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무실(務實)을 강조한 이수광

▲ 지봉유설-01
▲ 이수광의 저술인 [지봉유설],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로 평가되는 책이다.(실학박물관 제공)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①박학(博學)을 바탕으로 무실(務實)을 강조한 이수광

 

도시의 은자(隱者)로 남고자 했던 삶

 

이수광(李?光, 1563~1628)의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왕자인 경녕군(敬寧君)의 후손이다. 경녕군 후손은 경녕군 이후 4대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다가 이수광 부친인 이희검(李希儉) 때부터 관료 사회에 진입하였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뒤를 이어 이수광은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에 급제한 뒤 사환을 시작, 사관(史官)을 비롯해 언관직과 이조 좌랑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조 좌랑은 흔히 전랑(銓郞)이라 불리는 관직 중 하나로, 관인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관직이었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은 “오늘날의 선비 중에 영예로운 진출에 마음을 끊었는데도 전랑이 된 자”는 이수광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경상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과 선유어사(宣諭御史)로 활동하였고, 전란 후에는 병조참의와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내기는 하였다. 그러나 남인계 붕당의 일원이었기에 정국을 주도하던 북인 세력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외직으로 나가 안변부사와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을 비판하거나 광해군의 공빈(恭嬪) 추숭을 반대하는 등 사사건건 집권 세력과 충돌하였으며, 급기야 계축옥사와 폐모론 등이 제기되면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 하에서 승정원 도승지를 시작으로 사간원대사간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수광은 선조 후반 이후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대신 그는 도시 속에 은자(隱者)가 되기를 원했다. 이수광이 관직을 떠나 머물던 곳은 서울 낙산(駱山)의 동쪽으로, 호인 지봉(芝峯)은 집 부근에 있던 봉우리의 명칭을 딴 것이다. 이곳은 당초 세종 연간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이 살던 곳인데, 외손인 이희검과 이수광이 계속해서 이곳을 터전으로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이수광은 이곳에 작은 당(堂)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으로, 이곳에서 이수광은 대표적인 저술인 ??지봉유설??을 완성하였다. ??지봉유설??은 천문과 지리, 역사, 정치, 언어, 복식, 동물과 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담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가히 “학문을 좋아해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던” 이수광의 박학이 그대로 녹아들어 간 것이었다.

▲ 곤여만국전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경 조선에 전해졌으며, 이 지도는 1708년(숙종 34) 그려진 것이다.(실학박물관 제공)

안남(安南)에 한류를 일으키다

 

이수광은 생애에 몇 차례 명나라에 사행 일원으로 다녀왔다. 1590년(선조 23)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597년(선조 30) 명나라의 황극전(皇極殿)에 화재가 나자 진위사로 파견되었고, 1611년(광해군 3) 세자의 복장을 요청하는 주청사의 부사로 파견된 바 있었다. 이수광은 1597년 사행 시에는 앞선 1590년 서장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만난 안남(安南, 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옥하관에서 50여일 간을 동숙하였다. 1611년 사행 시에는 유구(琉球)와 섬라(暹羅) 사신 등을 만나서 역시 필담을 나누며 교류하였다. 이수광에게 3번의 사행 경험은 서양의 종교와 문물을 접하는 창구가 되었고, 유구나 안남의 사신 등과 접촉하여 다른 지역의 문화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7년 풍극관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시를 수창(酬唱)하며, 필담을 통해 양국의 문화와 풍속 등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때 이수광이 풍극관에게 써준 시는 안남의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수광의 저작인 『지봉유설』에 전기로 수록된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조완벽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생활하던 중 일본 무역 상인을 따라 안남에 가게 되었는데, 안남의 관리들이 이수광의 소식을 물었다며 향후 귀국 후 이런 소식을 전파하여 결국 이수광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판 한류(韓流)의 역사인 것이다.

 

이수광이 사행을 갔던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중국에는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수광은 사행 기간 중 견문한 일부 내용을『지봉유설』에서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이다. 이수광은 북경에서 안남 사신 등을 만나는 이외에도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을 만나고, 이를 통해 『천주실의』 등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무실(務實)을 강조하다

 

이수광의 사고에는 무실(務實)이 내재되었다. 이른바 ‘중흥장소(中興章疏)라고도 불리는 1623년(인조 1)에 제출한 장문의 차자에서, 이수광은 인조에게 “실심(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써 실효(實效)를 거두시어 생각마다 실(實)을 생각하시고 일마다 실(實)을 생각하시면 정치가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자신 입론의 기저가 무실(務實)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는 학문하는데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수광은 성리학자로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중시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정구(李廷龜)는 “문(文)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뿌리를 두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따라서 당시 이단으로 평가되는 양명학이나 도교, 불교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단, “이익이 있다면 취한다〔取益〕”는 입장에서 도교나 불교, 양명학 등의 일부 논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유연하면서도 실용적인 입장 때문이었다.

 

이수광이 생존하던 시기는 대내외적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소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수광은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위정자들에게 실정(實政)을 강조하며 국가와 사회 재건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광산의 개발, 무역에 대한 긍정적 사고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고는 전란 후 조선 사회 재건을 위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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