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지역사회 곳곳 헌당식 갖고 하나님의 사랑 밝혀

영국 여왕상 수상, 유엔 최초 종교인 연설 등 세간이 이슈를 몰고 있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교회)가 정유년 새해 헌당식을 잇따라 개최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달 30일부터 2일까지 사흘에 걸쳐 부산과 경남 김해, 경북 경주와 김천 등지서 총 5개 교회의 헌당식을 거행했다. 우선 축복의 포문은 부산에서 열었다. 부산연제교회와 부산사하 하나님의 교회·김해내동교회에서 열린 헌당식에는 총 3천800여 명이 참가했다. 특히 참석자들은 종교적인 공간과 더불어 도심 속 휴식처를 연상케하는 내부시설의 기품있는 건축양식이 자아내는 성스러운 분위기 등에 감동으로 화답했다. 이번 헌당예배 설교를 통해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새 성전 마련의 의의와 함께 하나님의 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70억 인류 전도의 가치를 강조했다.김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천국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70억 전도는 전 세계에 축복을 나눠주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하고 큰일”이라고 확고하게 밝혔다. 이어 “그 일을 위해 아름답고 큰 성전을 세워주셨으니 이 지역은 물론 대한민국과 아시아,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나눠주는 시온이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한편, 2일 경북 경주와 김천에서도 헌당기념예배를 진행한다. 이어 원주, 파주와 연천, 포천 등 전국에서 하나님의교회를 세우는 헌당식이 예정돼 있다. 권소영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7. 북학과 양반의 상업종사를 주장한 농암 유수원

양반도 상업에 종사시키자. 우서(迂書)에 나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 상업을 천업으로 여겼는데, 양반도 상업에 종사시키자니. 우서에는 매우 선진적인 산업관과 체계적인 상업진흥책을 담고 있다. 우서라는 책을 누가 썼는지도 한동안 잘 몰랐다. 우서의 저자가 농암 유수원(1694~1755)이라고 뒤늦게 알려지면서 과연 그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유수원은 소론의 경세가였다. 1755년(영조 31) 5월에 나주(羅州)의 괘서사건(掛書事件)에 연루되어 대역부도의 죄로 사형되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상당기간 알려지지 못했다. 유수원은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는데, 주자성리학의 해석에만 구속되지 않고 폭넓은 사고를 가졌다. 가령 관중, 한비자의 생각도 자신의 경세론에 활용했다. 주희를 흉내내어 성의·정심을 거론하고 군심의 바름만 강조하는 데 그치고 정작 경세의 대책을 갖추지 못한 현실을 비판했다. 그가 경세와 실무를 중시했던 김육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그의 지향을 알 수 있다. 유수원은 당시 이익추구를 경계하는 주장을 반박했고 부(富)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가 말하는 “의식이 넉넉해야 예절을 안다(衣食足而知禮節)”는 말은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倉?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는 관중의 말에서 온 것이다. 유수원이 경세의 뜻을 품고 방책을 담아낸 저서가 바로 우서였다. 우서는 10권 7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국허민빈(國虛民貧)의 현실을 심각하게 여기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자 했다. 가난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검소함이라고 하는 세태를 힐난하기도 했다. 농업을 긍정적으로 여겨 상업을 억제하는 당대에 그가 상업진흥론을 제시한 것은 획기적이었다. 유수원은 북학파의 선구라 할 수 있다. 그의 경세론은 대부분 중국을 사례를 들고 있는데 중국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질타했다(?논변통규제이해?). 중국을 배운다는 것이 그 명목만 답습하기도 하고, 혹 그 껍데기만 모방할 뿐, 그 정신과 골자의 소재를 얻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 폐단이 부허(浮虛)·무실(無實)로 귀착하게 되었으며, 무실(無實)이 무한한 병통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개탄했다. 중국제도를 숭상한다는 것이 지엽말절(枝葉末節)·허명문구(虛名文具) 아닌 게 없다며 실사(實事)를 강조했다. 무엇이 실사인가? 농암은 정사(政事)가 실사라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된 경세론을 피력했다. “학제가 이뤄지면, 유생이 스스로 경사에 힘쓰게 되어 나중에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관제가 밝아지면, 관리들이 모두 직책에 봉사하여 일을 않고 녹봉만 타먹을 염려가 없게 될 것이다. 고적(考績)이 엄격하면, 파면과 승진이 공정하여 훌륭한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분수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추기(樞機)가 주밀하고 품식(品式)이 구비되어 오직 실사(實事)에 힘쓰고 부론(浮論)을 높이지 않으면, 국체가 존엄해지고 세도가 청명해져 당파 싸움의 염려가 없어질 것이다.”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사민(四民, 사·농·공·상)이 분별되는 것, 정역(征役)이 고른 것, 재화를 만들고 취하는 데 법도가 있을 것 등 세 가지를 말했다. “사민이 분별되는 것은 민산(民?)을 만드는 것이요, 정역이 고른 것은 농사짓는 시기를 빼앗지 않는 것이요, 재화를 만들고 취하는 데 법도가 있는 것은 백성의 힘을 펴주고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해주는 것이다.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하는 데는 경작과 방직에 법도가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유수원은 사민의 분별을 강조했다. “사민의 업(業)이 아직 분별되고 있지 않았다.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國虛民貧]은 오로지 여기서 비롯되었다. … 비록 삼남의 비옥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햅쌀과 묵은 쌀이 이어지는 집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처럼 민산(民産)이 텅빈 게 심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사민이 분별되지 못해 각자가 제 직업에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총론사민?이란 글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사민분별은 농암의 경제정책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을 유기적으로 파악했으며, 각 직업이 전력을 기울일 수 있을 때,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농업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수리도 갖추지 않고, 농사일에 법식도 없어 농사가 무실함이 심하다”고 지적했는데, 그의 경제론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상업진흥론이었다. 교통수단과 상업의 낙후성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사례를 들어가며 진흥책을 제시했다. 지방에 행상만 있고 점포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무릇 점포라는 것은 반드시 대상(大商)이 있어서 자본을 많이 내어 점포를 크게 차린 연후에야 물화가 몰려들어 번성할 수 있다.” 점포에 많은 물건을 구비하고, 사람도 많이 고용해야 이익도 많이 날 수 있다고 했다. 물가가 낮아져야 소비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직업 분화와 전문화가 잘 이뤄져야 생산이 빠르다 등 지금 상식에 비추어 전혀 손색없는 경제론을 전개했다. 부자와 상인의 사회적 기여를 기대하기도 했다. 유수원의 사민론은 직업제도의 확립과 사회적 분업의 심화를 의미했다. 그는 양반이 일하지 않는 현상과 문벌의 폐해를 심각하게 보았다. 농·공·상업을 천업이라 하여 양반이 종사하지 못하게 하니, 양반을 우대한다는 것이 실제로 양반을 아무것도 못하게 구속하여 굶어 죽게 한다는 것이다. 양반이 농공상업에 종사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백성에겐 일정한 직업이 없고, 시전에는 일정한 額이 없어 생활의 곤궁함이 극도에 달했음”을 개탄했다. 그리하여 사민을 신분제적 질서가 아닌 직업선택의 문제로 보아 모든 사람을 선택한 직업에 종사하여 일하게 함으로써 생계를 확보하고 생산과 이익 창출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다. 유수원은 소론의 정책이론가로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노론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는 시대에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비명에 갔다. 그의 문벌에 대한 문제의식은 실로 타당하다. 신분질서가 아닌 직업질서로의 발상 전환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상업론의 제시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상업진흥론은 박제가로 이어졌다. 그는 북학파의 선구였을 뿐 아니라 외래 문명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전범이 될 만한 자세를 제시했다. 글_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용인서 6~7세기 추정 신라 고분·유물 발굴

용인에서 6~7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과 유물 등이 발굴됐다. 용인시는 기흥구 보정동 산 121번지 일대 ‘보정동 고분군’에서 6세기 말~7세기 초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2기와 유물 15점을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보정동 고분군’은 임진산성에서 삼막곡까지 이어지는 능선에 100여 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대규모 고분군으로 이 지역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북동과 보정동 일대 삼국시대 주거유적 및 할미산성, 석성산성과 함께 조성된 유적으로 삼국시대 용인지역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과 함께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 2기의 석실분(돌을 쌓아 방처럼 만든 무덤)과 뚜껑이 있는 그릇(유개고배), 항아리 모양 토기(토기호), 쇠칼 등 15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축조방법과 형태 등을 분석한 결과 6세기 말~7세기 초 신라에 의해 축조된 고분으로 확인됐다. 발굴지역은 보정동 고분군 진입로에 있는데다 인근 주민들이 경작을 위한 농로로 사용하면서 일부 고분이 파괴돼 있어 훼손이 우려됐었다. 그러나 고분의 덮개돌이 주저앉으면서 내부가 도굴되지 않아 유물과 유구가 매우 양호하게 보존돼 있었다. 시 관계자는 “보정동 고분군은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선조의 무덤군으로 2002년 지표조사 후 일부 고분이 발굴돼 복원됐으나 문화재 보존과 정비를 위해 추진하는 학술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올해 상반기에 추가 발굴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용인=강한수·안영국기자

하나님의 교회, 전세계 대학생 참여하는 ‘ASEZ 그린 캠퍼스 정화활동’ 전개해

15일 오전 10시께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오산대학교 정문 앞에 모였다. 이들은 “Let’s save campus, Let’s save the earth”라는 슬로건 아래 캠퍼스에서 환경정화 자원봉사를 펼쳤다. 같은날 오전 11시께 가천대학교 글로벌캠퍼스와 수원 경기대학교 후문에서도 대학생들이 ‘지구 수비대’를 자처했다. 이같은 활동을 펼친 ASEZ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대학생자원봉사단이다. 이들은 어려움에 처한 지구촌 가족에게 희망을 전하고자 환경보호활동과 사회복지활동, 교육의식계몽활동, 긴급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ASEZ 그린 캠퍼스 정화활동’은 국내를 비롯해 세계 80개 대학 캠퍼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동참했다. 단국대, 인하대, 인천대, 경인교대 등 경기·인천지역은 물론 홍익대, 포항대, 충북대, 조선대, 인제대 등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 프랑스 파리5대학,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등 여러 나라에서도 진행했다. 봉사에 참여한 김혜인 학생(수원대 4학년ㆍ여)은 “미래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면서 “우리의 노력으로 깨끗해진 오산시의 모습을 보게 되니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나님의 교회 관계자는 “인성교육과 현장 체험을 함께 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다”면서 “세계 각국 대학생들이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병들어가는 지구를 보호하고 인류와 모든 생명을 지키는 일에 솔선수범하고자 하는 열정과 패기를 모았다”고 말했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지속적인 봉사 실천한 결과 미국 대통령자원봉사상 금상(단체 최고 상 5회), 영국 여왕자원봉사상 등 세계 각국 정부와 기관에서 수여한 상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2000여 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권소영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6. 수원 어랑천의 취석실 우하영

불우한 환경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우하영 우하영의 자는 대추(大猷)이고, 호는 취석실(醉石室) 또는 취석당(醉石堂)이며,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생부는 우정서(禹鼎書)로, 이후 큰 아버지 우정태(禹鼎台)에게 입양되었다. 우하영이 속한 단양 우씨는 우성훈(禹成勳), 우성전(禹性傳) 등이 16세기 이후 사림 세력과 관계를 가지며 활동하였다. 우성전 이후 우하영 선대의 정치적 진출의 모습이 찾아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향촌 사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실세한 후 향촌 사족으로 생활해 가던 집안에서 출생한 우하영은 조부에게서 수학하였다. 우하영은 이후에도 12차례 대ㆍ소과에 응시하였으나 연속적으로 실패하자 과거를 아예 포기하고 세거지 일대의 논 13두락(斗落)을 경작하는 향촌사족으로 머물러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전국을 유력하면서 농민 대중의 입장에서 현실을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위에서 파탄상태인 농가경제를 재건하고 문란한 사회경제적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을 그의 사상적, 사회적 과제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후일 「천일록」이라는 우하영 학문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면에는 애민의식(愛民意識) 내지는 동포애(同胞愛)가 내재되었다. 정조와의 만남과「천일록」의 부상 정조는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초야의 지식인들에게 그 대책을 문의하는 구언하교(求言下敎)를 내렸다. 개혁군주 정조와 우하영과의 만남은 이러한 구언하교 가운데 1796년(정조 20)에 내린 것에서 이루어졌다.즉 정조는 초봄까지 겨울 혹한으로 모든 나무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동사하는 재해가 있자 관례대로 구언하교를 내린 것이다. 즉 초야의 선비들에게 정치와 백성의 고통에 대하여 묻도록 하고 그에 대한 방안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 천일록(실학박물관) 이때 향리에서 농사에 힘쓰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을 쏟고 있던 당년 56세의 시골 유생 우하영은 같은 해 4월 25일 자신의 시무책을 별도로 곁들여 응지진소하였다. “이미 평일 집록해 둔바 있는데 끝내 말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어서 감히 그것을 대략 깍고 간추려서 책자를 만들어 망령스럽게도 응지하는 도구로써 바치오니 성명께서는 깊이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우하영의 응지소에 대해 정조는 “그대가 진술한 13조목은 모두 백성과 나라의 실질적인 쓰임에 관련이 있으니, 그대는 분명 재능을 품고 있으면서 쓸 길이 없는 인물임이 틀림없다.”라고 비답하고, 조목별로 상세히 타당성 여부 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등본을 관계 부서와 비변사에서 필사할 것을 하교하였다.이때 우하영이 제출한 시무책은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역사의 큰 흐름 속에 묻혀 버렸을지도 모를 향촌 유생 우하영의 학문과 「천일록」의 존재가 정부와 국왕에게 알려지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796년 응지소를 제출한 지 8년 후, 64세의 우하영은 두 번째로 국왕의 윤음에 대해 상소하였다. 개혁 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인 1801년(순조 4) 2월 순조의 구언하교에 대해 응지소를 올렸다.이 상소에서 그는 평소에 저술하고 있던 「천일록」가운데서 긴요한 부분의 요점을 뽑아 상소한다는 것과 선대왕 때도 특별히 정소하여 특별한 포상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군덕(君德)에 대한 내용 10조목과 시폐 10조의 목록을 밝혀놓았다. 그러나 이때 역시 세도 정국 하에서 우하영과 같은 향촌 지식인들의 개혁안이 채택될 리는 없었다. 실증과 경험에 바탕한 「천일록」 우하영은 스스로 「천일록」이라는 제목에 대해 “천 가지 생각에 하나는 쓸 만한 것이 있다”고 겸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옛 사람들의 저서를 널리 읽어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역사·지리 등 그의 사상이나 견해를 기록해 둔 것을 모은 것이 「천일록」이어서 우하영의 실증적인 학문 연구 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서적이다. 또한 우하영은 경험을 중시하였다. 우하영은 과거를 포기한 후 국내 산천을 유력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통해 농업 관행을 조사하는 등 현실 생활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농업 관행의 조사를 통해 우하영은 각 지역의 농업실상을 점검, 문제점을 찾은 후 이에 대한 대책, 즉 농업 생산의 증대와 농민의 근검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우하영은 경종법(耕種法)이나 중경제초 등 농사 전 작업에 개혁론을 제시하는 한편 의생활의 기본이 되는 양잠의 장려할 것을 주장하면서 재배법을 정리하였다. 또한 관개를 위한 수리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정부에서 제언 축조를 위한 법제를 정비하고, 지방에서는 8월과 9월에 제언의 수축 원칙을 세워 시설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하자고 하였다.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한 이상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 대한 대책과 함께 우하영이 가장 주력한 부분은 농정책이라 할 수 있다. 우하영은 농사에 주력하기 위한 첫걸음은 농정을 책임진 지방관의 의욕과 인정(仁政)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고, 농정 장려에 지방관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였다. 아울러 각 지역에 권농관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이밖에도 우하영은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사회질서가 해체되는 것을 막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향약을 제정하였으며, 농사을 버리고 유식(遊食)하는 자 등을 귀향시키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 등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근농(勤農)과 사람의 공[人功]의 투여를 통한 노동집약적 농업을 강조하였다. 특히 나농(懶農)에 대한 지적 등은 그의 집약적 농업경영론을 보여주는 일례로써, 집약적 농업을 통해 소농사회의 안정을 이루고자 하였다. 글_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15. 책에 미친 고증과 박학의 대가, 이덕무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린 시인이자 실학자이다. 경서와 사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조선사회에서 천대받던 서자로 태어나 설움도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간서치전을 쓴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는 책에 미친 바보 간서치전을 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간서치는 서울 남산 아래 살던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직 즐기는 것은 책을 보는 것이어서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픔도 전혀 느끼지 못한 인물이다. 이덕무는 그에게 간서치라는 별명만 붙이고는 실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간서치가 곧 이덕무 자신임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책에 미친 바보를 뜻하는 간서치로 널리 알려진 이덕무지만, 그가 실제 즐겨 사용한 호는 아정(雅亭), 형암(炯庵), 청장관(靑莊館)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즐겨 사용한 호가 ’청장‘이다. 청장은 해오라기로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새로 청렴을 상징한다. 이덕무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에 걸 맞는 법도 있는 행동거지와 오직 책 읽는 일을 자신의 천명으로 여긴 인물이었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끼곤 했다.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실학자 이서구는 이덕무를 가리켜 “겉은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욕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시와 문장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중국 시단에 알려진 조선 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 초로 친구인 유금이 중국을 방문하여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문단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한객건연집은 이때부터 조선은 물론이고 청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청과 조선에서 나란히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청조 시단에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노련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시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 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우아하다’는 정조의 시평은 들은 이덕무는 이후로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천애지기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던 맹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해서 살아갈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구한 현실을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시켜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실로 자유인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글_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사

수원화성박물관, 다음달 9일까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4호 ‘조선경국전’ 시민에 공개

독립 형태 간행본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국내 유일본인 ‘조선경국전’이 공개된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을 빛낸 국가보물, 조선경국전’을 다음달 9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연다. 이번 전시는 ‘조선경국전’을 포함해 조선의 국가운영서인 ‘경국대전’과 정조대왕의 국정개혁 요체인 ‘대전통편’, 고종대에 편찬된 ‘대전회통’ 등 조선시대 주요 법전을 함께 마련했다.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경국전’은 목판 인쇄한 조선 초기 판본이며 지난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4호로 지정됐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조선 최초의 법전이다. 관제ㆍ군사ㆍ호적ㆍ경리ㆍ농상 등 각 분야의 제도를 기술했으며 조선의 건국 이념과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지난 2014년 ‘TV쇼 진품명품’에 출품돼 프로그램 역사상 고문헌 유물 중 가장 높은 감정평가액을 판정받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조선경국전의 희귀성과 가치를 확인하고 조선의 법전 편찬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전시”라며 “수원을 빛내는 문화재임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뜻깊은 틈새전시”라고 말했다. 문의 (031)228-4219 손의연기자

최초의 한글 활자책 ‘월인천강지곡’ 국보 됐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활자본 ‘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이 국보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월인천강지곡 권상’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국보 제320호와 국보 제48-2호로 각각 지정했다고 3일 밝혔다. 또 구한말 국새인 ‘국새 황제지보(國璽 皇帝之寶)’ 등 문화재 6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중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아내인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직접 지은 찬불가를 모은 책으로 세 권 중 한 권만 남아 있다. 1963년 보물 398호로 지정됐다가 이번에 국보로 승격됐다. 함께 국보로 승격된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국보 제48호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짝을 이루는 문화재로 탑과 불상이 하나의 구성을 이루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고종이 1897년에 제작한 대한제국 국새 ‘황제지보(皇帝之寶)’, 국왕의 명령서인 ‘유서’에 사용한 국새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시강원 관원의 교지에 사용한 ‘준명지보(濬明之寶)’ 등 국새 3점은 보물로 지정했다. 한국전쟁 중 미국으로 유출된 것을 2014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돌려받은 문화재다. 이 밖에도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전 많은 신하와 함께 발원한 사리장엄구로 1932년 금강산 월출봉 석함 속에서 발견된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을 보물 제1925호로, 신라와 중국의 시인 30명의 시선집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를 보물 제1926호로, 1728년에 그려진 박동형(朴東亨)의 ‘전신좌상본’과 1751년에 그려진 ‘반신상본’ 및 각 함을 보물 제1927호로 지정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비록 일부만 남아 있지만 국어학적, 출판 인쇄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국보 승격 이유를 설명했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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