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태 ㈜오뗄 대표이사

“우리는 단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담긴 오뗄의 정신과 정성을 고객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문구는 육가공제조 전문업체인 ㈜오뗄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이다. 이 회사가 작지만 내실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중심에는 김연태 대표이사(54)가 있다. 건실한 중견기업의 CEO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낡아보이는듯한 회사 점퍼에 타이를 하지 않은 편안한 옷차림의 김 대표. 그는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실속파’ 경영인이다. 김 대표가 회사를 창업한지도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젊은시절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회사를 다니면서 ‘육가공회사’의 창업을 꿈꿔왔었다고 한다. 78년 서울대 축산과를 졸업하고 종합식품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기획과 마케팅을 10여년동안 맡아 일해왔다. 당시 회사는 세계적 다국적 기업인 하인즈와 제휴한 상태여서 김 대표는 자연스럽게 선진화된 마케팅 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를 가리켜 지금도 마케팅 전문가로 부르는 것도 이러한 경험 때문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가 양질의 육류를 고객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꿈을 위해 91년 고민끝에 포천에 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도 신선하고 정갈하고 깨끗한 음식을 의미하는 ‘오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의지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확실한 틈새시장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성공을 장담했지만 처음 2년간 고전을 면치못했다. 문제는 제품 경쟁력이었다. 기존 업체들에 비해 차별화하지 않는다면 적자생존에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수소문끝에 일본에 있는 육가공 업체의 장인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아 일본 현지로 날아갔다. 그러나 예상대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설득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그는 절실했다.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이후 직원을 교대로 일본에 보내 선진 기술을 배우게 했다. 1년에 서너번은 일본 장인을 한국으로 초청, 기술력을 올리는데 전력했다. 이런 노력 끝에 회사는 당시 패스트푸드 ‘붐’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거래처에서도 서서히 입소문을 타면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5년을 보내고 난 후에야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94년 수입자율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 UR, WTO 등으로 개방의 문이 서서히 넓어졌고, 관광호텔 등에 외국 냉동제품이 들어오면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그는 정면돌파라는 초강수를 택했다. 어차피 경쟁해야 한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외국산 냉동소시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판단은 냉혹했다. 김 대표의 경영 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신뢰’라는 말로 압축된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모든 것을 증명하듯 그의 삶에 신뢰라는 말을 빼고나면 지금의 김 대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앞의 이익만 쫓다보면 고객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지금도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그는 경쟁력있는 브랜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객이나 거래처와의 신뢰가 그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김 대표의 이러한 경영철학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97년 IMF가 밀어닥칠 무렵 수입원료가 폭등하면서 업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김 대표도 당시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베이컨육과 삼겹살, 우육 등을 제외하고는 수입원료만큼은 절대 쓰지 않았던 김 대표에게는 오히려 호재였다. 수입에 의존하던 국내 생산업자들이 앞다퉈 돈육가격을 올렸지만 3개월 정도의 원료를 비축하고 있었던 김 대표는 이전 가격 그대로 납품했다. 거래 업체에 서신으로 ‘납품 가격을 올리지 않겠다’고 연락하고 끝까지 이같은 약속을 지켜나갔다. 유통기한 때문에 많은 원료를 많이 비축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 확실한 동반자라는 ‘눈도장’을 찍었다. 비축원료가 동이나고는 거래업체들과 상의해 최소 금액만 인상하면서 신뢰를 이어나갔다. 이후 IMF의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김 대표는 수년동안 고공성장을 이어가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합리적이고 젠틀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 스스로에게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김 대표는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때문에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1초의 시간도 헛되이 허비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매일 시간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회사를 창업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말이 있다. ‘먹는 제품은 원료가 중요한만큼 최고 품질의 원료만을 쓰겠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그는 원료는 최고품질의 국산만을 고집하고, 철저히 선별해 사용한다. 이는 모든 것을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객과 함께하겠다는 자신만의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 그는 새로운 신규 시장 개척 등 다양한 변화가 필요하다며 고민하고 있다. 결국 전문성이 없는 기업은 고객이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에 김 대표는 ㈜오뗄을 전문기업으로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김 대표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기 보다는 지역 사회의 한 축이 될 수 있는 내실있는 회사를 만들 계획입니다. 회사로 인해 이곳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있는 130여명의 직원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다./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 오뗄은… 91년 제품 개발과 만족을 위해 피자토핑용 육가공품 생산을 시작으로 외식소재사업에 첫발을 내딛었다. 현재 자체적으로 엄선된 원료육을 사용해 국내 유명 호텔과 패밀리레스토랑, 피자전문점, 편의점 등 일반 육가공제품에서 냉동식품 및 유럽명품 등 150여가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25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매년 10~15%의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한 고부가 가치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외식문화 선진국이라 일컫는 독일 및 일본 등의 육가공업체와 기술제휴를 통한 새로운 맛과 상품의 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CEO의 향기/김홍자 ㈜G.M. 테크 대표이사

평범한 직장인에서 주부로, 그리고 사업가로 뒤늦게 인생의 제 2막을 설계하고 있는 김홍자(49) ㈜G.M. 테크 대표이사. ㈜G.M. 테크는 3D 디지털 스캐닝 방식을 통해 국가적인 문화재의 원형복원과 보존을 이뤄내는 대표적인 CT기업이다. 김 대표는 ㈜G.M. 테크에 몸담았던 2년정도를 제외하고는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조금 남다른 경력이라고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간호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것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먼저 ㈜G.M. 테크를 업계에서 주목받는 기업으로 키워낸 일등 공신으로 김 대표를 꼽을 정도다. ㈜G.M. 테크를 단기간에 유망기업 반열에 올려놓고 3년째 고공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일에 또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김대표는 회계, 경영, 인사 등 회사 전반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그녀의 부족한 면은 그녀와 함께 이 회사에서 기술이사로 일하고 있는 남편 이종훈씨(54)가 채워준다. 실제 전문화된 기술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경험많은 남편이 책임을 진다. 창업전만해도 남편은 엔지니어로 3D 레이저를 이용해 발굴유적지의 실측 업무를 책임지는 회사원이었다. 남편과 맞벌이하며 부족하지는 않을만큼 그녀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에 2005년 늦깎이로 3D 디지털 스캐닝 사업에 뛰어들었다. 남편이 뛰어난 기술을 가진만큼 다른 업종에 비해 승산이 있다는 생각에서다. 늦게 창업에 나선만큼 부담도 컸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창업을 하긴 했지만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더이상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스쳐갔다. 역시 사업이라는게 그리 녹록한게 아니었다. 독특한 아이템을 가진 신생 업체이다보니 자금도 자금이지만 일할 인력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일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사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업인만큼 주변의 홀대를 받기도 하고, 현장을 직접 실사해야 하는만큼 작업 자체도 매우 힘들었다. 몇해전만해도 매출은 빈약했고 장래성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회사를 처음 창업하고 고집스러울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의 일처리 방식도 간혹 직원들과의 의견 충돌을 가져왔다. 그녀가 현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직원들과의 대화도 늘어났다. 그녀가 먼저 직원들을 이해하고, 직원들 역시 마음을 하나둘씩 열어나갔다. 직원들의 어깨넘어 귀동냥이나 듣던 것에서 이제는 왠만한 기술자 뺨칠만큼 착실하게 실력도 쌓아나갔다. 일단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빠른 일처리와 확실한 마무리는 항상 그녀의 최고 무기였다. 그녀는 자신만이 가진 저돌적인 스타일로 스스로 사업을 꾸리고 확장해 나갔다. 일한 뒤에는 따로 손댈것 하나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작업을 해내는 것이 그녀만의 작업 스타일이다. 김 대표는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을 줄만큼 거침없는 화술을 구사하고, 단도직입적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의 껍질을 들춰보면 여전히 부족함과 아쉬움투성이 많다고 스스로 말한다. 문화재 복원작업이라는게 유적지의 범위에 따라 작업시간도 천차만별이지만 현장에서 일주일을 꼬박 작업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녀는 한번씩 ‘여름은 여름이라서 힘들고, 겨울은 겨울이라서 힘든게 바로 이 일’이라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유적지 중에서도 성곽지는 워낙 외지다보니까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낑낑대며 산을 올라가는 직원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다고 한다. 지난해 산길이 험난하기로 잘 알려진 경북 청송에 있는 청양산성의 현장 실측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장비를 짊어지고 올랐다. 가파른 산세 때문에 젊은 남자 직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에 와서보니 작업한게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장비를 들춰메고 험난한 산을 넘어 산성을 서너번이나 재실측하는 억척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직원들도 이제는 간단한 옷이나 세면도구 정도는 항상 사무실 한켠의 가방에 넣어두고 언제 떠날지 모를 출장준비를 평상시에 해둔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복원 현장이 도로나 건물공사로 사라진 곳도 있었다고 한다. 보존지역의 경우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보존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곳은 실측을 나갔을때 흔적조차 없어진 곳이 한두곳이 아니다. 수정작업이 많은 업무 특성상 이렇게 작업이 생각보다 어려운만큼 김 대표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대충대충이라게 있을 수 없다. 김 대표는 이같은 이유를 “이 일이 창의적인 작업이면 작업자의 느낌이나 생각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문화재 복원작업이나 조형물 축소작업의 경우 한치의 오차나 실수가 원형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고 몇번씩이나 강조한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노력도 결실로 이어졌다. 지난해 10월 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일거리도 부쩍 늘어난 것을 실감한다. 아직 부족하지만 이제는 회사도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의 반은 야근을 하고 현장에 나가 실측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미 2개월 정도의 일거리를 미리 수주한 상태다. 직원들도 고생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도움이 컸다.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각 지자체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김 대표를 찾는 곳이 늘어났다. 2005년 남한산성 성곽발굴조사에 참여해 정확한 기초 데이터를 제공했고, 지난해 6월에는 해미읍성 복원 발굴작업에 나서 성벽 전체를 스캔 작업을 통해 복원데이터화 시키고 학술자료로 구축했다. 일이 늘어나면서 문화재 발굴, 고증을 주로 하는 대학이나 조사기관과도 공동 연구개발에 나서는 등 기술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데도 노력하고 있다. 김대표는 ㈜G.M. 테크가 IT기업보다는 CT기업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제 문화 관련 기업도 보다 전문화되고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에만 치중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의료, 산업기계 등 산업분야 전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넓혀갈 생각이다. 도면이 없는 제품을 스캔을 해서 원형을 만들고 이를 복원하는 일이 산업분야에도 무궁무진하게 응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김 대표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 “일반 고객보다는 박물관이나 연구기관을 주로 왕래하고 있어 그리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회사를 알리기 보다는 일반인들이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왔던 문화재를 보다 실물에 가깝게 복원하고, 실생활에 접목해 생활화할 수 있도록하는데 이바지하고 싶습니다.”/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 G.M. 테크는… 주요 업무로는 국가문화재의 3차원 디지털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 문화재 원형 보존에서 문화상품 개발까지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문화재 원형 보존을 기본 바탕에 두고 비접촉 3차원 레이저 스캐닝 방식에 의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축적된 3차원 디지털 데이터는 영구적인 자료로 보관, ‘One-source Multi-use’의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CEO의 향기/안승환 ㈜한국해양기술 대표이사

“바다에 미치지 않은 사람은 해양산업 분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해양산업의 강자가 되는 순간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천혜의 보고로 알려진 한국해양 개발의 선두기업 ㈜한국해양기술(KOCECO; Korea Ocean Enginnering & Consultants Co.Ltd.). 세계 선진해양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그 날을 위해 밤낮으로 매진하고 있는 ㈜한국해양기술호의 선장인 안승환 대표이사로부터 최근 인터뷰를 통해 그의 바다사랑과 경영철학, 그리고 비전을 들어봤다./편집자 주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대표적 국제물류기지와 해양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경기도의 수부도시인 수원으로 지난 2006년 11월 본사를 이전한 후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한국해양기술 안승환 대표이사. 그는 “바다에 미쳐 해저케이블사업과 수중공사 등에 종사하던 해양전문가들이 하나 둘씩 외인구단 처럼 모여 창업된 해양전문가 집단이 바로 ㈜한국해양기술입니다”라고 열정을 토했다. 자신의 역할은 이 회사의 주인이 아닌 회사 직원들의 바다 일 동료이자 조언자, 최종적으로 회사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조타수에 불과하다고 겸손해 했다. 하지만 바다 사나이들은 “안 사장이 바로 이 회사의 화합의 구심체이자 촉매제이며, 회사 발전의 원동력이나 다름 없다”고 입을 모은다. ◇ 나의 꿈 나의 길 ‘바다사나이’ ㈜한국해양기술의 CEO 안승환 사장은 바다를 사랑해 수없이 물멱질을 하는 잠수산업기사이자 진정한 바다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바다탐구가를 꿈꾸는 만학도이다. 안 사장은 철이 들기 이전 부터 바다와 동거동락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인생에 막 눈을 뜨기 시작했던 인하대학 시절엔 바다와 전혀 무관한 화학을 전공한 뒤 80년대 소위 잘 나간다던 무역상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그는 일정분야에서 직접 투자할 기회를 잡아 하루에 수백만원씩 수익을 내는 등 수년동안 무섭게 성장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원하던 만큼의 성공이 눈에 보일 때 안 사장은 “소위 너무 잘 나가던 자신과 세상이 무서워져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모든 사람이 대박의 꿈을 쫓는데 여념이 없을 때 인생의 무상함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가족과 직장, 친구 등 자신이 가진 모든 현실을 뒤로한 채 무작정 발길이 인도하는대로 여행을 다녔다. 운명의 신은 안 사장을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로 이끌었다. 해양기술의 척박지였던 한국에서 해저케이블을 건설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그는 순간 벼락처럼 몸에 감도는 전율에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안 사장은 “완도에서 해저케이블 건설 현장을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며 “그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회사가 현재까지 몸 담고 있는 한국해양기술”이라고 말했다. ◇ 모험정신과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바다사랑 안 사장의 큰 장점은 끊임 없는 도전정신과 일에 대한 강한 열정을 손꼽는다. 그는 어릴적 부터 산을 좋아해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서 가입후 암벽등산을 배운 뒤 전국의 산을 찾아 다니며 산악인으로 삶을 마칠 듯 했다. 하지만 안 사장의 산 사랑에 대한 위기는 대학시절인 지난 1985년 여름에 찾아왔다. 평소 산을 같이 타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암벽등반을 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그처럼 좋아하던 산행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됐다. 자신의 혼을 불태웠던 산에 더이상 가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젊음을 고사시키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을 낙으로 삼았던 그는 88올림픽 등을 앞두고 시작된 해외여행에 눈을 돌렸다. 안 대표는 당초 유럽으로 목표를 잡았으나, 여행경비가 턱없이 모자라 결국 일본으로 목표를 선회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배와 비행기 표값을 제외하고 달랑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단돈 1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히치 하이킹 여행은 안 사장에게 ‘고생을 무릅쓰고 새로운 세상과 부딪혀 나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는 “당시 일본의 화장실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깨끗해 여행객들에겐 잠자리로 최고였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음 여행지인 대만을 가로질렀던 여행중에 같은 또래의 친구를 사귀는 등 배낭여행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은 지금의 회사를 일구는 자양분이 됐다고 소회를 드러내기도 했다. ◇ 창조적 자기파괴를 통한 혁신 안 사장이 가장 근본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여초’같은 마음이다. 그는 “나 자신에게 나태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편 직원들에게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 없는 자기파괴를 할 것”을 주문한다. 창조적 자기파괴의 경영혁신이 없이는 회사의 미래가 없다는 것. 회사와 관련된 다이빙과 선박 교육 등에 대한 끊임없이 자기 실력을 배양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안 사장은 전직원이 전공분야의 전문성을 최대한 확보토록 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 직원이 CEO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또한 전직원이 바다에 대한 열정으로 형성된 끈끈한 신뢰를 토대로 한 ‘신뢰 경영’을 추구한다. 이같은 직원에 대한 믿음으로 출·퇴근 시간에 제약을 두지 않고 있고, 직원들에게 법인카드를 다 지급해 출장비 등을 자율적으로 지출토록 하는 등 회사 일에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 사장은 1년에 하나씩 회사를 바꿔나가는 것을 목표로 설정, 직원들과 약속 지키기에 주력하고 있다. 회사내 복지개선을 목표로 선정한 뒤 회사여건상 어렵지만 지난해부터 전직원이 가족들을 다 데리고 태국으로 휴가를 다녀온데 이어 올해는 직원들의 학자금 지원 등을 구상하는 등 직원들 복지향상을 꾀할 방침이다. 안 대표는 최근 태국학생들을 한국에 잇따라 초빙, 석사 2명, 박사 1명을 공부시키는 등 외국에 한국 해양기술 수준을 알리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 세계일류의 해양국가를 꿈꾸며 참여정부 들어 ‘블루오션’인 해양산업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지만 국내 수중업계의 영세성과 취약한 기술력 때문에 해양선진화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한국해양기술은 해양, 수산양식분야에 정부가 오는 2011년까지 어장환경개선에 3천630억원을 투입, 어장환경개선을 통한 지속가능한 어업생산기반 조성에 나섬에 따라 제2의 발전기를 맞고 있다. 또 오는 2007년부터 제2 제주∼육지간 해저케이블 경로설정 사업을 비롯하여 포설사업까지 참여할 예정이어서 향후 해양수중공사분야의 주축기업으로 성장할 예정이다. 이와함께 당사의 부설연구소에서는 최근 해저케이블 보호공법 중 인공어초를 활용한 해저케이블 보호공법에 연구가 한창인 동시에 한국의 아쿠아리움 사업과 밸러스트수 처리설비 개발사업(BWT기술) 등 미래 전략적인 사업에 참가하고 있다. 안 사장은 이같은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해양전문 기업 등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 해난구조 전문회사들과 상호 기술지원 협력관계를 맺고 해양·수중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안 사장은 “해양기술의 세계화를 위해 국제 수준의 해양 전문인력 육성과 해양장비를 확보하는 한편 안전 효율적인 현장운용을 통해 실력을 쌓아 세계적인 해양기술 전문기업으로 키워나갈 것”이라며 “한국인의 기술력과 근면성을 토대로 해양부국의 디딤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전상천·이명관기자 junsch@kgib.co.kr /사진=김시범기자 sbkim@kgib.co.kr ■㈜ 한국해양기술 (www.koceco.co.kr) 지난 1993년 해양유전업계, 항만·연안공사, 해난구조, 해군과 관계기관 등 해양과 수중관련 분야에서 전문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들의 뜻에 의하여 인류의 영원한 보고인 바다로 나가기 위해 설립됐다. 이 회사는 해양 및 수중, 토목과 관련된 분양에 대한 정보제공, 타당성 검토, 설계·시공·유지 및 보수, 공사관리 및 감리 등을 주요 대상업무로 하고 있다. 한국해양기술은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에 의하여 1994년 4월에 해양, 1997년 5월에는 수산양식 전문분야로 신고를 필한 해양수산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 6월 수중공사 전문건설업자로 등록된 회사이다. 또한 2000년 4월에 기업부설연구소인 ‘해양기술 연구소’를 인정받아 해양기초분야 연구, 해양공학 설계, 바다목장화 연구, 해양품셈표준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본사무소를 지난 2006년도 11월 서울시 역삼동에서 수원시 우만동으로 옭겼으며, 해저광케이블 매설 작업 등을 진행하기 위해 완도와 제주도에 분사무소를 두고 있다. 해양, 수산양식 분야에서 그동안 ▲96년 대통령 포장증 ▲2001년 해양수산부장관 표창장(한국해양기술) ▲2004년 전라남도지사 표창장(한국해양기술 안승환) 등 다수의 공공기관 포상실적이 있다.

CEO의 향기/김난실 상방원 대표

전통 액세서리 공예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상방원의 김난실 대표(37). 그녀는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남들보다 뛰어난 색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다양한 색의 조화를 통해 한국의 미를 알리고 싶어 한다. 얼마전 인기리에 종영된 TV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고급스런 천으로 멋드러지게 꾸며낸 것도 바로 그녀다. 앞으로 방영될 ‘태왕사신기’ 등의 인기 드라마의 테이블웨어도 그녀의 손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요즘 그녀는 오랫동안 꿈꿔오던 자신만의 전시장을 내기 위해 얼마전 수원 인계동에 조그마한 공간도 마련했다. 눈코 뜰새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그녀는 요즘 행복하다. 상방원은 전통 문양을 딴 휴대폰 줄이나 안경집, 복주머니, 명함지갑에서부터 테이블웨어 등 패브릭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200여종의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다소 실험적인 제품도 내놓고 있다. 지난해말 시장에 선보인 골프 아이언 커버는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녀는 창업 2년의 신생기업을 전통 액세서리 공예시장에서 2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주목받는 기업으로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작 2억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신생업체가, 그것도 시장 규모가 작고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전통 액세서리 공예시장을 감안하면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휴대폰 액세서리는 본체가 유행을 많이 타는 제품이다보니 액세서리도 입맛 까다로운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여간 쉽지않은 일이다. 김 대표가 전통공예와 인연을 맺은 것은 89년 대학(배화여대)에 입학하면서다. 전통복식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액세서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디자인을 좀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91년 대학 졸업 후 2년 넘게 ‘백수’ 생활을 전전했다. 학원을 다니며 그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애니메이션 디자인도 배웠다. 급기야는 전통공예가 아닌 3D 애니매이션 관련 회사에 취업했다. 4년동안 회사를 다니며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지만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과 천연염색 동아리를 만들 정도로 전통공예에는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결혼과 이어진 출산.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취업을 위해 여러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한 특기적성교육 강사도 해보고, 이런 저런 일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차에 경기도에서 ‘디자인 애니메이션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는 만사를 제쳐두고 수강 신청을 했다. 교육 수료후에는 프리랜서로 학교 강의, 홈페이지 제작에도 손을 대는 등 활동 폭을 넓혀 나갔다. 내친김에 3D 애니메이션 관련 업종의 창업에 도전했다. 큰 자본금이 없던 그녀는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하기 위해 전문가로부터 컨설팅을 받았다. 입주심사에서 컨설턴트는 뜻밖에도 애니메이션 보다는 전통 액세서리 공예 분야의 창업을 권유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었다고 한다. 창업한지 6개월이 지나도록 매출이라고는 8천원짜리 핸드폰 액세서리 1개를 판 것이 고작이었다.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만들어낸 제품이 재고로 쌓여가던 그때를 김 대표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구멍난 재정은 짬짬히 해온 3D애니메이션 아르바이트를 통해 메우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런 어려움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인건비와 시설비를 줄이기 위해 같은해 10월 ‘실버손틀’사업을 기획, 사무실과는 별도로 영통사회복지관에 작업 공간을 마련하고, 인근에 살고 있는 할머니 10여명을 고용했다. 그런데 이게 뜻밖에 대박(?)이었다. 마땅한 기술자를 적은 임금에 고용할 처지가 못됐지만 수십년간 시집살이를 해온 할머니들의 바느질 솜씨는 웬만한 기술자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품질에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2005년 3월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들고 무턱대고 전국 리빙디자인대전에 참여했다. 김 대표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부스를 찾았다. 독특한 아이디어에 관심을 보인 곳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의 대형 의상실과 인테리어업체. 그들은 김 대표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이내 거래를 하자고 나섰다. 시장의 꾸준한 성장세에 보조를 맞춰 신제품 개발과 적극적인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펼쳐온 것이 주효했다. 특히 거래업체에 ‘품질과 기술력 만큼은 최고’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그런 행운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김 대표는 지금도 기술과 아이디어로 시장 수요에 부응하는 제품을 먼저 선보이고 고객과 신뢰를 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홍콩 가정용품 박람회도 찾았다. 이곳에서 한국의 전통공예에 관심이 많았던 두바이 상인이 독특한 자연미에 반해 생각지도 못했던 10만개를 선주문했다. 김 대표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벅차 올랐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한순간에 가시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주문은 받았지만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던 그녀는 납품기일에 맞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길로 그녀는 베트남으로 날아 갔다. 인건비가 싸고, 손재주가 좋아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다는 말만 듣고 주저없이 현지 생산업자를 만나 다행히 납기일에 맞출수가 있었다. 이후 김 대표는 지금처럼 수작업으로 소량 생산만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 제조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력과 영업을 위한 판매 네트워크, 그리고 생산라인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 그녀는 시장 조사를 위해 베트남과 중국 현지를 들렀다. 최종 적격지로 베트남을 선정하고, 당장에 자금을 투자해 시설을 설립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김 대표는 우선 베트남을 통해 주문자생산방식으로 대량 생산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연구개발과 영업, 관리만 전담하게 된다. 대외적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지난해에는 미국과 그리스 등에 액세서리 제품의 수출길을 열었다. 이런 것들이 상방원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돼 줄 것으로 김 대표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요즘 그녀는 전 세계 수공예 액세서리 제품이 경합을 벌인다는 뉴욕이나 라스베가스 시장에 자신의 제품을 선보이는 꿈을 꾸고 있다. 내년에는 이를 발판으로 핸디 크라프트 전시회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처음 시작은 비록 초라했지만 상방원의 지난해 성적표는 한마디로 ‘우등’이다. 지난해 2억원의 매출에서 올해는 3억원 정도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주소비층도 여성과 남성, 주부 등 젊은층까지 확대되는 것도 희망적이다. 최근 들어 매스컴에서도 고구려 등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어 매출액의 고공행진은 무난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김 대표는 “전통 액세서리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다양한 제품을 출시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전통공예를 세계시장의 입맛에 맞게 개발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은 것이 제 작은 소망입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CEO의 향기/김경희 JK아카데미 원장

일반적으로 유학하면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영어권의 선진국가가 떠오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학습의 효율성과 비전, 유학비가 저렴한 중국과 필리핀, 싱가포르 등이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새롭게 주목을 받으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중국은 세계적인 경제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유학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현재 대학생, 유학생, 어학연수생 등을 포함하면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하는 우리나라 학생수는 1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중국 유학은 중국어와 영어 등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조기유학에 대한 효율성과 비전 등을 잘 활용하면 저렴한 유학비로 북경대학교 등 세계적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유학의 길이 확대되면서 중국유학원들은 유학생활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다. 이중 지난 2001년 중국상해에서 창립한 JK 아카데미는 ‘학생관리시스템’ 개발로 선풍을 일으킨 중국 전문유학원으로 유명하다. JK아카데미를 창립, 운영하고 있는 김경희 원장(46)은 중국유학 만큼은 박사급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중국유학의 붐이 불기 시작한 지난 2000년. 중국 상해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녀는 한국 학생들이 중국에 들어와 학교 생활을 적응 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를 하거나 탈선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상해에서 한글학교 교사직을 담당하고 있던 그녀는 ‘유학생들을 모범적으로 운영할 수 없을까’하는 고민을 해 오다가 유학생들의 폐해를 파악하기 위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 유학생을 수용하고 있는 각 학교 현지 실태를 걸쳐 ‘학생관리시스템’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학생관리시스템을 개발한 그녀는 2001년 중국 상해에 JK아카데미 유학원을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유학원 사업을 시작했다. 김원장이 개발한 학생관리시스템이 학부모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면서 JK아카데미는 창립 5년만에 명실공히 중국유학원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유학생의 통합관리시스템은 중국유학에 대한 불신을 크게 해소시켰고, JK아카데미 유학원을 정상궤도에 올려 놓은 것이다. 김 원장이 개발한 학생관리시스템은 학교선택과 현지교사가 직접 학습과 생활을 지도하는 교육방식이다. 그녀는 조기유학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유학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교육의 인프라와 학교의 지명도를 고려, 중국 상해 복단부중상해강교학교와 복단대학부속고등학교, 진원고등학교, 양포고등학교 등 4개 학교와 합작관계를 맺었다. 이 학교들은 학교 역사는 물론 교육환경의 인프라가 구축돼 상해에선 명문학교로 손에 꼽는다. 학부모들이 JK아카데미 유학교육을 신뢰하는 것은 현지학습과 생활지도 시스템 때문이다. 김 원장은 학생들에게 언어장벽과 중국식 학습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상해에 중국어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선 언어연수는 물론 영어, 수학 등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 또 유학생들이 초·중·고교생 등 어린 학생이기 때문에 현지 생활지도가 필수라는 것. 생활지도는 학생들의 의식주 등 기본 생활 점검과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 중국이라는 공간이 주는 문화적 충격과 이질감, 불투명한 미래, 부모들과 떨어져 지내는 심리적 부담을 해소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김 원장은 석사학위를 취득한 4명의 관리주임 교사를 채용해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학교소식, 고민상담, 성적관리 등 학생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 인터넷을 통해 학부모들에게 전달하게 된다. 또 학과시간외에 학부모와 학생들의 쌍방대화가 가능해 항상 자기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같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한 JK아카데미는 창립 5년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린다. 2002년부터 유학생을 받아들인 JK아카데미는 지난 2005년 복단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중 중국의 복단대학과 교통대학, 동제대학, 한국 경희대 등 5명의 학생을 합격시켰다. 특히 지난해에는 중국 명문대학인 북경대를 비롯, 청화대, 복단대, 상해교통대, 상해동제대, 한국 연세대 등 20여명의 학생들을 합격시켜 중국 유학에 대한 성공을 예감하고 있다. 김 원장은 “미주권 나라들의 학교는 외국학생을 위한 ESL 코스가 다양하게 개발돼 있고, 세계 각지에 국제학교가 포진해 있어 외국 학생들에 대한 틀이 어느 정도 마련돼 있으나 중국은 이같은 교육인프라가 체계적으로 구축돼 있지 않아 철저한 사전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어 그녀는 “중국 상해가 세계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상해로 조기유학을 오는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다”며 “유학비가 저렴하니까 중국유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10년후 자녀가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형표기자 hpkim@kgib.co.kr ■김경희 원장 상해, 세계 비즈니스 중심 부각 철저한 사전조사로 적응 도와 -중국 유학시 유의해야 점은. ▲중국의 교육현실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중국은 많은 유학생을 받으면서도 유학생을 위한 커리큘럼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없어 학생들이 수학이나 물리, 과학 등에 대한 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상해를 추천하는 이유는. ▲상해는 아시아 물론 세계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부각하고 있다. 향후 중국 전문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상해라는 지역적 기반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학생들 탈선은 실제로 많이 발생하는가. ▲사실은 중국조기유학이 시작되면서 이같은 문제는 예견됐다. 그러나 현지 학생관리 등 교육인프라가 강화되면서 이같은 문제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학생들 주변의 교육환경을 심도있게 짚어보는 것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책중 하나다. -학생들의 기숙사 생활은 어떠한지. ▲2인1실의 호텔식 기숙사이며 식사는 한식과 중식을 선택해 먹을 수 있다. 또 주말에는 HSK, 중국어, 영어, 수학을 중심으로 보충교육이 이뤄지며 상해체험학습, 서예, 요리, 박물관 견학 등 취미활동과 동아리활동이 이뤄진다./김형표기자 hpkim@kgib.co.kr

CEO의 향기/김종필 경기도 양돈연구회 회장

올해는 600년만에 찾아온 황금 돼지해다. 때문에 돼지 이야기가 새해벽두부터 온통 화두다. 경기도가 배출한 인물로 돼지 하면 김종필씨(49)를 빠뜨릴 수 없다. 성공한 축산인으로 또 경기도양돈연구회 회장으로 경기지역 축산계의 위상을 크게 높인 장본인이다. 모두가 그의 열정과 공적을 높게 평가하는데 인색지 않는다. 경기도농업기술원과 그를 비롯 연구회 회원들이 똘똘 뭉쳐 개발한 아이포크는 현재, 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으로 소비층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의 삶과 열정, 그리고 아이포크가 개발되기까지 연구회가 지내온 생생한 역동의 현장을 더듬어 본다. ◇ 그가 걸어온 길 김종필 회장은 수원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수원과 화성 등에서 보내온 경기인이다. 지동초등학교, 수성중학교,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한뒤 천안 연암대 축산학과를 졸업한 그가 양돈업계의 대부가 되기까지는 곡절도 많다. 그는 젊은 시절, 꿈많은 청년이었다. 역겨운 분 냄새 보다는 저 넓은 도심에서 꿈을 실현해 보려 했던 뚝심과 야망의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 또한 태생을 저 버릴 수 없었던 시골 사람이었다. 군 제대후 이런 저런 생각에 시간을 보내다 결국 농사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대학시절 전공했던 축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터라 초기 자금과 맞물려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82년에 대학 지도 교수와 학장의 추천으로 화성군으로부터 축산분야 농민후계자로 선정돼 600만원의 자금을 지원받게 됐다. 이 때부터 양돈인으로서 그의 역동적 삶이 시작된다. 지원금을 손에 쥔 그는 60여평의 돈사를 임대한뒤 이곳에 새끼돼지 10마리를 구입해 키웠다. 알 수 없는 질병 등으로 생각 만큼 농사가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으나 2년이 지난 84년, 1천여평의 부지에 300마리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뚝심과 땀의 결과였다. 이후 간간이 찾아온 돼지 파동으로 힘도 들었으나 지금은 자산 규모 18억원 연 매출 4억원에 이르는 3천여평의 양돈장을 일구는데 성공한 양돈인이 됐다. ◇ 경기도양돈연구회와 아이포크 탄생 김종필씨가 현재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경기도양돈연구회는 브랜드 아이포크를 개발한 단체다. 경기지역내 뜻있는 최정예 양돈 농가로 구성된 특화된 모임이다. 연구회는 태동은 지난 96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내 양돈농가 250명으로 처음, ‘경기도양돈연구회’가 조직됐다. 초대 회장은 진용복씨로 이 때부터 대일 수출 규격돈 생산은 물론 기술 평준화를 위한 외래강사 초빙 연찬회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며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 갔다. 이런 작업들은 이후 연구회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나가는 근간이 됐다. 2001년 김종필 회원이 제3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과 동시, 회원수를 54농가로 정예화시킨 뒤 브랜드 사업에 본격 뛰어 들었다. 회원들이 살길은 종돈, 사료, 사양관리를 통일하고 규격화된 고품질 돈육을 생산 공급하는 것임을 회원들에게 주지시켜 규격품을 만들어 가는데 힘을 모았다. 신규농가가 가입을 원할 경우,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일정 면적의 사육규모와 시설, 그리고 돈사 등 농장 위생상태는 최상의 양호함을 전제 조건으로 했다. 또 통일화된 사료로 한방사료를 사용토록 했으며 냄새를 제거하는 비법으로 정수기를 이용한 정수된 물만을 사용토록 했다. 드디어 이런 과정속에 2002년 브랜드 아이포크를 시장에 선보였다. 이 브랜드 돈육은 곧바로 소비층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 지금은 경기도청과 수원하나로클럽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대형 매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말 한화그룹 식자재 매장에 납품 계약을 성사시켜 올부터 안양관악정보고 등 50여개 학교 급식용으로 공급하게 됐다. 1호점으로 안양평촌점 등 경기남부권을 중심으로 전문식당만도 60여개가 성업중에 있다. ◇ 이것이 아이포크 경쟁력 김 회장은 “회원들이 생산한 돼지고기의 품질이 좋은지를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 성분 분석한 결과, 기대 이상 좋은 결과치가 나와 소비자의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 성분검사 결과, 어린아이 성장과 머리가 좋아진다는 DHA성분이 일반 돼지 고기의 2.2배 이상 들어 있고 사람의 피를 맑게 해주는 칼륨은 7.6배 이상, 성인병을 유발하는 콜레스테롤 및 지방 또한 적게 들어 있었다고 귀띔했다. 아이포크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냄새가 없을 뿐 아니라 맛이 좋다는 말들을 먼저 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한약사료 급여 체계다. 2001년 화성시 정남면에 60여평 규모로 한방공장을 건립, 월 20t 정도의 사료를 생산하고 있다. 이 사료는 인삼과 당귀, 홍삼, 영지, 감초 등 40여종의 한약재 부산물이다. 또 항생제를 첨가하지 않는 무항생제 사료 4종을 개발, 급여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방법은 경영비 절감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월 1천500t의 사료를 회원 농가에 공급, 사료 구입비 14.9%를 절감했으며 1만5천두를 키우는데 단일 전용사료이용으로 2억4천만원의 사료비 절감 효과를 높였다. 또 돼지고기 품질을 한단계 높이기 위해 아이포크 생산농장마다 수질개선 정수기를 설치토록 했다. 돼지에 정수기 물을 먹인 결과, 깨끗하고 맛있는 돼지고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노력들은 곧바로 브랜드 인기를 얻게 됐고 회원들에게는 높은 농가수취율을 책정, 소득을 보전해 주고 있다. 일반 농가 수취율이 66~68%인데 반해 아이포크 생산농가들에게는 71~73%를 지급하고 있는 것도 이런 노력 때문이다. 김 회장은 “아이포크는 생산자 실명제로 유통돼 고기에 문제 발생시, 리콜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문제의 농가는 곧바로 아이포크 생산농가에서 강제 탈퇴시킨 후 3개월이 지나야만 다시 가입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서 “소비자 중심의 유통체계를 구축해 소비자로부터는 신뢰를, 양돈농가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동수기자 dskim@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CEO의 향기/김영복 삼겹살 전문점 ‘올 돈’ 대표

외식업 프렌차이즈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잘 알려진 김영복 대표(46). 그는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힘든 역경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CEO이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해 한때 잘 나가는 농산물 직배사업과 직판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런 그가 부도를 맞은 후 공사판을 전전하다 다시 재기,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충남 청양이 고향인 그는 경력부터가 남다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고향에서 10년동안이나 지게를 지며 농사만 지었다. 1983년 24살에서야 겨우 중학교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수원에 올라왔지만, 그는 평범한 만학도에 불과했다. 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어 광부며 우체부, 연탄배달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대로 일했고, 저녁에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고생끝에 2년만에 고교 과정까지 검정고시로 합격했고, 26살 되던해에는 그토록 바라던 대학(충북대 농업경제학과)까지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했다고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학 이후 4년간 우유배달이며 막노동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학비를 벌어야 했고, 그렇다고 취업도 생각처럼 쉽지만 않았다. 그는 취업을 앞둔 4학년이 돼서야 서른을 앞둔 나이가 취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일찌감치 창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유배달을 하며 모은 100만원을 가지고 수원으로 다시 올라와 지대미사업에 손을 댔다. 그야말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동서의 도움을 받은 4평 남짓한 점포에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중고 오토바이, 저울, 석발기, 비닐 접착기, 그리고 외상으로 들여온 쌀 10가마가 전부였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을 삼아 그 당시 생소했던 포장쌀을 선보이고, 농민들과 직거래를 통해 수익률도 높였다. 뜻밖에 대박이었다. 장사에 소질이 있었던지 하루에 20㎏ 200포대를 팔아치우는 등 물건은 갖다 놓기가 무섭게 팔렸다. 88년 사업 시작 3년만에 무려 2억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거머쥐었다. 내친 김에 92년 1억5천만원으로 농민들과 함께 ㈜농민회 농축산유통사업단을 설립하고 농축산물 집배사업과 직판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수원에만 5개의 직영점과 10개의 대리점, 40여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사업체는 성장했다. 시쳇말로 잘나가는 사업가로 성공한 것이다. 당시에는 돈을 긁어 모은다고 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화려한 시절도 잠시, 당시 직판이라는 개념도 생소했을뿐더러 작업이 표준화되지 않았고 농산물 유통과 관련된 전문성도 없이 혈기 하나만 믿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 그동안 벌어놨던 돈은 사업확장에 모두 쏟아부어 가진돈은 바닥났고, 그나마 조금 남은 돈은 기일에 맞춰 빌린돈을 상환했다. 사업은 망해도 신의를 잃지 않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낭떠러지 몰락의 길로 떨어졌다. 자금 부족의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정육매장을 농민들이 직접 관리하도록 양도했지만, 집배사업은 94년 7억원이라는 결손액을 내고 문을 닫았다. 그 여파로 장사가 잘 되던 직영점 전부와 곡물 백화점도 정리해야 했다. 결국 96년 10억원의 부도를 맞아 회사를 정리하고 빚더미에 앉아야 했다. 애들은 할머니한테 보내고 부인과 함께 후배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다시 무일푼이 된 그는 마땅한 직업을 갖지못해 아파트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면서 재기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렇게 1년을 보냈을까. 자신이 부도를 낸 농산물센터를 인수한 후배가 그의 형편을 딱하게 여겨 센터 앞에서 장사를 해보라고 건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 날의 부와 명예도, 그리고 체면도 다 버렸다. 그러나 재기의 꿈만은 놓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도전했다. 재기를 위해 열심히 과일을 팔았다. 다른 사람들의 비아냥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런 노력을 하늘도 알았을까. 장사를 시작한지 5개월이 되기도 전에 채권자 중 한명이 그에게 수원 영통에 분양받은 점포를 맡겼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외식업에 눈을 돌렸다. 변화무쌍한 외식업 시장에서 ‘계속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는 골몰했다. 치킨 바비큐 전문점으로 업종을 정하고, 몇개월간 준비를 통해 가게를 열었다. 가게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반응이 금세 나타났다. 자신감을 얻자 내친김에 화성 봉담에 족발 공장을 설립하고 족발에까지 사업을 넓혔다. 2000년에는 동생과 함께 ‘두리아 체인사업본부’를 냈다. 자체 개발한 소스와 독특한 바비큐 조리법 등으로 사업은 성공을 거듭했다. 2002년 120개 점포에서 현재 전국적으로 260개 체인점으로 확대됐다. 큰 시련을 딛고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한 그는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리는 듯했다. 그런 그가 또 일을 냈다. 2년전 잘 나가던 두리아 체인사업을 돌연 동생에게 물려주고는 제대로 된 외식업을 하겠다며 6개월전에 인계동에 ‘올 돈’이라는 삼겹살 전문점을 냈다. 지금은 한달에 1억2천만~1억3천만원의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그새 수원 본점을 제외하고 부산과 오산까지 체인점을 확대했다. 지금 그는 ‘올 돈’이 든든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올 돈’을 단순히 먹기 좋고, 분위기 괜찮은 곳으로만 만들고 싶어하진 않는다. 누구나 좋아하는 외식 메뉴인 삼겹살을 보다 손쉽고, 맛있게 굽는 방법도 연구하면서 맛과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전에는 삼겹살 조리기도 직접 만들고, 매장에 나와 직접 앞치마도 두르며 손님을 반갑게 맞는다. 이제 김 대표는 새로운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한번에 두가지 일을 하는 성격이 못된다는 그는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자기만의 길을 천천히 걸어갈 것이라며 “지켜봐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세계로뛰는기업/㈜이레산업

원-달러 환율 인하, 고유가 지속 등에다 저가위주 중국업체 시장잠식 등으로 상당수의 중소 수출업체들이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아이디어’ 하나 만으로 국내·외 틈새시장만을 노려 수익성을 높여가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친환경 롤크리너 점착 테이프 브랜드인 탑세기(Tap Segi)를 생산, 해외에 수출하는 ㈜이레산업(대표이사 이은용,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귀전리 25, www.tapsegi.com)이 바로 그곳이다. ◇㈜이레산업의 발자취 ▲1998. 03 이레산업 설립(생활용품 일본수출 시작) ▲1999. 02 테이프 제조 공장설립 ▲1999. 06 접착 크리닝 테이프의 자동생산 설비 도입 ▲2000. 09 PVC 사출기 도입 ▲2001. 02 국제 선물용품전 참가(일본) ▲2002. 01 공장 확장이전 및 설비 확장 ▲2002. 02 벤처기업 등록 ▲2002. 05 ㈜이레산업으로 법인 전환 ▲2002. 07 수출 유망중소기업 지정 및 경기도 프론티어 기업 선정 ▲2002. 12 ISO 14001 인증 획득 ▲2003. 02 남유럽 시장개척단 참여 ▲2003. 04 상표등록출원(탑세기 롤 크리너 테이프) ▲2005. 06 중기청 우수기업인상 수상 생활잡화 유통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장이 지난 1998년 창업한 이 회사는 세계적으로 드문 ‘친환경 롤크리너 테이프 생산’이라는 신화를 창조하며 매년 수출액을 늘려나가고 있다. 회사 창업초기, 생산제품의 60% 이상을 일본에 수출한데 이어 지난해 7월 미국, 유렵 등 4개회사와 탑세기 브랜드로 100만달러 수출계약을 체결, 현재 생산량(일일 80만개 생산)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 특히 청정지역이라는 남아프리카 지역에까지 탑세기 판로를 개척, 현재 수출량이 매년 늘고 있으며 지난 2002년 대형 판매사인 미국계 A회사와 OEM으로 제품을 납품하고 있는 등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시장 에 있어 단 한건의 지적이 없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이 회사는 끊임없는 아이디어 개발을 통해 지난 2004년 하반기 공동입찰에서 경쟁업체인 미국의 3M, 일본의 닛토무스 등을 당당히 물리치고 또다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이 회사의 가장 큰 장점은 정직한 기업운영 아래 거품 없는 가격에 최고의 품질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은 수량에도 개의치 않고 소비자의 욕구을 충족하는 인쇄나 스티커 부착 등 기업홍보 서비스까지 제공,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더욱이 지난 2003년 자체 개발한 자동기계설비는 하루에 소형 50만개를 비롯해 중형 20만개, 대형 10만개 등 80만개의 방대한 분량의 롤크리너 접착 테이프를 생산하고 있다. 산업용으로는 중국 남부 지역에 제조라인을 설비해 환경오염 방지의 크라프트 테이프와 싱크대에 사용하는 알루미늄 테이프, 일명 청테이프라고 하는 브라운색의 면 테이프, 문구용이나 산업용으로 사용되는 양면 테이프, opp 테이프 등을 생산, 유럽 및 일본 등에 직접 수출하고 있다. 회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올해 미국시장 개척을 위해 시카고 생활용품 전시회에 참석, 미국에서 제일 큰 에바케어 회사와 전속계약을 협상 중에 있으며 새로운 이형 코팅기술 및 접착제 개발을 위해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여기에 회사는 생산노하우 축적만이 살길이라는 판단아래 끊임 없는 아이디어 창출로 중국 등 동남아 국가의 저가품 공세에도 불구, 경쟁력 높은 고가품의 제품 개발로 일본시장에서 신규로 15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일회용 소모성 신제품을 개발해 지난해 초 특허를 출원했으며 올해부터 제품개발을 추진, 내년 2월∼3께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시장조사결과, 신세대에 적합한 제품으로 호응이 아주 좋아 양산이 본격화 될 경우 큰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회사는 현재 형점착 테이프의 의장등록출원, ‘탑세기 롤 크리너 테이프’ 상표등록, ‘테이프 절단기를 갖는 테이프 청소기’와 ‘테이프 청소기용 프레임과 손잡이의 결합장치’ 실용신안 출원, 일회용 위생 용품 특허 출원 등 10여개가 넘는 실용신안과 특허권을 갖고 있다. 창업초기 1억원에 불과하던 자본금이 현재 13억3천600만원까지 늘어났으며 지난해 수출액만 150만달러에 달하는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주)이레산업 이경규 차장은 “30여명에 달하는 임직원들이 똘똘 뭉쳐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에 밤낮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는 실 생활에 필요한 클리너 쪽으로 아이디어 상품을 꾸준히 연구·개발해 국제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회사로 발돋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저돌적인 실험과 모험정신을 바탕으로 아이디어 개발 및 해외 마케팅 활동을 통해 국내 테이프 업계의 새 장을 열고 있는 회사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데 선두주자로 손색없어 보인다./박수철기자 scp@kgib.co.kr 이은용 ㈜이레산업 대표이사 “회사는 작은일도 소중히 생각해 생활속에서 아이디어를 창출, 웰빙시대에 발맞춰 친환경 신기술, 신제품 개발에 매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40여명에 달하는 임직원이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가장 큰 자랑입니다.” 단지 아이디어 하나 만으로 창사 7년여만에 150만달러 수출 실적을 이룩한 ㈜이레산업 이은용 대표이사는 틈새시장 공략만이 국내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길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 일답. -탑세기 제품이 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데. ▲기존 청소기의 경우 충전이나 전기선연결과 소음, 가격 등에 의해 쉽게 사용하기 불편하지만 탑세기 제품은 작고 가벼운데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소비자가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특히 청소면에 손상이 안가는 우수한 점착력을 지니고 있어 가정의 먼지, 부푸러기, 유리파편 등을 손쉽고 편하게 손잡이만 밀면 롤러가 회전하며 청소가 가능한 제품으로 침대, 카펫, 소파, 옷 등의 먼지와 진드기 등의 청소에 탁월하다. -탑세기 제품이 기존 클리닝 테이프와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기후변화에 따라 제품의 특성이 심하게 변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타 회사의 제품과는 달리 본사 제품은 이형처리 및 본드를 수성성분을 사용하고 있어 기후변화에 따른 제품의 특성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수성성분이 자연분해가 돼 환경오염 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제품으로 최근 거세게 불고 있는 웰빙라이프에 적절한 상품이라 할 수 있다. -탑세기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데. ▲탑세기는 고유의 지방사투리로 먼지, 검불 등을 칭하는 단어이다. 옛날 어린 시절 가을 벼 수확을 할 때 마당 가운데 절구통을 눕혀놓고 동네 장정들이 모여 볏단을 새끼로 옭아 맨 뒤 어깨 넘어로 메치면 벼알이 떨어질 때 자연바람으로 탑세기는 멀리 날아가고 벼알만 모아져 가마니에 담아 곳간으로 이동하곤 했다. 지금은 자연 탑세기가 아니고 산업먼지, 화학먼지가 집안까지 들어오고 머리카락이 방안 구석구석 날아다니는데 이러한 청소를 위해 탑세기 롤크리너 테이프를 만들게 됐다. -앞으로 개척하고 싶은 분야는. ▲환경오염을 대비해 자연분해가 쉬운 원지를 개발해 제품을 만들며 점착 롤 크리너 테이프가 세계제일의 제품이 되도록 본 회사 전 임직원이 힘을 합해 노력할 것이다. 회사 제품을 사용하는 모든 소비자들이 100% 만족할 수 있도록 제품성능에 완벽을 기하겠다. /박수철기자 scp@kgib.co.kr

애견인공수정기업 (주)캐나인

2006년은 犬의 해이다. 사람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인류와 오랜 역사를 지녀온 견공, 때론 식용견 문제로 문화적 도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지만 분명, 삶의 질이 윤택해 질수록 관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병술년 犬의 해를 맞아 작아 보이지만 실상, 국내 애견 인공수정사업을 선도하고 있는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 소재 벤처기업 (주)캐나인(대표 정준환 www.canineland.com)을 찾았다. 인공수정·정자은행등 기술 독보적 캐나인 정준환 대표는 “회사는 애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견인공수정, 정자은행 및 유전자 분석을 주사업으로 애견인 모두에게 최상의 인공수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회사의 브레인은 축산학도 출신의 수정사 정준환 대표(41)를 비롯, 수의사 김병무씨(38), 그리고 회사 운영에 대한 전반적 자문과 대외적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진용복 이사(55) 등이다. 정 대표와 김 수의사는 용인 AI센터(돼지인공수정센터)소속 연구원들로 10여년의 임상경험을 지닌 이 분야 베테랑으로 기술력 만큼은 최고를 자처한다. 또 진 이사는 초대 경기도양돈연구회장 출신으로 용인 축산업의 대부다. 때문에 개개인이 지닌 축적된 노하우와 이론 및 실무 경험은 현장에 그대로 접목돼 탄탄한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고 있다. 게다가 용인시농업기술센터 또한 자문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이 의기투합해 양돈에서 애견으로 사업 방향을 정하고 용인 원삼면에 둥지를 튼 것은 지난 3년전의 일이다. 이 분야에 대한 도전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다분히 무모했다. 애견산업에 대한 기술정립은 물론 국내 시장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종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모래위 집’격의 혼란스런 시장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지극히 모험적이었다. 벤치마킹을 위해 미국도 찾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만 않았다. 우선 장비 문제에 봉착했다. 값이 비싸 구입하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령 구입할지라도 따져본 결과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정밀을 요구하는 일부 완제품을 제외하고 부품을 하나 둘 구입해 조립해가면서 기기를 손수 제작했다. 그리고 캐나인만의 자체 기술도 개발해 갔다. 지난 2003년 이후 애완견 미국수출길도 개척, 지금까지 총 20만불을 벌어 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애완견 값이 헐값으로 전락돼 중단하고 국내 시장에 주력하고 있지만 시장이 호전될 경우 수출로 승부한다는 당찬 포부다. 자체기술로 80% 수정성공률 자랑 캐나인이 자랑하는 기술은 우선 ‘냉동정자’ 확보다. 현재 회사는 2천여마리를 수정할 수 있는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196 상태에서 급랭 보관돼 있는 이 정자들은 3년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내 최고의 애완견 정자만을 수집한 분량으로 60여 품종에 이른다. 국내 최대 규모의 애완견 정자은행으로 손색없다. 또 ‘희석제(보존액)’ 독자개발이다. 희석제를 사용할 경우, 수정 가능한 정자를 길게는 7일 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확보후 채 몇분 지나지 않아 사장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시경 이용 인공수정법’ 개발도 회사가 자랑하는 기술이다. 배란되는 장소(난소) 앞까지 깊숙이 넣어 완벽한 수정이 되도록 한다. 이 과정들은 모니터를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첨단 기술탓에 회사는 80%대의 수정 성공률을 자랑하고 있다. 경기침체 어려움 속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같은 기술력에도 불구,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 현재, 국내 애견 시장은 20만 마리 기준(마리당 1만원), 20억 규모로 추정되고 있지만 시장이 좋을 때는 40만~50만 마리까지 육박, 50억 시장까지 가능하다는게 이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지난해부터 국내 시장은 최악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코카스 파니엘의 경우, 1마리당 600만원까지 호가했으나 지금은 3만원 정도로 아예 가격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정 대표는 말한다. 애견시장의 현주소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회사는 지난해부터 투자비를 건질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犬의 해를 맞아 희망과 열정이 세차게 오르는 새해처럼, 한번 힘차게 용틀임 할 수 있는 금년을 기대해 본다. ■㈜캐나인 진용복 이사 농가소득 올릴 산업…이제부터라도 지원을 -캐나인 인공수정의 기술력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선 위생적이다. 자연교배시 발생하기 쉬운 암·수간 질병의 전파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리 수컷의 정액으로 인공수정을 통해 여러 마리의 교배를 동시에 할 수 있고 우수한 혈통의 애완견 정자를 동결정액으로 제조, 보관해 몇 대 이후의 번식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사를 운영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애견산업이 아직까지 축산업의 범주 밖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농업기술센터 등 관계당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 해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애견산업도 벤처다. 그리고 농가 소득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 승산이 있는 산업이란 점이다. 실제, 운영비는 차치하고 장비 구입비가 만만치 않다. 때문에 장비 마련비 만이라도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사업 방향은. ▲애견 정자은행으로 또 애견인공수정센터로 회사를 가꿔 볼 생각이다. 이같은 사업이 용이 할 수 있도록 도심 동물병원등과 연계,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인공수정 사업을 시도해 볼 생각이다. 비용이 비교적 저렴해 경쟁력이 충분하다. -사업 성공을 자신하는가. ▲자기가 시작한 사업을 놓고 실패를 생각한 사업가들은 없을 것이다. 양돈을 시작하기전 양돈을 자신했다. 지금이 호황이 아닌가. 그리고 애견산업도 지금은 바닥을 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외국 선진국이나 비근한 예로 일본처럼 괜찮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그 산업을 처음, 일구었다는 점에서 성취감과 살아가는데 있어 보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김동수기자 dskim@kgib.co.k

2만불 시대로/결 산

그래도...믿을 건 수출뿐 연간 수출액 2천억달러 시대가 열렸다. 수출은 이제 우리 경제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하며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 도래의 유일한 희망으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 기업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세계시장의 글로벌화로 인해 상품에 대한 경쟁력은 더이상 기술과 품질만으로 불충분하게 됐다. 기업들은 불필요한 가격경쟁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전략으로 무장하고 가격보다는 브랜드와 같은 비가격 경쟁을 통해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등 갈수록 치열한 수출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숨막히고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도 우리 중소기업들은 올 한해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무장하고 세계 곳곳에 ‘메이드인 코리아’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지난 64년 1억달러대의 수출국 중 절대 빈곤에서 탈출한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는 우리 중소기업들이 각자의 주어진 여건에서 수출 첨병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본보는 올 1월부터 ‘가자 2만불 시대로!’라는 주제로 수출중소기업들의 기술개발 의지, 성공 스토리 등을 연중 기획시리즈로 보도했다. 이에 기획시리즈를 마감하며 올해 수출 2천억달러 달성 과정과 의미, 수출현황을 짚어보고 수출확대 지속을 위한 우리의 과제를 알아본다.<편집자주> 1. 올해 수출의 주요 특징 첫째, 80년대 이후 유례 없는 호조세를 보였다. 80년대 후반의 저유가, 저금리, 달러 약세 등에 힘입은 3저 호황기에 버금가는 수출증가율을 기록했다. 특히 지난 8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수출규모가 5~600억달러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놀랄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둘째,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했다.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등 3대 수출품목이 45% 내외의 높은 수출증가율로 수출을 주도한 것이다. 이밖에 컴퓨터, 선박은 물론 석유제품, 철강판, 합성수지, 영상기기, 자동차 부품 등 우리나라의 10대 수출상품 모두 급증세를 보였다. 셋째, 대중국 수출의 호조세 지속했으며 부진했던 대미 수출이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수출증가율은 미국, 일본에 대한 증가율보다 여전히 높다. 2003년부터는 우리나라 수출 1위 시장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넷째, 우리나라는 중국을 제외하고 경쟁국중 가장 높은 수출증가율을 기록했다. 올해 1~9월중 우리나라의 수출증가율은 35.0%이다. 중국이 1~7월중 35.4%로 우리보다 조금 높았지만 대만, 싱가포르, 일본, 태국은 20%대에 머물렀다. 이는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등 경쟁국에 비해 우위에 있는 수출상품의 수출호조가 그 원인이다. 다섯째, 올해들어 수출채산성이 완만한 회복세를 보였다. 2002~2003년 동안 악화됐던 수출채산성이 올해 수출단가 상승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수출단가 상승은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가격의 상승에 기인한 바가 큰데다 원화가치 절상, 임금상승이 계속되고 있어 이러한 수출채산성 개선추이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섯째, 이달말에는 수출이 2천억달러를 훌쩍 넘어 2천52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수출은 2천520억달러로 전년보다 30.0% 증가하고 수입은 2천220억달러로 작년보다 24.1% 늘어나 300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고유가로 인한 세계경제 둔화조짐, 컴퓨터 등의 수출둔화 등이 내년 수출증가에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2. 수출 2천억달러의 의미 수출 2천억달러를 100달러 지폐로 쌓으면 그 높이는 무려 240km에 달한다. 이 높이는 무역센터 트레이드 228m의 약 833배, 에베레스트산 8천848m의 약 27배, 성층권 최고고도 약 50km의 5배 정도에 해당한다. 또 1달러 지폐로 늘어 놓으면 지구 780바퀴를 돌수 있다. 일평균 수출 규모인 1조원(8.9억달러)을 주요 품목의 수출량으로 환산하면 중형차는 5만대, 쌀은 625만가마, 자장면은 3억그릇에 상당한다. 남미 38개국 전체 수출규모인 2천119억달러(2003년 기준)에 육박하는 수준이며 아프리카 전체 53개국 수출규모인 1천725억달러를 초과한다. 수출 2천억달러 달성은 우선 수출이 우리경제의 견인차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올해 수출은 지난해에 이어 내수침체 속에서도 우리경제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으며 수출이 우리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올 상반기 민간소비는 1.0% 감소, 설비투자는 3.0% 증가에 그친 반면 수출은 38.0% 증가해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은 100% 내외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홍콩을 추월하고 처음으로 세계 11위 수출국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돼 우리가 목표로 하는 2008년 세계 무역 8강의 초석 마련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수출순위는 90년대 초반부터 세계 12~13위를 오르내렸지만 세계 수출 빅5(독일,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와 상위권 수출대국(영국, 네덜란드, 이태리, 캐나다, 벨기에, 홍콩) 등과의 차이를 좁혀왔다. 우리나라의 수출 2천억달러 달성시점은 빅5와는 18~24년, 상위권 수출대국과는 2~10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한국경제의 자신감 회복과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조기 실현 가능성을 열었다. 수출 2천억달러 달성은 우리경제에 확산돼 있는 심리적 불안을 완화시켜 실종된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던 국민소득 2만불 달성 시기를 2~3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국민소득 2만불 달성의 주요 전제 조건중 하나인 수출 3천800억달러 내외 달성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3. 수출 2천억달러는 또 다른 시작 수출 2천억달러를 넘어 향후 3천억달러, 4천억달러 나아가 5천억달러로의 수출확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수출 3천억달러 이상을 기록한 미국, 중국, 캐나다 등의 나라를 보면 국토, 인구, 부존자원, 기술 등 다방면의 초강대국들이다. 또한 이같은 수출대국들도 2천억달러를 넘어 3천억달러 달성에 소요된 기간이 독일, 일본, 프랑스, 미국과 같은 초일류 경제대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대체로 9년 내외가 소요됐다. 특히 앞으로 무역환경은 우리 수출에 기회와 위협요인을 동시에 충족하고 있어 이의 효과적인 대응여부에 따라 우리 수출의 앞날이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경기지방중소기업청 수출지원센터 한기원씨는 “우리나라의 수출순위는 지난 8년간 현격한 격차를 보였던 홍콩을 추월해 올해 11위에 올라설 것”이라며 “수출목표를 달성해 나가면 10년내 6~7위를 넘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의 수출확대 지속을 위해서는 수출의 수익성 제고와 수출·내수간 선순환 구조 정착을 위해 부품·소재 산업의 육성이 시급하다”며 “시장 선점효과가 큰 품목, 선진국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된 품목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KOTRA·무협 2005년 수출 전망 내년에도 우리나라의 수출 신장세가 지속돼 올해보다 약 10~15% 증가한 2천810~2천88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긍정적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는 최근 ‘2005년 무역환경 및 수출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내년 수출은 올해(2천530억달러)보다 10.2% 늘어난 2천810억달러, 수입은 12.9% 증가한 2천530억달러로 무역수지 흑자규모는 28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KOTRA도 북미·중국·유럽 등 8개 해외지역본부 산하 103개 무역관의 현지 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해외무역관이 바라본 2005년도 수출 전망’ 보고서를 통해 내년에는 2천880억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무협은 원화환율 불안, 국제유가 상승, 세계경기 둔화 가능성 등의 위협요인을 들어 10.2%의 수출증가율을 전망했다. 반면 KOTRA는 자동차와 부품, 휴대폰 등 첨단 IT제품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고 있으며 고성장을 구가하는 중국과 막대한 오일달러의 소비처를 찾고 있는 대중동지역 수출호조로 15.2%의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KOTRA는 또 휴대폰과 컴퓨터 등 IT제품은 선진국 소비자층에도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식돼 앞으로 우리 수출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우리나라의 수출주력 품목인 반도체 부문에서는 D램과 플래시메모리 가격의 하락으로 올해보다 다소 부진할 것으로 분석했다. 무역협회도 휴대폰(19.6%)과 가정용 전자제품(14.2%) 등은 두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는 반면 반도체(5.8%), 자동차 부품(4.0%), 컴퓨터(4.7%) 등은 증가세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지역별로는 두 기관 모두 중국과 유럽연합(EU) 지역의 수출증가세가 10.5%∼22.9%로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미국·일본·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지역은 수출증가율이 한자리 또는 10%대에 그칠 것으로 분석했다. 여성철 무협 경기지부장은 “내년 수출은 상반기중 두자리대의 증가세가 예상되지만 원화환율 불안, 국제유가 불안, 세계경기 둔화 가능성 등의 위협요인도 만만치 않다”면서 “내년도 경제운용은 수출 둔화세 축소 및 내수경기 회복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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