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DNA’… 1919년 3월 28일 ‘만세운동’ 폭발
20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여 광명시 곳곳에서는 태극기가 펄럭였고 다양한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3.1만세 운동의 현장인 옛 주재소 자리인 온신초등학교에서의 기념식을 비롯해 만세 거리행진, 시민회관에서의 본 행사, 새마을시장에서 벌어진 플래시몹 등이 이어졌다. 광명지역의 대표 독립운동은 3.1운동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 역시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 투철한 항일 의식과 높은 교육열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위가 비롯된 후 전국으로 확산된 전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당시 서울에 인접하여 있던 시흥군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시흥군 서면에 속해 있던 광명 역시 그 항일독립운동의 물결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다.
광명지역에선선 이미 1896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조정의 봉건성에 대한 저항과 일제의 경부철도 역부 과다배정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다. 봉기의 결과 조선인 군수 포함 일본인 2명이 죽고 시위 참여자들 중에서도 여러명이 죽고 다치는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대문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들어와 진압을 시작하였다. 사건의 결과 주동자 김원록은 사형, 광명시 학온동 집강 성우경에게는 무기징역이 각각 선고되었다. <<시흥직산안핵사주본>>에 따르면, 당시 농민봉기의 주모자 또는 연루자로 체포되어 조사 심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철산리의 최영선, 소하리의 최덕순 등 광명의 각 마을 대표들이 대부분 들어 있었다. 광명 지역의 저항 의식은 이때의 기억으로 지역민의 마음속에 온존해있었을걸로 여겨진다.
광명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시흥군 서면으로 편제되었으며 면소재지는 소하리에 있었다. 시흥군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현재 소하동)에는 비정규 사립 교육기관인 운양의숙이 대한제국 시기부터 존재하였고 시흥공립보통학교의 분교가 개설되어 있었으며 마을에는 서울의 고등교육기관인 배재고보에 다니는 청년들도 있는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었다.
3월 28일에 광명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쌓여온 항일 의식과 높은 교육열, 독립의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 이정석, 최호천과 윤의병의 3.1운동
3월 27일 서면 소하리 거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만세를 불렀다가 28일 아침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아버지 이종원은 마침 서울 지역의 학교 휴교령으로 집에 내려와 있던 배재고보생 최호천에게 이정석을 구출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최호천은 동네 친구로 같은 학교를 다니던 윤의병과 만나 이정석이 구금되어 있는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하고 마을 주민들을 모아 그 즉시 실행에 들어간다.
최호천은 같은 마을의 동문 배재고보생 윤의병에게도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하여 주민을 모아 오게 하였다. 각자 모아온 주민 70여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 모여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인근 가리대 마을에서 100여명이 합세하여 2백여명의 인원이 되었다. 시위대는 최호천과 윤의병이 이끌고 이종원과 같은 마을의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5명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시위 군중에게 곤봉이나 돌로 무장할 것을 권하고 경찰이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퇴각하지 말고. 휴대한 돌이나 곤봉으로 대항할 것을 일러두었다. 200여명의 시위대는 밤 10시경 구름산을 넘어 주재소에 다다라 주재소를 포위하고 함성을 질렀다.
시위대는 이어 몽둥이로 주재소 앞 게시판을 때려 부수고, 주재소 숙직실의 뒷면 벽에 약 1치 반쯤의 구멍을 뚫고 침실 문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시위대가 닥치자 주재소 안에 있던 경찰은 처음에는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듯이 위장하였으나 곧 발각이 되었다. 최호천과 윤의병은 경찰과 담판을 하며 이정석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미 영등포 본서에 넘어갔음을 알고 다음날 본서에 가는 일본인 경찰에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약속받았다. 이에 시위대는 주재소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돌아와 소하리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로서 27일 이정석의 단독 만세 시위로부터 시작한 광명 지역의 만세운동은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다음날 경찰 병력을 파견하여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유지호, 최정성, 김거봉, 최주환 등 7인을 주동자로 체포 구속하였다.했다.
최호천은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중간에 소요죄로 바뀌어 결국 1921년에 징역 2년으로 확정되었다. 1심은 궐석재판으로 진행된 걸로 보아 식민지 법정의 재판에 계속 항의했던걸로 보인다, 윤의병은 당초 소요죄로 징역1년 판결을 벋았으나 고등법원에서 파기되어 대구와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징역 2년으로 확정 판결받았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과 최정성은 당초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등에 항소하여 1919년 12월 벌금 30원으로 확정되었다. 이외에 유지로, 김인한, 최주환 등은 중한구금자 탈취미수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정석은 체포 이후 재판 기록이나 여타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석방된걸로 보인다. 엄혹한 일제 경찰이지만 부자를 함게 가두기에는 부담이 있지 않앗을까 한다.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결코 퇴각하지 말라...’
당시 배재고보생이던 최호천과 윤의병의 주도로 죽음을 감수하고 무장 폭력시위를 준비하였고 이를 실행하였다. 경찰이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아 더 큰 충돌은 없었지만 시위대가 어떤 마음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죽음까지 불사하고 벌어진 광명의 만세운동. 이는 당시 만세운동의 비장함과 함께 민족지도자 33인이 내걸었던 비폭력주의와는 다른 폭력시위로 진행되는 만세운동으로 당시 지식인층인 학생의 의식과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동자 중 최호천과 윤의병은 학생이지만 최주환, 유지호, 최정성 등 나머지 주동자는 농민이었다. 맨 처음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정석도 농민이었다. 이를 보면 학생출신의 지식인과 청년 농민이 결합하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석이 체포되자마자 아버지 이종원이 최호천 등에게 바로 구출을 요청하고 최호천 윤의병이 조직적우로 마을 주민을 모은 것은 사전에 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짧은 시간에 주민 200여명이 합류 했다는 점에서 지도부의 조직적인 움직임과 주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당시 지도부인 최호천, 윤의병과 처음 만세 시위를 한 이정석의 나이가 20세 전후인점에서 마을에서 활발하게 할동하던 젊은 층이 선두에 나섰음을 알수 있으며 이는 3.1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매우 자발적인 집단 시위 참여와 청년들의 적극적인 모습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룬 7인 중 최호천, 윤의병, 유지호, 최주환은 1990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이종원은 1992년 대통령 표창을 김거봉은 201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아쉬운 점은 국가가 인정한 것은 이 들이 세상을 뜨고 한참지나서야 그 공훈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 계속 이어진 만세운동의 숨결
‘학자가 없어서 또는 학령 연령 초과 등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맹퇴치운동의 한 차원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서 윤의병(尹宜炳) 이순구(李舜九) 이병대(李丙大) 이범규(李範圭) 외 여러 명의 청년들이 이곳의 유지 이연철(李淵哲)의 후원을 얻어 설립하였다.’ (<東亞日報> 1928년 1월 7일)
‘15세 미만의 아동들도 주경야독으로 야학에 참여하여 절반 정도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많을 때는 남자 211명, 여자 18명이나 되는 인원이 야학에 참여했다.’ (<東亞日報> 1932년 8월 23일)
비록 광명지역의 3.1운동은 일본경찰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멈췄지만 3.1운동의 주동자인 윤의병의 이름은 10여년이 지나 소하리 야학 운동 설립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소하리 야학은 중간에 여러 사정으로 중지되기도 했으나 1932년까지 지속되어 큰 성과를 이루었다. 광명지역 3.1운동의 정신은 사회계몽운동까지 이어져 내려와 지역을 깨우는데 기여하였다고 보여진다.
양철원 광명시청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