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음악적으로 별처럼 높은 위치에 도달하려고 애써 왔어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지요. 그래서 매일 하는 연습이 늘 새롭습니다. 제가 과거에 훌륭한 연주를 했다고 해서 내일과 모레에도 그런 연주를 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78)는 최근 몇 년간 한국을 찾은 대중문화계 스타 중에서 최고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1948년 첫 공식 음반을 녹음한 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마일스 데이비스, 콜맨 호킨스, 델로이너스 몽크 등 전설적인 대가들과 연주실력을 겨루며 현대 재즈사의 한 장을 담당해 왔다. '재즈북(The Jazz Book)' '재즈총론(Jazz Styles)' 등 유명 재즈 입문서들은 상당 부분을 할애해 그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서 "아직도 배울 부분이 많다"는 말을 들으니 놀라웠다. 8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루에 2~3시간씩 연습에 매달리고 있다는 그는 "오랜 세월 나를 지지해 준 한국 관객에게 감사하며, 한국 공연에서는 독창적이고 독특한 나만의 스타일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5월 내한공연을 앞두고 연합뉴스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시종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마땅한 단어를 일일이 골라가며 말을 이어가듯 질문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음악을 대하는 진진한 자세가 대화에도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롤린스는 비밥, 하드밥 등 정통 재즈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951년 자신의 밴드를 만든 후 '무빙 아웃(Moving Out)' '워크 타임(Work Time)' 등으로 이름을 날렸고, 1956년에는 재즈사상 불후의 명반으로 꼽히는 '색소폰 콜로서스(Saxophone Colossus)'를 발표했다. 이 음반에는 재즈 스탠더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인트 토머스(St. Thomas)'가 수록됐다. 재즈의 황금기를 누린 '살아 있는 전설'이자 '재즈의 신'으로 여겨지지만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1957년 '웨이 아웃 웨스트(Way Out West)'에서는 피아노 세션 없는 연주로 주목받았고, 1985년 발매작에서는 리듬 세션이 전혀 없는 연주를 시도해 후배 뮤지션으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2001년과 2005년에는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5년 수상작 '위드아웃 어 송(Without A Song)'은 "상처받은 이들을 음악으로 치유하고 싶다"며 9ㆍ11 테러 직후 연 공연 실황을 담고 있다. 그는 '연습 벌레'로도 잘 알려졌다. 한창 인기를 모으던 1950년대 말 갑자기 무대 위의 공연을 중단한 후 뉴욕 윌리엄스버그 다리에서 혼자 연주 연습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처음 내한하는 그는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5월23일 오후 8시와 25일 오후 7시 두 차례 공연을 펼친다. 65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한 그는 2006년작 '소니, 플리스(Sonny, Please)'의 수록곡을 이번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을 예정이다. 이하 일문일답. --첫 한국공연이다. ▲한국 관객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오랜 세월 나를 지지해 준 한국 관객에게 감사하다. 한국 공연을 갈망하고 있으며, 한국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공연에서는 재즈의 기쁨과 즉흥성을 즐기기를 바란다. 한국인이 재즈를 좋아하며 훌륭한 한국 재즈 뮤지션이 많다는 것을 안다. 공연에서는 나만의 재즈 스타일을 보여 줄 것이다. 독창적이고 독특한 롤린스만의 스타일이다. --재즈의 매력은. ▲재즈는 인생의 여러 순간을 섞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인생에서는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없다. 재즈도 마찬가지다. 자유의지에 의한 연주이며, 리허설이 없다. 내게 재즈는 실제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다. 무엇이 발생할지 모르는 점, 그것이 재즈의 아름다움이다. --테너 색소폰의 장점은. ▲삼촌이 부는 색소폰을 듣고 자랐다. 색소폰은 다양한 것을 연주할 수 있다. 다른 악기와 비교할 때 사운드와 감동을 변형하기 쉽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최근 공연 중에서는 지난해 여름 이탈리아에서 한 공연이 내가 좋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재즈는 인생과 같아서 매번 같은 음악이 나오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잘 이뤄진 좋은 공연은 1년에 2~3차례 정도 나오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이런 공연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북한도 방문하기를 바랐다. --거장 존 콜트레인과 라이벌로 비교된다. ▲라이벌 맞다. 서로 강력한 힘을 가진 뮤지션은 늘 어떤 의미에서 라이벌로 여겨진다.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 등도 서로 다른 식으로 연주해 라이벌이라고 평가받는다. 나도 콜트레인과 연주 스타일은 다르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인 콜트레인과 함께 연주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은 내게 큰 영광이다. 팬이 볼 때는 두 사람이 라이벌이었겠지만 사실 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그는 나를 위해 '라이크 소니(Like Sonny)'라는 곡도 작곡했다. 나에 대한 애정을 담은 감동적인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당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나 눈물이 고인다. --당신에게 음악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콜맨 호킨스다. 그는 위대한 색소폰 연주자로 '테너 색소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를 보며 나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웠다. 음악적으로도 그는 나에게 큰 영향을 줬다. --기뻤던 순간과 좌절했던 순간은. ▲늘 최고 수준의 음악을 연주하려고 애썼다. 목표를 높게 잡았다. 음악적으로 별처럼 높은 위치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음악가로서 종종 좌절감을 느꼈다. 다만 관객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순간은 기쁘다. 비록 내가 좌절감을 느낄지라도 관객이 그런 감정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프로 뮤지션으로서 관객 앞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게 여긴다. --여전히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나. ▲예전처럼 연습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매일 하루 2시간은 연습한다. 3시간까지 연습할 때는 아주 좋은 날인 셈이다. 매일이 새롭다.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훌륭한 연주를 했다고 해서 내일과 모레에도 그런 연주를 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색소폰 연주자는 입술 등 신체적으로도 연주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생겨도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연습과 영감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나. ▲꾸준히 연습하면 좋은 뮤지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 위대한 뮤지션이 되려면 우선 신이 내려준 특별한 재능을 갖춰야 한다. 그 후에 진정으로 연습해야 한다. 재능 있는 많은 뮤지션이 연습을 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연주와 음악을 사랑해야 한다.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나. ▲적당하게 먹으려고 애쓴다. 규칙적으로 식사하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 단 음식도 피하려고 애쓴다. 다만 생선은 좋아한다. 과일도 매일 먹는다. --9ㆍ11 사태 당시 사고 현장 근처에 있었다. 충격을 딛고 곧바로 공연을 강행한 이유는. ▲아내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쇼크를 받아서 무대에 설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이 콘서트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콘서트가 사람들에게 치유의 시간이 됐다고 믿는다. --요가와 불교에 심취한 이유는. ▲요가를 하고 있으며, 불교도 좋아한다. 가치를 찾아가는 그런 상상을 좋아한다. 인도에서 요가를 가르쳐 준 선생님으로부터 '색소폰 연주도 일종의 명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처 같은 위대한 인물의 족적을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1950년대 말 '윌리엄스버그 다리 에피소드'에 대해 설명해달라. ▲당시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이디어도 얻고 더 연습해서 돌아오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살던 뉴욕은 인파가 많은 도시다. 테너 색소폰은 힘차게 불어서 연주를 해야 하는데 그 소리를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리를 따라 걷다가 그 다리를 보게 됐고 연습에 적당한 장소라고 여겼다. 차량 경적 등 많은 소음이 있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연습할 수 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도쿄의 한국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아주 독특하게 고기를 요리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난 채식주의자라 고기는 먹지 않았다.
(연합뉴스) 6년의 공백을 깬 강산에(본명 강영걸ㆍ45)의 8집 제목은 '물수건'. 그간 '라구요' '태극기' '명태' '와그라노' 등 한국적인 록음악으로 사랑받은 그는 음반 제목을 손수 붙였다. 일본 음식점에 가면 언제나 차와 함께 제공되는 것이 물수건. 더운 여름에는 차갑게,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내놓아 음식점을 찾은 손님에게 예의와 감사를 표시하는 의미다. 강산에는 팬들에게 정성스레 준비한 물수건을 내놓는 마음으로 음반을 준비했다. 강산에는 이번에도 소소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느낀 삶의 소중한 가치를 끄집어냈다. 타이틀곡 '답'은 우리에게 복잡한 정답만을 요구하는 틀에 박힌 고루한 세상에 자신의 바람을 담았다. '기분 좋은 그런 여러 가지 많은 답들이 내 안에 가득 차 넘치면 너무 좋겠네~'란 가사를 통해 '넌 할 수 있어'란 노래가 주던 격려보다 한층 성숙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밖에도 멜로디컬한 인트로와 강산에의 시원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아침의 사과', 때론 귀엽고 야무지고 때론 무서운 소중한 내 여자에 대한 솔직한 가사의 '내 여자', 기타 사운드가 평화로운 '낮잠', 레게 리듬이 가미된 '나의 기쁨' 등이 담겼다. 일본인 뮤지션 하찌를 주제로 한 '사스가카스가'는 강산에의 개인적인 노래로 일본어 가사로 수록했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난 강산에의 일본인 아내는 노랫말 작업에 참여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음반 재킷. 어설픈 한글 실력으로 삐뚤빼뚤 가사를 써놓았다. 마치 다섯 살의 솜씨 같다.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강산에의 외국인 친구들이 손으로 쓰고 오리고 붙여서 만든 작품이란다. '눈물 핑' '이구아나' '사막에서의 똥' 등 이색적인 노래 제목들과 정감 있게 어울린다. 강산에는 8집 발매를 기념해 4월2~20일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번 공연에는 윤도현, 김C, 강채이, 하찌와 TJ, 이상은 등이 지원군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관람료 3만5천 원, ☎ 1544-1555
(연합뉴스)배우 겸 가수 비(본명 정지훈ㆍ26)가 출연한 삼성 애니콜의 올림픽 테마송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2008 베이징올림픽 공식 후원사인 삼성전자는 21일 베이징올림픽의 성화봉송 주자를 발표하는 행사에서 '도전과 꿈의 실현'이라는 주제로 춤을 통해 꿈을 이뤄가는 비의 모습이 담긴 뮤직비디오 '애니드림'을 선보였다. 비는 블록버스터급 영상을 자랑하는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안무 제작에 직접 참여했고, 실력파 비보이들과 함께 댄스 배틀을 벌이며 강렬하고 섹시한 매력을 발산했다. 특히 할리우드 액션영화 '닌자 어새신(Ninja Assassin)' 촬영을 위해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가 빛을 발했다고 한다. 비의 3집 타이틀곡 '잇츠 레이닝(It's Raining)'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장재혁 감독이 연출을 맡은 뮤직비디오는 5월4일부터 97일 동안 올림픽 성화봉송과 올림픽 기간에 홍보용으로 적극 활용될 예정이다. 15초 분량의 광고로 제작돼 4월 초 중국과 홍콩 전역에 전파를 탄다. ] 비는 '닌자 어새신' 촬영을 마친 후 올림픽 관련 행사를 위해 8월 중순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 이수만 회장이 미국 MIT 경영대학원(MIT Sloan School of Management) MBA 학생 22명을 대상으로 24일 SM 본사에서 한류 특강을 했다. 이들의 방문은 이 회장에게서 아시아 대중문화를 이끌어나가는 한국 연예 비즈니스 산업의 성공 노하우와 한류의 글로벌 전략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으로 이뤄졌다. 이날 이 회장은 CT(Culture Technology)가 기반이 된 SM의 발전된 한류 전략과 '최대 시장이 있는 곳에서 최고의 스타가 탄생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중국 시장 발전 가능성 및 향후 아시아 대중문화의 영향력 확대 등을 설명해 박수를 받았다. 학생들은 한국의 CT 전략이 미국ㆍ유럽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아시아에서 사랑받는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지적재산권 관리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강의에 참석한 MIT 학생 멜리사 에드워드 씨는 "강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며 "한류의 글로벌 전략과 CT에 대해 많은 걸 배웠고, 한류 문화에도 흥미를 느꼈다"는 소감을 밝혔다. 강의에는 연기자 이연희와 그룹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멤버들이 참석했다. 이 회장은 2006년과 2007년 하버드대 MBA 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한 바 있다.
(런던=연합뉴스) 영국의 팝그룹 비틀스의 음반회사 애플을 경영하며 '비틀스의 다섯 번째 멤버'로 불렸던 닐 아스피날이 66세로 사망했다. 런던 소재 애플사는 24일 성명을 통해 아스피날이 짧게 병을 앓다가 뉴욕의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42년 웨일스에서 태어난 아스피날은 비틀스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함께 리버풀의 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두 사람이 비틀스를 결성했을 때 로드 매니저가 됐다. 그는 1968년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만 한다는 조건으로 애플의 매니저가 됐지만, 작년에야 애플의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언론을 기피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는 비틀스의 음악, 이미지,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는 애플 컴퓨터와 애플 레코드 간 상표권 분쟁, 비틀스와 음반회사 EMI 간 로열티 분쟁을 이끌었다. 비틀스 멤버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 해리슨의 아내 올리비아 해리슨은 공동 성명을 통해 "충실한 친구이자 최고경영자로서 닐의 믿음직한 역할은 미래 세대까지 미치는 원대한 유산을 남겼다"고 애도를 표했다. 유족으로 아내와 자녀 5명이 있다.
(연합뉴스) 제이슨 므라즈(Jason Mrazㆍ31)는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가장 사랑받는 팝 가수 중의 한 명이다.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세태를 반영하듯 므라즈의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포크와 록은 물론 힙합, 컨트리, 보사노바까지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오간다.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달콤하면서도 세련된 멜로디 감각으로 이런 다양한 장르를 잘 녹여 버무린다. 여기에 귀여운 외모까지 더해져 그의 공연장에는 젊은 여성 팬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006년 펜타포트록페스티벌 때 한국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이용해 관객과 스태프의 사진을 찍어 나눠주는 등 발랄한 무대 매너로 사랑받았다. 그는 28일 오후 8시 서울 광장동 멜론악스에서 열리는 첫 단독 내한공연을 앞두고 연합뉴스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작곡 때마다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면서 "내 음악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기분 좋게 만들며 웃음을 이끌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 버지니아 출신인 그는 다양한 장르를 녹여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달콤하면서도 신나는 이런 '제이슨 므라즈'표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때로는 다른 장르의 비트를 파격적으로 사용해 완성된 테마를 바꾸기도 해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나에게는 복잡한 것이 아니지요. 나는 생생하면서도 긍정적인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음악적 지향점에 대해서는 "모든 곡에는 인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곡이 가볍게 들리거나 장난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람들이 웃고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99년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는 단 두 장의 정규음반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2002년 '웨이팅 포 마이 로키츠 투 컴(Waiting For My Rockets To Come)'을 선보인 후 2005년 2집 'Mr.A-Z'로 본격적인 인기를 모았다. 2집에서는 '라이프 이스 원더풀(Life Is Wonderful)' '워드플레이(Wordplay)' '그리크 인 더 핑크(Greek In The Pink)' 등의 여러 히트곡을 쏟아냈으며, 올해는 3집 음반을 발표할 예정이다. "새 음반은 거의 준비됐어요. 함께 따라 부를 수 있고 춤출 만한 곡을 담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음반 제목을 '위 싱. 위 댄스. 위 스틸 싱스.(We Sing. We Dance. We Steal Things.)'로 달았죠. 다만 한국 공연에서는 신작 중 어떤 곡을 부를지 정하지 않았어요. 관객 반응에 따라 즉흥적으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거든요. 이번 공연은 2006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에너지와 흥겨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2집으로 대성공을 거둔 그는 승승장구하며 팝계에서 입지를 다져간다. 2005~2006년에는 전설적인 그룹 롤링 스톤스의 투어에서 무려 5차례나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투어의 최고 순간은 제 어머니를 모셔와 공연을 관람하게 한 후 롤링 스톤스를 만나게 해 드린 때인 것 같아요. 제 어머니는 대학 시절부터 롤링 스톤스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 셈이죠."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음악 동료로 밥 슈나이더와 콜비 카레이를 꼽았다. 슈나이더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가장 재능 있는 송라이터"라고 말했고, 카레이에겐 "신선하고 겸손한 아티스트이며, 내가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벨 & 세바스찬"이라며 "그들은 내가 곡 작업을 즐길 수 있도록 항상 자극한다"고 덧붙였다. 음악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글쓰기와 사진 촬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온라인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아는 사람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음악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면서 "조만간 폴라로이드 사진집을 출간할 생각이다. 서핑과 요가도 즐긴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전제한 후 "서울은 아시아 도시들 중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이며, 북위 37도35분, 동경 127도3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정도는 안다"고 익살스럽게 설명했다. 이어 "내한 때 한국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들어보고 싶다"면서 "박물관을 가 보거나 서울의 아름다운 공원에 들를 기회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개그가 저희에게 고향이라면 노래는 도전의 의미입니다." 개그 그룹 나몰라패밀리가 세 번째 음반을 발매하고 다시 외도(?) 중이다. 2006년 세 곡이 수록된 싱글 1집을 발매하고 개그 외의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들은 지난해 12곡을 담은 정규 1집을 냈고, 이번에 다시 세 곡을 녹음한 싱글 2집을 발매했다. 10일 각종 음악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 '너만 볼래'는 싸이월드에서 1위에 랭크되는 등 반응이 좋다. "사실 저희 노래 실력이 좋지는 않아요.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배워가고 있는 중이구요.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게 좋고 개그 외에 노래라는 또다른 매개체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들의 말처럼 나몰라패밀리는 가창력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김태환, 김경욱, 김재우는 랩을 하고 곡마다 객원으로 여자 가수를 섭외해 노래를 완성한다. 한마디로 래퍼다. 이들은 랩을 위해 7~8개월씩 연습한다고 밝혔다. 김재우는 "사실 저희가 노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래 듣는 것만 좋아하다 싱글 음반을 내보겠냐는 제의를 받고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해 도전했다. 처음엔 잘 안돼서 두 번째 음반은 안 내려고 했는데 그게 반응이 좋아 여기까지 오게됐다"며 웃었다. 김태환은 "음반을 낸 우리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개그맨의 음악도 좋다는 인식이 퍼졌으면 좋겠고 개그맨도 진지하고 좋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얼결에 시작했지만 어느새 자신들의 이름으로 18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웬만한 가수 부럽지 않다. 또 음반 판매가 아닌 모바일 내려받기 횟수가 노래 인기의 척도인 요즘 이들의 노래는 지금까지 총 30만 건의 내려받기를 기록했고, 1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경욱은 "우리 음악의 특징은 편하고 부담없이 따라부를 수 있다는 점"이라면서 "얼마 전에 일본에 갔더니 그곳 가라오케에도 우리 노래가 있어 기분이 좋았다"며 싱긋 웃었다. "저희의 본업은 개그입니다. 노래 역시 완벽한 개그 공연을 위해 하는 것이구요. 지난해 음반 홍보를 위해 급조해서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역시 실패했어요. 개그는 거짓말하지 않거든요. 개그가 저희에게 하나의 커다란 본질이라면, 노래는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저희가 가수보다 잘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제 이름, 원래 안희성이었어요. 왜 안칠현(安七炫)이 된지 아세요?" 입대 열흘 전 만난 강타(본명 안칠현ㆍ29)는 되레 질문을 던졌다. 우리 나이로 서른 살, 1996년 그룹 H.O.T로 데뷔해 스타생활 12년. 팬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딱딱한 군화에 익숙함을 느끼기 전, 긴장과 여유가 교차하는 시간이어서일까. "저, 이런 얘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강타는 스타가 되고도 개그 소재로 놀림받았던 이름 얘기로 소박한 독백을 시작했다. 입대로 인한 2년간의 쉼표 전, 짧은 메모를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를 터다. "누나(33), 형(32), 저 삼남매인데 제 위에 또 다른 형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서울 올라와서 힘들게 장사하시다 자연유산을 하셨죠. 이후 절 가졌는데 잃은 형에 대한 죄책감에 무척 잘해주셨대요. 아버지가 시골에 안희성이란 이름을 받으러 간 사이, 한 작명가 할아버지가 돈을 안 받더라도 제 이름을 짓겠다고 하시더래요." 그렇게 얻은 이름, 안칠현. '일곱 칠(七)'에 '불꽃 현(炫)'으로 남들이 우러러볼 성공을 일곱 번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싸움도 참 많이 했다. 다행인 건 이 이름이 중국에선 '안치셴'으로 불리는데 한국으로 치면 '준' '혁' '민' 등 멋진 남자 이름이라는 것. 강타의 얘기는 30년을 두루 훑기 시작했다. 페달을 가열차게 밟자 가속도가 붙었다. 서울 뚝섬에서 태어난 강타의 본적은 경북 예천군 보문면. 부모님은 이 지역 이웃마을 출신이다. 강타가 두세 살 때 산 적도 있지만 기억나진 않는다. 부모님이 옷가게를 하던 강동구 길동에서 오래 살았고 이후 옷가게로 성공한 아버지가 건축업과 공인중개업을 시작, 데뷔 5~6년 전 송파구 오금동으로 이사했다. "송파구에는 '끼'있는 애들이 정말 많았어요. 이 지역 출신 연예인으론 문희준, 이재원, MC몽, 전진 등이 있죠. 이곳 아이들은 서로 춤과 노래 배틀을 벌이며 문화를 형성했어요. 때론 불량학생도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 친형 덕택에 건스 앤 로지즈, 메탈리카, 메가데스 등 록음악을 접했고 팝만이 음악인 줄 알았다. 이후 흑인 음악을 들으며 힙합, 랩 다음엔 춤에도 관심을 가졌다. 친구들과 카세트덱을 들고 롯데월드 인근과 거리를 쏘다니며 춤 배틀을 벌였다. 이즈음 기타 학원에 다니면서 곡을 쓰고 싶었다. 이때만 해도 중학생이 음악과 춤에 빠져 가수의 꿈을 키우는 건 어른들의 시선에 위태로운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캐스팅 매니저로부터 명함을 받았다. 처음 공개하지만 베이비복스를 배출한 DR뮤직을 찾아간 적도 있다. 명함 받은 지 두세 달 후 SM을 방문했고 연습생이 됐다. "(가수 겸 작곡가) 유영진 형이 제 노래를 듣고 이수만 선생님이 얼굴을 보셨죠. 제가 사납고 불성실해 보여서 고민하셨대요. 장우혁, 토니안, 이재원은 단번에 캐스팅됐는데(웃음). 1년간 연습생으로 춤과 노래 연습을 했고 영진이 형 스케줄 백댄서도 했어요. 한번은 영진이 형 차 뒷좌석에서 포 이그잼플의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다시 불러보라고 하셨죠. 그 길로 연습생에서 H.O.T 멤버로 전격 발탁됐어요." H.O.T 데뷔 반년 전인 고2 때, 마지막 멤버로 전속 계약이 성사됐다. 처음엔 강타의 진로에 아버지가 반기를 들었다. 음악을 하면 배고플 것이란 선입견에다 성인이 된 후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남들 집안처럼 엄청난 반대는 안 하셨어요. 부모님은 평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단지 못 도와준다. 원하는 대로 강요하지 않을 테니 네 인생은 알아서 살라'는 지론이셨죠." 사실 부모의 꼿꼿한 교육 철학으로 인해 강타의 사회 경험은 무척 일렀다. 고1 때까지 하루 용돈이 100원, 한 달에 3천 원이 전부. 중2부터 고1까지 신문과 우유ㆍ중국집ㆍ치킨집 배달, 전단지 배포, 공사장 일용직 등 별별 아르바이트를 거쳤다.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새벽 일을 한 적도 있어요. 각지에서 해산물이 올라오면 경매를 벌이는데 낙찰된 아줌마 가게에 생선을 날라주는 거였죠. 비린내도 심했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고1 겨울방학 때 많게는 아르바이트로 120만 원까지 벌어본 적도 있어요." 부모 원망도 했을 법. 오히려 새벽 3~4시에 귀가해도 '패스'되는 자신을 친구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은 왜 내게 무관심할까'가 아니라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체격도 크고 남자다우신 아버지는 흡연, 음주에 대해서도 사고가 개방적이셨어요. 싸움을 해도 좋지만 모두 어릴 때 겪으라셨죠. 그래야 성인이 돼서 안 한다고요. 그러나 어렸을 때 배운 도둑질은 커서도 한다며 남의 물건에만 손대지 말라셨어요." 그러나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오해로 부모의 가슴을 멍들게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연예계에서 건실한 스타로 소문난 강타이기에 갑절로 솔직하게 다가온 이야기. 한마디로 오토바이 절도 사건인데 어린시절 남자들 사이의 의리를 지키다가 벌어진 일이다. 강타의 친한 친구 A가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훔쳤는데, 그 지역 불량학생 B가 경찰에 걸리면 책임질 테니 타겠다며 뺏어갔던 것. 그런데 B에게서 한 바퀴만 빌려탄 강타가 경찰에 딱 걸리고 말았다. "파출소 분들이 모두 저를 알았어요. B와 저를 보면서 '평생 콩밥이야'라고 하셨죠. B는 오토바이를 훔친 제 친구 A의 이름을 대겠다고 하길래 의리상 제가 뒤집어쓰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파손돼 특수절도가 적용된다길래 어머니는 울고불고 난리가 나셨죠. 유치장에 열흘 있고 고등학교도 정학당했어요. 다행히 경찰이 정황이 안 맞는다며 제가 훔친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서야 사건이 끝났죠.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던 아버지의 철칙을 본의 아니게 어긴 셈이 됐죠." 강타는 유년기, 청소년기를 돌고 돌아 2001년 해체된 H.O.T 시절의 에피소드를 다시 꺼냈다. 금방 스타가 될 줄 알았다는 것, 데뷔 전 목표가 '가요 톱 10' 10위권이었는데 음반 나온 지 3주 만에 '전사의 후예'로 이 꿈을 이뤘다는 것, 그러나 한 달 만에 '전사의 후예'가 사이프러스 힐의 노래와 표절 시비가 일어 활동을 접었고 2주 만에 '캔디'로 나와 1등을 차지했다는 것 등. 신체검사 2등급을 받아 4월1일 현역으로 입대해 제대할 시점은 2010년 4월. 31살이 된다. 결혼과 일 모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나이다. 1년반 전 군입대로 고민하다 여자친구와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했다. "그 친구와는 라이프 스타일이 잘 맞아서 결혼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TV만 대여섯 시간 틀어놓아도 웃고 떠들며 잘 맞는 친구지요. 놀 때는 놀고 일할 때는 일하는 스타일도 같았고요. 제대 후에는 더 철이 들겠죠. 활동 중 저의 공백기를 안정적으로 채워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SM의 대주주답게 중국 시장에 대한 사업적인 마인드도 풀어놓는다. 올해 베이징 올림픽 이후 열릴 중국 시장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것. 후배들이 편하게 활동할 여건을 마련하겠다고도 한다. "군 미필자는 외국 스케줄을 소화할 때마다 절차가 복잡해요. 제대하면 아무 때나 나갈 수 있으니 참 좋아요. 군 복무를 마치고 그 시장(중국)에 다시 뛰어들 겁니다." 강타는 입대를 3주가량 남기고 3년 만의 정규 음반인 '이터니티(Eternity)-영원(永遠)'을 발표했다. 타이틀곡은 자작곡인 '어느 날 가슴이 말했다'. 오늘, 강타는 가슴으로 말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뒷모습으로 자리를 떴다.
(연합뉴스) 맘보 음악의 개척자이자 쿠바의 전설적인 베이스 연주가인 이스라엘 카차오 로페스가 22일 타계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89세. 카차오는 이날 미 플로리다주 코럴 게이블스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고 넬슨 알바레다 대변인이 발표했다. 카차오는 지난해 9월 트롬본 연주가 게레스토 지멘츠가 사망하자 추모공연을 가지는 등 80대 후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하다 지난주에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입원했었다. 1918년 아바나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카차오는 고전적 기법으로 베이스 연주를 배웠고, 10대에 이미 아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시작했다. 30여년간 아바나필과 함께 일하면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빌라 로보스 등 세계적 지휘자들과 화음을 맞추기도 했던 그는 1960년대에 스페인을 거쳐 뉴욕으로 건너갔으며 1980년대에 마이애미에 정착했다. 카차오는 같은 쿠바 출신의 연기파 배우 앤디 가르시아가 1993년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멘터리 '카차오:누구도 따를 수 없는 리듬'을 만든 것을 계기로 일약 세계적인 명사로 떠올랐다. 같은 해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있었던 그의 공연은 매진사례를 기록했으며, 이듬해 발매된 앨범 `마스터 세션스, 볼륨 1'과 2004년의 앨범 `맘보'는 잇따라 그래미상을 안겨줬다. 카차오는 쿠바에서 활동할 때에는 현지 전통음악 `손'(son)이 기저에 흐르는 수백여 개의 관현악곡을 만들었다. 특히 만능 연주가로 활동하다 먼저 작고한 동생 오레스테스 로페즈와는 1930년대에 맘보라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던재즈의 하모니와 주법에 쿠바 특유의 리듬을 가미시킨 맘보는 야성미 넘치는 강렬한 음색과 신선한 음향, 시원스런 리듬을 기반으로 멕시코와 미국을 거쳐 세계적 인 선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살사'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형제는 기존 음악에 뭔가 새로운 것을 보태려다 `단존(danzon) 맘보'라는 장르를 선보였다"면서 "당시 우리 음악에는 그런 식의 풍성함이 필요했다"고 회고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의 전설적인 록밴드 '엑스재팬(X-JAPAN)'의 리더 요시키(YOSHIKI)가 22일 개막한 일본 최고 전통의 춘계 고교야구 고시엔대회(제80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요시키가 졸업한 지바현 아와(安房)고교의 첫 경기가 열린 이날 열렬한 야구팬이자 남다른 모교 사랑으로 알려진 요시키가 관중석에서 응원한다는 사실이 일찌감치 보도됐으나, 고시엔 구장에 팬들이 몰려들어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고교야구연맹으로부터 "현 경비체제로는 대응할 수 없으니 참석을 삼가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교 응원을 위해 21일 미국에서 귀국해 고시엔까지 헬리콥터를 빌리는 등 만전의 준비를 했던 요시키는 "팬들이 부상하거나 후배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며 포기하고, 대신 28일부터 열리는 엑스재팬 도쿄돔 부활 공연의 리허설에 전력을 기울였다. "개교 100년이 지나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아와고교의 경기를 졸업생으로서 꼭 응원하고 싶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은 요시키는 첫 경기에서 모교가 구마모토현의 조호쿠(城北)고교를 2-0으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요시키는 모교의 응원 비용으로 1천만 엔을 기부했으며, 재학생과 지역주민 등 5천 명이 열띤 응원을 펼쳤다. 특히 모교의 취주악대는 엑스재팬의 히트곡 '홍(紅)'을 연주하는 등 요시키를 대신해 힘찬 연주로 선수들의 투지를 붇돋웠다. 일본에는 4천 개가 넘는 고교야구 팀이 있으며 치열한 지역별 예선을 펼쳐 36개 팀만이 고시엔 구장을 밟을 수 있다. 숱한 스타 선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배출됐으며 야구 팬뿐 아니라 전 국민이 열광하는 전통이자 문화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