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길’에 굴종·타협은 없다… 대쪽같은 ‘민족정신’
1911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21세의 안재홍은 자신의 호를 민세(民世)로 정했다. 민세란 민중의 세상이란 뜻이다. 그의 하숙방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의 밤노래’란 시가 걸려있었다. “바다에 가을빛 저무니⁄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날아가네.⁄근심 속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밤⁄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고 있네”
■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하여
충무공을 존경했던 민세 안재홍(1891~1965)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두릉리이다. 예닐곱 살부터 향리의 가숙에서 한문을 배웠던 소년 안재홍은 <사기>를 읽고 “내가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만큼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구독하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조숙한 아이였다. 한학에 열중하던 안재홍은 17세가 되던 1907년에 단발하고 평택의 진흥의숙을 거쳐 수원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했다. 정치, 지리, 철학 등 신학문을 배우고 <미국독립전사>, <월남망국사> 같은 책을 독파하며 열렬한 애국청년으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월남 이상재와 한서 남궁억 같은 애국지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1910년 8월 조선이 망했다. 안재홍은 이상재를 찾아가 미국으로 유학하려는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월남은 그에게 먼저 일본에 갈 것을 권하고 부친도 같은 입장을 밝히자 안재홍은 일본에 유학하기로 결정했다. 9월에 일본에 도착한 그는 1년 동안 청산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해 1911년 9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안재홍은 벗조소앙과 함께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때부터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13년 여름, 안재홍은 밀항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두 달 동안 북경과 심양을 비롯한 대도시를 둘러보며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채호, 김두봉 등 선배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1914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안재홍은 이듬 해 5월 중앙학교 학감으로 취직했다.
교장은 30년 연상인 유근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과 함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기독교인이던 안재홍은 유근의 권유로 단군을 숭모하는 대종교 신도가 됐다. 1917년에 그는 학생들에게 불온한 언동을 자주 한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압력을 받아 학감을 사직했다. 1919년 겨울, 안재홍은 3ㆍ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한 것이 발각되어 징역 3년을 살았다. 1922년에 출옥했으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2년 동안 고향에서 요양했다.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크게 개선한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1919년에 약 6천 명이던 경찰을 1920년에는 2만여 명으로 늘여 항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밀정을 양성해 사생활까지 감시했다.
■ 민족단일전선 신간회를 만들다
1924년 봄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안재홍은 가을에 <조선일보> 주필로 자리를 옮겼다. 친일파 송병준이 운영하던 <조선일보>를 신석우가 사들여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안재홍을 주필로 영입한 것이다. 안재홍은 논설을 통해 일제가 선전하는 문화정치의 실상이 무단정치와 다를 바 없음을 비판했다. ‘보석 지연의 희생’이란 논설로 일제의 감옥제도와 고문, 감옥 안에서의 비인도적 처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금고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이후 민족운동 내부에서 자치운동론이 등장했다.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나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으니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학문을 배워 실력과 자본을 축적한 다음 독립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재홍은 이러한 자치운동을 타협운동으로 규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1926년 겨울, 안재홍은 자신의 집에서 신간회를 결성하기 위한 비밀모임을 가졌다. ‘신간’은 “고목에서 나온 새로운 줄기”라는 고목신간(古木新幹)에서 나온 것이다. 1927년 1월, 안재홍은 사설을 통해 신간회는 대일 타협의 우익노선에 대항해 비타협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상해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화요회, 북풍회, 서울청년회 등 공산주의자들과 자치운동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해 창설된 민족합동전 신간회의 초대 회장은 이상재가 맡았다. 안재홍은 총무간사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족대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에게도 신간회 참여를 권유했다.
1928년 5월,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는 사설로 신문은 정간되고 안재홍은 8개월 간 징역을 살았다.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지도자들과 12월에 진상보고 회대회를 준비하던 중 다시 구속됐다. 야심차게 출발한 신간회도 위기를 맞았다. 신간회를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공작과 주도권을 민족주의자들에게 뺏긴 공산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했던 것이다. 안재홍은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정치운동도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 감옥 드나들며 조선역사•조선철학을 연구하다
1930년 1월부터 안재홍은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을 연재했다. 고대사를 주목한 것은 일제가 조선역사에서 가장 왜곡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6월, 여순감옥에 복역 중이던 단재 신채호에게 연락해 한국사 관련 원고를 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했다. 잦은 옥살이로 건강을 해친 안재홍은 틈나는 대로 등산을 다녔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단군 유적이 전해지는 구월산에 오른 후 <백두산 등척기>와 <구월산 등람기>를 남겼다.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의 1절이다.
이 몸이 울어 울어 우레같이 크게 울어
망천 후 사자되어 온누리 놀래고저,
지치다가 덜 깬 넋이 행여나 다시 잠들리.
다산 정약용의 서거 100주년에 즈음한 1934년부터 안재홍은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해 신조선사에서 출판했다.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김두봉과 연락해 청년 두 명을 중국 항주의 군관학교에 밀파하려다가 발각돼 종로경찰서에 구속됐다. 1937년에 보석으로 석방된 후 고향에 칩거하며 조선역사와 철학 및 문화를 아우르는 <조선상고사감>을 집필했다. 불행하게도 이때 부인이 별세하고, 장남 결혼을 며칠 앞두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형기를 마친 1940년에 고향집에서 집필에 힘을 쏟아 <불함철학대전>을 완성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일경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발에 커다란 족쇄를 채워 영하 20도의 감방에 가두고 대소변을 볼 때나 잠시 족쇄를 풀어주는 혹독한 체벌을 가했다. 이때 대장에 냉상을 입고 코에 동상이 걸려 죽는 날까지 고생했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이윤재와 한징 두 분은 끝내 옥사했다. 1943년 3월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으나 절명시를 쓸 정도로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였다.
■ 해방, 미완의 다사리 공동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안재홍은 여운형을 만나고, 다시 송진우를 찾아가 민족진영을 강화해 좌익과 합동전선을 펴자고 제안했으나 송진우는 이를 사양했다. 12월 초, 안재홍은 총독부 고위관리를 만나 전후 치안유지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고 자신과 여운형에게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고 제의하여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총독부의 태도가 돌변해 3원칙 중 민족자주를 제외하지 않으면 폭력조직을 동원해 암살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8ㆍ15 해방을 맞았다. 16일 오후 안재홍은 휘문중학에서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했다. 민중들은 일제 치하에서 9차에 걸쳐 7년 3개월을 옥중에서 보낸 불굴의 지사의 구상에 공감했다. 안재홍은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여운형, 김규식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좌우를 아우른 통합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분투노력했다. 그러나 미소 강대국의 이해와 정치집단의 분열로 끝내 분단이 확정되고 말았다. 안재홍은 민족상잔인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가 1965년 3월 1일에 서거했다.
민세 안재홍 선생이 우리 역사를 연구하며 정립한 다사리 이념은 분단시대를 극복할 정치철학이다. 곧 다사리란 모든 사람을 말하게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해 건강한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치철학이기 때문이다. 현충사 앞에서 벽초 홍명희와 함께한 안재홍.
김산 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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