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억 인류를 위한 희망” 새 언약 유월절… 하나님의 교회, 세계 175개국서 유월절 대성회 거행

이탈리아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눈 현장이 기록돼 있다.베드로·요한 등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逾越節·Passover·성력 1월14일)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는 이 그림은 대대손손 명화로 명성을 잇고 있다. 2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현재에 유월절을 재현하는 시간이 온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오는 10일 한국을 비롯한 세계 175개국 지역교회에서 유월절을 지킨다.우선 국내선 판교신도시에 위치한 새예루살렘 판교성전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유월절에 참여할 예정이다. 미국·영국·프랑스·호주·캐나다·일본·싱가포르·페루·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서도 뜻을 함께한다. 또 히말라야 산맥 해발 4000m 고지대에 자리한 네팔 오지마을 세르퉁에서도, 아프리카 적도 부근의 적도기니에서도 유월절이 거행된다. 아마존 열대 우림지대인 브라질 마나우스, 남태평양 섬나라 통가와 사모아에서도 유월절을 지킨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성찬예식 전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데 유례해 세족(洗足)식을 시행하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예식을 진행해 의미를 더한다. 김주철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총회장 목사는 “너희가 이(유월절)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십자가 사건 이후 사도 바울도 유월절을 중요하게 지켰다.(고린도전서 5장, 11장) 이후 1천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새 언약의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새 언약을 회복하여 지키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교회뿐”이라며 앞으로 언약의 축복을 지구촌 가족 모두에게 선물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소영기자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여성, 실학과 통하다_강정일당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심지어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났던 아내의 조언을 순응할 뿐만 아니라 스승처럼 예우하며 해로했다. 더 나아가 아내가 사망하자 그녀의 업적들을 한 데 모아 전 재산을 들여 그녀의 문집을 간행해 주었다. 멋있는 남편에 뛰어난 아내의 만남이 아닐까! 이 부부가 바로 정조·순조대에 살았던 탄재(坦齋) 윤광연(尹光演, 1778~1838)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이하 ‘정일당’이라고 약칭함)이다. 가난 속에서도 남편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다. 정일당의 본관은 진주로, 부친 강재수(姜在洙)와 모친 안동 권씨[權瑞應의 딸]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익혔고, 시문과 서화에 능하여 “백세에 표상이 될 만한 천인(天人)”이라 칭송되었다. 안동 권씨의 태몽에 “이 아이는 지극한 덕이 있어 지금 너에게 맡긴다.’고 한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일당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지덕(至德)’이라 불렀다. 정일당의 가계는 대대로 벼슬을 하던 선비 집안이었지만, 조부 강심환(姜心煥)과 부친이 일찍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였다. 1791년(정조 15) 스무 살 때 충주에 사는 여섯 살 연하의 윤광연과 결혼했다. 남편 역시 학문을 숭상한 양반가의 자제였으나, 집안이 곤궁하여 생계 마련을 도모하느라 글공부를 할 수 없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부부는 결혼한 후에도 삼 년간 친정인 충청도 제천에서 생활하였고, 아홉 남매를 모두 첫돌을 맞이하기 전에 잃었다. 3년 뒤 시댁이 있는 충주로 이사했지만 부부의 생활고는 극심해졌고, 급기야 고향을 떠나 경기도 과천에서 남의 땅을 빌려 살았다가 다시 한양 남대문 밖 약현(藥峴, 현 중림동)으로 이사했다. 그녀의 나이 마흔세 살 되던 해였다. 그곳에서 정일당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편을 만류하여 학문을 독려하였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 남편의 학문 뒷바라지에 소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독학하던 남편의 학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6세손인 당대의 학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 들여보내 성리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남편은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고,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와도 일정한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 강정일당 초상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다. 정일당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한 나이는 30세 무렵이었다. 윤광연이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마다 그 옆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깊은 뜻을 음미하였고, 시간 날 때마다 항상 유교 경전을 암송하였다. 그래서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유교의 13경을 두루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13경을 깊이 골몰하여 연구하였다. 특히 『주례(周禮)』·『이아(爾雅)』·『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아 나갔다. 정일당이 가장 관심을 두었던 공부는 『중용(中庸)』이었다. 『중용』은 성리학의 기초가 되는 책으로, 그녀는 일생 동안 자연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하는데 몰두하였고 성품과 천명(天命)의 근원을 탐구하였다.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공부하는 데에 간혹 의심나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남편이나 그 친구들에게 질의하였고, 남편의 스승 강재에게도 어려운 내용과 예법을 문답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성리학뿐 아니라 시와 문장, 그리고 글씨로 유명하게 되었다. 한편 그녀는 50여 년 전에 태어난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을 흠모한 나머지 “남녀의 품성은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윤지당의 주장을 평생 자신의 중요한 모토(motto)로 삼았다. 강정일당에 대해 권우인(權愚仁)은 “비록 아녀자가 지은 것이라 하지만 여자의 기상이라고는 전혀 없고, 산속에 숨어 사는 선비가 뜻이 있어서 학문을 연구하는 글과 같다.”라고 평할 정도로 그녀는 시문에 능한 훌륭한 문인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진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10여 권에 이르는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로 전해진다. 그녀의 재능은 가문적 영향이 컸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어머니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동생 권상명(權尙明)의 현손녀였다. 문장으로 이름난 진주 강씨의 학문적 전통과 외가 쪽의 성리학적 학풍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한 남자의 아내라기보다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정일당의 학문은 결국 남편을 뛰어넘었고, 남편과 더불어 학문적 토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언제나 남편과 학문적 자세를 가다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종종 그녀는 남편에게 “배워서 쓰지 않으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무릇 성현의 가르침은 그 당연한 것을 알면 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이론적인 지식에 머물지 말고 학문의 실행을 권면하였다. 그녀는 이처럼 남편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멘토(Mentor)였다. 실제로 정일당의 학덕인의 면모를 본 윤광연은 “부인도 내가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였고, 한 가지라도 허물이 있으며 걱정하여 충고하였다. 내가 우둔하여 모두 실천하지 못했지만, 부인의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1832년(순조 32) 9월에 정일당이 죽자, 그는 하늘이 나의 좋은 벗을 빼앗아갔다고 한탄했다. 향년 61세였다. 조선시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학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교육은 오로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사를 익히고 부도(婦道)를 익히기 위한 초보적이고 제한된 교육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정일당은 가난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성인이 되는 공부에 목표를 두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였으며, 평생 선비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 만큼 그녀는 분명 성리학을 연구하고 수련한 여류 문인이자 성리학자였다. 물론 그녀는 부덕을 기르고 교양을 쌓으며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가정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기에 올바른 현모양처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글_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중요민속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문화재 명칭 변경됐다

‘강릉 선교장’과 ‘흥선대원군 기린흉배’처럼 민간생활과 관련된 유물 중 중요도가 높아 국가가 별도로 지정하는 문화재의 명칭이 ‘중요민속문화재’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바뀌었다. 2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의 명칭 변경과 재난방지 대책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이 지난 21일 공포됐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293건이 지정된 중요민속문화재를 개정안 공포 즉시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중요무형문화재를 지난해 3월 국가무형문화재로 바꾼 데 이은 후속 조치”라며 “시도가 지정하는 민속문화재와 국가지정문화재를 더욱 명확하게구분하기 위해 ‘중요’를 ‘국가’로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개정안에는 문화재 방재 교육훈련과 화재 방지 시책의 홍보활동 의무화, 문화재 금연구역 지정 확대, 관계기관의 협조 요청 등 재난방지에 대한 조항이 신설됐다. 또 대학, 산업체, 지방자치단체, 정부출연 연구기관과의 공동 문화재 연구가 법제화됐다. 아울러 개정안은 등록문화재의 대상 범위를 ‘문화재’에서 ‘유형문화재·기념물·민속문화재’로 명확히 했고, 국외소재문화재에 관한 설명도 ‘영토 밖에 소재하는 문화재’에서 ‘외국에 소재하는 문화재로서 대한민국과 역사적·문화적으로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도 개정해 시행령에 있던 발굴된 매장문화재 보존조치에 관한 사항을 법으로 규정하도록 했다. 매장문화재법 개정안과 국외소재문화재 범위 확대는 9월 22일부터 시행되고, 문화재 공동연구와 재난방지 대책, 등록문화재 범위 확대는 내년 3월 22일부터 시행된다. 연합뉴스

용주사, 혜거국사 1043주기 다례제 봉행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에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한국 불교 최초의 국사, ‘혜거국사(惠居國師) 1043주기 다례제’가 봉행됐다. 지난 12일 오전 10시께 용주사 관음전서 올려진 ‘선찰대보산 갈양사(現 용주사) 중창주 혜거국사1043주기 추모 다례제(茶禮祭)’는 따뜻한 봄기운을 만끽하러 나온 나들이객과 용주사 신도 운영위원 임원, 불교신자 등 300여 명이 경내를 가득 메웠다. 이번 다례제는 한국 불교 최초의 국사이자 용주사의 전신인 갈양사(葛陽寺)를 세운 중창주, 혜거국사 열반 1043주기를 기리는 제의로서 매년 열리고 있다. 제2교구 용주사 교구장 성월스님을 비롯 특보 무법스님 ,총무국장 성무 스님, 선원스님을 비롯 국장 스님 등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예불 ▲낭독 ▲다례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성월 용주사 교구장 스님은 이날 법회를 통해 “모든 일에는 시초가 중요한 법으로 갈양사의 진면목을 알아본 혜거국사의 사리를 꿰뚫는 현묘한 판단을 배워 오늘날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를 바로잡는 리더의 자세 또한 불가의 정신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불교의 자녀들도 부처의 심중을 헤아리는 명철함으로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혜안을 갖는 계기로 삼자”고 설법했다. 한편 혜거국사는 여주에서 출생(899년), 고려 정종 때 왕사로 책봉됐다. 홍화사·광명사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경전을 강설한데 이어 수원 갈양사를 중창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입적(974년) 후 성종의 명에 의해 탑호 보광(寶光)·시호 홍제존자(洪濟尊者)로 칭했다. 권소영기자

“청년들 실천하고 행동… 추억 만드세요”

봄이 오는 소리에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이었던 지난 5일, 대학생들의 앞날을 기도하는 예배가 있었다. ‘2017 전국 대학생 개강예배’가 그 현장으로 하나님의 교회 측은 올해 대학생으로 첫발을 떼는 새내기들과 새 학년을 맞이한 재학생들을 응원하고 대학 생활에 비전을 제시하고자 행사를 마련했다. 이날 기도의 성전은 판교신도시에 위치한 새예루살렘 판교성전. 전국 각지서 4천명가량의 대학생들이 모였다.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설교를 통해 “청년의 때는 실천하고 행동하기에 좋은 시기다. 학업에도 충실하면서 삶에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하며 대학 생활을 보람 있게 보내길 바란다”고 축복 메시지를 전했다. 더불어 대학생들이 선한 행실로 사회에 훌륭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예배 후에는 대학생활 사례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하나님의 교회 대학생들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하나되자’는 슬로건 아래 외국인 대학생을 초대해 △음식문화 나눔 △환경보호 활동 △다문화아동센터 방문 △한국 전통문화 체험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또 ‘지구 한 바퀴 둘레에 해당하는 4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정화하자’는 뜻에서 ‘Mother’s street’를 타이틀로 거리정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편, 지난 1월15일 대학생 자원봉사단 ASEZ는 세계 각국의 80여 개 대학 일원서 캠퍼스 환경정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환경문제에 대한 인류의 관심도를 높였다. 이 같은 대학생들의 열정적인 봉사에 피터 매틱 호주 브리즈번 시의원을 비롯 테오도로 J. 오캄포 필리핀 국립대학 총장이 각각 하나님의교회 측에 감사장을 전달한 바 있다. 조영진씨(조선대)는 “대학생들은 젊음과 열정이 있고, 그걸 모아서 좋은 일에 쓴다면 큰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사회에 봉사할까, 어떻게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며 행동하는 게 우리 몫”이라고 강조했다. 권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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