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화려한 색의 유혹 '사쿠란'

(연합뉴스) 일본의 신인 감독 니나가와 미카의 '사쿠란'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과 빛의 사용으로 시신경을 자극하는 개성 있는 영화다. 니나가와 감독은 일본에서 이름을 알려 온 사진작가 출신으로 안노 모요코의 동명 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장편 데뷔작 '사쿠란'에서 색다른 화면을 만들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 8살 난 기요하(즈치야 안나)는 에도시대의 유명한 유곽 요시와라에 팔려온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과 질펀한 술자리가 있는 요시와라는 늘 남자들로 북적인다. 여자들은 앞에서는 남자들에게 교태 어린 웃음을 짓고 술을 따르면서 뒤에서는 최고의 오이란(고급 유녀)이 되기 위해 동료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건방진 말투와 성격으로 문제아로 찍힌 기요하는 유곽의 꽃이 되기를 거부하고 요시와라에서 달아나지만 곧 잡혀온다. 기요하는 자신을 가르치는 아름다운 오이란 쇼히(간노 미호)의 교묘한 설득과 유곽의 일꾼인 세이지(안도 마사노부)와의 약속으로 유곽에 남기로 마음먹는다. 쇼히는 유곽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대로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고 기요하에게 "최고의 오이란이 되면 쓰라"며 머리 장식품을 손에 쥐어 주고 떠난다. 17살이 된 기요하는 뛰어난 미모와 거침없는 성격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오이란 다카오(기무라 요시노)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다. 기요하는 어느 날 잘생기고 마음씨도 착한 손님 소지로(나리미야 히로키)와 사랑에 빠진다. 다카오는 그 마음을 이용해 기요하를 무너뜨릴 계략을 꾸민다. 영화는 시대극이지만 트렌드에 맞게 톡톡 튀는 캐릭터와 현대적인 대사, 과감한 사운드트랙으로 목마를 때 마시는 청량음료 같은 맛을 낸다. 유곽의 화려함을 표현하기 위해 의상부터 세트까지 눈을 쏘아대는 강렬한 원색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창살 안 꽃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무채색의 빛과 그늘로 그린다. 영화는 삶의 비밀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대사와 함께 발빠른 전개로 흘러가지만 관객이 시각적 충격에 익숙해질 만한 후반부에 이르면 화면상으로나 줄거리로나 주춤하며 맥을 잇지 못하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에도시대 유곽을 배경으로 한 갖가지 에피소드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을, 기요하의 사랑과 선택은 애절한 감수성이 녹아 있는 청춘영화가 줄 수 있는 보편적인 즐거움을 준다. 내달 6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새영화> 아빠들에게 박수를… '거친 녀석들'

(연합뉴스) 한동안 '아줌마의 반란'이란 이름으로 중년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작품들이 인기를 끌더니 최근에는 '아빠의 청춘'을 외치는 작품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한국영화로는 '즐거운 인생'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개봉을 앞두고 있고 할리우드에서도 '거친 녀석들'이 건너왔다. 이 영화는 한때 잘나갔던 중년의 남성들이 위기에 부딪힌 뒤 일탈하면서 벌이는 해프닝을 그린 유쾌한 코미디다. 이런 콘셉트가 미국의 중년 남성들의 마음도 움직였는지 이 영화는 '유치하다'는 미국 평단의 혹평과 관계없이 올 3월 미국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으며 DVD 출시 첫 주에도 판매와 대여 순위 모두 1위를 달렸다. 치과의사인 더그(팀 앨런)는 쇠를 씹어먹어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시절을 지나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때문에 기름진 음식은 입에도 댈 수 없는 중년 남성이 됐다. 하나 있는 어린 아들은 "친구 아빠는 덩크슛도 할 줄 아는데"라며 아빠를 무시한다. 그의 친구들도 나을 게 없는 처지다. 재력가였던 우디(존 트래볼타)는 슈퍼모델 출신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면서 재산까지 몽땅 잃게 될 위기에 놓여 있다. 컴퓨터를 끼고 사는 더들리(윌리엄 메이시)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마흔이 넘도록 여자친구 하나 없다. 변기 수리공인 바비(마틴 로런스)는 작가의 꿈을 꾸지만 돈 벌어오라는 아내의 닦달에 시달리는 데다 큰딸과 어린 아들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이들의 유일한 낙은 주말마다 '와일드 혹스(Wild Hogs)'라고 쓰인 재킷을 걸친 채 오토바이를 타고 근교를 달리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더그는 식이요법에 진저리를 내다 버터 한 입을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병원으로 실려간다. 지칠 대로 지친 4명은 일상을 버리고 떠나기로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태평양 연안까지 가겠다는 목표만 세워둔 채 숲에서 야영하고 호수에 뛰어들기도 하며 정처 없이 달린다. 거침없이 앞으로 향하던 4명은 어느 작은 마을의 술집에서 폭주족 갱단인 '델 퓨에고스'와 마주친다. 이 영화는 길을 떠나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지만 감동적인 로드무비가 아니라 몸으로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다. 생각 없이 웃으며 즐기게 해주려는 영화인 만큼 진지한 감동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영화를 보면서 낄낄대며 웃을 준비가 된 관객이 타깃이다. 할리우드 코미디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와 터프 가이에 대한 환상, 무언가를 깨고 부수고 불을 내는 호들갑스러운 유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연출을 맡은 월트 베커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며 2002년 '화려한 싱글'로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새영화> 이름값 보여준 나문희의 '권순분…'

(연합뉴스) 김상진 감독이 돌아왔다. TV와 영화,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나문희를 내세워서. 최고 흥행 감독으로 꼽히는 강우석 감독 밑에서 수업받은 후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귀신이 산다' 등 코미디 장르에서 자신의 이름을 굳건히 한 김상진 감독이 전작 '귀신이 산다'에서의 실망감을 회복했다. 일등공신은 권순분 여사, 나문희다. 김상진 감독은 소동극에 강하다. 개성 강한 젊은이들의 한바탕 난장판인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초등학교 시절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동창생의 좌충우돌을 그린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를 받기 위해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야 하는 탈옥범의 난리법석 '광복절 특사'까지. 특히 상황 설정만으로도 무릎을 치게 만든 '전복적인' 사고방식이 관객에게 먹혀들었다. 이번에는 납치를 자처한 인질의 이야기다. 어수룩한 납치범들은 영민한 인질의 계획대로 몸값을 받아내는 데 동원된다. 인질극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인질인 것. 영화 '열혈남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자신을 원톱으로 내세운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제작 감독의 집, 어나더썬데이)까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전성기를 맞고 있는 나문희는 강성진ㆍ유해진ㆍ유건, 세 남자를 당해낼 정도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뽀글뽀글 퍼머 머리에 중년의 배를 쑥 내민 '몸빼' 바지 스타일만으로도 관객은 웃자고 덤빌 터. 여기에 세 남자는 과하지 않은 배역의 크기를 감당해내며 슬랩스틱과 표정 연기까지 다양하게 해낸다. 돈은 벌었으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고 돈밖에 모르는 자식들을 배치한 이번 영화에서 코미디에 교훈을 얹으려한 시도가 충분히 짐작된다. 황당한 상황 전개가 펼쳐지기에 '어찌 그럴 수 있어?'가 '저럴 수도 있겠네'라고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유해진의 극중 이름이 문근영, 강성진의 이름은 강도범 등 이름으로 웃기는 한국 코미디영화의 기본 공식(?)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예고된 수순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향해가고, 시작하자마자 예상 가능한 결말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보는 재미를 더 이상 키우지는 못했다. 도범(강성진 분)은 아이를 교도소에서 낳게 된 아내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2천만 원이 필요하다. 평생 농사밖에 모르던 노총각 근영(유해진)은 결혼 사기를 당한 후 틀니를 해넣을 돈에 쌈짓돈을 얹어주신 어머니 뵐 면목이 없어 자살하려고 한다. 도범의 처남 종만(유건)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백수. 이들은 국밥집으로 큰 돈을 번 권순분(나문희) 여사를 납치한다. 돈 많고, 나이 든 여자이니 인질로 잡기가 수월할 것이란 예상 때문. 한데 이들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만다. 권순분 여사는 휴대전화 길 찾기를 능숙하게 해내고, 능력있는 경찰서장 안재도(박상면)가 양아들이나 다름없어 경찰의 수사망을 꿰뚫고 있을 정도로 신식이며 비상한 할머니다. 권 여사는 납치범들이 자식에게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하자 평소 연락도 잘 안하는 자식들에게 은근한 기대감을 품는다. 그러나 기대는 무너져내린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선거운동에 바쁜 큰아들은 장난전화로 치부하고, 골프장 사업에 진출하려는 큰딸도 시간 없다며 전화를 곧장 끊는다. 둘째딸은 왜 언니, 오빠 놔두고 나한테 전화하느냐고 화를 내고, 노름 하느라 바쁜 백수 막내아들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미 자식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 상태인 권 여사는 자식들에게 돈을 다시 받아내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순진하게도 5천만 원이 목적이었던 납치범들에게 500억 원은 받아야 한다며 몸값 500억 원을 경찰과 자식들에게 요구한다. 웃자고 만든 영화, 웃으면 된다. 추석 시즌 한국 영화 경쟁이 흥미로워진다. 15세 이상 관람가. 9월13일 개봉.

'最古의 영화잔치' 베니스영화제 29일 개막

(연합뉴스)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29일 이탈리아 베니스 리도 섬에서 64번째 막을 올린다. 개막작인 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Attonment)' 상영을 시작으로 이번 영화제 메인 경쟁부문인 '베네치아 64'에는 모두 22편이 진출해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놓고 내달 8일까지 경합을 벌인다. 지난해에 이어 영화제 사상 두 번째로 경쟁작 22편이 모두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다. 한국영화는 '베네치아 64'에 진출하지 못했다. 다만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비경쟁부문에, 전수일 감독의 신작 '검은 땅의 소녀와'가 새로운 경향의 영화를 소개하는 경쟁부문 '오리종티'에 초청받았다. 올해 경쟁작 목록을 살펴보면 최근 몇 년의 경향대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한 주최 측의 노력이 엿보인다. 미국 또는 영국, 영미 합작 영화가 절반인 11편을 차지하고 있으며 할리우드 유명 감독이 연출하고 스타들이 출연한 작품이 두드러진다. 나탈리 포트만 주연ㆍ웨스 앤더슨 감독의 '더 다질링 리미티드(The Darjeeling Limited)', 주드 로가 출연하는 케네스 브래스 감독의 '슬루스(Sleuth)', 조지 클루니가 주연을 맡은 토니 질로이 감독의 '마이클 클레이턴(Michael Clayton)', 브래드 피트 주연ㆍ앤드루 도미니크 감독의 '카워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등이다. 켄 로치 감독의 '잇츠 어 프리 월드(It’s a Free World)',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리액티드(Reacted)'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다만 이름난 아시아 감독들에 대한 베니스 영화제의 애정은 올해에도 변함없다. 량차오웨이(梁朝偉)가 출연하는 리안(李安) 감독의 '욕망, 신중(Lust, Caution)',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출연해 더 화제가 된 일본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Sukiyaki Western Django)' 등이 경쟁부문에 올라 있다. 게다가 1998년 '하나비'로 황금사자상을 차지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제목을 딴 '감독ㆍ만세(Glory to the Filmmaker)!'상이 신설됐으며 기타노 감독이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또 미국 감독 팀 버튼이 평생공로상을 받고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75주년 기념상을 받는다. 심사위원단은 제50회 영화제처럼 전원 감독들로 구성됐다. 중국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위원장을 맡고 프랑스의 카트린 브레야, 뉴질랜드의 제인 캠피온, 멕시코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등이 참여한다. 한편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1932년 시작돼 올해로 75주년을 맞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열리지 못했고 여러 차례 경쟁부문 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스타벅스 파워도 영화 홍보엔 역부족>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전 세계적인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와 영화 마케팅 파트너십을 체결한 파라마운트 클래식이 예상만큼의 효과를 못 거두자 실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Arctic Tale)'은 미 전역에 지난달 25일 개봉한 뒤 현재까지 겨우 48만4천 달러를 벌어들였다. 지난 주말 158개 극장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북극곰 나누와 바다코끼리 실라가 여러 가지 모험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았으며,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펭귄의 행진'을 제작한 내셔널지오그래픽 필름이 제작하고 파라마운트 클래식이 배급했다. 23일자 버라이어티지에 따르면 파라마운트 클래식은 매주 4천400만 명이 방문하는 스타벅스의 미국내 6천800개 점포에 이 영화를 홍보하면 흥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타벅스는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 로고가 붙은 커피컵 슬리브를 매장에 내놓았고,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매장에서 판매했으며 심지어 몇몇 점포에서는 이 영화의 주제인 지구 온난화에 대한 토론회도 후원했다. 일반 패스트푸드 체인점과 달리 이 영화의 이름을 딴 제품을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스타벅스는 일반 영화의 마케팅 스폰서십과 달리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 극장 개봉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게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스타벅스가 마케팅만으로 흥행 수익의 일부를 챙긴다는 사실은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더구나 스타벅스는 그동안 매장 내서 홍보, 판매한 수많은 가수들의 음반 판매 실적으로 보아 영화 홍보에서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할리우드는 예상했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매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음반 홍보와 달리 소비자들을 극장에 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영화 홍보에서는 취약점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스타벅스는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 이전에 지난해 로런스 피슈번과 안젤라 바셋이 주연한 '아키라 앤 더 비'를 미국 내 전 점포를 동원해 마케팅에 나섰으나 1천900만 달러라는 예상보다 저조한 실적을 거둔 바 있다. 스타벅스 측은 파라마운트 클래식과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 마케팅 계약을 맺을 당시 '아키라 앤 더 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좀 더 많은 소비자들이 영화를 보러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결국 스타벅스 소비자들은 매장 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만 토론했지 극장에 가서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을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필름과 파라마운트 클래식 측은 서운한 감정을 숨긴 채 스타벅스가 '나누와 실라의 대모험'의 DVD 출시 때는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것을 기대한다고만 밝혔다.

<인터뷰> 제프리 길모어 EIDF 심사위원장

(연합뉴스) "아시아 영화 작가들은 한계점(edge)에 도전하는 실험정신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20년간 볼 때 아시아가 할리우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합니다." 세계적인 인디영화 축제 미국 선댄스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18년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제프리 길모어 위원장이 아시아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27일 개막한 2007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내한한 그는 이날 오전 서울 도곡동 EBS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EIDF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수준 있는 작품들을 상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면서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게 돼 영광"이라고 밝혔다. 9월2일까지 열리는 EIDF에서 길모어 위원장은 경쟁부문 심사와 함께 28일에는 '미국 독립다큐,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마스터 클래스도 펼친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을 다시 찾은 소감이 어떤가. ▲1986년에 UCLA의 한국 시네마테크를 위해 처음으로 찾은 이후 부산영화제 참가 등으로 10번 정도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영화에 관심과 열정이 많다. 사실 이번에 심사위원장 제안을 받고 도저히 시간이 안될 것 같았는데 서울이라는 도시를 매우 좋아하고 EIDF가 세계 여러 영화제 중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퀄리티와 매력을 갖고 있어 수락하게 됐다. --EIDF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페스티벌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EIDF는 일반 관객과 심사위원들이 함께 심사하는 방식이 독특하며 무엇보다 TV로 동시에 영화제를 진행하는 방식은 앞으로 영화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 어느 나라에서든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만나기란 어렵다. 물론 최근 들어 마이클 무어의 작품들이나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등은 극장에서 상영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하물며 방송을 통해 이런 영화들이 상영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 점에서 EIDF를 영화제의 한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영화제가 TV와 동시에 진행되는 장점은 무엇인가. ▲최근 들어 방송과 극장이 손잡고 영화를 개봉하는 추세다. 이는 영화의 상영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은 접근성(visibility:가시성)의 의미인데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영화를 관객이 6개월에서 10개월 후 극장에서 상영할 때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이 아니라, 화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때에 TV를 통해 볼 수 있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떠오르는 새로운 영화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는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고 영화를 대중에 노출시키는 플랫폼인데 TV와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영화를 최대한으로 노출하고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댄스 영화제에 대해 설명한다면. ▲선댄스는 다큐멘터리와 일반 영화를 똑같이 취급하는 세계 유일의 영화제다. 3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 국제경쟁부문 역시 다큐와 일반 영화를 똑같은 비중과 수준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영화제들처럼 다큐멘터리를 구색 맞추기용으로 선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고 자부한다. 내 상사(Boss)인 로버트 레드퍼드도 "선댄스에서 와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다면 다큐를 보라"고 말한다. --아시아 영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UCLA 필름스쿨 재학시절 쉽게 접할 수 없는 일본 영화나 초기 중국 영화를 아카이브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전형적인 유럽 영화들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지난 세기에 출현한 영화 중 가장 훌륭했던 영화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묻는다면 당연히 아시아라고 답하겠다. 공포, 미니멀리즘, 갱스터, 예술영화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아시아 영화는 눈부신 성과를 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잘 모른다. 또 아시아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도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이나 왕자웨이 감독을 봐도 아시아 감독들은 장르나 영화 산업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만든다. 늘 실험을 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래서 때로는 '괴짜(crazy)' 소리도 듣는다. 반면 서양 감독들은 2년마다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데 그것에 질렸다. 물론 미국 독립영화 중에도 좋은 작품이 많다. 그러나 결점도 많다. 그런데 아시아 영화는 아니다. 아시아 영화를 아주 오래 봐왔는데 이런 점이 나로 하여금 아시아 영화에 대해 열정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아시아 영화 작가들은 한계점(edge)을 넘어서는 실험정신을 발휘한다. 최근 20년간을 볼 때 아시아가 할리우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올해 나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도 거의 대부분 아시아 영화의 재창조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지금 할리우드에서는 장르의 재발명(reinvention)이 아시아 영화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가 있나. ▲어떤 작품이 어떤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콕 집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특수효과, 무술 장면, 카메라 워킹 등을 볼 때 총체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이나 '매트릭스'를 보면 홍콩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 않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점차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혼합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역시 아시아 영화의 영향이다. 아시아 영화는 장르를 갖고 논다.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시아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훔쳐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가. 할리우드 영화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성공을 거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톰 크루즈는 더 이상 세계 최고의 스타가 아니다. 그는 구세대의 아이콘이다. 우리는 새로운 스타와 이야기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EIDF 초청작 중 지난해 선댄스에서 상영된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추천할 작품이 있다면. ▲'영혼의 병 거식증' '어느 미군 병사의 짧은 삶' '빅 할아버지와 수녀' '행복의 적들' '당신의 생선은 어떻습니까' '블랙 골드' 등 많은 작품이 지난해 선댄스에 소개됐다. 모두 수작이다. 특히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닉 브룸필드의 작품이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