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거주춤 날개를 벌리고 머리를 떨군 백로의 모습이 측은해 보인다. “1979년에 그린 ‘오염지대’란 작품인데 경제개발로 환경 문제가 심각했던 당대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이처럼 월전 선생님은 현실 비판적인 면모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분입니다.” ‘오염지대’ 바로 옆에 똑같은 모습을 한 백로가 벼랑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젊은 작가가 이번 전시에 맞춰 새로 그린 것입니다. 이런 작품을 ‘방작(倣作)’이라 하지요.” 장준구 학예실장이 안내해 주는 월전 장우성(1912~2005)의 작품세계는 깊고도 넓었다. 1970년대에 사회 문제를 화폭에 담았던 화가가 한국 화단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7일 개막전을 여는 이천시립월전미술관(관장 장학구)의 기획전 ‘시정화의(時情畫意), 월전을 그리다’에서 만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작품에서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가득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을 그린 월전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다. ■ 시정화의, 월전을 그리다 동서미술문화학회와 함께 기획한 ‘시정화의時情畫意, 월전을 그리다’는 월전이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력의 깊이와 넓이를 잘 보여준다. 7일 오후 2시에 열리는 특별 강연의 주제가 ‘월전 장우성과 현대 한국 화단’이다. ‘한국화의 변화: 월전 이전과 이후’(김상철 동덕여대)와 ‘선면화의 세계와 월전 장우성’(이인숙 경북대), 그리고 장준구 학예실장의 ‘월전의 작품, 다시 읽기’는 이를 확인해 준다. “이번 전시에 강유림 작가(단국대·미술학박사)를 비롯해 마흔아홉 명의 작가가 참여합니다. 참여 작가 대부분은 미술학 박사학위 소지자입니다.” 월전은 작품 ‘광란시대’에 자신을 반아자(半啞子), 즉 ‘반벙어리’라 소개한다. 10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작품 속에도 작가의 문제의식이 짙게 투영돼 있다. 젊은 작가 11명이 참여한 ‘제2회 후속세대 기획전: 시정화의, 월전을 그리다’에서 만난 월전도 선구적이다. 자동차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그림은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화지만 바탕이 검은색이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살피는 것도 재미있다. 놀랍게도 월전은 이처럼 실험적인 작품을 이미 오래전에 선보였다. 거리를 질주하는 버스가 위태롭다. ‘아슬아슬’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에 20년이 지난 그림이지만 2024년의 한국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 한국화의 대가 신문인화를 개척하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한국화의 발전과 월전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2007년 문을 연 미술관이다. 2005년 서거한 월전의 유지대로 이천시는 2007년 6월 재단법인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유족으로부터 월전의 유작 및 월전미술관 소장품 1천532점을 기증받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개관했다. ‘물의 다리’를 지나면 펼쳐지는 둥근 마당은 그의 호 ‘월전(月田)’에 등장하는 보름달이 연상되는 공간이다. 두세 달에 한 번꼴로 특별전과 기획전이 열리는 1층의 기획전시실 2실과 2층의 상설전시실에는 월전의 작품과 고미술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상설전시실 입구에 월전의 주먹을 쥔 오른손과 펼친 왼손의 모형 및 초상화가 여러 점 전시돼 있다. 월전의 섬세한 손과 초상화에서 조선 선비의 고결한 기품이 느껴진다.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서 한학을 수학한 월전은 한시와 서예 실력까지 두루 갖춘 특별한 화가였다. 월전이 무척 아꼈던 ‘목필통’과 작품의 바탕이 된 스케치도 여러 점 보인다. 1949년 그린 ‘한국의 성모자상’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연두색 당의를 입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어린 예수의 옷은 한국의 아이들이 입는 색동옷이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시대를 풍자한 ‘유인원도’(1984년), 무분별하게 수입된 외래종이 이 땅의 주인인 토종을 몰아내는 ‘황소개구리’(1998년), 이익을 위해 부끄러움을 모른 세태를 꼬집은 ‘개싸움 1, 2’(1998·2001년), ‘광란 시대’(2001년)는 여든을 넘긴 노장의 작품이다. 휴대전화를 든 젊은 여성을 그린 ‘단군일백오십대손’(2001년)이나 ‘광우병에 걸린 황소’(2001년), ‘낚시를 문 고기’(2003년) 같은 작품을 보노라면 시대의 고민에 응답하려는 지식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아한 멋이 느껴지는 한글서예 작품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태산이 높다 해도’(1998년), ‘나모도 아닌거시’(1999년), ‘이 몸이 죽어가서’(2003년) 같은 작품은 학창 시절에 배운 시조를 다룬 것이기에 더욱 반갑다. ‘현충사봉인충무공이순신영정초본’과 ‘집현전학사도초본’ 같은 특별한 내력을 가진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월전 장우성 화백은 평생을 한국화의 새로운 형식과 방향을 모색해 우리 화단을 이끈 한국 미술계의 거장입니다. 동양 고유의 정신과 격조를 계승하며 현대적 조형기법을 조화시킨 ‘신문인화’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광복 이후 새로운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월전은 시서화(詩書畵) 전통 문인화의 높고 깊은 세계를 내적·외적으로 일치시킨 경지에 이른 현대 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월전의 작품은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충무공 이순신 영정’을 비롯해 수많은 국내외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로마 바티칸 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청춘일기’(삼성미술관 리움), ‘새안(塞雁)’(영국 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 문화부), ‘회고’(독일 쾰른 시립박물관), ‘심청도’(일본 후지미술관) 등이다. 복도에도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은관문화훈장과 금관문화훈장(2001년)을 살펴본다. 그의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 월전, 한국화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매우 부지런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미술관이다. 2024년 ‘용(龍)’과 ‘꽃 보다: 이철주의 작품세계’를 비롯한 기획전과 ‘명경지수-맑고 고요한 월전의 풍경’과 ‘달과 별의 인연: 성천이 간직한 월전의 그림들’ 같은 상설전을 연달아 열었다. 제11회 월전학술포럼 ‘문인화의 전파와 확산’, ‘종교와 예술의 만남, 쉬운 우리 불화 이야기’를 비롯해 ‘이천달빛탐험’과 ‘달빛모래놀이’를 같은 프로그램과 ‘학부모를 위한 교과서 속 문화재 이야기’와 도슨트 양성 아카데미 ‘한국화 재료로 그리는 인물 그림’ 같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6일부터는 ‘달빛美클래스: 이천의 옛 미술’이 진행된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는 안평대군 이용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신사임당, 흥선대원군의 서간(書簡)과 한석봉, 송강 정철,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김삿갓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물론 단원 김홍도의 ‘쌍치도(雙雉圖)’와 겸재 정선의 ‘월송정(月松亭)’, 연담 김명국의 ‘신선도(神仙圖)’ 등도 소장하고 있다. 중국 청나라 문사들이 조선의 역관 오경석에게 선물했던 김농의 ‘매화’는 한중 문화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귀환 소장품이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한국화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월전 선생은 한국 미술이 점점 서구적 미감과 표현 방식에 잠식돼 가던 상황에서 전통 시대 미술의 정수인 문인화(文人畵)를 현대적으로 계승함으로써 한국 화단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문학, 그림, 글씨가 하나로 어우러진, 표현적인 문인화에 사실성과 조형성을 더한 새로운 한국화를 개척한 것입니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설봉산 자락에 안긴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축복받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곁에 이천시립박물관을 비롯해 이천세라피아 한국도자재단이 자리 잡고 있어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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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4-12-05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