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향기 박대조 ㈜거림스톤·㈜세종마블 대표이사
남들이 한국에서 일군 사업을 발판으로 중국으로 떠나갈 때, 오히려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사업에 성공한 ‘해외파’(?) CEO가 있다.
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에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박대조 ㈜거림스톤·㈜세종마블 대표이사(37). 석재 수입에서 가공, 판매에 이르기까지 업계에서는 그를 ‘미다스의 손’이라고 부른다.
박 대표는 2000년 4월 중국 합작 공장을 설립해 사업을 시작한지 이제 만 7년째다. 그는 남들이 말하는 일찍 성공한 기업가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억세게 운좋은 촌놈’이라고 소개했다. 하는 사업마다 운좋게 잘됐기 때문이라며 겸양을 보였다. 사업이 커지면서 자신의 평가도 같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어릴적 책값이 없어 책을 못살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2시간이 넘어 버스 한대가 올 정도로 시골동네인지라 학교까지 8㎞나 되는 거리를 매일 혼자 걸어다녔다. 누가 생각하면 낭만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그게 현실이었다.
그때부터 꿈은 남들처럼 ‘대통령’이나 ‘장군’, ‘과학자’가 아닌 ‘돈 잘버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서 'CEO변신' 성공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형편은 별로 나아진게 없었다. 등록금부터 책값, 생활비 걱정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95년 장교(ROTC)로 군에서 제대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업했다. 일본 지사에 파견될 정도로 인정도 받았다.
1년 반쯤 지났을까.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산악회에 가입했다. 여기서부터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소 부지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깍듯한 그를 지켜보던 산악회 회원 중 한 사람이 일을 같이 하자며 제안한 것이다.
박 대표는 대부분 업무가 틀에 잡힌 대기업보다는 자신이 직접 회사를 만들어가며, 커가는 조직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어학도 배우고, 돈도 벌고’라는 단순한 생각에 다니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중국 하문에 있는 한국 석재회사의 현장 관리인으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중국에 도착해보니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 그것도 주변 상황이 열악한 해외 현지공장. 시스템은 미흡했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잔손이 필요했다. 제품의 품질관리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현지 사람들과 생각하는 가치관은 물론이고 일하는 스타일까지 모든게 그에게는 넘어야할 산이었다.
우선 그는 말부터 배웠다. 한중 사전을 들고다니며 직접 현장 인부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과 어울리며 조금씩 그들을 이해해나갔다. 그렇게 그는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는 무슨 일에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는 그의 성격이 십분 발휘됐다.
中→한국 역행… 건설경기 호황 ‘매출 껑충’
그는 중국 현지 공장을 진두 지휘했다. 이런 저런 기획력을 발휘하면서 다소 실험적인 경영도 해봤다. 처음에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하루 이틀 견뎌내다보니 훨씬 안목이 높아진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납품 구조도 개선해 비용을 줄여 나가고,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도 만들며 일에 한참 재미를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회사와의 오해 등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는 억울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박 대표는 2000년 당시 서울 화곡동 3천500만원 전세금을 빼 이 돈을 종자돈 삼아 중국 청도 현지 투자자와 함께 합작 공장을 세웠다. 우선 재단기 2대와 활석기 2대를 들여왔다. 시작은 초라했지만 새로운 거래처를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아갔다.
그런 자신감이 독이 됐을까. 사업을 시작한지 1년도 안돼 그는 2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앞서 석재 사업 이외에 다른 사업에 손댄 것이 화를 불렀다. 불행중 다행인지 합작 공장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재기할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꺼내든 카드가 바로 한국 진출이었다.
당시 많은 업체들은 인건비, 물류비 등의 부담으로 앞다퉈 중국으로 진출했지만 그는 과감히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회사를 설립했다.
성내동 전세집에 팩스기와 전화기를 두는 것이 전부였다. 직원도 부인이 유일했다. 회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거래처 사람이 제품을 보겠다며 직접 회사로 찾아오겠다고 하면 그는 한사코 만류했다. 행여나 초라한 사무실을 보고 거래를 끊자고 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때문에 직접 발품을 팔며 거래처에 샘플을 가져다준 것이 오히려 거래처 사람들에게는 성실함으로 비춰졌다.
우선 석재 사업에만 전념하기로 한 그는 중국 현지 공장에서 원석을 공급받고, 직접 공사 현장을 돌아다녔다.
이런 노력들은 건설경기가 호황을 맞으면서 박 대표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줬다. 대리석 등 석재의 수요가 늘어나고 영업 실적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게다가 고급빌라의 건축이 많아졌고, 마감재가 타일에서 대리석으로 바뀌면서 매출이 고공성장을 계속했다.
한국에 진출한 첫해 25억원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매출을 올린데 이어 2001년 75억원, 2002년 120억원, 현재 300억원 정도로 늘어났다.
품질관리 철저… 유럽 등 수입루트 다양화
그는 종전에 대리석만 수입해와 업체에 납품하던 단순한 수입업체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선 자신의 사업의 모태가 됐던 중국 공장을 독자 법인으로 운영하고 수입검사와 중간검사, 최종검사 등 3단계로 나눠 품질 검사를 했다.
특히 원석 하치장에서 로트 관리를 통해 색상을 동일화하고 중국 뿐 아니라 유럽, 남미 등 수입해오고 있는 루트도 다양화했다.
얼마전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사업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많이 벌긴 벌었나 보다’ ‘돈을 벌더니 자만에 빠졌다’ 등 비아냥 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릇이 있으며 그것을 알때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욕심을 언제 버리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회사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내실화를 다지는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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