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홍, 오산서 독립만세운동 실행 결심 유진홍은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이었다.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정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당시 성호면)의 세교동 출신이다. 유진홍은 오산에서도 이와 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규합되자 의거 실행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했다. ■ 최초 독립만세운동 일경 감시 무산 오산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최초 독립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경의 경계로 거사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3월 25일과 26일 오산리의 독립만세운동이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됐다. 이때 일경이 총을 발사 3명의 총상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또 이튿날 2건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이 경계를 강화했다. ■ 3월 29일 낮, 오산장날 독립만세운동 시작 이날은 오산장날이었다. 음력으로는 2월 28일로서 당시는 음력에 장이 섰다. 이날 성호면 오산리에서는 민가 13채가 파괴되고, 일본병이 출동해 2명이 붙잡혀 가고 일본병의 발포로 약간명의 부상이 있었다. 이 거사가 일어나기 전후 5차례에 걸쳐서 비밀회합을 갖고 장날인 29일에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한 날 아침 모임이다.
행동대장격인 이성구가 먼저 말문을 연다. 안낙순 형님부터 말씀하시지요. 세마대쪽 인원은 얼마쯤 모이기로 했는지요. 그리고 공칠보 형님이 맡으신 부처내 쪽도 이야기하시지요. 5~600명은 모여야 거사가 어울릴 듯한데요 8명이 제각기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참가할 예상 인원을 체크 하니 계획된 숫자는 훨씬 넘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할 일이 더 무겁군요. 제가 이규선, 정규환 동지와 전위대로 앞장서서 안낙순, 유진홍 형님을 선두로 모시겠습니다. 김용준, 공칠보 형님들은 나이가 드셨으니 중간에 서시고, 다음 두 분은 맨 뒤에서 시위 군중을 북돋아 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이론이 없다. 이성구의 대견한 제의에 행동으로 옮길 차비를 한다.
이날 정오께 오산장의 우시장은 흰옷을 입은 백의군상으로 빽빽하게 찼다. 소시장이야 큰 규모는 아니나 오산 우시장의 시세가 수원 우시장에서의 소 가격을 결정할 정도로 경기 남부의 중요한 시장이다. 오후 3시쯤 오산장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을 유진홍과 안낙순 등이 태극기를 나눠주고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5시경에는 시위대가 우시장에서 출발해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원래 성호면은 반농반상(半農半商) 지역이어서 일경들은 방심했다. 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위가 일어나니, 일경들은 당황해 필사적으로 시위행진을 저지했다. 이 오산지역은 함부로 총을 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신문지국이 개설돼있다. 기자들도 상주하고 있고, 교회가 일찍 들어와 선교사도 많이 상주하는 곳이다. 오산경찰주재소 현장에 있던 순사 오오키가 해산을 요구하자, 유진홍과 안낙순 등의 시위대가 이에 불응하고 만세소리를 더욱 높였다. 오오키가 유진홍, 안낙순을 주재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해산하라고 권고하는데 왜 듣지 않소 우리 길을 우리가 걷겠다는데 무례하게 총을 들이대며 막느냐 그것은 당신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폭동을 일으키니 그런 거 아니요 우리가 자주독립을 달라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행위이다. 합방 합방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일방적으로 한 것이니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안낙순, 유진홍 두 명의 눈에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일경 3명이 면상을 갈기더니 매질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끌려간 지 십여 분이 지나도 풀려나지 않자 바깥에서는 아우성이다. 이젠 만세 시위가 사람을 내어놓으라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이성구, 김경도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 함성에 오오키가 두 사람을 내어줄 터이니 시위를 중지하시오 이윽고 두 사람이 풀려났다. 그런데 다리를 절고 눈언저리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시위 대열 중의 누군가가 우리 형님들이 왜경에게 얻어맞았다 이때 여기저기서 주재소를 쳐부수자는 소리가 아우성쳤다. 사태가 돌변하자, 이성구가 만류했다. 참으시오! 오늘 저녁이 있소 흥분한 군중들은 저놈들을 혼 내줘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왜놈들을 욕한다. 다시 시위 지도부는 오늘 저녁에 벌일 만세운동계획을 짜는데 몰입했다. ■ 3월 29일 해질무렵,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으로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홍 등이 다시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대를 해산하려는 면장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유종열에게 면장은 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는가?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니 죽여라 하며 투석전을 했다. 이날 저녁 7시 30분경.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고, 면사무소를 투석으로 파괴한 다음 다시 우편소로 몰려가 일본 군경과의 통신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화기를 부셨다.
일찍부터 성호면에는 일본상인과 이민자들이 들어와 평소에 오산사람들과 감정이 대립하고 있었다. 면민들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이어 일본인 가옥 11채를 파괴했다. 또한 주재소에 투석을 한 뒤 오산역으로 몰려가 역을 습격 파괴하자, 일경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했다.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됐다. 오산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앞에서의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서 당연한 우리의 주권을 공표한 것이다. 오산지역에서 거주지를 확장하는 왜인들의 지배력을 부인하는 실력행사였다. ■ 일제, 주모자들에 징역형 선고 오산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의 경성지방법원은 징역 6월에서 1년 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이성구(李成九, 수원군 일형면, 25세, 징역 1년 8월.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이규선(李圭璇, 진위군 북면, 25세, 징역 1년 8월. 2006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김경도(金敬道, 성호면 오산리, 34세, 징역 1년 6월. 201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정규환(鄭奎煥, 성호면 오산리, 25세, 징역 1년. 199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안낙순(安樂淳, 성호면 세교리, 44세, 궐석, 징역 6월.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김용준(金用俊, 성호면 금암리, 38세, 궐석, 징역 6월.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 유진홍(兪鎭弘, 성호면 세교리, 34세, 궐석,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공칠보(孔七甫, 성호면 궐리, 36세, 태 90. 1995년 대통령표창) 의사들이다. 오산의 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도교도들의 시작으로 시작됐고 이후에는 오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돼 오산주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이었다. 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했다. 남경식 오산학연구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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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2019-04-04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