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0. 나라의 말글을 지킨 한결 김윤경

나는 일생을 통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어 본 적이 세 번 있었는데, 그 첫번은 31운동 때 탑골공원 앞에서요, 둘째 번은 815해방 때 일본의 천왕이 무조건 항복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되던 방송을 듣던 종로 어느 라디오 상점 앞에서요, 그 셋째 번은 4월 혁명의 날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였다. 한결 김윤경(金允經, 1894~1969)은 광주군 오포면 고산리에서 김정민과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봄에 기독교로 개종한 부친 김정민은 이제까지 한학을 익히던 14세의 맏아들에게 신학문을 배우라며 서울의 우산학교에 입학시켰다. 의법학교로 옮겨 고등과를 수료한 김윤경은 자신의 관심과 소질이 자연과학에 있음을 알고 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10년에 김윤경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상동 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청년학원은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와 함께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상동교회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들인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이회영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김윤경은 청년학원에서 도산 안창호와 한힌샘 주시경이라는 두 스승을 만났다. 청년학원의 교사 주시경의 국어 문법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그는 수학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913년 청년학원을 졸업한 20세의 김윤경은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 역사, 수학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 이윤재를 만났다. ■ 31운동은 국어학 연구의 사상적 기반 데라우치 총독의 야만적인 공포정치는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 김윤경에게 견딜 수 없는 심적 고통을 안겨 주었다. 1917년 김윤경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더 배우기 위해 교사를 그만두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조선 학생들의 친목과 단결을 위해 서울에서 조직한 조선학생대회의 회장을 맡아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그는 31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한 후 경찰의 추적을 피해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이듬해 복학했다. 김윤경에게 31운동은 국어학 연구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동아조선중앙 세 일간지의 발행을 허가해 주고, 부분적으로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인가해 주었다. 1921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윤경은 이듬해부터 배화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여 학교로부터 3년 동안 동경 유학비를 지원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가족들을 고향 광주로 내려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간 김윤경은 릿쿄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동양의 역사를 공부하며 한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조선 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다. 배화여학교의 교사로 복직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졸업논문을 다듬고 보완하여 국문학 분야의 4대 명저로 꼽히는 조선문자 급 어학사를 펴냈다. ■ 수양동우회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8년 옥살이 도산 안창호는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정신과 덕, 체, 지의 수양으로 실력을 길러 조국의 부흥과 독립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흥사단을 만들었다. 김윤경은 1922년 2월 서울에서 흥사단 지부로 수양동우회를 결성할 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수양동우회의 활동을 주목하며 탄압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제는 1937년 6월 경성기독교청년회에서 발송한 멸망에 빠진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유인물을 압수하면서 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김윤경은 6월 6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일제는 동우회의 핵심인 그에게 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양심적인 일본인을 포함한 변호사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1941년 11월 서울고등법원 상고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세 사람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혹한 고문으로 상한 몸을 추스르며 지내던 김윤경은 1942년 4월에 성신가정여학교(성신여고)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해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윤경은 또 다시 투옥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는 한글날을 제정하고 한글 보급 운동을 열렬히 펼쳐나갔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하고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여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1938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이처럼 엄혹한 상황에서 한글을 지키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활동은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던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1942년 10월 1일 서울 조선어학회 회관을 급습한 일경은 김윤경을 비롯하여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한징, 이중화, 이석린, 최승호 등 11인을 체포하여 함흥과 홍원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학회 관계자 대부분이 구속되었다. 김윤경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옥중에서 당한 고문과 폭행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악한 것이었다. 고문을 받다가 한쪽 청각을 잃기까지 했지만 김윤경은 고문하는 경찰에게 늘 당당했다. 고문을 받을 때 그가 하는 말은 이 한 마디였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이처럼 크구나! 김윤경은 생지옥 같은 감옥 안에서 동지들에게 깊이 존경을 받았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변기 옆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 식사와 잠자리도 변기 옆에서 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김윤경은 평생의 외우 이윤재가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충격과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동지 한징도 옥사했다. 김윤경은 운 좋게 살아남아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넉 달 전에 이미 별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김윤경은 눈물을 감추고 이윤재의 집을 찾아가 벗의 노모에게 이 선생은 건강하게 잘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9년 동안 실직 상태여서 그의 가족들의 고통도 말 할 수 없이 컸다. ■ 31정신으로 돌아가자 1945년 8월 간악한 일제가 물러갔다. 8월 25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병제, 김윤경 등 6명을 상무간사로 선출하고 초등과 중등교과서 편찬, 국어교원 양성, 월간지 한글 속간, 국어사전 편찬 완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해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김윤경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신생 조국에 필요한 저술에 힘을 쏟아 1948년에 나라말본과 중등말본을 펴냈다. 김윤경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31정신은 우리 역사상 기적같이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부활의 정신이며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으나 이 31정신으로 나라를 되찾았으니 나라의 부강도 31정신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크게 실망한 김윤경은 1960년 4월 학생들에게 31정신을 역설했다. 삼일정신은 자유가 목숨보다 귀함을 깨닫게 한 사상이다. 독립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다. 통일의 정신이다. 굳은 신의의 정신이다. 굳은 단결의 정신이다. 희생되기를 사양하지 않는 정신이다. 용기의 정신이다. 이 일곱 가지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지켜야할 정신이다. 일곱 가지 고귀한 정신의 부활이 없이는 이 나라 이 민족의 번영의 길은 고사하고 멸망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1960년 419 때 교수대표단으로 참석하여 조사를 받았고,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서대문형무소에 15일간 구치되었다. 1965년 정부가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이를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고 일제 치하에서 벌어졌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한결 김윤경의 한결같은 삶을 시인 박두진은 이렇게 노래했다. 고집 질투 악의 비열 늙어갈수록 마음 둘러 추해지는 그런 틈에서 양의 탈을 쓴 인두겁 그런 틈에서 언제 뵈어도 하루같은 훈훈한 바람 언제 뵈어도 티없는 하늘 양심 드맑어 그냥 일월 그냥 인간 그냥 깨끗한 저절로인 이러한 스승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복인가. 김산(홍재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9. 임시정부의 숨은 살림꾼 일파(一波) 엄항섭

■여주에서 태어난 일파 엄항섭3ㆍ1 운동 목격 후 독립운동 투신 결심 일파(一波) 엄항섭(1898~1962)은 여주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엄주완은 승지를 지냈다. 일파는 1919년 3ㆍ1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이었다. 그는 이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족적으로 일어난 3ㆍ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곧바로 상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해 법무부 참사로 활동한다. 그때가 22살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활동을 그만두고 항주에 소재하고 있는 지강(芝江)대학에 입학한다. 지강대학에서 그는 중국어, 영어, 불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급엘리트로 재탄생한다. 나중에 외국어는 일파가 임시정부의 각종 일을 처리하는데 커다란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지장대학을 졸업(1922) 후 일파는 다시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온다. 돌아와 보니 임시정부는 2~3년 전의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겨우 백범 김구와 석오 이동녕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만이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임시정부 청사 집세도 못 낼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처지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구와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조차 제때 먹지 못할 정도로 옹색했으니 그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일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통역원이자 형사로 취직(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엄항섭에 관한 제문제)한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항섭군은 뜻있는 청년으로 지강대학 중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했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해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이었다. ■백범의 그림자로서 임시정부에 공헌 엄항섭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는 와해했을지도 몰랐다고 혹자는 말한다. 임시정부에 대한 엄항섭의 공이 그만큼 지대했다는 얘기다. 엄항섭의 부인 연미당(1908~1981) 역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는 숨은 조력자였다. 1927년 3월 20일 두 사람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임시정부 부부 일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연미당은 독립운동가 연병환(1878~1926)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이며 독립운동가 엄기선(1929~2002)의 어머니이다. 독립운동가의 딸은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닮아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고, 독립운동가 손녀 역시 독립운동가 어머니를 보고 그렇게 또 독립운동가로 컸다.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를 낳았고, 독립정신은 독립정신으로 이어졌다. 엄항섭은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이래 서거할 때까지 백범의 그림자였으며,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일제의 간계를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영문 성명서로 발표도 하고 중국어로 상해의 여러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리기도(한민, 一波, 윤봉길 열사의 白川 炸殺案 진상) 한다.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사업과 관련해 백범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 작성, 통역, 대외 홍보활동,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사작성과 번역 등 엄항섭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임시정부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순식간에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자유자재로 이에 대처해(일파, 한민, 蘇日中立條約에 대한 감상) 약소민족은 어떻게 하면 자유를 얻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는지를 설파하기도 한다.(엄항섭, 한민, 국제정세의 변화와 약소민족이 가져야 할 각오) 또한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 연합군에 결의문을 발송한 소식, 중국군 당국과 광복군이 협의한 내용, 해외 거주 한국인의 문제(이상 1944년 6월 24일 중경에서 LA로 보낸 전보), 3ㆍ1운동 24주년을 맞아 그 의미 및 정신을 미주 각국 동포에게 전해달라는 내용(1942년 신한민보에 보낸 전보) 등을 숨 가쁘게 전한다. 해방 후에는 환국해 김구가 중국어로 쓴 도왜실기(屠倭實記)를 번역(김구선생혈투사, 국제문화협회, 1947)해 출판하기도 한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 이후 상해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 총영사는 통역원으로 일하는 엄항섭을 체포하기 위해 프랑스 총영사에게 엄항섭 체포영장을 교부해 줄 것을 몇 번이고 요청한다. 그러나 프랑스 총영사는 엄항섭은 중국에 귀화한 엄경민이라고 말하며 체포영장 교부를 거절(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엄항섭에 관한 제문제)한다. 엄항섭은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국적도 중국 국적으로 위장해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숨은 일꾼에게 위장 전술은 필수였다. 그 덕분에 상해 임시정부는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 뒤에도 일제의 물샐틈없는 정보망을 피하며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으리라. 이후 일제가 엄청난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를 체포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엄항섭은 김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윤봉길ㆍ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크게 감동한 장개석을 만나러 갈 때도 그는 곁에서 보이지 않게 수행하며 보좌했다. 김구가 국무령이 되어 임시정부를 활성화하려 할 때도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김구의 의도를 간파하고 단일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로 개정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27년간 임시정부 청사를 7번 옮기면서 수천 킬로를 이동할 때도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했다. ■납북 이후 잊힌 독립운동가 중경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된 이후 임시정부 직할 군대가 마침내 창설된 것이다. 엄항섭은 광복군 발족을 위한 전례식의 제반 준비와 행사 실무를 맡아 추진했다. 또 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사실과 광복군은 결코 어느 한 정당, 어느 한 단체의 군대가 아니고 한국의 국군임을 한민이나 신한민보 등의 기고를 통해 알린다. 광복군이 국내 진공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던 중 느닷없이 광복이 되었다.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엄항섭과 백범 김구 등 임정요원 제1진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원이 아니라 각각 한 사람의 시민자격으로 환국(환국 성명서)한다. 독립운동의 대장정을 마치고 완전히 자주 독립할 통일된 신민주 국가 건설을 꿈꾸면서 그토록 그립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백범 김구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1949)하고 만다. 청천벽력이었다. 엄항섭은 추도사에서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는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웠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 합니다. 목자(牧者)를 잃은 엄항섭은 백범 김구 선생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추도사) 하고 울분을 토한다. 엄항섭은 6ㆍ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납북됐다. 중국 북간도에서 독립운동가의 딸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살았던 연미당은 조국에는 진정 삶의 터전이 없었다. 연미당은 미군 군복 빨래 일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다 별세했고, 장녀 엄기선은 전쟁미망인을 돌보는 루시 모자원을 운영하다 사망했다.(엄기남, kbs 독립투사 연미당) 엄항섭은 납북된 후에도 통일을 위해 진력하다(한시준) 1962년 7월 끝내 운명하고야 말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수난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연구는 물론 조명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여주 엄항섭의 집터 또한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아직도 텅 비어 있다. 독립운동가의 생가터 라기보다는 납북자의 집터였기 때문은 아닐까. 엄항섭은 조국 독립의 횃불을 밝히기 위해 역사의 부름에 응했다. 그는 월급을 쪼개가며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챙겼고,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탁월한 문장력, 국제정세를 읽는 통찰력을 발휘하면서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역사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만의 역사가 될 수 없다. 굴곡진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수많은 민초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그 손길은 일파(一波)가 되고 만파(萬波)를 일으켜 역사의 격랑을 거세게 헤쳐나간다. 권행완 정치학 박사(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8. 청년 원태우,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다

■ 을사늑약, 일제가 대한을 삼키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역사가 정교는 대한계년사에 그날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17일 이른 아침, 5강[한강동작진마포서강양화진] 각처에 주둔하였던 일본병이 모두 경성으로 들어왔다. 기병 700~800 명과 포병 4천~5천 명보병 2만~3만 명이 사방으로 가로 세로 달리니 우리나라 사람은 촌보(寸步)의 자유도 없었다. 궁성 안팎을 두어 겹으로 둘러싸니 대소 관리가 나고 들며 떨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그 수행원 및 그 부하의 무관과 다수의 보병기병헌병이 순사 및 고문관, 보좌원들과 연속하여 풍우처럼 대궐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각 문을 파수하고 수옥헌 지척에도 겹겹이 둘러서니 총과 칼이 총총히 벌여서 철통같았다. 이어 그 인장을 받아가지고 회의석으로 들어가서 그만 누르니 그 때가 18일 상오 한 점 종이 칠 때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실이 알려지자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으며,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통곡했다. 늑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문이 쏟아졌으며, 경운궁 앞에서 수천의 시민들이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상소와 항의로는 늑약의 폐기와 오적 처단을 기대할 수 없었다.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오적을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을사늑약을 자세히 보도하여 일제의 침략의 진상을 널리 알린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위암 장지연의 사설을 발표했다. 우리 태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성의로 끝내 거절하셨으니 그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생각하건대 이등후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아! 저 돼지 개만도 못한 소위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리를 노리고 공갈을 겁내서 움찔움찔 물러서고 움츠려 떨면서, 매국의 적이 되어 3천리 강토와 500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몰아내도다. 애통하고 애통한 일이로다. 동포여! 동포여! 2천만 동포가 다 함께 울면서 읽었던 글이다. 한국인을 몹시 사랑했던 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2월 1일자에 늑약무효라는 기사를 실었다. 지금 일본이 군사를 이끌고 황궁 안으로 들어가 위협하고 억지로 외부대신을 시켜 인장을 누르고 가져가니, 이것은 잔약 질병의 사람을 위협하여 강제로 증서를 작성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만국 공법에 강제로 작성한 조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한일간의 새 조약은 신용 없고 효과 없고 능력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 그리고 을사오적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원한은 골수에 맺혔다. ■ 원태우, 이토 히로부미를 표적으로 삼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元泰祐, 1882~1950, 원태근김시근김태근으로도 불림)는 안양동에서 원태성과 이호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헌병대장이 사건 직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20세 김태근으로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주지만 호적을 추적하여 1882년에 출생했으며 본명이 원태우인 것으로 밝혀졌다. 원태우는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부터 의기를 높이고 바른 일에 앞장 서는 정신과 기백을 가진 젊은이였다. 을사늑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던 그는 이토가 열차로 수원 지방을 구경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친구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결의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닷새가 지난 1905년 11월 22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늑약 체결의 일본 측 담당자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와 함께 특별열차를 타고 남대문역(서울역)을 출발하여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 화성을 둘러보고 팔달산에 올라 주변 경치를 구경한 이토 일행은 수원에서 안양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즐겼다. 안양에서 잠시 휴식한 이들은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행 열차를 탔다. 한편 침략의 원흉 이토와 하야시가 탄 열차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한 원태우와 그의 친구들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술을 나눠 마시고 철도 레일에 돌을 올려놓고 열차를 기다렸다. 열차가 레일을 벗어나면 원흉 이토와 하야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물론 이번 거사는 단순한 객기일 수가 없었다. 일제는 그해 1월에 개통한 경부선 철도를 파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월 3일에 한국인 3명을 체포해 공개처형한 사실이 있다.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어도 사형 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멀리서 기차가 보이자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이만여가 갑자기 철로 위에 놓았던 돌을 치우고 달아났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철로에 다시 돌을 올려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 절호의 기회를 흘려버릴 수 없었던 원태우는 주먹만 한 화강석 돌멩이를 주워 들고 열차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열차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자 원태우는 열차로 달려들며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를 겨냥해 돌멩이를 던졌다. 열차가 출발하고 약 2분이 지난 오후 6시 17분, 경부철도 안양역에서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진 언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원태우가 던진 돌멩이는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토의 왼쪽 눈꺼풀과 얼굴 여덟 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아수라장이 된 열차는 현장에서 1시간이나 머물러 8시에야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사건 직후 원태우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거느린 헌병과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태우는 철도방해죄로 징역 2개월에 곤장 100대를 선고 받았다. 열차 전복을 계획하고 목숨을 노렸던 사건치고 형량이 적은 것은 당사자 이토가 가벼운 죄로 처벌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조선 청년에게 아량을 보여 초대 총독인 자신의 대범함을 선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틀이 지난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한편 11월 23일자 오사카매일신문과 11월 29일자 도쿄매일신문에도 이 사건이 보도될 정도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12월 8일에는 일본 박물관 기관지 일로전쟁화보에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삽화가 실렸는데,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시흥군수 김종국이 파면되고 경기도관찰사 정주영은 견책을 당했다. 혹독한 매질과 고문으로 원태우의 건장했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죽기를 각오했던 그는 아무런 숨김없이 혐의 사실을 솔직하게 밝혔다. 영등포감옥에서 두 달을 보내고 이듬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으나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흉터가 너무 심해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정도였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성기에도 심한 고문을 가해 자녀를 둘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원태우 지사를 본받은 투쟁이 또 일어났다. 1906년 6월 하순, 일본에 갔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이었다. 안양에서 10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선비가 이토가 탄 열차에 돌을 던졌다. 이번에도 열차의 유리창을 깨트렸으나 이토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경찰과 헌병이 그 선비를 붙잡아 헌병사령부로 연행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배후를 캐물었으나 단독 거사로 밝혀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 1910년 8월 29일, 지도상에서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나라가 아주 망하면서 원태우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몸이 불구가 되어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자 형 원영우의 삼남인 원계복이 숙부를 뒷바라지했다고 전한다. 만년에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임곡동에서 살았던 원태우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에 별세했다. 고단한 그의 육신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 공동묘지에 묻혔다. ■ 의로운 이름을 기억하자 안양시는 원태우 지사의 애국활동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을 꾸준하게 벌이고 있다. 안양역 입구 벽면에 원태우 지사의 초상을 새긴 부조를 비롯하여 만안도서관에는 원태우 지사의거비가 설치되어 있다. 자유공원에도 지사의 흉상이 있고 이토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 표지석을 세워 지사의 의거를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고증에 아쉬움이 있다. 지사가 거사를 감행할 때 20대 청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흉상과 부조는 40대 장년의 얼굴이다. 원태우 지사는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사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별세하였다. 놀랍게도 지사가 별세하고 40년 세월이 더 흐른 1990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수훈을 인정받았다. 왜 이처럼 오랫동안 지사의 의로운 투쟁이 묻혀 있었을까? 통렬히 반성해야할 일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7. 근곡 박동완, 독립 위해 잠든 영혼을 깨우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봄의 노래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지은 근곡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경기도 포천군 신읍리(혹은 양평군 도곡리)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박형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박동완이 열 살이 되던 1894년에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 해 박형순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갑오경장으로 1895년에 설립된 관립소학교에 입학한 박동완은 신학문을 익히고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전공했다. 1906년 22세에 6품직인 농상공부기수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벼슬 대신 학문의 길을 택했다. 한성외국어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한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박동완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부가 폐쇄되자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학적을 옮겨 법률을 전공했다. 이에 앞서 박동완은 열세 살 때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의 딸 현미리암과 서울에서 혼례를 올렸다. 이집트에서 유대민족을 해방시킨 모세의 누나 이름이 미리암인 것을 미루어보면 그의 처가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개화한 집안으로 보인다. 박동완의 호는 무궁화골짜기를 뜻하는 근곡(槿谷)이다. 자신의 필명을 근생(槿生) 혹은 근(槿)이라할 정도로 조선을 상징하던 무궁화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1915년, 31세의 박동완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설립한 기독신보사에 입사하여 서기 및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로 일했다. 또한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와 조선중앙기독청년회(YMCA)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배재학당장 신흥우와 여성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이화학당 교수 김란사를 비롯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동완이 전도사로 재직하던 1915년에 현순 목사의 후임으로 손정도 목사가 부임했다. 손정도는 1918년에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 이강을 출석시키는 일을 돕고자 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망명했다. 손정도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필주 목사는 군대의 장교 출신으로 전덕기의 추천을 받아 상동청년학원과 기독교청년회 체육교사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박동완은 이필주목사를 보좌하며 김란사, 신흥우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9년 2월 중순,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서 YMCA 간사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월 27일 박희도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동의한 그는 이필주의 사택에서 가진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참가하고, 28일 밤에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최종회의에도 참석했다. 3월 1일 아침 박동완은 누워 있는 병든 아내와 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오후 2시 그는 태화관에서 28인의 대표들과 함께 기념식을 갖고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갖은 고문을 당해 그의 얼굴과 심신은 크게 망가졌다. 그러나 박동완은 재판정에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에 출소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교회의 형편을 알리는 보고문이 있다. 3월 1일에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감옥에 갇히고 그 후에는 정동교회의 동량과 같은 김진호정득성 양씨가 잡히어가고 배재학당 생도들과 이화학당 교사와 생도들이 다수 감옥에 끌려가 교우는 흩어지고 인심은 험악하야 봄부터 가을까지 저녁 집회를 정지하였다. 감옥에 끌려간 이화학당 생도 중에 유관순이 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던 학생이었다. 언론을 통한 신생명운동 박동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이 아파 1여 년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른 그는 기독신보사에 복직했다. 기독신보는 1919년에 네 차례나 압수를 당했을 정도로 항일사상이 투철했다.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이 창간되자,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서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생명에 계급투쟁과 사회진화 같은 사회성 짙은 논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배금주의가 교회에 파고든 현실을 개탄하며 기독교인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참생명을 위하여 초월적 신생활로 향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는 일요강화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의로운 청년, 우리의 준비, 우리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박동완은 주일학교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1923년 여름에 한국 최초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그는 실업을 장려하는 것보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려는 아동과 청년을 구하여 고결하고 쾌활한 인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이라는 믿음을 가진 교육자였다. 이런 믿음으로 나무를 심는데도 100년을 내다보는데 하물며 사람을 바꾸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1925년 3월 23일, 박동완은 신흥우의 집에서 이상재, 안재홍, 윤치호 등 국내의 기독교계 명망가들과 함께 흥업구락부를 조직했다.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회의 국내조직이었다. 조선민립대학 설립과 기독교청년회를 통한 농촌운동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1925년 4월 초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신생명이 폐간되고 말았다. 신간회운동의 숨은 주역 1927년 2월 15일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박동완은 이상재, 안재홍 등과 함께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평양지회 창립대회에 본부 대표로 참가하여 신간회의 취지에 대해 연설하고, 경성지회 설립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등 신간회의 확산과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1927년 7월, 중국 길림성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리관개사업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한국과 중국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와 막대한 재산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재만 한인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부당한 박해와 탄압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박동완은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과 같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설립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실태를 조사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민의 화합에 힘썼다. 일제는 신간회가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자 신간회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에 신간회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안재홍을 비롯한 지도자를 여럿 구속했다. 겨우 체포는 면했으나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절감한 박동완은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 하와이에서 목회를 통한 민족운동 1928년 8월 박동완은 고국을 벗어나기로 결단을 내렸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야하는 외롭고 고달픈 길이었다. 다행인 것은 박동완이 영어 회화에 능숙하고 하와이의 사정에 밝았다는 점이다. 영어를 전공했고 함께 활동한 김란사, 신흥우 같은 이들이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은 1915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총무로 활동하다가 하와이로 이주해 살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하와이 와히아와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한 박동완은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열어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오래지 않아 박동완은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교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1년 6월에는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귀국하여 동포들의 근황을 전하고, 하와이 교민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연했다. 박동완은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1934년에 한인기독교보를 재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실린 생명은 힘이다라는 논설은 그의 신앙과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선 사람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아니고는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교파와 노선, 남녀 구분 없이 연합단체를 구성하여 한인사회의 연대를 모색하던 박동완은 1941년 2월 23일 호놀룰루 정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별세에 한인사회는 크게 슬퍼하며 애도를 표했다. 1941년 4월, 박동완 선생의 유골이 우편물 취급으로 고국에 돌아오자 3?1운동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4년 뒤 선생의 유해는 동작동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6. 위대한 평민 목사 이필주(李弼柱)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고 고생이 너무나 심하여 나는 때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많이 나서 산중이나 물가에 가서 홀로 운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곤란하게 사는 중에도 주색잡기에 침혹하여 방탕한 생활을 은근히 계속하니 나는 점점 버린 사람이 되었다. 소고 장고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기와 탁견하고 편싸움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살림에는 힘을 쓰지 아니하니 식구의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렵게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필주가 고백한 자신의 청년시절이다. 택견꾼, 밥벌이를 위해 군인이 되다 18세에 부친을 잃고 가장 노릇을 하던 이필주는 21세 되던 1890년에 친구의 권유로 구한국 군대에 병사로 입대했다. 밥벌이를 위한 것이지만 몸을 쓰는 군대일이 적성에 맞았다. 많지는 않지만 매달 급여를 받게 되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의 일원으로 농민군 진압에 참전했다. 이 와중에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필주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교관에게 신식 훈련을 받았다. 농민군이 가을에 다시 봉기하자 또 출전하게 된 이필주는 참교(분대장급)로 진급하고 훈련대로 자리를 옮겼다. 훈련대에서 복무하던 그는 신설된 시위대로 전입하여 부교로 승진했다. 이 무렵 일본 낭인들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에는 일본의 감시를 받던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관파천 후에는 러시아 군사교관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1897년, 이필주는 김인숙과 결혼하여 가정을 갖게 되었다. 남매를 낳아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기쁨도 잠시, 1902년 전염병으로 사랑하던 남매를 모두 잃었다. 전덕기를 만나 숨겨진 재능을 꽃 피우다-교육운동 인생의 허무를 느끼며 괴로워하던 이필주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상동교회에서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숯장수 출신의 전도사 전덕기와의 만남은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1903년 봄에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의 정식 교인이 된 이필주는 그해 가을에 군복을 벗어던졌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던 그에게 교회가 청소를 맡겼다. 교회청소를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사경회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신앙생활에 충실했다. 1904년 4월 이필주는 전덕기의 추천으로 공옥소학교의 체육교사에 임명되었다. 이필주가 택견을 잘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출신이기 때문이다. 10월부터는 상동청년학원의 체육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청년학원의 교장은 전덕기, 학감은 이회영, 교사는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조성환, 남궁억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이필주가 지도하는 체육시간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상동교회 뒤뜰에서 도수체조를 가르치고 축구와 농구, 야구도 가르쳤다. 때때로 학생들에게 군복같은 정복을 입히고 나무로 만든 총을 메고 북을 치고 보조를 맞추어 거리를 행진하며 노래를 불렀다. 무쇠 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만인 대적 연습하여/후일 전공 세우세/절세 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애국지사들 상동교회로 몰려들었다. 지사들은 공을 차고 씨름을 하며 학생들과 어울렸다. 군인출신의 과격파 독립지사 이갑과 도산 안창호가 상동교회 뜰에서 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우고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도 해산했다.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정식 부임한 전덕기가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진사 최성모는 전덕기의 강연에 감동을 받아 그날로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배제학당에 다니던 아들과 교회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학동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상주 출신의 김진호도 교회에 등록했다. 상동교회 삼총사로 불리던 이필주, 최성모, 김진호 세 사람은 전덕기를 도우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삼일운동의 중심이 되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동휘, 이갑 등의 과격파와 전덕기와 안창호를 중심한 온건파가 노선을 놓고 갈등했으나 교육을 통한 국력배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지도노선에 따라 안창호가 평양에 대성학교,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상동교회는 공옥소학교와 청년학원을 통해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신민회의 산하단체로 탄생한 학우회는 학생들의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에 힘썼다.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이나 전문 학술을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갖추도록 지도하고, 매일 지덕체(智德體)의 자기 수련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1910년 일제의 강탈로 조선이 사라졌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이필주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11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이필주가 목회에 전념하려고 준비하던 1914년 3월, 전덕기 목사가 39세의 한창 나이로 별세했다. 전덕기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으나 이필주가 존경하며 따르던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이필주는 1918년 6월 민족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한 손정도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정동교회에는 배재학당장 신흥우, 기독신보사 서기 박동완 등이 직분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이필주는 이들과 함께 활발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약소국들이 독립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조선독립의 방안을 찾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해주에서 최성모 목사가 배재학당을 졸업하는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상급학교 진학을 상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 이필주의 집에 지내게 되었다. 이날 최성모는 박희도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돌아와 이필주에게 만세운동을 준비 소식을 전하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망설임 없이 찬성한 이필주는 다음 날인 26일에 최성모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2월 27일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이 그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책임자를 선정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다. 2월 28일 밤 이필주는 손병희의 집에서 가진 전체 회합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가 물었다.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이필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일제는 취조서에 이필주의 본적을 고양군 한탄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2년 8개월 동안 독방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로 서울 경성감옥에서 최성모, 박동완 등 동지 1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의열단 김상옥, 위대한 별 1922년 12월 하순, 목사관으로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 청년은 예전에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체육교사로 일할 때 가르친 제자 김상옥이었다. 이필주 부부는 폭탄을 품고 온 의열단원인 김상옥을 안방에 숨게 하고 대소변도 방에서 보게 하였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다 폭탄을 던지고 일본 형사대의 포위망을 뚫고 남산으로 피신했다가 경찰대가 다시 은신처를 포위하자 쌍권총을 가지고 세 시간 동안이나 격전을 벌여 경찰 여럿을 사살하고 마지막 한 발 남은 총알로 자결했다. 1923년 벽두에 한성을 뒤흔든 김상옥 의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필주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여두고 목회에 헌신했다. 명절에 부모의 묘소에 성묘를 할 때면 김상옥의 장남을 데리고 가서 의사의 무덤에 참배하고 명복을 빌었다. 서울 여러 곳에서 목회하던 이필주는 1934년 3월 65세로 은퇴한 뒤 수원 지방의 요청을 받아 목회자가 비어있던 남양교회에서 목회를 이어갔다. 수원 남양지역은 3?1운동 당시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으로 제암리 학살을 비롯해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이필주는 3?1절을 맞으면 사흘 동안 금식하며 이날을 기념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신앙의 지조를 지키던 그는 1942년 4월 21일, 74세로 운명했다. 장례일, 남양에서 비봉으로 가는 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46년에 민족대표로 감옥살이를 함께한 의형제 오화영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봄바람 같은 온화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여 근심걱정이나 분노가 나타나지 않았다. 비문에 새겨진 글이다. 3?1운동 50주년을 맞은 1969년에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과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갑성 옹이 참여하여 위대한 별은 여기 빛나고 있다로 시작되는 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5. 광명의 독립운동가

20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여 광명시 곳곳에서는 태극기가 펄럭였고 다양한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3.1만세 운동의 현장인 옛 주재소 자리인 온신초등학교에서의 기념식을 비롯해 만세 거리행진, 시민회관에서의 본 행사, 새마을시장에서 벌어진 플래시몹 등이 이어졌다. 광명지역의 대표 독립운동은 3.1운동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 역시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 투철한 항일 의식과 높은 교육열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위가 비롯된 후 전국으로 확산된 전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당시 서울에 인접하여 있던 시흥군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시흥군 서면에 속해 있던 광명 역시 그 항일독립운동의 물결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다. 광명지역에선선 이미 1896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조정의 봉건성에 대한 저항과 일제의 경부철도 역부 과다배정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다. 봉기의 결과 조선인 군수 포함 일본인 2명이 죽고 시위 참여자들 중에서도 여러명이 죽고 다치는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대문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들어와 진압을 시작하였다. 사건의 결과 주동자 김원록은 사형, 광명시 학온동 집강 성우경에게는 무기징역이 각각 선고되었다. 시흥직산안핵사주본에 따르면, 당시 농민봉기의 주모자 또는 연루자로 체포되어 조사 심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철산리의 최영선, 소하리의 최덕순 등 광명의 각 마을 대표들이 대부분 들어 있었다. 광명 지역의 저항 의식은 이때의 기억으로 지역민의 마음속에 온존해있었을걸로 여겨진다. 광명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시흥군 서면으로 편제되었으며 면소재지는 소하리에 있었다. 시흥군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현재 소하동)에는 비정규 사립 교육기관인 운양의숙이 대한제국 시기부터 존재하였고 시흥공립보통학교의 분교가 개설되어 있었으며 마을에는 서울의 고등교육기관인 배재고보에 다니는 청년들도 있는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었다. 3월 28일에 광명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쌓여온 항일 의식과 높은 교육열, 독립의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 이정석, 최호천과 윤의병의 3.1운동 3월 27일 서면 소하리 거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만세를 불렀다가 28일 아침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아버지 이종원은 마침 서울 지역의 학교 휴교령으로 집에 내려와 있던 배재고보생 최호천에게 이정석을 구출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최호천은 동네 친구로 같은 학교를 다니던 윤의병과 만나 이정석이 구금되어 있는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하고 마을 주민들을 모아 그 즉시 실행에 들어간다. 최호천은 같은 마을의 동문 배재고보생 윤의병에게도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하여 주민을 모아 오게 하였다. 각자 모아온 주민 70여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 모여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인근 가리대 마을에서 100여명이 합세하여 2백여명의 인원이 되었다. 시위대는 최호천과 윤의병이 이끌고 이종원과 같은 마을의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5명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시위 군중에게 곤봉이나 돌로 무장할 것을 권하고 경찰이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퇴각하지 말고. 휴대한 돌이나 곤봉으로 대항할 것을 일러두었다. 200여명의 시위대는 밤 10시경 구름산을 넘어 주재소에 다다라 주재소를 포위하고 함성을 질렀다. 시위대는 이어 몽둥이로 주재소 앞 게시판을 때려 부수고, 주재소 숙직실의 뒷면 벽에 약 1치 반쯤의 구멍을 뚫고 침실 문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시위대가 닥치자 주재소 안에 있던 경찰은 처음에는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듯이 위장하였으나 곧 발각이 되었다. 최호천과 윤의병은 경찰과 담판을 하며 이정석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미 영등포 본서에 넘어갔음을 알고 다음날 본서에 가는 일본인 경찰에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약속받았다. 이에 시위대는 주재소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돌아와 소하리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로서 27일 이정석의 단독 만세 시위로부터 시작한 광명 지역의 만세운동은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다음날 경찰 병력을 파견하여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유지호, 최정성, 김거봉, 최주환 등 7인을 주동자로 체포 구속하였다.했다. 최호천은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중간에 소요죄로 바뀌어 결국 1921년에 징역 2년으로 확정되었다. 1심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된 걸로 보아 식민지 법정의 재판에 계속 항의했던걸로 보인다, 윤의병은 당초 소요죄로 징역1년 판결을 벋았으나 고등법원에서 파기되어 대구와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징역 2년으로 확정 판결받았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과 최정성은 당초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등에 항소하여 1919년 12월 벌금 30원으로 확정되었다. 이외에 유지로, 김인한, 최주환 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정석은 체포 이후 재판 기록이나 여타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석방된걸로 보인다. 엄혹한 일제 경찰이지만 부자를 함게 가두기에는 부담이 있지 않앗을까 한다.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결코 퇴각하지 말라... 당시 배재고보생이던 최호천과 윤의병의 주도로 죽음을 감수하고 무장 폭력시위를 준비하였고 이를 실행하였다. 경찰이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아 더 큰 충돌은 없었지만 시위대가 어떤 마음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죽음까지 불사하고 벌어진 광명의 만세운동. 이는 당시 만세운동의 비장함과 함께 민족지도자 33인이 내걸었던 비폭력주의와는 다른 폭력시위로 진행되는 만세운동으로 당시 지식인층인 학생의 의식과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동자 중 최호천과 윤의병은 학생이지만 최주환, 유지호, 최정성 등 나머지 주동자는 농민이었다. 맨 처음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정석도 농민이었다. 이를 보면 학생출신의 지식인과 청년 농민이 결합하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석이 체포되자마자 아버지 이종원이 최호천 등에게 바로 구출을 요청하고 최호천 윤의병이 조직적우로 마을 주민을 모은 것은 사전에 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짧은 시간에 주민 200여명이 합류 했다는 점에서 지도부의 조직적인 움직임과 주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당시 지도부인 최호천, 윤의병과 처음 만세 시위를 한 이정석의 나이가 20세 전후인점에서 마을에서 활발하게 할동하던 젊은 층이 선두에 나섰음을 알수 있으며 이는 3.1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매우 자발적인 집단 시위 참여와 청년들의 적극적인 모습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룬 7인 중 최호천, 윤의병, 유지호, 최주환은 1990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이종원은 1992년 대통령 표창을 김거봉은 201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아쉬운 점은 국가가 인정한 것은 이 들이 세상을 뜨고 한참지나서야 그 공훈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 계속 이어진 만세운동의 숨결 학자가 없어서 또는 학령 연령 초과 등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맹퇴치운동의 한 차원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서 윤의병(尹宜炳) 이순구(李舜九) 이병대(李丙大) 이범규(李範圭) 외 여러 명의 청년들이 이곳의 유지 이연철(李淵哲)의 후원을 얻어 설립하였다. (東亞日報 1928년 1월 7일) 15세 미만의 아동들도 주경야독으로 야학에 참여하여 절반 정도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많을 때는 남자 211명, 여자 18명이나 되는 인원이 야학에 참여했다. (東亞日報 1932년 8월 23일) 비록 광명지역의 3.1운동은 일본경찰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멈췄지만 3.1운동의 주동자인 윤의병의 이름은 10여년이 지나 소하리 야학 운동 설립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소하리 야학은 중간에 여러 사정으로 중지되기도 했으나 1932년까지 지속되어 큰 성과를 이루었다. 광명지역 3.1운동의 정신은 사회계몽운동까지 이어져 내려와 지역을 깨우는데 기여하였다고 보여진다. 양철원 광명시청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4. 안성에서 타오른 3·1운동의 불길

피고들의 선동에 응하여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및 원곡면 등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로서(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판결문 중에서)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자원수탈과 무단통치에 신음하고 분노하던 조선인들이 마침내 일어섰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5월말까지 타올랐다. 박은식은 31운동의 전 과정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위대한 행진으로 기록했다. 222개 부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7500명 이상이 살해되고, 1만6천명이 부상당했으며, 체포된 사람만 4만6천명이 넘었다. 안성 삼일운동의 불꽃, 최은식 경기도 양성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분수령을 이룬 31운동의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당시 언론도 안성의 만세운동을 주목했다. 매일신보 1919년 8월 10일자에 실린 안성의 최은식 등 126명 예심종결, 모두 다 내란범으로 고등법원으로 보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경기도 안성군에서 지난 4월 1일 밤에 촌민을 선동하여 소요 폭동을 일으킨 안성군 원곡면 최은식 외 126명에 대한 예심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취조 중이더니 지난 8일 오후에 종결 결정되어 피고 등은 관할이 다름으로 모두다 내란죄로 고등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안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연인원은 7~8천을 헤아린다. 그런데 일제는 최은식(1899~1960)을 안성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판단했다. 천안 출신으로 안성 원곡면에 살던 21세의 최은식은 이덕순, 이근수, 최두환 등과 함께 고종의 국장에 참관하기 위해 상경했던 3월 1일,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만세시위 현장을 목격했다.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 최은식은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마을을 돌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3월 28일 원곡면 지문리와 외가천리 주민들이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 저녁 8시 경 최은식은 이덕순, 홍창섭 등 동지들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든 1천여 명의 주민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일본인 원곡면장과 서기를 끌어내어 선두에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양성으로 행진했다. 태극기와 횃불을 들은 시위대는 원곡과 양성의 경계인 성은고개(만세고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함께 시위를 주도하던 이유석(34세)이 열변을 토했다. 오늘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다.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 순사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를 부수자. 최은식도 격정적인 연설로 호응했다. 조선이 독립하면 주재소, 우편소 등은 필요 없으니 부수자! 돌과 몽둥이를 들고 가서 주재소와 우편소를 불태우자! 일본 관헌이 만든 서류는 독립이 되면 쓸데없으니 불태우자! 일본인을 추방하자! 시위대는 조선 독립, 주재소와 우편소 파괴, 일본인 추방을 외치며 진군하듯 양성으로 들어섰다. 같은 시각 양성에서도 여러 마을에서 주민들이 만세를 부른 후 양성면사무소가 있는 동항리로 모여들었다. 1천여 양성주민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려다가 원곡의 시위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2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밤 10시 무렵 최은식 등의 주도로 양성주재소와 숙직실에 불을 지르고,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부수었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과 일본상인의 가게도 파괴했다.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기하고 시위군중과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 날 새벽 4시 무렵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최은식은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방화하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1일과 2일 무력시위를 벌인 이틀 동안 양성과 원곡은 해방 공간이 되었다. 결국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체포에 나섰다. 이때 최은식은 재빨리 몸을 숨겨 체포를 피했다. 그러나 일제가 그의 아버지를 경찰서로 끌고 가 혹독하게 매질을 하고 최은식이 나타나면 풀어 줄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사정을 알게 된 최은식이 스스로 경찰서를 찾아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안성 출신 이유석(1886~1950)은 군대와 경찰이 집요하게 검거작전을 펼쳤으나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가명을 사용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에 광복을 맞이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세상을 떠났다.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의 성지 안성의 31만세운동은 원곡과 양성, 안성읍, 죽산 세 지역에서 벌어졌다. 3월 11일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성에서의 첫 만세운동은 서울에 유학 중이던 남진우와 고원근이 만세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알리며 조회시간에 후배들을 독려하여 시작된 것이다. 저녁에는 안성 읍내 장터에서 상인을 비롯한 주민 5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만세소리를 들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시위자를 체포했다. 3월 28일, 원곡면과 읍내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원곡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이웃 양성으로 번져나가 폭발했다. 안성의 만세운동은 지역민의 신망을 얻고 있던 원곡과 양성의 청장년들이 조직적으로 이웃을 설득하여 일으킨 총궐기로 방화와 파괴 같은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안성 읍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동리를 시작으로 29일에는 장기리, 30일에는 서리에서 일어났다. 서리에서는 600여명의 시위대가 동리, 서리, 장기리를 돌며 만세를 불렀다. 계속 불어나는 시위대는 안성군청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이어갔다. 4월 3일까지 이어진 시위에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한편 죽산지역도 4월 1일부터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한 죽산의 농민과 상인들도 죽산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2일에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죽산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죽산 장터에 모여든 1천여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와 학교, 주재소, 우편소를 돌며 시위를 벌이자 대열은 2천여 명에 달했다. 3일까지 계속된 죽산지역 만세시위도 격렬해져 일제의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했다. 안성 읍내면에서는 3월 30일 김진수, 이경수, 이성옥이 주동이 되어 마을과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은 사람들을 안성 경찰서 및 관청 까지 이끌고 나가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31일 권만동은 읍내면 동산에서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오후에는 이성옥이 마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성옥은 군대가 출동하여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없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다니다가 군병에게 체포되었다. 죽산 지역에서는 4월 1일 안재헌과 양재옥이 죽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50여 명과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2일에는 장암리 구장 곽대용이 주민 200여 명을 모아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주민들까지 참여하여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밤에는 군중 200여 명이 일죽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돌을 던졌다. 잊지 말아야할 위대한 역사의 현장 이처럼 안성에서는 주재소와 면사무소 같은 일제의 통치기구를 파괴하고 무력화시키는 과감한 투쟁을 벌였다. 격렬하게 전개되는 만세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총검으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일제 군경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체포하여, 171명에게 징역 5월부터 최고 12년에 달하는 실형을 선고했다.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을 벌인 안성 원곡면에서만 24분이나 순국할 정도로 많은 희생이 따랐다. 만세를 부르던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절명한 것을 비롯해 안성경찰서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구치된 상태에서, 혹은 복역하던 중에,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숨을 거두었다. 안성 만세고개에 세워진 31운동기념관은 100년 전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 떨쳐 일어난 선열들의 피어린 역사를 담고 있는 자랑스런 공간이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거룩한 희생을 딛고 수립된 나라이다. 유공자들이 업적과 서훈을 받은 연도를 살펴보다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별세한 지 40년이 지난 1990년에야 애국장을 추서 받은 이유석 선생을 비롯한 유공자의 대부분은 1990년 이후에 서훈을 받았던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순국 사실을 기록으로 입증할 수 있는 유공자조차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수훈으로 남아 있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3. 독립군·광복군 군사전략가 청사 조성환

독립혁명가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 1875~1948)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이다. 청사의 생가는 경기도 여주 대신면 보통 1길 98에 위치한다. 청사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의 명문가였다. 이조판서와 한성판윤 등 주요 요직을 역임한 조윤대(曺允大, 1748~1813)를 비롯하여 당대를 대표할만한 선비들이 즐비했다. 청사의 생가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시계(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가 섬돌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다. 청사는 어릴 적부터 해시계를 보고 자라서인지 지금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또 시기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때(時)를 잘 알고 있었다. 청사는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일찍이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방례초본 인)고 경고 했듯이 청사는 졸업을 앞둔 시점에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무관학교를 고쳐보려고 앞장섰다. 결국 청사는 동맹 퇴학의 주동자(황성신문 1902년 1월 20일)로 15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고 유배를 가야만 했다. 이 여파로 계급은 있으나 직책이 없는 군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당할 무렵 청사는 평양의 기명학교 교사로 활동한다. 1906년 안중근이 간도로 망명하기 바로 직전에 만난 인물이 다름 아닌 조성환이었다. 조성환은 안중근에게 첨서添書를 써준다.(이등공伊藤公 암살범 안응칠(중근)에 대한 조사 보고) 조성환은 1906년 10월 5일자 황성신문에 청사자해晴蓑自解라는 시詩를 기고한다. 청사라는 호號의 의미를 스스로 풀이한 시이다. 여름엔 베옷 겨울엔 갖옷이 각각 마땅하지만 夏葛冬?各適宜 맑게 갠 날 도롱이 삿갓도 서로 어울린다네 晴天?笠底相隨 강호의 본디 모습 원래 이와 같으니 江湖本色元如此 비바람 앞날을 알기 어려울세라 風雨前頭未可知 이슬 젖어 우거진 풀 언덕에 앉아 있으니 露濕坐因芳草岸 밝은 달은 푸른 버들가지에 걸려 있구나 月明掛在綠楊枝 사람들아 지금 소용이 없다고 웃지 마라 傍人莫笑今無用 예로부터 처신에는 저절로 때가 있으니 從古行藏自有時 맑게 갠 날 도롱이 삿갓을 왜 써야만 했을까? 비바람 칠지도 모르는 조국의 미래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성환은 나갈 것인지(行) 묻혀 살 것인지(藏)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황성신문은 쓸모 있는 재능을 지니고도 위양에서 낚시를 드리운다고 평했다. 강태공이 위양에서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때를 기다렸듯이 조성환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의 축은 이미 무너졌고, 군대도 해산(1907년)되어 버렸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 청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908년 독립기지 건설을 하라는 신민회의 명을 받들고 연해주에 가서 최재형과 독립기지 건설을 논의한 후 북경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지목한다. 거점을 마련한 청사는 1909년 2월 드디어 망명길에 오른다. 독립군의 불꽃이 되고자 이름도 조욱曺煜으로 바꾼다. 청사는 독립군의 통신원이 되어 도산 안창호와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주지역의 동포들의 현황과 중국 신해혁명 상황 등을 속속들이 알린다. 신해혁명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무관학교 동기 신규식과 함께 상해에 가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을 간파하면서 늘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강구해야만 했다. 상해에서는 중국혁명세력과 교류할 기관으로 한인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동제사同濟社를 만든다. 그러다 북경에서 일본수상 가츠라桂太郞를 암살하려다 체포(매일신보 1912년 8월 15일자)되어 또 다시 10년 만에 거제도로 유배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국내에서 가두연설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민부 재무부장을 역임했던 일강一崗 최석호崔碩鎬(다른 이름 최문석崔文碩, 獨立鬪爭 自苦一生前末記, 독립기념관)는 광산에서 일하다 청사의 연설을 듣고 지금 광산에서 한가하게 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1915년 독립운동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이다.(최석호의 막내아들 최창화 증언) 망명 혁명가 조성환은 북경에서 광무황제가 국권을 포기한 날은 우리 동지가 국권을 계승한 날이요 4천년의 주권은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다는 대동단결선언(1917)의 주역이 된다. 뿐만 아니라 대한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는 대한독립선언서(1919)의 39명 대표 중 한명이 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핵심 요원으로 활약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헌법을 통과시켜 대한제국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으로 탄생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의 군무차장에 이어 군무위원장으로서 임시정부의 군사문제를 책임졌다. 조성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민족 재생을 위해 무기를 휴대하고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 방략을 모색한다. 외국인의 도움(독립운동자금모집자 검거의 건, 1919년 12월 13일자)도 필요했다. 그때 마침 블라디보스톡에 체코군이 도착하자 조성환은 대장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를 비밀리에 만나 막후교섭을 벌여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발,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대량 확보한다.(김희곤, 이범석 『우등불』) 조성환의 주도면밀한 협상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써 조성환은 청산리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조성환의 아버지 조병희 역시 독립에 대한 꿈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던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여주의 생가를 팔고야 말았다. 독립혁명가 조성환은 독립군을 지탱해 주는 동포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도 매진한다. 대종교는 그 중심축에 있었다. 북경에서는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조직(1921)하였고 『부득이不得已』라는 신문도 부득이 발행했다. 남만주에서는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서 군사분과위원을 맡으며 남만주 독립혁명단체를 하나로 묶는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북만주에서도 신민부新民府가 탄생한다. 중앙집행위원장에 오석 김혁이 추대되고, 조성환은 외교부장을 맡는다. 이처럼 조성환은 독립혁명 조직을 그물망처럼 연계시키고 있었다. 이제는 각계 각파와 좌우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야 했다. 그것은 독립혁명조직을 통합하는 유일당 운동이었다. 독립혁명조직들을 연계하고 통합하는 전략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대 창설을 도모한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장으로서 군사특파단의 단장도 맡는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등의 조직은 군대창설을 위한 병력 모집을 주임무로 삼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드디어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군대 해산 이후 33년 만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잇는 어엿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것이다. 군대가 창설되자 1944년 10월 3일 국무회의에서는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러나 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광복은 느닷없이 도둑처럼 오고야 말았다.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청사 조성환은 조국의 독립과 반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온 정성과 정력을 다 쏟아 부었다. 해체된 군대를 다시 창설하기 위해, 동포사회의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 같고, 큰 용기는 겁먹은 것처럼 불철주야 전 중국을 누비며 전 방위적으로 활약했다. 독립군의 줄기와 가지를 연계하고 통합하여 강한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조성환은 귀국하여 즐거워할 사이도 없이 다시 찬탁이니 반탁이니 하며 좌우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또 다시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청사晴蓑 조성환은 독립을 위해 탁월한 군사전략가로서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음에도 청사晴蓑의 이름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 혁명의 길을 걸으며 청사가 꿈꾸었던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2. 대한민국 탄생을 기초한 사상가·독립운동가 조소앙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을 돌아보면,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이 운동을 통해서 되찾으려는 나라가 왕국이나 제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선이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가 망하게 된 때가 1910년 8월 29일이었으니, 3ㆍ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10년 전에는 왕국 내지 제국의 신민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왕국을 말하지 않고 민국을 말하게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조명되고 있다. 임시정부를 몇몇 망명자 집단으로 폄하하는 견해가 일부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추동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낡은 시대를 흘려보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기원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중대한 의미를 띤다. 그 선각자들 가운데 주요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었다. 조소앙의 출생지는 교하군(현 파주시 월농면)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본가와 그를 기리는 기념관은 양주시 남면 양연로(황방리)에 있다. 두 지역은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행정구획의 변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출생지와 성장지가 약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조소앙은 조정규(趙禎奎)와 박필양(朴必陽)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이고, 자는 경중(敬仲)이다. 소앙(素昻)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 통정대부인 할아버지 조성룡(趙成龍)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에 성균관에 입학했으니, 전통적인 한학을 학문적 배경으로 성장한 셈이다. 그의 문장엔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이 배어 있다. 그러나 조소앙은 맏형 조용하(趙鏞夏)의 영향으로 서양의 최신 지식을 접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1904년에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세이소쿠영어학교,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 등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일본 유학생활 8년은 그의 일기 동유약초(東遊略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성균관 시절부터 일본의 침탈 행위를 규탄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유학생들의 조직 활동에 적극 가담하여 일본의 잘못을 성토하는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 당국에 의해 요시찰인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1912년 3월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일시 교편을 잡았으나, 이미 마음먹었던 중국 망명을 결행했다. 그의 사상적 지평은 넓었다. 전통 유학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 1915년에 발표한 육성교(六聖敎)는 단군,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마호메트 등 여섯 성현의 가르침을 일체화한 것이다. 이는 종교의 통합을 통해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기하고 민족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취지였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대동단결의 선언을 발표했다.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최고기관과 헌법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경술국치일이 황제권의 소멸일이며, 민권의 발생일이라는 주장이다. 즉 한인의 주권이란 한인 아닌 자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이며,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로 오히려 주권이 한국 인민 전체에 귀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건설할 국가의 정체와 독립운동을 주도할 임시정부의 법적논리적 근거를 세운 셈이 됐다.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하여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했는데 그 기초 책임을 조소앙이 맡았다. 이 선언은 일본 유학생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와 국내의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보다 시기적으로 선구를 이루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혈전이라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것이다. 이는 대동단결의 선언의 독립운동론을 이은 것이었다. 31운동을 전후로 한 독립운동의 흐름은 4월 상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으로 귀결됐다. 10일 늦게 모여 밤샘 토론 끝에 11일에 대한민국 국호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결정됐는데, 여기에는 조소앙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이후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의 근간이 됐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지금의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규정으로 이어져 왔다.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이를 통치함이고,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다. 권력분립과 의회주의를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제3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고 하여 신분제적 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의 원칙을 선언한 것이다. 제4조에서 기본권 내지 자유권, 제5조에서 참정권, 제6조에서 국민의 교육납세병역 의무, 그리고 제7조에서 국제평화주의 원칙을 정하고 있다. 제9조의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는 조항도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의미가 큰 활동에 조소앙이 법학 전공자로서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조소앙은 외교활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유럽을 순방하면서 한국 독립의 지지를 호소했는데, 특히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지지를 얻었다. 즉 만국사회당대회에서 한국독립을 승인하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유럽 순방을 통해 조소앙은 소련 공산당을 비롯한 유럽의 다양한 정치 이론과 현실을 견문할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노력을 기울인 민족유일당운동이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930년 1월 조소앙은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때 당의 이론화 작업을 조소앙이 맡아 바로 삼균주의를 선보였다. 1931년 1월에 쓴 한국독립당의 근황[近像]이란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을 주의로 삼는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균등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 균등화 방안으로는 보통 선거제를, 경제 균등화 방안으로 국유제를, 교육 균등화 방안으로 국비 의무 학제를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의 균등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국가와 국가의 균등을 위해 식민주의의 배격과 침략 전쟁 금지를 주장했다. 조소앙은 또한 건립할 국가의 형태와 정치 체제로 바로 민주 입헌공화국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독립당과 공산당의 차이점을 제시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파괴하는 시기에는 독립당은 민족투쟁을 도구로 삼고,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도구로 삼는다. 그리하여 전자는 국내의 모든 반일 민중과 국외의 피압박 민족과 연합하여 일본을 타도하는 것을 도모하고, 후자는 국내의 무산계급과 세계의 무산계급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할 것을 도모한다. 건국하는 시기에는 독립당은 자체 주권을 옹호하여 어떠한 외세의 간섭과 대행 통치도 승인하지 않고, 공산당은 동일한 주의를 가진 대국에 자국을 편입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더 이상 자국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 계급을 간판으로 내걸고 독단으로 정치를 행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1939년 독립운동방략을 발표했는데,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광복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했는데,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畵)가 주석 김구와 나란히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발표됐다. 조소앙은 1945년 일본이 패퇴하여 귀국했는데, 임시정부는 미군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총선거에도 불참하고 남북 협상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태도를 바꿔 참여했는데,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고 말았다. 그는 북한에서 1958년 9월 세상을 떴다. 전통은 힘을 잃고 새것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는 그러한 전환기에 새로운 나라를 이끌 생각들을 정리하여 제시했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활동 등 실효성 있는 방안을 찾아 끝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28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이광수, 31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최남선이 훗날 변절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삶의 무게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고 대한민국 탄생을 기초한 사상가였으며, 불굴의 독립운동가였다. 김태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수석연구원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1. 삼일운동·고려혁명당 이끈 인암 홍병기

1919년 3월13일 경무총감부 순사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51세의 천도교 장로 홍병기를 심문했다. 이번 조선독립운동을 하게 된 전말을 자세히 말하라 일본이 합병 이래 우리 조선민족을 압박하고 교육에 차별을 두는 것 등에 불평이 있었는데 이번 우리 동지들이 민족자결의 제창에 자극되어 조선독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런데 올 2월 10일경 친구 권동진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났을 때,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제창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도 독립을 기도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권동진도 찬성했다 한 달이 지난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본인 판사가 심문했다. 피고는 왜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계획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원래 조선은 4천년 역사가 있는 나라로, 하루아침에 남의 영토가 된 것을 나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때 민족자결이란 문제가 제창됨에 따라 이때에 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피고는 일본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품고 있는가 불평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점차 조선 민족을 망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권리라든가 대우를 해주지 않고 또 교육의 정도가 일본보다 낮은 식민지 교육을 하고 있다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다 홍병기(洪秉箕)는 1869년 여주군 이포리에서 태어났다. 참봉 벼슬을 한 아버지 홍익룡은 양반의 서자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건강했던 홍병기는 일찍부터 한학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해 19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름만 남은 군대에서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홍병기는 24세에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놀라웠다. 자신의 여종을 해방시켜 며느리로 삼고 딸로 삼아 신분 차별을 없앴던 최수운과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하느님이라고 선포한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은 의식을 개벽시켰다. 여주에서 포교활동을 열심히 벌여 능력을 인정받고 접주에 임명됐다. 1893년 봄의 보은집회와 이듬해에 벌어진 갑오동학혁명은 홍병기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1894년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이 동학교도들을 총동원 하는 기포령을 내렸다. 홍병기도 여주에서 기포해 수십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경기도 편의장 이종훈의 지휘를 받으며 통령 손병희가 이끄는 부대에 합류해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동학군은 무기력했다. 홍병기는 결국 손병희, 이종훈 등 지도자들과 함께 스승 최시형을 모시며 관군과 민보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1898년 해월 최시형이 관헌에 잡혀 처형됐다. 나 죽은 후 10년 안에 장안에 동학의 주문이 울려 퍼지게 하라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홍병기도 탄압의 중심지 서울에 잠입해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 동학의 근대화 활동과 갑진개화운동에 앞장서다 해월 최시형이 순교한 후 동학교단이 도통의 전수 문제로 분란에 빠졌을 때 홍병기는 의암(義庵) 손병희를 적극 지지했다. 서자로 자랐으나 당당하고 사려 깊은 손병희의 인품을 높이 샀던 것이다. 손병희의 집안일을 돌볼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그는 1900년에 편의장과 대정(大正)에 임명되고 인암(仁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홍병기는 자신의 누이 홍영을 해월의 맏아들 최동희와 혼인시키고 어려움에 처한 스승 해월의 사모와 둘째아들 동호를 돌봐주었다. 1901년 봄, 동학교단 조직의 재건과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던 의암 손병희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포교에 힘을 쏟으며 교단을 지도하던 홍병기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동학교도의 자제 중에서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보내는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1904년, 손병희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민회(民會)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홍병기는 동학 지도자들과 협의해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로 정하고 수십만 동학교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단발하는 갑진개화운동을 선두에서 벌여나갔다. 그러나 그 해 말 이용구가 이끌던 진보회가 친일단체 일진회와 통합한 후 친일로 돌아섰다. 홍병기는 이러한 사정을 손병희에게 알리기 위해 이종훈과 함께 동경으로 건너갔다. 1905년 12월,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일진회 이용구를 비롯한 지도자 62명을 파문시키며 교단 재정비에 나섰다. 이때 대종사장에 임명된 홍병기는 의암을 보좌하며 교회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포교에 전념했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활동하던 동학의 조직에 천도교란 새로운 옷을 입히니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도교에 입교해 순식간에 신도 수가 1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어느덧 홍병기는 천도교의 장로로서 정책을 결정하고 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핵심 지도자가 됐다. 1919년 2월25일, 홍병기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의 추진상황을 듣는 자리에서 천도교 대표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7일, 홍병기는 이종훈이 맡긴 도장을 가지고 김상규의 집으로 가서 기독교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건의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출동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15인의 동지와 함께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15인의 천도교 민족대표들 중 9인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동지들이었다. 형량은 짧았으나 민족대표 33인 중 두 사람이 옥사할 정도로 감옥살이는 혹독했다. ■ 만주로 망명 혁명운동에 나서다 1921년 11월 4일에 출소해 잠시 몸을 추스른 홍병기는 교회의 혁신 활동에 뛰어들었다. 3ㆍ1운동으로 교단 원로들이 수감되어 있던 3년 동안 행정을 맡았던 인사들이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던 것이다. 홍병기는 이종훈, 오지영, 최동희 등과 뜻을 같이했다. 홍병기의 발걸음은 교단의 개혁에만 머물지 않았다. 1922년 7월 14일, 홍병기는 자신의 집에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천도교연합회의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조직한 고려혁명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에 홍병기가 추대됐다. 홍병기는 해월의 맏아들이자 외교부장인 최동희와 고려혁명위원회를 통해 조선의 독립과 사회혁명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최동희는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자 연해주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과 사회혁명을 전개했다. 1926년 4월 5일, 길림성에서 양기탁을 비롯한 정의부의 주요인사들, 조선 형평사 오성환 등 핵심인사들, 최동희를 비롯한 천도교연합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했다. 최동희가 고려혁명당 창당일을 4월 5일로 잡은 것은 최수운이 인내천주의와 평등주의를 추창한 동학을 창도한 날이기 때문이다. 계급타파를 부르짖던 형평사와 천도교혁신파의 연대는 강고했다. 창당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 우리들의 인간 실생활의 적, 계급적 기성제도 및 현존조직 일체를 파괴하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유, 평등과 이성적인 신사회를 건설한다. 2.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에 우리들은 공명하고 각 피압박 민족의 결합과 통일전선 구축에 보조를 취한다 최동희가 고려혁명당 창당 사실을 동지를 국내로 파견하여 홍병기에게 알려오자 홍병기도 당에 가입하고 신변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말에 고려혁명당의 핵심 간부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직의 전모가 밝혀져 1927년 1월에 만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같은 달 말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끼던 최동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홍병기는 크게 상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판이 진행되던 동안 음식물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크게 고통을 받았다. 징역 2년형을 받은 홍병기는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에 가출옥한 홍병기는 서울 재동의 자택에서 요양하며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들 홍인섭이 1930년 국치일(8월 29일)에 시내에 항일 격문을 붙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광복 후 노구를 이끌고 삼일동지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홍병기는 1945년 12월, 삼일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가 연합할 것을 제안했다.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활동도 의욕적으로 벌이던 홍병기는 1949년 1월 26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치료하던 중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62년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병기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0. 비타협 민족주의자 민세 안재홍

1911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21세의 안재홍은 자신의 호를 민세(民世)로 정했다. 민세란 민중의 세상이란 뜻이다. 그의 하숙방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의 밤노래란 시가 걸려있었다. 바다에 가을빛 저무니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날아가네.근심 속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고 있네 ■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하여 충무공을 존경했던 민세 안재홍(1891~1965)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두릉리이다. 예닐곱 살부터 향리의 가숙에서 한문을 배웠던 소년 안재홍은 사기를 읽고 내가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만큼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구독하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조숙한 아이였다. 한학에 열중하던 안재홍은 17세가 되던 1907년에 단발하고 평택의 진흥의숙을 거쳐 수원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정치, 지리, 철학 등 신학문을 배우고 미국독립전사, 월남망국사 같은 책을 독파하며 열렬한 애국청년으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월남 이상재와 한서 남궁억 같은 애국지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1910년 8월 조선이 망했다. 안재홍은 이상재를 찾아가 미국으로 유학하려는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월남은 그에게 먼저 일본에 갈 것을 권하고 부친도 같은 입장을 밝히자 안재홍은 일본에 유학하기로 결정했다. 9월에 일본에 도착한 그는 1년 동안 청산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해 1911년 9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안재홍은 벗조소앙과 함께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때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13년 여름, 안재홍은 밀항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두 달 동안 북경과 심양을 비롯한 대도시를 둘러보며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채호, 김두봉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1914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안재홍은 이듬 해 5월 중앙학교 학감으로 취직했다. 교장은 30년 연상인 유근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과 함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기독교인이던 안재홍은 유근의 권유로 단군을 숭모하는 대종교 신도가 됐다. 1917년에 그는 학생들에게 불온한 언동을 자주 한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압력을 받아 학감을 사직했다. 1919년 겨울, 안재홍은 3ㆍ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한 것이 발각되어 징역 3년을 살았다. 1922년에 출옥했으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2년 동안 고향에서 요양했다.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크게 개선한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1919년에 약 6천 명이던 경찰을 1920년에는 2만여 명으로 늘여 항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밀정을 양성해 사생활까지 감시했다. ■ 민족단일전선 신간회를 만들다 1924년 봄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안재홍은 가을에 조선일보 주필로 자리를 옮겼다. 친일파 송병준이 운영하던 조선일보를 신석우가 사들여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안재홍을 주필로 영입한 것이다. 안재홍은 논설을 통해 일제가 선전하는 문화정치의 실상이 무단정치와 다를 바 없음을 비판했다. 보석 지연의 희생이란 논설로 일제의 감옥제도와 고문, 감옥 안에서의 비인도적 처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금고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이후 민족운동 내부에서 자치운동론이 등장했다.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나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으니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학문을 배워 실력과 자본을 축적한 다음 독립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재홍은 이러한 자치운동을 타협운동으로 규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1926년 겨울, 안재홍은 자신의 집에서 신간회를 결성하기 위한 비밀모임을 가졌다. 신간은 고목에서 나온 새로운 줄기라는 고목신간(古木新幹)에서 나온 것이다. 1927년 1월, 안재홍은 사설을 통해 신간회는 대일 타협의 우익노선에 대항해 비타협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상해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화요회, 북풍회, 서울청년회 등 공산주의자들과 자치운동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해 창설된 민족합동전 신간회의 초대 회장은 이상재가 맡았다. 안재홍은 총무간사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족대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에게도 신간회 참여를 권유했다. 1928년 5월,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는 사설로 신문은 정간되고 안재홍은 8개월 간 징역을 살았다.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지도자들과 12월에 진상보고 회대회를 준비하던 중 다시 구속됐다. 야심차게 출발한 신간회도 위기를 맞았다. 신간회를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공작과 주도권을 민족주의자들에게 뺏긴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했던 것이다. 안재홍은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정치운동도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 감옥 드나들며 조선역사조선철학을 연구하다 1930년 1월부터 안재홍은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을 연재했다. 고대사를 주목한 것은 일제가 조선역사에서 가장 왜곡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6월, 여순감옥에 복역 중이던 단재 신채호에게 연락해 한국사 관련 원고를 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했다. 잦은 옥살이로 건강을 해친 안재홍은 틈나는 대로 등산을 다녔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단군 유적이 전해지는 구월산에 오른 후 백두산 등척기와 구월산 등람기를 남겼다.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의 1절이다. 이 몸이 울어 울어 우레같이 크게 울어 망천 후 사자되어 온누리 놀래고저, 지치다가 덜 깬 넋이 행여나 다시 잠들리. 다산 정약용의 서거 100주년에 즈음한 1934년부터 안재홍은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해 신조선사에서 출판했다.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김두봉과 연락해 청년 두 명을 중국 항주의 군관학교에 밀파하려다가 발각돼 종로경찰서에 구속됐다. 1937년에 보석으로 석방된 후 고향에 칩거하며 조선역사와 철학 및 문화를 아우르는 조선상고사감을 집필했다. 불행하게도 이때 부인이 별세하고, 장남 결혼을 며칠 앞두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형기를 마친 1940년에 고향집에서 집필에 힘을 쏟아 불함철학대전을 완성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일경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발에 커다란 족쇄를 채워 영하 20도의 감방에 가두고 대소변을 볼 때나 잠시 족쇄를 풀어주는 혹독한 체벌을 가했다. 이때 대장에 냉상을 입고 코에 동상이 걸려 죽는 날까지 고생했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이윤재와 한징 두 분은 끝내 옥사했다. 1943년 3월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으나 절명시를 쓸 정도로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였다. ■ 해방, 미완의 다사리 공동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안재홍은 여운형을 만나고, 다시 송진우를 찾아가 민족진영을 강화해 좌익과 합동전선을 펴자고 제안했으나 송진우는 이를 사양했다. 12월 초, 안재홍은 총독부 고위관리를 만나 전후 치안유지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고 자신과 여운형에게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고 제의하여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총독부의 태도가 돌변해 3원칙 중 민족자주를 제외하지 않으면 폭력조직을 동원해 암살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8ㆍ15 해방을 맞았다. 16일 오후 안재홍은 휘문중학에서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했다. 민중들은 일제 치하에서 9차에 걸쳐 7년 3개월을 옥중에서 보낸 불굴의 지사의 구상에 공감했다. 안재홍은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여운형, 김규식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좌우를 아우른 통합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분투노력했다. 그러나 미소 강대국의 이해와 정치집단의 분열로 끝내 분단이 확정되고 말았다. 안재홍은 민족상잔인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가 1965년 3월 1일에 서거했다. 민세 안재홍 선생이 우리 역사를 연구하며 정립한 다사리 이념은 분단시대를 극복할 정치철학이다. 곧 다사리란 모든 사람을 말하게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해 건강한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치철학이기 때문이다. 현충사 앞에서 벽초 홍명희와 함께한 안재홍. 김산 홍재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9. 민족화합·통일비전 세운 몽양 여운형

나의 고향은 양주다. 나는 풍광이 맑고 아름다운 이 양주땅에서 소년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사상적 감화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 분의 사상은 중국을 치자함이다. 이리하여 나는 조부의 감화로 이 산골구석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란 자각을 얻고 삼천리 1933년 9월호에 실린 여운형의 자서전 첫머리 부분이다. 1886년 양평군 신원리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1900년 집안 어른 여병현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물리 같은 신학문을 배웠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직한 협성회에 가입하여 배운 토론과 웅변은 평생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1903년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별세로 다니던 우체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냈다. 2년 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농사를 짓고 책을 읽으며 지내던 그는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를 고향에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 삼년상을 마친 23세의 여운형은 신주단지를 땅에 묻고 집안의 노비를 해방한 후 강릉 초당의숙의 교사로 부임하여 청년계몽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나 1911년, 일본 연호 사용을 거부하여 경찰의 퇴거명령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여운형은 클라크 목사의 권유로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105인 사건을 지켜보고 중국 신해혁명 소식을 들은 여운형은 중국 유학을 결정하고 1914년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 만세운동을 기획하다 1917년 봄 대학을 수료한 여운형은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상해 협화서국의 직원으로 일했다. 한인 청년들의 구미 유학과 도항을 주선하다가 만난 신규식과는 한평생 동지이자 벗으로 지냈다. 여름에 귀국해 가족을 중국으로 망명시켰다. 이 해 중국 신문기자의 소개로 혁명가 손문을 만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닫던 1918년 8월 이강훈, 이상재 등을 만나 국제 정세와 전후 처리 문제 등을 논의하고, 11월 하순에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여운형은 윌슨대통령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크레인을 면담하고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상해에 있는 신문사에도 전달했다. 우리 한국인은 결코 일본에게 정복된 것이 아니요, 일본의 교활과 기만에 빠진 것뿐이니 이 기만과 제국주의는 장차 전 아시아를 침범하여 대통령 월슨 씨의 평화주의 민주주의를 정복하려 함으로 한국은 반드시 독립을 회복해야 하며 민주주의가 반드시 아시아에 정착돼야 합니다 -월슨에게 보낸 여운형의 편지 일부-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불러들여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결정하고 2월 초 파리로 파견했다. 이어 선우혁 등을 국내로 잠입시켰고, 장덕수와 여운홍은 일본을 거쳐 다시 국내로, 여운형 자신은 간도와 시베리아로 들어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조선 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전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여운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녕, 박은식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2월 1일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선언이 선포되고, 2월 8일에는 일본 동경에서 2ㆍ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4월, 여운형은 3ㆍ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차장ㆍ외무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상해교민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거류민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민의 아동을 교육하기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했다. 일본 정부가 31운동을 기획한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3주 동안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육군상, 총독부 정무총감, 수상 등 최고 요인들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일본의 위협과 자치제 제안을 공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창해 충격을 주었다. 제국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일본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운형은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했다. 일제는 여운형을 일제에 귀순시키거나 자치론 동조자로 만들려 계획했으나 이를 뒤집었던 것이다. 여운형의 거침없는 발언과 당당한 행동은 이를 계획했던 하라 내각이 해산될 정도로 일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광복을 위해 좌우를 아우르다 1920년 봄, 여운형은 러시아,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시베리아에 한인군관학교 설립과 부대양성을 위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방안을 협의했다. 같은 시기 이동휘가 이끄는 고려공산당에 참가해 중앙위원과 번역 일을 맡았다. 최초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하고, 영국노동당의 직접행동을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했다. 여름에는 북경에 온 미국의원단을 방문해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지원을 요청했다. 상해에서 김규식ㆍ조동호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한중 연대를 추진했다. 1922년,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김규식, 김단야와 함께 대회운영 의장단에 뽑혀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이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공산당 지도자와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을 만나 국제연대를 논의했다. 1925년, 손문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하고, 구추백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다. 여운형은 손문에게 중국에 와 있던 소련 정객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1926년에는 광동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영어로 중국 국민혁명의 전세계적인 사명이란 제목의 연설할 정도로 중국혁명에 깊숙이 개입했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한국독립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928년 상해 복단대학에 취업해 이듬해 5월 대학 축구부를 이끌고 자바ㆍ필리핀 등 동남아로 원정경기에 나가 30여 차례 싱가포르 해방,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다가 결국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1929년 7월에는 상해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7월에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석방됐다. ■ 자주의 나라 건설에 평생을 바치다 출옥해 몸을 추스른 여운형은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를 재정비했으며, 일제의 눈을 피해 백범 김구의 모친과 두 아들을 상해로 탈출시켰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처음 게재했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도 폐간됐다. 여운형은 체육활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된 후 1937년 해산될 때까지 회장을 지내며 청년학생들에게 운동정신을 통한 애국심을 고취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섯 차례나 일본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해 정세를 파악하고 정보를 입수했다. 동경에서 전 조선총독을 비롯한 정치거물들과 회견을 가지는 한편 일본유학생들을 규합해 해방을 준비하도록 했다. 1942년 12월, 일본의 패망과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한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체포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형을 살다가 1943년 7월에 가석방됐다. 8월, 경성요양병원에서 조동호, 이상백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성했다. 일제는 그에게 학병지원 연설, 대동아전쟁 강연회 등을 강요했으나 이를 모두 거부했다. 1944년 4월에 거짓으로 환갑잔치를 열고 동지를 불러 모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다. 넉 달이 지난 8월에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건국동맹의 규약은 불언(不言), 불문(不文), 불명(不名)이다. 1945년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총독부와 5개조에 합의하고 치안권을 이양 받았다. 건국동맹을 기초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8월말까지 전국 145개 시군에 지부가 조직됐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남한에서 좌우합작에 성공한 후 이를 남북연합으로 연결한다는 이들의 구상은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념에 가려진 굳은 꺼풀을 걷어내고 맑은 눈으로 70여 년 전 몽양이 걸었던 길을 굽어봐야 할 때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8.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해공 신익희

우리가 31운동 당시에는 오직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순결하고 숭고한 이상으로전 국민이 통일되었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비운에 빠져있는가. 이를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경계하고 반성해야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31정신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피란지 부산에서 32돌을 맞은 31절 기념식장에서 했던 해공 신익희의 말이다.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판서를 지낸 신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 한학을 배웠던 그는 1908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해 1910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참판의 딸 이승희와 결혼하고 1년 후에 현해탄을 건너 와세다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고학으로 학비를 마련하는 한편 문일평, 안재홍, 송진우 등과 일본 유학생의 통일 단체인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와 회장을 맡으며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창간해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20세가 되던 1913년 윤홍섭, 장덕수 등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힘 쓸 것을 맹세하고,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와 광동강숙을 세우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실력이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일인 교수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신익희는 4학년이던 1917년에 몰래 귀국해 계룡산에 가서 도사 박해봉에게 도술과 차력술을 배웠다. 장래에 무장투쟁을 펼치리라 생각했던 까닭에 졸업을 코앞에 둔 시기에 서둘러 결단한 일이다. 한 학기 내내 강의를 전혀 듣지 않아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우며 공부한 끝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18년에 귀국해 중동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자리를 옮겨 비교헌법과 국제공법을 강의했다. 이때부터 신익희의 활동범위는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최린, 윤홍섭, 송진우, 최남선 등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과 해외의 독립단체들과 연락하여 국내외에서 동시에 궐기할 방법을 논의하고, 11월 말에는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를 무대로 무장 투쟁을 벌이던 홍범도, 김좌진 등을 만나고, 다시 상해로 이동해 신한청년당을 창당해 파리평화회의를 준비하던 여운형, 김규식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한 다음 2월 중순에 천진, 북경, 심양을 거쳐 귀국했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극심해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를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일이 선결 과제였다. 25세의 청년 신익희는 오산학교 교장이자 예수교 장로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 세계 대세와 우리 민족이 일어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역설했다. 남강은 바로 그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이어 한성기독교청년회 총무 윤치호도 만났으나 때가 아니라며 거절당했다. 그러나 때는 무르익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무오독립선언과 2ㆍ8독립선언이 그것이다. 일본 도쿄에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직은 바로 신익희가 동지들과 만든 학우회였다.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하던 장덕수가 비밀리에 입국해 신익희에게 연락해 왔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만나 만세운동의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3월 4일 경성역에서 수백 명의 2차 시위 행렬을 지휘한 신익희는 체포를 피해 흰 갓을 쓰고 곰방대를 든 농민으로 위장해 용산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삼엄한 검문을 통과해 19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이때부터 1945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고국을 밟지 못하는망명생활이 시작됐다. 3ㆍ1운동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신익희는 이시영, 조소앙과 함께 제정위원으로 참여해 1919년 4월 11일에 임시헌장 10개조를 발표했다. 헌장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한다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선양하고 나아가서는 인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한다는 임시헌장은 민주국가로서 기본 원칙과 정신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임시정부는 1922년부터 재정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신익희는 의열단 김상옥을 국내로 잠입시키는 일을 주도했다. 1923년 1월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1천여 경찰에 포위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신익희는 중국의 혁명운동을 주목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본토인을 능가하는 회화실력으로 중국의 지방 군벌과 사귀고 국민당 군대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한중합작으로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중 청년 5백명을 모아 분용대라는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1회 졸업한 성주식을 초빙해 훈련 총책을 맡겼다. 이 무렵 중국 혁명을 지원하겠다고 북경에 와 있던 소련 대사 카라한을 만나는 등 외교활동도 동시에 벌였다. 1926년에는 국민당 총통 장개석을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 상황을 알리고 한중합작으로 한만 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신익희는 상해로 달려갔다. 한중이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전선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아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선임됐다.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어 상해사변과 북경사변을 연달아 일으키자 중국도 국공합작으로 일제와 맞섰다. 신익희는 중일전쟁을 기회로 김규식, 김원봉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한 해 동안 황하를 일곱 번이나 건널 정도로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 단체의 연대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 생업에 힘쓰도록 지원하고,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이 무렵부터 일본군대를 탈출한 조선 청년들이 광복군에 참여하기 위해 임정에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8년 의열단 단장을 지낸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9월에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폭격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임정은 이틀이 지난 10일에 대일선전포고를 선언하고 광복군은 항일전에 전면 돌입했다. 신익희는 중경에서도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한중합작을 꾸준하게 추진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43년 12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을 때 장개석의 발의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이 채택될 수 있었다. ■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다 진공작전에 투입될 날만 기다리던 광복군에게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더 컸다.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선에 참전하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 되었다. 신익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의 자격으로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교섭했다. 그러나 미국은 임시정부는 한국민 전체의 의사로 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받아들이지 않아 중경에서 상해까지 장개석이 제공한 비행기로 이동하고, 상해에서 미군용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12월 1일, 옥구 비행장에 내린 신익희는 고국의 흙에 입을 맞추며 동지들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신익희는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며 이승만과 연합하여 독자적 독립정부 수립의 길을 걸었다. 자유신문을 발행하고 국민대학을 창설했으며,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아 국민체육진흥에도 힘을 쏟았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해 당선되고,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5년 동안 일했다. 조국 분단은 끝내 민족상잔의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민주주의의 실현과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노정치가 신익희의 최대 과제였다. 1956년 5월 2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신익희는 자유당의 이승만에 맞서 한강 백사장에서 수십만 서울시민들 앞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부르짖어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흘이 지난 5월 5일 호남으로 유세를 가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지면서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그의 대장정은 멈추고 말았다. 해공 신익희가 60 평생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은 민족통일을 통해 이룩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7.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오광선 장군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는 오인수(吳寅秀, 1868~1935) 의병장과 오광선 장군(吳光鮮, 1896~1967) 등 후손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의병장 해주 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 義兵將 海州 吳公寅秀 三代 獨立抗爭 紀蹟碑가 그것이다. 이 비는 오인수 의병장과 아들 오광선 장군 그리고 손녀 오희영(吳熙英, 1924~1969)과 오희옥(吳熙玉, 1927~ ) 3대에 걸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기념해서 광복 63주년을 맞아 2003년에 세워졌다. 한 집안이 3대에 걸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역사상 거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다. ■ 나라 잃은 슬픔 오인수 의병장 총을 들다 나라가 망했다.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나라를 무참히 빼앗겼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우국지사를 비롯한 뜻있는 일반 백성들은 일제의 불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오인수 의병장 역시 총을 들었다. 오인수의 고향은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이다. 원삼면은 용인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충절의 고장이다. 그는 백발백중 명포수로 유명했다. 원삼면은 안성지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정철화 의병장과 합세해 중군장(中軍將)이 돼 안성군 매봉재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하루 밤낮을 교전했으나 일본군 화력에 밀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노숙하며 야음을 틈타 집 근처로 잠입했으나 한인 밀정의 밀고로 잠복해 있던 일본군에 체포돼 징역 8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오광선은 몸을 사리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다 체포되는 아버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린 오광선은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쳤으리라.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여준(呂準, 1862~1932)이 원삼면에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삼악학교(三岳學校)를 통해 민족의식으로 철저하게 무장할 수 있었다. 오광선은 조선을 광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본명인 성묵(性 )을 광선(光鮮)이라고 이름까지 바꾸고 압록강을 건넌다. 그 후 여준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 ■ 항일전투 선봉 아들 오광선, 광복군 양성 올인 독립군 오광선은 갓 시집온 새댁마저 집도 절도 없는 그 황막한 만주벌판으로 기어이 부르고야 말았다. 새댁은 두말없이 고난의 길을 함께 했다. 출옥한 아버지 역시 아들과 재회했다. 가족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다. 남편 오광선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는 자신이 졸업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국민회군 홍범도, 서로군정서 이청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한 김좌진 등이 만주 독립군을 통일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명지휘관으로 발탁돼 중대장에 임명됐다. 이 연합군이 노령자유시 참변으로 수난을 겪을 때 그는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한다. 1930년에는 총사령관 이청천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오광선은 의용군중대장으로서 한중연합군을 편성해 항일전을 전개했다. 한중연합군은 1933년 수분하대전자(綏芬河大甸子)라는 곳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백범 김구가 남경 중앙군관학교에서 장개석으로부터 낙양 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해 군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자 교관으로 임명돼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또 일본 관동군의 요인을 암살하라는 백범 김구의 비밀지령을 받고(1936년경) 북경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그는 중국인 오원지(吳元之)라고 끝끝내 버텨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고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그는 출옥하자마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는 늘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군사전략과 전술에도 매우 탁월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독립군 조직이 결성될 때마다 명지휘관과 교관으로 뽑힌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광복 후 오광선은 광복군 국내지대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한다.(자유신문, 1945.11.10.) ■ 독립운동 여장부 부인 정정산, 독립군 수발 내조 오광선 장군의 부인 정정산(鄭正山, 1900~1992, 정현숙鄭賢淑으로 개명)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세 아이를 낳았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강했다. 생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병아리를 팔기도 하고 돼지를 키워 팔기도 했다. 독립군의 어머니는 더 강했다. 만주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에서는 억척같이 황무지를 개간해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독립군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에도 열두 번 씩 가마솥에 불을 지펴야만 했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임시정부 피난길을 따라 북경, 천진, 남경, 중경 등으로 옮겨 다니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 했다. 그 와중에도 정정산은 비밀연락 임무 등도 수행했다. 1941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해 활약하기도 하고,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비록 적과 대치하며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무장한 군인 못지않았다. 일상이 치열한 전투였다.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 대를 잇는 독립투쟁 큰 손녀 오희영, 광복군 간부 활동 일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락은 다 버리고 풍찬노숙하면서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투쟁했지만 조국의 광복은 쉬 오지 않았다. 광복을 애타게 그리던 오인수 의병장은 이국 땅 만주에서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큰 손녀 오희영은 어느 새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陳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 독립운동이 벌써 3대째에 접어들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한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약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희영은 교관 신송식(申松植, 1914~1973, 다른 이름 陳敬誠)을 만나 중경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오희영의 남편이자 오광선장군의 사위인 신송식 또한 독립지사였다. 운명이었다. ■ 독립군아 백만용사야~ 막내딸 오희옥, 청년공작대 입대 오광선 장군의 막내딸 오희옥은 길림성 액목현에서 태어났다. 오광선 장군 3대 독립운동가 6명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독립지사이다.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학교를 온전히 다닐 수가 없어 중국의 이곳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방학 때면 이시영 선생 등 임정요원들로부터 역사교육을 받았다. 오희옥은 어릴 적부터 무용, 노래 등을 배웠고 토교에서나 중경에서도 대원들 사기진작을 위해 독립군가, 민요 등을 불렀으며 중국인 옷으로 위장하고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선전까지 했다고 회고한다.(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박환, 2007) 신대한의 독립군아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내가 아느냐 등과 같은 독립군가를 불렀다. 또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네. 새 우는 이 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모여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등의 노래도 불렀다. 1939년 중국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언니 오희영과 독립군 동지가 됐다. 일본군의 정보수집, 연극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로써 엄마 정현숙, 언니 오희영, 오희옥 등 세 모녀가 모두 한국독립당 여성 당원으로 활동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 나라 없는 서러움 어찌 다 형언하리오 그 무엇이 여느 집과 다름없는 평범한 오광선 일가의 온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일생을 걸고 3대에 걸쳐 이토록 처절하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을까. 독립이 무엇인가. 조국은 도대체 무엇인가. 조국의 주인은 또 누구인가. 어린 오희옥은 독립군아 조국의 부름을 아느냐고 독립군을 깨웠다. 조국이 독립되어야 강산에 봄은 다시 돌아오고, 조국이 독립되어야 옆집 동무들과 춤추며 노래 부를 수 있다고. 이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국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오희옥 독립지사는 나라가 없으니 조국을 찾기 위한 운동을 해야지요. 물론 첫째 나라가 편안할 때도 나라를 생각해야지요. 나라가 있어야 우리의 삶도 있지요. 나라 없는 슬픔이 커요. 정직하고 비리 없이 살아야지요라고 말한다.(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박환, 2007) 나라 없는 서러움과 슬픔을 어찌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있으리오. 그럼에도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오광선 장군 일가는 1대만이 아니라 2대, 3대에 걸쳐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을 붙들고 독립의 꿈을 불태웠다. 산천은 의구하나 나라의 흥망에는 반드시 그 이치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역사의 터전 위에 서 있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6. 경기도 만세운동의 도화선 ‘오산장 독립만세운동’

■ 유진홍, 오산서 독립만세운동 실행 결심 유진홍은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이었다.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정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당시 성호면)의 세교동 출신이다. 유진홍은 오산에서도 이와 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규합되자 의거 실행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했다. ■ 최초 독립만세운동 일경 감시 무산 오산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최초 독립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경의 경계로 거사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3월 25일과 26일 오산리의 독립만세운동이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됐다. 이때 일경이 총을 발사 3명의 총상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또 이튿날 2건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이 경계를 강화했다. ■ 3월 29일 낮, 오산장날 독립만세운동 시작 이날은 오산장날이었다. 음력으로는 2월 28일로서 당시는 음력에 장이 섰다. 이날 성호면 오산리에서는 민가 13채가 파괴되고, 일본병이 출동해 2명이 붙잡혀 가고 일본병의 발포로 약간명의 부상이 있었다. 이 거사가 일어나기 전후 5차례에 걸쳐서 비밀회합을 갖고 장날인 29일에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한 날 아침 모임이다. 행동대장격인 이성구가 먼저 말문을 연다. 안낙순 형님부터 말씀하시지요. 세마대쪽 인원은 얼마쯤 모이기로 했는지요. 그리고 공칠보 형님이 맡으신 부처내 쪽도 이야기하시지요. 5~600명은 모여야 거사가 어울릴 듯한데요 8명이 제각기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참가할 예상 인원을 체크 하니 계획된 숫자는 훨씬 넘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할 일이 더 무겁군요. 제가 이규선, 정규환 동지와 전위대로 앞장서서 안낙순, 유진홍 형님을 선두로 모시겠습니다. 김용준, 공칠보 형님들은 나이가 드셨으니 중간에 서시고, 다음 두 분은 맨 뒤에서 시위 군중을 북돋아 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이론이 없다. 이성구의 대견한 제의에 행동으로 옮길 차비를 한다. 이날 정오께 오산장의 우시장은 흰옷을 입은 백의군상으로 빽빽하게 찼다. 소시장이야 큰 규모는 아니나 오산 우시장의 시세가 수원 우시장에서의 소 가격을 결정할 정도로 경기 남부의 중요한 시장이다. 오후 3시쯤 오산장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을 유진홍과 안낙순 등이 태극기를 나눠주고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5시경에는 시위대가 우시장에서 출발해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원래 성호면은 반농반상(半農半商) 지역이어서 일경들은 방심했다. 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위가 일어나니, 일경들은 당황해 필사적으로 시위행진을 저지했다. 이 오산지역은 함부로 총을 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신문지국이 개설돼있다. 기자들도 상주하고 있고, 교회가 일찍 들어와 선교사도 많이 상주하는 곳이다. 오산경찰주재소 현장에 있던 순사 오오키가 해산을 요구하자, 유진홍과 안낙순 등의 시위대가 이에 불응하고 만세소리를 더욱 높였다. 오오키가 유진홍, 안낙순을 주재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해산하라고 권고하는데 왜 듣지 않소 우리 길을 우리가 걷겠다는데 무례하게 총을 들이대며 막느냐 그것은 당신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폭동을 일으키니 그런 거 아니요 우리가 자주독립을 달라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행위이다. 합방 합방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일방적으로 한 것이니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안낙순, 유진홍 두 명의 눈에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일경 3명이 면상을 갈기더니 매질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끌려간 지 십여 분이 지나도 풀려나지 않자 바깥에서는 아우성이다. 이젠 만세 시위가 사람을 내어놓으라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이성구, 김경도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 함성에 오오키가 두 사람을 내어줄 터이니 시위를 중지하시오 이윽고 두 사람이 풀려났다. 그런데 다리를 절고 눈언저리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시위 대열 중의 누군가가 우리 형님들이 왜경에게 얻어맞았다 이때 여기저기서 주재소를 쳐부수자는 소리가 아우성쳤다. 사태가 돌변하자, 이성구가 만류했다. 참으시오! 오늘 저녁이 있소 흥분한 군중들은 저놈들을 혼 내줘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왜놈들을 욕한다. 다시 시위 지도부는 오늘 저녁에 벌일 만세운동계획을 짜는데 몰입했다. ■ 3월 29일 해질무렵,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으로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홍 등이 다시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대를 해산하려는 면장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유종열에게 면장은 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는가?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니 죽여라 하며 투석전을 했다. 이날 저녁 7시 30분경.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고, 면사무소를 투석으로 파괴한 다음 다시 우편소로 몰려가 일본 군경과의 통신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화기를 부셨다. 일찍부터 성호면에는 일본상인과 이민자들이 들어와 평소에 오산사람들과 감정이 대립하고 있었다. 면민들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져 건물을 부수고, 이어 일본인 가옥 11채를 파괴했다. 또한 주재소에 투석을 한 뒤 오산역으로 몰려가 역을 습격 파괴하자, 일경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했다.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됐다. 오산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앞에서의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서 당연한 우리의 주권을 공표한 것이다. 오산지역에서 거주지를 확장하는 왜인들의 지배력을 부인하는 실력행사였다. ■ 일제, 주모자들에 징역형 선고 오산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의 경성지방법원은 징역 6월에서 1년 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이성구(李成九, 수원군 일형면, 25세, 징역 1년 8월.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이규선(李圭璇, 진위군 북면, 25세, 징역 1년 8월. 2006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김경도(金敬道, 성호면 오산리, 34세, 징역 1년 6월. 201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정규환(鄭奎煥, 성호면 오산리, 25세, 징역 1년. 199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안낙순(安樂淳, 성호면 세교리, 44세, 궐석, 징역 6월.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김용준(金用俊, 성호면 금암리, 38세, 궐석, 징역 6월.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 유진홍(兪鎭弘, 성호면 세교리, 34세, 궐석,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아직 수훈을 받지 못함), 공칠보(孔七甫, 성호면 궐리, 36세, 태 90. 1995년 대통령표창) 의사들이다. 오산의 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도교도들의 시작으로 시작됐고 이후에는 오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돼 오산주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이었다. 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했다. 남경식 오산학연구소 상임위원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5. 여성독립운동가 김향화·이선경

이글은 수원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김향화와 이선경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운명의 해, 1919년 1919년 1월 27일, 고종임금이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온 천하에 파다했다. 비록 망한 나라이긴 했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독살을 당하다니, 그것도 한국역사상 가장 오랜 라이벌인 일본에게 말이다. 하지만 독살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으리라. 고종임금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해서 마음에 맺힌 억울함과 분노가 사람들에게 몰아쳤다. 분노는 서릿발이 되어 3월에도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해 춘삼월에는 그렇게 꽃이 피지 않았다. 잔인한 3월, 고통스러운 3월의 서막이 올랐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3월을 빼앗겼다. ■ 같은 공간 다른 모습으로 1 기생으로 나 김향화는 기생이다. 2019년 1월 고종임금의 망곡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서글피 울었다. 김향화의 원래 이름은 순이이다. 1913년 수원으로 이사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나이차가 많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딸만 있는 남편이 아들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쩐 이유인지 이듬해인 1914년에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결혼을 추진한 것이라서 이혼의 대가는 컸다. 생계가 더욱 막막해 진 것이다. 순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고된 교육과정을 거쳤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에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어느덧 수원에서 이름 있는 기생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망곡례가 끝나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한없이 서글펐다. 기생 동기들과 함께 한 길이지만 외롭고 쓸쓸했다. 임금도 독살당했다고 하고 나라도 망했다는데 어디하나 기댈 곳이 없다. 함께 간 친구들도 얼굴표정이 어둡다. 앞으로 다가올 답답하고 어두운 미래를 예감하는 것 같다. 이 기차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타고 내려간다. 남녀노소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매일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한다는 여학생도 있는데, 흰저고리에 검은치마, 그리고 앞 이마이에서부터 머리를 높게 올려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를 하고 다닌다. 유명한 나부자집 딸인 나혜석이나 박충애도 홍보배도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부는 서울로 진학했다고 한다. 홍보배는 산루리 이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집은 시아버지가 금대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녀를 모두 공부를 시킨 대단한 집이라고 한다. 그 집 두 딸도 모두 서울로 유학을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언니 현경은 지금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고, 동생 선경은 지금 숙명여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향화도 여학교를 다녔으면 기생으로 살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같은 공간 다른 모습으로 2 여학생으로 산루리 이씨 집안의 막내딸 이선경은 서울로 가기 위해 새벽부터 매산로 길을 걸어 수원역으로 향한다. 이른 새벽이라 고단하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신학교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보냈으니 열심히 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인이나 친지들도 서울로 교육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 이학구는 교동에 있는 수원성공회에 열심히 다니신다. 그래서 세례도 받았는데 요한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천유니사, 큰 오빠는 디모듸, 막내 동생은 그레고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선경도 세례를 받았겠지만 세례명을 알 수 없다. 이선경은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서울 기차 통학생이었다. 올케는 삼일여학교를 졸업했고, 언니는 동경의 일본여자대학으로 유학도 했고, 이선경은 숙명여교를 다니고 있다. 막내 동생도 이용성도 야구를 좋아해서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로 진학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 3월의 함성, 두 명의 수원여성 독립운동가 탄생을 알리다 이선경은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신학문을 배운 똑똑한 여학생이라고 하던데 독립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다. 3.1일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월 5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잡혔고 한다. 그런데 15일 만에 무죄로 풀려나왔다고 한다. 소문에는 부모가 딸의 앞날을 생각해서 경찰서에 가서 빼달라고 빌었다는 소리도 있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이선경을 본적은 없지만 대단한 동생인 거 같다. 엄황귀비가 세운 숙명여학교에 다녔다는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에 언니가 졸업한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이선경은 기생인 김향화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수원읍내 이야기는 수원역이나 팔달문 주변으로 금새 퍼져 나간다. 수원 기생 33인이 고종임금의 망곡례에 참여한 이야기는 벌써 동네방네 다 퍼져 나갔다. 일본놈들의 조선지배에 울분을 토하던 학생들이 수원 기생의 용기에 감탄했다. 사실 수원읍내에 이하영, 김세환, 임면수 선생님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로 만주로 다니면서 활동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거기다가 기생들도 나서서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니, 학생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소식이 돌았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부른다고 했다. 이선경도 서울에서 학생들과 힘을 합쳐 만세를 부른 것이리라. 김향화도 이선경과 수원독립운동가들의 용기있는 외침에 부응하여 3월 29일 수원장이 서는 날 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기생들이 봉수당에 있는 자혜의원에서 단체로 정기 위생검진을 받는 날이다. 봉수당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 열렸다는 유서깊은 곳이라는데 일제가 병원을 만들었다. 권번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각종 전염병이나 성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은 몹시 나쁘다. 여기저기 들추는 모양새가 영 기분이 안 좋다. 망한 나라의 국민이어서 이렇게 천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생 동기들과 함께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나서 만세를 불렀다. 사실 자혜의원 오른쪽으론 수원경찰서가 있다. 만세를 부르면 바로 잡혀갈 것이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몰아지는 만세의 기운을 수원에서도 함께 하고자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경찰서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기생들의 만세를 일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을 본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규모가 커졌다. 마침 그날은 수원장이 서는 날이었기 때문에 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시위규모는 더 커졌다. 시장상인들의 마음도 만세를 불렀던 기생들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1927년 동아일보 순회탐방 기사에 정거장 근처부터 일인이 잠식하고 있다고 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전통시장들은 일인으로 대표되는 상권 확장이 전통시장의 위축과 이에 따른 생계 문제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가장 연약한 여성이며 사회적으로 홀대받던 기생들의 만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 대한 탄압에 같이 괴로워하며 힘을 보탰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역시 모두가 잡혀 들어갔다. 하지만 김향화는 주동자로 몰려 더욱 고초를 겪게 되었다. 감옥에서 유관순, 권애라, 어윤희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전국각지에서 모였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똑같았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나왔다. 고문으로 얼굴도 몸도 망가져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 그사이 많은 전국의 만세현장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수원 여학생인 이선경도 박선태가 만든 구국민단에 가입해서 조선의 독립국가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목표를 확고히 했다. 구국민단은 서호와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가졌고,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선경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유관순도, 이선경도 아직 어린 여학생인데 고문을 받아 재판장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선경의 막내동생 이용성이 아픈 누나를 업고 큰 형의 집에 데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경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9살의 나이로 순국을 했다. 김향화도 목숨은 부지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소리로 기생활동을 했다면 더 이상 권번에서 활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 10년을 버텼지만,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 속에서 가족도 대구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아서 버텨봤지만,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20년 쯤 살았던 수원을 떠나 경성부로 떠나버렸다. 그 후 김향화와 이선경은 수원역사에서 이름만 남긴채 자취를 감췄다. ■ 3월, 봄바람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열다 1919년 3월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걸음을 떼는 뜨겁고 격렬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뜨겁고 강렬한 함성으로 대한민국 곳곳을 메운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운명의 3월에 수원군도 함성의 한 축에 서 있었다. 때로는 시장상인으로, 때로는 기생으로, 여학생으로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어떤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날의 함성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목소리였다. 유현희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 연구원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4.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 김혁 장군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바로 옆에는 김혁공원이 위치한다. 김혁공원에는 독립운동가 오석(吾石) 김혁(金赫, 1875~1939) 장군의 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혁장군독립운동기념비 바로 옆에는 그의 11대조인 갈천(葛川) 김원립(金元立, 1590~1649)의 창의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김혁(金赫, 1875~1939)은 칼을 찬 선비 갈천 김원립(葛川 金元立, 1590~1649)의 후예다.(박세채의 김원립 묘갈명 참조) 김원립은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능주목사로서 각처의 의병을 규합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과천에 이르러 수많은 청나라 군대를 무찌른 의병장이다. 갈천 김원립은 구국의병활동으로 국난극복에 앞장서며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인물이다. 김혁은 갈천의 애국정신을 그대로 계승했다. 김혁은 대한제국무관학교 고급장교 출신이다. 김혁이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군대가 강제 해산됐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제국주의는 189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의 늑결(勒結, 굴레로 얽듯이 목을 옭아 맴)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다. 더해 1907년 사법권을 박탈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더니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키며 국권을 침탈한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강탈당하고 일제에 병합되고 말았다. 100여년 전 이 땅의 하늘은 빛을 잃었고 구름의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 칼을 찬 선비 후예, 총을 들다 김혁은 비분강개했다. 더구나 그는 대한제국무관학교 1기생으로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 아닌가. 고향 용인으로 내려온 그는 칼을 찬 선비의 후예로서 총을 들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무관학교 정식과목으로 배운 군사학과 신학문 등도 김혁의 독립운동노선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박환) 그는 1919년 3월 용인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가족마저도 뒤로한 채 홀홀단신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가출옥관계서류, 假出獄關係書類)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듯하다. 1910년경에는 만주지역을 순방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김혁이 대종교에 입교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기간 동안에 나철(1863~1916)이 창설한 대종교에 입교해 사상적으로 무장하며 구국의 길을 모색한다. 대종교는 단군의 고대 강역인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통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고,(박환) 또한 대종교 교도들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도 하나의 커다란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스승 맹보순의 민족의식과 실천 유학을 온몸으로 체화하다 김혁은 어린시절 용인향교(龍仁鄕校)에서 당대 유림계의 거목인 동전 맹보순(東田 孟輔淳, 1862~1933)으로 부터 유학(儒學)을 배운다. 맹보순은 도학의 비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사당 충렬사를 다시 세우기도 하고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심곡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의식 있는 유자(儒者)였다. 그래서 그는 비록 국가가 위기에 처했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약해서 당장 항일의 기치를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낫다는 일부 유림계의 인사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국권을 침탈당한 이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행동하는 유학자였다. 맹보순은 서울에서 유림대회를 열어 일제의 고등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기도 하고, 만주에서도 배일(排日) 조선인의 명단에 오르내리기도 하며, 경성지방법원에서 대동단사건으로 피고인 최익환을 신문할 때 포섭 대상 인물었는지 거론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김혁은 어려서부터 스승 맹보순의 민족의식과 실천하는 유학을 온 몸으로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 대한제국 육군정위에서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 김혁은 먼저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해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흥업단은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조직이었다. 이후 김혁은 흥업단을 떠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로 이동한다. 또한 의용군이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부관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다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활약한다. 이처럼 그는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다양한 세력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그러다 남만주지역의 구심체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이때 김혁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중앙집위원장은 신민부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기관이었다. 이는 김혁이 실질적으로 북만주지역의 독립군 최고지도자였음을 말해준다. 신민부를 조직하고 신민부중앙간부 김좌진, 박성진 등과 함께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 내정, 외교, 무력준비, 경제문제 등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모진 옥고 치르다 순국 신민부에서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김혁은 교장에 임명된다. 부교장은 김좌진이었다. 성동사관학교는 독립군 간부로 500여명을 배출한다. 김혁은 대한제국무관학교의 경험과 항일투쟁 경력, 한학(漢學), 민족의식, 애국정신 등을 총망라해 혁명투사를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극비로 보안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제가 부패한 만주군벌을 매수해 습격하는 바람에 1928년 1월에 김혁을 비롯한 신민부 주요인물 10명이 일본 총영사관 총경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낯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면서 활동했다. 본명은 김학소(金學韶)이나 김혁(金赫)과 또 다른 김혁(金爀)도 사용하며 활동했다. 호는 오석(吾石)과 오석(梧石, 1928년 2월 4일 동아일보) 또 다른 오석(烏石, 독립유공자공훈록4권, 국가보훈처)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석은 그가 속한 어느 독립운동단체에서도 항상 중추적인 위치에서 다양한 세력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구심체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체포되자 신민부는 내부 분열로 인해 와해되고 말았다. 그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혁은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7년형을 구형받는다. 다시 6월 13일 최종 판결에서 10년형을 언도 받는다. 그는 처음 평양감옥에 수감되고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가출옥(假出獄)했으나 9년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용인 본가에서 순국(1936)하고 말았다. ■ 하늘의 빛은 조국의 독립 김혁은 감옥에서도 맹자(孟子) 와 해동시선(海東詩選) 등을 읽었다.(가출옥관계서류) 최근에 발견된 김혁의 친필(용인시민신문, 2월 27일)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구절은 신유학의 태두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라는 시에 나오는 글이다. 反畝方塘一鑑開 반이랑 크기의 네모난 연못에 하나의 거울이 열려 天光雲影共徘徊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돈다 問渠那得淸如許 묻노니 어찌 이리도 맑을 수 있을까 爲有源頭活水來 근원에서 샘물이 흘러오기 때문이라네 안동 도산서원의 서쪽에 위치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또한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이 구절을 애용했다. 오석 김혁 역시 한학을 배운 유학자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그러나 김혁에 있어서 이 구절은 사물을 관조하고 풍류를 즐기는 여느 유학자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한학과 군사학으로 무장한 문무를 겸전한 선비였다. 이 글을 쓴 시점은 만주로 떠나기 전으로 추정된다. 나라가 망해 하늘이 빛을 잃고 구름의 그림자마저 사라져 버렸을 때 김혁은 하늘의 빛을 다시 찾아오고 구름의 그림자를 이 땅에 드리우자고 비장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썼으리라. 하늘의 빛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온통 혼탁한 물로 가득한 조국산천을 생명력 넘치는 활수(活水)로 깨끗이 씻어버리자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였다. 그 소망대로 언제쯤 삼천리금수강산에 싱싱한 활수가 용솟음치고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온전히 비칠까.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 유학자로 만세운동 중심에 선 탄운 이정근 선생

삼일 독립가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십오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발안 장터 만세운동이 벌이기 전에 탄운 이정근 선생이 지은 삼일 독립가는 독립을 염원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4/4조로 된 창가형식의 이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몰래몰래 팔도로 퍼져나갔다. 삼일 독립가는 국립묘지에 있는 이정근 선생의 묘소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1856년(혹은 1863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이연규의 2남으로 태어난 탄운 이정근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17세에 사서오경을 섭렵할 정도로 유학경전에 해박한 유학자였다. 젊은 시절부터 마을아이들을 가르치고 청년과 이웃주민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던 개화한 유학자였던 점이 여느 유학자와 다른 점이다. 손자 이신재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행랑채 2칸과 사랑방 2칸을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집안사람들도 학문에 깊고 지도력이 뛰어난 선생을 어렵게 대해 말 한마디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33세가 되는 1889년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이 무렵 조선의 사정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1895년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고 태워 버려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을미사변의 충격 속에서도 변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은 이어졌다. 1896년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돼 국내외의 정보가 유통되고, 1898년에는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만민공동회라는 민회(民會)를 통해 낡은 정치를 개혁했을 뿐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도 물리쳤던 일은 각성한 인민대중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닫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고종이 일제의 협박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후 대한제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보다 10배 강한 나라라고 알려졌던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열강들의 눈치를 보던 일본이 본색을 드러냈다. ■ 교육으로 사람을 길러 나라를 되찾자 선생은 33세 되던 해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직에 임명됐다. 그러나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한 선생은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을 불러 강학에 전념할 계획을 밝히고 제자들과 지역을 돌며 청년교육에 힘을 쏟았다. 팔탄,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7개 면을 돌며 서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사업을 힘차게 벌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해도 도시와 떨어져 있는 농촌은 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을사늑약 후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지면서 농민들도 그 까닭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뿐이다. 물론 교육운동을 벌이기도 쉽지는 않았다.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총칼로 위협하는 무단정치 하에서 계몽운동마저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낡은 제도인 서당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팔탄을 시작으로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이웃마을을 돌며 서당을 세워 청년들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과 사귀며 대안을 모색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왕 3년이라는 말을 했던 일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켰으나 머잖아 일본은 망해서 물러갈 것이라는 독립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 일로 선생의 활동을 주시하던 경찰에 잡혀가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 발안 장터에 울려 퍼진 만세 소리 1919년 1월,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밀려나 유폐됐던 고종이 승하했다. 고종을 가까이서 모셨던 선생의 슬픔은 지극했다. 선생의 지시를 받은 제자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셔서 서울을 바라보며 곡하는 망곡제를 지냈다. 이러한 일의 배후로 지목된 선생은 다시 주재소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모두가 함구했기에 구류는 살았어도 구속은 면할 수 있었다.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월 20일 제자를 통해 수원의 삼일학교에서 복사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았다. 불령선인으로 요시찰 대상인 선생 자신이 직접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지시는 주로 제자를 통해 이뤄졌다. 그 위험한 일에 아들도 참여시켰다. 만세운동을 벌이는 거사일은 발안 장날인 3월 30일로 결정했다. 그날 만세에 참가하는 사람은 흰 갓을 쓰거나 갓이 없는 사람은 머리에 흰 띠를 둘러 만세에 참여하는 동지임을 나타내도록 약속했다. 남양은 오산, 양감, 조암, 안중, 수원, 고주리 방명으로 이어져 있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다.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을 조직한 선생의 동지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도들로서 백낙열, 김홍근, 안정환, 안정옥, 안종후 같은 이들이다. 30일 한낮, 발안 장터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약속대로 흰 갓을 쓴 선비들과 흰 띠를 두른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정오에 백립을 쓴 초로의 선생을 중심으로 거대한 백색 물결을 이뤘다. 1919년 3월 31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이정근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 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유 할 것 없이 구름 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덧 세월이 52년이 지난 아득한 옛일이 돼 버렸습니다. 1971년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비를 세울 때 참석한 제자 김영태의 추모담이다.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연설을 마친 선생이 만세를 삼창한 후 1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을 이끌고 대열의 앞에 서서 행진을 시작했다. 시장을 벗어나 향한 곳은 주재소였다. 평소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걸핏하면 잡아가 때리고 목욕을 주었던 젊은 일본 순사가 거대한 인파가 물려오는 것을 보고 급히 병력을 요청한 후 착검한 총을 들고 나서서 위협했다. 군중들은 총검을 들고 발악하며 위협하는 순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등을 돌린 순사가 도망가며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하여 사람들이 쓰러졌다. 분노한 사람들이 달려가 돌과 몽둥이로 순사를 처단했다. 얼마 후 연락을 받고 달려온 수원의 수비대 헌병 30여 명이 대검을 장착한 총을 겨누며 대열을 가로 막았다. 중무장한 헌병들은 거침없이 다가와 선두에 있던 선생의 배를 연거푸 찔렀다. 붉은 피가 휜 옷을 물들였다. 선생은 간신히 버티고 서서 흐르는 피를 움켜쥐고 일본 경찰에게 피를 던지다 쓰러졌다. ■ 영원히 살아 있는 정신 그러나 이정근 선생의 행적은 오랜 세월 동안 묻혀있었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공자를 찾아내어 포상하는 일을 미룬 탓이다. 해방 직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선생을 기리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다시 분단과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서 오랜 세월동안 선생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다. 또한 해방 후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이 여러분이 생존해 계셨으나 아쉽게도 그때 선생에 관한 사실을 기록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1968년에야 비로소 공적이 알려져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다시 3년이 지난 1971년 4월 5일에 선생의 고향에 창의비를 세웠다.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이 지은 비문을 보면 이정근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는 제자와 지역민들의 마음이 오롯이 들어있다. 선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현재 선생의 숭고한 뜻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탄운 이정근 의사 기념사업회는 2004년 3월에 장학회를 설립해 선생이 강학을 하셨던 화성시 향남, 팔탄, 양감, 우정, 장안, 봉담 6개 읍면의 학생을 뽑아 해마다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 낮은 자세로 구국 헌신… 민족대표 이종훈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100년 전 3월, 삼천리 방방골골에 뿌려진 기미독립선언서의 한 부분이다. 200만의 조선인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100년 전의 삼월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31운동 이전 위정척사를 앞세우며 일제에 맞선 의병은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양반들이 주체인 반면 태극기로 거리를 뒤덮은 만세운동은 각성한 평민과 학생들이 주도했다. 한 달이 지난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은 왕조의 부활을 거부하고 국민이 주인임을 선언하며 민국을 건설한 혁명이다. 이처럼 위대한 민족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을 리 없다. 31운동이라는 실천의 장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선언한 동학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였던 정암 이종훈(正菴 李鍾勳, 1856~1931)의 생애는 위대한 평민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난 이종훈은 어려서 글 잘 한다는 칭찬을 들을 만큼 총명했으나 14세에 학문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다. 오랜 방랑을 끝내고 21세에 고향에 돌아와 철점을 열어 7년 동안 운영했으나 사업이 어려워지자 서울로 올라가 별군관이라는 하급 무관으로 지냈으나 이 일 또한 그만 두었다. 31세가 되던 해에는 인천으로 가서 한동안 선상 객주노릇을 하며 지냈으나 여기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함경도 함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세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확인한 이종훈은 1893년(고종30) 1월에 동학에 입도했다. 38세의 중년에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이때부터 이종훈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동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듣고 깨우친 동학의 가르침을 주위로 전파하던 그는 여주, 이천, 안성 등 경기도 전역으로 포교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3월에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기치로 열린 충청도 보은집회에 참석하여 소 두 마리와 800냥의 거금을 기부하여 최시형을 비롯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종훈은 집을 떠나 속리산과 용문산에 들어가 수련하며 여름을 보낸 뒤 해월 최시형과 손병희를 찾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이종훈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산 최시형이 그를 경기도 편의장에 임명했다. 189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와 화약을 체결해 호남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정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석 달이 지난 8월 동학봉기를 빌미로 출병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9월 18일, 최시형이 총 기포를 명했다. 관할 지역을 돌며 교도들에게 기포를 권유하여 편성한 경기도 동학군을 이끌던 이종훈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500여 명의 군대와 맞섰다. 이때 이종훈은 이용구와 함께 선유사 정경훈을 만나 담판을 벌여 부대를 10리 밖으로 퇴각시켰다. 이 일로 농민군으로부터 큰 기대와 신뢰를 받게 되었다. 11월, 이종훈은 북접군 통령 손병희의 중군장으로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여 1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크게 패했다. 보은과 음성에서도 거듭 패하자 손병희는 결국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수만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되는 쓰라린 패배였다. 이종훈은 관군의 눈을 피해 도피하면서도 스승 최시형의 보필에 헌신했다. 관의 탄압이 차츰 줄어들자 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풍찬노숙하며 포교에 전념하는 스승을 지원했다. 눈물겨운 포교활동으로 뿌리까지 흔들렸던 동학이 다시 서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6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 간수를 매수하여 옥바라지하던 이종훈은 최시형이 사형을 당하자 한밤중에 스승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밤길을 달려 송파 야산에 안장했다가 2년 후 여주 천덕산으로 이장했다. 이후 이종훈은 관의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최시형의 법통을 이은 의암 손병희를 보좌하며 포교에 헌신했다. 1904년 2월, 이종훈은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가 손병희를 만났다. 귀국 즉시 손병희의 지시대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검은 색 옷을 입고 신생활운동을 벌이며 독립협회의 민회운동 방식을 도입한 대동회를 조직했다. 조선인의 생활문화 전반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민회의 주체가 동학임을 파악한 정부가 다시 교단을 탄압했다. 이용구가 주도하던 진보회는 일진회에 합병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진회는 드러내 놓고 친일을 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할 때 이종훈도 참여하여 교단 정화에 동참했다. 국권이 상실된 그해 이종훈은 장성한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아들 이동수가 귀국하여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고 양평으로 피신한 아들이 용문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던 것이다. ■ 신생활 운동에서 만세운동으로 1912년부터 이종훈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보성사 직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수호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14년 4월, 교인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민족문화의 수호의 의의에 대한 강연을 하던 이종훈은 도중에 형사에게 제지당하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다시는 강연회를 열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난 이후 드러나는 활동은 모두 중지하고 비밀결사로만 활동했다. 1916년 봄, 이종훈은 이종일, 김홍규 등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세계정세에 밝고 민족운동에 열성을 보이던 이종일이 명망가들을 찾아가 민중운동의 선봉이 되어달라고 청원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공감한 이종훈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상재를 만나 연합운동을 제안했다. 이상재도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자신이 기독교를 동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민족연합전선을 민중운동의 방략으로 정한 이들은 손병희에게 앞장 서줄 것을 요청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 구국단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민중운동을 준비했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유고폴란드가 민족 자주권을 선언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천도교단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이종훈, 권동진 등이 모임을 갖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으로 민중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중화는 각계각층의 민중을 동원하는 것, 일원화는 여러 계층의 독립운동 계획을 하나로 대동 통합하는 것, 비폭력은 동학혁명의 경험에서 얻은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를 무오독립시위운동이라 하고 거사일은 9월 9일로 정했으나 이 계획은 준비의 부족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만주에서도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했다. 독살설이 널리 퍼져 반일감정이 높아졌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약소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퍼져나가는 등 안팎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계획대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학생들과의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일제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이종훈은 1919년 2월에 손병희, 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이종훈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인 65세였다. 3월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보성전문 학생이던 손자 이태운도 방정환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서울 시내에 배포했다. 이종훈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많은 지사들이 옥중에서 목숨을 잃은 것처럼 감옥생활은 혹독했으나 잘 견디고 1921년 11월 4일에 출옥했다. 동지 이종일은 (이종훈이 옥중에서)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마음이 든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출소한 이종훈은 천도교 내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던 혁신운동을 지지했다. 1926년에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가 고려혁명당의 창당했을 때 이종훈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성정이 강직하여 한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다는 그의 성향은 노년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민족문화를 지키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이종훈은 1931년 5월 2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 프롤로그

백두에서 한라까지 삼천리 방방곡곡 위대한 함성이 터지고 있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흰 옷 입은 백성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외친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이 함성은 단순히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어떠한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문화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이상이 담긴 대투쟁이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었다. 봉건왕조 체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가 시작된 날이다. 고종황제의 죽음은 한 왕조가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5천 년간 이어진 우리 역사에서 봉건체제가 완전히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을 인정하고 이들을 존중하는 시대가 새로 열린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혁명은 바로 우리 민초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나아가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저항 운동으로 연결되며 세계사를 바꾸는 한 축이 됐다. 올해 우리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게 됐다. 단순히 100년이라고 하는 시간적 관계 때문에 전 국민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 3.1운동을 통해 우리 역사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이를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열망하던 민족자결주의의 실천 의지를 어떤 국가보다도 먼저 보여준 것이다. 한 민족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 국민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서구의 다수 제국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외면한 채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3.1운동을 계기로 봉건체제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천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을 3.1혁명이라 불러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 3.1 운동의 중심, 경기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3.1운동은 경기도에서 가장 치열하고 깊이 있게 전개됐다. 비록 33인의 민족대표가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종묘 옆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지만 경기도는 항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기에 3.1 운동 역시 경기도가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1919년 3월 1일은 고종황제의 국장(國葬) 일이었다. 친일파들의 간악한 행위로 고종은 독살을 당했고, 덕수궁에서 국장을 치르기 위한 대여(大轝)가 동대문을 거쳐 양주 금곡(현재의 구리시 금곡동)으로 이동하는 도중 종로거리에 있는 파고다 공원에 많은 인파가 모이게 됐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투쟁은 갑작스럽게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경기도 백성들의 독립 투쟁은 조직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3.1운동의 3대 성지를 경기도 수원과 안성 그리고 황해도 수안이라고 정리하고 있는데 세 곳 중 두 곳이 경기지역인 것을 보면 당시 경기도의 대일 항쟁이 얼마나 거셌는지 잘 알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이병헌의 3.1운동 비사(秘史)에 의하면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친 곳은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수원지역이었다.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의 핵심 장소인 방화수류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바로 경기도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은 화성시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치열했던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안성 양성면 만세고개에서의 항쟁은 그 어떤 투쟁 보다도 격렬하고 치열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경기지역 곳곳은 바로 3.1운동의 피맺힌 항거의 공간이었다.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경기도의 3.1운동은 누구에 의해 추진된 것일까? 경기도는 예로부터 나라의 중심이고, 국방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5대 군사 요충지는 압록강 아래의 백마산성, 파주의 임진나루, 고양의 북한산성, 광주의 남한산성, 수원(현재 오산)의 독성산성이었다. 5대 군사요충지의 4곳이 바로 경기지역에 있다. 이는 경기지역이 나라를 지키는 근본의 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 지역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나라를 지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러한 자부와 책임감이 대대로 전해졌고, 결국 3.1 만세운동으로 격렬하게 나타났다. 양반사대부들과 지식인들의 항거도 대단했지만, 경기도 3.1운동은 민초들의 운동이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기녀 김향화였다. 김향화는 수원의 기녀로서 고종황제의 죽음 이후 가무(歌舞)를 끊은 뒤 상복을 입고 머리에 나무 비녀를 꽂았다. 그리고 매주 1회 서울로 동료 기녀들을 데리고 올라가 덕수궁에서 곡(哭)을 하고 내려왔다. 그녀는 3월 1일 이후 지속적인 만세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독립운동의 의지를 꺽지 않아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됐다. 이처럼 기녀들까지 참여한 경기도 독립만세 투쟁은 역사 속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3.1운동의 역사적 인물들은 대부분 민족대표 33이나 혹은 48인을 중심으로 하는 명망가들이다. 그러나 경기지역의 3.1운동을 이끌어간 이들의 상당수는 김향화 처럼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이다. 남존여비 사상이 존재하던 시절 여성에다 그것도 천민으로 취급받던 기녀가 3.1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중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화성 지역의 차희식, 백낙열, 공칠보, 파주의 임명애 등은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인물들이 민족의 자주와 인간의 평등을 요구하는 항쟁의 선두에 섰다. 물론 경기지역 3.1운동에 명문가 출신의 안재홍 지사 같은 사람이 기여한 것도 부인할 수 없으나, 경기도 평민들의 항쟁은 3.1운동사에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할 것인가? 올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선조들의 얼을 기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100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100년의 시작을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100년 전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헌법에 민주공화정을 천명한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등 약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권력과 금력이 법과 정의를 뛰어넘어 불평등 사회를 만드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외쳤듯 남과 북의 국민들이 더 이상 이념대결로 서로를 배척하지 말고 하나가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문화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 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백범이 꿈꾸던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 만들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 만들기를 위해 2019년 경기일보의 특별기획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다가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 연재를 통해 경기도의 각 지역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주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경기인들이 삶과 자연스레 비교하며 자랑스런 경기의 역사를 보여주도록 노력 할 것이다. 이 연재를 위해 경기도와 경기일보, 현장을 답사하고 역사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해 줄 전문가들을 대신해 대표 필자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제 북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반드시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준혁(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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