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시대가 본격 개막됐다. 글로벌 지구촌이 하나의 섹터로 재편되며 의욕과 애정만으로 우리 것을 보호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주고 받으며 장점을 찾아 경쟁력을 높여 가는 길만이 세계무대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게 됐다. 먹거리 생명산업으로 지칭되고 있는 농산물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식량자원을 무기 삼아, 각국의 공세가 우려되는 상황으로 경쟁력을 하나 둘 높여 가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경기도의 경우,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몇몇 경쟁력 높은 농산물이 있다. 사과와 배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 바로 화성 포도다. 화성 포도는 2005년도에 까다롭기로 이름 높은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근 3년간 홍콩과 싱가포르 등 동남아 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주력 수출 품목이다. 내수가격이 만만치 않아 수출물량 확보가 어려웠지만 화성시포도수출협의회 소속 농가들은 흔쾌히 수출에 동참했고, 동남아나 미주시장에 한국 포도의 경쟁력을 각인시켰다. 더불어 내수 시장의 안정을 가져와 농가소득 보존은 물론 국내 포도 산업 경쟁력 확보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각 계층의 지원과 관심이 적중했다.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일선 농가들의 노력은 물론 농가 대상의 수출지원 컨설팅이나 해외 마케팅, 자금 지원에 인색지 않았던 농수산물유통공사와 경기도, 수출업체 등이 큰 힘이 됐다. 그 중에서도 포도 수출업체인 엘림무역(대표 오성진·39)의 역할이 돋보였다. 화성포도 가능성 본 후 주저없이 해외 노크 까다로운 美시장 열어… 수출물량 6배 ↑ 오성진 대표가 화성 포도와 연을 맺게 된 때는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8월, aT(농수산물유통공사)의 소개로 화성 포도를 처음 알게 된 오 대표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곧바로 30t 물량을 화성 포도수출협의회와 계약, 해외 시장을 두드렸다. 그의 의지와 확신은 적중했다. 국내 거점이 탄탄한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대박 조짐을 알려오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됐다 싶어 지난해 물량을 배 이상 늘렸다. 70t을 갖다 팔았다. 이 역시 만족스런 결과였다. 그는 올해 170t 규모의 화성 포도를 가져다 동남아 시장에 팔 계획이다. 자신도 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와 홍콩 시장을 자신한데는 자국내 최대 규모의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는 제1군 바이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현지 바이어와의 돈독한 우정을 수년간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지금도 얼마든지 팔아줄테니 좋은 물건만 가져오라는 말을 듣곤 한다”고 그는 귀띔했다. 예사롭지 않는 경쟁력이다. 여세를 몰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시장도 노크했다. 올해 생산된 화성 포도를 까르푸 등 현지 시장을 통해 판매키로 현지 바이어와 약속도 했다. 내친김에 지금은 베트남 시장 진출까지 저울질 하고 있다. 경기도와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올해 새송이 버섯을 신규 판매 물량으로 정하고 동남아 시장에 선보인다. 물량은 이미 안성 머쉬하트측으로부터 공급 받기로 계약했다. aT, 경기도 등과 함께 해외 마케팅은 물론 바이어와의 상담을 끝마쳤다. 잘 될 것이란 확신에 차 있다. 더불어 지난해부터 취급하고 있는 경기산 배 수출건도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 화성, 용인, 양주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중소과 중심의 배를 이미 동남아 시장에 선보여 판로는 확보하고 있는 셈이지만 올해의 경우 물량 확보가 쉽지 않아 고민이 없진 않다. ↗ “올해 270만弗 수출달성 목표” 지난 4월말 수원에 둥지를 튼 엘림 오성진 대표의 원 거점지는 부산이다. 2002년 4월, 부산에서 간판을 내건뒤 감귤과 딸기를 주력 품목으로 무역 업체로의 모습을 가꿔가기 시작했다. 캐나다 감귤수출로부터 시작, 홍콩 딸기 수출 등 몇년새 성장 속도가 눈부시게 거듭됐다. 급기야 2005년 aT 센터 지사화 사업체로 지정된데 이어 해외 각종 박람회와 판촉전을 주도하며 신선농산물 부문 수출에 있어 국내에서 제일가는 업체로 발돋움 했다. 지금도 감귤은 물론 포도, 딸기 등 신선 농산물 부분별 수출 실적이 각각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해 248만불 수출이란 금자탑을 이룩했다. 올해 그는 경기도에서 270만불 수출 달성을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확신하기까지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일선 생산 농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해외 어느곳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제품만을 선적해 보내고 있다. 수출날이 임박할 때면 그는 농가에서 며칠을 보낸다. 작업 현장에서 팔을 걷어 붙인채 작업을 거든다. 농가에 보전해 주기로 약속하고 가격은 물론 물량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지켜내고 있다. 그리고 좋은 물건만을 골라 빼가는 얌체짓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맘에 들어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갖고 있다”고 남윤현 화성포도수출협의회 사무국장도 한몫 거든다. “까다로운 일본이나 미국보다는 동남아 시장이 틈새 시장으로 더 큰 장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엘림무역 오성진 대표, 경기 농산물을 세계인에게 선보이는 첨예병으로의 역할이 기대된다. /김동수기자 dskim@kgib.co.kr
그만큼 노하우가 쌓여 있으며 국내 황무지라 할 수 있는 의료기기 분야에서 일으킨 업적이기에 웬만한 내공으론 불가능했다. “IMF가 터졌을 무렵이었어요. 수입 의료기기는 비싼값에 들여와야 했는데, 그 가격으로 팔 곳이 없었습니다. 저 뿐 만 아니라 그때 당시 수입업체들이 모두 비슷한 상황을 겪었죠. 그 때, ‘그러면 차라리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전에도 한 번 시도했었거든요.” 1968년 명지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정보통신부에서 사회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이후 10여 년 가까이 공직에 몸담았다. 하지만 전공에 대한 애착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공직을 나온 그는 틈새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무역업 자체가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당장 몇 년 앞을 바라보기 보다는 먼 미래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의료기기 시장을 보게됐고 전방위적인 시장 보다는 치과라는 분야에 도전을 결심했다. 1983년 치과기자재 수입업체 대일통상 대표를 지낸게 그 출발점이다. “치과에서 의료기기라는 게 그야말로 약품 만큼이나 많습니다. 특히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 정밀가공업이 발달한 나라에서 발전됐죠. 이 점에서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술이 뒤쳐지긴 했지만 분명 발전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장을 선점하려 했다는 의지다. 한국의 가공기술이 어느 시점에선 떨어졌더라도 잠재력이 있었기에, 이미 앞선 국가에서 형성된 시장성을 미리 습득, 잠재력이 현실화될 때 접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1990년대 초반 (치과의료기기를 만들기 위해) 시도했었습니다만 잘 안됐죠. 스위스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우리의 자동차산업 있잖아요. 어느 순간 확 올라왔죠.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기술력이 곧 가공기술력도 끌어올리게 됐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다가왔다. 군소업체들은 부도가 나고 국내 시장경제가 처참히 짓밟힐 무렵 이 대표는 내심 계획했던 목표를 실현키 위해 움직였다. 이듬해인 1998년 치과의료기기 제조를 위해 팔을 걷어 붙혔고 기술진들을 하나 둘씩 영입하기 시작했다. 2001년께,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내는 수준과 비슷한 기기를 생산할 수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엇비슷한 제품으로 승부하려했다면 애시당초 뛰어들지도 않았다. 이어 2004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초음파를 통해 시술할 수 있는 ‘초음파 치석 제거기’로 발명특허를 냈고 2005년에는 산업자원부로부터 ‘차세대 일류상품 인증서’를 받기에 이른다. 국내시장 30% 가량을 점유했고 과거 주수입국이었던 나라에 역수출을 포함, 50여 개국에 수출이란 쾌거를 이뤘다.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변환시킨 셈이다. “아직 멀었습니다. 앞으로 계획이요? 중국으로 시장성을 넓히려고요. 누구는 이미 중국은 어렵다 하지만 이쪽 분야는 예외죠. 대륙의 특성상 사스나 황사 등으로 치과의료기기 소모가 더 많습니다. (시장규모가) 국내의 20배 정도 되요.” 이미 치밀한 계산으로 세계 시장을 바라보는 이승대 대표. 중국시장에 성공하면 미국과 남미로까지 현지공장을 설립 하겠다는 포부도 귀띔했다. 치과의료기기 뿐 아니라 생활의료기에까지 도전하고 싶다는 그. 지칠줄 모르는 끊임없는 목표에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란 의미가 새삼 떠오른다./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디메텍은… ㈜디메텍은 1983년 7월 서울시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대일통상(치과기자재 수출입)을 모태로 한다. 2000년 1월 대일 덴테크로 상호를 변경, 치과용기기제조 및 무역업으로 탈바꿈하고 같은 해 5월 부천시 오정구 삼정동의 부천테크노파크로 자리를 옮겼다. 2001년 5월 식품의약품 안전청 의료용구 제조업을 허가 받은 뒤 식품의약품 안정청 치과용 공압분사연삭기 제조품목 허가 및 스케일러 제조품목 허가를 받고 그해 7월 ㈜디메텍으로 법인전환을 했다. 2002년 4월에는 ISO9001, ISO13485 및 CE MARK 국제인증을 획득하고 부천시로부터 치과용 스케일러 및 공압분사연삭기로 우수상품에 선정되며 다음해에는 경기지방중소기업청으로부터 수출 유망 중소기업으로도 선정됐다. 이어 2004년 2월 초음파 치석 제거기 발명 특허를 특허청에 등록하고 벤처기업 등록 및 초음파스케일러를 FDA에 등록했다. 2005년은 그야말로 화려한 나날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로부터 연구소 인정서를 발급받고 산업자원부로부터 차세대 세계일류상품 인증서를 획득하는가 하면 경기도로부터 유망중소기업 인증 및 인터넷 무역 프론티어 기업 인증, 부천시로부터 벤처기업 우수제품 대상 수상 등에 이르더니 10월 산업자원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또 지난해에는 코트라로부터 ‘KOTRA B2B e-TRADE’ 사업 최우수기업 표창을 받았으며 올해에는 3월 (재)부천산업진흥재단 표창과 4월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는 등 매년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국내 주요 제조업체들은 자기화물을 자기가 직접 처리하는 1자나 2자 물류체제를 운영하는 대신에 고정비가 적게 들어가는 제3자 물류를 선호하고 있어 제3자물류는 최근 물류 분야에서 급격히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영물류는 이같은 추세를 미리 파악해 적절한 대응책을 준비해온 결과 이 분야의 선두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국내 제3자 물류산업을 선도하는 기업 삼영물류의 모체는 지난 76년 국제복합운송업체로 설립된 삼영 익스프레스로 이 회사는 88년부터 국내 물류산업에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국내에 택배시스템을 선도적으로 도입하는 등 큰 역할을 해오던 삼영물류는 90년대 중반 한국형 제3자 물류기업의 모델을 제시하는 등 새로운 물류기술을 현장에 도입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98년 2월 삼영물류라는 새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처음에 제3자물류를 하는 대신에 DHL이나 FEDEX와 같은 국제특급송달 사업인 ‘쿠리어 사업’을 목표로 출발했다. 본격적으로 제3자 물류산업에 뛰어든 것은 94년 주류 전문업체인 진로의 물류업무를 대행하면서 부터다. 이 때부터 삼영물류는 물류비 지급방식 개선작업에 착수했다. 3자물류의 운영으로 삼영물류를 이용하는 기업들은 결과적으로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제조업에서 물류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많게는 20%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삼영물류의 획기적 물류시스템 변화는 물류비용 절감과 함께 산업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효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영물류는 이같은 변화를 바탕으로 ‘물류의 모든 것’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초기 물류컨설팅부터 입고, 보관, 재고관리, 물류가공, 출고, 배송, 물류정보의 피드백(Feed-back)에 이르기까지 ‘맞춤 물류서비스’를 제공하는 제3자 물류 방식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고객중심이 최고의 경영가치 삼영물류는 창사이래 고객중심 사고 확립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이 회사의 고객은 일반 소비자가 아닌 바로 기업이기 때문에 고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이 고객이다보니 물류서비스 분야에서 친절, 정직, 저렴, 신속하고 편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고객을 창출할 수 없고 고객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 진로, 월마트, 삼성전기, 유한킴벌리, 바이더웨이, 신세계 등 13개 제조·유통업체가 이 회사의 제3자물류 통합대행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또 가구, 식품, 일반 상품에 대한 공동물류서비스와 납품대행, 보세운송 분야까지 합치면 총 148개로 늘어난다. 이 회사는 대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슬림화된 조직의 최대 무기인 ‘순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핵심적인 차별화 전략은 ‘QR(Quick Response)시스템’이다. 말 그대로 현장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체계다. 이 회사에는 3단계 이상의 결재가 없다. 고객의 대기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물류업무의 특성상 현장에서 모든 결정이 이뤄지고 회사는 그 결재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객의 불만 사항을 최단 시간 내 처리하는 등 서비스 차별화를 통한 고객만족을 끊임없이 창출해 내고 있다. ◇공동물류사업으로 사업분야 다각화 삼영물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최근 전략적으로 공동물류사업에 뛰어드는 등 국내 대표적 종합물류 전문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삼영물류는 인천시가 주관하는 남동공단 물류공동화 주관사로 선정돼 국내 처음으로 중소기업들의 물류공동망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이같은 성과는 삼영물류가 단위당 물류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는 물류공동화 사업에 큰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삼영물류는 물류공동화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공동물류 전용센터로 전국의 24개 물류센터를 이용해 많은 중소기업 상품을 공동보관, 배송하는 서비스를 꾸준히 확대할 예정이다. 또 삼영물류는 제3자 물류 도입 초기의 운송, 보관, 재고관리에 국한된 서비스에서 한걸음 나아가 최근에는 주문접수, 운송업체 선정, 포장, 라벨링, 상품조립 등 직접적인 고객업무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가구물류서비스는 이런 변화의 대표적인 예다. 삼영물류는 현재 이노센트, 파로마가구 등 50여개 가구업체에 물류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740억원의 매출을 올린 삼영물류는 물류업, 택배업외에도 인터넷관련사업, 물류컨설팅업, 복합운송사업, 하역업, 인력파견업, 각종 부대사업 등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물류기업을 기치로 내걸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물류분야 선두주자로 기업을 이끌어낸 비결은. ▲고객이 인정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고객이 신뢰하는 조직원이 되도록 교육하고 고객의 요구를 신속한 분석과 대응, 서비스의 상시 평가 및 지속적 개선책을 마련했다. -평소의 경영철학은. ▲기업은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다. 삼영물류는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좀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직원들이 자기개발을 할 수 있도록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 학비의 절반을 지원하고 있다. 또 책임경영이 이뤄지도록 직원들에게 결정권을 대폭 위임하고, 11개에 이르는 관계사(계열사)가 책임경영과 고객서비스 확보를 위해 지분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나눔경영에 대한 생각은. ▲기업은 열심히 일해서 일단 기업을 유지·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수익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 활용해야 한다. 삼영물류는 공익단체 및 복지시설 후원 및 물류지원활동 등을 적극 벌이고 있다. 또 소녀가장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공헌활동도 벌여 나가고 있다. /이영철기자 wyatt@kgib.co.kr
남들이 한국에서 일군 사업을 발판으로 중국으로 떠나갈 때, 오히려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사업에 성공한 ‘해외파’(?) CEO가 있다. 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에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박대조 ㈜거림스톤·㈜세종마블 대표이사(37). 석재 수입에서 가공, 판매에 이르기까지 업계에서는 그를 ‘미다스의 손’이라고 부른다. 박 대표는 2000년 4월 중국 합작 공장을 설립해 사업을 시작한지 이제 만 7년째다. 그는 남들이 말하는 일찍 성공한 기업가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억세게 운좋은 촌놈’이라고 소개했다. 하는 사업마다 운좋게 잘됐기 때문이라며 겸양을 보였다. 사업이 커지면서 자신의 평가도 같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어릴적 책값이 없어 책을 못살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2시간이 넘어 버스 한대가 올 정도로 시골동네인지라 학교까지 8㎞나 되는 거리를 매일 혼자 걸어다녔다. 누가 생각하면 낭만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그게 현실이었다. 그때부터 꿈은 남들처럼 ‘대통령’이나 ‘장군’, ‘과학자’가 아닌 ‘돈 잘버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서 'CEO변신' 성공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형편은 별로 나아진게 없었다. 등록금부터 책값, 생활비 걱정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95년 장교(ROTC)로 군에서 제대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업했다. 일본 지사에 파견될 정도로 인정도 받았다. 1년 반쯤 지났을까.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산악회에 가입했다. 여기서부터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소 부지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깍듯한 그를 지켜보던 산악회 회원 중 한 사람이 일을 같이 하자며 제안한 것이다. 박 대표는 대부분 업무가 틀에 잡힌 대기업보다는 자신이 직접 회사를 만들어가며, 커가는 조직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어학도 배우고, 돈도 벌고’라는 단순한 생각에 다니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중국 하문에 있는 한국 석재회사의 현장 관리인으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중국에 도착해보니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 그것도 주변 상황이 열악한 해외 현지공장. 시스템은 미흡했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잔손이 필요했다. 제품의 품질관리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현지 사람들과 생각하는 가치관은 물론이고 일하는 스타일까지 모든게 그에게는 넘어야할 산이었다. 우선 그는 말부터 배웠다. 한중 사전을 들고다니며 직접 현장 인부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과 어울리며 조금씩 그들을 이해해나갔다. 그렇게 그는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는 무슨 일에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는 그의 성격이 십분 발휘됐다. 中→한국 역행… 건설경기 호황 ‘매출 껑충’ 그는 중국 현지 공장을 진두 지휘했다. 이런 저런 기획력을 발휘하면서 다소 실험적인 경영도 해봤다. 처음에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하루 이틀 견뎌내다보니 훨씬 안목이 높아진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납품 구조도 개선해 비용을 줄여 나가고,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도 만들며 일에 한참 재미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회사와의 오해 등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는 억울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박 대표는 2000년 당시 서울 화곡동 3천500만원 전세금을 빼 이 돈을 종자돈 삼아 중국 청도 현지 투자자와 함께 합작 공장을 세웠다. 우선 재단기 2대와 활석기 2대를 들여왔다. 시작은 초라했지만 새로운 거래처를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아갔다. 그런 자신감이 독이 됐을까. 사업을 시작한지 1년도 안돼 그는 2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앞서 석재 사업 이외에 다른 사업에 손댄 것이 화를 불렀다. 불행중 다행인지 합작 공장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재기할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꺼내든 카드가 바로 한국 진출이었다. 당시 많은 업체들은 인건비, 물류비 등의 부담으로 앞다퉈 중국으로 진출했지만 그는 과감히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회사를 설립했다. 성내동 전세집에 팩스기와 전화기를 두는 것이 전부였다. 직원도 부인이 유일했다. 회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거래처 사람이 제품을 보겠다며 직접 회사로 찾아오겠다고 하면 그는 한사코 만류했다. 행여나 초라한 사무실을 보고 거래를 끊자고 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때문에 직접 발품을 팔며 거래처에 샘플을 가져다준 것이 오히려 거래처 사람들에게는 성실함으로 비춰졌다. 우선 석재 사업에만 전념하기로 한 그는 중국 현지 공장에서 원석을 공급받고, 직접 공사 현장을 돌아다녔다. 이런 노력들은 건설경기가 호황을 맞으면서 박 대표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줬다. 대리석 등 석재의 수요가 늘어나고 영업 실적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게다가 고급빌라의 건축이 많아졌고, 마감재가 타일에서 대리석으로 바뀌면서 매출이 고공성장을 계속했다. 한국에 진출한 첫해 25억원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매출을 올린데 이어 2001년 75억원, 2002년 120억원, 현재 300억원 정도로 늘어났다. 품질관리 철저… 유럽 등 수입루트 다양화 그는 종전에 대리석만 수입해와 업체에 납품하던 단순한 수입업체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선 자신의 사업의 모태가 됐던 중국 공장을 독자 법인으로 운영하고 수입검사와 중간검사, 최종검사 등 3단계로 나눠 품질 검사를 했다. 특히 원석 하치장에서 로트 관리를 통해 색상을 동일화하고 중국 뿐 아니라 유럽, 남미 등 수입해오고 있는 루트도 다양화했다. 얼마전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사업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많이 벌긴 벌었나 보다’ ‘돈을 벌더니 자만에 빠졌다’ 등 비아냥 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릇이 있으며 그것을 알때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욕심을 언제 버리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회사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내실화를 다지는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내년 1월부터 정년을 56세 이상으로 연장하는 기업에 장려금이 지급되고 오는 9월말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청년 신규고용촉진장려금제도가 오는 2010년 말까지 연장 시행된다. 노동부는 최근 이같은 내용을 담은 고용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번에 새로 도입된 정년연장 장려금은 기업이 정년을 56세 이상으로 기존에 정한 연령보다 1년 이상 연장할 경우 정년이 연장된 근로자 1명당 월 30만원씩 연장기간의 2분의 1 기간 동안 사업주에게 지원해주는 제도다.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300명 이상 사업장의 정년은 지난 2002년 56.6세, 지난 2003년 56.7세, 지난 2004년 56.8세, 지난 2005년 56.8세, 지난해 56.9세 등으로 정체돼 있다. 이에 따라 고령자고용촉진법은 각 기업들이 직원들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하도록 노력의무를 부여하고 정년이 낮은 기업들은 정년연장계획을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그동안 기업들의 정년은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섬유를 누가 사양산업이라고 말합니까. 우리에게는 희망산업입니다.” 회사를 세운지 20년.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시간이지만 이봉화(57) 두산산업 대표는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난 것이 변화라면 변화랄까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밖에서는 영업현장을 직접 누비고, 안으로는 직원들을 격려하느라 분주히 보내고 있다. 직접 거래선을 돌아다니며 영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진단해가며 두산산업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경북 김천이 고향인 그는 75년 상경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조그마한 공장을 하나 운영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섬유산업이 한창 활황기였던 1987년, 이 대표는 그의 바람대로 부천에 공장 문을 열었다. 한동안 기계 AS와 판매업을 해오던 그는 평소에 기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우연찮게 일본에서 기계전시회가 열린다는 말만 듣고 그는 한달음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도착해 한참을 전시회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전시장 한켠에 있는 기계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진짜 기가막힌 기계가 제 눈에 딱 들어왔습니다, 그때 바로 저거야 싶더군요”. 요즘 말로는 ‘필(?)’이 제대로 꼽힌 것이다. 그 기계가 그의 운명을 순식간에 바꿔놓은 편직기였다. 이 대표는 귀국하자마자 가진 돈을 털어 독일 전시장에서 봤던 편직기를 들여왔다. 그렇게 편직기가 좋아 그는 지금까지 섬유업에 종사하고 있다. 대형업체로부터 OEM 방식으로 주문 제작했지만 한창 수출물량이 많았던 시기라 당시에는 연초받은 주문량으로도 10월까지 밤샘작업을 해야했다고 한다. 원단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면서도 직원들은 힘든 기색하나 없었다. 일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일하는 즐거움이 뭔지를 그때 맛보게 됐다고 한다. 95년 회사를 지금 공장이 성남으로 옮기고 회사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갖게 됐다. 납품업체도 늘어가고 회사는 날이갈수록 성장하면서 어느정도 기반도 잡았다. 공장은 날이 갈수록 성장했다. 회사가 커가는 만큼 더 큰 열매를 거둬들이고 싶었다. 97년에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대당 10만달러에 달하는 편직기 10대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회사도 나름대로 생산력이나 기술력을 업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후 IMF사태를 맞으면서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아직도 그때의 여파가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는 인생 살면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스스럼없이 당시를 회상할 여유도 생겼다. 얼마전 그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농담삼아 “너 아직도 섬유회사 하냐”는 말을 던졌다. 그 말을 듣고는 웃어 넘겼다. 이제 이런 질문에는 이골이 났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그만큼 요즘 섬유업계 전반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섬유업을 사양산업이라고 하는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이 살면서 꼭 필요한게 의식주인데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벗고 다니지 않는다면 섬유업은 분명 희망산업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단지 기술력과 시대 흐름에 맞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요즘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수입품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지만 고급 기술력으로 승부한다면 큰 걱정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대표는 요즘 몸이 두개라도 부족하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그는 같은 섬유업에 종사하는 회사들과 힘을 합쳐 공동 브랜드도 만들어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 사업이 그에게는 확신을 안겨줬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동안 펼쳐 왔던 성장 위주의 경영에서 앞으로는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펼치겠다고 한다. 무분별한 경쟁은 자제하고 보다 안정적인 수익 위주로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설명이다. “지금 당장 유명 백화점 매장에 있는 옷을 가져와서 품질을 비교해도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이 절대 뒤떨어질게 없다고 확신합니다. 작은 차이는 있지요. 그 옷에는 단지 유명 브랜드가 찍혀있고 우리가 생산한 제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엔지니어출신인 만큼 그는 요즘도 웬만한 기계고장쯤은 직접 해결한다. 직원들도 이 대표를 맥가이버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그러나 그는 20년동안 회사를 경영하는 동안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꿈을 이루고 살기에 더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섬유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별로 못봤습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그동안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있을 곳은 바로 이 공장입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한 우물만 열심히 파면 언젠가는 우물안에 물이 가득차겠지요.” 크지는 않지만 한 회사만을 꾸준히 키워온 박용성 한보섬유 대표(49).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항상 남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의 박 대표. 그가 남들이 사양산업이라고 하는 섬유 회사를 이끌어온지도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늘 욕심없이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큰 후회는 없다고 회고했다. 박 대표의 지난 삶을 되내이다보면 그가 어느 정도의 노력파인지를 알게 된다. 85년 서울의 한 조그마한 공장에 편직기 10여대를 들여와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여엿한 한 기업의 대표로 성장하기까지 그에게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 70년대초 고향인 충남 당진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서울의 작은 섬유 염색업체에 취업하면서 박 대표는 처음 섬유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회사에서 관리와 영업만 10여년을 맡아 일했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해오던 그에게도 주변 사람들은 직접 섬유업체를 운영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대기업은 물론이고 잘나가는 중소기업 가운데도 섬유에 손을 안댄 업체가 없을 정도로 섬유업은 호황이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주저없이 85년에 창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열정만 앞선 탓에 사업체를 세우기는 했지만 염색업체에서만 일해오던 박 대표에게는 편직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문지식이 없어 무척이나 고전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직원들과 함께 공장에서 밤새기를 밥먹듯했다. 조금씩 길이 보였다. “당시에는 섬유가 엄청 잘나갈 때였죠. 주문도 많고 기계를 밤낮없이 돌리는 업체는 대부분 섬유업체였을 정도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다. 때문에 투자에 항상 과감하다. 90년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독일에서 편직기를 들어와 회사를 자동화했고, 93년에는 스위스에서 기계를 도입,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선 과감한 투자로 이목을 받았다. 나이 40을 앞두고 그는 뭔가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사업이 한창 성장하던터라 욕심도 생겼다. 물량을 늘리고 제품도 고급화하기 위해 97년 일본에서 고가의 편직기를 들여올 생각이었다. 그는 은행에서 50만 달러 대출을 받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실패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IMF가 들이닥치면서 그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 아침에 이자가 올랐고 빚은 순식간에 100만 달러로 늘었다. 그는 충격과 스트레스로 병원에 두번씩이나 입원했다. 기계를 넘겨버리고 회사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한우물을 파라’는 그의 생활신조에서 알 수 있듯이 박 대표는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제품을 짜고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13년동안 먹고 살았던 일을 한순간에 놓을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뾰족히 할 줄 아는 일도 없었고요.” 이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박 대표는 한발한발 다시 전진했다. 당시 대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아직도 품질만큼은 최우선으로 꼽는다. 그점이 바로 박 대표가 빨리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박 대표는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입산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차별화였다. 성남섬유제조사업협동조합과 함께 디자인을 고급화하고 공동브랜드를 활성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동안의 노하우와 기술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우선 시장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조합과 중국 동북 3성의 경제중심도시인 요녕성 심양시에서 열린 한국상품전시회에도 참가했다. 여기에서 자신이 만든 제품 홍보는 물론 효과적인 현지 마케팅까지 병행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에 대박(?)을 터트렸다. 현장을 방문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중국 소비자 선정 우수 10대 한국 건강브랜드로 선정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중국 현지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는 조합은 물론이고 박 대표에게도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 쾌거였다. 또 전시 기간 내에 다양한 바이어들과의 상담도 이어졌고, 대리점을 개설하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기대 이상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앞으로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이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박 대표에게 얼마전 또하나의 행복이 찾아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겠다며 공장 허드렛일도 마다않고 바닥부터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들이 여간 고맙고 기특해 보이는게 아니었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아들은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직장에서 땀 흘리고 일하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줄 모른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다른 회사의 주문을 받아 원단만 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에게 입혀보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을 아들과 함께 이루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면서 슬픈일도 기쁜 일도 많았습니다. 옆에서 항상 함께 해준 가족이 있어 행복했고, 공장에서 함께 땀흘려준 직원들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못다 이룬 꿈을 아들과 함께 만들어 나갈 겁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모든 세상이 자동차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열심히 뛸겁니다.” 도로 흡음벽을 제작 생산하는 에스에이㈜의 박춘종 대표(59)는 요즘 하루가 24시간으로는 부족하다. 지난 2001년 9월에 창업해 불과 5년만에 회사를 안정궤도에 올려놓고 이제는 사업다각화까지 모색하고 있다. 박 대표는 이러한 고속성장의 비결을 끊임없는 기술력 향상과 ‘발상의 전환’에서 찾았다고 한다. 아직도 항상 쉼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서 성공한 중소기업 CEO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박 대표의 어릴적 꿈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사실 그의 꿈이라기 보다는 부모님의 꿈이었다. 60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로 유학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기대를 한가득 안고 서울로 오긴 했지만 그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선생님이 되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접고는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이후 상고에 진학했고 66년 졸업과 함께 국내의 한 대형출판사에 입사하면서 그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70년 칸막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에 취업하면서 박 대표는 인생에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다. 그는 이 회사에서 특허와 상표 등록 등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칸막이 사이의 소음을 줄이는데 관심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 일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는 사실 어릴적 유별나게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신기한 물건을 보면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뜯어도 보고, 고장도 많이 내 부모님에게 곧잘 혼나기도 했다고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재능을 그는 늦게 발견한 것이다. 회사에서 8년간 이런 저런 업무를 하면서 그는 소음이나 방음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회사 설립은 단순했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 가락동 시장에 갔다가 그 당시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목재 방음판을 유심히 살펴봤다고 한다. 한참을 지켜보다 ‘저 정도는 나도 만들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통나무를 이용한 방갈로 사업을 하고 있던터라 목재를 이용한 사업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젊고 패기가 있어 고민 끝에 3년간 닦아온 방갈로 사업을 뒤로 하고 방음벽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생각은 사업을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돼 자신의 판단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그가 봤던 것은 방음벽이 아니라 차음벽이었던 것이다. 차음벽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의 소리 역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단순히 소리를 막아주는 역할만 한다. 이렇게 차음벽을 방음벽으로 잘못 알고 시작한 사업에 그는 오히려 흠뻑 빠졌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머리안은 온통 ‘방음’과 ‘소리’와의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통나무에 구멍을 내서 그곳에 폴리에스터를 넣은 목재 방음벽을 만들어냈다. 직접 발로 뛰며 다른 제품과 비교하고 연구했다. 시각적 효과는 물론 KS제품 인증, 우수조달제품 인증 등 목재 방음벽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그의 성격상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03년에는 투명흡음벽에 대한 발명특허를 내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2년만에 주문량이 늘면서 업계에서 주목받는 기업으로 급부상했다. 목재 전문가에서 방음 전문가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그는 항상 침대 위에 펜과 메모지를 두고 잠을 잔다. 잠을 자다가도 머릿속을 번쩍 스쳐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잊어버리기 전에 꼭 메모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탓이다. 이런 것도 습관이 되다보니 요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서 깨 메모를 하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 메모지를 보면 잠시 잊었던 생각이 다시 사진처럼 떠오른다고 한다. 행여나 길을 지나가다가도 좋은 생각이 날까봐 양복안 주머니에는 항상 3~4개의 펜과 수첩을 꼽고 다닐 정도로 철저한 메모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는 천성이 부지런하다. 1년 중에 그가 쉬는 날은 설날과 추석 두 번 뿐이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회사에 나와 밤낮없이 연구에만 몰두한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온 제품이 상용화되면 거기서 나오는 희열은 정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에스에이㈜는 현재 국내 투명 흡음벽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제는 발을 넓혀 중국 상해까지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현재까지 목재방음벽의 생산을 시작으로 소음저감용 방음패널, 목재방음판넬 등은 2005년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우수조달제품으로 인증받아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만들어진 제품을 그냥 파는 보편적인 마케팅 영역을 탈피해 시장의 흐름과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늘 고민한다. 최근에는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도심내 고속화도로가 늘어나면서 민원이 늘어나는 것에 주목했다. 이런 고민은 국내 처음으로 투명 흡음벽을 개발하는 성과를 올렸다. 기존 방음벽과는 달리 말그대로 소리를 흡수, 소음을 저감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방음벽은 이미 시장이 과열됐다고 판단하고 그 보다 업그레이드된 흡음벽을 연구, 생산해 틈새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설치작업도 손쉽게 했다. 구조적 안전성도 뛰어나다. 흡음벽은 성남시 탄천변도로와 우회도로 등의 현장성능평가를 통해 그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했다. 전국의 도로에 그의 손길이 묻어 있다. 그가 항상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고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집념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에도 부산 등 전국적으로 흡음벽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차별된 시공을 강조하는 박 대표는 흡음벽 관련 여러가지 특허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기술력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앞세운 고품질의 제품으로 방음벽 시장의 틈새를 적극적으로 공략한 것이 적중했다고 한다.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나고 대형화되면서 소음이 커지고 있지만 도시민들의 편안한 주거생활을 위한 방법으로는 현재로서는 방음벽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방음벽을 어떻게 특화시켰을까. 우선 박 대표는 외부의 소음이나 실내의 음향을 차단하기 위해 단순히 벽을 두껍게 하는 기존의 방음벽과는 차별화를 뒀다. 그리고 기존 1세대 회사들이 기술 개발보다는 마케팅에 주력했다는데 주목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뛰어난 기술자였다기보다는 8년 가량을 방음벽 회사에서 특허 등을 신청해주며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배우고, 듣고, 직접 몸으로 부딪혀 지금의 실전 기술을 익힌 베테랑 엔지니어다. 때문에 기술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던터라 ‘선 기술개발, 후 마케팅’ 전략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초심을 잃지 않은 연구정신으로 요즘은 도로의 불투명한 방음벽을 모두 걷어내고 도심 미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투명한 방음벽을 선보였다. ‘터널용 방음판’도 개발 중에 있다. 그는 도심내 소음이 없어지는 그런 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소음이 없는 조용한 세상이 가장 좋지만, 꼭 방음벽을 설치해야 한다면 도심미관을 고려한 아름답고 효율적인 제품을 사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방음벽이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자리잡는 그날을 위해 소음과의 전쟁을 계속해 나갈겁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도내 중소기업들이 장기간의 내수침체로 고질적인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 중소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 이런 가운데 은행권의 경영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은 여전히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중소기업중앙회와 경기일보는 제19회 중소기업주간(5·14~19)을 맞아 업계와 금융계, 정부와 지자체, 학계 등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 ‘은행권의 경기지역 중소기업 지원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지상토론회를 가졌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과 해소방안, 개선점, 금융지원과 정책입안 방향, 정책자금 지원 등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하고 은행권의 중소기업에 대한 원활한 자금지원 방안을 모색해 본다. “中企자금 루트, 정책·信保·공제 확대 시급” ■ 은행권의 경기지역 中企지원 활성화 방안 <참석자> ▶박재필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 ▶박종규 기업은행경수지역본부장 ▶심규섭 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회 본부장 ▶오일환 경기지방중소기업 청장 ▶이병관 경기도 기업지원 과장 ▶최동진 중소기업중앙회 경기지역 회장<가나다 순> -사회자=최근 중소기업들이 장기간 내수부진과 원자재가격 상승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내 중소기업의 경영환경은 어떤지. ▲이병관=한국은행 경기지역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도내 기업의 4~5월 중 업황BSI는 제조업이 부진한 모습을 지속하고 있지만 비제조업은 2월 이후 개선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자금사정은 제조업과 비제조업 모두 1분기 수준을 유지했고, 제조업은 점차 호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내 산업생산 부진이 연초보다 다소 완화되고는 있지만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 무선통신기기의 수출둔화는 지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한미 FTA 체결은 도내 경제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전기·기계·장비 부문의 경쟁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생산 감소도 우려된다. -사회자=정부나 지자체가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는데 향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방향은. ▲오일환=올해 중기청은 지난해와 비슷한 2조8천억원 정도를 중소기업에 지원하게 된다. 기업의 성장단계에 적합한 정책자금 지원체계를 개편하고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 직접·신용대출에 역점을 둘 계획이다. 특히 41조3천억원에 달하는 신용보증에 대해 고액보증기업이나 장기이용기업은 민간자금을 활용토록 유도하고 일반 중소기업에 대한 가용보증 여력을 확대하는 등 시장친화적인 보증 정책을 펼쳐나갈 방침이다. 이와함께 기술평가에 대한 보증을 확대하고 혁신형 중소기업에 대한 보증 우대 등 혁신활동도 촉진할 계획이다. ▲이병관=경기도의 경우 정책자금을 양보다 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올해 중소기업 육성자금 1조3천200억원을 운영하며, 성장기반 촉진부문인 시설투자와 벤처창업·신기술사업화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국내 최초로 신설해 지원하고 있는 여성창업자금창업은 여성창업자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성장 가능 기업에 대한 신용보증 공급 확대로 연평균 1만3천180개 기업에 6천610억원의 전국 최대 규모의 신용보증 공급을 실시하고 올해 공급확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펀드조성 확대로 성장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직접투자 활성화하고, 성장가능성이 있는 창업 초기단계 중소기업에 대한 직접 투자를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사회자=은행 등 금융권은 외환 위기 이후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도 기업에 대한 지원은 인색하고 이익챙기기에 급급하다며 기업들의 불만이 많은데. ▲최동진=90년대 이후 국내 중소기업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세소규모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국내 중소기업의 영세성은 금융기관의 원활한 자금 지원이 미흡하다는 것도 한 이유라 하겠다. 금융기관에서 중소기업에 추가담보를 요구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신규대출을 기피하면서 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금융권이 담보없이 대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관련서류를 단순화해야 한다. 또 대출금액을 늘리고 직접 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심규섭=국내 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자산규모나 수익성에 있어 미국 등 선진 외국은행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금융권이 대기업에 대한 직접대출을 우선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어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같은 중소기업간에도 이중구조가 빚어지는 등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지나친 수익 추구로 중소기업의 이자부담과 수수료 부담이 과중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면 국내은행은 새로운 상품개발을 통한 수익개선보다는 예대마진에 의한 이자이익과 수수료 수익에 치중하고 있다. 또 120여가지의 각종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수수료를 부담해야 하는 중소기업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금융권은 이자율을 낮추고, 각종 수수료 명목을 개선하거나 폐지해야 한다. ▲박종규=최근 부동산 등 자금 지원이 막히면서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은행 자체적으로 펀드를 조성하고, 혁신형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등 다양한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은행도 재원을 만드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수익을 남겨야 하는 입장이다. 은행이 막대한 수익을 챙기고 있다고 하지만 시스템의 안정화 및 선진 경영시스템 등 금융인프라를 개선하는데 따른 비용이 만만찮다. 특히 외국은행과 비교하면 투입한 자본에 비해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은행권은 판단하고 있다. 이에따라 최근에는 예대마진이 줄어 다각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자=내년부터 신 BIS제도인 바젤Ⅱ가 시행예정인데, 중소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재필=바젤Ⅱ는 기업에 대한 리스크의 측정방법이 보다 투명화되고 정교화된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기업들이 대출을 위해 그동안 재무적요소에 중점뒀지만 앞으로는 비재무적요소에도 더 신경을 써야한다. 은행들이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 차이는 있겠지만 기업의 투명성이나 향후 잠재력, 기술력, 성장잠재력 등 비재무적인 요소가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경영자의 경영능력이나 동종업계의 평판도 포함된다. 그러나 단기간 중소기업의 대출이 위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소기업의 대출부분이 급격히 떨여져 중소기업들이 단기적인 쇼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중기청 등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오일환=정책자금 지원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담보, 재무상태, 경영자의 신용도 등을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부도 비재무적인 요소 평가가 적다고 판단하고 올해 기업의 기술성과 사업성을 평가하는 개발기술화합화자금을 도입했다. 재무평가보다 연구개발, 생산기술, 사업성, 시장성 등 비재무평가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심규섭=바젤Ⅱ가 시행되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이 줄어드는 등 단기적으로는 자금난에 봉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개선이 될 수도 있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기준이 얼마나 객관적이냐가 더 중요하다. -사회자=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해 금융기관의 바람직한 역할은. ▲박재필=지난해 연말 금융권을 통해 중소기업에 304조원이 지원됐다. 기업대출의 90%가 중소기업에 지원되는 등 중소기업의 금융권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중소기업 자금의 가장 큰 루트는 은행이다. 금융기관이 대형화되고 선진화될수록 중소기업 대출을 줄어들수 밖에 없다. 특히 증권업계에도 소액결제 시스템 도입을 추진하는 등 금융고객들의 은행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는 장기 투자자금 확보에는 긍정적이지만 은행권을 통한 중소기업 대출이 감소할 것이 우려된다. 은행에서 줄어든 자금이 자본시장에 유입돼 다시 중소기업에 유입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정책자금, 신용보증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공제기금의 역할도 상대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은 금융의 선진화에 걸림돌이 되는 담보대출을 줄여야 한다. 담보라는 것이 경기 진폭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어 경기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산업분야의 자금공급역량을 강화하고 향후 발전가능성이 떨어지는 기업에 대해서는 사업전환이나 구조조정 등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컨설팅 기능이 필요하다. ▲박종규=금융권의 자금 지원에 앞서 기업에서는 자체적인 영업관리나 신용관리 등이 우선돼야 한다. 경영자 스스로가 본인의 경영의지나 비재무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중소기업도 정책자금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앞으로 어느정도의 요건만 갖춰지면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은 지금보다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기업과의 상생방안도 검토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정리=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김시범기자 sbkim@kgib.co.kr
친환경제품인 법랑보드제조 전문업체인 써지오 O/A의 오정금(50) 대표. 이 회사는 법랑칠판 제조분야에서는 경쟁력을 지닌 탄탄한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법랑은 철판에 도자기 유약을 입혀서 850℃의 온도에서 구워 만들낸 반영구적인 제품이다. 최근 유럽의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선진국 등에서는 이미 일반화됐다. 요즘 그녀는 질좋은 법랑칠판을 생산하기 위해 포천으로 공장 이전을 추진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그녀는 5시간 이상 잠을 잔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다. 손수 원자재 구입과 제품 판매를 위해 전국 각지를 누비는 그녀의 열성과 노력이 지금의 내실있는 써지오 O/A를 일궈냈다. 사실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흔한 승용차 한대 없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일주일에 절반은 매일 아침 7시 서울 집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2시간 걸려 포천공장까지 출근한다. 지하철과 버스안에서 그녀는 사업 구상과 스케줄관리 등 할 일이 많다.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 아직 공장을 완전히 이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았다며 수줍은 미소로 반겼다. 50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성스럽고 앳된 모습이다.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든지 미혼이라는 이러한 조건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사업가 변신 그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그도그럴 것이 2002년 달랑 720만원의 창업자금으로 길바닥에 내몰리다시피 사업에 뛰어들때만해도 무모한 일이라고 수근거렸다. 그 누구도 그녀의 성공을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류수출업체와 건설회사 등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해왔다. 회사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 뭔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느날 큰 결단을 내렸다.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해오던 소설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출판을 통해 못다한 꿈을 조금이나마 이뤄보기 위해서다. 그동안 모았던 돈을 털어 90년 드디어 출판사를 냈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처음하는 사업이었지만 짧은 시간에 회사도 안정됐고 무엇보다 출판업은 그녀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보여지는 것과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에 한참 재미가 붙을때쯤인 97년 IMF가 밀어닥쳤다. 소기업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시련이었다. 잘나가던 회사는 이후 여느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나락의 길로 떨어졌다. 고민도 많았지만 그 길로 공들였던 회사를 접어야만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다음 결론을 내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집에서 편집업무를 대행하는 것으로 다시 일을 손에 잡았다.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성실한 것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던지라 일감은 끊이질 않았다. 삶도 안정되고 40줄이 넘어서자 주변의 유혹이 많아졌다. 2001년 지인들로부터 법랑칠판 제조와 관련된 사업이 괜찮다는 말만 듣고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업체에 선뜻 4억원이라는 돈을 투자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별 의심은 없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뜻밖에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 업체가 6개월만에 사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그때 느낌을 ‘하늘이 무너진다는게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광주 공장으로 달려갔지만 건물은 무허가에, 돈될 것이라고는 이미 은행이며 채권자들이 먼저 차지한터라 아무것도 챙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막막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어찌됐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공장에서 노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가 온 세상이 월드컵 축제로 가득했던 2002년 6월이었다. 이게 법랑칠판과 그녀의 끈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그녀는 한번도 해본적 없는 기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계라도 못가져간다면 기계를 돌려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평소 자신을 잘 따르던 조카 2명이 함께 공장에서 합판에 코일을 본드로 붙여가며 일했다. 압착기가 없어 직접 칠판위에 올라가 발로 밟기도 했다. 그나마 있던 기계가 고장이라도 나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로 물어보기도하고, 직접 고쳐도보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과의 전쟁이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이런 회사에 주문이 들어올리는 만무했다. 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했지만 매출이 없어 개점 휴업상태가 계속됐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직접 영업에 나섰다. 서러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 제대로된 제품이나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그들에게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실함만큼은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여기에다 일을 맡기면 똑소리나게 마무리하는 그녀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일감이 하나둘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어려움끝에 6개월동안 50개의 칠판을 주문받아 3천6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그녀는 당시를 회상한다. 이듬해인 2003년 4월이 되자 경매로 공장을 비워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수소문 끝에 인근에 보증금 760만원을 들여 다시 공장 문을 열었다. 직원과 함께 트럭을 몰고 전라도 광주며, 부산, 춘천 등 칠판 1개라도 주문만 한다면 전국 각지를 마다않고 새벽이라도 달려가 제작했다. 주문량이 늘면서 매출도 1억2천만원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좀더 고급화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벨기에로부터 원료인 세라믹스틸을 들여왔다. 당시만해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직원을 늘리고, 영업에 전력했다. 생산도 중요하지만 영업이야말로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서 이듬해인 2004년에는 4억원, 그리고 지난해에는 1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4월에는 그동안 벨기에로부터 들여왔던 세라믹스틸의 국내 독점 공급하는 계약까지 맺었다. 이는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원료 확보는 물론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대량 생산을 위해 필요한 원료를 6억원(1만6천500m) 정도 비축하고 있다. 부수자재인 알미늄과 합판 등도 풍족하다. 조만간 일본 등 해외 진출도 모색,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5년만에 대량생산 눈앞 ‘꿈은 진행형’ 오 대표는 올해 25억~30억원까지 매출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제품 단가가 높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짧은 기간에 상당한 실적이다. 불과 5년전만해도 직원도 없는 1인 회사에서 지금은 어엿한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인생의 50%정도 성공했다고 말한다. 사실 그녀는 어릴적 두가지를 꿈꿨다. 현모양처로 아이들을 키우며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었다. 또 하나는 여고시절부터 꿈꿔오던 소설가. 지금은 소설가도, 현모양처의 꿈도 못이뤘지만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어 그나마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 그녀는 광주에 있는 공장을 5월까지 포천으로 이전한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된다. 회사 설립 5년만에 제대로된 공장과 창고를 마련하게돼 그녀는 가슴이 벅차다. 이곳에서 안정이 된다면 10년 후쯤 그녀는 대여섯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싶다고 작은 소망을 밝혔다. 그리고 나이 60에 소설가가 돼 못다 이룬 꿈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싶다고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창밖의 아름다운 꽃이며 강이며, 산, 들. 모두 내게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게 합니다.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만해도 주위의 반대도 많았고 제 스스로도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한번 목표로 정하면 꼭 해내고 마는 성격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잔잔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