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의 아름다운에 매료되어 인체에 대한 다양한 재료와 감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도하고, 왜곡, 과장시키기도 하며, 과감히 생략하여 특징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모델이 표현하고자 하는 동세 즉 스토리를 화면에 연속적으로 재구성하여 살아 숨 쉬듯 역동적인 동작, 그리고 꿈틀대며 이어지는 선으로 표현되는 크로키는 먹색의 번짐으로 숨을 고르기도 한다. 하나의 먹물덩어리의 농담은 마치 큰 산과 같고,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먹 선은 찰라와도 같다. 선이 주는 맛에서 드로잉의 참 맛을 터득하는 듯하다.짧게는 30초~1분 길게는 2~3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모델과의 호흡 속에서 개성으로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발산해 낸다. 수많은 포즈와 형상, 연속된 동작 등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즐거움만이 아닌 고된 인내의 과정도 요구된다. 자료제공_정구찬갤러리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 63-1 ☎031-262-7122 강상중 서양화 강남대학교 미술학과 졸업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미술교육전공) 졸업개인전 10회(서울?수원)수원예술인100선 및 초대전 160여회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장, 수원미술전시관장 역임장안구민회관, 수원체육문화센터 출강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 출강드로잉 수원화성 회장
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해 산림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지난 7월 27일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서울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를 막으려면 숲 가꾸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종태(57) 여주군 산림조합장.원 조합장은 산사태를 막고 숲을 건강하게 하려면 숲 가꾸기가 꼭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산사태를 막는 방안이 있다면최근 산사태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낸 서울 우면산 산사태를 보면서 나무가 산사태를 막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수직으로 생장이 촉진된 나무뿌리의 말뚝 효과와 수평으로 생장이 촉진된 나무뿌리의 그물 효과에 의한 것이다. 또 숲 가꾸기를 해준 나무가 그렇지 않은 나무에 비해 뿌리의 양이 5배 이상 더 늘어나고 뿌리의 깊이는 2배 이상 확장한다는 연구결과를 봐도 알 수 있다. 숲 가꾸기와 함께 사방댐을 건설해야 한다. 산사태 위험지역의 계곡에 설치하는 사방댐은 산사태로 떠내려 오는 토석류를 상류에서 차단하고 물 흐름을 줄여주기 때문에 인명과 재산의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미래의 가치는 산에 있다'라고 강조했는데 어떤 의미인지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맞춰 산림사업의 품질향상과 산림조합원의 소득증대 및 임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조합 임직원들은 지역 주민이 행복한 녹색도시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푸름을 즐길 수 있도록 산림관리에 치중하고 있으며, 특히 후손들에게도 푸르고 울창한 숲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여주지역의 산림자원 복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합의 자립기반을 구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봄철에만 개장했던 나무시장을 연중 개장할 수 있도록 추진과 함께 조합원들을 위한 금융사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헐벗은 국토를 푸르게 만들 계획은경기도 최남동부에 위치한 여주군은 6만 772ha의 면적 중 산림은 3만 1천690ha로 51%를 차지, 토양이 좋아 여주 쌀과 도자기 등 농특산물 등이 매우 우수하다. 우리 조합은 1962년 창립되어 그동안 정부의 산림녹화 사업을 주도해 리기다소나무, 낙엽송, 잣나무 등을 조림하고 있으며, 23명의 임직원과 3천100 명의 조합원이 산림의 미래가치 창조와 관내 산림자원을 가꾸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산림경영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 제공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우리 조합은 나무를 가꾸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산주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리경영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또 사이버 산림경영시스템을 구축해 분야별로 산림 경영정보를 제공함은 물론 신용사업과 산림경영지도원 5인을 배치해 산림경영정보를 제공하고 전문 상담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 말 우리 조합의 수신액은 600억 원 실적을 달성해 전국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2010년도 사업실적으로 조경수 시범 포지 3ha 조성, 조림 35ha, 숲 가꾸기 450ha, 산림 보로 220ha, 임도 보수 5km, 사방댐 2개소, 예방사방 1개소, 산지사방 3개소, 훼손지 복구 1개소, 직영벌채 및 원목납품 2ha를 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당기순익 4억 4천만 원을 달성해 조합원에게 정기예탁금보다 높은 배당을 한 결과 출자금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관심과 열의가 높게 나타났다.이 밖에도 2007년부터 관내 노인회 회원들을 '명예산불 감시원'으로 위촉해 산불예방과 감시 활동에 앞장선 결과 산불의 주원인이었던 농산촌 쓰레기 소각과 산불 발생이 많이 줄어들어 정부 시책사업에도 모범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4대강 구간인 여주 남한강 숲 조성은 얼마만큼 진행됐는지올 연말이면 남한강 살리기 사업이 완료된다. 남한강변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 강천보와 여주보, 이포보 주변에 남한강 희망의 숲 조성 사업을 우리 조합에서 전담하고 있다. 출향인사, 관내 희망의 숲 참여 희망자를 모집해 지난 4월 5일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지역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관내 사회단체 및 대신 초, 송촌초 학생 등 500여 명이 참가한 남한강 희망의 숲 조성 행사를 했다.이밖에 고용노동부와 법제처, 한국토지주택공사, 석유관리원,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등이 우리 조합과 협약을 체결해 단풍나무, 은행나무, 느릅나무, 메타세쿼이아 등을 자전거 도로에 집중적으로 심어 멋진 휴식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여주=류진동기자 jdyu@ekgib.com
8월 6일 오전 11시께 수원 아주대학교 앞 헌혈의 집.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헌혈의 집 직원들은 오셨어요라며 친숙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한눈에 봐도 서로 잘 아는 듯한 모습. 헌혈의 집 방문이 낯설지 않은 듯 시종일관 편안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린 뒤 능숙하게 헌혈에 임하는 노신사에게서는 녹록지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강한 포스를 풍기며 성분헌혈을 마친 이 노신사는 바로 경기도 내 최대 헌혈자로 알려진 헌혈왕 이상철씨(64)다.상철씨가 25년 헌혈인생의 첫단추를 끼운 것은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지나치던 곳에서 헌혈차량을 발견하고 역사적인 첫 헌혈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서울 잠실역 앞에서 처음으로 헌혈할 당시 굵은 주삿바늘을 보고 바짝 긴장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헌혈을 하고 난 뒤 그쪽에서 제공하는 빵과 우유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그때부터 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거지요이후 상철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기적으로 헌혈을 실시하게 된다. 막연히 해왔던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헌혈을 통해 실천하게 된 것이다.한번 해보지도 않고 헌혈 자체를 무조건 꺼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헌혈을 하고 난 뒤 드는 뿌듯한 기분을 한번 느껴봐야한다니까요. 헌혈하는것은 나만의 특권이죠현재 상철씨의 총 헌혈횟수는 모두 384회. 원심분리기가 개발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반, 전혈 헌혈이 불가능할 당시 1달에 1차례 이상 헌혈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5년간 거의 1차례도 거르지 않고 헌혈을 한 셈이다. 상철씨에게 있어 헌혈은 이제 취미이자 습관이 돼 버린 셈이다.현재 용인시 백암면에 사는 상철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달에 2차례씩 꼬박꼬박 이곳 수원 아주대 헌혈의 집을 찾는다.차로 1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하는 불편은 헌혈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이처럼 꾸준한 헌혈을 통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상철씨는 현재 국내의 열악한 헌혈 환경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국내 보유 혈액이 모자라 외국에서 피를 수입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혈액의 집을 많이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수십만이 사는 용인시에 제대로 된 헌혈의 집이 한 곳도 없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이 같은 열정에 힘입어 상철씨는 지난 2007년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은데 이어 지난해 경기도지사 상을 받게 된다. 현재도 상철씨는 헌혈을 계속하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고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등 꾸준하게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65세부터 건강상태에 따라 헌혈에 크게 제한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철저한 건강관리를 통해 헌혈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헌혈을 통해 봉사하고 싶다는 상철씨는 헌혈을 하면 B형간염, C형간염 등은 물론 간 기능이나 혈당, 콜레스테롤까지 정기적으로 검사할 수 있다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헌혈에 참여, 우리나라가 혈액 수입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_박민수기자 kiryang@ekgib.com사진_하태황기자 hath@ekgib.com
소 똥에 박힌 옥수수를 빼먹으며 한 달 반을 걸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넜죠.김규민(37) 영화감독의 북한 탈출기 중 일부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거친 김 감독은 한국에 온지 딱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어딜 가든 자신을 따라다니는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가 어렵게 느껴진다. 그는 꼬리표는 단지 운명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새터민 김규민, 탈북자 김규민이 아닌 언제까지나 공산주의가 싫어 북한을 탈출한 대한민국 국민일뿐이라고 소개한다.탈북자를 소재로 다룬 영화 국경의 남쪽, 크로싱의 조감독을 했던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첫번째 장편영화 겨울나비가 지난 7월 7일 개봉했다. 영화는 북한 식량난 때문에 겪는 모자의 비극적인 사연을 예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우고 급기야 종이와 흙을 씹어 먹고 김일성 사진은 불쏘시개로 사용된다. 결국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의 첫 데뷔작은 북한의 굶주림이었다. 북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탈북자로서 빚을 갚은 심정이라고 할까. 굶어죽는 고통은 인간적으로 봤을 때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었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비참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황해북도 봉산 출신인 김 감독은 글재주가 뛰어나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만담(漫談)꾼으로 지역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했고 연극동아리에서도 소위 잘나가는 학생이었다. 모범생은 중학교 시절 우연히 한국 라디오를 듣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불 덮고 몰래 듣던 남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근사근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 마약과 같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고 한다.내가 알고 있던 북한 사회하고는 뭔가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보편화된 세상이 북한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북한의 잘못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자유에 대한 그의 열망은 청소년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특별전형으로 북한 리계순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 김 감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분석하는 과제물을 하면서 진정한 공산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자유에 대한 열망이 폭발했다. 그 후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반공산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자의반, 타의반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김 감독은 정치적인 이유로 총살형을 선고 받았다. 수감 생활 중 못을 삼켰고 치료 과정에서 병원을 탈출했다. 배에 찬 고름을 욺켜 쥐고 한 달 반을 걸어서 두만강에 도착한다. 삼엄한 북한군의 경비망을 피해 과감하게 대낮에 두만강에 몸을 던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죠. 성치 않은 몸이 북쪽이 아닌 중국쪽 강기슭에 닿았으니.두번의 탈출 끝에 그는 2001년 5월 남한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김 감독은 하나원을 나와 전라남도 나주로 향한다. 조용히 배농사를 짓고 싶어서 말이다. 그 때 당시 나주경찰서 김석주 담당형사의 조언으로 2002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됐다. 북에서도 해주 당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고 배우의 꿈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공부하다 보니 연기보다는 연출쪽이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고 연기는 과감하게 포기했죠.그의 한국생활은 나름 평탄했다. 적응도 빨랐다. 좋아하는 연기도 잠깐 해보았고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 고생 끝에 어찌됐든 감독이 됐다. 결혼도 하고 예쁜 딸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분명 성공한 탈북자다. 하지만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족을 등지고 자유를 택한 저 때문에 40년 동안 군에서 일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이 시골로 추방당하고. 한국 와서 가족 찾으러 고향에 사람을 보내 봤지만 허사였어요. 점쟁이한테 물어보니 어딘가에 살아는 있다고 하는데그래서 김 감독에게 통일은 숙명적인 과제다. 북한 구호물자와 식량 대부분을 북한 공권력이 받아먹고 있는 가운데 이 공권력이 역으로 국민들은 탄압하는 도구로 전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누구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굶어가는 우리 형제를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는가. 10년 전 남과 북이 형제관계였다면 지금은 이웃사촌 보다 못한 소원한 관계가 됐죠. 북한은 중국에겐 주기 싫고 남한이 떠안기는 벅찬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는 통일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많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야 하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아내를 위해 통일이 되면 꼭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성공한 탈북자요? 저는 평범한 대한민국 아저씨입니다. 단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통일의 당위성과 중요성 등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일뿐이죠. 차기작은 흥행도 염두해 두고 작업할 예정인데 아마 내년 정도면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김 감독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뭘까.굶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말하고,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고. 그런 것들이라면 그는 지금 행복할 터인데 웃음소린 허탈하다. 분명, 진정으로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강현숙기자 mom1209@ekgib.com
응애~ 응애~지난 7월 23일 오후 6시 10분 수원 아주대학교 분만실. 경기도내 최다 다둥이 가족으로 인증받은 김정수(50)함은주(40)씨 부부와 할머니 함옥란(76), 11남매는 환호성을 질렀다. 11남매가 12남매가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기자님, 이번이 진짜 마지막입니다.(하하) 12명을 낳았으니 정말 한 다스(12개 한 묶음)가 됐네요.함씨는 출산 직후 12번째 아들 탄생 소식을 본보에 제일 먼저 전해왔다. 아무리 자식낳기를 권장하는 세상이 왔다한들 11명은 좀 많다 싶어 사실여부를 눈으로 보기 위해 지난 7월 21일 오후 용인시 백암면 근삼리에 사는 흥부네 가족을 직접 찾았을 때만 해도 출산 소식을 그렇게 빨리 전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함씨의 출산일기는 19살 때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0살 많은 남편을 만나 강원도 원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법적으로 혼인신고 전이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동거가 맞다. 그 때 당시 농장에서 일하게 되면 숙식이 해결됐죠. 아들 녀석들은 농장 일을 거들었고 한마디로 똥밭에서 구르면서 컸어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내리 아들 셋을 낳다보니 딸 하나는 꼭 있었으면 했죠.소원대로 부부는 큰 딸 소연이를 낳고 가족 계획을 공식적(?)으로 종료했다. 그 후 남편 김씨는 의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영구적으로 피임수술도 받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섯째가 생겼다. 함씨가 19살 때부터 40살까지 21년 동안 배아파 낳은 자식이 총 12명. 군복무 중인 영광(22)이를 시작으로 영완(20), 영석(19), 소연(17여), 미영(15여), 소희(14여), 미나(12여), 영대(11), 영진(5), 소정(3여), 영국(2). 그리고 태어난지 한달도 안 된 늦둥이 아들까지 계산하면 아들 7명, 딸 5명. 그야말로 딱 한 다스다. 한 다스가 되기까지 부부가 꾼 태몽만 해도 사과, 밤, 뱀, 구렁이, 용 등 각양각색 기억을 다 못할 정도다. 함씨 부부는 왜 이렇게 많이 낳은 걸까?다 하늘의 뜻인 것 같은데. 남편 김씨는 다산의 비법을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그러자 부인 함씨는 의사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애기가 잘 들어 서는 축복받은 신체 조건(자궁)을 가지고 있다고.(하하)경기도 최고 다산왕답게 함씨는 20여년 동안 배불러 있으면서 그 흔한 입덧 한번 하지 않고, 진통도 심하지 않았다고. 첫애는 병원 도착 5분만에 자연분만, 지난달에 낳은 막내도 병원 가자마자 출산, 그야말로 건강 체질의 소유자다. 허나 가족들이 감수해야 하는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다. 남편 김씨는 물류센터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어 벌이가 넉넉지 않다.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고 부인도 식당 일로 살림을 돕는다. 흥부네 아이들은 학습지나 과외를 모르고 산다. 12명의 아이들이 한창 먹을 땐 한달에 쌀 120~140㎏도 부족하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규칙을 세워놓고 생활한다. 옷, 학용품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빵, 과자가 먹고 싶다고 칭얼거리지 않는다. 셋째 영석(19)이는 제주도 수학여행비를 아르바이트 해서 직접 마련했고 둘째 영완(20)이는 장학금을 타서 학비를 해결했다. 부인 함씨는 고백한다. 솔직히 부모가 무책임한거죠. 그래도 아이들이 부모 탓하지 않고 씩씩하게 우애있게 잘 자라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랑스러워요. 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대개 웬수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떠올릴 때 이만큼 정확한(?) 표현도 없을 듯 싶다. 웬수 같은 자식들이 자그마치 12명. 용인 흥부네 가족을 두고 더 이상의 딴지는 삼가하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자. 글_강현숙기자 mom1209@ekgib.com사진_하태황기자 hath@ekgib.com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보이는 터쿠아즈 칼라의 변주는 작가의 기본 정서인 우울과 그래도 희망을 대변한다. 파랑과 초록의 중간색인 터쿠아즈는 우리와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머나먼 이국의 색이며, 차가움과 부드러움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이중적인 성격의 색이다. 근작들은 과거의 그것에 비해 좀 더 경쾌해졌는데 회색과 흰색의 적극적인 면 분할에 기인한 것이다. 이들 색을 배경으로 터쿠아즈의 사용은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의 구성에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는 긴장감을 부여한다. 작가의 자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또는 세상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조심스럽지만 거침없이 바라보는-주제를 떠받치는 색의 선택과 표현에서 드러난다. 작품 속 터쿠아즈는 작가의 자아를 짚어내는 하나의 단서로 기능하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비밀스러움을 상징한다.난 지 삼칠일 만에 부친이 전쟁 전후 혼란기로 인해 행방불명이 되고 갓 스물 되던 해에 모친마저 잃었던 슬픈 과거-사실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가 있는 작가의 기본 정서는 우울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강골의 면모를 제일 먼저 드러내었다. 아니, 다른 이들은 그에게서 강함을 먼저 느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그의 세상에 대한 여릿한 태도와 물기 어린 시선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작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의 작품들은 작가가 늘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머물러 있는 현재의 몽타주인 셈이다. 아련한 동경의 대상인 이국의 배경이 일상의 느슨하거나 혹은 따뜻함과 공존하는 그림들은 세상에 대한 작가의 자기방어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개방적인 혼재된 감성의 매력적인 결과물로 관객에게 다가설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남영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2010. 10. 송파미술인상 수상 기념전/ 예송미술관 2010. 10. 현대아산갤러리 초대전2006. 3. 가산화랑 초대전외 다수의 초대전과 그룹전.현재 한국미술협회, 한국여류화가회, 홍익여성화가회, 숙란전, 송파미술협회, 화수회 회원 및 송파 여성문화회관 누드드로잉, 코스튬반 강사로 활동.
브라질 리오 데자네이루에 위치한 해변 지구 코파카바나. 그 곳에서 지난 5월 1일 큰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이틀 후인 3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축일인데 당일 보다 일요일인 1일 사람들이 거리, 광장으로 나와 퍼레이드를 펼친 것. 차량들은 꽃장식을 하고 대성당 앞에 줄지어 늘어서 차례대로 사제가 뿌려주는 축성을 받았다. 교회 광장은 페스티벌의 중심이다. 수백명이 한 팀을 이뤄 경쟁하듯이 퍼레이드를 반복한다. 코파카바나가 불과 100~200m 규모의 작은 시가지이지만 퍼레이드와 음악소리로 들썩거린다.괜히 기분이 들떠서 점심도 거르고 행렬을 쫓아다녔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모두 환하게 웃으면서 포즈까지 취해 준다. 어떤 참가자는 자기 친구가 사진이 안 나오는 각도에 있다며 그 친구까지 앞으로 끌고 와서는 찍어 달라고 야단이다.코파카바나는 페루 쿠스코푸노에서 라파스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티티카카호를 비롯해 주변 곳곳에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일찍부터 관광산업이 발달했다. 17세기에 세워진 흰색의 거대한 가톨릭 성당은 볼리비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당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지난 5월에는 프랑스의 세계적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친딸과 연기한 영화 코파카바나가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이름을 따왔다. 영화에서는 이런 휴양지의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와 어울리는 중년 여성 바부가 등장한다. 영화에서처럼 삶이 축제가 되는 곳 코파카바나, 나는 지금은 그 곳에 서 있다. 글사진_김영훈
레이크 사이드 골프장은 지난 1986년 재일교포였던 고(故) 윤익성씨가 고국에 자본을 투자해 1990년 7월 36홀(동코스 18홀, 남코스 18홀)로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대중 골프장이다. 이어 1997년 9월 회원제 코스인 서코스(18홀)를 추가 개장함으로써 동일법인이 한 장소에서 54홀 정규시설의 골프장을 구성한 동양 최대의 골프장이다.레이크 사이드 골프장을 구성하는 동코스(7천342야드), 남코스(7천380야드) 및 서코스-회원제 코스(7천52야드)는 코스 규격면에서나 시설, 서비스 및 토너먼트 코스 셋팅 능력 면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모든 조건을 완비한 골프장으로 전 코스 모두 지난 몇 해 동안 국제대회 유치 경험이 있으며, 대회 유치 이후에는 각계 언론 및 네티즌으로부터 명문코스로 인정받은 바 있다.레이크 사이드 골프장은 특히 최근에는 미국 유명 골프잡지인 Golf magazine에서 선정한 세계 유명 500개 홀 중 하나로 레이크 사이드 18홀(Par4)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정됨으로써 골프장의 위상이 국내 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도 인정하는 명문 골프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용인 레이크 사이드 골프장은 국내 퍼블릭 골프장의 역사를 대변한다. 1990년 7월 국내 최초 퍼블릭 36홀로 개장해 퍼블릭 코스로는 처음 정규 18홀의 면모를 갖췄다.1997년에는 회원제 18홀을 추가 개장해 140만평의 부지에 총 54홀의 대형 골프장으로 변신했다.동, 서, 남 3개 코스 모두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조건을 가지고 있다.완만한 구릉지대에 만들어진 아기자기한 레이아웃과 아름답게 펼쳐진 연못이 인상적이다. 또 농약 대신 미생물 제재 천연물질로 잔디를 관리해 환경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상할 정도로 친환경적이다. 특히 7천660야드인 남 코스는 완만한 주변산세를 감상하면서 플레이할 수 있고, 코스와 코스간의 간격이 짧고 주변 환경이 친숙하게 느껴져 골퍼들을 편안하게 만든다.블라인드 홀과 긴 워터해저드는 도전적인 느낌을 주며 동양적인 전통미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와 함께 그린 스피드가 빠르고 굴곡이 심해 퍼팅의 묘미를 더했다.이같은 조건을 갖추고 레이크 사이드 골프장은 한국 골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7년 미국 LPGA대회인 삼성월드챔피언십을 비롯해 레이크 사이드 여자오픈, 힐스테이트 서울경제여자오픈 등 굵직한 프로대회를 개최했고, 주니어 육성을 위해 익성배 주니어선수권대회를 지속적으로 주최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lakesidecc.co.kr 문의 ☎031-334-2111~9 글_용인=강한수김규태기자 kkt@ekgib.com
버려지는 페트병으로 300억원을 벌어들이는 기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오산시 갈곶동에 위치한 페트병 재활용 전문기업 ㈜SH ENG는 지난 2006년에 설립돼 회사의 연혁은 길지 않지만 2대에 걸쳐 자원재활용 사업을 해온 임범진 대표의 노하우와 열정, 그리고 신기술 개발로 전국의 재활용 페트병 25% 가량을 처리하고 있다.설립 초기 자본금 3억원, 매출액 16억원 규모에 불과했던 ㈜SH ENG는 불과 4년여 만인 지난해 매출액 282억원을 달성했으며 중국 진출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등 국가대표급 재활용 기업으로 성장했다.㈜SH ENG 임범진 대표는 아버님이 자원 재활용 관련 일을 해 오셨기 때문에 재활용에 많이 익숙했고 관심이 많았다며 우리나라에 재활용이라는 개념이 들어온 지는 1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SH ENG 경영을 통해 우리나라의 재활용 기술수준 및 국민의식 수준을 향상 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고 말했다. ■페트병 자원재활용 분야 설비 및 생산능력 국내 1위 기업㈜SH ENG는 지난 1995년 설립된 재활용기업 신해산업㈜에서 페트병 재활용 부분을 따로 분리해 설립한 회사이다. 2006년도에 설립된 ㈜SH ENG는 설립 초기 중급품의 단섬유 원료 위주로 생산을 했지만 과감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고품질의 제품원료를 생산, 현재는 무색단일 페트병의 약 90% 이상을 투명 과일상자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고품질의 Sheet 원료용으로 생산하고 있다.특히 지난해에는 기존 선별인력의 최대 50%를 줄이고 품질을 보다 고급화하기 위해 약 30억원을 투자, 고속색상자동선별기 및 컨베이어시스템을 고속화시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등 과감한 기술 투자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SH ENG는 오산 시내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이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다른 재활용공장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악취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민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이는 약 10억원을 들여 고도 폐수정화시설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기존대비 세척제 사용의 80%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 정화설비를 갖추고 있다.또한 지난 2008년에는 국내 최초로 페트병라벨 제거장치를 개발해 실용실안등록을 마치기도 했으며 2010년에는 중국 칭화대학교와 고체폐기물 기술지원 협약을 체결, 본격적인 중국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이처럼 과감한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SH ENG는 초기 자본금 3억에서 16억원, 연매출을 16억원에서 300억원까지 달성했다㈜SH ENG는 2006년 경기도지사 표창, 2008년 환경부장관 표창, 2009년에는 경기지방중소기업청 경영혁신형중소기업 선정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 2월에는 환경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현재 ㈜SH ENG는 페트병 재활용 분야에서 전국 25%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수도권의 경우 50% 이상의 페트병이 ㈜SH ENG에서 재활용 되고 있다. ■자원을 재생하고 환경을 사랑하는 기업 신해산업㈜㈜SH ENG는 신해산업으로부터 시작된다.신해산업㈜은 지난 1995년 성남시에 설립된 회사로, ㈜SH ENG 임범진 대표의 부친인 임재완씨가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형인 임성진씨가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있다.신해산업㈜ 임재완 회장은 자원 재활용 분야에서만 40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으며 그의 재활용 노하우 및 열정은 고스란히 두 아들에 전수됐다.이러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도권 제1의 재활용 기업으로 성장한 신해산업㈜은 1998년 사회봉사 분야에서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했으며 2001년과 2005년에는 환경부장관 표창(환경보전기여), 2009년에는 경기지방중소기업청 경영혁신형중소기업 선정, 2011년 환경부장관표창 등을 수상했다.특히 성남시, 오산시, 화성시, 용인시 등 경기도내 주요 시군의 재활용품 처리업체로 선정되는 등 수도권 뿐 아니라 전국 1등 재활용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현재 신해산업은 지난 2006년 ㈜SH ENG가 페트병 재활용 분야로 독립하면서 음식물 재활용에 집중하고 있으며 자본금은 40억원, 연간 매출액은 560억원에 달하고 있다.■국민과 함께하는 자원순환사회㈜SH ENG 임범진 대표는 자신을 자원 재활용 업체의 대표이기 이전에 환경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임 대표는 ㈜SH ENG의 활동 중 사회공헌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먼저 환경단체 및 학생들의 공장 견학을 꾸준히 추진해 버려진 폐기물이 자원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실제로 보여주는 환경홍보를 실시하고 있다.최근에는 중국 뿐 아니라 재활용 선진국인 일본에서 조차 ㈜SH ENG의 최신 설비를 벤치마킹 하기 위해 공장을 찾는 경우도 많아 세계에 한국의 재활용 기술을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또 ㈜SH ENG가 위치한 오산시와 함께 쓰레기 분리배출 시민계도 및 홍보켐페인에도 참가하고 있으며 오산시 독거노인 지원, 불우이웃 돕기 등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SH ENG는 지난해 10월 중국 칭화대학교와 고체폐기물 기술지원 협약 체결했다.특히 ㈜SH ENG는 이번 협약을 계기로 그동안 축적된 페트병 재활용 생산기술 및 설계기술을 활용해 최적의 페트병 재활용 시스템을 중국 등 해외에 PLANT 수출운영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고 회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활용 기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임범진 대표는 선진국들을 보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환경의 개념으로 자원 재활용 기업을 육성지원하는데 아직 우리나라 정부는 재활용 분야를 수익사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국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 부분은 있을 수 있지만 향후 정부와 지자체가 자원 재활용 분야 사업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자발적 분리배출로 폐기물을 자원화하는 기업 ㈜SH ENG는 조금이나마 사회에 공헌하고 향후 중국시장 진출 등을 통해 우리 회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활용 기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오늘도 달리고 있다.글_이호준기자 hojun@ekgib.com사진_전형민기자 hmjeon@ekgib.com
아이고. 강 기자 오랜만일세. 애기는 잘 크고? 내가 일정을 착각했네. 미안하지만 서울 가면서 얘기하면 좋겠는데 괜찮겠나. 차에서 하는 인터뷰는 나도 난생 처음이네.(하하)지난 9일 단국대 죽전캠퍼스에서 만난 고은(78안성시 공도읍) 시인은 기자를 납치해 부랴부랴 서울 을지로로 향했다. 차 안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는 배가 고플 정도로 대화가 이어졌다. 고은 시인이 작품활동 53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연시집 상화시편:행성의 사랑(창비 刊)을 발표했다. 시집 주인공인 상화. 시인의 부인 이상화 교수(64중앙대 영문과)다. 민주화운동의 투사와 학자의 옷을 번갈아 입으며 우리 역사와 정서, 사회 문제를 넘나드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펼쳐온 시인에게 이번 시집은 확실한 외도(?)임은 분명하다. 팔순을 내다보는 어르신네가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물었다. 책 나온 거 보고 의외래. 전혀 기획하지 않았던 시집이지. 작년에 연작시편 30권짜리만인보를 완간하고 나서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을 정리하고 싶었어. 사랑이 갚아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아내한테 엄청 갚아야 해. 한마디로 빚쟁이지. 빚쟁이라 그런지 아직도 쓸 게 많아. 최소 한 권은 더 낼 예정이야. 시인은 시작부터 거침없이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 연세에 그런 로맨스가 가능할까 싶었다.나는 태아였어. 상화라는 자궁 속의 태아였지. 이 사실은 내가 그 자궁 속에서 나와 이 누리의 갖가지 세파를 무릅쓰며 노쇠한 뒤에도 퇴화될 수 없는 태고의 기억에 잠겨 있을 원점의 태아인 것을 뜻해. 시인이 이토록 부인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상화의 사랑 없이는, 상화와의 삶이 없이는 나는 두 가지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고백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두 가지는 지금까지 시인의 삶과 문학적 결실이다. 곧 시인에게 부인은 절대적인 존재, 태아의 나를 태 밖에서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인의 아내자랑은 거의 수다 수준이었다. 아내하고 다니면 다 좋아.(하하) 모든 장소가 다 잔치가 이뤄지는 장소 같아. 우리는 친해 아직도. 손잡고 다니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빠져 있으니깐. 1983년 결혼해서 30년 가까이 같이 사는 그 짧지 않은 일상의 사소한, 티끌 같은 시간들의 집적 자체가 감동이었지. 시집에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애달파하고 깨달음을 얻는 고은 시인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시인의 소소한 일상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인이 되기까지의 세월, 사유의 과정을 담은 시 118편을 담았다. 그의 시어는 때묻지 않았고, 늙지도 않았다. 팔순을 앞둔 어르신이 쓴 거라고 믿기기 않을 만큼 술술 읽힌다.표지에 실린 그림 역시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 몇 해 전 아내의 생일에 그린 그림이란다. 세상의 낮과 밤 배고프며 너를 사랑해야 겠다, 너를 엉엉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진실을 아늑자늑 가르쳐준 사람, 아, 상화는 어디에 있나, 나의 어머니인 아내, 너는 내 어머니의 무한이다, 그대 없는 나는 무이다 등 시인이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이렇게 아내에게 푹 빠져 사는 시인에게 부부싸움이 성립될까 싶어 그래도 간혹 싸우시죠?물었더니. 우린 둘다 싸우는 재능이 없어. 안 싸워. 싸울 것 같으면 어느 하나가 사라져버려. 내가 술이 코가 삐뚤어지게 먹고 들어와도 아내는 잔소리가 없어. 잔소리를 안 한다고 끝이 아니지. 언젠가는 꼭 들먹인단 말이야.(하하)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시인도 술 취해 집에 들어가면 아내 눈치를 본다는 거. 세상 남자 다 똑같다. 이어 물었다. 선생님,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지금이지. 사랑은 하였다도 하리라도 아니다. 언제나 사랑은 한다.팔순을 앞둔 시인은 아직도 청년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쉬는 날 없이 365일, 24시간 풀가동이다.따로 날 정해서 쉬는 거 없어. 나는 일이 내 놀이야. 난 밥도 맛있고, 술도 맛있고, 일도 맛있어. 책 읽는 것도 놀이야. 즐거워. 나는 아직도 책을 보면 떨려.시인의 이런 근면함이 다작의 밑거름이 됐다. 그 증거가 바로 지난해 완간한 만인보 30권이 아닐까. 1980년 육군교도소에 갇혀 구상을 시작해 만 30년 만에, 1986년 1권을 출간한 이래 25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 경이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총 작품수 4001편. 세계 시단에서도 오늘날의 문학에서 가장 비범한 기획이라고 평가받은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시인의 가장 절친이자 술친구인 백낙청 교수는 만인보는 이 자체로 충분히 경이로운 향연이니, 이제는 독자들이 자기 나름으로 즐길 일이 남았다. 대하소설 읽듯이 몇날 며칠 새워가며 내리닫이로 읽어낼 수도 있고, 공부삼아 꼼꼼히 읽을 수도 있다. 또 화장실 같은 데에 놓아두고 띄엄띄엄 읽어간다면 저자가 싫어할 텐가. 싫건 좋건 그런 독자가 있을 것이고 그도 또한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했다.시인은 만인보 완성 후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로 제2의 고향인 안성에서 완성했다는 것이라며 안성에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시인의 고향인 군산에서는 고은 시인의 문학적 가치와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만인의 물결 군산운동본부가 7월 초 발족했다. 생가 복원, 문학관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30년동안 살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해 온 안성시와 경기도는 무관심이다. 매년 가을, 노벨문학상 발표날만 시인이 사는 안성시 공도읍 대림동산이 떠들썩할뿐이다. 서운하지 않을까? 서운하긴. 1983년 5월 5일 결혼 직후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소개해 안성에 정착했는데 안성 살기 좋아. 이사 계획도 없는데 뭘.시인은 말을 아꼈다. 시인은 복잡한 서울 시내에 진입하자 옛날 이야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9월 초 수원에서 강연이 있다며 꼭 오라 하신다. 연신 손을 흔들며 말이다. 고은 시인을 만났는데 어찌 노벨문학상 한마디 못 건네고 오냐 싶을텐데. 기자 맞아?질문하지 않았다. 시인을 광적인 노벨문학상 올가미에 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기론 노벨재단은 수상 후보국의 주요 언론 보도까지 다 분석한다고 한다. 대중적으로 나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하니 시에 미쳐 사는 고은 시인을 조용히 응원하는 것이 최선일듯 했다. 노벨상이 뭔데. 올 가을만큼은 시인이 들려주는 삶과 사랑을 바라보는 광할한 시적 사유에 취해 보자.정작 왜 시를 쓰느냐고 묻지 못했다. 서운해 그의 시집을 뒤지고 또 뒤졌다. 꼬박 3일 동안 말이다. 일찍이 1991년 시집 해금강을 내면서 고은은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라고 써 있었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ekgib.com사진_하태황기자 hath@ekgib.com <고은 프로필>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에서 출생 본명 고은태(銀泰)1952년 불교 승려가 됨. 법명 일초(一超). 12년 동안 수행1958년 시 폐결핵으로 데뷔 1960년 첫 시집 피안 감성 발표1963~66년 제주도 금강고등공민학교 개교, 교장 겸 국어 미술 교사 재직1974년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이상화(李相華)와 만남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투옥1983년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냄2001년 세계한민족작가연합 회장현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 서울대 초빙교수단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