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박해 속에도 성장한 천주교… 100여년간 순교자 1만명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발적 태동과 순교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다.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신자 수는 1천 명에 달하게 됐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집권층은 천주교를 반왕조적 종교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박해는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1년 만인 1785년 3월부터 시작됐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가 진행됐다. 또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신해(1791), 을묘(1795), 을해(1815), 정해(1827), 경신(1860) 박해와 1901년 제주교난 등 잇단 수난으로 교회가 창설된 뒤 100여 년 동안 1만 명이 순교했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천주교도 박해 사건으로는 정조 15년에 발생한 신해박해(1791)가 있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채 천주교 의식을 따른 일로 처형된 사건이다. 이는 유교와 천주교가 조상제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밝힌 시발점이 됐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대대적인 천주교도 숙청이 시작된다. 이른바 신유박해(1801)다. 이 때에 최초의 외국인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가 죽임을 당했고, 천주교 사상 개척의 1인자로 손꼽히는 권철신이 심한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등 300여명이 순교했다. 그러다 1839년(헌종 5년) 제2차 천주교 박해로 불리우는 기해박해가 발생했다. 이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안동김씨을 몰아내 정치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당시 전국적으로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됐다. 1866년(고종 3년)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탄압이었던 병인박해가 있었다. 4년간 지속된 박해는 8천명에 달하는 신도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처럼 당대 천주교인들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죽음까지 불사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씨앗을 심었다. 박성훈기자

낮은자 위한 순례길… 세월호 유가족·위안부 할머니 만난다

12억 세계 가톨릭교인의 수장이자 상징적 인물인 프란치스코(Francesco) 교황이 방한했다. 제265대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지난해 3월, 제266대 교황이 됐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수적 성향의 전임 교황과 달리 개방적인 행보를 보이며, 빈자(貧者)의 벗으로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이 교단은 물론 한국사회 전체에 커다란 관심과 반향을 일으키는 것도 교황의 인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교황의 방한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25년 만이자 취임 후 첫 아시아 국가 방한이다. ■ 첫날, 박 대통령과 면담 후 한국주교단 만남 교황은 공식 일정은 전용기 탑승부터 시작한다. 현지시각으로 13일 오후 4시, 교황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출발해 14일 오전 10시 30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다. 수행에는 교황청 국무원장인 피에르토 파롤린 추기경과 인류복음화성 장관 페르난도 필로니 추기경 등 30여 명의 주교가 맡는다. 공항을 나와 교황이 처음 가는 곳은 청와대 인근 주한교황청대사관. 검소한 인품을 반영하듯 새로 들여놓은 물건 없이 방 안에 있는 침대와 옷장을 그대로 사용한다. 교황은 이 곳에서 개인 미사를 본 뒤 오후 3시 45분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다. 이어 오후 5시 30분 청와대로부터 약 12㎞ 떨어진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이동해 한국천주교 주교단과 직원들을 만나 연설하는 것으로 첫날 방한 일정을 끝낸다. ■ 둘째날,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뒤 세월호 유가족 위로 면담 눈길 15일. 우리에게는 광복절이지만, 가톨릭에서는 성모승천대축일이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일생을 마친 뒤 하늘로 들어올림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신자라면 일요일이 아니라도 반드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 의무 대축일이다. 교황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에서 준비한 전용헬기를 타고 대축일이 열리는 대전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한다. 이날 미사에는 5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가 운집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눈여겨볼 것은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 학생들과의 면담이다. 교황은 미사가 끝난 뒤 제의를 갈아입는 제의실에서 이들과 공식 만남을 가진다. 교황은 이날 유가족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위로를 전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의 조속한 통과와 관련해 교황의 관심을 촉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은 교황 입국부터 명동성당 미사 집전까지 전 일정을 교황의 지근거리에서 동행할 예정이다. 교황은 이어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자대표 20명과 함께 점심식사를 가진 뒤 오후 5시 30분 대회에 참여하는 6천여 명 전원을 만나기 위해 솔뫼성지를 찾는다. 이 곳은 한국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교황은 이 곳에서 각국 청년 3명에게 하느님께 받은 소명, 종교 박해가 발생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선교, 인생의 가치관 등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 셋째날, 광화문광장서 124위 시복식 30만 명 운집 예상 가장 큰 규모의 의식이 있는 날이다. 바로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되는 124위 시복식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시복식에서 교황은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1.2㎞ 구간에서 카퍼레이드를 한다. 이어 광화문광장 북쪽 끝에 설치된 제단에 올라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를 집전한다. 이날 시복식에는 가톨릭 신자와 전 세계 주교 등 최대 30만 명이 몰릴 예정이다. 시복식이 끝난 뒤 교황은 3시 30분 대표적 복지시설인 충북 음성 꽃동네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교황은 장애인과 한국 수도자 4천500여 명,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대표를 차례로 만난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그린 교황의 초상화, 손이 없어 발가락으로 접은 종이학을 교황에게 선물하고 환영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 넷째날, 아시아청년대회 참가 폐막미사 진행 교황은 오전 11시,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을 간다. 교황 방한의 목적이기도 하다. 미사의 중심 공간인 제단은 읍성 서문 옆에 조성된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죽어서 나간다는 읍성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여겼다. 그 문 옆에 교황이 자리하고 청년들은 교황과 마주봄과 동시에 천국 문을 바라보며 기도하게 된다. 교황이 미사를 드릴 제대는 23개국 청년들이 장식한 십자가를 조립해서 만든다. 23개국 청년들과 교황이 함께하는 이날 미사는 다양한 언어로 이뤄진다. 성경 독서는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신자들의 기도는 일본어, 영어, 힌디어, 한국어 등으로 낭독된다. 그 밖의 기도문은 교황은 라틴어로, 신자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바친다. 아시아청년대회의 폐회사가 될 교황의 강론은 영어로 이뤄질 계획이다. 최대한 많은 청년에게 통역 없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내린 결정이다. ■ 마지막, 서울 명동성당서 미사 집전 끝으로 대미 18일 오전 9시 교황은 서울 명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7대 종단 지도자를 만난 뒤 9시 45분 방한의 마지막 미사인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명동성당을 찾는다. 이날 교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등이 참석하는 미사를 집전한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명동성당 맨 앞줄에 앉아 교황의 말씀을 듣는다. 또 미사에는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과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용산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노동자들도 참석한다. 북측 신도들의 방남은 북측의 거부로 아쉽게 무산됐다. 하지만 교황이 625전쟁 전 북한에서 서원(誓願)해 사목활동을 하던 수녀들을 미사에 초청한 것으로 알려져 성사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 교황은 미사를 마친 뒤 낮 12시45분 서울공항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방한 일정을 모두 끝낸다. 박광수기자

철제 십자가 걸고 청빈한 삶…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

버스 타고 호텔 숙박료 직접 계산 절약정신 투철 바깥으로 나가는 사목 중요하게 여겨 노숙자 등 돌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베르고글리오로)다. 남미 출신의 베르골료 추기경은 어째서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다. 그럼에도 예수회가 아닌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설립자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1182~1226)를 따라 교황명을 지었다. 사실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교황은 나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평화,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조물과 그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저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명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이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평생 걸었던 길을 따라 가난의 영성을 받드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확실한 것은 이 이름에 현 교황의 재임 활동 밑그림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 12억 가톨릭 인구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취임 직후부터 작은 것들을 택하며 청빈한 삶을 실천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교황이 되기 이전부터 그러했다. 지난 200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175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을 때 한밤중에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이 바로 베르골료 추기경이었다. 소방차도 응급 구호차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교회가 부패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실제로 교황은 베르골료 추기경 시절에 우리나라 시청앞 광장과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 있는 콘스티투시온 광장에서 넝마주이의 수레를 제단 삼아 거리 미사를 봉헌하고, 인신매매 희생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등 바깥으로 나가는 사목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뿐 아니라 주교와 추기경 시절 손수 요리를 즐겼고, 버스와 지하철을 애용하면서 대중들에게 다가갔으며 이따금 몰래 밤거리로 나와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함께 먹었다. 그 마음, 그 실천은 신분이 달라졌다 하여 변하지 않았다. 교황이 된 이후에도 전용 리무진 대신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자신의 가방을 스스로 챙기고, 호텔 숙박료를 직접 계산하고 교황청에서 유별나다 싶을 만큼 절약정신이 투철하다. 사도궁전 대신 사제용 숙소를 거처로 정한 교황, 생일이면 노숙자들을 숙소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하는 교황, 장애인이나 병자가 보이면 발걸음을 맞추고 스스럼없이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교황, 아이들의 장난을 할아버지의 미소로 지켜봐주는 교황, 교도소에 수감된 무슬림 소녀의 발을 씻어주는 교황, 마피아를 공개적으로 파문한 교황, 순금십자가 대신 철제십자가를 가슴에 건 교황이 바로 프란치스코다. 보통 카리스마가 아니다. 보통 사랑이 아니다. 교황의 사랑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교황의 사랑에에는 과거분사도 미래진행형도 없다. 오직 현재에만 집중하고 실천한다. 남북한의 여전한 냉전 구도,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의 갈등, 국내적으로는 경제지수의 흑자 행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양극화된 계층 간의 격차, 거기에다 국가 운영 시스템 전체의 패착이 송두리째 드러난 세월호 침몰 같은 참혹한 대형사고가 일어나는 등 우리 국민들이 심한 충격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 곁을 제일 먼저 찾아가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방문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어떠한 위로화 희망의 복음을 들려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 1963년 산미겔 시 성 요셉 대신학교 철학사 학위 취득 ▲ 1967~1970년 산미겔 시 성 요셉 대신학교 신학 전공 ▲ 1986년 3월 독일에서 박사 학위 취득 수품 및 경력 ▲ 1969년 12월 13일 사제 수품 ▲ 1992년 6월 27일 주교 수품 ▲ 1997년 9월 27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부교구장 주교 ▲ 1998년 2월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 2001년 2월 21일 추기경 서임 ▲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 강현숙기자

124위 중 13人… 경기도에 뿌리내린 순교정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는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거행한다. 시복식이란 신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들을 가톨릭교회 공경의 대상이자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공식 선포하는 일이다. 교황이 순교자의 땅을 찾아 직접 시복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관례적으로 시복미사는 바티칸에서 교황청 시성성(하느님의 종들의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기관) 장관 추기경이 교황을 대리해 거행해왔다. 이날 교황은 시청에서 광화문 앞까지 퍼레이드하며 한국 신자들과 인사한 뒤 광화문 삼거리 앞 북측광장에 설치될 제대에서 시복미사를 집전한다. 미사 전에는 한국 최대 순교성지이자 이번에 시복될 124위 복자 중 가장 많은 27위가 순교한 서소문 성지도 참배한다. 광화문광장이 시복미사 장소로 결정된 것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초대교회 순교자들이 고초를 겪고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기 때문. 또, 광화문 인근 북촌은 이번에 시복되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성직자 없이 믿음을 이어가던 조선 땅에 처음으로 파견되어 초기 공동체를 꾸려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국 가톨릭 신앙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시복 미사에는 천주교 신자 30여만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는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로 신분사회의 사슬을 끊고 신앙 안에서 인간 존엄과 평등, 이웃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정신을 몸소 실천한 분들이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한국 교회의 시작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초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수가 더해져 초기 한국 순교자들이 늘어나게 됐고, 그들의 신앙은 한국 교회와 그 큰 선교 열정의 활력을 드러내는 눈부신 증언이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신유박해(1801) 순교자가 53위(42.7%)로 가장 많다.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로는 신해박해(1791) 3위, 을묘박해(1795) 3위, 정사박해(1797) 8위다. 신유박해 이후 순교자로는 1814년 1위, 을해박해(1815) 12위, 1819년 2위, 정해박해(1827) 4위이며, 기해박해(1839) 18위, 병인박해(1866~1888) 20위다. 순교지별로 한양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경기도 12위, 강원도 3위의 순교자가 나왔고, 한양에서 가장 많이 순교했다. 특히 경기도의 경우 감영과 여주, 양근, 포천, 죽산, 광주 남한산성 등지에서 순교했다. 124위 중 경기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13명으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박경진 프란치스코, 오 마르가리타, 원경도 요한, 윤유오 야고보, 윤점혜 아가타, 이중배 마르티노, 정광수 바르나바, 정순매 바르바라,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한덕운 토마스, 홍 인 레오가 그들이다. 124위 순교자들은 신앙의 탁월한 영웅성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며 순교를 받아들였다. 그들 가운데 정조 15년 (1791년) 신해박해로 한국의 첫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는 하느님을 만민의 위대하신 아버지로 여기며 신앙을 고백했다.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선교사를 통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던 시절의 참다운 첫 희생이었기에 당연히 윤 바오로 순교자가 이 한국 순교자 그룹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강현숙기자

조숙·조용삼 후손 조병옥씨 “순교자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 살 것”

그것은 영광이자 감격이었다. 동시에 커다란 무게였다. 박해의 역사는 무관할 듯 했던 한양 조씨의 족보 안에서도 꿈틀됐다. 깨달음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1993년 일이다. 당시 수원교구 양평본당 총회장을 맡고 있던 조병옥씨(필립보ㆍ67)는 본당 설립 50주년 사(史)를 집필 중이었다. 지역 가톨릭 역사 정리가 작업의 취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 씨의 계보가 됐다. 사료 정리 중 집안 어르신들의 이름이 나왔다. 족보에 명확히 기록된 이름들이었다. 이와 함께 몇 명에 불과할 것이라 여겼던 양평지역 순교자의 이름도 30명 넘게 쏟아졌다. 이에 조 씨는 넓은 연대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성당 역사 작업을 접고, 양근신앙 200년 사(史) 만들었다. 이번 교황 방문에 시복되는 124위의 순교자 중에서 3위가 조 씨의 집안 어르신이다. 고조부 격인 조숙(베드로ㆍ1787~1819) 순교자와 그의 동정부부인 권천례(데레사ㆍ1784~1819) 순교자, 집안사람으로 확신하지만 아직 족보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조용삼(베드로ㆍ?~1801) 순교자까지 모두 세 분이다. 이들 모두 자신의 신앙을 순교로서 증명했다. 교구에서도 이를 인정받아 이번 시복식에 조숙ㆍ조용삼의 후손으로서 부인 노외자씨(엘리사벳ㆍ64)와 아들 태형씨(요셉)를 비롯한 자녀들과 동생 조병오씨(에프라노)씨 부부, 사촌 조병서씨(프란치스코) 등 가족 7명이 VIP로 참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시복식을 참관하게 된다. 선대가 줄줄이 시복되는 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두려움과 부담도 크다. 주변에 내색조차 못했다. 솔직히 말하기도 조심스러웠다. 위대한 선대의 후손이지만 그에 걸맞은 인품과 신앙을 가졌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기가 됐다. 조 씨의 선대가 감내했던 박해는 고스란히 신앙을 추동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 시기, 선대는 순교를 준비하며 모진 고문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감각을 마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순교는 하느님의 은총과 믿은 없이 불가능한 것이라 느낍니다. 새삼 부끄러워지는 부분이죠 핍박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맥은 조 씨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다. 남은 것은 부끄럽지 않은 신앙을 자손에게 넘겨주는 일이라 생각한단다. 그것이 생의 과제이자, 이번 시복식을 통해 약속될 신앙의 증거라고 믿는다. 박광수기자

교황 세월호 생존자 유족 면담한다

교황 세월호 생존자 유족 면담 오는 14일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과 생존 학생들을 직접 만난다. 지난 5일 천주교 교황방한준비위원회는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교황께서 8월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석하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생존 학생들을 직접 면담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미사가 끝난 뒤 제의실(祭衣室)에서 세월호 생존 학생과 유족들을 따로 만나 참사의 충격과 슬픔을 위로하고 이들의 얘기를 들을 계획이라고 천주교 관계자는 전했다. 이에 따라 교황과 세월호 생존자, 유족이 서로 손을 맞잡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방한준비위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시복식 장소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대화하고 있으며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방준위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세월호 가족들에게 시복식 행사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해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구체적인 논의 내용은 나중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방준위는 오는 18일 교황이 명동성당에서 집전할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초청한 북한 천주교 관계자들로부터 참석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방준위는 북한 쪽이 여러 사정상 참석이 어렵다고 알려왔다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어 불참이 확실히 결정된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hojun@kyeonggi.com 사진 = 교황 세월호 생존자 유족 면담

[남한산성 세계를 품다] 5. 세계유산 등재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약속을 지키는 겁니다.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이 됐다는 것은 그 가치를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순간 기쁨의 박수와 함께 의무도 받게 된다. 부여 받은 의무라는 것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자랑이고 세계의 유산인 남한산성을 더 완전한 유산으로 가꾸고, 다음 세대에 물려 주어야 하는 약속말이다. 이를 위해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6년마다 남한산성의 상태에 대한 정기보고를 세계유산위원회에 해야 한다. 또 남한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변화가 발생할 경우 보존현황을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결국 등재 이후의 관리 방향이 중요하다. 마냥 관광 위주로만 치우친다면 자칫 해당 유산을 훼손하고 격을 낮추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 세계유산이 자연적 또는 원인으로 인해 심각한 위협에 봉착하게 되면, 세계유산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List of Endangered World Heritage)에 포함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협으로 인해 등재 시 확인 및 인정됐던 세계유산의 보존상태와 가치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경우, 이 유산은 세계유산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도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목록을 만드는 목적에 대해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위험에 처한 유산의 복구나 보호활동 등을 통해 파괴훼손을 근본적으로 막고,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에 대한 국제적 협력이나 각 나라의 보호활동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2014년 6월 기준으로 세계유산은 161개국이 보유한 1천7건이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가 50건으로 가장 많고 중국 47건, 스페인 44건 그리고 한국 11건 등이다. 즉 한국의 경우 남한산성을 비롯해 10건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초대형 전시 수도이자 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 후손들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산인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한 남한산성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지난 7월 25일 수원 라마다프라자 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고 남한산성의 가치를 함께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으로 다른 나라의 세계문화유산 보존 사례를 살펴보고 남한산성의 향후 보존방안을 구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됐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이번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바탕으로 산성 내 지역 주민과 함께 남한산성의 역사적 의의와 세계유산적 가치를 발전시킬 프로젝트를 발굴해나갈 계획이다. ■ 중국이스라엘호주인도 등 세계유산 우수 보존관리 사례 발표 세계유산 우수 보존관리 사례연구를 주제로 한 이날 심포지엄에는 푸에르토 리코, 중국, 이스라엘, 호주, 인도 등 5개국의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위원들이 참가해 각국의 세계유산 보존관리 우수사례를 살폈다. 먼저, 푸에르토 리코(미국령) 국제성곽 군사유산 학술위원회(ICOFORT) 밀라그로스 플로레스 로만 위원장은 기조연설에 나서 성곽세계유산지 우수 보존관리 사례를 발표했다. 밀라그로스 플로레스 로만(ICOFORT 위원장)은 성곽군사유산은 본래의 기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지는 않지만 성곽군사유산은 항상 우리 유산의 일부로 존재하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할 때 성곽군사유적의 보존관리는 전세계적인 난제로 남아 있다며 이코포트(ICOFORT)의 주요역할은 이코모스를 도와 성곽군사유산 관련 세계유산지에 대한 유네스코 자문기관으로서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 1천여 개의 세계문화유산 중에 성곽군사유산은 100개 미만으로 남한산성도 이에 해당된다며 지역사회와 지속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계획수립과정에서 지역사회가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어 구오 잔 ICOMOS 부위원장, 기오라솔라 前 ICOMOS 재무총장(현 이코모스 이스라엘 위원회 위원), 제인 헤링턴 ICOMOS 호주위원, 구르밋 상가 라이 ICOMOSI 인도 부위원장, ICOMOS 한국 집행위원인 박소현 서울대 교수와 최재헌 건국대 교수의 주제 발표가 각각 진행됐다. 중국 출신의 구오 잔 ICOMOS 부위원장 현재 전세계적으로 1천7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돼 있는데 그 가운데 46개가 위기에 기한 처한 세계유산 목록이 됐다며 이는 등재 이후의 모니터링은 세계유산에 대한 우리의 주요 의무가 되어야 한다며 북경 고궁박물관 세계유산 모니터링센터 등 중국 내 세계유산에 대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소개했다. 기오라솔라 前 ICOMOS 재무총장(현 ICOMOS 이스라엘 위원회 위원)은 남한산성이 한민족의 생존을 책임진 최후의 근거지로 건설된 만큼 이스라엘의 마사다(Masada) 요새처럼 마사다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연결해 장애인을 위한 배려를 한 것처럼 남한산성도 이에 조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제인 헤링턴 ICOMOS 호주위원은 포트아더역사유적지, 탄광역사지구, 캐스케이드 여성 공장 유적지 3곳의 유산관리를 소개했으며, 구르밋 상가 라이 ICOMOSI 인도 부위원장은 2007년 세계유문화유산에 등재된 인델리의 붉은 요새의 종합보존관리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최재헌 ICOMOS 한국 집행위원(건국대 교수)은 한국의 성곽이 중국과 일본의 성곽과의 차이점을 고찰하면서 아시아 성곽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유산 주제프로그램으로 격상시켜 제도화된 상호협력 체계를 구국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 국내 전문가 종합토론시간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제언 쏟아져 세계 각국 전문가들의 주제 발표 후에는 남한산성 보존관리를 위한 제언을 주제로 ICOMOS 집행위원인 이혜은 동국대 교수가 좌장을 맡고 박재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 이천우 문화재청 전문위원, 김준혁 한신대 교수, 최종호 한국전통대 교수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가 진행됐다. 박재광 건국대학교 박물관 학예실장은 남한산성만의 차별화된 문화유산 활용 전략이 수립되어야 하며 최근 세계문화유산의 관광을 통한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자칫 보존 환경이 흐트러지는 상황도 예견되고 있다며 관광형태, 관광자원의 추세를 고려해 하드웨어 중심의 관광이 아닌 교육문화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방식의 휴먼웨어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천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건축문화재 조사위원은 남한산성은 12.3㎞에 달하는 대규모 산성이므로 부분적 보수를 시행할 경우 행정체계상 보수가 늦어지기 마련임으로 사업단에서 직영 보수단을 운영해 상시로 관리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박물관 건립과 남한산성내의 수어청 무예, 승군의 무예, 병장기 제작, 남한산성 소주, 효종갱 등 음식, 장승 솟대 만들기, 전통 복식 등 다양한 무형유산을 연구하고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종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는 1999년 10월 멕시코에서 열린 제12차 이코모스 총회에서 채택한『국제 문화 관광 헌장: 주요 유적지의 관광 관리』의 일부인 제5원칙에 주목한 가운데 현재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에서는 총 30건의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성인, 청소년, 어린이, 가족, 학교연계, 행궁체험, 문화나눔을 시해하고 있으나 정책 입안자, 기획가, 연구원, 설계인, 건축학자, 해설가, 보존 운동가, 관광산업 운영자 등을 위한 이해당사자 및 재직자 특별프로그램을 신규과정과 정기 보수 과정 프로그램을 기획개발평가해 실행평가환류할 것을 제안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김시범기자 sbkim@kyeonggi.com

[남한산성 세계를 품다] 4. 남한산성 효종갱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단순 생존을 위한 최소단위를 뛰어 넘어서 사회ㆍ역사ㆍ종교ㆍ환경적으로 훨씬 더 복잡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음식문화는 모든 문화의 근간이 된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그 문화도 달라진다. 그래서 음식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음식은 문명의 뼈대가 되는 필요충분조건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특히 음식문화는 사회와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21세기를 음식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전 인류가 지켜야할 공동유산으로 거듭난 남한산성도 그러하다. 300년간 광주 유수부의 읍치였던 남한산성에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한 역사성과 전통성을 가지고 있는 전통음식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 효종갱(曉鐘羹)이다. 허나,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남한산성을 닭볶음탕으로 유명한 유원지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효종갱이라는 좋은 음식문화 컨텐츠(메뉴)가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홍보 등은 많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 해장국2012년 상표출원 남한산성의 명물 효종갱은 양반들의 해장국으로 새벽 효(曉), 쇠북 종(鐘), 국 갱(羹)자를 쓴다. 밤새 끓이다가 새벽녘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33번 울리는 파루(罷漏)의 종이 울려퍼지면 남한산성에서 사대문 안의 대갓집으로 배달되던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 해장국이라고 할 수 있다. 1925년 조선말 문신이자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는 효종갱에 대해 광주 성내 사람들이 잘 끓인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쇠갈비, 해삼, 전복에 토장을 풀어 온종일 푹 곤다. 밤에 국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무렵에 재상의 집에 도착한다. 국 항아리가 그때까지 따뜻하고 해장에 더없이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몸에 좋은 귀한 재료들을 넣어 하루 종일 푹 고아낸 후 새벽부터 이고 지고, 4시간에 걸쳐 사대문안 양반댁 밥상까지 보내져야 했으니 그 공이며 수고가 이만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조선시대 최초의 뇌물음식이었단 설도 있다. 효종갱은 소갈비, 해삼, 전복, 배추속, 콩나물, 표고버섯 등을 넣고 하루종일 끓인 것으로, 맛과 영양면에서 최고라 할만한 음식이다, 특히 효종갱을 해장국의 으뜸으로 손꼽는 이유는, 갈비국에 영양가가 높은 해물과 버섯을 넣고 오래도록 끓여내어 소화가 잘되고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많이 쓰지 않아 담백하고 부드러워서 속을 달래는 데 으뜸이기 때문. 그리고 효종갱을 끓이는 조미료의 역할을 한 중요한 토장은 된장을 의미하므로 이 또한 자체로 중요한 식재료였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에 따르면 그간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효종갱은 산성내 일부 주민들이 명절이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 요리해서 먹고 있으나 조리법이 체계적이지 않고 많이 변형된 채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경기도와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지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문헌을 토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을지대학교(신미혜 조리학과 교수)와 산성 내 상인들과 힘을 합쳐 체계적인 조리법을 개발했다. 이후 효종갱은 2012년 8월, 역사 문화적 고유성 인정받아 특허청으로부터 남한산성 효종갱으로 상표출원을 획득했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상표특허출원 등록을 계기로 남한산성 효종갱 상표를 산성내 음식점에서는 명의를 자유롭게 사용해 영업할 수 있게 지원하는 등 효종갱의 대중화, 상품화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 푸드 스토리텔링을 통한 대중화특화성 절실 남한산성은 서울과 가깝고, 자연 경관이 매우 뛰어난 지역이다. 방문객은 연간 350여만 명에 이르는 수도권 최대의 국민관광 명소이다. 단위 면적당 방문객으로 따져도 국내 최고 수준이다. 허나, 효종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는 곧 효종갱이 대중화와 특성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산성을 찾는 이들에게 남한산성 하면 뭐가 떠오르나라고 물어보면 열의 아홉은 닭백숙이라 대답한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가장 발달한 분야가 바로 음식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는 남한산성내 마을의 음식거리를 남한산성 전통 음식마을로 지정했다. 현재 전통 음식마을은 좁은 면적에 동종 음식을 판매하는 음식점이 70여 개가 집적돼 있는 실정이다. 즉 주민들은 현재 닭(백숙), 오리(백숙 및 로스)를 활용한 메뉴를 주로 제공하고 있다. 식당간 경쟁도 심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남한산성의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로 문화적 기대가 없는 실정이다.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닭과 오리를 삶아 파는 형태의 백숙집이 가장 많고 그 외 한정식 집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러한 메뉴는 전국 어디에서나 파는 메뉴이기 때문에 남한산성만의 특성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미 과거부터 효종갱이라는 스토리와 역사를 가진 남한산성만의 특별한 음식이 있으므로 이를 잘 활용해서 특성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음식에 이야기를 입히는 푸드 스토리텔링이 확산 추세다. 식재료뿐만 아니라 조리법이나 식당 이름까지 이야기로 승부하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전략이다.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을 사로잡을 만한 남한산성의 대표 음식문화 콘텐츠(메뉴)가 있어야 한다. 음식문화는 끊임없이 변한다. 시대에 맞춰 재해석재창조되지 못하면 외면당한다. 또 음식문화라는 것은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효종갱의 대중화와 특성화는 남한산성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그리고 귀한 아이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점으로 남한산성만의 대표 음식브랜드화가 절실하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 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인터뷰 효종갱 판매하는 고향산천 성백일 사장 맛ㆍ효능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 커 명맥 이어갈 것 남한산성에 가면 효종갱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있다. 바로 한식전문점 고향산천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70여 개의 음식점이 영업 중이지만 효종갱을 판매하는 곳은 고향산천이 유일하다. 충청도 출신인 성백일(48) 사장은 지난 1991년 남한산성에 식당을 오픈했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번듯한 회사를 그만두고 남한산성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성 사장은 남한산성에서 장가도 가고, 두 딸의 아빠가 되고, 식당도 나름 자리를 잡으면서 그렇게 23년을 보냈다. 위기도 있었다.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성 사장에게 남한산성의 삶의 터전이자, 건강을 되찾아준 아주 특별한 곳이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찾는 이들에게 최고의 맛을 선물하게 위해 매일 신선한 재료와 청결한 위생, 맛 그리고 친절과 서비스까지 5박자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손도 많이 가고 재료값도 비싼 효종갱을 판매하는 것도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자부심과 책임감 때문이다. 효종갱은 맛과 효능,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큰 메뉴이지만 식당 주인 입장에선 재료 구입부터 손질, 국물내기 등 무척 까다로운 음식이에요. 현재 한 그릇에 1만2천원에 판매 중인데 재료 단가도 높고, 콩나물, 배추 등 쉽게 상하는 재료가 많다보니 국물 관리도 쉽지 않아요. 2년 넘게 끓이고 버리고, 끓이고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고향산천만의 효종갱 레시피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지금도 닭, 오리 메뉴보다 많이 팔리는 건 아니지만 주말에도 10그릇 내외는 꼭 팔려요. 성 사장 입장에서 효종갱은 수익적으로 효자녀석(?)은 아닐지라도 효종갱의 명맥과 맛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에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장사를 하고 있다. 고향산천의 효종갱은 화학조미료를 뺀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단연 압권이다. 워낙 맵고, 짜고 자극적인 입맛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효종갱의 국물 맛이 좀 밍밍하거나, 싱겁다고 할 수 있다. 밍밍하거나 싱겁다 느낄 수 있는 효종갱을 한입, 두입 먹다 보면 어느새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맛과 해산물과 버섯향의 풍미가 어울려 입안 전체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성백일 사장은 효종갱의 대중화와 브랜드화를 위해선 남한산성내 식당 관계자 그리고 전국의 다양한 분야의 스토리텔링 관련 전문가, 음식전문가, 축제담당자 등이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플랜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효종갱 재연 레시피 재료 소갈비, 해삼, 전복, 배추 속대, 콩나물, 표고버섯, 송이버섯, 무, 대파, 마늘, 생강, 양파, 건고추, 들깨가루, 된장 만드는 법 ① 소갈비를 손질하여 향신채소를 넣고 끓는 물에 튀하여 건져낸 다음 다시 찬물을 붓고 장시간 끓인다 ② 전복은 껍질에서 기둥을 떼어내고 내장과 해캄을 손질하고 썰어 놓는다 ③ 해삼도 불려서 삶기를 3~4회하여 부드러울 때 건지고 채 썬다 ④ 송이는 흙을 털어내고 길게 썰고 표고는 기둥을 따내고 채 썬다 ⑤ 배추속대는 끓는 물에 데치고 물기를 짜서 된장에 버무린다. ⑥ 소갈비가 어느 정도 끓으면 건져내고 한입크기로 썰어 놓는다 ⑦ 육수는 간을 맞추고 전복, 해삼 우거지와 살코기를 넣고 맛이 베어 나도록 끓인다 ⑧ 한소끔 끓으면 콩나물과 표고버섯 등 부재료를 넣어 끓인다 ⑨ 나머지 양념을 넣고 끓여 뚝배기에 담아 낸다 <출처: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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