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7. 근곡 박동완, 독립 위해 잠든 영혼을 깨우다

좌우익 독립운동의 용광로 ‘신간회’ 창립 주역

▲ 박동완
▲ 박동완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봄의 노래’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지은 근곡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경기도 포천군 신읍리(혹은 양평군 도곡리)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박형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박동완이 열 살이 되던 1894년에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 해 박형순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갑오경장으로 1895년에 설립된 관립소학교에 입학한 박동완은 신학문을 익히고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전공했다. 1906년 22세에 6품직인 농상공부기수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벼슬 대신 학문의 길을 택했다. 한성외국어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한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박동완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부가 폐쇄되자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학적을 옮겨 법률을 전공했다. 이에 앞서 박동완은 열세 살 때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의 딸 현미리암과 서울에서 혼례를 올렸다. 이집트에서 유대민족을 해방시킨 모세의 누나 이름이 미리암인 것을 미루어보면 그의 처가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개화한 집안으로 보인다. 박동완의 호는 ‘무궁화골짜기’를 뜻하는 근곡(槿谷)이다. 자신의 필명을 근생(槿生) 혹은 근(槿)이라할 정도로 조선을 상징하던 무궁화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1915년, 31세의 박동완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설립한 기독신보사에 입사하여 서기 및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로 일했다. 또한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와 조선중앙기독청년회(YMCA)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배재학당장 신흥우와 여성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이화학당 교수 김란사를 비롯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동완이 전도사로 재직하던 1915년에 현순 목사의 후임으로 손정도 목사가 부임했다. 손정도는 1918년에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 이강을 출석시키는 일을 돕고자 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망명했다. 손정도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필주 목사는 군대의 장교 출신으로 전덕기의 추천을 받아 상동청년학원과 기독교청년회 체육교사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박동완은 이필주목사를 보좌하며 김란사, 신흥우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시절 유년주일학교(1921년)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시절 유년주일학교(1921년)

1919년 2월 중순,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서 YMCA 간사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월 27일 박희도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동의한 그는 이필주의 사택에서 가진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참가하고, 28일 밤에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최종회의에도 참석했다. 3월 1일 아침 박동완은 누워 있는 병든 아내와 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오후 2시 그는 태화관에서 28인의 대표들과 함께 기념식을 갖고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갖은 고문을 당해 그의 얼굴과 심신은 크게 망가졌다. 그러나 박동완은 재판정에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에 출소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교회의 형편을 알리는 보고문이 있다.

“…3월 1일에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감옥에 갇히고 그 후에는 정동교회의 동량과 같은 김진호·정득성 양씨가 잡히어가고 배재학당 생도들과 이화학당 교사와 생도들이 다수 감옥에 끌려가 교우는 흩어지고 인심은 험악하야 봄부터 가을까지 저녁 집회를 정지하였다.”

감옥에 끌려간 이화학당 생도 중에 유관순이 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던 학생이었다.

▲ 민족대표48인 4줄 오른편 2번째 박동완
▲ 민족대표48인 4줄 오른편 2번째 박동완

언론을 통한 신생명운동

박동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이 아파 1여 년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른 그는 기독신보사에 복직했다. <기독신보>는 1919년에 네 차례나 압수를 당했을 정도로 항일사상이 투철했다.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이 창간되자,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서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생명>에 ‘계급투쟁과 사회진화’ 같은 사회성 짙은 논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배금주의가 교회에 파고든 현실을 개탄하며 기독교인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참생명을 위하여 초월적 신생활로 향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는 일요강화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의로운 청년’, ‘우리의 준비’, ‘우리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박동완은 주일학교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1923년 여름에 한국 최초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그는 실업을 장려하는 것보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려는 아동과 청년을 구하여 고결하고 쾌활한 인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이라는 믿음을 가진 교육자였다. 이런 믿음으로 ‘나무를 심는데도 100년을 내다보는데 하물며 사람을 바꾸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1925년 3월 23일, 박동완은 신흥우의 집에서 이상재, 안재홍, 윤치호 등 국내의 기독교계 명망가들과 함께 흥업구락부를 조직했다.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회의 국내조직이었다. 조선민립대학 설립과 기독교청년회를 통한 농촌운동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1925년 4월 초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신생명>이 폐간되고 말았다.

▲ 신간회 창립11
▲ 신간회 창립

신간회운동의 숨은 주역

1927년 2월 15일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박동완은 이상재, 안재홍 등과 함께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평양지회 창립대회에 본부 대표로 참가하여 신간회의 취지에 대해 연설하고, 경성지회 설립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등 신간회의 확산과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1927년 7월, 중국 길림성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리관개사업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한국과 중국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와 막대한 재산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재만 한인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부당한 박해와 탄압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박동완은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과 같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설립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실태를 조사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민의 화합에 힘썼다.

일제는 신간회가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자 신간회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에 신간회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안재홍을 비롯한 지도자를 여럿 구속했다. 겨우 체포는 면했으나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절감한 박동완은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

▲ 신간회 경성지회 창립
▲ 신간회 경성지회 창립

하와이에서 목회를 통한 민족운동

1928년 8월 박동완은 고국을 벗어나기로 결단을 내렸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야하는 외롭고 고달픈 길이었다. 다행인 것은 박동완이 영어 회화에 능숙하고 하와이의 사정에 밝았다는 점이다. 영어를 전공했고 함께 활동한 김란사, 신흥우 같은 이들이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은 1915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총무로 활동하다가 하와이로 이주해 살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하와이 와히아와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한 박동완은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열어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오래지 않아 박동완은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교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931년 6월에는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귀국하여 동포들의 근황을 전하고, 하와이 교민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연했다.

박동완은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1934년에 <한인기독교보>를 재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실린 ‘생명은 힘이다’라는 논설은 그의 신앙과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선 사람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아니고는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교파와 노선, 남녀 구분 없이 연합단체를 구성하여 한인사회의 연대를 모색하던 박동완은 1941년 2월 23일 호놀룰루 정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별세에 한인사회는 크게 슬퍼하며 애도를 표했다. 1941년 4월, 박동완 선생의 유골이 우편물 취급으로 고국에 돌아오자 3?1운동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4년 뒤 선생의 유해는 동작동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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