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8. 청년 원태우,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다

을사늑약 원흉 이토 히로부미 향해 돌팔매

■ 을사늑약, 일제가 대한을 삼키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역사가 정교는 <대한계년사>에 그날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17일 이른 아침, 5강[한강·동작진·마포·서강·양화진] 각처에 주둔하였던 일본병이 모두 경성으로 들어왔다. 기병 700~800 명과 포병 4천~5천 명·보병 2만~3만 명이 사방으로 가로 세로 달리니 우리나라 사람은 촌보(寸步)의 자유도 없었다. 궁성 안팎을 두어 겹으로 둘러싸니 대소 관리가 나고 들며 떨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그 수행원 및 그 부하의 무관과 다수의 보병·기병·헌병이 순사 및 고문관, 보좌원들과 연속하여 풍우처럼 대궐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각 문을 파수하고 수옥헌 지척에도 겹겹이 둘러서니 총과 칼이 총총히 벌여서 철통같았다. …이어 그 인장을 받아가지고 회의석으로 들어가서 그만 누르니 그 때가 18일 상오 한 점 종이 칠 때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실이 알려지자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으며,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통곡했다. 늑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문이 쏟아졌으며, 경운궁 앞에서 수천의 시민들이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상소와 항의로는 늑약의 폐기와 오적 처단을 기대할 수 없었다.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오적을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을사늑약을 자세히 보도하여 일제의 침략의 진상을 널리 알린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위암 장지연의 사설을 발표했다.

“…우리 태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성의로 끝내 거절하셨으니 그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생각하건대 이등후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아! 저 돼지 개만도 못한 소위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리를 노리고 공갈을 겁내서 움찔움찔 물러서고 움츠려 떨면서, 매국의 적이 되어 3천리 강토와 500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몰아내도다. …애통하고 애통한 일이로다. 동포여! 동포여!”

2천만 동포가 다 함께 울면서 읽었던 글이다. 한국인을 몹시 사랑했던 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2월 1일자에 ‘늑약무효’라는 기사를 실었다.

“지금 일본이 군사를 이끌고 황궁 안으로 들어가 위협하고 억지로 외부대신을 시켜 인장을 누르고 가져가니, 이것은 잔약 질병의 사람을 위협하여 강제로 증서를 작성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만국 공법에 강제로 작성한 조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한·일간의 새 조약은 신용 없고 효과 없고 능력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 그리고 을사오적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원한은 골수에 맺혔다.

■ 원태우, 이토 히로부미를 표적으로 삼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元泰祐, 1882~1950, 원태근·김시근·김태근으로도 불림)는 안양동에서 원태성과 이호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헌병대장이 사건 직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20세 김태근으로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주지만 호적을 추적하여 1882년에 출생했으며 본명이 원태우인 것으로 밝혀졌다. 원태우는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부터 의기를 높이고 바른 일에 앞장 서는 정신과 기백을 가진 젊은이였다. 을사늑약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던 그는 이토가 열차로 수원 지방을 구경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친구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결의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닷새가 지난 1905년 11월 22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늑약 체결의 일본 측 담당자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와 함께 특별열차를 타고 남대문역(서울역)을 출발하여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 화성을 둘러보고 팔달산에 올라 주변 경치를 구경한 이토 일행은 수원에서 안양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즐겼다. 안양에서 잠시 휴식한 이들은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행 열차를 탔다. 한편 침략의 원흉 이토와 하야시가 탄 열차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한 원태우와 그의 친구들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술을 나눠 마시고 철도 레일에 돌을 올려놓고 열차를 기다렸다. 열차가 레일을 벗어나면 원흉 이토와 하야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물론 이번 거사는 단순한 객기일 수가 없었다. 일제는 그해 1월에 개통한 경부선 철도를 파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월 3일에 한국인 3명을 체포해 공개처형한 사실이 있다.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어도 사형 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멀리서 기차가 보이자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이만여가 갑자기 철로 위에 놓았던 돌을 치우고 달아났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철로에 다시 돌을 올려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 절호의 기회를 흘려버릴 수 없었던 원태우는 주먹만 한 화강석 돌멩이를 주워 들고 열차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열차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자 원태우는 열차로 달려들며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를 겨냥해 돌멩이를 던졌다. 열차가 출발하고 약 2분이 지난 오후 6시 17분, 경부철도 안양역에서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진 언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원태우가 던진 돌멩이는 이토와 하야시가 탄 객차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토의 왼쪽 눈꺼풀과 얼굴 여덟 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아수라장이 된 열차는 현장에서 1시간이나 머물러 8시에야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사건 직후 원태우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거느린 헌병과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태우는 철도방해죄로 징역 2개월에 곤장 100대를 선고 받았다. 열차 전복을 계획하고 목숨을 노렸던 사건치고 형량이 적은 것은 당사자 이토가 가벼운 죄로 처벌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조선 청년에게 아량을 보여 초대 총독인 자신의 대범함을 선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초대 통감 시절의 이토와 매국노 이지용.
초대 통감 시절의 이토와 매국노 이지용.

이틀이 지난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한편 11월 23일자 <오사카매일신문>과 11월 29일자 <도쿄매일신문>에도 이 사건이 보도될 정도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12월 8일에는 일본 박물관 기관지 <일로전쟁화보>에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삽화가 실렸는데,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시흥군수 김종국이 파면되고 경기도관찰사 정주영은 견책을 당했다.

혹독한 매질과 고문으로 원태우의 건장했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죽기를 각오했던 그는 아무런 숨김없이 혐의 사실을 솔직하게 밝혔다. 영등포감옥에서 두 달을 보내고 이듬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으나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흉터가 너무 심해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정도였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성기에도 심한 고문을 가해 자녀를 둘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원태우 지사를 본받은 투쟁이 또 일어났다. 1906년 6월 하순, 일본에 갔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이었다. 안양에서 10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선비가 이토가 탄 열차에 돌을 던졌다. 이번에도 열차의 유리창을 깨트렸으나 이토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경찰과 헌병이 그 선비를 붙잡아 헌병사령부로 연행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배후를 캐물었으나 단독 거사로 밝혀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

1910년 8월 29일, 지도상에서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나라가 아주 망하면서 원태우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몸이 불구가 되어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자 형 원영우의 삼남인 원계복이 숙부를 뒷바라지했다고 전한다. 만년에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임곡동에서 살았던 원태우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에 별세했다. 고단한 그의 육신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 공동묘지에 묻혔다.

■ 의로운 이름을 기억하자

안양시는 원태우 지사의 애국활동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을 꾸준하게 벌이고 있다. 안양역 입구 벽면에 원태우 지사의 초상을 새긴 부조를 비롯하여 만안도서관에는 원태우 지사의거비가 설치되어 있다. 자유공원에도 지사의 흉상이 있고 이토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 표지석을 세워 지사의 의거를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고증에 아쉬움이 있다. 지사가 거사를 감행할 때 20대 청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흉상과 부조는 40대 장년의 얼굴이다. 원태우 지사는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사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별세하였다. 놀랍게도 지사가 별세하고 40년 세월이 더 흐른 1990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수훈을 인정받았다. 왜 이처럼 오랫동안 지사의 의로운 투쟁이 묻혀 있었을까? 통렬히 반성해야할 일이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905년 1월 3일 일본군이 한국인 3명을 철도파괴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905년 1월 3일 일본군이 한국인 3명을 철도파괴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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