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주관적 진실공방 무대공연으로 또다른 재미
어둠이 가득한 공간, 어둠 속에서 격렬한 북소리가 관객들의 귀청을 때리며 공연장 안을 가득 메운다.
무대의 불이 밝혀지면 무대 뒤편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드러나고 허물어져 가는 작은 암자에는 세명의 인물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웅크리고 앉아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있다.
지난 7일 안산문화의전당 별무리극장 무대에 오른 극단 수의 ‘나생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느날 대나무 숲을 지나던 무사의 아내가 산적에게 유린당한다. 그리고 무사는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건은 너무도 명백하다. 사건의 진실은 감출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 4명 모두 각기 다른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들의 거짓말에 진실은 점점 꼬여가기만 가고 무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놈의 바람 때문에….” 그 놈의 바람 때문에 부인을 성폭행하고 그의 남편인 무사를 살해했다는 산적 타조마루. 관헌에게 붙잡혀 재판장에 선 그는 우연히 만난 무사의 부인이 너무 아름다워 흑심을 품고 강간했지만 무사와는 당당히 결투를 벌여 살해했다고 얼토당토 않게 진술한다. 그는 왜 성폭행과 살인을 자인하고 죽음을 맞으려고 하는 것일까?
“네. 그래요. 제가…. 제가 죽인 거예요. 제가 사람을 죽인 거예요.” 하지만 무사 부인의 진술은 다르다. 부인은 법정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진술, 남편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회피한다. 타조마루는 자신을 성폭행한 뒤 떠났고 정조를 더럽힌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서 모멸감을 느껴 잠시 혼절한 사이 그녀가 들고 있는 단검에 남편이 찔려 죽었다고 진술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손쉬운 진술인가.
“지금까지도 귓가에 떠나지 않는 그 끔찍한 소리, 여자의 변심….”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무사의 진실은 또 다르다. 타조마루에게 성폭행당한 부인이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데 환멸을 느껴 그 자리에서 명예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구. 모조리 거짓말이라구요….” 이 사건을 목격한 나뭇꾼은 세명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뭇꾼의 주장도 “나뭇꾼 또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발장수의 말 한마디에 진실성을 의심받게 된다.
죽음을 앞에 둔 산적의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남편을 잃은 부인의 말이 진실인가. 죽은 남편이 영매를 통해 한 말이 진실일까. “모든 게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건을 목격한 나뭇꾼의 말이 진실일까?
이 작품은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허무적 색채가 짙은 ‘랴쇼몽(羅生門)’과 ‘덤블 속’이란 두 단편을 엮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을 각색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세가지 시간대의 존재와 회상화면 구조를 처리하는 과감한 방식으로, 특히 환상적인 무당의 접신장면과 마치 관객들이 재판관인 것처럼 말하는 법정에서의 정면구도가 명장면. 연출가 구태환은 세겹의 구조와 각 장면들마다 표현양식을 변화시키는 시도를 통해 사실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특성을 갖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연극을 보다 보면 타악기를 통한 장면전환이나 구체적인 음향효과부터 전체적인 이미지 창출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게 엿보인다. 여기에서 네가지 에피소드를 드라마틱하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고리는 타악기. 타악기는 극에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관객들도 타악기 소리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바뀌는지 상상하는 등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는 훌륭한 매체가 됐다. 악사 한명이 무대 뒤 대나무 숲 속에 은밀하게 숨어 악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막과 막 사이의 긴박한 장면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극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줬다.
여기에 무대의상 부분에서도 일본 전통 의상 기모노와 무사 복장의 현대화, 또는 동양적인 이미지로 바꿔줌으로써 관객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했고, 이와 반대로 신분과 상황에 따라 배우들의 팔과 얼굴 등에 상징적인 문양을 분장함으로써 극 분위기를 살리고 다양한 조명 색으로 각 장면마다의 특성을 잘 표현해냈다.
이번 연극에선 출연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도 한몫 했다. 처음 대관한 공연장의 사정으로 공연장을 변경하면서 일부 출연진이 바뀌었지만 새로 투입된 배우들은 탄탄한 연기력을 갖췄다. ‘에쿠우스’와 ‘아일랜드’ 등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승호가 나뭇꾼으로 출연했고 ‘웰컴투 동막골’과 ‘라이방’ 등에서 호연한 이서림이 부인역을 맡아 열연하는 등 극을 더 짜임새 있게 만들어냈다. 산적이 부인을 성폭행하는 장면에선(극의 흐름상 있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이었지만) 과장된 몸짓이 아닌 실체적인 흐름으로 표현, 관객들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배려도 좋았다.
하지만 몇가지 부분에서 미흡한 점들도 눈에 띈다. 산적과 부인, 무사의 대사를 위한 상황 전환을 위한 암전 등이 자주 반복되면서 약간의 혼란감을 주기도 했고 관객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기 보다는 단지 극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하는 역할에만 머물러 아쉬움을 줬다. 부분적으로 약간 미흡한 면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지역 소극장 무대에서 오랜만에 스토리가 탄탄한 작품 한편을 만나 연극의 재미를 느끼게 된 점은 큰 수확이었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전문가 비평-안경모 연극평론가 /외피에 감춰진 속내 들여다보기
극단 秀가 공연한 ‘나생문(羅生門)’을 ‘나생문’식으로 들여다 보자. 먼저 관객으로 참여한 A씨의 진술.
그는 우선 ‘진실에 대한 논란으로 인간의 허식과 이기심’을 해부한 원작자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작가정신, 그리고 이를 영화화, 세계적인 유산으로 남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공을 높이 샀다. 또한 이를 연극적으로 풀어낸 극단 秀의 예술역량에 박수를 보내며 경기지역에서 공연된 많은 작품들 중에서 당연 수작(秀作)임을 내세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B씨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B씨는 평소부터 문화적 지역주의를 주장하던 이였다. 작품이 좋았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이 공연은 이미 지난 2003년부터 극단 秀가 제작해 온 레퍼토리다. 경기도가 연고가 아닌 서울 극단의 공연이 경기문화재단의 무대공연작품 제작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것 자체부터 문제다. 서울의 한 극단과 기획사의 투어공연에 왜 경기도민들의 혈세가 들어가야 되는가. 이처럼 경기도에서 공연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이 이뤄진다면, 경기도는 결국 서울의 문화적 ‘위성’ 역할 이상을 넘어서질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건 수작(酬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B씨의 의견에 대해 C씨가 발끈했다. 아니 그런 해묵은 지역주의가 경기도의 문화수준을 얼마나 낙후시켰는지 모르냐며, 상대적으로 문화역량이 연약한 경기지역 문화주체들이 현재 경기도 관객들의 예술적 기대감과 충족감을 전부 채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관객들을 실망과 허탈로 극장 밖으로 몰아낼 게 아니라 좋은 작품들로 끊임없이 관객들을 극장 공간과 친숙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냐고 했다. 더불어 경기도 혈세로 서울 시민들을 위해 공연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냐. 경기 도민들의 문화적 갈망을 채우는 게 더욱 중요한 게 아니냐며 역설했다. 게다가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극단들 중 절반 이상이 경기지역 문화주체들이라고 주장했다.
B씨와 C씨의 논란은 경기도와 서울을 넘어 로컬리즘(지역주의)과 글로벌리즘(세계화주의)에 대한 논란으로 확대됐고, 급기야 글로컬리즘(글로벌 로컬리즘)으로까지 번져갔다. 일본문화에 대한 수용방식과 비교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쟁까지 거치더니, 끝내는 경기지역 문화주체에게 경기문화재단 지원의 일정 비율을 항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지원-쿼터까지 그 논쟁을 이어갔다.
지켜보던 D씨 또한 이 논쟁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이 문제는 어쩌면 지원 자체의 모호함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 문화 주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원인지 경기 도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한 지원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했어야 했고, 그것이 제작 주체의 역량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 지원이 어떤 세부적인 예술 의도와 예술적 축적과정을 거쳤는지를 평가해야만 하며 이것이 경기 도민들의 문화향유를 위한 지원이라면 관객 계발을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활동으로 지원금이 활용됐는지가 주된 평가의 내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작품 외적인 부분으로 계속되자 E씨가 나섰다. 그는 공연예술작품으로서 공연의 예술적 측면 또한 온전히 평가돼야 한다면서, 숲을 통해 은밀한 훔쳐보기가 의도됐던 무대디자인적인 의도가 그저 그런 배경으로만 자리잡아 그 효과를 다하지 못했고, 많은 장면 전환을 타악장단의 힘으로 해결은 했지만 불편하면 모두 타악에 기대버리는 안이함이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때문에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템포가 기능적인 연출력 이상을 넘어서질 못했고, 연기자들의 편차 또한 여실히 드러나 원작이 주는 의미 이상 공연적으로 발전되진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F씨는 무사의 혼령들이 만들어내는 숲 속 장면이나 죽음 장면 등은 다소 익숙한 표현이긴 하지만 효과적이었으며, 타악의 리듬감 또한 기능상 요구되는 물리적 전환간극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으로 전환시킨 효과적인 선택이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인물 각각이 표현해야 할 극단적 이중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에선 아쉬움을 토로했다.
논란은 다시 예술의 내적 평가와 외적 평가에서 그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는 다소 사변적인 얘기를 거쳐 언급했던 작품의 의미와 한계, 관객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 지원과 이에 따른 결과론적 의미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되풀이됐다.
물론 ‘나생문’이란 작품에선 진실공방 그 모두가 ‘자신의 허의식으로 진실을 주관적으로 왜곡시키는 인간들에 대한 폭로와 반성’을 의도한 것이지만, 극단 秀의 ‘나생문’ 연극화에 대한 논란은 제작자와 관객, 지원자와 수혜자, 예술가와 비평가의 다차원적인 시각에 따라 상대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예술행위에 대한 논란일 수 밖에 없다. 모두의 진술이 결국 진실이 아니었던 나생문이야기에 반해 이 논쟁은 모두가 진실의 원에 한발씩 걸치고 있는 소위 시각차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논란 그 자체로도 계속돼야 하고, 더욱 거세져야 한다. 작품의 완성도에 박수치면서도 안이함에 경종을 울려야 하고, 관객들의 기쁨에 행복해 하면서도 더 새로운 관객들을 만나지 못했음에 좌절해야하며, 지원은 했지만 재정적 지원 이상의 문화적 성과에 채근해야 하고, 논의는 진행하지만 논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끝없이 긍정적 혜안을 찾아야만 한다. 논란이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사장(死藏)을 의미하니까.
죽음이 넘나드는 나생문의 터에서는 갓난 아이가 발견됐다. 지금은 비록 미약한 인간들이지만 미래에 대한 시험적인 믿음을 안겨주려고 했다. 그리고 극단 秀의 ‘나생문’ 연극에선 꽤나 많은 관객들이 발견됐다. 그 관객들이 경기도 문화주체들에겐 또 다른 시험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억측일까.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