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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 유학자로 만세운동 중심에 선 탄운 이정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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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 유학자로 만세운동 중심에 선 탄운 이정근 선생

일제 총칼 최후 순간까지 “대한독립” 핏빛 외침

삼일 독립가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십오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발안 장터 만세운동이 벌이기 전에 탄운 이정근 선생이 지은 ‘삼일 독립가’는 독립을 염원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4/4조로 된 창가형식의 이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몰래몰래 팔도로 퍼져나갔다. 삼일 독립가는 국립묘지에 있는 이정근 선생의 묘소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1856년(혹은 1863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이연규의 2남으로 태어난 탄운 이정근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17세에 사서오경을 섭렵할 정도로 유학경전에 해박한 유학자였다. 젊은 시절부터 마을아이들을 가르치고 청년과 이웃주민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던 개화한 유학자였던 점이 여느 유학자와 다른 점이다.

손자 이신재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행랑채 2칸과 사랑방 2칸을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집안사람들도 학문에 깊고 지도력이 뛰어난 선생을 어렵게 대해 말 한마디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33세가 되는 1889년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이 무렵 조선의 사정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1895년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고 태워 버려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을미사변의 충격 속에서도 변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은 이어졌다. 1896년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돼 국내외의 정보가 유통되고, 1898년에는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만민공동회라는 민회(民會)를 통해 낡은 정치를 개혁했을 뿐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도 물리쳤던 일은 각성한 인민대중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닫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고종이 일제의 협박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후 대한제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보다 10배 강한 나라라고 알려졌던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열강들의 눈치를 보던 일본이 본색을 드러냈다.

■ 교육으로 사람을 길러 나라를 되찾자

선생은 33세 되던 해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직에 임명됐다. 그러나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한 선생은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을 불러 강학에 전념할 계획을 밝히고 제자들과 지역을 돌며 청년교육에 힘을 쏟았다. 팔탄,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7개 면을 돌며 서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사업을 힘차게 벌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해도 도시와 떨어져 있는 농촌은 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을사늑약 후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지면서 농민들도 그 까닭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뿐이다. 물론 교육운동을 벌이기도 쉽지는 않았다.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총칼로 위협하는 무단정치 하에서 계몽운동마저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낡은 제도인 서당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팔탄을 시작으로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이웃마을을 돌며 서당을 세워 청년들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과 사귀며 대안을 모색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왕 3년”이라는 말을 했던 일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켰으나 머잖아 일본은 망해서 물러갈 것이라는 독립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 일로 선생의 활동을 주시하던 경찰에 잡혀가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탄운 이정근 선생 창의탑 입구에 서있는 ‘삼일 독립가’ 노래비.
탄운 이정근 선생 창의탑 입구에 서있는 ‘삼일 독립가’ 노래비.

■ 발안 장터에 울려 퍼진 만세 소리

1919년 1월,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밀려나 유폐됐던 고종이 승하했다. 고종을 가까이서 모셨던 선생의 슬픔은 지극했다. 선생의 지시를 받은 제자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셔서 서울을 바라보며 곡하는 ‘망곡제’를 지냈다. 이러한 일의 배후로 지목된 선생은 다시 주재소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모두가 함구했기에 구류는 살았어도 구속은 면할 수 있었다.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월 20일 제자를 통해 수원의 삼일학교에서 복사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았다. 불령선인으로 요시찰 대상인 선생 자신이 직접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지시는 주로 제자를 통해 이뤄졌다. 그 위험한 일에 아들도 참여시켰다. 만세운동을 벌이는 거사일은 발안 장날인 3월 30일로 결정했다. 그날 만세에 참가하는 사람은 흰 갓을 쓰거나 갓이 없는 사람은 머리에 흰 띠를 둘러 만세에 참여하는 동지임을 나타내도록 약속했다. 남양은 오산, 양감, 조암, 안중, 수원, 고주리 방명으로 이어져 있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다.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을 조직한 선생의 동지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도들로서 백낙열, 김홍근, 안정환, 안정옥, 안종후 같은 이들이다.

30일 한낮, 발안 장터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약속대로 흰 갓을 쓴 선비들과 흰 띠를 두른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정오에 백립을 쓴 초로의 선생을 중심으로 거대한 백색 물결을 이뤘다.

“1919년 3월 31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이정근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 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유 할 것 없이 구름 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덧 세월이 52년이 지난 아득한 옛일이 돼 버렸습니다.”

1971년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비를 세울 때 참석한 제자 김영태의 추모담이다.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연설을 마친 선생이 만세를 삼창한 후 1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을 이끌고 대열의 앞에 서서 행진을 시작했다. 시장을 벗어나 향한 곳은 주재소였다.

평소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걸핏하면 잡아가 때리고 목욕을 주었던 젊은 일본 순사가 거대한 인파가 물려오는 것을 보고 급히 병력을 요청한 후 착검한 총을 들고 나서서 위협했다. 군중들은 총검을 들고 발악하며 위협하는 순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등을 돌린 순사가 도망가며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하여 사람들이 쓰러졌다. 분노한 사람들이 달려가 돌과 몽둥이로 순사를 처단했다. 얼마 후 연락을 받고 달려온 수원의 수비대 헌병 30여 명이 대검을 장착한 총을 겨누며 대열을 가로 막았다. 중무장한 헌병들은 거침없이 다가와 선두에 있던 선생의 배를 연거푸 찔렀다. 붉은 피가 휜 옷을 물들였다. 선생은 간신히 버티고 서서 흐르는 피를 움켜쥐고 일본 경찰에게 피를 던지다 쓰러졌다.

수원에서 발안으로 가는 마을 초입에 자리한 탄운 이정근 선생 창의비.
수원에서 발안으로 가는 마을 초입에 자리한 탄운 이정근 선생 창의비.

■ 영원히 살아 있는 정신

그러나 이정근 선생의 행적은 오랜 세월 동안 묻혀있었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공자를 찾아내어 포상하는 일을 미룬 탓이다. 해방 직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선생을 기리는 모임을 가졌다.

이후 다시 분단과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서 오랜 세월동안 선생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다. 또한 해방 후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이 여러분이 생존해 계셨으나 아쉽게도 그때 선생에 관한 사실을 기록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1968년에야 비로소 공적이 알려져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다시 3년이 지난 1971년 4월 5일에 선생의 고향에 창의비를 세웠다.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이 지은 비문을 보면 이정근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는 제자와 지역민들의 마음이 오롯이 들어있다. 선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현재 선생의 숭고한 뜻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탄운 이정근 의사 기념사업회는 2004년 3월에 장학회를 설립해 선생이 강학을 하셨던 화성시 향남, 팔탄, 양감, 우정, 장안, 봉담 6개 읍면의 학생을 뽑아 해마다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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