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질 칠판 제작…하루하루가 새로운 전쟁 꿈 있기에 행복해”
친환경제품인 법랑보드제조 전문업체인 써지오 O/A의 오정금(50) 대표. 이 회사는 법랑칠판 제조분야에서는 경쟁력을 지닌 탄탄한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법랑은 철판에 도자기 유약을 입혀서 850℃의 온도에서 구워 만들낸 반영구적인 제품이다. 최근 유럽의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선진국 등에서는 이미 일반화됐다.
요즘 그녀는 질좋은 법랑칠판을 생산하기 위해 포천으로 공장 이전을 추진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그녀는 5시간 이상 잠을 잔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다. 손수 원자재 구입과 제품 판매를 위해 전국 각지를 누비는 그녀의 열성과 노력이 지금의 내실있는 써지오 O/A를 일궈냈다.
사실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흔한 승용차 한대 없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일주일에 절반은 매일 아침 7시 서울 집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2시간 걸려 포천공장까지 출근한다. 지하철과 버스안에서 그녀는 사업 구상과 스케줄관리 등 할 일이 많다.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 아직 공장을 완전히 이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았다며 수줍은 미소로 반겼다. 50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성스럽고 앳된 모습이다.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든지 미혼이라는 이러한 조건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사업가 변신
그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그도그럴 것이 2002년 달랑 720만원의 창업자금으로 길바닥에 내몰리다시피 사업에 뛰어들때만해도 무모한 일이라고 수근거렸다. 그 누구도 그녀의 성공을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류수출업체와 건설회사 등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해왔다. 회사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 뭔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느날 큰 결단을 내렸다.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해오던 소설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출판을 통해 못다한 꿈을 조금이나마 이뤄보기 위해서다. 그동안 모았던 돈을 털어 90년 드디어 출판사를 냈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처음하는 사업이었지만 짧은 시간에 회사도 안정됐고 무엇보다 출판업은 그녀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보여지는 것과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에 한참 재미가 붙을때쯤인 97년 IMF가 밀어닥쳤다. 소기업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시련이었다. 잘나가던 회사는 이후 여느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나락의 길로 떨어졌다.
고민도 많았지만 그 길로 공들였던 회사를 접어야만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다음 결론을 내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집에서 편집업무를 대행하는 것으로 다시 일을 손에 잡았다.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성실한 것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던지라 일감은 끊이질 않았다.
삶도 안정되고 40줄이 넘어서자 주변의 유혹이 많아졌다. 2001년 지인들로부터 법랑칠판 제조와 관련된 사업이 괜찮다는 말만 듣고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업체에 선뜻 4억원이라는 돈을 투자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별 의심은 없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뜻밖에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 업체가 6개월만에 사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그때 느낌을 ‘하늘이 무너진다는게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광주 공장으로 달려갔지만 건물은 무허가에, 돈될 것이라고는 이미 은행이며 채권자들이 먼저 차지한터라 아무것도 챙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막막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어찌됐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공장에서 노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가 온 세상이 월드컵 축제로 가득했던 2002년 6월이었다. 이게 법랑칠판과 그녀의 끈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그녀는 한번도 해본적 없는 기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계라도 못가져간다면 기계를 돌려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평소 자신을 잘 따르던 조카 2명이 함께 공장에서 합판에 코일을 본드로 붙여가며 일했다. 압착기가 없어 직접 칠판위에 올라가 발로 밟기도 했다. 그나마 있던 기계가 고장이라도 나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로 물어보기도하고, 직접 고쳐도보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과의 전쟁이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이런 회사에 주문이 들어올리는 만무했다. 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했지만 매출이 없어 개점 휴업상태가 계속됐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직접 영업에 나섰다. 서러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 제대로된 제품이나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그들에게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실함만큼은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여기에다 일을 맡기면 똑소리나게 마무리하는 그녀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일감이 하나둘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어려움끝에 6개월동안 50개의 칠판을 주문받아 3천6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그녀는 당시를 회상한다.
이듬해인 2003년 4월이 되자 경매로 공장을 비워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수소문 끝에 인근에 보증금 760만원을 들여 다시 공장 문을 열었다. 직원과 함께 트럭을 몰고 전라도 광주며, 부산, 춘천 등 칠판 1개라도 주문만 한다면 전국 각지를 마다않고 새벽이라도 달려가 제작했다. 주문량이 늘면서 매출도 1억2천만원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좀더 고급화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벨기에로부터 원료인 세라믹스틸을 들여왔다. 당시만해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직원을 늘리고, 영업에 전력했다. 생산도 중요하지만 영업이야말로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서 이듬해인 2004년에는 4억원, 그리고 지난해에는 1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4월에는 그동안 벨기에로부터 들여왔던 세라믹스틸의 국내 독점 공급하는 계약까지 맺었다. 이는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원료 확보는 물론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대량 생산을 위해 필요한 원료를 6억원(1만6천500m) 정도 비축하고 있다. 부수자재인 알미늄과 합판 등도 풍족하다. 조만간 일본 등 해외 진출도 모색,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5년만에 대량생산 눈앞 ‘꿈은 진행형’
오 대표는 올해 25억~30억원까지 매출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제품 단가가 높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짧은 기간에 상당한 실적이다. 불과 5년전만해도 직원도 없는 1인 회사에서 지금은 어엿한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인생의 50%정도 성공했다고 말한다.
사실 그녀는 어릴적 두가지를 꿈꿨다. 현모양처로 아이들을 키우며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었다. 또 하나는 여고시절부터 꿈꿔오던 소설가.
지금은 소설가도, 현모양처의 꿈도 못이뤘지만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어 그나마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 그녀는 광주에 있는 공장을 5월까지 포천으로 이전한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된다. 회사 설립 5년만에 제대로된 공장과 창고를 마련하게돼 그녀는 가슴이 벅차다.
이곳에서 안정이 된다면 10년 후쯤 그녀는 대여섯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싶다고 작은 소망을 밝혔다. 그리고 나이 60에 소설가가 돼 못다 이룬 꿈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싶다고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창밖의 아름다운 꽃이며 강이며, 산, 들. 모두 내게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게 합니다.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만해도 주위의 반대도 많았고 제 스스로도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한번 목표로 정하면 꼭 해내고 마는 성격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잔잔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