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5. 여성독립운동가 김향화·이선경

기생·여학생 ‘대한의 딸’ 소망은 오직 ‘대한 독립’

이글은 수원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김향화와 이선경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운명의 해, 1919년

1919년 1월 27일, 고종임금이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온 천하에 파다했다. 비록 망한 나라이긴 했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독살을 당하다니, 그것도 한국역사상 가장 오랜 라이벌인 일본에게 말이다. 하지만 독살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으리라. 고종임금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해서 마음에 맺힌 억울함과 분노가 사람들에게 몰아쳤다. 분노는 서릿발이 되어 3월에도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해 춘삼월에는 그렇게 꽃이 피지 않았다. 잔인한 3월, 고통스러운 3월의 서막이 올랐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3월을 빼앗겼다.

■ 같은 공간 다른 모습으로 1… 기생으로

나 김향화는 기생이다. 2019년 1월 고종임금의 망곡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서글피 울었다. 김향화의 원래 이름은 순이이다. 1913년 수원으로 이사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나이차가 많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딸만 있는 남편이 아들을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쩐 이유인지 이듬해인 1914년에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결혼을 추진한 것이라서 이혼의 대가는 컸다. 생계가 더욱 막막해 진 것이다. 순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고된 교육과정을 거쳤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덕에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어느덧 수원에서 이름 있는 기생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망곡례가 끝나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한없이 서글펐다. 기생 동기들과 함께 한 길이지만 외롭고 쓸쓸했다. 임금도 독살당했다고 하고 나라도 망했다는데 어디하나 기댈 곳이 없다. 함께 간 친구들도 얼굴표정이 어둡다. 앞으로 다가올 답답하고 어두운 미래를 예감하는 것 같다.

이 기차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타고 내려간다. 남녀노소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매일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한다는 여학생도 있는데, 흰저고리에 검은치마, 그리고 앞 이마이에서부터 머리를 높게 올려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를 하고 다닌다.

유명한 나부자집 딸인 나혜석이나 박충애도 홍보배도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부는 서울로 진학했다고 한다. 홍보배는 산루리 이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집은 시아버지가 금대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녀를 모두 공부를 시킨 대단한 집이라고 한다. 그 집 두 딸도 모두 서울로 유학을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언니 현경은 지금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고, 동생 선경은 지금 숙명여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향화도 여학교를 다녔으면 기생으로 살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혜의원으로 쓰인 봉수당
자혜의원으로 쓰인 봉수당

■ 같은 공간 다른 모습으로 2… 여학생으로

산루리 이씨 집안의 막내딸 이선경은 서울로 가기 위해 새벽부터 매산로 길을 걸어 수원역으로 향한다. 이른 새벽이라 고단하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신학교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보냈으니 열심히 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인이나 친지들도 서울로 교육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 이학구는 교동에 있는 수원성공회에 열심히 다니신다. 그래서 세례도 받았는데 요한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천유니사, 큰 오빠는 디모듸, 막내 동생은 그레고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선경도 세례를 받았겠지만 세례명을 알 수 없다. 이선경은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서울 기차 통학생이었다. 올케는 삼일여학교를 졸업했고, 언니는 동경의 일본여자대학으로 유학도 했고, 이선경은 숙명여교를 다니고 있다. 막내 동생도 이용성도 야구를 좋아해서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로 진학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 3월의 함성, 두 명의 수원여성 독립운동가 탄생을 알리다

이선경은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신학문을 배운 똑똑한 여학생이라고 하던데 독립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다. 3.1일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월 5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잡혔고 한다. 그런데 15일 만에 무죄로 풀려나왔다고 한다. 소문에는 부모가 딸의 앞날을 생각해서 경찰서에 가서 빼달라고 빌었다는 소리도 있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이선경을 본적은 없지만 대단한 동생인 거 같다. 엄황귀비가 세운 숙명여학교에 다녔다는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에 언니가 졸업한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이선경은 기생인 김향화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수원읍내 이야기는 수원역이나 팔달문 주변으로 금새 퍼져 나간다. 수원 기생 33인이 고종임금의 망곡례에 참여한 이야기는 벌써 동네방네 다 퍼져 나갔다. 일본놈들의 조선지배에 울분을 토하던 학생들이 수원 기생의 용기에 감탄했다.

사실 수원읍내에 이하영, 김세환, 임면수 선생님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로 만주로 다니면서 활동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거기다가 기생들도 나서서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니, 학생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소식이 돌았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부른다고 했다. 이선경도 서울에서 학생들과 힘을 합쳐 만세를 부른 것이리라.

김향화도 이선경과 수원독립운동가들의 용기있는 외침에 부응하여 3월 29일 수원장이 서는 날 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기생들이 봉수당에 있는 자혜의원에서 단체로 정기 위생검진을 받는 날이다. 봉수당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 열렸다는 유서깊은 곳이라는데 일제가 병원을 만들었다. 권번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각종 전염병이나 성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은 몹시 나쁘다. 여기저기 들추는 모양새가 영 기분이 안 좋다.

망한 나라의 국민이어서 이렇게 천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생 동기들과 함께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나서 만세를 불렀다. 사실 자혜의원 오른쪽으론 수원경찰서가 있다. 만세를 부르면 바로 잡혀갈 것이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몰아지는 만세의 기운을 수원에서도 함께 하고자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경찰서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기생들의 만세를 일본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을 본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규모가 커졌다. 마침 그날은 수원장이 서는 날이었기 때문에 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시위규모는 더 커졌다.

시장상인들의 마음도 만세를 불렀던 기생들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1927년 동아일보 순회탐방 기사에 정거장 근처부터 일인이 잠식하고 있다고 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전통시장들은 일인으로 대표되는 상권 확장이 전통시장의 위축과 이에 따른 생계 문제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가장 연약한 여성이며 사회적으로 홀대받던 기생들의 만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 대한 탄압에 같이 괴로워하며 힘을 보탰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이선경 판결문
이선경 판결문

역시 모두가 잡혀 들어갔다. 하지만 김향화는 주동자로 몰려 더욱 고초를 겪게 되었다. 감옥에서 유관순, 권애라, 어윤희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전국각지에서 모였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똑같았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나왔다. 고문으로 얼굴도 몸도 망가져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

그사이 많은 전국의 만세현장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수원 여학생인 이선경도 박선태가 만든 구국민단에 가입해서 조선의 독립국가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목표를 확고히 했다. 구국민단은 서호와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가졌고,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선경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유관순도, 이선경도 아직 어린 여학생인데 고문을 받아 재판장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선경의 막내동생 이용성이 아픈 누나를 업고 큰 형의 집에 데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경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9살의 나이로 순국을 했다.

김향화도 목숨은 부지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소리로 기생활동을 했다면 더 이상 권번에서 활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 10년을 버텼지만,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 속에서 가족도 대구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아서 버텨봤지만,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20년 쯤 살았던 수원을 떠나 경성부로 떠나버렸다. 그 후 김향화와 이선경은 수원역사에서 이름만 남긴채 자취를 감췄다.

■ 3월, 봄바람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열다

1919년 3월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걸음을 떼는 뜨겁고 격렬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뜨겁고 강렬한 함성으로 대한민국 곳곳을 메운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운명의 3월에 수원군도 함성의 한 축에 서 있었다. 때로는 시장상인으로, 때로는 기생으로, 여학생으로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어떤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날의 함성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목소리였다.

 

성공회
성공회

유현희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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