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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4.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 김혁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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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4.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 김혁 장군

온몸바쳐 독립군 양성·체계화 서대문형무소 옥고 끝내 숨져

서대문형무소 내부와 김혁 장군.
서대문형무소 내부와 김혁 장군.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바로 옆에는 김혁공원이 위치한다. 김혁공원에는 독립운동가 오석(吾石) 김혁(金赫, 1875~1939) 장군의 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혁장군독립운동기념비 바로 옆에는 그의 11대조인 갈천(葛川) 김원립(金元立, 1590~1649)의 창의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김혁(金赫, 1875~1939)은 ‘칼을 찬 선비’ 갈천 김원립(葛川 金元立, 1590~1649)의 후예다.(박세채의 김원립 묘갈명 참조) 김원립은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능주목사로서 각처의 의병을 규합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과천에 이르러 수많은 청나라 군대를 무찌른 의병장이다. 갈천 김원립은 구국의병활동으로 국난극복에 앞장서며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인물이다. 김혁은 갈천의 애국정신을 그대로 계승했다.

김혁은 대한제국무관학교 고급장교 출신이다. 김혁이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군대가 강제 해산됐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제국주의는 189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의 늑결(勒結, 굴레로 얽듯이 목을 옭아 맴)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다. 더해 1907년 사법권을 박탈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더니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키며 국권을 침탈한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강탈당하고 일제에 병합되고 말았다. 100여년 전 이 땅의 하늘은 빛을 잃었고 구름의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 칼을 찬 선비 후예, 총을 들다

김혁은 비분강개했다. 더구나 그는 대한제국무관학교 1기생으로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 아닌가. 고향 용인으로 내려온 그는 ‘칼을 찬 선비’의 후예로서 총을 들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무관학교 정식과목으로 배운 군사학과 신학문 등도 김혁의 독립운동노선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박환) 그는 1919년 3월 용인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가족마저도 뒤로한 채 홀홀단신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가출옥관계서류, 假出獄關係書類)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듯하다.

1910년경에는 만주지역을 순방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김혁이 대종교에 입교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기간 동안에 나철(1863~1916)이 창설한 대종교에 입교해 사상적으로 무장하며 구국의 길을 모색한다. 대종교는 단군의 고대 강역인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통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고,(박환) 또한 대종교 교도들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도 하나의 커다란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스승 맹보순의 민족의식과 실천 유학을 온몸으로 체화하다

김혁은 어린시절 용인향교(龍仁鄕校)에서 당대 유림계의 거목인 동전 맹보순(東田 孟輔淳, 1862~1933)으로 부터 유학(儒學)을 배운다. 맹보순은 도학의 비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사당 충렬사를 다시 세우기도 하고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심곡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의식 있는 유자(儒者)였다. 그래서 그는 비록 국가가 위기에 처했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약해서 당장 항일의 기치를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낫다는 일부 유림계의 인사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국권을 침탈당한 이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행동하는 유학자였다. 맹보순은 서울에서 유림대회를 열어 일제의 고등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기도 하고, 만주에서도 배일(排日) 조선인의 명단에 오르내리기도 하며, 경성지방법원에서 대동단사건으로 피고인 최익환을 신문할 때 포섭 대상 인물었는지 거론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김혁은 어려서부터 스승 맹보순의 민족의식과 실천하는 유학을 온 몸으로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든 김혁 장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든 김혁 장군.

■ 북만주 독립군 최고지도자

대한제국 육군정위에서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 김혁은 먼저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해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흥업단은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는 조직이었다. 이후 김혁은 흥업단을 떠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로 이동한다. 또한 의용군이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부관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다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활약한다. 이처럼 그는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다양한 세력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그러다 남만주지역의 구심체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이때 김혁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중앙집위원장은 신민부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기관이었다. 이는 김혁이 실질적으로 북만주지역의 독립군 최고지도자였음을 말해준다. 신민부를 조직하고 신민부중앙간부 김좌진, 박성진 등과 함께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 내정, 외교, 무력준비, 경제문제 등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모진 옥고 치르다 순국

신민부에서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김혁은 교장에 임명된다. 부교장은 김좌진이었다. 성동사관학교는 독립군 간부로 500여명을 배출한다. 김혁은 대한제국무관학교의 경험과 항일투쟁 경력, 한학(漢學), 민족의식, 애국정신 등을 총망라해 혁명투사를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극비로 보안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제가 부패한 만주군벌을 매수해 습격하는 바람에 1928년 1월에 김혁을 비롯한 신민부 주요인물 10명이 일본 총영사관 총경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낯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면서 활동했다. 본명은 김학소(金學韶)이나 김혁(金赫)과 또 다른 김혁(金爀)도 사용하며 활동했다. 호는 오석(吾石)과 오석(梧石, 1928년 2월 4일 동아일보) 또 다른 오석(烏石, 독립유공자공훈록4권, 국가보훈처)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석은 그가 속한 어느 독립운동단체에서도 항상 중추적인 위치에서 다양한 세력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구심체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체포되자 신민부는 내부 분열로 인해 와해되고 말았다. 그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혁은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7년형을 구형받는다. 다시 6월 13일 최종 판결에서 10년형을 언도 받는다. 그는 처음 평양감옥에 수감되고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가출옥(假出獄)했으나 9년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용인 본가에서 순국(1936)하고 말았다.

갈천공 김원립 선생 창의근국기념비(왼쪽)와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오른쪽).
갈천공 김원립 선생 창의근국기념비(왼쪽)와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오른쪽).

■ 하늘의 빛은 조국의 독립

김혁은 감옥에서도 맹자(孟子)

와 해동시선(海東詩選) 등을 읽었다.(가출옥관계서류) 최근에 발견된 김혁의 친필(용인시민신문, 2월 27일)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구절은 신유학의 태두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라는 시에 나오는 글이다.

反畝方塘一鑑開 반이랑 크기의 네모난 연못에 하나의 거울이 열려

天光雲影共徘徊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돈다

問渠那得淸如許 묻노니 어찌 이리도 맑을 수 있을까

爲有源頭活水來 근원에서 샘물이 흘러오기 때문이라네

안동 도산서원의 서쪽에 위치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또한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이 구절을 애용했다. 오석 김혁 역시 한학을 배운 유학자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그러나 김혁에 있어서 이 구절은 사물을 관조하고 풍류를 즐기는 여느 유학자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한학과 군사학으로 무장한 문무를 겸전한 선비였다. 이 글을 쓴 시점은 만주로 떠나기 전으로 추정된다.

나라가 망해 하늘이 빛을 잃고 구름의 그림자마저 사라져 버렸을 때 김혁은 하늘의 빛을 다시 찾아오고 구름의 그림자를 이 땅에 드리우자고 비장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썼으리라. 하늘의 빛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온통 혼탁한 물로 가득한 조국산천을 생명력 넘치는 활수(活水)로 깨끗이 씻어버리자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였다. 그 소망대로 언제쯤 삼천리금수강산에 싱싱한 활수가 용솟음치고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온전히 비칠까.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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