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 낮은 자세로 구국 헌신… 민족대표 이종훈

민족·독립을 위해 한평생 일제 폭압에 당당히 맞서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100년 전 3월, 삼천리 방방골골에 뿌려진 기미독립선언서의 한 부분이다. 200만의 조선인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100년 전의 삼월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3·1운동 이전 ‘위정척사’를 앞세우며 일제에 맞선 의병은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양반들이 주체인 반면 태극기로 거리를 뒤덮은 만세운동은 각성한 평민과 학생들이 주도했다. 한 달이 지난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은 왕조의 부활을 거부하고 국민이 주인임을 선언하며 ‘민국’을 건설한 혁명이다. 이처럼 위대한 민족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을 리 없다. 3·1운동이라는 실천의 장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선언한 동학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였던 정암 이종훈(正菴 李鍾勳, 1856~1931)의 생애는 위대한 평민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난 이종훈은 어려서 글 잘 한다는 칭찬을 들을 만큼 총명했으나 14세에 학문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다. 오랜 방랑을 끝내고 21세에 고향에 돌아와 철점을 열어 7년 동안 운영했으나 사업이 어려워지자 서울로 올라가 별군관이라는 하급 무관으로 지냈으나 이 일 또한 그만 두었다. 31세가 되던 해에는 인천으로 가서 한동안 선상 객주노릇을 하며 지냈으나 여기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함경도 함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세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확인한 이종훈은 1893년(고종30) 1월에 동학에 입도했다. 38세의 중년에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이때부터 이종훈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동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듣고 깨우친 동학의 가르침을 주위로 전파하던 그는 여주, 이천, 안성 등 경기도 전역으로 포교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3월에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기치로 열린 충청도 보은집회에 참석하여 소 두 마리와 800냥의 거금을 기부하여 최시형을 비롯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종훈은 집을 떠나 속리산과 용문산에 들어가 수련하며 여름을 보낸 뒤 해월 최시형과 손병희를 찾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이종훈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산 최시형이 그를 경기도 편의장에 임명했다.

189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와 ‘화약’을 체결해 호남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정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석 달이 지난 8월 동학봉기를 빌미로 출병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9월 18일, 최시형이 총 기포를 명했다. 관할 지역을 돌며 교도들에게 기포를 권유하여 편성한 경기도 동학군을 이끌던 이종훈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500여 명의 군대와 맞섰다. 이때 이종훈은 이용구와 함께 선유사 정경훈을 만나 담판을 벌여 부대를 10리 밖으로 퇴각시켰다. 이 일로 농민군으로부터 큰 기대와 신뢰를 받게 되었다. 11월, 이종훈은 북접군 통령 손병희의 중군장으로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여 1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크게 패했다. 보은과 음성에서도 거듭 패하자 손병희는 결국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수만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되는 쓰라린 패배였다.

이종훈은 관군의 눈을 피해 도피하면서도 스승 최시형의 보필에 헌신했다. 관의 탄압이 차츰 줄어들자 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풍찬노숙하며 포교에 전념하는 스승을 지원했다. 눈물겨운 포교활동으로 뿌리까지 흔들렸던 동학이 다시 서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6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 간수를 매수하여 옥바라지하던 이종훈은 최시형이 사형을 당하자 한밤중에 스승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밤길을 달려 송파 야산에 안장했다가 2년 후 여주 천덕산으로 이장했다. 이후 이종훈은 관의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최시형의 법통을 이은 의암 손병희를 보좌하며 포교에 헌신했다.

1904년 2월, 이종훈은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가 손병희를 만났다. 귀국 즉시 손병희의 지시대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검은 색 옷을 입고 신생활운동을 벌이며 독립협회의 민회운동 방식을 도입한 대동회를 조직했다. 조선인의 생활문화 전반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민회의 주체가 동학임을 파악한 정부가 다시 교단을 탄압했다. 이용구가 주도하던 진보회는 일진회에 합병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진회는 드러내 놓고 친일을 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할 때 이종훈도 참여하여 교단 정화에 동참했다. 국권이 상실된 그해 이종훈은 장성한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아들 이동수가 귀국하여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고 양평으로 피신한 아들이 용문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던 것이다.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 신생활 운동에서 만세운동으로

1912년부터 이종훈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보성사 직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수호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14년 4월, 교인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민족문화의 수호의 의의에 대한 강연을 하던 이종훈은 도중에 형사에게 제지당하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다시는 강연회를 열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난 이후 드러나는 활동은 모두 중지하고 비밀결사로만 활동했다.

1916년 봄, 이종훈은 이종일, 김홍규 등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세계정세에 밝고 민족운동에 열성을 보이던 이종일이 명망가들을 찾아가 민중운동의 선봉이 되어달라고 청원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공감한 이종훈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상재를 만나 연합운동을 제안했다. 이상재도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자신이 기독교를 동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민족연합전선을 민중운동의 방략으로 정한 이들은 손병희에게 앞장 서줄 것을 요청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에 구국단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민중운동을 준비했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유고·폴란드가 민족 자주권을 선언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천도교단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이종훈, 권동진 등이 모임을 갖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으로 민중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중화는 각계각층의 민중을 동원하는 것, 일원화는 여러 계층의 독립운동 계획을 하나로 대동 통합하는 것, 비폭력은 동학혁명의 경험에서 얻은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를 ‘무오독립시위운동’이라 하고 거사일은 9월 9일로 정했으나 이 계획은 준비의 부족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만주에서도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했다. 독살설이 널리 퍼져 반일감정이 높아졌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약소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퍼져나가는 등 안팎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계획대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학생들과의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일제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이종훈은 1919년 2월에 손병희, 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이종훈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인 65세였다.

3월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보성전문 학생이던 손자 이태운도 방정환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서울 시내에 배포했다. 이종훈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많은 지사들이 옥중에서 목숨을 잃은 것처럼 감옥생활은 혹독했으나 잘 견디고 1921년 11월 4일에 출옥했다. 동지 이종일은 “(이종훈이 옥중에서)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마음이 든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출소한 이종훈은 천도교 내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던 혁신운동을 지지했다. 1926년에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가 고려혁명당의 창당했을 때 이종훈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성정이 강직하여 한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다”는 그의 성향은 노년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민족문화를 지키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이종훈은 1931년 5월 2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종훈의 고향 광주 실촌면 유사리 일대
이종훈의 고향 광주 실촌면 유사리 일대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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