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북부지역에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됐다.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연천군, 포천시 및 파주시 문산읍에서 헌당기념예배를 개최, 지역주민과 군인 등 1천800여 명이 참석한 현장이 그것. 지난 7일 하나님의 교회는 이들 경기 북부 3개 지역에서 헌당식을 거행했다. 부산과 경남 김해, 경북 경주와 김천 등 영남권에서 5개 교회 헌당식을 마무리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이다. 국내 최북단 및 접경지역에 잇따라 새 성전 설립 베이지색 외관이 온화한 느낌을 주는 ‘파주문산 하나님의 교회’(연면적 3천242㎡). 깔끔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연천 하나님의 교회’(연면적 1천45㎡). 웅장함이 느껴지는 ‘포천 하나님의 교회’(연면적 2천605㎡). 각각의 기품 있는 교회에서 헌당식이 이어졌다. 각 성전 내에는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교육실, 시청각실, 다목적실, 휴게실, 식당 등 다양한 공간들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교회의 주목적인 예배뿐 아니라 △성경 공부 △연령별 모임 등 이웃 간 소통과 화합 등을 위한 역할로 활용된다. 실제로 파주문산교회는 경의선 문산역, 문산천, 통일공원 등과 인접해 있으며 가까운 곳에 아파트 단지, 군부대 등이 있어 군 장병들이 휴가 및 외출 시 교회 방문이 용이하다. 연천교회는 이미 다방면에서 군인들을 배려하고 있다. 틈틈이 면회를 가기도 하고, 휴가 나온 군인들이 교회를 방문할 때면 정성껏 만든 음식을 챙겨주는 등 어머니의 사랑을 나누는 데 구슬땀을 아끼지 않고 있다. 때마침 휴가 첫날 파주문산교회 헌당식에 참여하게 된 여인권 일병(23)은 “군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군부대 가까이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라며 “군인으로서 국방의 의무도 다하고 하나님의 가르침도 잘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파주문산교회 헌당식에 참석한 박미영씨(22)는 “생활 속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포천교회 헌당식에서 고보경씨(50)는 “아름답고 포근한 성전이 마련되어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찬 마음에 다들 내 집처럼 한마음으로 깨끗하게 청소했다”고 뿌듯함을 전했다.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설교를 통해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문화와 종교가 다른 세계 각국에 새 언약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이어 성경을 살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언제나 복음의 길을 열어주시고 무한한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밝혔다. “새 성전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여 성도들로 가득해지고 넘치는 축복을 받기 바란다”고 기대했다. 한편, 교회 인근 주민들은 입을 모아 하나님의 교회가 들어서니 지역 곳곳이 밝고 깨끗해졌다고 칭찬일색. 파주·연천·포천지역 교회 성도들이 헌당식 전부터 도심 정화활동을 비롯 △이웃돕기 △제설작업 △김장 나눔 △연탄 지원 △이·미용 봉사 등 세심한 봉사로 지역사회에 기여했다. 권소영 기자
유월절(逾越節, Passover).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살과 피를 표상하는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새 언약을 세우고 인류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약속한 절기다.(마태복음 26장, 누가복음 22장) 성력 1월 14일 저녁으로, ‘재앙이 넘어가는 절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켜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대사건에서 유래됐다.인류의 생명을 위해 새 언약 유월절을 세운 그리스도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전 세계에 사랑을 통한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성도들이 그 주인공. 세계 175개국의 지역교회를 기반으로 오롯이 ‘70억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행복을 전하자’는 취지로써 사랑과 봉사에 힘쓰는 그들을 만났다.사랑이 절실한 시대, 어머니 마음으로 실천 봉사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성경 야고보서 2장)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실천하는 사랑’. 해마다 2~4월께 ‘전 세계 유월절사랑 생명사랑 헌혈릴레이’를 열고 대대적인 사랑실천에 발 벗고 나서는 하나님의 교회. 올해도 각종 질병과 응급사고 등으로 혈액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생명을 나눈다. 9일 수원에서도 헌혈행사를 열었다. 직장인, 대학생, 주부 등 각계각층 500여 명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참여했다. 현장을 방문한 신창우 경기혈액원장은 “국내의 경우 주로 학생, 군인들의 헌혈에 의지하는 상황이다 보니 제때 필요한 혈액을 공급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며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헌혈해주시니 일반인들도 헌혈에 참여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기정 수원시의원도 함께한 자리에서 “헌혈은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정말 소중한 봉사인데, 하나님의 교회가 주도적으로 해주시니 대단히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모아져 생명을 살린다는 기쁨과 보람에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한 현장이 됐다. 20회 이상 헌혈에 참여하고 있다는 장미영씨는 “생명을 살리는 헌혈을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게 되어 보람과 감동이 크다”며 “앞으로도 이웃들을 돕기 위해 계속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봉사의 생명력은 하나님의 사랑, 세계 각국서 찬사 태평양을 건너 뉴질랜드 오클랜드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같은 날 헌혈행사가 열려 150명 가량이 생명 나눔에 동참했다. 앞서 2일 대전에서는 260명이, 5일 미국 샌티에서는 390명이 각각 헌혈에 참여했다. 오는 15일에는 하나님의 교회 본당인 새예루살렘 판교성전에서도 헌혈행사를 개최, 700여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혈액은 인공물질로 대체할 수 없고 오직 누군가의 헌혈로만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헌혈은 생명을 나누는 숭고한 봉사다. 하나님의 교회가 2016년까지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진행한 헌혈행사는 664회에 달한다. 14만7천950명이 참여한 가운데, 5만7천명가량이 혈액을 기증했다. 1명의 헌혈로 3명을 살린다고 볼 때, 이는 17만여 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린 것과 같은 성과다. 교회 관계자는 “각종 질병과 응급사고 등으로 혈액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하나님께서 새 언약 유월절 진리를 세워주셔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소중한 생명과 사랑을 나누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교회 자원봉사는 사시사철 이뤄진다. 국내 전역을 비롯해 미국, 영국, 호주, 페루, 브라질, 인도, 말레이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국에서 환경보호, 헌혈, 이웃돕기, 재난구호, 제설작업, 서포터즈, 농촌일손돕기 등 다양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헌신적인 자원봉사를 펼친 공로로 하나님의 교회는 영국 여왕 자원봉사상을 비롯해 미국 대통령자원봉사상 금상(단체 최고 상 5회) 등 세계 각국 정부와 기관으로부터 2000여 회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또한 2016년 12월 13일에는 유엔 중앙긴급구호기금(CERF) 고위급회담에 교회로서 최초로 초청받았다. 이날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든 인도주의적 활동은 어머니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앞으로도 지구촌 곳곳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속적인 도움을 기약했다. 권소영 기자
개신교 교단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6일 사순절(四旬節·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을 기념해 안산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이날 기도회에는 NCCK 조성암 회장과 김영주 총무를 비롯해 회원 교단 목회자와 신도, 세월호 가족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오는 10일까지 이어지는 금식 기도회에는 남재영 목사(NCCK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가 금식에 나선다. 조성암 NCCK 회장은 이날 합동분향소 기독교 부스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고 있다”며 “세월호로 희생된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의 부활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교회의 사순절기는 세월호를 기억하고, 참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도하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신 아홉 분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여정이 되어야 함을 간곡하게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NCCK는 사순절 기간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 현장 방문, 탈원전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소녀상 지킴이 응원 방문 등을 계획 중이다. 연합뉴스
장원으로 급제하며 영조의 주목을 받다폐해를 개혁하여 백성을 구제하는데 뜻을 가지다유형원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이하 한교연)가 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오전 11시~오후 2시까지‘3.1 만세운동 구국기도회’를 개최한다. 이날 기도회는 총 3부로 나눠 ▲식전행사 ▲국민의례·대회사 ▲구국 기도회 순으로 진행된다. 한기총과 한기연 공동 주최로 진행되는 인라 기도회 설교는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이 집도, ‘진리와 자유’ 주제아래 요한복음(8장 31-32절)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어 축사는 한교연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가 맡는다. 한편,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애국애족 정신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로 애국의 기치를 높였다. 권소영기자
영조와 특별한 관계를 맺다균역법의 제정, 공공성의 강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효찰대본산 용주사(龍珠寺)가 내달 새움을 트는 계절을 맞아 입학식과 다례제 등 행사를 연다. 우선 3월 4일 오후 1시 관음전에서는 불교교양대학·불교대학 입학식을 거행한다. 불교에 관심을 둔 불자(교양대학)와 기본교육(교양과정 포함)을 이수한 불자(불교대학)를 대상으로 한 이날 입학식은 예비불자를 위한 공부 길을 축하하는 자리다. 불교교양대학 입학생은 석가의 가르침을 받는 자가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한 서약식인 수계의식(受戒儀式) 봉행에 이어 ▲불자예절 ▲기초상식 ▲부처님 생애 ▲불교교리 ▲수행방법 등을 이수한다. 또 불교대학 입학생은 중앙승가대·동국대·사찰 등서 강단에 오르는 스님·교수진의 지도아래 ▲불교역사 ▲불교문화 ▲불교사상사 ▲포교 방법론 등 심도깊은 불가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운다. 이어 3월 12일 경내 관음전에서 다례의 향으로 사찰을 적신다. ‘혜거국사(惠居國師) 1043주기 다례제’가 그것으로 한국 불교 최초의 국사이자 용주사의 전신인 옛 갈양사 중창주인 혜거국사 열반 1043주기를 기리는 다례제(茶禮祭)를 봉행한다. 혜거국사는 여주에서 출생(899년), 고려 정종 때 왕사로 책봉됐다. 홍화사·광명사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경전을 강설한데 이어 수원 갈양사를 중창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입적(974년) 후 성종의 명에 의해 탑호 보광(寶光)·시호 홍제존자(洪濟尊者)로 칭했다. 한편, 25일 오후 3시 용주사 거사회를 이끄는 제7대 거사회장 이·취임식도 함께 열릴 예정이다. 권소영기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가 지난 13일 발생한 北 김정남 피살사건에 대해 공공의 장소에서 벌어진 청부살인 형태의 극악범죄에 대해 엄중하게 규탄했다. 20일 한기총은 보도자료를 통해 “국제사회가 이번 피살 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하는 가운데 한기총은 적극적인 공조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밝힐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네가지 입장을 밝혔다.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 목사는 보도에 덧붙여 “김정남 피살사건은 첫째, 고귀한 생명을 잘못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배후를 명백히 밝혀 당사국을 제재하고 재발을 방지하자”며 “둘째, 한국과 제3국에 있는 탈북민들의 생명이 위협받게 된 시점에서 관계 당국은 탈북민의 안위와 신변을 보호하라. 셋째 북한은 앞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끊임없는 도발로 안보리 결의에 대한 중대한 위반행위를 범하고 있다”며 규탄했다. 권소영기자
남인계 명가의 후예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호는 청담(淸潭)이고, 본관은 여주로, 우리가 이른바 ‘실학자’라 부르는 성호 이익과 같은 가문의 일원이다. 이중환이 속한 여주 이씨는 조선 전기 세조 연간에 병조 참판을 지낸 이계손 때에 이르러 가문 성장의 기반이 마련되었다.이후 선조 연간 좌찬성을 역임한 이상의(李尙毅) 때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小貞洞)에 정착하면서‘정동 이씨’라고도 불렸다. 이상의는 북인계의 한 분파인 소북(小北)으로 활동하였으나, 후손들은 인조반정 이후 남인계로 정치적으로 변신하여 활동하였다. 이런 모습은 비단 이들 이외에도 유형원 가문이나 윤휴 가문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후손들은 남인 세력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였다.이중환의 고조인 이지정의 호는 청선당으로, 당대에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초성이란 초서의 명인이라는 의미이다. 이지정은 앞선 초서의 제1인자라 평해지는 황기로를 이어 초서에 능했다. 이지정의 뒤를 이어 이중환의 부친인 이진휴도 글씨에 능하여, 이진휴를 본 중국 사신이 “동쪽에 와서 좋은 글씨를 보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한편 이진휴는 서인 집권기인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었지만 이진휴는 지속적으로 관직 생활을 하며 승정원 도승지까지 역임하였다.남인계 청론의 중심에 서다이중환은 24세 때인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를 거쳐 1717년 김천도 찰방으로 나가 활동하였다. 이익이 쓴 이중환의 묘갈명에 따르면 김천에 이중환의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거사비는 흔히 선정비라 말해지는 비석의 일종이다.이후 이중환은 승정원 주서를 거쳐 경종 대에는 전적과 병조 정랑 등을 지냈다. 이즈음 이중환은 이인복(李仁復), 오광운(吳光運), 강박(姜樸), 강필신(姜必愼)과 함께 시단인 백련시사를 결성하였다. 북악산 자락에 있는 백련봉 정토사에서 시사를 결성한 것이다.백련시사가 주목되는 것은 이중환 등 구성원들이 1722년(경종 2) 경 남인 내에서 허목(許穆)을 종장(宗匠)으로 청론(淸論)을 내세우며 분파된 문외파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 남인은 문외파, 문내파, 과성파 등으로 분파되었다.문내파는 숙종조 남인 집권기 정치권력에 깊숙이 개입하여 정치 의리상 문제가 있는 인물이나 가문이 속한 세력이고, 과성파는 문내파와 문외파 양자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던 세력들이었다. 남인의 분파는 정치 의리상 문제가 된 인물들을 배제하여 정치적 진출을 모색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중환, 이인복 등이 백련시사를 결성한 것은 이 과정의 연장선상이었다. 주지하듯이 경종 즉위 이후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심각한 당쟁이 있었다. 경종 즉위 이후 1721년(경종 1) 노론 측에서 연잉군(후일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다가 결국 소론 세력의 반격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를 신축옥사(辛丑獄事 혹은 신축환국이라고도 함)라고 한다. 이어 1722년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서를 제출하였는데, 내용의 핵심은 노론이 3가지 수단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노론의 김창집·이이명 등 상당수가 화를 당하였다. 이 일로 목호룡은 부사공신으로 동성군에 봉해졌는데,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이지만 이때 목호룡은 자신의 공을 이중환에게 넘기려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익은 묘갈명에서 “고변을 주도한 자가 후환을 염려하여 남을 끌어들여 허물을 전가시키려고 기도”한 것이라고 하였다.그런데 이 일로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1726년(영조 2) 이중환은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휩쓸려 국문을 당하고 결국 절도에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 10월 옥사에 참여한 증거가 없어서 유배형이 해제되었으나, 12월 다시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사망 직전인 1756년 정3품의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급을 받았다.사대부의 삶의 터전을 설계하다이중환의 저술인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경에 저술되었다. 이중환이 작성한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기록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확인된다.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것은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후일 정약용이 택리지의 발문에서 “국내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농장에 대한 좋고 나쁜 점을 논한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중환은 이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곳은 인심과 산천이 좋고 경제적 교류도 좋은 곳이어야 하였다.『택리지』는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으로 구성되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민(四民) 중 사대부의 신분이 갈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 역할과 사명, 사대부가 살 만한 곳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팔도총론」에서는 전국 8도의 지리를 논하고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관련해서 서술하였다. 팔도의 역사와 지리, 지세, 기후, 산물, 인물, 취락 등을 서술하였다. 「복거총론」에서는 사대부가 살기 좋은 곳의 입지조건을 설명하였는데, 지리와 생리, 인심, 산수 등의 조건을 들어 서술하였다.이중환의『택리지』는 기존 지리지와 서술 태도가 달랐다. 기존 지리지는 군현별로 연혁이나 성씨, 풍속, 산천, 역원(驛院) 등으로 분류하여 백과사전적으로 서술하였다. 이에 비해 『택리지』는 저자가 국토를 두루 답사한 결과를 기록한 것으로, 팔도총론나 도별지지와 같이 우리나라를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주제별로 다룬 인문지리서라는 차이를 보인다. 『택리지』가 편찬된 뒤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책의 제목도 바뀌어 많은 이본이 생산되었다.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이다.글_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서자출신의 가난한 학자 북학파를 대표하는 실학자 초정 박제가는 1785년에 편벽된 병을 뜻하는 ‘벽(癖)’을 새롭게 해석했다.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열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것은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학적 사고는 그의 출신이 조선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에서 출발한다.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 11월 5일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다. 승정원에서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박평은 박제가의 나이 11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는 생계가 매우 곤란해졌지만, 어려운 형편에서 그가 글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공이 컸다. 비록 어려운 형편에 이리 저리 이사 다니느라 가지고 있던 책들은 흩어졌지만, 박제가의 모친은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 또한 박제가가 24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박제가가 학자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어머니 외에 장인인 이관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충무공의 5대손이었던 이관상은 박제가를 보자마자 사위로 삼았다. 장인과 사위는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했고 서로 닮아 뜻이 잘 맞았다. 1767년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백탑시사’라는 문학동인 모임을 결성하였다. 백탑은 현재 탑골공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말한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이 석탑이 햇빛을 받으면 하얀색으로 보여 “백탑”으로 통칭되었다.1768년 연암 박지원이 백탑 부근으로 이사 오면서 자연스럽게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백동수,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백탑시사 모임은 확장되었다. 백탑시사는 개방성과 개성을 존중했고 그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발휘하고 꽃을 피웠다. 이들의 인연은 1779년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나기 힘들었다. 청나라 연행 박제가가 처음 중국을 가게 된 것은 1778년이다. 정사 채제공의 도움으로 박제가는 벗인 이덕무와 함께 그토록 소망했던 중국으로 떠났다. 조선후기 실학자 가운데 중국을 가장 많이 다녀 온 인물이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모두 네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첫 번째 연행 때는 관직 없이 종사관의 신분으로 갔었지만, 두 번째 연행 때부터는 관직에 있으면서 공식적으로 중국 사절단을 수행하였다. 1790년에는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서호수의 종사관으로 유득공과 함께 열하까지 갔다. 네 번의 연행을 통해 박제가는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해 갔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주관자인 기윤(紀?)을 방문하여 교유 관계를 맺기도 했다. 훗날 기윤이 조선에서 온 사신의 인편으로 박제가를 그리워하는 서신을 보내자, 그것을 본 정조는 “기윤의 편지를 보니 박제가는 나라를 빛낼 인재가 아닌가”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기윤은 박제가가 만년에 귀양살이를 하자 위로와 안부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연행은 1790년 5월 27일 출발하여 북경에서 40여 일 머물다 돌아왔는데 9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정조는 다시 중국에 갈 것을 명령하였다. 국내 땅도 밟아 보지 못하고 다시 말머리를 중국으로 돌려야 했던 것은 원자 탄생에 대한 건륭제의 축하 인사에 답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년에 두 차례나 중국 사절로 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국어와 만주어를 동시에 할 수 있으면서 외교적 실무 능력을 갖춘 것이 정조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박제가가 마지막으로 중국에 간 것은 1801년이다. 이 연행에는 유득공도 함께 갔다. 박제가는 1796년 연행의 추억을 정리한 5언 절구 140수 연작의 「연경잡절(燕京雜節)」을 지었다. 훗날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암이 박제가가 중국 문인과 교유한 시와 편지 등을 엮어 「호저집(縞紵集)」을 펴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중국 인사만도 172명이었다. 조선시대에 박제가처럼 중국 명사와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북학의」의 저술 박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학의(北學議)」는 채제공의 도움으로 첫 연행 길에 오를 수 있었던 1778년(정조) 9월 29일에 완성되었다. 「북학의」의 ‘북학’이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그렇게 된 원인은 우물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누구나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박제가는「북학의」에서 수레를 널리 이용하여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견고한 선박을 만들어 해외 여러 나라와 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적인 쇄국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상품유통의 발전, 그리고 통상무역은 박제가의 경제관의 주요 골자였다.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려 쌓여 있는 조선의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이를 해상무역으로 발전시키면 국력은 자연히 강성해 질 것이고 백성의 생업도 안정될 것으로 본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론은 현실을 개선하고 이를 위해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데 그 초점이 있었다. 박제가를 포함한 백탑시사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북벌은 이미 시대과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들은 조선이 소중화라 여기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로 상공업을 천시했다. 박제가는 중화문화의 계승자는 조선이 아니라 청이라 보았고, 사농공상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당시로는 매우 급진적인 사고였다. 이런 그의 주장 탓에 박제가는 ‘당괴唐魁’라는 지탄도 받았다. 박제가의 개혁안은 경제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실질적인 방안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업적 이익이나 물욕을 경계했던 유학적 가치관에 반하는 개혁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분과 문벌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기득권에 강한 도전장을 내밀었던 박제가는 1801년 노론 벽파의 미움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2년 7개월간 귀양살이를 마친 뒤 1804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05년 4월 2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글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