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송 ‘관록’… 객석을 울리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사랑의 메시지에 어느새 눈물을 훌쩍이고 연극이 끝났을 때는 “브라보”와 함께 기립박수로서 도립극단 단원들의 연기에 감사를 표하게 만든다.
여기에 전무송 도립극단 예술감독의 무게와 연기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그래서 “역시 전무송”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연극 한편을 만나는 기쁜 하루였다.
경기도립극단이 구랍 28~3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공연장 무대에 올린 연극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원작 아서 밀러·연출 장용휘)’은 이같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느껴보기에 충분했다.
극은 시작부터 삶의 무게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피아노 선율이 관객들의 귓전을 때리며 흐르는 사이 엷은 막을 배경으로 차량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속을 삶의 무게에 짖눌려 지칠대로 지쳐버린 아버지 노만수가 양손에 가방을 든 채 무거운 발검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온다. 도시의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한옥 노만수의 집.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 것은 어둠 뿐이다. 출장 중 바람을 피운 아버지에 대한 불신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밖으로 떠돌던 큰아들 준형이 오랜만에 돌아온다. 가족들은 헬스클럽을 차려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준형을 격려하며 꿈에 부풀지만 이들 가족에겐 되는 일이 없다. 노만수는 36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쫒겨나고, 준형도 꿈을 이루지 못한다.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화해하려던 준형은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식당을 뛰쳐나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준형은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자신을 말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준형, “아버지 전 싸구려예요. 아버지도 싸구려구요! 저는 쓰레기예요! 인간 쓰레기! 쓰레기라구요”라고 말하며 아버지 품에 안겨 울음을 삼킨다. 준형을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노만수는 “그놈이 울었어. 애비한데 안겨 울었다니까”라고 말하며 흥분하고, 이윽고 노만수는 준형에게 보험금 1억원을 남겨주기 위해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달려나간다. 곧이어 들려오는 자동차 파열음….
연극에 빠져든 관객들은 준형이 “전 쓰레기예요”라고 외치며 아버지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기어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 만다. 기자도 어둠이 짙어질 때 재빨리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부인의 독백에 이어 공연이 모두 끝나고 무대가 다시 밝아지면 객석 곳곳에서 “브라보”가 터져 나오고 도립극단의 멋진 연기에 기립박수로서 화답하는 관객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20대부터 40~50대, 60대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 관객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경기도립극단의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고 난 뒤의 첫 감흥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잘 그려내 우리의 아버지란 존재적 가치를 한번쯤 더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사흘 동안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8번의 공연 모두 만원사례를 이룰 정도로 예전 도립극단이 무대에 올렸던 그 어느 작품보다 성공적이었다.
그 성공의 뒤에는 공연시간이 3시간이 넘어 지루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원작을 1시간 50분 정도로 줄였는데도 깔끔한 연출로 전혀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감동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장용휘 연출가의 연출력이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의 성공을 이끈 주역은 단연 아버지 노만수 역을 맡아 열연한 전무송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그의 관록의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아버지 품에 안겨 울며 용서를 비는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을 짜낸 준형 역의 한범희 연기도 빛이 났고, 부인 역의 김미옥 지도위원, 동생 준제역의 심완준, 그리고 비록 단역이긴 했지만 이승철(백부 역), 김종칠(병춘〃), 김길찬(달수〃), 이찬우(하원두〃), 윤상정(정부〃), 서장호(웨이터〃), 한수경(소영〃), 강혜련(가희〃), 임미정(미스조〃) 등까지 도립극단 단원들의 무르익은 연기는 극의 맛을 살려주는 조미료요 청량제였다.
도립극단은 전무송 예술감독이 취임한 이래 2007년 한해동안 많은 실험과 수련과정을 거쳤다. 러시아 연출가를 초빙해 러시아의 연극기법을 몸에 익히는 수련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물로 ‘엘리자베타 밤’과 ‘미운오리새끼(덴마크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국내 관객들에게 호평받았으며, 새롭게 다듬은 ‘눈물꽃 기생’으로 러시아 관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이번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을 위해 3개월 동안 노력한 결실로 나타났다. 이번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리들의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원작의 줄거리는 그대로 가져왔지만 상황이나 배경 등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한국적 상황이 잘 녹아져 있다. 그러면서 푸근하면서도 한국적 정서에 맞는 잔잔한 감동까지 전해 주고 있다.
무대 세트 또한 극의 맛을 잘 살려주고 있다. 사방이 높은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은 노만수의 아름다운 한옥집은 물론 창살문은 한국적인 미를 잘 살려줘 정답게 다가왔고, 1~2층으로 구분된 세트는 극의 무대를 양분하면서도 극 전체의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여기에 조명은 극의 맛을 살려주는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아마도 이번 ‘세일즈맨의 죽음’ 성공은 이같이 각계에서 내로라 하는 실력가들이 총출동해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는 3월 의정부 공연에 이어 한해 동안 도내를 순회하며 멋진 공연을 펼쳐주기를 기대하면서 다시한번 도립극단 단원들의 활약에 박수를 보낸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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