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무실(務實)을 강조한 이수광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①박학(博學)을 바탕으로 무실(務實)을 강조한 이수광도시의 은자(隱者)로 남고자 했던 삶이수광(李?光, 1563~1628)의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왕자인 경녕군(敬寧君)의 후손이다. 경녕군 후손은 경녕군 이후 4대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다가 이수광 부친인 이희검(李希儉) 때부터 관료 사회에 진입하였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뒤를 이어 이수광은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에 급제한 뒤 사환을 시작, 사관(史官)을 비롯해 언관직과 이조 좌랑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조 좌랑은 흔히 전랑(銓郞)이라 불리는 관직 중 하나로, 관인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관직이었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은 “오늘날의 선비 중에 영예로운 진출에 마음을 끊었는데도 전랑이 된 자”는 이수광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경상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과 선유어사(宣諭御史)로 활동하였고, 전란 후에는 병조참의와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내기는 하였다. 그러나 남인계 붕당의 일원이었기에 정국을 주도하던 북인 세력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외직으로 나가 안변부사와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을 비판하거나 광해군의 공빈(恭嬪) 추숭을 반대하는 등 사사건건 집권 세력과 충돌하였으며, 급기야 계축옥사와 폐모론 등이 제기되면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 하에서 승정원 도승지를 시작으로 사간원대사간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수광은 선조 후반 이후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대신 그는 도시 속에 은자(隱者)가 되기를 원했다. 이수광이 관직을 떠나 머물던 곳은 서울 낙산(駱山)의 동쪽으로, 호인 지봉(芝峯)은 집 부근에 있던 봉우리의 명칭을 딴 것이다. 이곳은 당초 세종 연간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이 살던 곳인데, 외손인 이희검과 이수광이 계속해서 이곳을 터전으로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이수광은 이곳에 작은 당(堂)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으로, 이곳에서 이수광은 대표적인 저술인 ??지봉유설??을 완성하였다. ??지봉유설??은 천문과 지리, 역사, 정치, 언어, 복식, 동물과 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담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가히 “학문을 좋아해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던” 이수광의 박학이 그대로 녹아들어 간 것이었다. 안남(安南)에 한류를 일으키다이수광은 생애에 몇 차례 명나라에 사행 일원으로 다녀왔다. 1590년(선조 23)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597년(선조 30) 명나라의 황극전(皇極殿)에 화재가 나자 진위사로 파견되었고, 1611년(광해군 3) 세자의 복장을 요청하는 주청사의 부사로 파견된 바 있었다. 이수광은 1597년 사행 시에는 앞선 1590년 서장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만난 안남(安南, 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옥하관에서 50여일 간을 동숙하였다. 1611년 사행 시에는 유구(琉球)와 섬라(暹羅) 사신 등을 만나서 역시 필담을 나누며 교류하였다. 이수광에게 3번의 사행 경험은 서양의 종교와 문물을 접하는 창구가 되었고, 유구나 안남의 사신 등과 접촉하여 다른 지역의 문화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7년 풍극관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시를 수창(酬唱)하며, 필담을 통해 양국의 문화와 풍속 등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때 이수광이 풍극관에게 써준 시는 안남의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수광의 저작인 『지봉유설』에 전기로 수록된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조완벽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생활하던 중 일본 무역 상인을 따라 안남에 가게 되었는데, 안남의 관리들이 이수광의 소식을 물었다며 향후 귀국 후 이런 소식을 전파하여 결국 이수광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판 한류(韓流)의 역사인 것이다. 이수광이 사행을 갔던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중국에는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수광은 사행 기간 중 견문한 일부 내용을『지봉유설』에서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이다. 이수광은 북경에서 안남 사신 등을 만나는 이외에도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을 만나고, 이를 통해 『천주실의』 등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무실(務實)을 강조하다이수광의 사고에는 무실(務實)이 내재되었다. 이른바 ‘중흥장소(中興章疏)라고도 불리는 1623년(인조 1)에 제출한 장문의 차자에서, 이수광은 인조에게 “실심(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써 실효(實效)를 거두시어 생각마다 실(實)을 생각하시고 일마다 실(實)을 생각하시면 정치가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자신 입론의 기저가 무실(務實)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는 학문하는데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수광은 성리학자로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중시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정구(李廷龜)는 “문(文)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뿌리를 두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따라서 당시 이단으로 평가되는 양명학이나 도교, 불교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단, “이익이 있다면 취한다〔取益〕”는 입장에서 도교나 불교, 양명학 등의 일부 논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유연하면서도 실용적인 입장 때문이었다. 이수광이 생존하던 시기는 대내외적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소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수광은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위정자들에게 실정(實政)을 강조하며 국가와 사회 재건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광산의 개발, 무역에 대한 긍정적 사고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고는 전란 후 조선 사회 재건을 위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파주시, 한국 유학의 본거지로 되살아나다

파주시, 한국 유학의 본거지로 되살아나다…경기문화재단-파주시, 오는 28일 기호유학(畿湖儒學) 학술회의 개최 현대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유학을 비롯한 전통문화는 전근대 사회의 고루하고 낡은 사상으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유학은 충ㆍ효ㆍ예와 청렴 등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전히 현재 세계의 주요 문제를 규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유효한 학문으로 재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경기도는 한국 유교문화의 본향(本鄕)으로 역대 이름난 유학자와 석학들과 관련한 다양한 유교문화 유적이 지역별로 산재돼 있다. 이 중 파주시는 기호유학(畿湖儒學)의 중심지로 기호학의 창시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을 배출한 지역이다. 한국유교의 근원지로 꼽는 배경이다. 더욱이 기호유학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실천’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같은 실천정신은 조선후기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실학의 뿌리가 됐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유교문화의 현대적 가치와 활용 방안을 제시하는 장이 펼쳐질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파주시를 한국 유학의 본거지로 집중 조명, 이를 주축으로 한 활용법을 모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설원기)과 파주시(시장 이재홍)가 오는 28일 오후 2시 서울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한국 유교문화의 산실 파주’를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회의가 그것이다. 이날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의 기조발제 ‘기호유학, 왜 경기도인가?’를 시작으로 김준혁 한신대 교수가 첫 발표자로 나서 ‘기호유학의 발상지 파주’를 주제로 한국 유학사에서 파주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로 최정준 박사(동문서숙)가 ‘한국유학의 현대적 가치’를 발표한다. 최 교수는 한국사상사에서 유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되짚고 충ㆍ효ㆍ청백리 등 현대인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어 김진형 한양대 박사가 ‘파주역사인물의 문화콘텐츠화를 위한 멀티유즈 구상’, 박성진 현대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이 ‘기호유학 활성화를 위한 정책제언’을 각각 발표한다. 또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최주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이난숙 강원한국학연구원 교수), 안효성 한국외대 박사 등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을 진행한다. 윤여빈 재단 경기학센터장은 “경기도의 유학사상 연구가 동시대적 맥락에서 활성화가 요청되고 있으며 파주 유교문화권의 OSMU(One Source Multi Use) 사업 추진이 절실한 실정”이라며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한국사상사 및 콘텐츠 관련 연구자들이 모이는 만큼 학술적ㆍ실무적 연구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적이며 발전적인 토론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의(031)231-8573 류설아기자

하나님의 교회, 제주에 새 연수시설과 성전 설립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가 제주도에 새 연수시설과 성전을 설립했다. 서귀포시 상예동에 세워진 WMC제주연수원은 대지면적 9천467㎡(2천864평), 연면적 3천426㎡(1천36평)의 규모다. 성전은 해외 각지에서 제주도를 방문하는 성도들이 늘면서 교육, 모임, 행사, 해외성도방문단맞이, 지역행사지원, 지역 이웃과의 소통 등을 위해 건립됐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번 제주연수원 신설로 용인 동백연수원과 충청권의 옥천고앤컴연수원, 엘로힘연수원, 전의산연수원을 포함해 5개 지역에 연수시설을 갖추게 됐다. 제주시청 부근에 설립된 제주교회는 연면적 3천824㎡(1천157평) 규모에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교육관, 접견실, 다목적실, 시청각실, 유아실, 식당 등 다양한 공간을 갖추고 있다. 성전은 예배, 모임 등 교회 활동뿐 아니라 헌혈행사, 이웃초청잔치, 메시아오케스트라 연주회,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 등 이웃과 사회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김주철 목사는 “새 연수원과 성전은 성도들뿐 아니라 해외성도, 지역민들을 위해 마련된 영적 보금자리”라며 “제주 전역의 모든 이들, 나아가 70억 인류에게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겠다”고 말했다. 송시연기자

“네팔 구석기유적, 연천 주먹도끼 제작법 유사”

전곡선사박물관(관장 이한용)은 지난달 12~22일 해외학술교류 프로그램 일환으로 네팔 남부 당(Dang) 지역에서 구석기유적 지표조사를 실시했다.전곡선사박물관 이한용 관장, 최진호·김소영 학예사, 배기동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겸 국제박물관협회ICOM 아시아태평양 위원장으로 이뤄진 조사팀은 네팔 국립포카라박물관 산딥 카날(Sandeep Khanal)과 함께 지표조사에 나섰다. 이번 지표조사는 구석기유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확인된 지역에 대한 비교 학술 연구차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전곡리유적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됐다. 유럽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사례로 서양 중심의 편협한 문화관을 깨뜨린 중요 사건이었다. 조사팀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당(Dang) 지역의 덕후리(Deokhuri), 당, 투이(Tui) 계곡 등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했다. 강에 인접한 지형을 통해 구석기시대의 지층구조와 문화층을 파악했다. 그 결과 우기 집중 호우로 드러난 중기 구석기시대와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 찍개, 가로날도끼, 몸돌, 긁개 등 석기 70여 점을 수습했다. 해당 콘텐츠는 현지에서 기록 및 실측 후 산딥 카날 국립포카라박물관장을 통해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한용 관장은 “대체로 유물들이 강가의 규암 자갈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곡리 구석기유적이 위치한 임진한탄강 유역의 구석기문화에서 확인되는 제작 수법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면서 “앞으로 두 지역의 구석기문화 비교 연구에 중요 자료로 쓰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한편 전곡선사박물관은 올 연말 네팔 남부지역 민속자료와 함께 발굴 유물을 소개할 예정이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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