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7.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오광선 장군

“조국을 광복시키고야 말리라”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는 오인수(吳寅秀, 1868~1935) 의병장과 오광선 장군(吳光鮮, 1896~1967) 등 후손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의병장 해주 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 義兵將 海州 吳公寅秀 三代 獨立抗爭 紀蹟碑”가 그것이다. 이 비는 오인수 의병장과 아들 오광선 장군 그리고 손녀 오희영(吳熙英, 1924~1969)과 오희옥(吳熙玉, 1927~ ) 3대에 걸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기념해서 광복 63주년을 맞아 2003년에 세워졌다. 한 집안이 3대에 걸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역사상 거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다.

■ 나라 잃은 슬픔… 오인수 의병장 총을 들다

나라가 망했다.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나라를 무참히 빼앗겼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우국지사를 비롯한 뜻있는 일반 백성들은 일제의 불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오인수 의병장 역시 총을 들었다.

오인수의 고향은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이다. 원삼면은 용인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충절의 고장이다. 그는 백발백중 명포수로 유명했다. 원삼면은 안성지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정철화 의병장과 합세해 중군장(中軍將)이 돼 안성군 매봉재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하루 밤낮을 교전했으나 일본군 화력에 밀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노숙하며 야음을 틈타 집 근처로 잠입했으나 한인 밀정의 밀고로 잠복해 있던 일본군에 체포돼 징역 8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오광선은 몸을 사리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다 체포되는 아버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린 오광선은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쳤으리라.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여준(呂準, 1862~1932)이 원삼면에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삼악학교(三岳學校)를 통해 민족의식으로 철저하게 무장할 수 있었다. 오광선은 “조선을 광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본명인 성묵(性 )을 ‘광선’(光鮮)이라고 이름까지 바꾸고 압록강을 건넌다. 그 후 여준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

3대 독립운동 기념비
3대 독립운동 기념비

■ 항일전투 선봉… 아들 오광선, 광복군 양성 ‘올인’

독립군 오광선은 갓 시집온 새댁마저 집도 절도 없는 그 황막한 만주벌판으로 기어이 부르고야 말았다. 새댁은 두말없이 고난의 길을 함께 했다. 출옥한 아버지 역시 아들과 재회했다. 가족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다. 남편 오광선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는 자신이 졸업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국민회군 홍범도, 서로군정서 이청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한 김좌진 등이 만주 독립군을 통일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명지휘관으로 발탁돼 중대장에 임명됐다. 이 연합군이 노령자유시 참변으로 수난을 겪을 때 그는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한다.

1930년에는 총사령관 이청천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오광선은 의용군중대장으로서 한·중연합군을 편성해 항일전을 전개했다. 한·중연합군은 1933년 수분하대전자(綏芬河大甸子)라는 곳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백범 김구가 남경 중앙군관학교에서 장개석으로부터 낙양 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해 군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자 교관으로 임명돼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또 일본 관동군의 요인을 암살하라는 백범 김구의 비밀지령을 받고(1936년경) 북경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한다.

그는 중국인 오원지(吳元之)라고 끝끝내 버텨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고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그는 출옥하자마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는 늘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군사전략과 전술에도 매우 탁월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독립군 조직이 결성될 때마다 명지휘관과 교관으로 뽑힌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광복 후 오광선은 광복군 국내지대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한다.(자유신문, 1945.11.10.)

오광선 장군 묘소
오광선 장군 묘소

■ 독립운동 여장부… 부인 정정산, 독립군 수발 내조

오광선 장군의 부인 정정산(鄭正山, 1900~1992, 정현숙鄭賢淑으로 개명)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세 아이를 낳았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강했다. 생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병아리를 팔기도 하고 돼지를 키워 팔기도 했다. 독립군의 어머니는 더 강했다. 만주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에서는 억척같이 황무지를 개간해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독립군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에도 열두 번 씩 가마솥에 불을 지펴야만 했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임시정부 피난길을 따라 북경, 천진, 남경, 중경 등으로 옮겨 다니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 했다. 그 와중에도 정정산은 비밀연락 임무 등도 수행했다. 1941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해 활약하기도 하고,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비록 적과 대치하며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무장한 군인 못지않았다. 일상이 치열한 전투였다.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 대를 잇는 독립투쟁… 큰 손녀 오희영, 광복군 간부 활동

일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락은 다 버리고 풍찬노숙하면서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투쟁했지만 조국의 광복은 쉬 오지 않았다. 광복을 애타게 그리던 오인수 의병장은 이국 땅 만주에서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큰 손녀 오희영은 어느 새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陳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 독립운동이 벌써 3대째에 접어들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활동한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약하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희영은 교관 신송식(申松植, 1914~1973, 다른 이름 陳敬誠)을 만나 중경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오희영의 남편이자 오광선장군의 사위인 신송식 또한 독립지사였다. 운명이었다.

오광선 장군 생가터
오광선 장군 생가터

■ “독립군아 백만용사야~”… 막내딸 오희옥, 청년공작대 입대

오광선 장군의 막내딸 오희옥은 길림성 액목현에서 태어났다. 오광선 장군 3대 독립운동가 6명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독립지사이다.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학교를 온전히 다닐 수가 없어 중국의 이곳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방학 때면 이시영 선생 등 임정요원들로부터 역사교육을 받았다. 오희옥은 어릴 적부터 무용, 노래 등을 배웠고 토교에서나 중경에서도 대원들 사기진작을 위해 독립군가, 민요 등을 불렀으며 중국인 옷으로 위장하고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선전까지 했다고 회고한다.(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박환, 2007) “신대한의 독립군아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내가 아느냐” 등과 같은 독립군가를 불렀다. 또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네. 새 우는 이 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모여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등의 노래도 불렀다. 1939년 중국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언니 오희영과 독립군 동지가 됐다. 일본군의 정보수집, 연극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로써 엄마 정현숙, 언니 오희영, 오희옥 등 세 모녀가 모두 한국독립당 여성 당원으로 활동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 “나라 없는 서러움 어찌 다 형언하리오”

그 무엇이 여느 집과 다름없는 평범한 오광선 일가의 온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일생을 걸고 3대에 걸쳐 이토록 처절하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을까. 독립이 무엇인가. 조국은 도대체 무엇인가. 조국의 주인은 또 누구인가. 어린 오희옥은 ‘독립군아 조국의 부름을 아느냐’고 독립군을 깨웠다. 조국이 독립되어야 강산에 봄은 다시 돌아오고, 조국이 독립되어야 옆집 동무들과 춤추며 노래 부를 수 있다고. 이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국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오희옥 독립지사는 “나라가 없으니 조국을 찾기 위한 운동을 해야지요. 물론 첫째 나라가 편안할 때도 나라를 생각해야지요. 나라가 있어야 우리의 삶도 있지요. 나라 없는 슬픔이 커요. 정직하고 비리 없이 살아야지요”라고 말한다.(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박환, 2007) 나라 없는 서러움과 슬픔을 어찌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있으리오. 그럼에도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오광선 장군 일가는 1대만이 아니라 2대, 3대에 걸쳐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을 붙들고 독립의 꿈을 불태웠다. 산천은 의구하나 나라의 흥망에는 반드시 그 이치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역사의 터전 위에 서 있다.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 위치한 오희옥 독립지사의 집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 위치한 오희옥 독립지사의 집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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