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을 떠나다]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 정약용의 저작들을 읽어 가다보면, 마치 대서사시에 빨려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글 갈피에 뜨거운 애민(愛民)사상과 심오한 철학(哲學), 시문학(詩文學)의 얼개들이 오롯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 불어닥친 수많은 환난과, 개인은 물론 일가친지에게 불어 닥친 험난한 시련속에 또한 유배의 몸으로 다산은 공맹을 비롯 동양사상연구를 망라하였다. 이를 기반삼아 경세학문의 경지에 오른 학자로, 위대한 저술가로 지고(至高)한 인생발자취를 남긴 다산선생의 웅혼한 삶 앞에,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오늘도 숙연한 느낌을 감출 수 없게 된 이유다. 인간 다산(茶山)의 멋과 다산학(茶山學)의 오묘함이 거기에 숨어 있다. ■유배살이중 꿈에 그리던 고향 소천 유배살이 중, 다산의 시문(詩文)에 자주 쓰이는 용어가 고향마을 소천(苕川)이다. 쓰기와 달리 발음은 초천이며, 다산이 고향산하가 그리워 떠 올릴 때면 내 고향 초천(苕川)하고 불려졌던 곳이다. 소내(牛川)라는 표현도 곧잘 나온다. 소내 다음으로 열상(?上)이란 단어도 종종 등장한다. 한강 옛 이름이 열수(?水)이니, 한강 상류마을이라는 뜻으로 열상이라 한 것이리라.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로, 마재라고도 한다. 마현 자의 현(峴)이 재이기 때문에 마재로 불리운 것이다. 다산에게 고향 소천은 매우 중요하다. 귀양살이 중에도 머리 속에는 늘 꿈속처럼 소천마을이 맴돌 뿐만 아니라, 다산사상과 철학, 실학 등 다산학문의 최종산실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진의 다산초당서 다산학의 광맥을 발굴하였고, 학문연구의 토대를 구축한건 사실이지만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경지와 인생경륜을 해배 후 귀향하여 마지막 완결시켰다는 점에서, 소천은 유배지의 다산초당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그렇듯 다산이 태어난 자연부락 마재, 소천마을. 강반(江畔)인 이 마을은 다산이 태어나 살고 마지막 7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곳이다. 조선후기, 그나마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實學)이라는 불세출의 학문이 완성된 소천, 연구하고 사색하며 수많은 저서들을 정리하고 보관했던 이 곳은 우리 민족에게 오래도록 기념될 마을이다. ■다산 인생역정은 한편의 대서사시 다산의 일생 가운데, 가장 극적인 반전을 꼽는다면 뭐니해도 유배(流配) 길에 오르는 대목일 것이다. 세상과 작별하고 극한 오지로 떠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선 탓으로, 다산의 시문(詩文)에는 한 맺힌 이별곡이 많다. 돌모루 이별, 모랫들 이별, 하담의 이별 등 삼별시(三別詩)가 대표적이다. 제목만 떠 올려도 가슴이 저며오는 주옥같은 이별가들이다. 다산에게 삼별시가 경상도 장기(포항근처)로 떠난 1차유배의 산물이라면, 밤남정 이별(본보 기획특집 2회 10월 5일자)은 전라도 강진 땅 끝으로의 2차유배가 배태한 명시(名詩)다. 이들 시는 다산의 유배문학 걸작선(傑作選)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문학은 불행의 나무에서 자란다고 했던가. 다산에게 유배라는 불행의 시간은 다산문학의 꽃을 피워낸 결정판이었다. 1801년 2월, 유배길에 오른 비운의 다산은 돌모루 이별(石隅別)이란 시를 남기고 한양을 떠난다. 쓸쓸하고 처량한 돌모루마을 가야 할 앞길 세 갈래로 갈렸네 숙부님들 머리 수염 하얕게 세고 큰 형님 두 뺨엔 눈물이 그렁그렁 가자꾸나,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마지못해 다시 만날 기약을 남기면서 -돌모루 이별(石隅別)- 돌모루라 하면 지금의 반포대교 북단 용산구 서빙고쯤으로, 한강변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 큰 바위가 있었기에 돌모루라는 칭호가 붙었을 법 하다. 다산은 신유년(1801) 2월28일(음력) 새벽, 이곳을 출발 경상도 장기로 끌려가는 길이었다. 이틀 전, 셋째 형 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한양성 서소문밖 형장서 참수형을 당한 직후였다. 평시 같았으면 이날 일가 친지들은 시신을 거두고 초상을 치러야 했겠지만 그럴 겨를마저 없었다. 신유박해 회오리에, 8대 옥당이라는 명문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고위 벼슬을 지낸 다산과 약전 형제는 그나마 죽음을 면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이른 새벽 돌모루에는 백발이 성한 집안 어른들과 일가친지들이 모두 나와 기약없이 떠나는 형제의 유배길을 배웅했다. 이 때의 한스런 심경을 담아 다산은 돌모루 이별 이라는 시를 남겼던 것이다. ■돌모루 이별 등 삼별시는 유배문학의 새장 이어 다산은 돌모루 한강나루를 건너 모랫들에 도착했다. 다산기록에 의하면, 모랫들에서 아내와 아들을 이별했는데 한강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라고 씌여있다. 모랫들은 지금의 반포대교건너 강남성모병원이 있는 중간쯤으로 추측된다. 한강건너 모랫들까지 아내와 아들들이 따라왔다. 어른들과는 강을 넘기 전 돌모루 마을에서 헤어지고, 차마 헤어질 수 없었던 아내와 두 아들은 강나루를 건너 그곳까지 따라와 석별의 한을 삭였던 것 같다. 다산은 이때의 심경을 모랫들 이별(沙坪別) 이란 시에 생생히 토설(吐說)하고 있다. 산바람 가랑비 흩날려, 헤어지기 섭섭하여 머뭇거리듯 하는구나. 서성거린들 무슨 소용 있으랴, 끝내 이 이별 어쩔 수 없는 것을. 시 말미에, 어미소는 음매하며 송아지를 돌아보고, 암탉도 구구구 제 새끼 부르는구나 라며 비통한 소회를 덧붙이고 있다. 어미소도 송아지를 예뻐할 자유가 있고, 암탉도 병아리를 품에 안을 자유가 있건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생이별하게 되는 다산가의 비통함과 가슴을 에는 서러움이 담긴 시다. 다음으로, 충주인근 하담에 있는 부모님 묘소를 지나면서, 하담의 이별(荷潭別) 이란 시를 지어 애처러운 마음을 고해 바친다. 부모님이여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집안이 갑자기 무너져버려 죽고 살아남는 이 지경이 되었어요. 하늘같은 은혜 꼭 갚으려 했건만, 깎아버림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언제다시 부모님 묘소에 성묘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기약도 없는 죄인의 몸,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에 눈물 흘리며 비탄에 젖는 이별의 노래다. 이런 시문(詩文)을 예로들어 다산학문을 인간학으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애민사상이 절절이 흐르는 싯귀들이 많기 때문이다.「적성촌에서」라는 시를 보면, 가난한 18세기 말엽 조선의 참담한 농촌의 실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탐관오리들의 관행도 신랄히 꼬집고 있다.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었는데 겨울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들쭉 날쭉 놋수저는 지난번에 이장에게 빼앗기고 아아! 이런 집들 온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애오라지 시 한편 베껴 임금님께 돌아갈까 - 적성촌에서 (積城村舍作) - 1794년 10월, 암행어사로 적성군에 들렀을 때 찌든 농촌의 피폐상에 너무 마음아파, 이에 통감하는 시를 지었다. 그동안 풍광을 읊고 자연을 관조해 오던 다산 시는 이후 면모일신하여 사회의 비리와 구조악에 눈을 뜨면서 투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사회시로 변한다. ■ 조선을 통째로 바꾸자며 경세유포 등 저술 다산의 낙담은 컸다. 조정에서 정조대왕의 측근으로 병조참의 등 고위벼슬을 두루 거칠 땐 바닥민생을 잘 몰랐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로, 참 목민관을 꿈꾸며 황해도 곡산수령으로 일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통절히 느끼고 매서울 비판과 통분의 글들을 남긴다. 하물며, 유배자의 시선으로 보는 조선사회의 실태는 더 황망했을 터였다. 이때 다산은 다짐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바꾸는 길밖에 없다. 그 같은 정신으로, 유배살이 중 학문연구와 저작에 몰입하게 된다. 다산은 세상을 바꾸자는 목표 하에 경세유포를 저작하였고, 백성을 구제하자는 계획하에 목민심서를 발간했노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공부하던 청소년기부터 한창 벼슬하던 30대, 그리고 긴긴 유배생할의 40~50대 저술기에 갈고닦은 온갖 학문의 종합으로, 유배말기 저작한 경세철학(실학)이야 말로 다산학문의 결산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글=구동수 (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박사

[장덕호의 보물읽기]보물 제1096호 쇄미록(鎖尾錄)

쇄미록(鎖尾錄)은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임진왜란 때 홍주(洪州)임천(林川)아산(牙山)평강(平康) 등지를 피난하면서 전란상황과 사회상을 적은 일기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쓴 피난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일기 곳곳에는 일상의 삶을 살았던 당대인들의 생활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쇄미록이란 시경(詩經)의 쇄혜미혜유리지자(?兮尾兮遊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딴 것으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그네라는 뜻에서 피난의 기록임을 암시하고 있다. 1591년(선조 24)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의 전쟁 기사는 물론 당시 각 계층의 생활상, 군대징발과 세금징수, 군량운반 등 구체적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구성은 1책이 임진남행일록(壬辰南行日錄)으로 1591년 11월27일부터 1592년 6월까지 노비추쇄를 위하여 충청도전라도 지방을 돌다가 장수현(長水縣)에서 왜란을 만나 깊은 산중으로 피난간 전말이 서술되어 있고, 2책부터 7책까지는 1593년부터 1601년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각 책의 끝에는 교서, 의병 격문, 명장(名將)의 성명문, 공문 등을 수록하였다. 쇄미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희문의 철저한 기록정신이다. 전쟁 속에서도 거의 매일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피난 생활과 조정에서 들은 전황과 의병의 활약상, 각종 제사와 상업 행위, 질병과 치료, 여가 생활 등 다양한 내용들을 모두 담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상황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또한 오희문의 관직에 대한 집념, 가문의 영광을 위한 모색, 외가와의 인연, 아들에 대한 기대, 딸과의 친분, 꿈속에 등장하는 가족 등 오희문 개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어 한 개인의 일기 기록이지만 당대의 사회상과 그와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특히 16세기 말 양반층의 농장경영이 노비의 부역노동을 기반으로 농장주가 직접 감독하는 경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저자 자신이 양반가 출신으로 많은 노비를 거느렸기 때문에, 당시 양반의 특권과 노비의 신공 및 매매소송입안(立案) 등의 연구에도 참고가 되는 조선중기 사회사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쇄미록에 나타난 420년 전 전쟁의 고난 속에 살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장덕호 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문화원에서 놀자] <12>안양문화원 '제27회 안양만안문화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재위 1776~1800년 24년간)은 업적만큼이나 효심이 깊었다.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던 정조의 일생을 놓고 보자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지 서막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끊임없이 성군의 자질을 시험받는가 하면, 외척의 모략과 암살 위협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은 끝이 없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왕조를 파국으로 몰아 간 파당정치를 해소하고, 경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루어 냈는가 하면, 부국강병으로 앞날을 도모한 성군 중의 성군. 바로 정조대왕이다. 이러한 정조의 효심과 애민정신(愛民精神)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매년 안양문화원(문화원장 직무대행 김수섭) 주최로 열리는 안양만안문화제다. 혹자는 정조의 도시는 수원 아닌가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모르는 말씀. 안양도 정조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고장이다. 뜨거웠던 2012 제27회 안양만안문화제 현장에서 그 인연의 끈을 찾아봤다. # 정조의 만안교(萬安橋)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너라 안양만안문화제의 시작은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만안교(萬安橋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만안교는 정조대왕이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에 옮기고 거의 해마다 능을 참배하러 갈 때 행렬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당초 능참로는 동작동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 고천, 수원, 화성으로 이어졌다. 당시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용산, 노량진, 동작, 과천을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중간에 교량이 많고 남태령 고개 때문에 행차로를 닦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까지 왕이 행차하는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끝난 뒤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행차 때마다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편히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명으로 영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무엇보다 과천에서 인덕원으로 나오는 길 오른쪽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영조에게 모함해 죽게 만든 정승 김상노의 친형 김약노의 묘가 있어 이를 불길하다 해 능참로를 변경했던 것. 만안교는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가 직접 지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원래는 남쪽으로 약 460m 떨어진 석수로의 교차지점에 있었는데 1980년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했다. 이에 안양문화원에서는 정조의 애민정신과 효심이 녹아 있는 안양의 대표 문화유적 만안교의 뜻을 기리고자 안양만안문화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올해로 27회째를 맞은 안양만안문화제는 안양의 대표적 전통문화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다채로운 문화행사로 채워진 종합선물세트 10월10일부터 31일까지 안양문화원, 안양아트센터, 안양삼덕공원 일대에서 열리는 안양만안문화제는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먼저 지난 10일 안양시민속경연대회로 그 화려한 서막을 연 문화제는 전통혼례, 정조대왕 화산능행차 시연, 전통문화체험, 문화가족발표회 및 문화가족 작품전시회, 안양향토문화연구소 세미나, 안양서도회전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축제의 달, 10월 안양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특히 지난 13일 안양삼덕공원에선 신랑 김병진씨와 신부 황명자씨의 전통 혼례식이 거행됐다.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신랑신부들은 안승용 선생의 집례(주례)에 따라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다. 전통혼례는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혼례를 재현해 혼례의 서막을 알리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신랑이 기러기를 신부댁에 드리는 절차(전안례), 경건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랑신부가 손을 씻는 의식(관세례), 신랑신부가 맞절을 교환하는 절차(교배례), 술잔을 서로 나누는 근배례에 이어 인사를 마치는 예필까지 주례 선생의 자세한 안내에 따라 총 1시간 넘게 진행됐다. 전통혼례식에는 가족, 친지 외에도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해 행복을 기원했다. 전통 혼례식이 워낙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 신랑신부와 관계자들은 잦은 실수를 연발해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됐다. 보는 이들도 절도있고, 복잡합 혼례절차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6살 손주녀석과 함께 전통혼례식 지켜본 유병만(68)씨는 요즘은 30분만에 초스피드하게 끝나는 결혼식이 대부분인데 오랜만에 전통 혼례복과 초례상, 꽃가마, 조랑말 등 우리의 전통 결혼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복잡한 절차로 서로에게 예를 정성껏 다하는 전통 결혼식은 부부에게 경건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 줄 것이라고 말했다. # 만안문화제의 백미정조대왕 화산능행차 지난 14일 진행된 정조대왕 화산능행차 시연은 안양만안문화제의 백미다. 오후 2시 안양여고 앞을 출발한 행차는 300여 명이 참여해, 중앙로와 우체국사거리를 거쳐 명학공원에 도착하기까지 조선시대 당시 화려하면서도 위엄있던 어가행렬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며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조선 정조대왕이 능행차시 억울한 백성들이 임금님께 직접 호소하기 위해 징을 치게 하고 억울함을 직접 해결해 주었던 격쟁(擊錚)제도를 시행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안양만안문화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전통문화 체험의 장으로써 역할을 톡톡히 했다. 탈춤추기부터 딱지치기, 전통매듭짓기, 다식만들기, 전통떡 맛보기, 윷놀이, 투호, 조랑말 타보기 등 평소 학교와 학원에선 경험할 수 없는 각종 전통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상덕 안양문화원 사무국장은 안양만안문화제는 지역의 향토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안양시민이 참여해 시민과 함께 안양의 전통문화브랜드를 창출해 안양의 문화가치를 높여 안양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시민에 의해, 시민을 위한 축제로 거듭날 때 안양의 전통문화예술은 지역의 폭넓은 문화벨트로 자리매김해 안양문화의 정서적 근간이 된다고 말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실학기행을 떠나다]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학(茶山學)을 대표하는 중심 가치는인간이다. 6경4서를 집대성 재창안한 실학(實學)의 주체는 단연 인간 중심이었다.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가 올해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을 기해 그를 2012세계기념인물로 꼽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 선생이 200년 전 당시의 조선사회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세계 인류사회에 남긴 위대한 학문적 업적 때문이다. 다산의 걸출한 학문에 대해, 한마디 헌사(獻辭)를 붙인다면 어떤 말이 가장 적합할까? 이에 필자는 감히 경국제세(經國濟世)란 말을 떠 올려 본다. 조선후기 혼란을 거듭했던 시대, 국가기틀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이 바라는 세상을 꿈꾸며 경세학(經世學) 곧 실학이라는 거대학문의 물줄기를 끌어 온 다산에게 그 말이 꼭 들어맞을 것 같다는 느낌에서다. 2012실학기행 일행 80여 명은 지난 9월초 2박3일간 계속된 여정 속에서 차량이동 중, 또는 강연회를 통해 다산이야기로 시종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다산에 대해 읽고 듣고 느낀 감회나, 생애를 바쳐 이룩한 대학자의 성과에 대해 돌아가며 한마디씩 남겼다. 일행은 한결같이 다산에 대한 흠모와 어둡던 한 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데 대한 안타까움,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대학자로서 우뚝 선 선생의 인생여정에 끝없는 찬사와 경하의 말들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왕 다산실학기행에 나선 김에,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200년 시간여행도 겸해 답사를 떠나 보기로 하자. ▣ 실학은 다산이 인류사회에 남긴 큰 업적 때는 1801년 11월23일경(음력), 우리일행은 대역죄인의 올가미를 뒤집어 쓴 채 유배의 몸으로 강진까지 끌려온 다산 정약용(40세)을 만나보게 됐다. 얼마 전(1799년38세)까지 병조참판형조판서 벼슬에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아낌없이 받아오던 조정대신이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면서 그 동안 숨죽이며 노려왔던 시기와 모함에 걸려, 죄인된 몸으로 한양서 끌려와 강진읍 동구 밖 당산나무 옆 허름한 초가주막 앞마당에 당도했다. 읍마을 사람들이 구경삼아 우르르 몰려들었다. 밤이 되자 다산이 갇힌 옥문을 발로 차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주막 한켠 골방에서 귀향살이를 하게 된다. 얼마 후 다산은 이 허름한 골방을 사의제(四宜齊)라 이름 붙이고 글방으로 삼았다. 생각, 행동, 용모, 언어 네 가지를 늘 바르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다산의 학문은 이렇게 고독하고, 한없이 초라한 가운데 시작하게 되었다. 강진읍 주막집 한 켠에 마련한 사의제가 상례연구의 산실이었다면, 몇 년 뒤 인근 백련사 혜암스님이 마련해 준 거처 고성사는 주역연구의 산실이었다. 뒤이어 마련된 거처 다산초당에서는 경세유포를 비롯해 목민심서 등 수많은 경세학연구서를 저작하게 된다. 다산은 울적할 때면, 이곳 다산초당 옆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구강포(九江浦) 앞바다를 바라보며, 남서해상 고도(孤島) 흑산도로 유배가 있는 4살차이 둘째 형 손암 정약전(1758~1816)을 그리곤 했다. 손암 형은 다산의 저작에 대한 해박한 분석과 조언을 해 주는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 마음붙여 살아갈 것이라곤 필묵 뿐 다산의 학문적성취가 남달리 뛰어난 것은, 그가 평생을 다해 이룩한 500권의 방대한 저술작업들이 한 인간으로 그처럼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절 귀양살이 중에 완성됐다는 점이다. 유배 초기, 다산은 자신의 애닮은 심경을 담아 두 아들 앞으로 편지를 써 보낸다.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것이라곤 오직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책의 한 구절이나, 마음에 드는 한 곳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줄 수 있겠다 여긴다(중략 ) 폐족이 되어 사람들이 너희를 천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얕잡아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열심히 배우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해 버리면 내가 해 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은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으로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두 아들에게 1802년 12월22일 임술년(1802) 한해를 마무리하려는 뜻에서였던지, 다산은 두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유배생활 1년을 보내고 난 후에 쓴 글이었다. 몰락한 집안 자식으로, 그나마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다 라는 말로 극구 학문할 것을 권하고 있다. 폐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벼슬길마저 막힌 두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키워내려는 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온 천지에 의지할 곳 없어 한없이 외롭지만, 유배살이 동안 오직 글과 붓만을 의지해 저술한들 세상에 누가 이를 보고, 누가 책으로 엮고 정리하겠느냐며 탄식하는 대목에 가슴이 아려온다. 다른 한편, 그 글속에 다산의 학문연구에 대한 불타는 심경이 담겨있기도 하다. 부자간 서신으로 나눈 이 대화 속에 다산학문 전체를 꿰뚫는 고뇌와 방향, 핵심이 담겨있다고 본다. 혹독한 유배시기를 보내면서도, 다산실학의 혼(魂)은 그렇게 태동해 가고 있었다. ▣ 유배살이 중 다산실학의 혼 태동 다산학은 자신의 관료시절과 6경4서의 경학 등을 경험론적 시선에서 집대성해 정립된 학문이다. 실학은 고대 중국 공자, 맹자의 유학사상과 철학을 대표하는 경전에 새로운 주석을 바탕으로, 또한 중세의 관념론적인 성리철학의 세계관, 인성론에서 탈피해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하는 실용적 학문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 같은 논리위에 실행(實行)을 앞세운 것이 다산의 실천철학이자 사상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본윤리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닦이면 다음단계도 절로 열린다고 하는 것이 바로 다산철학의 중심이다. 실학자요, 철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에 비견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칸트 저작 가운데 인간의 존엄을 가장 명징한 언어로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실천이성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보다 많은 학자들은, 칸트의 9서5제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순수이성비판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인 중에, 칸트 저작에서 딱 1권을 택해 읽는다면 실천이성비판 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기시대의 철학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한때 서학(천주교)이라는 외래사상을 이용하고 경험철학의 어떤 지점에 이끌어와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종합해내고 있다. 그는 외래사유를 활용하는 전략으로 실천철학의 지평을 확대하고 지지의 토대를 보강하고자 했다. ▣ 다산 실학은 칸트의 실천이성에 필적 다산은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가장 잘 방증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사유체계를 가장 잘 표현한 학자 역시 그다. 실학자적인 입장에서, 중국서 전래된 서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가 하면 고대와 근대 동양사상과 철학을 망라한 6서4경을 관통했고 이를 수정보완해 경학서(經學書)로 완성한 학자이기도 하다. 다산은 19세기 말, 당대에 제기된 많은 국가사회 문제와 백성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하면서 수 많은 연구저작물을 발간하였고, 경학(經學)을 인간학적 측면에서 재정의하여 실학이라는 학맥의 저변을 인류에게 남겼다. 다산의 꿈은 동양의 경학사상을 실천학문으로 변모시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고루 돌리어 행복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산과 거의 동시대 학자로 활동해 온 칸트도 실천이성비판을 내세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연구정의하고, 소외받은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졌던 학자로 분류된다. 칸트에게 철학은 모든 가능한 것의 과학으로 규정된다. 이 또한 다산사상과 맥을 함께 한다. 칸트철학은 인간행위를 두 가지 방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존재론 우주론 합리성 심리학이 속하는 이론철학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된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 이다. 칸트는 또 좋은 사회냐, 아니냐에 대한 대답은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느냐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다산학의 현대성 연구 및 조명 절실 칸트의 실천이성은 6경4서를 통달하고 근현대 동양철학을 재조명한 다산이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칸트의 글을 보노라면, 그 보다 약 30년(1세대) 후세 학자인 다산이 학문적으로 그의 실천철학을 실천학문(실학)으로 계승했던 것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에 대한 연구는 올해 장 자크 루소, 헤르만 헷세 등과 함께 세계기념인물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향후 더욱 봇물을 탈 것으로 보인다. 다산학이 종래 동양철학 및 사상체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 의제이자 메뉴였다면, 이후로는 앞의 글 다산-칸트의 공통논제라 할 수 있는 실천철학으로서의 유학(儒學)에서 보듯 동-서철학 비교 대상으로 적합할 다산학에 대한 연구 폭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다산실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 왜 다시 다산인가 의아 할 정도로 다산연구가 부쩍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니, 그 배경과 원인에 유념하고 현상 및 방향에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정부와 학계가 21세기 다산실학의 현대적 조명에 보다 관심있게 주목하고, 종합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와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글=구동수 (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박사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 어떤 모습일까

국제심포지엄 도시재생 & 커뮤니티아트 프로젝트(기획 김성호)가 오는 10일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인천의 영화공간주안(남구 미추홀대로 716)에서 열린다. 2012년 예술 프로젝트 커뮤니티 페어_아트 폐허(총감독 이탈)의 부대행사로 마련된 이번 심포지엄은 영국, 홍콩,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각 국의 전문가가 참여해 도시재생과 커뮤니티아트의 현황과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발제자는 박신의 경희대 교수, 영국의 마이클 클레가 미술이론가, 홍콩의 목취유 CCCD 대표, 백용성 커뮤니티스페이스 리트머스 대표, 이탈 총감독 등이다. 이어 프랑스의 클레르 부드소크 독립큐레이터와 정수모 아티스트,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큐레이터, 독일의 토르스텐 나스 등이 참여해 토론을 벌인다. 한편 예술 프로젝트는 아트 스페이스 유네스코 에이포트(Art Space UNESCO A.poRT)가 주최하고 공공예술커뮤니티 문화수리공이 주관, 인천문화재단과 인천 남구청이 후원한다. 이 프로젝트는 재개발 과정에서 폐허로 방치된 소외 공간에 예술가들이 들어가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를 지향하는 것으로, 오는 26일까지 제물포 재래시장과 인천 전도관에서 관련 전시를 볼 수 있다. 문의(032)427-6777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장덕호의 보물읽기]호표흉배(虎豹胸背)

흉배는 조선시대 왕족과 백관이 입는 평상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하던 사각형의 장식품이다.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그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냈다.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것은 보(補)라 하였다.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를 수놓은 원형의 보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에 붙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세밀하게 수놓아 관복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며, 또한 상하의 계급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구실을 하였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도안을 중심으로, 구름여의주파도바위물결불로초물방울꽃모란완자당초칠보보전해달물고기불수(佛手)서각(犀角)산지초(芝草)장생 등을 수놓았다. 2004년 4월 안성시 대덕면 무능리 무어산에 소재한 진주류씨의 합장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16세기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령, 직령, 철릭, 액주름, 저고리, 치마 등 40여점의 복식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 진주류씨의 부인 의인박씨(宜人朴氏)의 염습의 중 여성 단령의 앞뒤에 호표흉배가 부착되어 발견됐다. 이 호표흉배는 남색의 비단 바탕에 문양부분만을 금색 실로 직조하였는데 크기는 3534㎝이다. 흉배의 문양 배치를 보면 아래편에는 바위가 있고, 왼편에는 대나무 숲 아래에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아래에 표범 한 마리가 서있다. 나머지 여백에는 구름으로 꽉 채워져 있으며, 호랑이와 표범, 그리고 바위 사이의 공간은 영지, 서각, 서책, 금정 같은 보문이 있다. 앞뒷면의 문양은 동일하게 제작되었고, 오랜 기간 땅속에서 있었던 관계로 후면의 흉배는 금색 실이 거의 떨어져 나가 원형이 손상되었으나 전면의 것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어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거의 원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호표흉배는 1454년(단종 2)에 처음으로 흉배제도가 도입되면서 12품의 무관들이 착용하던 것인데, 지금까지는 문헌에서 흉배착용을 규정하기 위해 언급되거나, 조선 세조대 적개공신에 오른 오자치(吳自治)의 초상화에 관복 흉배로 부착되어 그림으로 전해질 뿐이었으나 실물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 호표흉배는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실물로 발견된 유일한 예로 흉배 및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장덕호 경기도박물관 학예실장

[문화원에서 놀자]<11>양주문화원 역사문화대학

독도는 한국땅? 일본땅? , 조선족은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제사상은 홍동백서(紅東白西)가 맞을까, 조율이시(棗栗梨枾)가 맞을까? 그 진실이 궁금하다. 선사시대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 속엔 수많은 물음표가 존재한다. 모호함만 가득한 궁금증, 어딜가도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직접 맛보며 역사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인기다. 오감만족 역사교육 을 시켜준다는 양주문화원 역사문화대학이 바로 그것. 지난 8일 역사문화대학 수업을 몰래(?) 청강해 해봤다. # 중노년 男女 역사에 빠지다 양주문화원 강의실에 들어서니 어린 학생은 없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조부모님들이 앉아 있다. 강의실 뒤쪽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교수와 나이 많은 학생들은 서로 거침없이 질문을 주고 받는다. 양주 역사와 우리나라 주요 지역 역사를 배우는 1학년, 백제고구려신라를 아우르는 2학년을 거쳐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대를 배우는 이들이 바로 3학년 졸업반 학생이었던 것. 추석 이후 첫 수업인 만큼 제례와 효도라는 주제로 특강이 진행됐다. 종손, 종부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제사는 몇 대까지 지내는지, 제사상 차리는 방식은 무엇인지 등 기본적인 내용부터 제사와 효도의 관계성까지 강의가 이어졌다. 특히 제사차례와 관련해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제사상에는 조기를 올린다, 문어를 올린다, 차례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위한 수단이므로 밖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해 상을 차려야 한다. 등 누구든 아는 내용이지만 진짜 정답을 찾지 못했다. 이때 홍정덕 지도교수가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았다.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해(左脯右?), 어동육서(魚東肉西)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원칙은 조선시대 노론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것. 세상이 바뀐 만큼 앞으로는 좌치우피(왼쪽은 치킨, 오른쪽은 피자) 원칙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교수 말에 심각하게 토론을 하던 학생들은 하하하, 깔깔깔 웃기도 했다. 이처럼 40~60대로 이뤄진 역사문화대학 학생들은 학창시절에 배웠던 역사 혹은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문화를 이곳 역사문화대학에서 다시 한번 배우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직생활을 했던 오순옥씨(69여)는 퇴직을 한 뒤 양주 문화와 잊혀가는 역사를 알기 위해 입학하게 됐다면서 뭇 사람은 늙어서 무슨 공부냐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일하시던 분들과 함께 역사를 이해하며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양주 토박이 이성신씨(66)는 집이 가까워 문화원에서 붓글씨 수업을 듣다가 역사 공부에 참여하게 됐다며 60평생 잘못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고 전문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돼서 정말 좋다고 말했다. # 역사문화를 알고 싶다면 그곳에 가라 역사문화대학 수업은 단지 책으로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1학년, 2학년, 3학년이 매주 돌아가며 월요일에는 강의실에서, 수요일은 답사지에서 수업을 진행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곳곳의 유적지를 여행하기도 하지만 수박 겉핥기 식에서 그치기가 쉽다. 하지만 이곳 학생들은 이틀 전에 강의실에서 예습하고, 답사를 떠나 교수가 현장에서 유래부터 만들어지게 된 과정까지 설명을 해줘 쉽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1학년과 2학년은 답사 6회로 수업이 이뤄지고, 역사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3학년은 11차례 답사를 간다. 답사지 역시 다양하다. 1학년 때에는 회암사지, 권율장군 묘, 양주관 아지 등 양주 역사 문화지를 시작으로 보은 삼년산성, 충남 서부지역 윤봉길 의사 생가, 경주 석굴암,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수원 행궁 등 우리나라 주요 유적지를 둘러본다. 2학년은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와 월정사 등 신라의 흔적들을, 3학년은 의정부, 강원 영월, 충북 단양 등 국내 유적지와 더불어 오사카, 교토, 나라, 아스카 등 일본 관서지방의 역사 문화탐방을 한다. 답사지에서 유적을 보고, 듣고, 만져보고, 그곳에 깃들여진 역사의 향기와 지역 전통음식 맛보기까지 현장 수업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어 학생들의 이해도와 만족도가 높다. 학생대표 장이근(55)씨는 수업 내용, 인터넷 검색 등 역사에 대한 간접적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현장에 직접 나가 입체적으로 배우니까 가슴에 와 닿고 감회가 새롭다며 답사와 함께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전했다. 6년째 역사문화대학을 이끌고 있는 홍정덕 교수는 학점을 따려는 어린 대학생들과 달리 자기가 역사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참가해 열의가 대단하다며 시험은 없지만 답사를 다녀와서 보고서를 쓰면 개개인의 생각을 뚜렷하게 잘 나타낸다고 밝혔다. # 양주 시민들의 뜻으로 만들어진 역사문화대학 어렵다던 역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역사문화대학은 누가 만들었을까. 지난 2001년 문화원에서 민요, 서예를 배우던 양주지역 여성지도자들이 양주를 위해 마음을 한 데 모아 개설했다. 이들끼리 유적지를 탐방하며 역사에 대한 배움을 필요로 했고, 많은 지역민과 역사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대학을 만드는 발판이 됐다. 여성들로만 이뤄졌던 대학은 2009년부터 남녀 공학으로 바뀌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올 초 12기 모집에는 정원(40명)을 배로 넘는 80여명이 지원을 해 문화원 관계자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결국 올해 처음으로 2개 반을 구성하고 홍 교수와 함께 한순자 조교수가 수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특히 역사문화대학 1기 졸업생인 한순자씨가 조교수를 맡아 학생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또 역사문화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양주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알리는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이 우선적으로 주어짐에 따라 현재 15명이 양주의 사라져가는 역사문화유적을 지키고 알리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박성복 양주문화원장은 참여하시는 분 대부분 퇴직을 하고 노후를 즐기려고 이 곳을 찾는다며 그분들이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외적으로 역사전통을 홍보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어 역사문화대학을 양주문화원의 전통으로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매년 역사문화대학에 대한 양주시민의 사랑이 커지고 있지만 11년째 똑같은 열악한 환경이 양주문화원 역사대학에 아쉬움이 남는다. 박 원장은 양주문화원 부설 역사문화대학은 시민들을 위해 존재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을 문화관광해설사로 육성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장덕호의 보물읽기]조남리 지석묘(鳥南里 支石墓)

고인돌이란 명칭은 그 생김새대로 돌을 괴였다는 뜻으로, 고인돌이 사방에 4개의 굄돌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에 착안하여 생긴 말이다. 또 다른 이름인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무덤이라는 기능적 측면이 합쳐져 생긴 한자식 이름이다. 선사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만들어졌으며, 전국에 3만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인돌은 탁자식, 개석식, 바둑판식으로 형식을 나누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순으로 변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고인돌을 세운 목적은 첫째 무덤으로, 발굴조사 결과 사람의 뼈가 출토됨으로써 가장 신빙성이 높고, 둘째 부를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는 건축물적인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상징물, 셋째 제천행사를 행하기 위한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고인돌은 조남동의 마산 동쪽계곡 평지에 있으며 형식은 탁자식, 크기는 41029683㎝, 무게는 약 20톤이다. 고인돌의 하부에 있는 굄돌은 남쪽과 동쪽에 일부만이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윗면에서는 성혈(性穴) 23개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직경 10.6㎝, 깊이가 6.4㎝에 이른다. 굄돌은 원래 4매가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서쪽의 마감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굄돌이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99년도에 발굴조사와 함께 복원한 것이며, 그 결과 유구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덮개돌에 새겨진 성혈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한 것, 생명 연장을 위한 질병 치료의 목적, 별자리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규모, 성혈의 수량 등으로 볼 때 국내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 비교적 대형에 속한다. 발굴조사 결과 별다른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단독으로 평지에 축조된 점으로 볼 때 무덤 유적이라기보다는 부족의 구심체로써 사냥이나 농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거나 부족간의 전쟁 전에 의식을 치르기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 즉 회의, 축제, 제사 등의 행사를 행하는 부족의 구심점이 되었던 장소에 세웠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화성문화제 속 볼거리 ‘맵핑 프로젝트’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화홍문이 오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매일 저녁 화려한 영상 옷을 입는다. 제49회 수원화성문화제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수원천 꿈길 설치영상 프로젝트를 통해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이 펼쳐지는 것이다. 프로젝션 맵핑은 고해상 프로젝터로 건축물의 벽과 빈 공간에 미리 제작한 3D 입체 영상물을 투영하는 방식의 영상 퍼포먼스다. 최근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주목받으며 국내외의 대규모 예술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광주 비엔날레와 서울 덕수궁 프로젝트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수원은 물론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펼쳐지는 프로젝션 맵핑이어서 그 의미가 깊다. 특히 세계적 건축물인 수원 화성을 영상물이 흐르는 배경으로 선정, 고건축물과 21세기 미디어 기술의 조화가 깊어가는 가을 밤 하늘을 얼마나 아름답게 수 놓을지 주목된다.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것은 참여작가의 면모다. 이번 영상물을 기획 제작한 작가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김창겸과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작품에 담아온 독일인 미디어아티스트 올리버그림이다. 기존의 프로젝션 맵핑이 주로 건축물 평면에 상을 입혔다면, 두 작가는 입체적인 고건축물인 화홍문에 정조대왕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의 흐름과 수원천의 가치를 조명한 영상물을 선보인다. 작품은 10분 분량으로 행사 기간 중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반복 재생된다. 이와 함께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수원천에서는 수원천 꿈길 설치영상 프로젝트의 참여작가 7명의 각기 다른 설치작품이 펼쳐진다. 어항 속 바닷물고기를 통해 수원천에서 공생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순적 상황을 지적하거나(김새벽 作 어항), 7개 색깔의 배를 물 위에 띄워 무지개를 형상화하며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기도 한다(김태균 作 무지개 배). 이 설치영상프로젝트를 기획한 조두호 큐레이터는 수원화성문화제에 맞춰 지난 3개월간 지역탐사와 조사연구를 벌여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조명할 3D 맵핑작업과 설치작품이 탄생했다며 수원의 젖줄인 수원천에서 펼쳐지는 밤의 향연에 많은 관람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로 49회째를 맞는 수원화성문화제는 4일부터 7일까지 華城, 꿈을 품다를 주제로 연무대광장(창룡문), 화성행궁 광장, 수원천 등 수원 화성과 화성시 일원에서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의 개혁사상을 담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장덕호의 보물읽기]심환지 초상(沈煥之 肖像)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1798년에 우의정, 1800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노론 벽파(?派)의 영수로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 초상화는 양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구분면의 전신상으로 바닥에는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있다. 화면 상단에는 領議政文忠公晩圃沈先生眞이라고 쓰여 있고 높은 오사모에 짙은 녹색의 단령을 입고 가슴에는 쌍학흉배가 붙어있으며 서대(犀帶)를 허리에 두르고 있어 심환지가 영의정이 된 1800년 이후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비교적 낮은 족좌대와 원근법으로 처리된 화문석, 의복의 두드러진 명암법 등에서 19세기 초반의 사실적인 초상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생동감 있는 안면의 사실적 묘사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복과 기물의 표현, 그리고 심환지의 높은 지위를 고려할 때, 이 초상화는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난 초상화를 그렸던 전문 화가인 이명기(李命基 1756~?)가 그렸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정도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상의 요체를 포착한 얼굴 묘사로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질감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기물의 표현으로 박진감 넘치는 시각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조선후기 초상화의 특징인 사실성과 장식성의 조화를 잘 보여주며 기법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그간 역사학계에서는 심환지에 대해 노론 벽파의 영수로 정조의 개혁 정치에 반대하여 정조를 독살한 배후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2009년 공개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편지에 의하면 이전의 평가와는 다르게 정조의 개혁정치를 심환지가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간 논란이 많았던 심환지의 역사적 평가 -정조 독살설의 배후, 정조의 정치적 정적-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초상화에 보이는 심환지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당시 혼탁한 정국을 주도하던 노련한 노정객의 내면속 깊이를 떠올리게 하는 문화재이다. 이 초상화는 2004년 청송심씨 안효공파 온양공 종중에서 관련 유물과 함께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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