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3.성남 을지대 범석의학박물관

‘몸’보다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몸이 아파야 비로소 몸에 관심을 기울인다. 몸에 이상이 오기 전에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돌본다면 훨씬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몸을 공부하기 좋은 의학 전문박물관이 경기도에 있다. 바로 성남 을지대 범석의학박물관이다. 을지대(총장 홍성희) 범석의학박물관은 제1종 전문박물관이다. ■ 몸을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공간 ‘범석(凡石)’은 을지재단 설립자인 고 박영하 박사의 아호다. 을지대 본관 8층에 설립자를 기리는 ‘범석홀’과 제1전시실이 있고 아래층인 7층에 제2전시실이 있다. 2003년 개관한 범석의학박물관(관장 김시덕)은 대학박물관에서도 주목되는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범석의학박물관은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이 설립자인 고 범석 박영하 박사의 인간사랑·생명 존중의 뜻을 기리고 보건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2003년 10월 개관했습니다.” 장례지도학과 교수이기도 한 김시덕 관장은 국립민속박물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30여년간 학예연구관으로 활동한 현장 경험을 살려 학생과 지역민과 친숙한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궁리가 많다. “내 뜻이 사회 곳곳에서 두루 꽃피게 하라.” 을지재단 설립자 고 범석 박영하 박사의 정신이 깃든 곳에서 낡은 책과 두툼한 원고를 만난 것은 뜻밖이다. 1937년 펴낸 ‘동의어사전’은 설립자의 부친인 박봉조 교수가 애용한 것이다. 한글과 한자와 영문 필기체가 단정하게 정리된 노트는 설립자의 박봉조 교수가 1900년 한영사전을 만들기 위해 작성한 초고다. 6·25전쟁에서 군의관 박영하와 간호장교 전증희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생명의 존귀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깊이 체득한다. 부부가 전쟁을 통해 터득하고 실천한 ‘인간사랑’과 ‘생명존중’은 을지재단의 설립 이념이다. 2008년 박영하 박사에게 수여한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2020년 재단 명예회장 전증희 여사에게 수여한 국민훈장 모란장 훈장,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가 박영하·전증희 부부에게 수여한 ‘호국영웅기장증’은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1973년 펴낸 ‘보전학보’ 창간호와 2016년의 ‘을지재단 60년사’ 같은 책자는 대학의 역사와 박물관의 뿌리를 보여준다. 설립자의 명함과 가까운 사람들의 번호가 빼곡한 ‘삐삐’, 이제는 구닥다리가 된 전자 손목시계와 두 개의 안경과 만년필도 설립자의 검소한 성품을 보여준다. 하얀 의사 가운과 목제 청진기, 뒤축이 닳은 가죽구두는 의료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설립자의 분주한 일상을 그려본다. ■ 몸을 살피고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보건의료의 중요성을 알리는 제1전시관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물을 마주한다. “유리관 속에 든 것은 실재 인간의 뇌입니다.” 유리관에 담긴 뇌를 보고 머리뼈를 절단해 뇌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을 함께 전시해 뒀다. 엄마의 자궁에서 자라는 태아를 보여주는 모형도 있다. 한 달 된 태아부터 출산 직전의 모습까지 실재와 비슷한 모형으로 아기가 자라는 과정을 모형으로 살펴본다. 아기처럼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우리의 몸속 들어있는 장기의 위치를 살펴본다. 뼈와 장기와 혈관, 근육 등 인체를 이루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어 몸을 공부하기에 좋다. 한자로 쓰인 작은 글씨가 가득한 인체도 앞에 서서 동양의 의사들이 이해한 몸의 구조를 살펴본다. 인체를 작은 우주로 봤던 한의사의 인식은 온몸에 그려진 ‘경락’이 입증한다. 한의사가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의 의학 고서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미국 등의 근현대 의학 관련 고서적 가운데 국내 유일의 의학 도서도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친필 편지와 에칭 초상화, 찰스 다윈 저서 ‘종의 기원’을 마주하는 기쁨도 적지 않다. 제2전시실에는 60여점의 ‘현미경’이 전시돼 있다. 1700년대부터 시작된 현미경의 발전상을 살펴보는 재미가 기대 이상이다. ■ 미지의 광선 X선으로 몸속을 여행하다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명한 온도계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의료기기가 아닐까. 1816년 프랑스에서 발명한 청진기는 의사의 상징 같은 의료기기로 각인돼 있다. 1851년 독일에서 발명한 검안경이나 1911년 네덜란드에서 발명한 심전계(ECG), 그리고 1913년에 미국에서 개발한 엑스레이 튜브는 의료의 혁신을 이끌었다. 1924년 독일에서 개발한 뇌전도(EEG), 1957년 미국에서 개발한 연성 내시경은 우리 몸속을 자세히 살펴 치료할 수 있게 해줬다. 드디어 1960년대에는 인공판막을 개발하고 심장 이식수술에 성공한다. “1970년대 영국에서 개발한 X선 CT와 MRI는 의료의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현대의 의학 기술은 인류에게 100세 시대를 약속합니다.” 130년 전 독일에서 발견한 X선은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발견이었다. 특별 전시실에서 암의 발견부터 코로나19의 확진까지 사람들의 각종 치료에 큰 역할을 하는 엑스레이의 흥미로운 역사와 마주한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우연히 몸을 통과해 뼈를 보여주는 광선을 발견하고 이 광선에 수학에서 ‘미지의 속성’을 가리키는 ‘X’를 붙여 ‘X-ray’라 이름을 붙인다. 초기에는 신장 결석을 확인하거나 병사의 몸에 박힌 총알을 찾아내던 이 신비로운 광선은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0.3㎜의 미세 병변까지 발견하는 ‘소마톰 포스’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인 지멘스 헬시니어스가 제작한 의료기기를 살펴보면서 건강과 장수를 향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확인한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자동으로 진단 이미지를 분석하고 의료진의 진단을 돕는 촬영기기까지 선보이며 엑스레이 기반의 의료기기가 나날이 진화하고 있지요. 영화처럼 더욱 선명한 3D 영상 이미지는 AI 기술과 결합해 이미지 자동 분석으로 AI가 병변을 잡아내는 수준으로 진화했습니다.” ■ 몸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제2전시실의 주인공은 역시 현미경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소중한 유물들이다. 그중 몇 개를 선택해 자세히 살펴본다. 생물 시료와 금속 시료를 관찰할 수 있는 광학현미경과 약 15도로 벌어진 2개의 광속을 이용해 시료를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입체현미경의 차이와 성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광기와 대물렌즈 사이에 광학판을 넣어 물체를 통과한 빛의 위상 차이를 명암의 차이로 바꿔줘 살아있는 상태로 조직을 관찰할 수 있는 ‘간섭현미경’도 주목되는 현미경이다. 자외선 같은 단파장 빛을 쪼이면 형광을 발하는 원리를 이용한 ‘형광현미경’은 아교섬유나 지방조직 등 생체 물질의 관찰에 이용된다. ‘레이저 초점 주사현미경’은 형광 장치가 부착되고 레이저를 광원으로 사용하는 현미경으로 물질을 광학절편으로 자르고 그 절단면은 주사해 나타나는 상을 관찰한다. ‘초고압전자현미경’은 두꺼운 조직의 관찰이 가능하고 ‘주사전자현미경’은 물체의 표면 관찰, 물체 구성원소의 정성, 정량 등의 분석에 이용된다. 100년 전에 사용했던 현미경으로 보는 세포 슬라이드 체험존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유물이다. 의학 발전에 기여한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이용된 다양한 실험기구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과학 기술과 의료기기는 인간에게로 향하고 있다. 전시실을 안내하며 김시덕 관장이 들려준 말을 떠올린다. “여러분이 박물관을 많이 찾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면 몸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2. 용인 예아리박물관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유월의 숲길을 걸으며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나와 무관한 듯 살고 있지만 예고 없이 날아드는 부고를 받으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화들짝 깨닫곤 한다. 장례를 주제로 한 박물관의 풍경이 궁금하다.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인 상례를 전시하는 예아리박물관에 들어선다.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황토 색깔의 건축물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 죽음 너머를 상상할 수 있을까 5월부터 시작된 ‘2025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운남성 소수민족 생활문물전’은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박물관 맞은편의 체험실에 전시된 중국 소수민족의 독특한 의상을 감상한다. 카페에서 시원한 차를 마시며 뜻밖의 전시물과 맞닥뜨린다. 나비 및 나방 표본과 하얀 목화와 누에고치다. 고치에 들어있던 누에 번데기가 날개를 가진 나방이 되는 ‘우화(羽化)’는 죽음에서의 부활처럼 신비롭다. 고치에서 1천400m에 달하는 0.02㎜의 가는 명주실을 뽑는 특별한 체험은 관람객들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줬을 터다. 관람객들은 한동안 작가가 돼 자신만의 도자기 만들기에 몰입한다. 초벌을 거쳐 재벌된 도자기에 여러 색상의 유약으로 전시된 유물의 문양 및 형태를 그리고 즉석에서 구워 가는 체험은 인기가 많다. 흙으로 만든 컵이 전혀 다른 성질의 도자기로 변신하는 것도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피카소의 그림 판화 찍기와 소와 쥐를 비롯한 십이지신상 목판화 찍기 체험도 재미있을 것 같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어떤 옷을 입을까. 이족, 묘족, 동족, 요족, 납고족, 회족까지 여섯 민족의 유물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묘족의 모자는 조선의 유생들이 썼던 유건과 비슷해서인지 정감이 간다. 전시된 옷의 모양과 색상이 화려할 뿐 아니라 문양도 추상적이다. 부츠처럼 생긴 신발도 손으로 직접 만든 수제품이라니 더욱 정겹다. 어깨 부분에 우리나라 전통 베갯잇 비슷한 장식을 단 옷도 시선을 끈다. 장신구의 색깔과 문양이 어쩌면 이처럼 화려하고 정교할까.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여섯 폭의 화조 병풍은 쉽게 보기 힘든 유물이다. 입체적으로 조각한 새와 꽃이 살아있는 듯 섬세하다. ■ 독수리와 로켓을 타고 하늘로 떠나는 천장과 우주장 장례식의 참뜻은 사람이 죽어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 이를 축복하고 기뻐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가나의 장례문화가 그렇다. 1층 전시실에서 장례식을 축제처럼 즐기는 영상을 감상한다. 임권택 감독이 1996년 장례를 소재로 한 영화 제목도 ‘축제’였다. “아프리카 가나는 특이하고 유쾌한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장례를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르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지요.” 오정교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장례를 축제로 만든 가나인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에 공감한다. 도무지 관으로 보기 어려운 관이 여럿이다. 해설에 귀를 기울이니 비로소 의문이 풀린다. “가나 사람들은 고인을 좋은 관에 모시고 싶어 합니다. 고인이 평소 좋아했거나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을 관 모양으로 제작했지요.” 음악에 맞춰 죽은 자를 헹가래 치듯 들었다 놓았다 하고 다 함께 춤을 추기도 하는 충격적인 영상이 나온다. “1950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젊은 목수 카네 크웨이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할머니를 위해 비행기 모양의 관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에게 농부는 양파 모양, 어부는 배 모양의 관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를 ‘아트관’이라 부릅니다.” 아트관 예술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파조의 원작 아트관 8개를 살펴본다. 사자, 코끼리, 독수리, 물고기, 비행기, 배, 자동차를 관으로 사용한 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부럽다. 가마처럼 보이는 상여는 또 무엇일까. “이 좌식 상여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1900년대 초에 제작돼 1950년대까지 사용한 것입니다.” 시신을 운구할 때 살아있는 사람처럼 앉히기도 했던 일본의 문화가 재미있다. 세상에 알려진 장례 중에서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보다 놀라운 문화가 또 있을까. 티베트고원 일대에서 행해지는 조장은 고산지대여서 땔감을 구할 수 없어 화장을 하기도 어렵고 땅에 묻어도 쉽게 썩지 않기에 택한 방법이다. 독수리가 가득한 흑백사진을 살펴본다. “사자의 몸을 독수리가 뜯어먹게 하는 천장은 티베트와 윈난성, 쓰촨성에 살고 있는 장족의 장례법입니다. 독수리가 육신을 먹고 하늘로 오르게 한다고 믿었지요.” 흥미롭게도 미국, 일본, 스위스 등 선진국으로 불리는 7개국에서 사람의 유골을 로켓에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내는 우주장(宇宙葬)을 시행하고 있다고 하니 천장과 닮은 꼴이다. ■ 한글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상여 2층 한국관은 볼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정작 실물은 보기 어려운 칠성판과 마주한다. 일곱 개의 구멍 모양이 밤하늘의 북두칠성이다. 장난감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백자 그릇들은 무덤에 넣었던 부장품이다. 20세기 초에 제작한 100세가 넘은 전남 진도의 상여와 경주 최씨 상여를 가까이서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경주 최씨의 상여는 실제로 사용했던 유물인데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녹색 치마와 분홍 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비롯해 상여 위에서 춤을 추는 있는 여인들은 누구일까.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한글 소설 ‘구운몽’에 나오는 팔선녀들입니다. 서포는 효자로 유명한 분 아닙니까.” 또 한 분의 효자를 만난다. 바로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한 제22대 정조대왕(1752~1800)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하의 명당인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자급자족의 신도시 수원화성을 건설한 효행의 군주. 출판을 비롯한 기록문화를 활짝 꽃피운 정조대왕의 장례를 재현한 것은 아주 멋진 결정이다. “‘정조대왕국장도감의궤반차도’를 바탕으로 3년간 고증과 수작업을 거쳐 국장행렬을 재현했습니다. 행렬에는 20㎝ 크기의 토우 인물 1천384명, 말 341필, 가마 20채가 등장하지요.” 경기감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전체 행렬을 감상하려면 계속 자리를 옮겨 다녀야 한다. 행렬에 여러 가마가 등장한다. 왕의 상여인 ‘대여’와 ‘견여’를 비롯해 왕실 귀중품을 실어 나르는 ‘채여’와 제기를 실은 ‘요여’도 있으니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짐작하듯이 장례를 주제로 한 박물관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삼백로에 있는 예아리박물관은 세계의 상장례 유물 5천여점을 보관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으로 2013년 4월 문을 열었다. “예아리는 예가 있는 아름다운 울타리라는 뜻이지요. 상장례(喪葬禮)문화를 북돋우고 효와 예를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상장례문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절차 및 예법이 시기별 지역별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처럼 특별한 장례 전문박물관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을까. 설립자는 임호영 관장의 부친 고 임준 회장이다. 임 회장은 종합장례용품 회사인 ‘삼포실버드림’을 운영하며 1991년부터 국내외를 다니며 관련 유물과 자료를 수집한다. “설립자는 재산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세계의 상장례문화를 후대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예아리박물관은 경제성과 편의성을 좇으며 본래 의미가 퇴색·변질된 전통 상장례문화를 연구하고 그 참된 의미를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살아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 시대 어느 철학자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죽음은 삶을 충실하게 살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예아리박물관을 나오며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떠올린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1. 안산 성호박물관

성호는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안산 성호박물관을 찾으며 생각에 잠긴다. 의대 진학을 목표로 7세부터 학원에 다니는 우리의 참담한 현실을 선생은 어떻게 진단하실까. 그 목적이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면 선생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실까. 3천7편의 글이 실려 있는 ‘성호사설’을 펼쳐보면 성호의 대답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섯 마리의 좀벌레를 뜻하는 ‘육두’라는 글에서 ‘노비제도’와 ‘과거제도’를 먼저 지적했던 사실을 떠올린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성호를 이렇게 노래한다. “학식이 넓고 깊은 성호 선생을 백대의 스승으로 나는 모시네.” ■ 청년 성호를 만나는 성호문화제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을 기리는 성호박물관은 2002년 5월 안산시가 건립한 1종 전문 박물관이다. 성호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여유롭게 산책하기에 좋다. 김홍도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성호공원에 있는 안산식물원이나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점성공원도 성호와 관련이 깊다. 성호박물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객과 소통하고 있다. 예컨대 봄이면 입춘첩을 선물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꽃씨를 나눠준다. 매년 안산 성호공원에서 열리는 성호문화제 역시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시민을 불러들이고 있다.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일까지 ‘제28회 성호문화제’가 열렸다. 행사 프로그램 가운데 ‘성호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음악회’와 ‘청년 성호 지식 콘서트’가 있다. 할아버지 성호와 청년 성호를 함께 다루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할아버지 성호 선생님이 아니라 고민하고 방황하며 여행을 떠나던 젊은 성호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이수빈 학예연구사는 성호를 알리기 위해 궁리가 많다. 박물관 벽에 걸린 펼침막에 새긴 ‘고난, 유람, 유산기’와 ‘일상, 거인, 청년성호’라는 글귀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삼두회 체험’은 어떤 내용일까. 성호는 20대 청년 시절에 안산군 첨성리(안산시 일동)에 들어와 살면서 평생을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손수 닭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넉넉해지는 개선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특히 그의 사민평등의 인간관은 크게 앞선 생각으로 평가된다. ■ 위대한 실학자 성호의 부드러운 숨결 2층 상설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성호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성호의 한평생을 살펴보면서 그의 삶도 고난에 찬 삶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상설전시실 입구에 성호의 ‘수결’과 성호 선생의 흉상이 놓여 있다. ‘여주 이씨 성호 이익의 가계도’를 살펴본다. 역사책에서 만난 익숙한 이름이 여럿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정조대 명성을 떨친 이가환은 성호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인 ‘천금물전(千金勿傳)’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풀잎처럼 곡선으로 이어지는 글씨체 초서(草書)는 마치 추상화 같다. 과연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성호 이익의 집안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서예의 명문가다. 부친 매산 이하진(1628~1682)과 셋째 형 옥동 이서는 특히 유명하다. 이하진의 글씨 ‘청풍(淸風)’을 비롯해 선조들의 소중한 글씨를 책으로 만들어 보존한 후손들의 정성이 가득 느껴진다. 이하진이 남긴 서첩 천금물전은 ‘천금을 줘도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호의 셋째 형 옥동 이서(1662~1723)의 다양한 서체를 수록한 서첩도 주목해야 할 유물이다. 포천에 살았던 이서가 안산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아우 이익에게 보내는 편지도 눈길을 끈다. 중요민속문화재인 다섯 줄의 거문고는 아주 특별한 명품 유물이다. “마음의 번뇌를 씻어주는 데 거문고보다 나은 것이 없더라.” 옥동금을 비롯해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이름을 가진 거문고의 뒷면에 새겨진 사연은 무엇일까. 금강산 만폭동에서 벼락을 맞아 고사한 오동나무를 거문고 장인 문현립에게 맡겨 만들었다는 흥미로운 사연과 감리금, 천지금, 벽력금, 군자금, 봉래금, 풍계금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려준다. 거문고 위에 전시한 반주 악보 ‘우조초삭대엽’도 소중한 유물이다. 한글로 가사와 악보를 새긴 사실이 무척 반갑다. ■ 모두가 안녕하길 성호 이익이 여러 조카에게 부친 편지에는 집안의 혼사에 관련된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고 있다. 성호가 이사문에게 1743년 9월6일에 보낸 편지에는 아들 이맹휴가 다시 관직에 나아간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조용한 곳을 택해 쉼 없이 독서하고 있느냐. 오직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란다.” 독서를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 성호의 당부가 절절하게 전달된다. 12각 소반에 음식이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콩나물이 담긴 그릇도 보인다. “내가 근래에 삼두회(三豆會)를 마련했으니, 콩으로 죽을 쑤고 콩나물과 된장을 먹으며 친척들을 모아 환담하는 것이다. 우리같이 띠집에 살면서 생계를 이어나갈 전답이 없는 자를 위해 글을 지어 자손에게 경계한다.” 그 옆에 놓인 책이 ‘백언해(百諺解)’인데 성호를 비롯해 박지원,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의 글들을 뽑아 필사한 책이다. 이익이 우리나라 속담을 정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가 편지 내용을 풀이해 준다. “성호 선생님은 편지로 자신의 안위를 전하고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눈빛이 빛나고 얼굴이 맑은 초상 앞에 선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호 이익의 영정은 진본이 아니다. 1780년(정조 4년)에 처음 제작해 소중히 전해오던 영정은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타 버렸다. “이 초상화는 성호의 후손인 이돈형이 주도해 성호 유상을 관리했던 사람의 기억과 종손 이삼환의 초상화를 참조해 1989년 다시 그린 작품입니다.” 성호의 초상을 그리면서 참고했다는 종손 이삼환(1729~1813)의 초상을 다시 살펴본다. ■ 아이와 어른이 어울리며 꿈을 펼치는 공간 성호박물관은 옛날 성호 이익의 ‘성호장(星湖莊)’이 있었던 자리, ‘점섬(占剡)’이라고도 불린 곳에 세웠다. 이익의 호 ‘성호(星湖)’는 근처에 있던 호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형 이잠의 호 ‘섬계(剡溪)’와 손자 이구환의 호 ‘섬촌(剡村)’도 마찬가지다. 박물관에서 만난 한 권의 책에서 성호 이익 선생의 뜨거운 숨결을 느낀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선생의 갸륵한 마음을 편지에서 찾아낸다. 성호가 존경하고 사숙했던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유형원의 ‘반계수록’ 같은 문집과 성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통해 성호의 사상사적 위치를 가늠해 본다. “소중한 유물을 안산시에 기증한 후손들이 있었기에 박물관을 설립할 수 있었지요. 고 이돈형 선생의 성호 이익의 유물 기증과 기탁은 박물관 설립의 바탕이었습니다.” 안산시는 이러한 박물관의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성호학 연구 지원사업을 꾸준하게 펼쳐 성호학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성호를 꾸준하게 공부하는 안산시민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다. 대중적으로 전달하려는 박물관의 노력은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지하 공간은 어린이 체험과 시민들의 학습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체험하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무척 다양하다. 성호사설 서문에 실린 저자의 바람이 뜻밖에도 너무나 소박하다. “지극히 천한 퇴비와 지푸라기라도 밭에서 곡식을 기르고 부엌에서 반찬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 글을 잘 보면 어찌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 그렇다. 위대한 고전도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옛사람의 낡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새겨 읽으면 영혼을 살찌우는 거름이 될 것이다. 박물관 너머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며 선생의 맑고 깊은 눈빛을 떠올린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0.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박물관 주변에 활짝 핀 인동덩굴 꽃향기를 맡으며 반짝이는 유선형의 박물관을 살펴본다. 아득한 선사시대를 다루는 박물관의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다. 세계 공모로 당선된 두 명의 프랑스 건축사가 선사시대로 떠나는 우주선을 상상하며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풍광이 빼어난 한탄강 가까이에 자리 잡은 연천 전곡선사박물관(관장 이한용)은 선사시대와 오늘을 잇는 흥미로운 역사 공간이다. 박물관 주변 수십만평의 드넓은 대지 위에 ‘전곡리 유적’과 ‘구석기체험숲’이 펼쳐진다. ■ 선사시대로 떠나는 행복한 시간여행 “전곡선사박물관은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발견으로 세계 구석기 연구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역사적 현장에 건립된 유적박물관입니다. 경기도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26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전곡리 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과 활용을 위해 설립한 것이지요.” 박물관 출입구를 장식한 별자리 장식을 보며 동굴을 찾고 잠들었을 선사시대 사람들의 하루를 생각해 본다. 관람객을 원시인들이 살았던 선사시대로 데려가는 박물관은 동굴처럼 아늑하다. 상설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모니터에 이한용 관장의 얼굴이 비친다. 놀랍게도 이 관장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박물관을 소개한다. “하하,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지능(AI)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구석기박물관이지만 가장 첨단의 매체를 활용하는 박물관입니다.” 최첨단 기술인 AI로 영어와 일본어까지 4개국어로 박물관을 소개하는 것은 선사박물관이 전국에서 최초다. 상설전시관 전체 전시의 주제는 ‘시간여행’이다. ‘시간의 선’을 따라 전시실로 들어서면 처음 마주하는 유물이 1978~1979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최초의 주먹도끼들이다. 전곡리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했을 주먹도끼를 둥근 유리관에 전시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인류 진화의 위대한 행진’은 약 700만년 전 유인원 ‘투마이’로부터 약 1만년 전 평양 인근에서 발견된 ‘만달인’까지 총 14개체의 화석인류가 전시돼 있다. 가죽옷을 입고 창을 든 만달인은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람이다. 평양 인근의 용곡동굴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용곡인’은 만달인과 함께 북한 고고학을 대표한다. 만달인을 우리 한반도의 직접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북한 고고학계는 전곡선사박물관에 전시된 만달인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나무에서 초원으로 내려온 ‘사바나의 최초 인류’부터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터전을 옮긴 ‘최초의 아시아 이주인’도 함께 만난다. ■ 돌멩이에 새겨진 동물과 인간의 역사 작은 동산처럼 꾸민 공간에는 어떤 동물이 숨어있을까. 나무와 바위에 몸을 살짝 가린 독수리는 박제된 것이지만 살아 있는 듯 당당하다. 성격이 예민해 망원경으로나 관찰해야 하는 두루미를 바로 곁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니 감동이다. “멧돼지와 고라니 등 연천군에서 기증한 것을 박물관에서 박제한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매년 상설전의 콘텐츠를 보강하는 예산을 지원하고 있지요.” 상설전시실의 작은 변화를 찾아내는 것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재현해 놓은 공간은 몇 차례 찾았으나 여전히 감탄을 자아낼 만큼 훌륭하다.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는 전시도 여럿 마련돼 있다.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피우고 돌멩이를 깨뜨려 돌도끼를 만드는 ‘고고학 체험실’과 약 250만년 동안 이어진 인간 육식의 증거 및 의미를 살펴보는 기획전 ‘고기’와 개관 10주년을 맞아 준비한 ‘오! 구석기’도 구석기시대의 의식주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롭고 알찬 전시다. ■ 아름답고 슬픈 멸종동물 이야기 ‘아름답고 슬픈 멸종동물 이야기’에는 어떤 동물이 등장할까. 기획전시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지하동굴처럼 재미있다. 8월까지 열리는 이 기획전은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많은 생명이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성찰하도록 만든다. 평소 우리가 만나기 힘든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동물을 소개하는 그림에 동물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부호를 살펴본다. 현재 위기에 있는 동물들은 어떤 종일까. 사라져 가는 동물을 소개하는 그림도 수준 높은 작품이다. “46억년의 역사를 가진 지구에는 공룡을 포함한 수많은 종이 멸종하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공룡이 사라진 마지막 대멸종이 있은 지도 어언 6천600만년이 돼갑니다. 이후에도 지구에서 멸종은 계속돼 매머드와 털코뿔소, 검치호 같은 동물들이 멸종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동물들이 사라졌기에 지금의 동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라니 자연의 질서가 오묘하다. 인류 또한 마찬가지다. 돌도끼를 비롯한 도구를 사용하며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기획전 ‘아름답고 슬픈 멸종동물 이야기’는 우리가 만날 수 없는 털매머드, 검치호, 네안데르탈인, 도도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환경과 자연의 소중함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전시물을 관람하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매머드 상아를 전시한 곳에 붙은 안내문이다. “진짜 매머드의 상아를 만져 보세요!” 조심스럽게 매머드의 상아를 쓰다듬어 본다. 귀중한 유물을 관람객이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전시한 박물관의 결단과 배려가 고맙다. ■ 연천 전곡리 구석기 축제의 탄생기 “1978년 전곡리 유적을 발견한 다음 해에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약 80만㎡(24만평)의 유적 일대가 국가사적 제268호로 지정됐습니다.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중요한 발견으로 세계적인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졌지요. 그러나 당시 전곡리 유적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은 매우 낮았고 지역 개발의 장애물로 취급받는 형편이었습니다.” 1993년 4월 전곡리 구석기 유적관(현 유적관리사무소)이 건립됐을 때 기념 공연이 펼쳐진다. 이날 펼쳐진 원시인 퍼포먼스와 석기를 만드는 행사는 어린이를 비롯한 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1994년 어린이날에 구석기 축제일로 지정된다. 2000년 제8회 전곡리구석기축제부터 행사를 주관한 연천군은 2011년 전곡선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축제로 발전시킨다. 축제와 함께 전곡선사박물관의 대표 교육프로그램 ‘1박 2일 캠프’의 인기는 매우 놀랍다. “개관 당시부터 진행했던 것으로 선사 체험의 종합선물 세트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모집 공고 1~2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해 올해부터는 선착순에서 추첨식으로 바꿨습니다.” ■ 선사시대는 남북 화해와 협력의 창 전곡선사박물관의 전시 방식도 실험적이며 도전적이다. 전시를 기획할 때 가장 집중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박물관에서 강조하는 것은 ‘생각하고 상상하는 힘’입니다. 관람객들이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감정이입을 돕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얼마 전부터 ‘선사 차력쇼’라는 재미난 이름의 시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직접 불을 피우고 돌을 깨 도끼를 만드는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한용 관장이다. 관람객을 향한 박물관의 노력은 전시실과 체험장 곳곳에서 발견된다. 전시실 곳곳에 배치돼 관람객을 안내하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어르신들은 연천지역의 노인대학생들이다. 박물관의 회의 공간을 지역과 군부대 등 공공 기관에 개방하고 있는 점도 칭찬할 만하다. 연천 전곡선사박물관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 같다. 76만㎡(23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와 세계자연유산인 한탄강을 끼고 있으며 북한과 가까운 인문지리적 조건은 앞으로 강점이 될 것이다. 장래 한반도의 번영은 남북 화해와 협력으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는 이념에서 자유로운 남북 공통의 역사다.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공동 연구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용곡인과 만달인은 남북 교류의 상징적인 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분을 평양박물관에 전시해 북한 주민들이 관람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탄강이 싸고 있는 전곡선사박물관의 풍경은 사계절 모두 좋다. 무더운 여름철에 찾으면 더욱 좋은 박물관이 연천에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9. 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광활한 만주 벌판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웅장한 장군총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며 호방한 문화를 창조해 민족의 위상을 뽐냈던 고구려는 고려를 거쳐 ‘코리아’로 이어진다. 구리시에 고구려의 기상과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립박물관이 있다. 바로 ‘고구려대장간마을’이다. ■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 ‘구리 아차산’ 5세기 고구려의 영토는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와 ‘아단성’(아차산의 옛 지명)까지 확장됐다. 1994년부터 구리 아차산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발굴된다. 2010년까지 계속된 학술조사와 발굴로 아차산은 남한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로 알려지게 된다. 아차산에서 수많은 보루가 발견되고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 터는 고구려 유적이 즐비한 만주나 북한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유적이다. 고구려의 영광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리시는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아차산 자락에 고구려대장간마을을 조성한다. 2008년 개장한 고구려대장간마을은 이듬해 4월 공립박물관으로 등록돼 아차산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정기적으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고구려 대장간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대장장이가 신격화돼 대장장이 신으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바탕으로 고구려대장간마을이 탄생한 것입니다. 살아 숨 쉬는 고구려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역사 체험 공간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고맙지요.” 아차산을 발굴 조사할 때부터 현장을 지켜봤다는 이면옥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아차산에는 구의동보루, 시루봉보루, 용마산보루, 망우산보루, 홍련봉보루, 봉화산보루가 이어진다. 아차산보루는 4보루까지, 용마산보루는 5보루까지 이어질 정도로 아차산 주변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17개의 보루(堡壘) 중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대장간터가 발견된 아차산 4보루다. “고구려는 396년부터 551년까지 76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이곳에서 고구려가 남긴 76년 동안의 역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 고구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고향을 떠나온 병사들은 보루를 쌓고 백제군에 맞서 전투를 벌이고 무기를 수리하며 전투가 없을 때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습니다. 이처럼 아차산보루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전시실에서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를 마주한다. 동양 최대의 비석이라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1천775자의 글자 중에서 ‘평안(平安)’이란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7~8세의 어린이가 무용총 수렵도의 그림을 맞추고 있다. 고구려의 무사가 말을 달리며 활로 호랑이와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호쾌하다. 전통 가옥의 지붕을 만들 때 처마 끝을 막는 기와를 막새기와 또는 와당이라고 한다. 전시실에서 고구려의 와당을 맞추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장수, 아이들, 염모, 대장장이, 백제군이 등장하는 만화 ‘투구에 핀 들꽃’이 전시실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다. 만화로 아이들에게 고구려대장간마을을 소개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부제가 ‘고구려대장간마을 장수 이야기’이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아차산 보루군을 옮겨 놓다-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라 새겨 놓았다. 안내 글귀대로 박물관 2층은 아차산보루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시 공간이다. “아차산 4보루의 둘레는 256m에 이릅니다. 성벽에는 적을 감시하면서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인 치(雉)가 두 개 있고 성안에는 배수로, 저수시설, 온돌이 놓인 건물터가 확인됐습니다.” 모형으로 병사들이 생활했을 건물터의 위치와 크기를 비교하고 간이 대장간 시설의 모양을 살펴본다. 특이한 유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현대 군대에서 사용하는 식기처럼 가운데는 둥글고 그 옆으로 네 곳으로 나눠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구절판’이란 그릇이다. 생김새도 흥미롭지만 이 그릇에 무엇을 담았을지 너무 궁금하다. 주발이 아주 넓고 띠고리 모양의 손잡이 네 개가 있는 토기는 어디에 쓰였던 것일까. 1천500년 된 유물이 관람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고구려인들도 연꽃을 사랑했던 모양이다. 아차산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과 평양에서 출토된 연화인동문와당에 새겨진 연꽃을 비교해 본다. 연꽃을 사랑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이 와당에 가득 담겨 있는 듯하다. 철기는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다. 보리나 밀을 베는 낫, 땅을 파는 삽날 같은 농기구와 창날과 화살촉도 여러 점 전시돼 있다. 물론 칼이나 낫을 갈았던 숫돌도 있다. 커다란 쇠솥과 쇠항아리는 처음 만나는 진귀한 유물이다. 여러 장의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 만든 투구에 눈길이 머문다. 저 갑옷을 입었던 고구려 병사는 고향에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차산 전투에서 전사했을까. 고구려 무사들이 사용했을 다양한 화살촉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아차산 자락을 달리던 고구려 무사들의 전마에 부착했을 등자와 재갈에 주목한다. 고구려의 기상을 보여주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 놀며 배우고 익히는 우리 역사 고구려대장간마을에는 8월까지 매주 토·일요일 두 차례 운영되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와당과 놀자’를 운영한다. 관람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고구려 와당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고구려인의 문화를 배우고 와당을 만들어보는 체험활동이다. 한편 4월과 5월, 9월과 10월에 진행되는 ‘만화랑 역사랑’은 유아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오전에 1시간 동안 미취학 유아를 대상으로 고구려대장간마을 관람과 활쏘기 체험이 이어진다. ‘아차산 지킴이’ 활동은 10월의 주말에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고구려대장간마을과 아차산일대보루군에서 4시간 동안 진행한다. 사적 제455호인 아차산일대보루군 현장을 답사해 고구려 유적의 보존 캠페인 활동을 진행한다.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의 프로그램 ‘고구려를 찾아라’는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활동지 및 와당 목걸이 체험 같은 활동이다. 다만 아쉽게도 야외전시관은 시설이 낙후해 안전에 문제가 있어 현재 개방하지 않고 있다. ■ 아차산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배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숨결이 남아 있는 보루를 살펴보기 위해 박물관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계곡 바위틈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더위를 식혀 준다. 잠시 걸었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사방이 탁 트인 봉우리가 나타난다. 해발 200~300m의 아차산과 용마산에는 20여개의 고구려 보루가 모여 있는데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교두보인 아차산보루에서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해 한강과 중랑천과 왕숙천 일대를 조망한다. 구릉의 능선을 따라 400∼500m의 간격을 두고 배치된 이 유적들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무렵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앞에서 소개했듯이 1994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아차산보루군은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에 진입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기까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삼국의 역사를 반영하는 소중한 유적이다. 대장간터가 발견된 아차산 4보루는 아차산성과 달리 들어갈 수 있어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외국인이다.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차산은 고구려의 명장 온달의 전설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옛 모습을 간직한 보루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는 시민들의 표정이 밝고 행복하다. 고려 때는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고 조선 중기까지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됐던 아차산은 고구려의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아이들과 고구려대장간마을을 찾고 아차산에 올라 수·당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기상을 이야기하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8. 현대어린이책미술관 MOKA

물방울처럼 동글동글하고 징검다리를 닮은 계단이 있는 어린이책미술관이 성남 판교에 있다. 현대백화점 5, 6층에 자리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 MOKA(관장 노정민)는 ‘어린이책’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의 미술관이다. ■ 열린 서재, 그림책 숲으로 오세요 홍보를 담당하는 박선주씨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을 둘러보며 어린이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동글동글한 계단을 오르면 ‘열린 서재’가 나타난다. 6천여권의 그림책이 진열된 열린 서재는 ‘몽글몽글 이야기가 피어나는 숲’이다. 그림책 속 주제를 분석해 나온 86개의 키워드로 6천여권의 그림책을 분류한 것이 재미있다. “어린이 스스로 나를 살피고 내 주변을 이해하고 나아가 스스로 사회와 세상을 탐구할 수 있는 미술관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열린 서재 가장 왼쪽 책장에 붙은 주제어가 ‘읽지 마세요’다. ‘이런 건 처음이야’와 ‘나도 책일까’라는 주제어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의 하루’라는 주제어에는 무엇이 포함돼 있을까. 우리집, 교통, 편지, 유치원, 시간, 돈, 학교, 잠자리, 몸의 이야기, 우리 동네, 약속, 놀이, 직업까지 13가지가 들어 있다. 주제어가 ‘우리들의 어려움’인 곳에는 이별과 전쟁과 폭력에 관한 그림책들이 있고 ‘신기한 이야기’에는 ‘조각조각’, ‘울퉁불퉁’, ‘미끄러운’처럼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책들이 모여 있다. 세계적인 그림책 수상작을 한곳에 모아 놓은 책장 앞에 선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케이트 그린어웨이상’과 ‘칼데콧상’ 및 ‘볼로냐상’,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처럼 이름난 상을 받은 그림책이 책장에 가득하다. 물론 어른을 위한 동화책을 모아 둔 곳도 있다. 열린 서재가 운영하는 ‘문해력 클럽’은 어떤 활동을 할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독해 지수 분석을 통한 학년 적정 수준의 그림책을 활용해 말하기와 듣기, 단어 퍼즐, 문자 만들기 같은 활동으로 아이들의 문해력을 키워 줍니다.” ■ 내일도 미술관에서 만나요 특별기획전의 주제가 ‘내일도 만나-See You Again’이다. 전시를 기획한 채병훈 학예사의 소개말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의 자연과 내일의 환경을 주제로 국내외 그림작가 22명과 함께 이야기를 펼칩니다. 오랫동안 글과 그림 속 배경이자 소재였던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을 넘어 이제는 우리의 행동을 끌어내는 환경으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 됐습니다.” 국내외 유명 그림 작가들이 지은 25권의 그림책을 통해 ‘함께하는 오늘’과 ‘사라지는 오늘’,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오늘’이라는 세 가지 시선으로 자연과 환경을 살핀 책이 전시돼 있다. 사라 토나티의 ‘나무와 말하다’, 펠리치타 살라의 ‘나무가 되자’, 브리타 테켄트럽의 ‘하늘 가득한 노래’ 등 세 권의 책이 이야기를 이끈다. 한 아이가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를 껴안고 있다. 자세히 보니 나무에도 두 눈이 있다! 커다란 나무에서 노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이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가 8인의 작품 64점이 관람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식물과 곤충, 동물과 인간은 여러 장소에서 관계를 만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요. 함께하는 오늘의 소중함을 느끼고 다가올 내일의 환경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도록 구성했습니다.” 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절로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 이어진다. ‘나무가 되자’는 저마다 다른 모습을 가진 나무가 어울려 숲을 이루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하늘 가득한 노래’는 자연이 가져다 주는 놀라움과 기쁨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 ‘모든 씨앗은 완벽해’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전시와 연계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7월 초까지 진행하는 ‘모든 씨앗은 완벽해’라는 프로그램은 어떤 내용일까.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 한 그루 나무로 성장하기까지 그 위대한 여정 속 숨겨진 자연의 순환 과정을 이해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매주 일요일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오후 1시30분부터 3시까지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전시 감상과 체험(40분)과 창의적 활동(50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의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기까지 과정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숨겨진 자연의 순환 과정을 배우고 씨앗의 특징을 관찰하며 자연 순환 상자를 만들어 보는 예술 창작활동이다. ‘미래 재료 연구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 아동을 대상으로 7월5일까지 진행되는 표현 교육이다. 전시 감상과 체험(40분), 창의적 활동(50분)으로 구성한 이 프로그램은 지속가능한 미래 재료를 탐구하는 연구자가 돼 재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더해 나만의 ‘미래 재료 상자’를 만들어 보는 연구 창작활동이다. “아이들은 지속가능한 미래 재료를 탐구하는 연구자가 돼 재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창의적인 대안을 궁리해 볼 것입니다.” 4~5세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다시 만난 친구’는 환경 교육프로그램이다. 일상의 재료로 만든 바닷속 해양동물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내용이다. 일정한 참가비를 받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정원을 15명 이내로 한정해 흥미와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 그림과 이야기로 찾아 내는 나의 꿈과 재능 6층 열린서재 옆에 있는 ‘MOKA 랩·아틀리에’는 미술관을 찾은 꼬마 예술가들이 숨겨진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예술과 친해질 수 있는 공간이다. 복도 끝 문에 ‘나는 책이 좋아’라는 글이 적혀 있다. 종이접기 형식을 닮은 3개의 교육실은 주말이면 아이들로 가득 찬다. 6층에서 내려다본 5층의 공간 풍경이 재미있다.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독특한 시공간적 경험을 아이들에게 선사하려는 건축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어떤 분야에 가장 집중할까. “예술과 문학을 새롭게 읽고, 쓰고, 표현하는 활동이 중심입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미술관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은 세계를 바라보는 어린이의 꿈을 꺼내 쑥쑥 자라도록 도와준다. 8월 말까지 진행하는 ‘종이 풍경화’는 참가비가 없지만 매우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다. “자연에서 온 재료로 만든 종이를 깊이 만나는 기회를 마련했지요. 한번 쓴 종이를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도록 흔하지만 종이를 아끼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나무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잘게 자른 종이에 풀과 물을 넣어 섞으면 멋진 무엇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된다. 네모 상자 속에 작은 풍경을 만든 뒤 원하는 위치에 놓으면 커다란 풍경도 완성할 수 있다. 재료는 4월부터 어린이책미술관과 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모은 종이를 재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7, 8월에 진행하는 ‘미지의 나라’ 역시 미술관을 찾은 어린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신규 프로그램이다. “용기를 내어 신청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여권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여권을 받은 어린이들은 7~12월 MOKA와의 세계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나라별 도장을 모을 수 있습니다. 모은 도장 수에 따라 선물을 나눠줄 계획이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8월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지역사회 공헌과 문화예술 지원을 위해 현대백화점이 설립한 ‘최초의 어린이책미술관’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지난 10년 동안 이어졌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예술과 문학을 새롭게 읽고, 쓰고, 표현하는 활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내는 미술관 MOKA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어린이의 꿈이 자라납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7.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상상한 자동차는 1886년 현실이 된다.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벤처 특허차’는 세상을 바꿨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처 설립자인 칼 벤츠가 삼륜 마차에 가솔린 엔진을 장착해 특허받은 이 차는 시속 16㎞에 불과했으나 자동차 시대를 활짝 열었다. 140살이 된 ‘벤처 특허차’는 2025년 현재도 시동이 걸리고 운행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 지구별이 위태롭다는 위기의식은 엔진과 모터를 함께 쓰는 하이브리드를 개발하고 100년 넘게 사장됐던 전기차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엔진이 사라진 전기자동차, 핸들이 없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과연 미래의 자동차는 또 어떻게 진화할까.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자리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서 모빌리티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미래를 상상해 본다. ■ 첨단의 기술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즐거운 공간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은 1998년 개관한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의 새로운 이름이다. 클래식카 중심에서 모빌리티로 테마를 확장하고 체험과 복합문화 기능을 강화해 2023년 8월 재개관했다. 기차와 배, 비행기와 드론 등 전시물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은 물론이고 친환경, 자율주행, 드론, 우주여행 등 모빌리티의 미래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체험 활동을 크게 늘렸습니다. 자율주행 버스를 타 보고, 무선조종 자동차를 운전해 보는 ‘RC 레이스웨이’를 즐길 수 있지요.” 4D 전투기 시뮬레이션 ‘익스트림 에어 컴뱃’과 자동차 경주 시뮬레이션 ‘스피드킹 레이서’ 등 첨단의 체험시설은 관람객들의 바람에 화답한 것이다. 1층 드론 비행장에서 드론을 조종해 장애물을 통과하는 실력을 갖춘 어린이와 런웨이에서 RC카를 조종하는 관람객의 표정이 밝다. “자동차를 몰고 시원한 숲길을 달리는 경험은 물론이고 레이서처럼 고속으로 신나게 달리는 짜릿한 경험도 가능합니다.” 3개의 TV 모니터를 보며 레이싱카를 운전하는 체험인데 달리던 자동차가 벽에 부딪히면 보닛에서 연기가 나고 앞쪽 창문이 깨지는 등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60여대의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을 시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는 2층 전시관은 볼거리가 풍성하다. 직접 타 볼 수 있는 전시품이 곳곳에 배치해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19세기 초 독일의 거리를 달린 자전거를 자세히 살펴본다. 둘을 뜻하는 바이(Bi)와 회전을 뜻하는 사이클(Cycle)이 더해진 바이시클(Bicycle)은 발전을 거듭하며 세계로 퍼져나간다. 자전거가 전기자동차와 내연기관 자동차의 바탕이 된다. 영국의 모터사이클 제조사 프리시전이 1912년 제작한 삼륜차는 운전석 아래 배치된 원동기와 동력전달장치, 앞바퀴는 모터사이클을 닮았고 후면의 넓은 좌석과 두 바퀴는 자동차를 닮았다. 오래됐으나 멋진 자동차를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관람객들의 눈길은 디자인과 성능이 빼어난 명차에 집중된다. “자동차 중에서 1920~30년대 장인들에 의해 수공으로 제작된 명차를 ‘클래식카’라고 부릅니다.” 전시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명품으로 손꼽히는 ‘부가티 타입 38’이나 ‘스터츠 베어켓 스피드스터’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1880년대부터 연대별로 세계 각국의 자동차를 만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자동차의 기능과 디자인에서 인간의 욕망과 시대의 변화를 확인한다. 이번에는 1955년 제작된 첫 국산 자동차 ‘시(始)-발(發)’과 마주한다. 1975년 선보인 현대의 ‘포니 자동차’는 한국 자동차 산업을 이끈 주역이다. 추억을 더듬는 것일까. 한 중년의 관람객이 역사적인 유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GMK 새마을 트럭’(1977년)과 ‘새한 맵시’(1982년)를 거쳐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98년 선보인 ‘쌍용 체어맨 리무진’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광복 80년을 맞이한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은 일본을 앞지른 자동차 강국으로 우뚝섰다. ■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 여행 오월의 장미꽃처럼 검붉은 롤스로이스 실버고스트는 1910년식 모델로 마차형 보디가 적용돼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던 시대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작고 효율적인 자동차를 출시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 초소형인 ‘BMW 이세타’는 전후의 경제난을 극복한 독일인의 의지와 지혜를 보여준다. 이처럼 자동차의 크기와 색깔과 디자인에도 시대의 요구와 철학이 깊게 투영돼 있다. 자율주행차는 언제쯤 실용화될까. 머잖은 장래에 브레이크와 액셀, 핸들을 조작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자동차가 거리를 채울 것은 분명하다. 카메라 12대와 레이더 6대가 장착된 자율주행차에 탑승해 과속방지턱, 신호등 등을 감지하며 달리는 과정을 체험해 보면 이런 전망은 더욱 굳어진다. 버스가 출발하면 차량 내부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에 운전 상황이 표시된다. 건널목이 나오면 자동으로 멈춰 보행자가 있는지 살피는 모양이 신기하다. 콜럼버스가 탔던 배와 대륙의 횡단을 가능케 한 기차는 물론이고 드론 같은 이동수단도 살펴본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탈것들을 만나고 체험하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모빌리티 특별전은 친환경, 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감상하고 상상하도록 꾸몄다. 경주차처럼 낮고 매끄러운 몸체를 가진 ‘BMW M8 그란 쿠페’는 현재 출시 중인 BMW 모델 중 최고 성능을 가진 최고가 모델이다. 작은 크기의 유선형 몸체에 전자동 소프트톱이 적용된 ‘BMW Z4 M40i’는 오픈카의 전형과 같은 모델로 운전의 즐거움과 개방감을 함께 제공하는 스포츠카로 인기가 높다. 두 가지 모두 2025년 출시한 신제품이다. ■ 명품에 깃든 장인의 숨결을 느끼다 ‘헤리티지 드라이브’는 무엇일까. “박물관 직원이 운전하는 클래식카에 탑승해 야외공원을 한 바퀴 도는 체험입니다.” 평소 구경하기 어려운 클래식카를 타고 야외공원을 달리는 경험은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다. 달마다 시승용 차종이 바뀌는데 5월에는 1958년 생산된 ‘뷰익 로드마스터’가 운행되고 있다. 뷰익은 캐딜락, 올즈모빌과 더불어 20세기 GM의 고급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다. 6월에는 ‘올즈모빌 98’, 7월 ‘포드 선더버드 스포츠 로드스터’, 8월 ‘메르세데스벤츠’, 9월 ‘링컨 콘티넨털 마크 Ⅲ’, 10월 ‘링컨 콘티넨털 컨버터블’, 11월 ‘뷰익 스카이락’, 12월 ‘AM 제너럴 허머 H1’가 뒤를 잇는다. 비록 우리에게 이름은 낯설지만 외장이 고급스럽고 멋지다는 사실은 한결같다. 분기마다 모빌리티 테마의 기획전이 열리는 ‘포커스존’에 들어선다. 5월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은 ‘모터사이클의 진화’다. 19세기 후반 자전거에 엔진을 장착하면서 탄생한 모터사이클은 20세기 초 할리데이비슨, 인디언 같은 유명 브랜드가 탄생하면서 대중화됐다. 전시실에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자전거 형태의 초기 모터사이클부터 2025년 최신형 전기모터사이클까지 10종의 모터사이클을 만나 본다.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서 정성을 쏟고 있는 사업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20세기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 자동차를 문화유산으로 정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보존 처리와 원형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복원작업이다. 100년이 지난 자동차가 원래의 모습으로 움직이게 하고 대한민국 자동차의 빛나는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결이다. 산과 들이 푸른 오월이다. 이 좋은 계절이 서둘러 지나가기 전에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추억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6.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1층에는 ‘문학을 더 가깝게 삶을 더 빛나게’, 2층은 ‘9살 내가 사는 마을’, 마지막 3층은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라는 글을 엘리베이터 출입문에 새긴 곳이 있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에 자리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촌장 김종회)은 2009년 6월 개관한 문학관이다. 16년이 지난 2025년 현재 소나기마을은 연간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국내 최고의 문학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황순원의 작품과 생애를 되돌아보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신록이 눈부시다. 연두와 초록의 숲에 드문드문 보이는 붉고 흰 꽃들이 봄날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푸른 잔디로 뒤덮인 널따란 마당에는 원두막과 수숫대를 엮어 만든 움집이 여러 채 서 있다. 시간마다 소나기가 내리는 광장의 봄 풍경이 평화롭다. 수숫단 움집처럼 디자인한 문학관의 공간 배치가 산뜻하다. 작가 황순원이 토해낸 빛나는 문장들이 직사각형의 투명한 아크릴판에 새겨져 주렁주렁 달려 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일까, 소나기 그친 하늘을 뚫고 나온 햇살일까. 보랏빛 천장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원통형 조형물에 새긴 ‘황순원 연대기’를 통해 작가 황순원(1915~2000년)의 작품 활동과 생애를 더듬어본다. 중등학교 교사로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시내에 배포하다가 1년6개월간 투옥된 적이 있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던 황순원은 16세에 ‘나의 꿈’이란 시로 문단에 등단해 시와 소설을 평생 꾸준하게 썼던 빼어난 작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 훌륭한 교육자였다.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황순원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 작품을 최초에 실은 정기간행물도 살펴본다. 제1전시실 ‘작가와의 만남’은 만년필과 친필 원고, 앉은뱅이책상과 저고리 등 생활유품을 전시해 작가의 소박한 일상과 정갈한 성품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의 주제는 ‘작품 속으로’다. ‘별’과 ‘독 짓는 늙은이’를 비롯한 단편소설과 ‘카인의 후예’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 같은 장편소설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 널리 읽힌 작품들이다. 제2전시실에서 박물관의 자랑인 ‘실감콘텐츠 영상체험관’을 체험한다. “소나기마을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시행하는 ‘2020년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사업’에 선정되고 2021년 ‘스마트 공립박물관·미술관 구축 지원사업’에 연속으로 선정됐지요.” 황순원문학촌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료 관람객이 찾는 박물관으로 성장한 비결은 첨단의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해 전시 방식과 내용을 새롭게 구축했기 때문이다.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난 징검다리가 반갑다. 디지털 플로어를 걸어가며 징검다리를 밟자 돌 주변 개울물이 파문을 일으킨다. 디지털 꽃밭에서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툭 치자 순식간에 꽃이 활짝 핀다. 동그라미들이 물방울처럼 바닥에 가득하다. 초록빛과 보랏빛 빗방울들이 바닥에 파문을 일으킨다. 소나기를 피한 원두막과 수숫단, 들꽃과 소나기가 내리는 하늘이 펼쳐진다. 어느덧 소설의 주인공처럼 들판을 달리고 수숫단에 파고들어 비를 피하고 소녀를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넌다. 소설의 인상적 장면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내는 디지털 기술이 신선하다. ■ 문학과 스마트 영상이 어우러진 공간 “황순원 선생님은 평생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과 장편 7편을 남겼습니다.” 함윤미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문학교실’을 둘러본다. ‘공부 안 해도 되는’ 교실답게 탁 트인 창밖으로 푸른 숲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수숫단 강당’은 매주 목요일마다 문학과 예술의 열기로 가득 채워지는 소통의 공간이다. “지난달 17일 오후 2시, 이곳에서 차인표 작가가 지역주민과 문인을 비롯한 200여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학정신과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수숫단 강당과 달리 ‘운명적 사랑전’이 열리는 전시실은 분위기가 한결 차분하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세 작품 ‘송아지’(1961년)와 ‘잃어버린 사람들’(1955년), 그리고 ‘기러기’(1942년)를 한 공간에서 영상으로 만난다.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디지털 전시여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작품에 집중할 수 있다. 줄거리를 보여주는 소설의 문장과 움직이는 그림이 어우러진 영상은 관람객의 시선을 이내 사로잡는다. 얼음이 깨져 소년과 송아지가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지막 장면이 못내 안타깝다. “소년과 송아지는 구조됩니까.” 함 학예사는 빙긋 웃으며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상상해 보세요.” ■ 놀이와 체험으로 즐기는 문학 2025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12월까지 진행하는 ‘이야기 숨바꼭질’은 나만의 ‘소나기’ 에코백을 꾸미는 프로그램이다. 소년이 소녀를 업고 있는 바탕 그림에 색을 칠하는 방식이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인기가 많다. ‘달력 만들기’는 소설 ‘소나기’의 주요 장면들로 구성된 12장의 그림들로 나만의 유일한 달력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와 함께 문학관을 찾은 가족에게 사랑받는 만들기 중심의 ‘징검다리 체험프로그램’과 청소년이 직접 문화기획자가 돼 보는 ‘인문학 크리에이터 층층대’도 운영된다. 관람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소원지 쓰기, 소나기 퀴즈, 손편지 쓰기 등 ‘자율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흥미로운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들이 마을을 문화 명소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3월부터는 매주 목요일 ‘2025 소나기마을 문학교실’을 열고 있다. 황순원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문학교실은 한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12월까지 흥미로운 강연이 이어진다. 정호승·신달자·김기택 시인, 김홍신·이순원·이승우 소설가, 차인표·배종옥 배우, 황선미 동화작가 등 유명 인사들이 마을을 찾아 강의를 진행하는 ‘2025 소나기마을 문학교실’에 대한 양평 주민과 관람객들의 관심이 뜨겁다. ■ 지역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소나기마을 “매년 가을에 열리는 황순원문학제는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 대회로 출발해 1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황순원문학상 시상, 문학세미나, 문화공연,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디카시 공모전을 더하며 풍성한 문학 축제의 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문화예술계의 마당발이기도 한 김종회 촌장의 열정이 대단하다. 전국 100여 문학관이 소속돼 있는 ㈔한국문학관협회장이기도 한 김 촌장은 황순원 선생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 20여년 전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소나기마을을 발의하고 그 건립과 운영을 이끌어온 산증인이다. 김 촌장은 매달 대중 문학강연 ‘문학마실’을 4천명이 넘는 구독자들에게 배달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소나기마을에 상주하면서 동화작가로 등단한 함윤미 학예연구사가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소나기마을의 임직원은 모두 양평지역 주민이며 서종면에 살고 있습니다. 직장이 지역사회인 셈이지요.” 수도권과 양평지역의 자원봉사단 40여명이 마음을 모아 문학관을 지켜가는 것이나 지역주민을 위해 매년 다섯 차례의 ‘첫사랑 콘서트’와 ‘수숫단 음악회’를 열고 있는 모습도 보기 좋다. 황동규문학관 병설을 통한 세계 최초의 ‘부자(父子) 문학관’과 세계문학의 ‘첫사랑 테마산책로’를 만들려는 계획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문학관 옆 언덕에 있는 황순원·양정길 부부의 묘소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1953년 발표해 1960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 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소나기’는 3대가 한 주제로 어울리게 하는 ‘국민소설’이다. 작가 부부가 잠들어 있는 언덕에 봄볕이 가득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5. 남양주 실학박물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실사구시’라고 한다. 공리공론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 태도는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 남양주 두물머리에 터를 잡은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재미있게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배움터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장약용 선생의 고택과 묘소를 비롯한 유적과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자리 잡은 까닭에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입구에 실학을 상징하는 수레가 전시돼 있다. 박제가는 “하늘에서 나와 땅 위를 운행하는 도구”라며 수레를 적극 이용할 것을 주장했던 선진 학자였다. 박제가는 1800년 정약용과 종두법을 연구해 최초로 예방접종에 성공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실학박물관은 ‘추사, 다시’라는 기획전을 과천 추사박물관과 제주 추사관과 협력해 10월26일까지 1층 전시실에서 연다. ■ 추사 글씨체를 캘리그래피로 만나는 ‘추사, 다시’ “실학박물관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전시회인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분들이 관람하면 좋겠습니다.” 김필국 관장은 이번 전시가 던지는 메시지가 상당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추사, 다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추사체를 재해석하고 이를 우리 시대의 서예인 ‘캘리그래피’로 재탄생시킨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참고로 추사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배웠고 정약용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전시는 1부 ‘추사’와 2부 ‘다시’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소봉래 난’, ‘유희삼매’ 등 추사의 주요 작품을 만나는 마당이다.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는 길이가 14.7m에 달하는 작품인데 두루마리를 펼쳐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구준모 학예사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겠다. 2부는 현재 우리나라 시각문화를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 디자이너 강병인, 김현진, 함지은, 양장점, DDBBMM 등의 작가들이 추사의 사상과 조형을 타이포그래피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회를 총괄 기획한 석재원 홍익대 교수는 추사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추사는 해박한 타이포그래피 이론가이자 파격적 타이포그래피 세계를 구축한 전위예술가입니다.” 김필국 관장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정희 추사체는 일생에 걸쳐 자기 개성과 특성에 맞게 창조해 나간 과정의 결실입니다. 추사 선생의 예술혼이 현대예술가들에 의해 재창조돼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한편 과천 추사박물관은 5월10일 연계 전시회 ‘추사를 품다’를 열고 제주 추사관도 7월8일부터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을 진행한다. ■ 조선의 하늘과 땅을 펼치다 2층 3전시실에서 열리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소재로 한 실감 콘텐츠 체험 전시관답게 전시 방식이 신선하다. 360도로 펼쳐진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으로 우리 전통 과학문화 발전의 발자취를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과학문화재를 제대로 알리려는 박물관의 정성이 듬뿍 느껴지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1분짜리 영상을 감상하면 문예부흥기를 연 정조 시대의 과학기술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은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몰랐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비롯해 이름도 생소한 ‘혼개통헌의’, ‘혼천시계’ 같은 과학문화재에 담긴 흥미로운 사연과 원리를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어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다. 조선의 밤하늘로 여행을 떠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같은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을 만나 2025년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자문하고 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며 조선시대의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워보는 체험활동이다.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증강현실로 보여준다. 쥐와 소, 호랑이를 비롯한 12가지의 동물이 주인공인 십이간지 캐릭터와 혼천의 주변에 펼쳐진 우주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특별전시 ‘움직이는 천문과학전-똑딱똑딱! 해, 달, 별’은 제목처럼 전시 내용이 흥미롭다. ‘앙부일구’와 ‘혼개통헌의’의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는 관람객은 얼마나 될까. 물론 미리 어렵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실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풀리기 때문이다. “실학박물관을 중심으로 남양주 관내 3개 기관에 이동식 전시 부스를 설치·운영하여 도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입니다.” ■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박물관 실학박물관은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개관 15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을 열었다. 시청각 체험을 통해 ‘실사구시’ 연구방법론으로 자산어보가 집필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기획한 참여형 전시였다. 실학박물관이 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전시를 꾸준히 기획한 점이 돋보인다. “발달장애 예술가 40여명이 그린 자산어보에 실린 해양생물 그림을 정약전의 글과 함께 선보인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박물관 방문하기 어려운 도민들을 온라인 가상현실(VR) 전시를 꾸준히 기획한 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온라인 가상현실을 통해 박물관을 직접 관람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처럼 실학박물관은 관람객과의 다양한 만남, 새로운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농사와 먹거리’를 주제로 살아있는 체험을 통해 실학정신을 배우는 가족 참여형 주말 프로그램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주말에 가족을 밭으로 초대하는 실학자는 어떤 분일까. 경기도를 대표하는 실학자 ‘서유구(고구마)’와 ‘정약용(상추)’, ‘이익(콩)’ 세 분을 밭에서 만나다니 그 발상이 재미있다.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문화나눔 프로그램 ‘오늘은 내가 실학자’는 정약용의 별명을 주제로 박물관을 쉽고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다. “직접 보고, 만들고, 이야기 나누며 각자가 주인공이 돼 박물관을 즐기는 즐거운 경험을 관람객들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상설전시와 정약용 유적지를 연계한 현장 체험 교육인 ‘생생! 실학여행’도 인기가 많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 실학 관련 유물을 직접 살펴보고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보며 활동하다 보면 실학은 어느덧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25년 주말 상설 체험-실~하게 놀자!’도 상설 전시와 연계된 다양한 체험이 중심인 프로그램이다. ■ 실학의 숲에서 놀자 2025년 어린이날을 맞아 준비한 ‘실학 숲티어링’은 숲속에서 지도와 나침반 등으로 길을 찾는 놀이다. 박물관 옆 다산생태공원에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자연과 생태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실학박물관은 아름다운 다산생태공원을 활용해 숲체험과 숲티어링, 각종 놀이와 실학퀴즈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준비했으며 이를 통해 ‘실학’과 ‘생태’라는 두 가지 소중한 주제를 아이들에게 선사할 예정입니다.” 실학박물관 로비에서 어린이날 특별 프로그램도 열린다고 한다. 지난해 조선시대 해양생물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주제로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체험 위주의 특별전과 ‘실학은 원래 박물관에 없었다’를 주제로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하고 발맞추는 사업을 전개했다. “지난해부터 실학을 낡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MZ세대를 손짓하는 다한 시도를 펼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실학박물관의 도전이 멋지다.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 파주 아트린뮤지움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고령산 자락 아늑한 언덕에 자리 잡은 아트린뮤지움(관장 배일린) 마당에도 봄꽃이 한창이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봄날에 미술관을 찾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평일임에도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외진 곳이지만 가까이에 둘레길이 아름다운 마장호수와 국립아세안자연휴양림을 비롯해 야영장 같은 휴식과 충전을 하기 좋은 여러 시설이 몰려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것 같다. ■ 미술관에서 양자물리학을 만나다 마침 미술관을 찾은 중년 여성들과 함께 배일린 관장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실력파 작가로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온 배 관장은 ‘2022년 대한민국 신지식경영대상 문화인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진 뛰어난 작가다. 2층 전시실 입구에 ‘2024 양자나노과학연구단 수상기념 학술발표회-미학적 접근을 통한 양자물리학-Quamtum Story Ⅰ’이라 새겨진 입간판이 서 있다. 미술관에서 양자물리학을 만나다니 사뭇 흥미롭다. 관련 자료를 통해 손대업 아트린뮤지움 대표, 홍가이 매사추세츠공대(MIT) 예술철학박사, 차문성 파주학연구소장, 이영진 파주박물관협회장 등 미술계, 과학계, 광탄기업인협의회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현대 문명은 양자역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말은 맞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우주의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증명해 196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던 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말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나 리처드 파인먼조차 양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는 상호작용하는 실체들의 광대한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이론은 컴퓨터부터 원자력발전소까지 우리 일상 속 주요 기술의 기초로 쓰이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다. 배 관장은 양자물리학이 예술에 어떻게 접목돼 있는지 작품을 통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양자나노과학연구단에서 실시한 미술공모전에서 회화 부문에 수상한 작품의 제목이 ‘얽힘과 자비’입니다.” ■ 위로와 격려가 되는 미술관 그림 중심을 장식한 반짝이는 쇳조각이 묘한 울림을 안겨준다. “이것은 마음 심(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지요. 환경과 조건은 같지만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빛도 되고 어둠도 됩니다.” 관람하던 여성들이 “그래 맞아” 하며 손뼉을 친다. 배 관장의 작품 해설이 이어진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됩니다. 빛과 어둠은 고정값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이지요.” 마음 먹기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설명에 모두 공감하는 듯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도 덧붙인다. 그림의 바탕이 우글쭈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질곡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현실을 표현한 것이라는 배 관장의 설명에 관람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전시실에 수십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때때로 이곳에서 강의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현대자동차 사장님들의 강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첨단의 자동차 회사 사장들이 미술관 관장에게 양자물리학에 관한 강의를 요청했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롭다. “삶은 더러운 강물인데 바다는 더러운 강물을 다 받아들인다.” 내 자유 의지에 따라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해설하며 배 관장이 인용한 니체의 말이다. 꽃상여를 그린 그림 두 장이 나란히 걸려 있다. 하나는 푸른 바탕이고 하나는 붉은 바탕이다. 만장을 휘날리며 상여 앞뒤를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꿈결처럼 이어진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를 그린 그림도 있다. 인(因)과 연(緣)에 대한 해설을 들으니 우리 인간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알겠다. ■ 지역과 사람을 잇는 사랑방 2층이 전시실이 사색과 깨침의 공간이라면 1층 전시실은 휴식과 충전의 공간에 가깝다. 1층 전시실의 올 한 해 일정은 꽉 차 있다. 4월 현재 ‘도마산도예회원전’이 열리고 있다. 색깔이 예쁜 찻잔과 꽃을 가득 꽂아둔 큼직한 화병, 늘씬한 항아리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취미로 시작했던 회원들이 작가로 변신한 전시이다. 꽃바구니가 가득한 전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지난 3월 박성빈 작가의 ‘breath’로 시작한 전시는 ‘권순창_5월의 환타지아’(5월)로 이어진다. 여름에는 ‘최바다_행복에너지의 메신저’(6월)와 ‘민화 작가_꿈, 사랑, 행복’(7월), ‘도자 작가’(8월)로 이어진다. 가을에는 ‘남송미술관 남궁 원 관장 개인전’(9월)과 ‘QUANTUM ART’(양자나노과학연구단의 큐비트미술공모작품 수상전) 전시가 예정돼 있다. 아트린뮤지움의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호응이 좋다. ‘자연의 색으로 그리는 마음의 정원’과 파주시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어울림의 화원’은 지역주민들과 문화소외계층에 활발한 소통의 창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박물관협회와 KB손해보험이 함께하는 ‘KB손해보험과 함께하는 열린박물관’ 프로그램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미술관 관람과 체험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환경을 주제로 한 체험활동도 준비돼 있다. 주 대상이 문화 소외 아동과 청소년이라니 고마운 일이다. “파주시와 인근 양주시에 소재한 10개 기관의 어린이집 친구들이 미술관을 방문해 전시를 관람하고 미술 수업을 진행해 완성된 작품은 11~12월 1층 전시실에서 전시합니다.” ■ 미술관에서 만들어가는 꿈과 사랑 2024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지역을 위한 상생과 존중’ 사업은 5회의 전시와 10회의 체험활동, 15회의 교육으로 이뤄졌다. 이 사업의 참여자가 무려 5천605명에 이를 정도로 지역주민들의 호응이 높았다. 미술관은 전시, 교육, 체험을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한 것을 대표적 성과로 꼽는다. 아트린뮤지움은 다양한 체험과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주민들은 물론이고 어르신과 발달장애인, 다문화가정 어린이 같은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소통해 이들과 함께 꿈, 사랑, 희망을 키워가는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함께하는 꿈, 사랑, 희망을 주제로 지역주민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미술을 통해 주민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이러한 공감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지역주민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전시할 계획입니다.” 아트린뮤지움은 지역 문화의 중심이자 지속가능한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4월부터 11월까지 꽃을 주제로 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들이 꽃의 생명력과 형태를 이해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꽃이 자라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관계를 탐구해 참가자들이 자신의 시각에서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우울감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니 기대가 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참여자들이 함께 활동함으로써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사회적 고립감을 줄이고 지역사회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심어줄 것입니다.” 지역주민들이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편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아트린뮤지움은 자연스럽게 지역 문화의 사랑방이자 치유와 회복의 쉼터로 거듭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어쨌든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지켜보기를 바란다.” 용인시 기흥구 용뫼산 자락에 자리 잡은 백남준아트센터(관장 박남희)의 개인전 ‘전지적 백남준 시점’은 친절하다. “4월10일 개관한 ‘전지적 백남준 시점’은 백남준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하는 시간을 다루는 전시입니다.” ■ 전지적 백남준 시점 박남희 관장의 소개말처럼 전시장 곳곳에서 백남준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미술관의 바람이 느껴진다. 카펫이 깔린 1층 로비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30여명의 사람이 학예사에 설명을 듣고 있다. 푸른 화초가 무성한 정원 곳곳에 텔레비전 모니터들이 보인다. 1974 제작한 ‘TV 정원’ 입구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 젊은 백남준을 만난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표정이 해맑다. 1960년대 선보인 ‘비디오 아트’는 백남준의 다른 이름이다. 1964년 첫선을 보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열두 개의 달이 있죠? 시간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그가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밤하늘의 달을 촬영해 재생한 비디오가 아니라 흑백 텔레비전에 전자석을 부착해 전자빔의 흐름을 방해해 달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음악과 텔레비전에서 출발한 이 전시를 시작으로 백남준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예술가로 성장한다. TV 정원 천장에 38개의 TV 모니터와 불이 켜진 작은 전구와 전선을 식물의 줄기처럼 늘어뜨려 놓은 이 멋진 작품은 1989년 제작한 ‘비디오 샹들리에 No.1’이다. 미디어 기술이 우리의 시공간을 장식한 시대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 대의 카메라 참여’(1969년) 앞에 모녀로 보이는 관람객이 한참 머물러 있다. 엄마가 카메라 앞에 서자 딸이 스마트폰으로 벽면에 세 겹으로 비친 알록달록한 엄마의 얼굴을 찍는다. 두 개의 마이크에 입을 대고 “후” 하고 길게 불자 앞의 모니터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던 리본 모양의 원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참여 TV는 작품의 제목처럼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던 백남준은 음악과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을 여럿 남긴다. 피아노 위에 12대의 텔레비전을 쌓아 놓은 ‘TV 피아노’의 모니터를 보니 연주하는 백남준이 등장하고 24개의 어항 뒤에 24개의 텔레비전이 놓인 ‘TV 물고기’(1975·1997년)에는 20세기 최고의 무용가 머스 커닝햄이 물고기와 함께 춤을 춘다. 한참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 젊은 작가들이 펼치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 2025년의 문을 여는 첫 전시가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이다. “2월20일 개관한 전시 ‘4.0’은 동시대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을 소개해 온 프로젝트의 네 번째 버전이란 뜻입니다.” 전시 제목이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선보인 ‘랜덤 액세스’에서 제목이 나온 것이란다. 규범화된 개념과 형식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식을 선보여 관객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만들었던 백남준의 실험정신을 잇는 젊은 작가들의 이번 전시는 6월29일까지 볼 수 있다.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 얀투, 장한나, 정혜선·육성민, 한우리까지 국내외 7팀(8명)의 작품 14점이 전시되고 있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지현 도슨트가 바닥을 모자이크로 장식한 작품 앞에서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작품이지만 여기 올라서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관람객들도 조심스럽게 작품을 밟아 보고 허리를 숙여 만져본다. 하늘색 철제 선반에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 있다. 그 둘레로 놓인 까만 선 위로 로봇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선반에 있는 물건 중에는 옮기지 말아야 할 예술품도 있다. 그러나 로봇은 물건을 가리지 않고 옮기는 일에만 충실하다. 그 물건 중에 백남준의 작품 ‘의자’도 있다. 고요손의 작품 ‘임채은의 오로라 여정기’와 ‘손정호의 미래의 일기’ 주변에 놓인 의자의 쓰임은 무엇일까. 작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의자는 관람객이 앉아 작품을 감상하도록 놓아둔 것이다. 작품과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 재미있다. ■ 백남준의 오래 사는 집 백남준아트센터의 다른 이름은 ‘백남준 오래 사는 집’이다. 2층에 백남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로 재현해 놓은 ‘메모라빌리아’는 세상을 즐겁고 놀라게 한 작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가구와 소품, 문서는 물론이고 벽과 창문도 똑같이 재현했다니 놓치지 말고 살펴봐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사진과 연표로 백남준의 일대기를 구성한 공간도 매우 훌륭하다. ‘1932~1957 음악을 사랑한 소년’, ‘1958~1962 괴짜 친구들’, ‘1963~1964 음악을 전시하다’, ‘1965~1971 움직이는 그림’, ‘1973~1977 인간과 기술과 자연’, ‘1977~1988 예술로 하나 되기’, ‘1989~1995 늘 새롭게 유목민’, ‘1996~2006 미래를 사유하는 예술가’로 구분하고 사진과 이력을 덧붙여 백남준의 일생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을까. “백남준이 경기도와 인연이 돼 만들어진 이곳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길 바랍니다. 백남준 선생은 한 집안의 3대가 주말에 슬리퍼를 끌고 와서 각자의 시각으로 예술을 즐기며 전시를 본 다음에 갈비를 먹으러 가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하셨어요.” 백남준이 지향했던 세계는 이해와 소통과 참여다. 미술관은 예술과 사람이 소통하고, 예술로 인해 도시와 도시가 소통하고, 우주가 소통하는 것이 백남준이 생각했던 방향이라고 전해준다. 백남준이 관객들에게 말한다. “네가 참여하면 예술이 완성되는 거야. ‘참여 텔레비전’이란 작품을 봐. 네가 목소리를 내는 것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이 보여. 그러니까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상호 작용하면서 만드는 거야.” 경기문화재단과 백남준아트센터는 2년마다 백남준 예술상을 시상한다. 2024년 제8회 수상 작가는 조안 조나스(미국)로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비디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등 여러 분야를 통섭하고 융합하며 다양한 현대미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에 대항하는 창작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며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탐구와 예술적 깊이를 더해 가는 작가다. 올 연말에는 그의 작품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는 백남준의 예술혼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 예술로 소외된 이웃과 소통하는 꿈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의미는 백남준의 작품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백남준과 미래의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이 늘 소통하고 싶어 했던 대중이 있는 공간이어야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될 것 같습니다. 백남준 선생은 너무나 유쾌하고 소탈하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매우 좋아했고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분입니다.” 선생의 바람대로 백남준아트센터는 이미 열린 공간이다. “우리 도민들이 열린 생각을 가진 이 공간에서 백남준을 더 오래오래 살게 만들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박남희 관장의 바람은 단단하다. 전시실을 꼼꼼하게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바람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 곳곳에 재미없는 세상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려 고민했던 유쾌한 천재 예술가의 번뜩이는 예술혼이 가득하다. 미술관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100m쯤 걸었을까.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도어린이박물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용인의 명당 용뫼산에도 싱싱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 광주 닻미술관

경기 광주시 진새골에 예술을 통한 창조성과 영성 회복을 기치로 2010년 10월 개관한 닻미술관(관장 주상연)이 있다. 닻은 성찰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며 창조의 공간이다. 미술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만든 작은 정원의 우물에 놓인 화분에서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왼편은 전시실이고 오른편은 카페다. 카페에 들러 따뜻한 차를 마시며 주상연 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일상에서 발화하는 고요하고 투명한 사진 이야기 “2025년 닻미술관은 ‘일상에서 발화하는 고요하고 투명한 사진 이야기’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크거나 작은 일상의 신화는 무거운 현실의 땅에 뿌려진 희망의 씨앗입니다. 예술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득 사진 속 빛나던 일상의 순간이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라고. 1인분의 삶, 그 안에서 오늘 하루의 빛을 잃지 않기를. 어둠 속 두 손을 모은 목련 꽃봉오리에 담긴 생의 기도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문득 주 관장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의 작품집 ‘다른 방식의 존재 연습’에는 어떤 표정이 담겨 있을까. “이 책에는 지난 10여년 동안 내가 본 안과 밖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한 번도 같지 않으나 반복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진가로서 오르던 한 기둥에서 내려와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내게 익숙했던 것들이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열리는 것을 봤지요. 어떤 중요한 가치가 깨어지면 다른 가능성이 태어나고 모든 과정의 의미는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작품을 살펴보며 ‘사진(寫眞)’이란 단어에 사물의 진실을 담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는 작가의 말을 되새긴다. ■ 이모젠 커닝햄, 숲속에서 만나는 사진예술의 거장 한 장의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마음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일까. 벙글지 않은 목련 꽃봉오리가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손처럼 보인다. 이 멋진 작품을 찍은 이모겐 커닝햄(1883~1976)은 어떤 작가일까. “커닝햄은 20세기 현대 사진 미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여성 작가입니다. 미국 서부 사진을 이끌었던 F64 그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한 그녀의 사진은 흑백 프린트의 우아한 톤과 순수한 조형미를 더해 사진으로 구현할 수 있는 차별화된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그는 사진예술에 대한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세계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오정은 학예실장은 그의 작품이 미국 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게티미술관 등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다수 소장돼 있다는 사실도 들려준다. 이어지는 친절한 해설은 커닝햄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빠져들기에 넉넉하다. “예술과 삶이 하나였던 자유로운 영혼, 그 시절 원조 보헤미안인 그녀에게 사진은 일상의 꿈 같은 것입니다. 커닝햄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당당히 사는 법과 사진가로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만들고 세 아들의 어머니로, 사진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가로서 홀로 빛나던 큰 별입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일상에서 작가를 매혹한 것들인데 매일 마주하는 정원의 식물들, 음악이 흐르는 계단, 인간의 표정과 움직임, 특히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해 가는 작가의 얼굴이 많다. 그를 더욱 깊이 만나기 위해 다음 공간으로 이동한다. ■ 작가의 집 전시관을 나와 건물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다 ‘프레임 야생정원’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겨울을 견뎌낸 숲은 생명의 기운으로 출렁대고 있다. 푸른빛이 번져가고 있는 숲에 작은 집이 서 있다. ‘월든-숲속의 생활’이란 고전을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지었던 오두막에서 영감을 얻어 최근에 지은 ‘작가의 집’이다. 작가의 집은 2025년 4월 현재 세계적인 여성 사진작가 커닝햄의 방이다. 방은 그녀의 사진 작품은 물론이고 일생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알차게 꾸며져 있다. 중앙에 놓인 나무 책상과 세 개의 나무 의자에서 관람객들이 작가 커닝햄의 시선과 생각을 만나도록 하려는 기획자의 따스한 마음을 느낀다. 아홉 명의 노인 얼굴로 채워진 인상적인 포스터 앞에 선다. 제목이 ‘After Ninety’인데 정중앙에 커다란 안경을 낀 늙은 여성이 커닝햄이다. 90세가 넘은 노작가의 눈이 한없이 그윽하다. 오정은 학예실장이 포스터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커닝햄은 90대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계속 주위의 인물과 풍경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자신을 포함해 노인들의 얼굴을 즐겨 찍었는데 세월이 남긴 노년의 얼굴 속 주름과 반점, 시간의 흔적과 개별적인 존재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들은 커닝햄의 조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한 공식은 시인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커닝햄의 말처럼 그의 사진은 시가 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 모놀리스, 나를 만나는 기억으로의 여행 작가의 집이 섬세한 여성이라면 프레임은 듬직한 남성처럼 느껴진다. 전시 공간인 프레임에는 핀란드의 사진작가 야리 살로의 ‘모놀리스 MONOLITH’를 전시하고 있다.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이 사진전은 5월18일까지 만나 볼 수 있다. “이 거대하고 깊은 감정을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살로는 핀란드 헬싱키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40대의 사진작가다. 심리학 박사인 그는 애착, 정체성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것에서 출발해 기억과 의미를 해체하고 재해석하며 아날로그 암실 작업이 갖는 우연성과 그 물성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양한 전시와 출판물, 수상 경력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모놀리스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온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의 영역이다.” 작가 살로의 말이다. 아들, 남자, 아버지로서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작가 내면의 여정을 담은 이 사진은 작가의 버려짐, 부재, 원망, 수용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아버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가족여행을 그의 아들과 함께 재연함으로써 남자로서, 그리고 후에 아버지가 되기 위해 중요했던 유년기 관계들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신비롭고 고독한 돌, 모놀리스가 있습니다. 돌은 회복력과 지속력을 상징하며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 문화와 심리적 주제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걸려 있는 작품들이 한결같이 작은 크기다. 어떤 의도가 있을까. 오 실장이 산책 중인 작가 살로에게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더니 이렇게 들려준다. “관람객이 작품 가까이서 바라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작은 사진을 선택했다고 하네요.” 무슨 작품을 전시해도 어울리는 공간이라 작가들이 선호하는 곳이란다. ■ 사월의 숲은 싱싱하다 프레임 뒤편으로 아늑한 산길이 있다. 오늘 마주했던 작가와 작품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숲으로 들어간다. 사월의 나무들은 물이 올라 더없이 싱싱하다.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게 난 길은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이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기운을 얻고 작품을 구상했을까. 아흔이 넘도록 카메라를 들었다는 커닝햄의 작품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작품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렌즈를 통해 세상을 탐구했던 한 작가의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 전시실에서 나와 카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나에게도 말을 걸어본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 김포 보름산미술관

김포에 숲속 미술관이 있다. 김포시 고촌읍 수기로 100-78번지에 자리한 보름산미술관(관장 장다운)은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2009년 개관한 보름산미술관 덕분에 멋진 이름을 가지게 된 보름초등학교와 달빛유치원을 지나니 미술관을 알리는 노란 간판이 나타난다. 연둣빛으로 물드는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미술관은 동산에 보름달처럼 걸려 있다. 나무가 담처럼 둘러싼 미술관 마당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탑처럼 두 겹, 세 겹으로 쌓아 올린 장독이나 운치 있는 소나무 아래에 기도하는 듯 서 있는 돌사람 한 쌍이 정겹다.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는 고관대작의 무덤을 지켰을 법한 문인상과 무인상이 나란히 서 있다. 전시관과 카페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도 올망졸망 키 작은 돌사람들이 관람객을 지켜보고 있다. ■ 망와, 집안에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는 조형물 장다운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망와(望瓦)가 전시된 상설전시관을 둘러본다. 전시관 입구에서 만난 붉은빛의 목어가 예사롭지 않다. 몸통은 물고기이지만 머리에 사슴뿔이 달렸으니 이무기인 듯싶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면을 가득 채운 수백개의 망와가 낯선 사람을 노려보는 듯하다. “기와지붕 용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인 망와에는 집주인이 바라는 희망이 문양으로 담겨 있습니다.” 문자와 기호, 연꽃과 국화, 당초문 같은 다양한 이미지를 정성스레 새긴 망와를 살펴보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벽면 중앙에 전시된 망와는 남녀의 얼굴이다. “어느 것이 남자일까요.”, “그렇습니다. 머리 위에 뾰족 솟은 것이 상투입니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망와에는 가족의 안정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흔했던 망와였지만 한옥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요.” 박물관에서 펴낸 안내서에 실린 망와를 소개하는 글이 감각적이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햇빛 아래서, 눈과 비가 폭풍으로 몰아치는 날에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사람과 망와에는 경외감마저 깃든다. 비에 젖은 돌사람과 망와는 표정이 살아나 더욱 아름답다. 얼굴이 나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닮은 것처럼 내가 만드는 물건 또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 역시 마음이란 좀처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개관 16년을 맞은 보름산미술관의 역사를 잠시 더듬어본다. 설립자인 고(故) 장정웅 선생은 1978년 충남 아산의 온양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몇 개의 망와를 보고 그 매력에 빠져든다. 전국을 누비며 300여점에 달하는 망와를 모은 그는 이 멋진 유물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전공을 살려 손수 미술관을 짓는다. 그 과정을 소개하는 글에도 설립자의 고운 마음이 느껴진다. “숲을 파헤치지 않고 나무를 베지 않고 지은 집은 산에 걸린 보름달처럼 혹은 나무에 걸린 보름달처럼 숲에 안겼다. 나무를 피해 오솔길이 생기고 비탈길에는 무너지지 말라고 돌덩이로 축대를 쌓아 올렸다.” 설립자는 망와에서 발견되는 회화적 요소를 전통 한지에 오방색으로 채색한 작품을 제작하고 이를 모은 작품집 ‘망(望)’, ‘바래기’, ‘지킴이의 노래’ 같은 책을 시리즈로 펴냈다. 망와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보름산미술관은 관람료가 따로 없다. 목가구와 도자기 같은 고미술품으로 장식한 2층 카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이다. ■ 미술관이 말을 걸다 출판사이기도 한 보름산미술관은 꾸준하게 소식지를 펴내고 있다. 중견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을 가진 장 관장이 발행하는 소식지는 디자인이나 내용이 풍성하다. 소식지에 적힌 ‘54 을사년 경칩’은 무슨 뜻일까. 갑자, 을축으로 시작하는 60간지와 입춘, 우수, 경칩으로 이어지는 이십사절기로 발행일을 나타내는 방식도 재미있다. 짐작하듯 ‘54’는 발행 호수이고 ‘을사년 경칩’은 2025년 3월5일이 발행일이라는 뜻. 미술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 중 설립자 이름 앞에 붙은 ‘故’란 한자에 눈길이 머문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매일의 같은 공간과 매일의 같은 시간에서조차 하루하루 생경함을 마주한다. 당신이 아침마다 미술관 문을 열고, 주변을 청소하고, 부서진 계단을 살피고, 웃자란 나뭇가지를 치던 자리…. 당신이 서 있던 자리 자리마다 하얗게 빈자리가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공간을 차지했던 당신이 사라지자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오래된 풍경에도 구멍이 뚫려버렸다.” 장다운 관장은 꼭 1년 전인 ‘갑진년 경칩’ ,즉 2024년 3월 펴낸 소식지 50호를 통해 미술관 설립자이자 아버지 장정웅 관장이 타계한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 “주황색 별이 희미해” 소식지 54호에 소개한 장혜경 작품전의 제목이 ‘주황색 별이 희미해’다. 그런데 그림을 살펴보니 뭔가 이상하다. 새는 줄에 묶여 있고 악어의 등에는 기둥이 세워졌다. 게다가 악어의 꼬리는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아닌가. 시의 한 구절처럼 느껴지는 제목과 꿈속인 듯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는 그림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 궁리해 보지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작가는 거대한 존재가 운명을 조작하는 세계를 상상합니다. 다른 차원의 눈을 빌려 현재 일상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의 근원을 찾고자 하지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떤 존재에 의해 서로 유기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여러 개의 세계가 각 차원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제작한 것입니다.” 장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장혜경 작가가 제작한 세계의 이름은 ‘시시블러디(嬉戏 / xīxì BLOODY)’다. 시시블러디는 ‘사람을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다. 이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 컴퓨터 포털을 타고 도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가의 다중우주 세계관 속 하나의 영역이다. 이에 작가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자의식의 결과인지도 의심하고, 두 세계를 오고 가며 양쪽의 시점에서 얻은 인간은 알 수 없었던 ‘우연의 관계점’을 소설과 그림으로 기록한다. 분홍색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가 그려진 커다란 그림 앞에 선다. 어쩐지 익숙해 생각을 더듬어 보니 미술관 입구에서 봤던 그 그림이다. 다시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 교실과 숲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다 보름산미술관은 어린이들에게 창의력을 심어주는 미술교육에 정성을 쏟고 있다. 아이들이 체험하고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세모 교실’이다. 교실의 문은 늘 열려 있다. “아이들은 오래 앉아 있지 못합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밖에 들락날락하도록 하지요.” 교실 밖은 숲으로 연결돼 있다. 아이들은 숲을 산책하며 나뭇잎을 가져와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다. ‘보름산미술관 B.school’은 무엇을 가르칠까. “B.school은 디자인 프로젝트 운영 방식에 기반한 사고를 바탕으로 참여자 각 개인이 직면한 문제나 어려움을 전공 분야별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과의 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해결해 보자는 취지로 설립됐습니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전공 및 일터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모아 새롭고 의미 있는 솔루션을 도출하는 전문 분야별 접근법이나 상호교류형 교육 프로그램이 신선하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 획득을 위한 문해력, 문제 해결을 위한 데이터 분석을 위해 필요한 수학, 나의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응원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한 영업력이 필요합니다.” 미술관이 이웃들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 돼야 한다는 설립자의 정신을 살린 보름산미술관 B.school의 목표는 선명하다. “실제 문제 해결을 통해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8.고양시립 아람미술관

미술관의 위치가 절묘하다. 정발산역 3번 출구는 ‘고양아람누리’로 연결된다. 고양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고양아람누리는 2007년 개관한 문화예술의 전당이다. 고양시립미술관 아람미술관의 ‘아람’은 무슨 뜻일까. “아람은 ‘크고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입니다.” ■ 예술 장르의 경계를 허문 미술관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에 있는 고양아람누리는 해발 87m의 아담한 정발산을 배경으로 오페라극장인 아람극장(1천887석)과 최상의 음향을 자랑하는 아람음악당(1천449석), 최첨단 가변형 극장 새라새극장(304석)까지 3개의 공연장을 갖추고 있다. 고양아람누리를 둘러보면 어디까지가 미술관이고 공연장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이처럼 첨단으로 단장한 시설물도 현대미술처럼 통섭적이고 융합적이다. “아람미술관은 회화를 비롯해 조각, 사진, 최첨단 미디어아트 전시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전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미술관 곁에 도서관과 공연장이 붙어 있어 전시를 관람하고 공연을 보거나 도서관에 들르기에 좋습니다.” 정태경 주임의 설명처럼 아람미술관의 입지 조건이 특별하다. 벽면이 이동형이라 다양한 공간의 변신이 가능한 것은 아람미술관의 강점이다. 수준 높은 국내 전시와 국제전을 아우르는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아람미술관은 우리나라의 전시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 공예, 사진, 설치미술, 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 한국 미술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어린이 체험전시를 포함한 폭넓은 장르의 기획 전시와 대관 전시를 함께 선보이고 있다. 지하 2층에 있는 전시 공간 ‘갤러리 누리’는 여러 개의 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천진규 작가의 ‘나비의 꿈’과 나누리 작가의 ‘투명한 낙원’, 김윤환 작가의 조각전 ‘의도하지 않은 조각 UNINTENDED SCULPTURE’가 열리고 있다. 인조잔디가 깔린 야외 중정은 지상과 지하를 잇고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 생생화화 生生化化 현재 ‘생생화화 生生化化 2024’전이 열리고 있다. “‘생생화화’는 경기문화재단의 시각예술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된 작가 18명의 창작 성과를 발표하는 전시회로 내년 1월까지 전시됩니다. 선정된 18인의 시각예술 작가를 두 그룹으로 나눠 고양시립 아람미술관과 안산 김홍도미술관에서 공동으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람미술관의 전시 주제는 ‘궤적을 연결하는 점들’이다.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도 제목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참여 작가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원이 밤하늘을 밝히는 우주의 별처럼 보인다. “예술은 시간과 경험이 축적돼 만들어지는 궤적이다. 작가의 시선과 손끝에서 형성된 궤적들은 과거를 재해석하고 변화와 실험, 그리고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확장된다. …작가들이 각자의 삶과 작업을 통해 쌓아온 예술적 궤적을 살펴보고 이뤄진 변화를 조명하고자 한다.” 강상우, 김대환, 김민정, 김진기, 김현주&조광희, 서성협, 이세준, 이희경, 전보경, 최윤지, 홍수진 작가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전시실에 들어선다. 평면의 그림을 전시한 방식이 특이하다. 작가는 캔버스의 아래 혹은 위를 튀어나오도록 입체적으로 설치한다. 현실과 상상이 중첩된 풍경을 변화하는 회화로 보여주는 이세준 작가의 작품은 얼핏 무지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의 기억처럼 또렷함과 흐릿함이 뒤섞여 있다. “9개의 캔버스에 그려진 ‘모든 순간들, 우리가 떠올렸던’이라는 작품 구성이 재미있어요. 작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작품의 배치를 달리해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사진 위에 물감을 칠해 묘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폐기된 공간과 대상을 탐구하며 사진과 회화를 결합해 삶의 순환을 형상화하는 김진기의 시선은 낮지만 따스하다. 한때는 아낌과 사랑을 받았을 물건도 시간이 지나고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고 잊히는 사실을 표현할 것일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묵직하게 박힌다. 서성협 작가는 소리를 매개로 이질적이고 복잡한 개체들이 이어지는 과정을 시각화하고 있다. 조각의 손잡이를 당기니 경쾌한 종소리가 들린다. 단순하지만 관객과 소통하려는 작가의 발상이 재미있다. 어둑한 전시실에 상영되는 영상물은 또 무엇일까. 1950년 6·25전쟁 때 포로가 된 A라는 사람을 통해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고찰한 홍수진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의 시선은 다큐멘터리나 탐사보도처럼 끈질기고 진지하다. ■ 담장과 경계를 허무는 미술관 이번에는 빛이다. 전시실 바닥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공간에 들어선다. 불꽃놀이와 백리탄의 이중적 이미지를 통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김민정 작가의 방식이 재미있다. 벽에는 높낮이가 다른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불꽃놀이 혹은 게임처럼 진행되는 전쟁의 참상을 관람객이 살펴볼 수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축제와 전쟁의 경계조차 흐릿하여 구분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제주도 강정마을과 오키나와는 서로 닮았다. 강제로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의 주민은 2차대전 때 커다란 희생을 당했고 제주도는 4·3 때 엄청난 민간인이 희생됐다. 문제는 그 고통이 70~8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문득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린다. 미군기지와 그 주변에서 얽힌 삶과 그 경계 속에서 공동의 가치를 성찰하는 김현주와 조광희의 작품은 분단의 아픔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의 고단한 삶에 주목하는 이희경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다. 작가는 전시실에 비닐커튼을 쳐 관람객의 시선과 통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어지러운 커튼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주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소외, 정체성의 충돌과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 기후 문제는 인류가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여전히 찾아내지 못했다. 기후 변화 속에서 사라지는 자연의 소리를 재구성해 새로운 소리풍경을 보여준 전보경 작가의 발상이 신선하다. 한편 최윤지 작가는 도시의 생성과 건설 과정을 보여주며 노동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이 있다. 건설 노동자들의 시린 손을 녹여주는 모닥불이다. 바닥에 쌓인 막대에 쓰인 글귀에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이 압축돼 있다. ‘사망사고 절반으로 줄입시다.’ 도르래에 매달린 막대에 쓰인 글귀는 더욱 절박하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건강하게 만납시다.’ 이처럼 ‘생생화화’는 일상에 묻혀 사는 우리를 성찰하게 하고 각성시킨다. ■ 생활 속 문화예술의 놀이터 아람미술관은 사회문화예술교육에 충실하다. 실용적이고 유익한 문화예술 평생교육을 제공하는 ‘어울림문화학교’를 비롯해 교육 프로그램과 감상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현장 참여가 가능한 점도 아람미술관의 자랑이다. 지역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관람객들이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 공간도 마련하고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아 정체성을 찾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문화예술 장르를 통합해 구성한 체험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아람미술관은 고양시민들에게 일상에서 폭넓은 문화예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성실하게 담당하고 있다. “고양아람누리는 전통과 현대의 화제작을 만나는 곳, 다양한 문화예술 교육을 경험하는 곳, 예술가와 시민이 소통하는 곳, 누구나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곳, 삶과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재단의 목표처럼 아람미술관은 아름다운 미술로 우리 삶을 비추는 한 줄기 햇살처럼 충전하고 자극한다. 아이디어가 필요한가. 새로운 생각이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면 아람미술관을 찾아보길 권한다. 전시가 무료이고 주차하기에도 편하다. 정발산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노루목야외극장, 문화예술 강의시설과 카페·식당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사계절 나들이하기에 좋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7.이천시립월전미술관

엉거주춤 날개를 벌리고 머리를 떨군 백로의 모습이 측은해 보인다. “1979년에 그린 ‘오염지대’란 작품인데 경제개발로 환경 문제가 심각했던 당대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이처럼 월전 선생님은 현실 비판적인 면모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분입니다.” ‘오염지대’ 바로 옆에 똑같은 모습을 한 백로가 벼랑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젊은 작가가 이번 전시에 맞춰 새로 그린 것입니다. 이런 작품을 ‘방작(倣作)’이라 하지요.” 장준구 학예실장이 안내해 주는 월전 장우성(1912~2005)의 작품세계는 깊고도 넓었다. 1970년대에 사회 문제를 화폭에 담았던 화가가 한국 화단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7일 개막전을 여는 이천시립월전미술관(관장 장학구)의 기획전 ‘시정화의(時情畫意), 월전을 그리다’에서 만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작품에서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가득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을 그린 월전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다. ■ 시정화의, 월전을 그리다 동서미술문화학회와 함께 기획한 ‘시정화의時情畫意, 월전을 그리다’는 월전이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력의 깊이와 넓이를 잘 보여준다. 7일 오후 2시에 열리는 특별 강연의 주제가 ‘월전 장우성과 현대 한국 화단’이다. ‘한국화의 변화: 월전 이전과 이후’(김상철 동덕여대)와 ‘선면화의 세계와 월전 장우성’(이인숙 경북대), 그리고 장준구 학예실장의 ‘월전의 작품, 다시 읽기’는 이를 확인해 준다. “이번 전시에 강유림 작가(단국대·미술학박사)를 비롯해 마흔아홉 명의 작가가 참여합니다. 참여 작가 대부분은 미술학 박사학위 소지자입니다.” 월전은 작품 ‘광란시대’에 자신을 반아자(半啞子), 즉 ‘반벙어리’라 소개한다. 10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작품 속에도 작가의 문제의식이 짙게 투영돼 있다. 젊은 작가 11명이 참여한 ‘제2회 후속세대 기획전: 시정화의, 월전을 그리다’에서 만난 월전도 선구적이다. 자동차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그림은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화지만 바탕이 검은색이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살피는 것도 재미있다. 놀랍게도 월전은 이처럼 실험적인 작품을 이미 오래전에 선보였다. 거리를 질주하는 버스가 위태롭다. ‘아슬아슬’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에 20년이 지난 그림이지만 2024년의 한국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 한국화의 대가 신문인화를 개척하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한국화의 발전과 월전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2007년 문을 연 미술관이다. 2005년 서거한 월전의 유지대로 이천시는 2007년 6월 재단법인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유족으로부터 월전의 유작 및 월전미술관 소장품 1천532점을 기증받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개관했다. ‘물의 다리’를 지나면 펼쳐지는 둥근 마당은 그의 호 ‘월전(月田)’에 등장하는 보름달이 연상되는 공간이다. 두세 달에 한 번꼴로 특별전과 기획전이 열리는 1층의 기획전시실 2실과 2층의 상설전시실에는 월전의 작품과 고미술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상설전시실 입구에 월전의 주먹을 쥔 오른손과 펼친 왼손의 모형 및 초상화가 여러 점 전시돼 있다. 월전의 섬세한 손과 초상화에서 조선 선비의 고결한 기품이 느껴진다.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서 한학을 수학한 월전은 한시와 서예 실력까지 두루 갖춘 특별한 화가였다. 월전이 무척 아꼈던 ‘목필통’과 작품의 바탕이 된 스케치도 여러 점 보인다. 1949년 그린 ‘한국의 성모자상’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연두색 당의를 입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어린 예수의 옷은 한국의 아이들이 입는 색동옷이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시대를 풍자한 ‘유인원도’(1984년), 무분별하게 수입된 외래종이 이 땅의 주인인 토종을 몰아내는 ‘황소개구리’(1998년), 이익을 위해 부끄러움을 모른 세태를 꼬집은 ‘개싸움 1, 2’(1998·2001년), ‘광란 시대’(2001년)는 여든을 넘긴 노장의 작품이다. 휴대전화를 든 젊은 여성을 그린 ‘단군일백오십대손’(2001년)이나 ‘광우병에 걸린 황소’(2001년), ‘낚시를 문 고기’(2003년) 같은 작품을 보노라면 시대의 고민에 응답하려는 지식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아한 멋이 느껴지는 한글서예 작품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태산이 높다 해도’(1998년), ‘나모도 아닌거시’(1999년), ‘이 몸이 죽어가서’(2003년) 같은 작품은 학창 시절에 배운 시조를 다룬 것이기에 더욱 반갑다. ‘현충사봉인충무공이순신영정초본’과 ‘집현전학사도초본’ 같은 특별한 내력을 가진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월전 장우성 화백은 평생을 한국화의 새로운 형식과 방향을 모색해 우리 화단을 이끈 한국 미술계의 거장입니다. 동양 고유의 정신과 격조를 계승하며 현대적 조형기법을 조화시킨 ‘신문인화’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광복 이후 새로운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월전은 시서화(詩書畵) 전통 문인화의 높고 깊은 세계를 내적·외적으로 일치시킨 경지에 이른 현대 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월전의 작품은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충무공 이순신 영정’을 비롯해 수많은 국내외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로마 바티칸 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청춘일기’(삼성미술관 리움), ‘새안(塞雁)’(영국 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 문화부), ‘회고’(독일 쾰른 시립박물관), ‘심청도’(일본 후지미술관) 등이다. 복도에도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은관문화훈장과 금관문화훈장(2001년)을 살펴본다. 그의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 월전, 한국화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매우 부지런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미술관이다. 2024년 ‘용(龍)’과 ‘꽃 보다: 이철주의 작품세계’를 비롯한 기획전과 ‘명경지수-맑고 고요한 월전의 풍경’과 ‘달과 별의 인연: 성천이 간직한 월전의 그림들’ 같은 상설전을 연달아 열었다. 제11회 월전학술포럼 ‘문인화의 전파와 확산’, ‘종교와 예술의 만남, 쉬운 우리 불화 이야기’를 비롯해 ‘이천달빛탐험’과 ‘달빛모래놀이’를 같은 프로그램과 ‘학부모를 위한 교과서 속 문화재 이야기’와 도슨트 양성 아카데미 ‘한국화 재료로 그리는 인물 그림’ 같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6일부터는 ‘달빛美클래스: 이천의 옛 미술’이 진행된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는 안평대군 이용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신사임당, 흥선대원군의 서간(書簡)과 한석봉, 송강 정철,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김삿갓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물론 단원 김홍도의 ‘쌍치도(雙雉圖)’와 겸재 정선의 ‘월송정(月松亭)’, 연담 김명국의 ‘신선도(神仙圖)’ 등도 소장하고 있다. 중국 청나라 문사들이 조선의 역관 오경석에게 선물했던 김농의 ‘매화’는 한중 문화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귀환 소장품이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한국화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월전 선생은 한국 미술이 점점 서구적 미감과 표현 방식에 잠식돼 가던 상황에서 전통 시대 미술의 정수인 문인화(文人畵)를 현대적으로 계승함으로써 한국 화단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문학, 그림, 글씨가 하나로 어우러진, 표현적인 문인화에 사실성과 조형성을 더한 새로운 한국화를 개척한 것입니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설봉산 자락에 안긴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축복받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곁에 이천시립박물관을 비롯해 이천세라피아 한국도자재단이 자리 잡고 있어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6.여주 목아박물관

건장한 장년의 사나이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두 팔로 안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사진의 제목이 ‘영감받다’다. 노인을 가리키는 우리말 ‘영감’이 아이디어를 뜻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관람객이 빙긋 웃음을 짓는다. 불에 뒤틀리고 구부러진 30㎝ 자를 전시한 작품의 제목은 ‘자화상’이다. 15㎝ 자 셋을 이은 것에 ‘연장자’라는 제목을 붙인 이 웃기는 작가는 누구일까. 목아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난 ‘한글 작가 박우택 개인전’을 보면서 우리말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한다. 놀라운 것은 ‘영감받다’에 등장하는 노인이 국가무형유산 제108호 목조각장 기능보유자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며 장년의 사나이가 목아박물관 박우택 관장이라는 사실이다. ■ 나무에 웃음과 감동을 새기다 여주시 강천면 이문안길 21에 자리 잡은 목아박물관은 1993년 개관한 사립 박물관이다. ‘목아’는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을 가진 설립자 박찬수 선생의 호다. 붉은 벽돌로 만든 전시관이 멋스럽다. “서울 혜화동 서울대 문리대 건물이 헐릴 때 나온 벽돌을 재활용한 것입니다.”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이다. 나선형의 계단은 불교의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관 내부는 전통한옥의 창문과 틀을 응용해 불교의 현대화와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목아박물관은 재미있는 박물관이다. 하루 만에 완성했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작품을 보자. 오월의 꽃밭처럼 환하게 웃음 짓는 커다란 얼굴 주위로 작은 얼굴이 수십 개 조각돼 있다. 생각에 잠긴 얼굴, 놀란 표정, 기다란 수염을 기른 사람, 부릅뜬 눈으로 앞을 응시하는 얼굴도 있다. 조각품의 좌우에 새겨진 ‘마음이 부자인 사람’과 ‘베풀 줄 아는 사람’이란 문장이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당신은 이웃에게 베풀며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만나는 이웃에게 미소만 건네도 우리 사회는 훨씬 밝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박찬수 장인은 10년 동안 나무를 연구했다고 한다. 마침내 나무의 숨결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으로 일가를 이룬 설립자의 예술혼을 만나기 위해 3층 상설 전시장으로 향한다. 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은 ‘법상(法床)’을 비롯해 목조각장 박찬수 선생의 대표작 150여점이 전시돼 있다. 나뭇결이 살아 있어 더욱 아름다운 반가사유상은 반드시 오래 머물며 위치와 각도를 달리해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다. 천진난만한 동자상의 표정과 몸짓에 장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 조각 작품은 사포질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로지 칼질로 깎아낸 것인데도 동자의 해맑은 얼굴과 어깨선이 부드럽습니다.” 자귀로 나무를 찍어 깎고 다듬은 작품 앞에서 다시 한번 장인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낀다. “자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설립자를 제외하고는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박찬수 목조각장의 작품을 살펴보면 문득 작가가 나무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붓으로 그리는 부처님 이야기 목아박물관이 소장한 3점의 보물은 빠뜨릴 수 없는 유물이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1992년 국가 보물로 지정된 예념미타도량참법(보물 제1144호), 묘법연화경(보물 제1145호), 대방광불화엄경(보물 제1146호)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본다. 긴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유물이 전달하는 감동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림으로 법문을 보여주는 탱화와 주목으로 만든 대형 염주도 아주 귀한 유물이다. 목아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은 어떻게 수집했을까. “1970년대에 불교 목조각에 입문한 설립자는 불상과 장승부터 모으기 시작합니다. 절집에서 새 부처를 모실 때 이전에 있던 부처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것을 보고 절집 사람들을 설득해 낡은 불상을 집으로 모셔 온 것입니다. 이렇게 모신 불상은 통일신라 때 작품부터 최근에 제작된 플라스틱 불상까지 다양하지요. 플라스틱 불상까지 모은 것은 시대에 따른 불상 제작 소재나 기법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흔해 빠진 플라스틱 불상도 세월이 흐르면 한 시대를 증언하는 소중한 유물이 될 수 있다는 박 관장의 지론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인다. ■ 저승의 끝, 지옥과 극락을 보다 2023 목아박물관 기획전 ‘열두 동물을 만나다’가 열리고 있는 1층 제1전시실에 들어선다. 박찬수 기능보유자가 조각한 쥐와 소와 호랑이를 비롯한 열두 마리 동물이 반겨준다. 자신이 태어난 해를 기억하게 만드는 ‘띠’에 관람객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관람객도 ‘십이지로 보는 나의 성격’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물론 아이들도 전시장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띠동갑’이란 말의 뜻을 깨치게 된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제1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홀로 지옥’은 경기도와 여주시의 지원으로 마련된 ‘2024 목아박물관 기획전’이다. “상설전 ‘망자의 길, 산 자의 길’과 연계, 확장해 ‘홀로 지옥’이 기획됐지요. 저승에 간 망자가 시왕의 심판을 받고 난 후 지옥에서 다양한 벌을 받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장을 나설 때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을 누구나 하게 만들었으니 성공한 기획이다.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잘 배합해 관람의 흥미와 집중력을 높인 점도 돋보인다. 염라대왕과 저승사자, 죄인의 역할을 체험할 수도 있게 구성한 것도 재미있다.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제2전시실의 ‘망자의 길, 산 자의 길’은 죽음과 장례라는 주제로 우리 전통문화 속의 사후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 시왕과 살아생전의 행위를 빠짐없이 보여주는 ‘업경대’와 ‘극락지옥도’가 전시돼 있다. 요즘은 보기 드문 ‘꽃상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게 전시했다고 해도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주제다. 전시실을 나서며 관람객에게 들려준 박 관장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하 전시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빛이 환한 1층이 나오니 관람객은 부활을 체험하는 셈입니다.” ■ 조각품이 당신에게 건네는 나직한 목소리 야외 공원에서 만난 석조 미륵삼존불은 현대적인 조형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저녁놀이 질 저녁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여주에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다. 목아박물관에는 한문 대신 초등학생도 뜻을 새길 수 있는 한글 현판을 설치했다. 일주문은 ‘맞이문’으로, 대웅전은 ‘큰 말씀의 집’이라 쓴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세종대왕도 ‘큰임금 세종’으로 불러야 한다며 한글 사랑을 강조한다. ‘큰 말씀의 집’은 박찬수 선생이 조각한 500여개의 목조 나한상을 모신 법당이다. 네 기둥에 달린 한글 주련의 글귀를 가만히 소리 내어 읽는 어린 관람객의 표정이 밝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 “베풀 줄 아는 사람”, “가정이 행복한 사람”, “언행일치하는 사람”.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야외 조각공원은 아무 때나 산책하기에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놀이 지는 시간에 거닐어 보면 아주 좋습니다.” 소나무보다 키가 더 큰 ‘석조 미륵삼존대불’과 ‘금동비로자나불’, ‘석조 백의관음’과 ‘자모관음상’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관람객을 굽어본다. 박물관에서 만난 예수상과 성모상은 더욱 각별한 느낌이다.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하늘교회’도 있다. 수령 500년 넘은 나무로 만든 천연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 앉아 뜨거운 물에 홀짝 꽃을 피우는 매화차를 마시며 내면을 울리는 나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만 줄 수 있어도 당신은 부자입니다.” 죽은 나무에 숨결을 불어넣은 조각품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목아박물관은 낙엽이 진 겨울철에 찾으면 더욱 좋은 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파주 한향림도자미술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도 가을이 깊었다. 갈색 연잎이 가득한 호수를 중심으로 조성된 통일동산 갈대광장공원을 지나 노을동산공원으로 걸음을 옮기니 언덕에 하얀 건물이 나타난다. 2018년 10월 개관한 한향림도자미술관은 국내 유일의 현대도예 전문 사립미술관이다. 이정호 이사장과 한향림 관장이 설립한 ‘Jay & Lim Collection’을 통해 1987년부터 수집해 온 1천여점의 국내외 현대도예작품을 중심으로 인문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도자예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만나 볼 수 있다. “1층과 2층의 전시실은 미술관 소장품과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주제별로 전시해 도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경혜 학예사의 안내로 미술관을 둘러본다.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건물답게 미술관 내부 공간의 분할과 연결이 자연스럽다. ■ 도자예술의 첨단을 만나는 곳 황종구 작가(1919~2003)의 ‘청자상감운학문병’과 ‘청자상감불꽃문화병’은 한향림 관장이 주목한 작품이다. 구름과 두 마리의 학이 새겨진 늘씬한 청자의 자태와 활활 타오르는 불꽃 문양이 그려진 화병의 빛깔 또한 이제까지 봤던 청자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곳은 설립자 이정호 이사장과 한향림 관장이 신념을 갖고 30여년 동안 수집한 도화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입니다.” 모이를 쪼는 토종닭 한 쌍이 그려진 항아리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그 옆에 놓인 작품은 운보의 아내인 우향 박래현의 ‘청화백자 추상문 과반’이다. 월전 장우성의 ‘게가 그려진 화병’과 함께 전시된 작품은 뜻밖에도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마광수(1951~2017)의 작품 ‘집 그림이 그려진 술병’이다. ‘그릇에서 예술로’라는 제목이 붙은 공간에서 공동 설립자이자 관장인 한향림 작가의 작업 모습을 담은 사진과 미술관 입구에서 만난 산을 형상화한 도자 작품을 만난다. 스케치와 프랑스어로 빼곡하게 채운 작가 노트에서 작품 ‘산’에 담긴 사연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지는 다양한 전시물에서 도자에 담긴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분방한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정점에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자리하고 있다. “피카소는 회화와 조각 작품 이외에도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이 담긴 도자기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완성품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자기 제작 과정은 노년의 피카소에게 새로운 창작 동기가 됐지요.” 피카소가 1947년부터 25년 동안 무려 4천여점의 도자기 작품을 생산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전시실에서 마주한 ‘얼굴’은 피카소의 자유분방한 예술혼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미국 작가 피터 볼커스(1924~2002)의 ‘더미-왕의 실내악’은 도자예술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거칠고 두텁게 처리한 도자의 표면은 도자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가볍게 파괴한다. 이어지는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천의 얼굴을 가진’ 도자의 변신에 거듭 놀란다. 악보가 담긴 상자를 왜 여기에 놓았을까. 허리를 숙이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 또한 도자로 만든 작품이다. 여선구 작가의 ‘포이즌 아이비’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는 작품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특별기획전 ‘장 샤를 프롤롱죠展’의 주제가 궁금하다. “연극 배우이기도 한 장 샤를 프롤롱죠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도예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960년부터 도예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4년부터 도자기로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 일에 몰두했는데 이번 전시는 자유로운 곡선에 의한 형태 속에서 얇을수록 극대화되는 긴장감을 통해 도자 재료가 주는 연약함의 미학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향림 관장의 스승이기도 한 프롤롱죠의 작품은 도자의 두께가 유리처럼 얇고 표면을 장식한 그림이 동양의 수묵화 혹은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단순함으로 감동을 끌어낸다. “도자기는 현대에 이르러 다른 장르와 결합하며 그릇의 용도를 벗어나 회화, 건축도자 등 상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예술로 변화하며 미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 흙과 디지털의 만남 한향림도자미술관은 올해 어떤 전시로 관람객과 만났을까. ‘갤러리H 특별전 박동엽 도예전-뿔 달린 주전자’(2월), ‘최아인 개인전-Frequency’(3월), ‘권희원 개인전-Pink Phobia’(4월), ‘emotion-도자 3인전 박한나 이은형 문지현’(7월), ‘천종업 개인전-Vibe Shift_흐름의 변화’(10월)로 이어진다. 11월에는 2024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박동엽 도예전-재인식의 미학’과 ‘파주시 시민 제안 우수프로그램-마음C 프로젝트’와 ‘장준호 개인전-도마의 환상’에 이어 ‘제11회 하모니 국제도예 프랜드십-하모니에 스며들다’를 열었다. ‘흙과 디지털의 만남, 하이브리드 원더랜드(Hybrid Wonderland)’ 세 번째 초대전인 ‘로우파이, 하이테크(LO-FI, HI-TEC)’ 오제성 작가의 개인전이 15일부터 진행되고 있다. 이 특별기획전에는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한향림 관장의 인사말을 들어본다. “2024년 한향림도자미술관은 발달하는 현대사회와 예술의 접점에 주목해 흙으로 만든 작품과 함께 디지털 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하이브리드 작품으로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세 명의 작가를 초대해 전시 및 다양한 활동을 펼칩니다.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디지털 세계로 나아가는 시대에 기술과의 협업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파주시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23일(토) 오후 1시부터 오제성 작가가 직접 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3D 출력 거푸집을 이용한 나만의 좌상 만들기’를 지도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한다. ■ 도자, 흙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다 미술관에 들어설 때부터 궁금했던 작품이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 조각 작품이다. 작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살펴보니 여인의 허리가 없고 엉덩이도 이상하다. “위생도기를 사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빌마 빌라베르데의 작품입니다.” 2002년 제작한 ‘왕과 왕비’란 작품은 더욱 파격적이다. 변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을 발처럼 디디고 있는 왕비와 변기에 얼굴을 담은 왕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허리를 감싸고 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작품이지만 소변기에 ‘샘’이란 이름을 붙여 출품한 마르셀 뒤샹보다는 훨씬 친절한 작품이다. 1층 햇볕이 잘 드는 공간에 마련한 도자 전문 체험장을 둘러본다.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일일 체험과 월 단위의 정규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영상 강의와 세미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단체가 체험하기에 좋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던 이지희 교육사가 체험 공간을 소개한다. ‘도자 아카데미’는 흙을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창조의 공간이다. 일정한 비용을 내면 잠시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다. 특수 색연필로 도안을 그려 완성하는 ‘나만의 머그컵’과 물레를 돌리며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보는 ‘물레 체험’이나 코일링, 핀칭, 판성형 등 다양한 도자 기법을 응용해 캐릭터 접시를 만들어 보는 체험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로비에 있는 ‘갤러리H’는 작가와 전공자, 취미 활동 단체 등의 대관 전시로 운영된다. 미술관 3층에 있는 ‘카페 스카이’는 헤이리의 전경과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파주 헤이리는 한향림도자미술관과 한향림옹기박물관을 비롯해 백봉한국장신구박물관, 블루메미술관, 세계인형박물관,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 한국근현대사박물관, 화이트블럭 같은 품격 높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즐비한 예술마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나무 줄기를 감은 담쟁이덩굴에도 빨갛게 단풍이 물들었다. 이천시 대월면 대평로214번길 10-13에 자리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마당에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동인)은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기독교 복음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 조선 말에 시작된 근대화와 기독교 복음의 선교 역사, 민족의 수난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한국 교회의 모습, 민족의 분단과 해외 선교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 ■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보여주다 박물관을 설립한 사람은 문서선교에 헌신한 향산(香山) 한영제 장로(1925∼2008)다. 향산은 한국기독공보 사장을 지내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장로교회협의회장을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1985년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유명 출판인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향산은 1955년 대구 평북교회의 이성호 목사 등 신앙 동지들과 문서선교 기관인 정문사를 설립하고 1956년 기독교문사로 출판 등록을 한다. 출판 자료를 위해 고서점을 뒤지며 기독교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그는 빠르게 사라져 가는 문헌 자료를 보관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기독교는 물론이고 한국의 역사와 종교, 철학, 문화에 대한 자료까지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력으로 도서와 잡지, 신문, 사진, 필름, 유물을 합쳐 10만여점을 모았다. 설립자 한영제 장로의 호 ‘향산(香山)’은 설립자의 고향 마을 이름이다.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12월30일까지 열리는 ‘제21회 기획전시 향산 15주기 추모전-선교의 여명’은 기독교가 들어오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기획전시가 열리는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에도 기독교 전파의 역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1611년,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지봉 이수광(1563~1629)이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들과 교류한다. “이 나라에 이마두란 자가 지은 천주실의 2권의 첫머리에서는 천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편안히 기르는 도를 주재한다는 것을 논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은 불멸의 것으로 금수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논하였으며….” 기독교와 마주한 조선 선비의 감정은 두려움보다 설렘이었던 것 같다. 1644년 9월, 소현세자가 북경 천주당을 방문해 아담 샬과 교류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1720년 9월 정사 이이명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이기지(1690~1722)가 천주당을 방문해 선교사와 교류하고 남긴 ‘일암연기(一庵燕記)’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나는 천지의 동쪽 끝에 살고 당신은 천지의 서쪽 끝에 사는데 지금 이처럼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어찌 하늘이 베푼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사실에서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한 한국의 독특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1884년 소래교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다. 개신교 역시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하고 8월에 배재학당, 이듬해 5월에 이화학당이 개교해 신교육을 시작한다. 1887년 정동교회(새문안교회)가 설립되고 20년이 지난 1907년 첫 조선인 목회자 7인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살펴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기까지의 경로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형 세계지 앞에 선다. 이승재 학예사가 손가락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를 가리키는 곳에 ‘MER DE COREE’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당시 서양인들도 동해를 한국해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 시대의 어둠을 밝힌 한국 기독교 저 낡은 책은 무슨 사연을 들려줄까.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성경책입니다.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는 기독교와 한글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1882년 일본사찰단으로 도쿄에 갔던 이수정이 기독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부터 성서를 번역한다. 1885년 출판한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를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수정해 펴낸다. 1900년대 초 한글 보급에 앞장섰던 한글학자 주시경과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는 한 장의 증서가 있다. 주시경과 전덕기가 중심이 돼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주시경이 지은 문법책 ‘말의 소리’와 전덕기가 번역한 기도서 ‘일일의력’을 살펴본다. 역시 33인의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의 친필 병풍도 있다. 십자가와 포도가 조각된 기왓장은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념해 1905년에 세운 나바위성당의 ‘곱새기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삼태극과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기와와 용정 명동촌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가져온 기와도 만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사용한 타자기와 입체경은 한국 선교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갓을 쓴 사내와 쪽머리를 한 여인, 대여섯 살쯤 되는 아이가 길을 걷고 있다. 그림 위에 ‘긔독도가 집을 떠나다’라는 설명이 붙은 이 책은 1895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1863~1937)이 번역한 ‘천로역정’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복음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과 그림을 적극 활용한다. 1924년 창간한 ‘부녀지광’이라는 여성지의 표지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 간행물로 알려진 ‘여자지남’은 1908년 간행한 것인데 표지에 “맹자의 어머니 속이지 아니한 일‘이란 글과 그림을 그려 넣을 정도로 실험적이다. 1906년 6월 창간된 기독교 월간 잡지 ‘가정잡지’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유성준, 양기탁, 주시경 등과 협력해 부녀자들을 깨우치자는 목적으로 발간한 것인데 표지 디자인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죽림과 차경신의 한글 편지도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두 분의 글씨가 활달하고 시원시원하다. ‘뎡말나라 연구’는 무슨 책일까. 1930년대에는 덴마크를 뎡말이라 표기했다. ‘정말과 정말농민’이란 책도 전시돼 있어 선진국인 덴마크를 연구하는 바람이 조선에 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사진은 달리기를 준비하는 월남 이상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1910년 6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생 여름 수양회가 열린 곳은 서울 근교의 진관사라는 절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협력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진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기독교 전파 초기에 양반과 남성, 어른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상민과 여성과 어린이를 주목하고 이들을 위해 헌신한 선교의 역사를 손때 묻은 유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 한국 기독교의 오늘을 성찰하는 공간 박물관 마당에는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백주년’을 기념해 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한 건물이 서 있다. 초기 기독교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자는 뜻이 담긴 건물이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3·1운동의 중심이었다. 안창호, 손정도 등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과 무장투쟁에 나섰던 독립군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는 고난과 절망의 시대를 밝힌 등불이었다. 문득 2024년 현재 한국 기독교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좋은 친구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장래를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인들의 성찰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3. 용인 한국등잔박물관

변화가 너무 빨라 손주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용했던 물건조차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 세대 전에 흔했던 물건도 이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수십년 전 한국인의 밤을 밝혀 주던 등잔도 마찬가지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의 한 구절이다. 포은정몽주선생묘역에서 걸어 10분 거리인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밤을 밝히는 등잔을 주제로 1997년 개관한 한국등잔박물관(관장 김상규)이 있다. 3대로 이어지고 있는 한국등잔박물관의 설립정신은 무엇일까. ■ 보배 같은 빛을 뿌려 밤을 열어 주던 등잔 “작으나마 반짝이는 불빛, 천한 사람 귀한 사람 차별 않고 보배 같은 빛을 뿌려 밤을 열어 주던 등잔, 방황하던 옛님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던 등불. 이 모두가 이제는 기억에서마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두 분(김동휘, 장영숙)은 이들을 거둬 안주할 곳을 마련하고 영원히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이곳에 박물관을 세웠습니다.” 수원화성을 닮은 박물관에 들어서면 ‘사진으로 보는 박물관 역사’란 작은 공간이 있다. 박물관의 역사를 보여 주는 사진이다. 1997년 9월28일 한국등잔박물관 개관식 날의 풍경, 1969년 고등기 전시관 개관일의 풍경, 양복을 입은 신사가 등잔을 죽 늘어놓고 남녀 사회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진에 1971년 동양방송(TBC) 굿모닝쇼에 출연한 고 김동휘 초대 관장이 1시간 동안 유물을 설명하는 장면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옛님의 불빛이 돌아왔네’라는 글귀가 적힌 박물관의 설계도면도 전시돼 있다. 어른 세 사람과 작은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설명을 보니 아이의 어깨를 잡은 중앙의 어른이 김동휘 초대 관장, 오른편은 부친, 왼편은 2대 김형구 관장, 소년은 3대 김상규 현 관장이다. 4대가 나란히 찍은 희귀한 사진 앞으로 ‘종지형 등잔’과 심지가 하늘로 향한 ‘호형 등잔’이 놓여 있다. 벽에 걸린 두 개의 표창장은 또 무엇일까. 2004년 문화재청은 제1회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의 보존관리 부문의 수상자로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을 선정한다. 초대 관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받은 표창장과 2대 김형구 관장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에게 받은 표창장이다. 2대에 걸쳐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박물관이 대한민국에서 또 있을까. 박물관은 8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절반이 등잔이다. 전시관의 구조가 아주 재미있다. 입구에 1층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안내판을 보니 1층에 농기구 전시관이 붙어 있고 너른 정원에는 고누놀이나 투호 같은 민속놀이를 할 수 있는 야외 전시장이 있다. ■ 한국 최초의 등잔박물관이 탄생한 내력 ‘등잔박사’로 불렸던 설립자 김동휘(1918~2011)는 화성이 둘러싸고 있는 수원시 신풍리에서 태어나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경기도수원병원에서 근무한다. 6·25전쟁 일어나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돼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다시 국군에 소속돼 군의관으로 환자들을 돌본다. 휴전이 되자 수원에서 보구산부인과를 개원한 그는 밀려 드는 환자를 돌보는 바쁜 몸이지만 틈날 때마다 인사동과 황학동을 돌고 고물상을 뒤져 등잔을 비롯한 유물을 찾아낸다. 처음부터 등잔에 끌렸던 그는 1971년 수원에서 등잔 전시회를 열고 동양방송 아침 생방송에 초청돼 등잔의 매력을 세상에 알린다. 1969년 병원 2층에 등잔 전시실을 마련했던 그는 결국 병원 건물을 판 돈 전부를 들여 1997년 용인에 한국등잔박물관을 세운다. 수원문화원 창립의 주역이며 예총 경기지부장을 맡기도 한 그는 국전에서 4년 연속 수상한 원로 사진작가이자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말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화성 복원 운동을 적극 펼쳤으며 등잔박물관을 지을 때 외관을 화성 동북공심돈을 본떴을 정도로 수원화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2009년 여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연 사진전 ‘화성을 걷다, 화성을 보다’는 이를 알려 주는 전시였다. ■ 등불이 밝혀 주는 옛날의 아늑한 풍경 김상규 관장의 안내로 박물관을 관람한다. 계단을 내려가 1전시실로 들어서니 오른편에 정갈한 부엌이 나타난다. 장작 아궁이 위에 걸린 무쇠솥, 그 옆에 호롱불 하나가 놓여 있고 벽에도 등잔이 걸려 있다. 함지박과 놋그릇이 진열돼 있는 찬장, 약탕기, 떡메, 절구가 놓여 있고 벽에는 창문이 나 있다. 부엌에서 지은 밥상이 차려지는 안방 풍경이 이어진다. 멋진 도자기가 진열장에 놓여 있는 안방 한가운데도 등잔이 놓여 있다. “등잔의 높이를 잘 보세요. 우리 조상들에게 등잔의 높이가 중요했지요. 식사와 독서도 앉아서 했기 때문에 불빛이 가장 밝게 비추는 높이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등잔은 선조들의 생활의 지혜가 묻어 나는 유물이다. 투박하지만 튼튼하게 만든 등잔대에 얌전하게 올려진 등잔에서 옛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하다. 꽃과 새를 그린 병풍을 배경으로 우아한 촛대가 두 개 서 있다. 초 높이에 바람을 가리고 불빛을 모아 주는 역할을 하는 나비 모양의 장식이 멋스럽다. “할아버지께서 알려 주셨어요. 촛불을 켜면 벽과 창문에 그림자가 비치게 되는데 아주 운치가 있다고요.” 일렁이는 불빛에 나비 그림자가 춤추는 방안 풍경을 상상하며 옥으로 장식한 비녀와 은장도, 노리개, 거울 같은 옛 물건을 감상한다. “어머니의 향긋한 분 냄새가 나는 안방입니다. …달빛조차 새어 들 데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머니는 잠도 잊으신 채 불빛 앞에 바짝 다가 앉아 밀린 바느질거리와 함께 아버지의 두루마기를 정성껏 마름질하십니다.” 설명문도 등잔 불빛처럼 환하고 따스하다.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안경과 문종이에 인쇄된 한문책을 보니 할아버지의 방안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두 개의 등잔대 위에 등잔이 놓여 있다. ■ 보고 생각하는 박물관 사립박물관은 학예사를 1~2명 두는데 한국등잔박물관에는 학예사가 4명이나 활동하고 있다. 사실 사립박물관의 상당수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등잔박물관이 어려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을 담아 ‘재단법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상(至上)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이 박물관을 세웠습니다. 정성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이미 내 것은 내 곁을 떠나 겨레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유물들은 여러분 각자가 아끼고 보살피고 사랑할 때 더욱 빛날 것입니다. 또 그것만이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후손 대대 물려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보고 느끼고 즐기십시오. 그리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십시오.” 김형구 2대 관장의 말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전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등잔, 색다르게 바라보기’ 기획전도 그런 고민이 묻어 있다. 선조들의 삶과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는 등잔을 ‘빛’으로 정의하고 ‘과거의 빛’, ‘현재의 빛’, ‘미래의 빛’ 3개의 주제로 나눠 바라보게 한다. 예컨대 ‘과거의 빛’은 등잔이 어떤 재료와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됐는지 손과 코와 귀로 전시물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홈페이지에 소개하는 ‘관람안내’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 있다. 조용히 관람하고 싶다면 이해하기 쉬운 전시 안내서를 보며 즐겁게 관람하자고 권한다. 그럼, 설명을 듣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매표소에서 해설을 요청하고 전문해설가와 함께 전시를 꼼꼼하게 관람하라고 권한다. ‘활동 안내’도 아이들의 생각과 태도가 자라도록 유도한다. 첫째, 빛을 나의 일상과 연결해 보는 현장 참여형 워크숍에 참여해 내 생각을 포스트잇에 적고 벽에 붙여 보자. 둘째, 전시를 관람한 뒤 전시 연계 체험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나만의 액자를 만들어 보자. 어른들에게는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주고 아이들에게는 생각하는 힘을 쑥쑥 길러 주는 한국등잔박물관이 경기 용인에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2. 부천 펄벅기념관

“힘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고 용기는 가슴속의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벅 여사의 말이다. 중국을 배경으로 ‘대지’라는 장편소설을 쓴 세계적인 작가로만 알고 있는 펄벅 여사가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천시 소사구 성주로 골목길에서 ‘펄벅문화마을, 부천시 심곡본동’, ‘봉사와 박애정신을 실천한 펄벅 여사’란 글씨가 새겨진 화분을 만난다. 성주산 자락 공원 속에 자리 잡은 부천펄벅기념관(관장 박종민)에도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활짝 웃고 있는 펄벅 여사의 사진 주변에 ‘펄벅 여사님 존경합니다’, ‘어린이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펄벅 여사님 고마워요. 사랑해요’. 방문자들이 남긴 수백개의 글에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사진 아래 ‘2024 펄벅인문학 아카데미 자료집’, ‘펄벅 할머니 색칠하기’, ‘펄벅의 세계’라는 책이 놓여 있다. 펄벅과 부천은 과연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부천펄벅기념관 박민주 학예사의 안내를 받아 기념관을 둘러본다. ■ 펄벅, 부천 소사에 희망을 심다 1층은 펄벅 여사의 저서와 사진,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고 2층은 책을 읽고 체험을 할 수 있는 학습공간이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왼편 벽 대형 모니터에 펄벅 여사에 관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박민주 학예사가 펄벅과 부천의 관계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아시아 혼혈 아동을 도울 방법을 찾던 펄벅은 이들에게 안정된 주거, 건강,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복지센터를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1965년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1967년 이곳에 소사희망원을 개원했지요. 훗날 펄벅은 수백명의 혼혈 아동들이 자리한 소사희망원 개원식을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사희망원은 적성분석부, 개인지도부, 예능원, 재활부 4개로 나누고 일반 고아들의 예능교육도 실행할 정도로 앞서나갔다. 150여명의 원생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기숙사에는 휴게실과 오락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혼혈 아동들의 어머니를 위해 양재나 비서학 같은 기능교육이 진행됐다. 학업성적이 뛰어난 아이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아주 뛰어난 학생들은 특별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도 줬다. “당시 펄벅 여사는 소사희망원에 머물면서 그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희망원 아이들이 먹었던 밥은 당시 군대 장성이 먹었던 것보다 더 좋았다고 합니다.” 소사희망원 축소 모형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모형을 감싸고 있는 동판에 부조로 펄벅과 아이들의 모습을 새겼다. 펄벅 여사와 손을 잡고 서 있는 남자아이는 곱슬머리 흑인이고 옆의 여자아이는 콧날이 우뚝한 백인이며 또 한 아이는 목발을 짚고 서 있다. 소사희망원에 살던 아이들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거나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 진주처럼 빛나는 펄벅의 삶 우리말 이름이 ‘최진주’인 펄벅은 1892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3개월 만에 선교사 부모를 따라 중국 진강에서 자랐다. 1914년 랜돌프메이컨여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대학 심리학 강사로 일하다가 어머니의 병 간호를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다. 농업학 교수 존 로싱 벅과 결혼하면서 ‘벅’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1930년 동양과 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첫 소설 ‘동풍, 서풍’을 발표하며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왕룽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1931년)을 출판해 작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1950년 딸 캐럴의 이야기를 담은 ‘자라지 않는 아이’란 소설을 발표한다. 펄벅은 인종 문제에 맞서 인권 개선을 위한 사회참여 활동을 전개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 평화 및 아동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 자원봉사 활동에 전념한다. 전시실의 많은 전시물은 책이다. 대부분 영문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된 펄벅의 저서도 상당히 많다. 앉은뱅이책상은 ‘살아있는 갈대’를 집필할 때 사용했던 책상이니 펄벅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것이겠다. 책상 위에는 영문판 소설책 여러 권이 놓여 있고 펄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67년 당시 소사희망원에서 사용했던 청색 타자기와 P.S.B 이름자가 또렷한 펄벅의 가방도 있다. 기증한 줄리 헤닝의 한국명이 ‘구순이’다. 분홍색 투피스 정장을 통해 펄벅이 멋쟁이였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1968년 서울시가 선물한 ‘명예시민증’에 펄벅 이름을 ‘최진주’라 써 놓았다. 196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펄벅 여사에게 수여한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도 있다. 유리병에 펄벅 여사가 잠든 고향 묘지의 흙이 담겨 있다. ■ 유일한과 펄벅의 우정이 깃든 곳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1894~1971·독립장)가 1967년 4월11일 펄벅에게 보낸 편지와 펄벅이 4월17일 답장한 편지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유일한은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학교에 입학해 애국 사상을 배웠다. 1940년대 초, 펄벅이 동서협회를 설립할 무렵 유일한 박사의 한국 독립운동으로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오랫동안 교류하며 우정을 쌓았다. 특히 펄벅은 유 박사의 도움으로 유한양행 소사 공장 터를 매입해 1967년 11월 부천에 소사희망원을 설립하는데 소사희망원 개원식 날 함께 자리한다. 펄벅이 한국의 구한말부터 광복까지를 배경으로 집필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1963년) 속 주인공 이름을 ‘일한’으로 지은 것만 봐도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영미 언론에선 이 작품을 ‘대지’ 이후 최고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펄벅은 이 소설 서문에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했다. 펄벅이 한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책은 ‘한국에서 온 두 처녀’와 ‘새해’까지 세 권 모두 전시해 놓았다. 펄벅은 글과 강연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에 꾸준히 알린다. 1937년 8월 중국 신문에 ‘한국은 응당 자치해야 한다’는 제목의 글을 실어 독립을 지지한다. 미국으로 돌아간 펄벅은 1941년 동서협회를 조직해 1942년 ‘한국을 알자’는 강연을 시작으로 ‘한국인의 밤’과 ‘이 위기 속의 한국’ 같은 행사를 통해 꾸준히 한국을 소개했다. 펄벅은 1944년 2월 ‘우리의 잊힌 우방 한국의 2,500만’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한다. “제가 알고 있는 한국인들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한국은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패망할 때 즉시 자유를 얻길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 부천, 펄벅을 기억하고 기념하다 부천펄벅기념관은 2006년 9월 개관한 이후 펄벅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펄벅 인문학 아카데미’를 비롯해 올해로 16회를 맞은 ‘펄벅 탄생 기념 그림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다. 아이들이 기념관에서 선생님에게 펄벅 여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관람한 후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제16회 펄벅 탄생 기념 그림그리기 대회 2024 작품집’을 펼친다. 올해의 대상은 탕정초등학교 이하율 어린이가 그린 ‘다르지만 같은 우리’라는 작품이다.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뜻을 담아 한 사람의 얼굴을 백색, 흑색, 황색, 갈색 네 가지 색깔로 그린 것이 재미있다. 같은 날 ‘2024 펄벅학술대회’도 열렸다. 기조강연 제목이 ‘펄벅과 한국 문화자유주의’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을 예견한 것일까. ‘펄벅과 한국문학의 발견’이란 토론에 눈길이 간다. 기념관을 나와 공원에 있는 펄벅 동상을 찾았다. 문득 펄벅이 진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개 속살에 난 상처에 자라는 것이 진주 아닌가. 장애인 딸을 가진 어머니 펄벅은 그 사랑을 넓혀 대한민국 부천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상처 입은 아이들과 어머니에게 희망과 용기를 줘 진주를 기르게 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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