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악랄한 ‘한글 말살’ 맞서 우리글 보급 운동 열렬히 펼쳐
“나는 일생을 통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어 본 적이 세 번 있었는데, 그 첫번은 31운동 때 탑골공원 앞에서요, 둘째 번은 815해방 때 일본의 천왕이 무조건 항복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되던 방송을 듣던 종로 어느 라디오 상점 앞에서요, 그 셋째 번은 4월 혁명의 날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였다.” 한결 김윤경(金允經, 1894~1969)은 광주군 오포면 고산리에서 김정민과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봄에 기독교로 개종한 부친 김정민은 이제까지 한학을 익히던 14세의 맏아들에게 신학문을 배우라며 서울의 우산학교에 입학시켰다.
의법학교로 옮겨 고등과를 수료한 김윤경은 자신의 관심과 소질이 자연과학에 있음을 알고 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10년에 김윤경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상동 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청년학원은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와 함께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상동교회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들인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이회영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김윤경은 청년학원에서 도산 안창호와 한힌샘 주시경이라는 두 스승을 만났다. 청년학원의 교사 주시경의 국어 문법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그는 수학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913년 청년학원을 졸업한 20세의 김윤경은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 역사, 수학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 이윤재를 만났다.
■ 3·1운동은 국어학 연구의 사상적 기반
데라우치 총독의 야만적인 공포정치는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 김윤경에게 견딜 수 없는 심적 고통을 안겨 주었다. 1917년 김윤경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더 배우기 위해 교사를 그만두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조선 학생들의 친목과 단결을 위해 서울에서 조직한 조선학생대회의 회장을 맡아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그는 3·1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한 후 경찰의 추적을 피해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가 이듬해 복학했다. 김윤경에게 3·1운동은 국어학 연구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동아·조선·중앙 세 일간지의 발행을 허가해 주고, 부분적으로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인가해 주었다.
1921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윤경은 이듬해부터 배화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여 학교로부터 3년 동안 동경 유학비를 지원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가족들을 고향 광주로 내려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간 김윤경은 릿쿄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동양의 역사를 공부하며 한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조선 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다. 배화여학교의 교사로 복직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졸업논문을 다듬고 보완하여 국문학 분야의 4대 명저로 꼽히는 <조선문자 급 어학사>를 펴냈다.
■ 수양동우회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8년 옥살이
도산 안창호는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정신과 덕, 체, 지의 수양으로 실력을 길러 조국의 부흥과 독립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흥사단을 만들었다. 김윤경은 1922년 2월 서울에서 흥사단 지부로 수양동우회를 결성할 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수양동우회의 활동을 주목하며 탄압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제는 1937년 6월 경성기독교청년회에서 발송한 ‘멸망에 빠진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유인물을 압수하면서 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김윤경은 6월 6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일제는 동우회의 핵심인 그에게 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양심적인 일본인을 포함한 변호사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1941년 11월 서울고등법원 상고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세 사람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혹한 고문으로 상한 몸을 추스르며 지내던 김윤경은 1942년 4월에 성신가정여학교(성신여고)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해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윤경은 또 다시 투옥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는 한글날을 제정하고 한글 보급 운동을 열렬히 펼쳐나갔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하고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여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1938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이처럼 엄혹한 상황에서 한글을 지키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활동은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던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1942년 10월 1일 서울 조선어학회 회관을 급습한 일경은 김윤경을 비롯하여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한징, 이중화, 이석린, 최승호 등 11인을 체포하여 함흥과 홍원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학회 관계자 대부분이 구속되었다. 김윤경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옥중에서 당한 고문과 폭행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악한 것이었다. 고문을 받다가 한쪽 청각을 잃기까지 했지만 김윤경은 고문하는 경찰에게 늘 당당했다. 고문을 받을 때 그가 하는 말은 이 한 마디였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이처럼 크구나!”
김윤경은 생지옥 같은 감옥 안에서 동지들에게 깊이 존경을 받았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변기 옆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 식사와 잠자리도 변기 옆에서 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김윤경은 평생의 외우 이윤재가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충격과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동지 한징도 옥사했다. 김윤경은 운 좋게 살아남아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넉 달 전에 이미 별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김윤경은 눈물을 감추고 이윤재의 집을 찾아가 벗의 노모에게 이 선생은 건강하게 잘 계신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9년 동안 실직 상태여서 그의 가족들의 고통도 말 할 수 없이 컸다.
■ 3·1정신으로 돌아가자
1945년 8월 간악한 일제가 물러갔다. 8월 25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병제, 김윤경 등 6명을 상무간사로 선출하고 초등과 중등교과서 편찬, 국어교원 양성, 월간지 <한글> 속간, 국어사전 편찬 완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해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김윤경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신생 조국에 필요한 저술에 힘을 쏟아 1948년에 <나라말본>과 <중등말본>을 펴냈다.
김윤경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3·1정신은 우리 역사상 기적같이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부활의 정신이며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으나 이 3·1정신으로 나라를 되찾았으니 나라의 부강도 3·1정신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크게 실망한 김윤경은 1960년 4월 학생들에게 3·1정신을 역설했다.
“삼일정신은 자유가 목숨보다 귀함을 깨닫게 한 사상이다. 독립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다. 통일의 정신이다. 굳은 신의의 정신이다. 굳은 단결의 정신이다. 희생되기를 사양하지 않는 정신이다. 용기의 정신이다. 이 일곱 가지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지켜야할 정신이다. 일곱 가지 고귀한 정신의 부활이 없이는 이 나라 이 민족의 번영의 길은 고사하고 멸망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1960년 4·19 때 교수대표단으로 참석하여 조사를 받았고,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서대문형무소에 15일간 구치되었다. 1965년 정부가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이를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고 일제 치하에서 벌어졌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한결 김윤경의 한결같은 삶을 시인 박두진은 이렇게 노래했다.
고집 질투 악의 비열
늙어갈수록 마음 둘러
추해지는 그런 틈에서
양의 탈을 쓴 인두겁
그런 틈에서
언제 뵈어도 하루같은 훈훈한 바람
언제 뵈어도 티없는 하늘 양심 드맑어
그냥 일월 그냥 인간 그냥 깨끗한
저절로인
이러한 스승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복인가.
김산(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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