, 그것이 제작 주체의 역량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 지원이 어떤 세부적인 예술 의도와 예술적 축적과정을 거쳤는지를 평가해야만 하며 이것이 경기 도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한 지원이라면 관객 계발을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활동으로 지원금이 활용됐는지가 주된 평가의 내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작품 외적인 부분으로 계속되자 E씨가 나섰다. 그는 공연예술작품으로서 공연의 예술적 측면 또한 온전히 평가돼야 한다면서, 숲을 통해 은밀한 훔쳐보기가 의도됐던 무대디자인적인 의도가 그저 그런 배경으로만 자리잡아 그 효과를 다하지 못했고, 많은 장면 전환을 타악장단의 힘으로 해결은 했지만 불편하면 모두 타악에 기대버리는 안이함이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때문에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템포가 기능적인 연출력 이상을 넘어서질 못했고, 연기자들의 편차 또한 여실히 드러나 원작이 주는 의미 이상 공연적으로 발전되진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F씨는 무사의 혼령들이 만들어내는 숲 속 장면이나 죽음 장면 등은 다소 익숙한 표현이긴 하지만 효과적이었으며, 타악의 리듬감 또한 기능상 요구되는 물리적 전환간극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으로 전환시킨 효과적인 선택이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인물 각각이 표현해야 할 극단적 이중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에선 아쉬움을 토로했다. 논란은 다시 예술의 내적 평가와 외적 평가에서 그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는 다소 사변적인 얘기를 거쳐 언급했던 작품의 의미와 한계, 관객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 지원과 이에 따른 결과론적 의미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되풀이됐다. 물론 ‘나생문’이란 작품에선 진실공방 그 모두가 ‘자신의 허의식으로 진실을 주관적으로 왜곡시키는 인간들에 대한 폭로와 반성’을 의도한 것이지만, 극단 秀의 ‘나생문’ 연극화에 대한 논란은 제작자와 관객, 지원자와 수혜자, 예술가와 비평가의 다차원적인 시각에 따라 상대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예술행위에 대한 논란일 수 밖에 없다. 모두의 진술이 결국 진실이 아니었던 나생문이야기에 반해 이 논쟁은 모두가 진실의 원에 한발씩 걸치고 있는 소위 시각차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논란 그 자체로도 계속돼야 하고, 더욱 거세져야 한다. 작품의 완성도에 박수치면서도 안이함에 경종을 울려야 하고, 관객들의 기쁨에 행복해 하면서도 더 새로운 관객들을 만나지 못했음에 좌절해야하며, 지원은 했지만 재정적 지원 이상의 문화적 성과에 채근해야 하고, 논의는 진행하지만 논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끝없이 긍정적 혜안을 찾아야만 한다. 논란이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사장(死藏)을 의미하니까. 죽음이 넘나드는 나생문의 터에서는 갓난 아이가 발견됐다. 지금은 비록 미약한 인간들이지만 미래에 대한 시험적인 믿음을 안겨주려고 했다. 그리고 극단 秀의 ‘나생문’ 연극에선 꽤나 많은 관객들이 발견됐다. 그 관객들이 경기도 문화주체들에겐 또 다른 시험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억측일까.

장·사·익 송년콘서트

지난 6월 의욕적으로 시도한 미국 4대 도시(뉴욕 시카고 워싱턴 LA) 투어에서 교민들은 물론 현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준 우리시대 최고의 가객(歌客) 장사익. 그가 오는 29~30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송년 콘서트 ‘사람이 그리워서’를 준비했다. 길을 가다가 노래를 들으면 노래 부른 이가 누구인지 묻고 기억하게 만드는 소리꾼, 유연하고 감칠 맛나게 가슴을 파고 드는 특유의 목소리로 우리 고유의 가락과 가요의 애잔한 정서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장사익. 뛰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국악과 팝, 대중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세계를 소화해 내며 독특 한 해석과 국악풍의 거침없이 내지르는 자연스런 창법으로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의 살아있는 노래, 인간적인 노래, 감동적인 노래들이 그의 삶의 이야기와 함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펼쳐진다. 촌부의 텁텁한 흙 냄새가 묻어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그의 목소리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슴 속에 묻혀있던 음악을 끄집어내 구성진 목소리로 토해내는 그의 소리에서 관객들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또 자연과 함께하는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지난해 발매된 5집 앨범 ‘사림이 그리워서’와 동명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공연에서는 5집에 수록된 곡들을 중심으로 데뷔 13년을 보내는 그만의 성숙한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정겨운 시골장의 풍경을 담은 5집 타이틀곡 ‘사람이 그리워서’를 중모리장단의 소리북에 얹어 구성지게 풀어내고 ‘무덤’ ‘자동차’ 등 전형적인 장사익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곡들과 그의 색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수록곡들을 부른다. 또 생을 마감하는 노인의 여정을 아름답고 처절하게 그린 미당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5집의 대표곡인 ‘황혼길’은 특유의 창법으로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듯한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허허바다’, ‘희망한단’, ‘여행’ ‘민들레’ ‘아버지’ ‘찔레꽃’ 등 자신의 대표곡들은 물론 2부에서 ‘삼식이’ ‘봄날은 간다’ ‘검은 상처의 블루스’ ‘동백아가씨’ ‘대전블루스’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곡들을 그만의 곰삭은 목소리로 풀어낸다. 기타리스트 정재열, 피아노 최장현, 트럼펫과 하모니카 최선배, 베이스 이원술, 드럼 Ben Ball을 비롯 모듬북과 각종 타악기, 해금, 클래식 아카펠라그룹 ‘솔리스츠’까지 새롭게 진용을 구성한 세션과 코러스 등 최고의 연주자들이 함께 참여해 더욱 깊어진 장사익의 음악세계를 풍성하게 뒷받침한다. 29~30일 오후 5시. VIP석 9만원, R석 7만원, S석 5만원, A석 3만원. 문의(02)548-4480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공연리뷰> 안산 BM산부인과 ‘작은음악회’

즐거운 크리스마스 캐롤이 산부인과 병원에 울려펴졌다.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위치한 BM산부인과(원장 정인광).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이곳에서 지난 20일 오후 7시 신생아부터 50대 중년까지 30여명의 관람객들이 클래식을 감상했다. 공연장을 찾기 어려운 지역 주민들이나 산모들을 위해 지난해 7월부터 매월 셋째주 목요일이면 ‘BM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이날 연주단체는 바로크 음악을 레퍼토리로 활동하는 ‘율 스트링 챔버 앙상블’. 검은색과 붉은색 옷을 차려 입은 단원들은 익숙한 팝송과 크리스마스 캐롤 등을 선사했다. 대개 연주자들은 무대와 객석이 떨어진 실내 공연장에서 연주하지만, 이날 공연은 연주자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생동감 넘치게 펼쳐졌다. 시작 전 튜닝하는 소리가 울리자 여느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격적인 연주를 위해 무대에선 연주자들의 표정 또한 진지했다. 첫곡은 기품 있는 모차르트의 현악 실내악곡을 선사했고 올드 팝송인 ‘선샤인’ 등 2곡을 들려줬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이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익숙한 곡들을 연주하자 관객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채 돌이 지나지 않은 아이들은 ‘징글벨’을 연주하자, 자그만 손으로 손뼉 치는 시늉을 하며 박자를 맞췄고 초등학생 10여명도 공연 내내 감상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다. 첼로의 중·저음은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음악에 심취한 첼리스트의 경쾌한 몸동작이 흥을 돋웠고 연령대를 넘어 하나가 됐다. 공연 후 앵콜이 쏟아졌다. ‘종소리 울려라’와 ‘기쁘다 구주오셨네’ 등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관람객들은 특별한 연말 음악회를 감상했다. 정인광 원장은 “아픈 환자를 대하며 웃을 일이 많지 않은데, 매달 음악회를 열면서 제 자신 스스로가 간병받는 기분”이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문화예술을 만끽하는 기회를 자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BM산부인과는 가야금 연주를 비롯 클라리넷&섹스폰이야기, 여성음악단체 레뮤젠, 한마음 클라리넷 앙상블, 오카리나 등 다채로운 연주를 선사했다. BM아카데미를 운영, 문화활동도 펼치고 있다. 문의(031)502-0078 /이형복기자 bok@kgib.co.kr

노래와 이야기가 있는 무대

올해에도 어김없이 달력의 마지막 끝자락에 섰다. 스산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있고 노래가 있어 외롭지만은 않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온 가족이 따뜻하게 연말을 보낼 수 있는 관객들과 함께 하는 공연 2편을 마련, 따뜻함을 전한다. 먼저 오는 24일 해돋이극장에서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 마련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행복하게 해줄 공연 ‘Another Christmas’가 열린다. 국내 재즈와 가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세션들과 함께 자신의 팝 프로젝트 앨범에 수록된 주요 곡들과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양한 음악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동화적 발상의 가사가 인상적인 ‘천사’ 를 시작으로 서정성이 빛나는 ‘어린 물고기’, ‘Memory Lane’의 타이틀곡인 ‘그리고 별이 되다’, 감성이 풍부하게 뭍어나는 ‘파흔’과 ‘신데렐라처럼’, 경쾌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클라우드 나인’ 등을 들려준다. 아름다운 발라드 곡인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주제곡 ‘When I Fall in Love’, 크리스마스 캐롤 ‘The Little Drummer Boy’ 등도 새롭게 편곡했다. R석 4만원, S석 3만원. 오는 29일은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과 3인3색의 완벽한 하모니를 선보이는 ‘Last Story’가 준비됐다. 백승주 아나운서 진행으로 가는 해의 아쉬움과 오는 해의 새로운 희망을 다지는 의미에서 추억, 낭만, 정열, 행복 등의 무대로 나눠 진행된다. ‘추억’이란 타이틀로 진행되는 첫 무대는 ‘클래시컬 비틀즈’로 국내 최초로 비틀즈의 음악을 바로크시대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한 곡들을 들려준다. 두번째 타이틀 무대 ‘낭만’에서는 70년대 낭만을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 김세환이 ‘사랑하는 마음’, ‘길 가에 앉아서’ 등 추억의 포크송들을 부드러운 음색으로 전해주고, 세번째 무대 ‘정열’에선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정상급 테너 임웅균이 그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정열로 다가오는 새해의 희망찬 도약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만든다. 마지막 무대 ‘행복’에선 거침없는 매력의 소유자 박해미가 ‘댄싱퀸’과 ‘맘마미아’ 등으로 관객들에게 행복을 전해준다. R석 5만원, S석 4만원, A석 3만원. 문의(031)481-4000/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大고구려 힘찬 기상 들리는가…

세상을 향해 눈을 부릅 뜬 푸른 빛이 감도는 청룡(靑龍), 거대한 준령 꼭대기에서 우렁차게 포효하는 흰색 호랑이 백호(白虎), 허공을 가르며 인간세상의 온갖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붉은 빛 공작의 힘찬 날오름 주작(朱雀), 땅을 솟구치며 끝 없는 우주를 비웃듯 온 몸을 뒤흔들며 번개를 부르는 검은빛의 현무(玄武)…. 어렸을 적 국사 교과서를 펼치면 고구려 벽화를 장식했던 사신도(四神도)를 보며 아득한 옛날 늠름하게 이 땅을 지켰던 조상들의 기개가 절로 느껴지곤 했다. 만주벌 한복판에서 하늘을 찌를듯 우뚝 솟아 있는 광개토태왕의 거대한 비석과 서슬 퍼런 창공을 뚫고 대륙을 내려다 보고 있는 오녀산성, 날카로운 시선으로 슬기롭게 오늘을 사는 예지와 지혜를 제사하고 있는 삼족오(三足烏) 등 지금도 중국을 여행하다 마주치는 고구려 유적들은 언제나 새롭다. 이처럼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이 평면회화로 펼쳐진다. 순수 조형작가 33명으로 구성된 갑자전(회장 정호양)은 19~25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고구려 夢’을 주제로 마흔네번째 전시회를 연다. 작품들은 100호 안팎의 대작 70여점. 1천호 크기의 공동 벽화도 만날 수 있다. 성기홍·박연·노정화·황제성·현남주·홍승표·박승순·박경애 작가 등 기존 회원들과 박동수·임근우·백진·황인혜·남궁원·안말환·김영미 작가를 영입, 새로운 출발을 다졌다. 고구려에 초점을 맞춘 이번 전시회에서 성기홍 작가는 작품 ‘향’(鄕)을 통해 옛 고구려의 향수와 회상을 보여주고 김행규 작가의 작품 ‘여명’은 작가의 기억 속에 잠재한 고구려 역사의 복원을 메시지화했다. 고구려의 발굴탐사과정을 지도로 표현한 임근우 작가와 ‘순환의 바람’을 연작하는 황제성 작가, 고구려의 꿈과 이상을 맑고 화사한 은하수와 접목시킨 백진 작가 등의 작품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공동작품은 작가들의 작품 100점을 일정한 크기로 제작해 1천호 크기의 거대한 벽화로 제작됐다. 갑자전은 내년 1월 일본 오사카 한국문화원으로부터 초대받아 일본 오사카에서 고구려전을 열고 미국 등지에서의 전시회도 개최할 계획이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공연리뷰>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군포 공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흥을 돋울 수 있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비보이. 비보이와 발레리나가 만나면 어떤 무대가 될까?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가 지난 16일 군포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올려졌다. 자유분방한 비보이 문화만큼 무대는 물론 객석까지 격식없는 공연이 펼쳐졌다. 발레리나와 비보이가 처음 격돌한 힙합광장, 신나게 춤 대결을 벌이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다니는 비보이의 춤에 발레리나들은 일단 후퇴한다. 그날 이후 비보이 매력에 빠져버린 발레리나 소연. 발레를 포기하고 비걸이 되기로 한다. 전체적으로 해피앤딩이라 부담이 없는 스토리에 무대를 날아다니는 비보이들의 모습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탄성을 지르게 했다. 첫 부분 발레리나와 비보이의 춤대결이라는 이색적인 소재에 흥미를 갖고 서서히 열기를 더해가는 춤이 객석을 고조시켰다. 인상적인 부분은 발레리나의 악몽 속에 등장하는 비보이였다. 밝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비보이 모습은 간 데 없고 호러영화에서 볼 수 있을만큼 기괴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비보이는 생소했다. 중력을 무시한 비보이라지만 어둑한 조명 아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연출자 의도대로 기괴해 관객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조명 각도를 조절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비보이의 그림자가 객석 사이사이 드리워져 객석도 함께 춤을 추는 효과가 났다. 춤 잘추는 아이가 인기도 많은 요즘 세태처럼 객석 어린이들은 공연에 집중해 여느 공연처럼 떠들거나 딴짓을 하지 않았다. 공연 후 집에 가기 아쉬워하던 아이들이 앵콜공연에 신이나 일어서서 뛰기도 했다. 격식에서 틀을 깬 공연 추세를 따라 이날 공연도 무대에서 춤을 추던 비보이들이 객석 사이를 뛰어 다니기도 했다. 공연자와 관람자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 속에 잔뜩 흥을 난 객석을 보니 가족 모두를 위한 공연으로 손색이 없었다. /김효희기자 hhkim@kgib.co.kr

<공연리뷰> 안산문예당 이미지극 '선동'을 보고

올해는 유난히 화가들을 소재로 한 연극들이 무대에 올려져 이색적인 트랜드로 부각됐다. 지난 6월 신윤복의 그림을 소재로 한 ‘그림 같은 세상’이 무대에 올려진데 이어 오는 20일 남산국악당 개관기념으로 겸재 정선의 그림을 영상과 소리극으로 표현한 ‘그림 손님’이 무대에 올려진다. 이와 때를 같이해 지난 13~15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 무대에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들을 중심으로 그의 화선세계를 그린 이미지극 ‘선동(仙童·김청조 작·양정웅 연출)’이 올려졌다. 이 작품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연극의 불모지와 같은 지역의 문화기반을 다지는 한편 연극과 생활의 통합을 시도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올해 야심있게 마련한 ‘연극-일상으로 가다’란 주제의 프로젝트의 결실이자 첫 창작품의 성공이어서 반가움을 더해 주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그림이 있을까? 이 말은 극중 김홍도가 항상 머리 속에서 되뇌이는 화두이다. 극 중에선 되뇌이는 이 말이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풍속화가 되고 자신 또한 그 곳에서 사는 신선이 되기도 한다. 이번 무대는 어머니의 작품을 아들이 연출해 화제를 모았지만 독특한 무대 디자인으로 극의 묘미를 잘 살렸다. 김홍도의 방대한 화선세계와 신선과도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해 무대의 4면을 막으로 둘러치고 객석을 무대 위에 설치, 관객들이 극과 동질화 될 수 있도록 했고 여기에 조명과 김홍도의 풍속화 등 영상이 더해져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색다른 무대를 연출했다. 극은 노인 김홍도가 홀로 깊은 산 속 바위에서 비파를 튕기며 상념에 잠기다 산을 내려오는 영상이 흐르는 사이 피리를 부는 신선을 따라 배우들이 뒷걸음 치며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이윽고 홍도 앞에 붓이 등장해 서로 어울리며 그림을 그리고 사면의 막에서는 그림이 퍼져나간다.(1장 급류도-붓과 친구가 되다). 김홍도의 긴 여행이 시작된다. 사람의 냄새가 질펀한 풍속화를 그려나가고(2장 풍속도-사람을 만나다) 궁중에 화사로 들어간 김홍도는 그곳에서 외로운 세손 이산을 만나 그림을 완성한다.(3장 초상화) 무료한 생활에 일탈을 꿈꾸는 홍도(4장 신선도-자유, 이상향을 꿈꾸다), 이어진 막간극에서 금강산을 그리라는 명을 받아 금강산타령을 따라 산을 오르는 홍도. 화첩을 펼치고 금강산을 완성한다.(6장 금강산도-산인가? 사람인가?) 연풍현감이 된 김홍도는 기근으로 그림으로 그릴 수 없어 절망하고(7장 송하선인취생도), 마지막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노년의 홍도. 홍도의 화구를 매고 각 장마다 홍도역을 맡은 배우들이 모두 나와 한판 진혼굿을 펼치며 극은 마무리된다.(8장 단원굿-홍도를 부르다) 극은 출연배우 10명 가운데 1명씩 주인공 김홍도역을 맡아 표현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각 장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을 찾아가는 김홍도의 여정을 언어는 최대한 자제한 채 몸의 언어로만 표현해냈다. 배우들의 자연스런 움직임은 물론 직접 악기를 다루며 극의 이미지를 표현해 내고, 해학적인 표정들과 알듯말듯한 절제된 대사들, 특히 막간극에서 변사의 코믹한 대사를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의 움직임까지 시종일관 관객들의 눈을 자신들의 움직임에 고정시키는 매력을 발산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모든 움직임을 1m도 안되는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김홍도가 자유로운 상상력의 연출가를 만나 그의 예술혼을 불어넣어 주는 소중한 시간과 만난 자리이기도 했다. 김홍도의 그림을 해체했다는 연출가의 말에 호기심이 많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해체는 아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극이 모두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느낀 건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이었다. 연출가가 홍도의 그림을 이미지로 해체했을뿐 극의 해석은 관객들의 몫으로 돌려놓다고는 했지만 그 해체 이미지 뒤에 있는,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짚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으로의 예술은 비언어극, 신체극 쪽으로 흐르는 것이 대세다. 안산문예당도 에딘버러나 아비뇽 등 해외진출을 위해 이 작품을 기획한 것으로 안다. 좀 더 다듬어 내년 해외 무대에서 안산문예당의 이미지극 ‘선동’이 빅 히트를 기록하길 바란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가야금앙상블 ‘사계’ / 명주실 12현의 가능성과 독창성을 말한다

가야금 창작 음악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매김해 온 가야금앙상블 사계(四界)가 창단 8년만에 전통음악의 총본산인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오는 27일 오후 7시30분 첫 콘서트 ‘All about 12Jul’을 연다. 이번 연주회는 김대성, 윤혜진, 이태원, 임준희 작곡가의 초연곡들로만 구성해 명주실 12현 가야금의 가능성과 예술적인 독창성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곡가 이태원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맡았고 김대성은 범패의 ‘짓소리’의 선율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가야금 4중주곡 ‘전설’을 선보인다. 짓소리(한문이나 산스크리트로 된 사설을 5음계로 짜여진 자유리듬에 얹어 합창으로 부르거나 같은 범패의 하나인 홑소리를 다 배우고 난 뒤 배우는 어려운 노래)로는 미묘한 음들, 변화무쌍한 장식음, 예상을 뒤엎는 음의 진행과 논리를 초월한 자유로운 전조, 반음 상행진행, 그리고 30분 이상 되는 곡의 길이와 전개방식 등등 흥분시키는 요소들이 많다. 이 곡은 인간의 탄생, 고뇌, 해탈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짓소리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기반으로 구조화했고, 화성적으론 범종의 맥놀이 현상에 의한 불협화음, 불교의식에 있어 발생하는 주변의 소리 등 범패의 헤테르포니성(이음성)을 기반으로 수직화했다. 두번째 곡은 듣는 귀로 만든 소리(연암 박지원)이란 뜻을 담은 윤혜진 작곡의 ‘이위지성(耳爲之聲)’. 소리를 생산하는 것, 생산된 소리를 귀로 듣는 것, 소리가 음이 되고 그것이 인간의 귀로 전달되며 그 들음이 소리와 의미를 만드는 일련의 연속적 과정에 대한 사고로 연주자의 호흡과 신체가 현과 맞닿아 이 모두를 생산하고 흡수한다. 세번째 곡은 네대의 12현 가야금을 위한 ‘잃어버린 소리’(임준희 작곡). 1천500년 전 우륵이 오동나무를 말리고 명주실을 꼬아 만들었던 가야금 소리의 최초의 흔들림을 12줄에 담아 더듬어보고 망국의 한과 유한한 생명에 대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하늘을 향해 펼쳤을 우륵의 춤을 상상하며 리듬과 소리를 골랐다. 전석 1만2천원. 문의(02)518-1450 ◇사계는 어떠한 단체? 여성 가야금 연주자 4명으로 이뤄진 실내악단으로 가야금 4대를 기본으로 12현 전통 가야금을 비롯해 개량된 18현·21현·25현 가야금 등과 그들이 직접 개발한 저음 22현 가야금까지 5음 음계는 물론 7음 음계 악기를 사용, 다양한 편성의 음악을 시도하고 있다. 작곡가들에게 전통 가야금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음색, 테크닉 등의 개발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올해 공연예술 집중 지원단체로 선정돼 바르샤바와 삿포로에서 두번의 해외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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