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 유산 안에 살아 숨 쉬는… ‘구국 항쟁의 魂’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 가리. 민중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렀던 노래 갑오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리다. 갑오년(1894)에 조정의 부패를 척결하고 정치를 개혁하여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면, 다음해 을미년(1895)도 허송세월을 보내고 병신년(1896)이 되면 나라조차 지키기 어렵다는 민중들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찾았던 날은 몹시 더웠다. 칠월 하순, 장마철이고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휴가철인데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리라. 맨 처음 둘러본 것은 최근에 복원한 행궁이다. 새로 지은 건물 사이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눈에 들었다. 병자호란과 을미의병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행궁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았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업을 결정했다. 전라도에 관민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관군과 합의했던 것이다. 중앙 정부도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오경장을 시행했다. 양반상놈을 갈라 차별하던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등 민들의 요구를 정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민중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그 배후에 일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미년(1895) 10월,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의 칼날에 죽임 당했다.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궁궐에 갇힌 처지가 되었다. 12월에는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고종이 제일 먼저 상투를 잘랐다. 이듬해 2월에는 온건개화파로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총리대신 김홍집이 대낮에 큰길에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 이 무렵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훈련대 대대장 이두황이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는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을 총지휘하여 패퇴하는 농민군을 보이는 대로 살육했던 토벌대장이다. 1896년 정월, 전국의 유생들이 총을 들었다. 매관매직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지만, 왕비를 살해한 일본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예의의 나라 조선의 유생들에게 단발령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작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전력을 숨기고 의병대열에 합류했다. 단발령을 공포한 다음날, 서울에 있던 김하락을 비롯한 구연영신용희 같은 젊은 유생들이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화포군을 포섭하여 이현에 진영을 설치하고 안성 의병과 연합하여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했다. 병신년 정월, 이천의병들은 백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다시 결집한 2천여 명의 의병들은 박주영을 새로운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1월30일 활동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남한산성은 서울로 진공할 수 있는 최적의 요새였다. 산성에는 심진원이 이끄는 광주 의병이 벌써 진을 치고 있었고 이승룡이 이끄는 양근 의병도 합세하였다. 사기는 드높았다. 당시의 분위기를 의병장 김하락은 《진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명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소금이 수백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대완기(大琬器)가 수십문, 천자포지자포도 역시 수십문, 천보총이 수백자루였고, 나머지 조총도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탄약 철환이 산더미 같았다.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경기도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중앙병력을 급파했다. 친위대 1개 대포중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3월 초부터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관군을 송파까지 추격하여 대포를 빼앗았다. 당황한 정부는 강화도를 지키던 병사 300여명과 일본군을 증파했다. 그래도 거듭 패배하자 최정예 혼성대대 병력을 남한산성으로 보냈다. 관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수차례 성을 공격했으나 의병의 강한 반격을 받고 물러섰다. 3월22일 새벽,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으로 관군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장 박준영이 낮에 병사들에게 수고한다며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이는 잔치를 벌인 다음 모두 곯아떨어진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박준영에게 광주 유수, 김귀성에게 수원 유수를 주겠다는 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대장들의 배반으로 의병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의병들은 후퇴하는 중에도 배신자를 처단했다. 김귀성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박준영 3부자를 끌어내어 총살했다. 의병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갈 때 관군들이 빨리 달아나라. 일본놈을 만나면 죽는다며 호송해 주었다. 이후 김하락은 이천 의병들을 이끌고 영남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연합전선을 펴고 활발하게 전투를 벌였다. 최후의 전투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은 김하락이 왜놈의 손에 잡혀 죽느니 차라리 고기밥이 되겠다며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이 도읍으로 삼은 때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다. 1636년 겨울, 청태종이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이다.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한 청의 기병부대는 엿새 만에 개성까지 진격했다.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적군에게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산성에는 1만3천의 병력과 충분한 군량미가 있었지만 땔감은 턱없이 부족했다. 달포 동안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텼다. 정월 26일,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었고 왕세자도 포로가 되었다는 급보를 받았다. 같은 달 30일 항전을 포기한 인조는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이후 남한산성은 치욕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적의 공격에 함락되었던 곳이 아니다. 최강의 군대와 맞서 45일을 지켜냈던 항전의 성지였다. 드디어 수어장대다. 경기도 의병들이 행궁과 산성을 굽어보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마른번개와 천둥소리가 연신 요란하다. 발걸음을 바삐 옮겨 성의 남문인 인화문 앞에 섰을 때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한참 동안 지화문(至和門)이라 쓰인 편액을 바라보았다. 화(和)란 곡식[禾]과 입[口]을 합한 글자다. 나눔을 실천하는 것[和]이 평화[和]에 이르는[至] 문이다. 동학은 밥을 혼자 먹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으라고 가르쳤다. 1779년(정조3) 8월 정조가 남한산성을 찾아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이때 정조는 신료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병자호란 때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성이 천험(天險)인 땅이라 하겠다. 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병을 걱정하였겠는가? 정조의 탄식처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천시(天時)와 지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인화였다. 정조는 병자호란 당시 남문을 맡았던 구굉이 여러 차례 출병하여 많은 적을 무찔렀던 사실과 북문을 맡았던 김류가 적에게 속아 출병했다가 군사들 대부분 잃었던 사실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했다. 1779년 6월에 수어사 서명응이 남한산성을 개축 보수하면서 동문을 좌익문(左翼門), 서문을 우익문(右翼門), 남문을 지화문,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볼 때 지화문을 포함한 4대문의 이름은 정조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맹자가 말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118년,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찮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며 평화헌법을 제정했던 일본은 얼마 전 헌법을 뜯어고쳐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로 선언했다. 120년 전 청일전쟁 때 패전했던 중국의 군비증강은 사뭇 위협적이다. 러시아의 군사력도 이에 못지않다. 미일중러 초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남북이 갈라져 여전히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명확하다. 서둘러 남북이 화합[人和]하고 협력하는 일 뿐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교황 프란치스코, 세월호 유가족 위로하다

'세월호 유족 위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 위로했다. 16일 오전 9시 8분께 서소문 순교성지 방문을 마치고 서울광장에서 덮개없는 흰색 차량에 올라탄 교황은 광화문 바로 앞 제단까지 카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때때로 차를 멈춘 뒤 부모와 함께 미사에 참석한 어린이 10여명을 들어 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거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교황이 탄 차는 제단을 돌아 오전 9시 31분께 세월호 유족 400여명이 모여있던 광화문광장 끝에 멈춰섰다. 교황은 유족들을 향해 손을 모아 짧은 기도를 올린 뒤 차에서 내려 딸 김유민양을 잃고 34일째 단식 중인 김영오(47)씨의 두 손을 붙잡았다. 김씨는 교황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세월호를 절대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교황이 대답을 하셨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왼쪽 가슴의 노란리본) 배지를 바로잡아 드리니 껄껄 웃으셨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교황에게 미리 준비한 노란색 봉투에 담긴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편지에는 "당신께선 가난하고 미약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끌어안는 것이 교황이 할 일이라고 하셨다"면서 "세월호 유가족은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으니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도와주시라"는 내용이 담겼다.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세월호 유족 위로(연합뉴스)

“한반도 평화, 마음 속에 깊이 담아왔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군부독재의 잔혹, 세계 경제 5위권 국가의 몰락, 연이은 쿠테타, 빈곤의 악순환. 프란치스코 교황이 살던 고향, 아르헨티나에서의 삶은 평화가 없는 우울 그 자체였다. 이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교황은 평화를 꿈꾸며 항상 희망을 도둑맞지 말라고 강조해 왔다. 안티비관론자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첫 날인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공식 환영식이 열린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 등 고위공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 연설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라면서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며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며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 추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교황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로,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한다며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며 피력했다. 특히 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고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이 나라가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면서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은 전쟁과 분단 등으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며 한반도 평화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오전 10시30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교황 환영단에 포함된 평신도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이들이 세월호 가족입니다라는 소개를 받자 유가족들과 손을 맞잡고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정 이튿날인 15일 오전 10시,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석한 뒤 세월호 가족들과 공식적인 만남을 가질 예정이며 오는 16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거행한다. 강현숙기자

세월호 유가족 “진정한 위로 받고 싶다”

14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입국한 서울공항에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희생자 유가족도 있었다. 고(故) 남윤철 단원고 교사의 부친 남수현씨(세례명 가브리엘)와 부인 송경옥씨(모니카), 사제의 길을 꿈꾸던 예비신학생 고(故) 박성호군(단원고 2학년)의 아버지 박윤오씨(50임마누엘), 일반인 희생자 고(故) 정원재씨(61대건안드레아)의 부인 김봉희씨(58마리아) 등 4명이 포함됐다. 세월호 가족들은 교황 비행기가 착륙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리 교황에게 준비해 간 말들은 뒤로한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자신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 교사의 부모 앞에 걸음을 멈췄고, 한 손을 가슴에 댄 채 손을 잡고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위로했다. 남수현씨는 교황님을 직접 뵙고 대화하는 시간 갖고 싶었고, 이로써 심적인 위로, 진정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며 교황님 위로 말씀 통해서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 갖는 계기 되길 바란다. 세월호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들도 고해성사 하듯이 뉘우치고 나서서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 전하고, 회개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가족 박윤오씨는 교황을 만나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들의 죽음을 통해 만나야 하나 싶어 아들에게 미안했다며 마음속으로 사회 지도층들이 회개해 모든 아픔이 잊혀졌으면 하고 교황에게 기도를 전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은 15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미사 직후 교황과 비공개로 면담할 예정이다. 교황을 만날 10명의 유족들은 진도의 참사현장은 실종자가 10명이라는 이유로 잊혀지고 있다 아이들의 시신만이라도 꼭 끌어안고 목놓아 통곡하며 하늘나라로 보내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서신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어 오는 16일 시복미사가 거행되는 광화문에서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600여명이 농성장을 유지한 채 함께 미사를 드릴 예정이다.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교황방한준비위에서 농성 텐트는 철거할 필요 없다며 크게 부담갖지 말라고 알려왔다며 하지만 교황의 시야를 가리면 안 되니 방법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앞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측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내쫓을 순 없다면서 시복식 장소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유족에 대한 강제퇴거를 반대한 바 있다. 이날 미사에도 일부 가족들이 교황을 만나고, 17일 폐막미사에는 생존 학생과 부모들이 참석한다. 박성훈기자

새터민·장애인 등 손 맞잡아… 한국땅 밟는 순간부터 ‘낮은 행보’

평신도와 일일이 인사 나눠 화동들에 감사하다 화답 국산 소형차 타고 이동 눈길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이자,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12억 가톨릭 교인의 수장이자, 전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국 환영단 치고는 소탈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의미를 더한 영접식이었다. 14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성남공항에 이탈리아 국적의 전용기를 타고 입국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의 손을 붙잡고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이날 공항 영접행사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천주교 신자 대표 5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평신도 32인의 면면이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자부터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새터민, 이주노동자, 외국인 선교사 등 우리사회의 소외계층과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사제복인 흰색 수단(Soutane)을 입고 한국 땅에 들어선 교황은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홀로 트랩을 걸어 나왔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시 무릎을 꿇고 땅에 입 맞춤을 했던 친구(親口) 없이 가볍게 목례로서 환영단을 맞았다. 마중을 나온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한 뒤 서울 계성초등학교 6학년 최우진, 2학년 최승원 남매가 건넨 꽃다발을 받았다. 이에 교황은 화동(花童)들에게 친절하다. 감사하다는 말로 화답했다. 이어 교황의 통역을 맡은 정체전 신부의 소개 아래 환영을 나온 평신도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중에는 장애인 대표로 참석한 정진숙씨(62ㆍ제노베파)도 있었다. 그녀는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소속 봉제협동조합 솔샘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지난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 때 입었던 제의를 만들기도 했다. 18일 미사 주례때 그녀가 만든 장백의를 교황이 입을 것으로 전해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01년과 2012년 탈북한 한성룡씨(44)와 김정현씨(58ㆍ가명) 등 새터민 2명과 필리핀 이주노동자 하이메 세라노씨와 볼리비아 출신 아녜스 팔로메케 로마네트 씨 등 이주노동자 2명도 환영단에 이름을 올리며 교황을 영접했다. 외국인 선교사 2명도 있었다. 영국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양 수산나(78수산나 메리 영거) 여사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인 뉴질랜드 출신 안광훈(73브레넌 로버트 존) 신부가 그들이다. 양 수산나 여사는 1959년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한국에 입국해 3년 뒤 대구 가톨릭푸름터를 세우고 불우한 여성들에게 미용기술을 가르쳤다. 또 안 신부는 1966년 입국해 서울 강북구 일대 달동네에 살며 주민들과 철거 반대 운동, 실직자 대책 마련, 자활센터 설립 등의 활동을 해 왔다. 영접식을 끝낸 교황은 오전 청와대 인근 주한교황청대사관에 들러 여정을 풀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간단한 연설을 마친 교황은 주요 공직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박광수기자

“아픔으로 얼룩진 마음 어루만져 주길…”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사적인 방한이 이뤄진 14일 경기도민들은 아픔으로 얼룩진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비록 4박5일간의 체류기간 동안 경기지역 방문 일정은 없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교황의 행보는 소외계층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이날 오전 10시께 북한이탈주민 H씨(77ㆍ여)는 안산 집에서 조선족 친구(76)와 함께 교황방문 생중계 TV를 시청했다. H씨는 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교황은 제일 못사는 사람들을 돌봐주고 우는 사람을 달래주는 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어려운 사람들이 교황을 환영했다고 들었는데 교황이 이들과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더 큰 나라도 많았을텐데 이 땅을 찾아준 게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이어 탈북한 동지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외롭고 힘들어도 마음을 기댈 곳이 없다는 점이라며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는 교황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오산에 살고있는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 L씨(42)도 교황의 방문이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이슬람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을 형제들이라고 칭하며 종교를 초월해 화해를 위한 노력을 펼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 L씨는 교황 방문은 종교를 떠나 의미 있는 일이라며 모쪼록 종교적 갈등이 빚어지지 않고 외국인노동자 등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온정과 관심도 커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성보경기자

문화예술로 만나는 ‘천주교 역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맞아 천주교와 교황과 연관된 다양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오는 10월 31일까지 천주교 순교와 전교의 역사를 다루는 서소문동소문 특별전을 개최한다. 박물관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공동 주최한 이 전시는 당초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막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결정되면서 지난 7일 개막 일정이 앞당겨졌다. 특별전에는 교회사 관련 400여 점의 근대유물이 한자리에 모인다.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경천(敬天)과 신유박해 순교자 황사영이 청나라 구베아 주교에게 쓴 백서, 김대건 신부 묘비석과 관, 기해박해의 내용이 담긴 기해일기, 정약용의 십자가 등 천주교의 유서깊은 역사가 담긴 유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평화화랑에서는 오는 19일까지 일어나 비추어라를 주제로 124위 순교자 시복기념 및 교황방한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원들과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추천 미술가 72명이 참여한 전시회는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 124위의 시복에 대한 이해를 돕고, 교황 방한을 계기로 전 세계에 우리만의 토착화된 성(聖)미술을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은 오는 17일까지 교내 리버스(RIVUS) 갤러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념전 그리고 주님께서 보시니 그것도 좋았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프로젝트 그룹 강지가 제작한 교황 방한 기념 특별작품(유화 520160cm)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고(故) 김수환 추기경 등을 주제로 한 회화, 영상 등 60여 점이 전시 중이다. 전시된 작품은 가난에 맞서 싸우지 않는 사회에는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교황의 메시지를 시각언어 화법으로 접근해 가톨릭 영성과 평화와 화합, 종교적 신성에 대한 경외를 표현했다. 박성훈기자

최대한 소박·간소하게… 눈 마주칠 수 있게 제단 낮게 설치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거행한다. 시복식은 최대한 소박하고 간소하게 진행한다. 일례로 봉헌예식에는 전례에 필요한 내용 이외의 일절 다른 봉헌을 하지 않는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위원장 강우일 주교)는 이날 시복식 행사를 위해 가로 7m, 세로 1.5m, 높이 0.9m의 제대를 설치한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설치하는 제단의 높이는 1.8m이다. 비교적 무대가 낮은 이유는 낮은 곳을 향하는 교황의 성품을 드러내고 후방에 위치한 광화문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다. 실제 교황청에서는 제단의 높이를 낮게 설치해 참가자들이 어디서나 교황과 눈을 마주칠 수 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제대 뒤로는 주물 제작한 십자가(가로3.6m, 세로 4.6m)가 8m 단 위에 설치된다. 십자가에는 한국 순교자의 빛나는 영성이 세계에 알려지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제대 양 옆을 비롯해 행사장 곳곳에는 LED 전광판 24대를 두어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과의 거리감을 최대한 좁힐 계획이다. 많은 인파가 몰릴 예정인 만큼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다. 우선, 시복식 참가자들은 행사 시작 전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13개 출입구를 통해 입장한다. 입장은 새벽 4시부터 오전 7시까지 진행된다. 오전 9시에 시작될 교황의 카퍼레이드 통제선 마련 관계로 오전 7시 이후 입장은 제한적으로만 이뤄진다. 지정 게이트에 도착 후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입장권과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원 확인 후, MD(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 입장 가능하다. 초청 신자들은 입장권과 본인의 신분증(주민 등록증 또는 운전 면허증, 외국인인 경우 여권)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유리병 제품, 페트병 음료, 플라스틱 재질의 음식 용기 등은 반입이 제한된다. 또한 우산 및 금속성 물건 역시 제한된다. 단, 간단한 간식(빵,샌드위치,김밥,떡, 과자류)은 지참이 가능하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장애인과 지역으로 출발하는 기차 시간이 예정돼 있는 신자들이 먼저 퇴장하며, 서울대교구 신자들은 멀리 이동해야하는 타 교구를 위한 배려로 가장 마지막에 퇴장한다. 입장을 마친 참석자들에게는 모자와 방석, 전례 예식서, 서울 천주교순례길 가이드북 등이 전달된다. 깔끔한 뒷마무리를 위한 쓰레기봉투도 함께 나눠준다. 의료진과 식수대, 물품 비치대 등이 있는 부스는 행사장 안에 10개, 밖에 15개가 설치된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조규만 주교는 최근 시복미사 참가자 안내문을 통해 안전과 경호상의 문제로 소지한 모든 물품의 내용을 확인하는 만큼, 입장시간 단축을 위해 소지품을 최소화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시복미사 당일 서울과 수도권 지하철은 오전 4시 30분부터 조기 운행된다. 다만 이날 시복미사가 완전히 끝나는 오후 1시께 까지는 행사장 구역 내의 모든 역(시청역경복궁역광화문역)에서 열차가 무정차 통과한다. 강현숙기자

교황, 오늘 방한 고통의 한국 보듬는다

한 인터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누구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답했다. 저는 주님이 지켜보는 죄인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하며, 파격적인 행보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한국에 온다.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자 라틴아메리카 대륙 출신으로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 선출 당시부터 한국 방문까지 1년 5개월 동안 교황이 보여준 발자취를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취임 한 달 만에 바티칸 개혁을 위해 추기경 8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을 발표하고, 사제 아동 성추행 대책위를 설치하고, 마피아의 돈세탁 창구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바티칸은행을 세계적인 회계 법인에 회계 감독을 위탁하고, 로마 밖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 섬과 리우데자네이루 북쪽에 있는 바르지냐 슬럼가를 방문했다. 이탈리아 범죄집단 마피아의 한 분파인 은드란게타의 본거지 칼라브리아 주에서 미사를 갖고 마피아 파문을 선언,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13년 12월 17일 아침 교황 즉위 후 맞은 첫 생일 아침상에 동유럽 출신 노숙인 세 명을 초청해 생일상을 함께 나눈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촉구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4~18일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과 만난다. 교황은 이번 한국방문에서 장애인, 평신도, 수도자, 한국 이웃종교 대표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등과 만나 사회 통합과 치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4박 5일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대전, 충남 당진시와 서산시, 충북 음성군 등 총 연장 1천km 이상을 이동하며, 4차례 미사를 집전하고 8차례에 걸쳐 강론과 공식 연설을 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의미에 대해 교종 즉위 이후 1년 밖에 경과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 교회를 제일 먼저 방문하심은 한국 교회에 대한 큰 관심과 배려가 전제되어 이뤄진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 교회가 걸어온 고난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한국이 위치한 세계적 분쟁과 갈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지정학적 표징과 상황이 그분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더 마음이 쓰이고 자부적 사랑이 향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현숙기자

문화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