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민주투사 ‘젊은시장’ 도전

김상하 진보신당 인천시장 후보는 지역의 대표적인 진보진영 인사로 인천을 바꿔 나가는 진보 시장을 꿈꾸고 있다. 김 후보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지만 민주화투쟁을 펼치면서 힘든 여건 속에서도 근로자들을 위해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인천에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김 후보는 사회 복지를 확충하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복지개혁과 생활 속의 진보를 이뤄 내겠다고 강조했다.노동정치연대 시절 민주운동가로 주목민주노동당 창당 당원으로 정치 입문복지교육 확대 살기좋은 인천 만들것◇출생과 학창시절김 후보는 1964년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슬하에서 4남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적이 뛰어났던 김 후보는 고모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서울 성북구로 유학을 오게 된다.다른 형제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김 후보는 서울 홍대부고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당시 군사정권 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의 생활을 지켜 보면서 사회과학 공부에 입문, 학생운동에 참여해 서울대 초대 반제 반군사독재 민족민주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민주화투쟁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자 아버지는 충격으로 한쪽 귀 청각을 잃었고 어머니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에 참여했다.◇민주화를 위한 길에서김 후보는 1989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부천에서 작은 공장들을 전전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이후 인천에서 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민중생존권쟁취 국민연대 등에서 활동하다 독자적인 진보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민중정치연합 인천지부 부지부장과 노동정치연대 인천지부장, 국민승리21 인천본부 총무위원장 등을 맡는다.1996년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총파업이 진행되자 노동정치연대 인천지부장으로 활동하다 또 다시 구속되면서 민주화 운동가로 주목받는다.김 후보는 선배 권유로 지난 1998년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지만 당시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수입도 없는 터여서 학교 선배인 이양원 변호사로부터 물질적으로 지원받으며 헌 책을 사서 공부했다.그는 2004년 인천으로 돌아와 학익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 본격적으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평소의 소신대로 민주노동당 창당 당원으로 참여한 뒤 2006년 연수구 시의원으로 출마, 14%대를 득표했고 민주노동당 인천시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진보신당으로 분당될 당시 진보신당을 택했다.◇행복한 인천 만들기김 후보는 기업하기 좋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인천, 복지와 교육 지원 확대를 통해 살기 좋고 행복한 인천 등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통해 민생경제를 활성화하고 인력충원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제 도입과 사회적기업 육성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방침이다.장애인소득 보장을 위한 각종 수당제도와 사회적응능력을 높이기 위한 자립교육 등도 도입하겠다는 구상이다.계양산 골프장과 검단~장수 구간 도로 개설을 중단시켜 환경을 보전하고 교육혁신특구를 지정, 창의력 교육을 강화해 학생들의 학력을 향상시키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이선주기자 sjlee@ekgib.com

시민 참여 ‘열린시정’ 이룬다

백석두 평화민주당 인천시장 후보는 사람 사는 인천을 만들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순탄치만은 않은 정치활동을 거쳐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면서 기존 후보들과는 다른 청사진을 제시하겠다는 각오로 선거에 임하고 있다.각종 사회단체 활동 사회지도자 꿈 키워故 김대중 전 대통령 권유로 정계에 첫 발정치경험 바탕으로 소신있는 시정 운영◇어린 시절의 기억백 후보는 전남 해남군 산골에서 1955년 2월8일 백승암씨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어려움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다 아버지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큰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온다.넓은 논과 밭 등을 자랑하던 시골집에서 북성동 대성목재 앞 쪽방으로 옮긴 백 후보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원목 껍질을 주으며 끼니를 이어갔다. 그렇게 바다에 나가 굴을 따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는 그를 검정고시반에 등록시키면서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게 했다.백 후보는 어려서부터 가족 생계를 위해 굴을 따러 나가는 것은 물론 소월미도 도크공사 등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학교 대신 각종 사회단체에서 세상 배워정규 학교생활을 하지 못한 백 후보는 각종 사회단체들이 시행하는 평생교육 및 교양강좌 등에 참가하면서 사회지도자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흥사단 민족대학, 통일원 통일교육, 내무부민방위 정신강사 연수교육, 유네스코 청소년지도자연수 등을 거치면서 1981년부터 흥사단에 몸 담아 1989년부터 1990년까지 흥사단 인천지부장을 지낸다.그는 지금도 존경하는 인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꼽으면서 스스로 인물되기운동을 펼쳐 건전한 힘을 길러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이후 백 후보는 유네스코 한국청소년활동지도자협의회장, 인천황해권 발전연구원 이사장, 재단법인 중앙노동경제연구원 교수,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인천시회장, 사단법인 한국환경보호협회장 등을 지내는 등 사회활동을 펼쳤다.◇고 김대중 전 대통령 권유로 정치계 입문백 후보는 1991년 당시 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 권고로 평화민주당에 영입돼 서구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했지만 2표 차이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당내 낙하산 공천에 반발하던 그는 연거푸 공천에서 미끄러진다.백 후보는 1995년 지방선거에 다시 도전, 당시 야당 지지기반이 전무했던 검단에서 시의원에 당선된다.제2대 시의원 시절 백 후보는 홍미영 민주당 부평구청장 후보, 신맹순 전 시의원 등과 함께 야당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강직하고 올곧다는 평가를 받았다.시의원 활동 이후 지난 1999년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300여일을 구치소에서 보냈지만 무죄를 선고받는다.이후 당내 공천에서 밀리면서 국회의원 보궐선거, 2000년 국회의원 선거 등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잇달아 고배를 마신다.2006년부터 농사꾼으로 돌아가 서구 인천생태원예농원에서 생활하던 백 후보는 한화갑 대표의 권유로 지난달 평화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을 맡아 시민들이 참여하는 인천을 만들기 위해 시장 후보를 수락했다. /박용준기자 yjunsay@ek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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