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반전의 삶'

탈북자 출신, 김규민 영화감독

“소 똥에 박힌 옥수수를 빼먹으며 한 달 반을 걸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넜죠.”

 

김규민(37) 영화감독의 북한 탈출기 중 일부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거친 김 감독은 한국에 온지 딱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어딜 가든 자신을 따라다니는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가 어렵게 느껴진다. 그는 꼬리표는 단지 운명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새터민 김규민, 탈북자 김규민이 아닌 ‘언제까지나 공산주의가 싫어 북한을 탈출한 대한민국 국민일뿐’이라고 소개한다.

 

탈북자를 소재로 다룬 영화 ‘국경의 남쪽’, ‘크로싱’의 조감독을 했던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첫번째 장편영화 ‘겨울나비’가 지난 7월 7일 개봉했다. 영화는 북한 식량난 때문에 겪는 모자의 비극적인 사연을 예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우고 급기야 종이와 흙을 씹어 먹고 김일성 사진은 불쏘시개로 사용된다.

 

결국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의 첫 데뷔작은 ‘북한의 굶주림’이었다.

 

“북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탈북자로서 빚을 갚은 심정이라고 할까. 굶어죽는 고통은 인간적으로 봤을 때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었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비참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

황해북도 봉산 출신인 김 감독은 글재주가 뛰어나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만담(漫談)꾼으로 지역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했고 연극동아리에서도 소위 잘나가는 학생이었다. 모범생은 중학교 시절 우연히 한국 라디오를 듣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불 덮고 몰래 듣던 남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근사근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 ‘마약과 같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던 북한 사회하고는 뭔가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보편화된 세상이 북한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북한의 잘못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자유에 대한 그의 열망은 청소년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특별전형으로 북한 리계순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 김 감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분석하는 과제물을 하면서 ‘진정한 공산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자유에 대한 열망이 폭발했다. 그 후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반공산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자의반, 타의반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김 감독은 정치적인 이유로 총살형을 선고 받았다. 수감 생활 중 못을 삼켰고 치료 과정에서 병원을 탈출했다. 배에 찬 고름을 욺켜 쥐고 한 달 반을 걸어서 두만강에 도착한다.

 

“삼엄한 북한군의 경비망을 피해 과감하게 대낮에 두만강에 몸을 던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죠. 성치 않은 몸이 북쪽이 아닌 중국쪽 강기슭에 닿았으니.”

 

두번의 탈출 끝에 그는 2001년 5월 남한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김 감독은 하나원을 나와 전라남도 나주로 향한다. 조용히 배농사를 짓고 싶어서 말이다.

 

“그 때 당시 나주경찰서 김석주 담당형사의 조언으로 2002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됐다. 북에서도 해주 당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고 배우의 꿈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공부하다 보니 연기보다는 연출쪽이 더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고 연기는 과감하게 포기했죠.”

 

그의 한국생활은 나름 평탄했다. 적응도 빨랐다. 좋아하는 연기도 잠깐 해보았고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 고생 끝에 어찌됐든 감독이 됐다. 결혼도 하고 예쁜 딸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분명 성공한 탈북자다. 하지만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족을 등지고 자유를 택한 저 때문에 40년 동안 군에서 일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이 시골로 추방당하고. 한국 와서 가족 찾으러 고향에 사람을 보내 봤지만 허사였어요. 점쟁이한테 물어보니 어딘가에 살아는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김 감독에게 ‘통일’은 숙명적인 과제다.

 

“북한 구호물자와 식량 대부분을 북한 공권력이 받아먹고 있는 가운데 이 공권력이 역으로 국민들은 탄압하는 도구로 전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누구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굶어가는 우리 형제를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는가. 10년 전 남과 북이 형제관계였다면 지금은 이웃사촌 보다 못한 소원한 관계가 됐죠. 북한은 중국에겐 주기 싫고 남한이 떠안기는 벅찬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는 통일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많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야 하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아내를 위해 통일이 되면 꼭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성공한 탈북자요? 저는 평범한 대한민국 아저씨입니다. 단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통일의 당위성과 중요성 등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일뿐이죠. 차기작은 흥행도 염두해 두고 작업할 예정인데 아마 내년 정도면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

 

김 감독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뭘까.

 

굶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말하고,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고…. 그런 것들이라면 그는 지금 행복할 터인데 웃음소린 허탈하다. 분명, 진정으로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강현숙기자 mom1209@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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