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상록경찰서가 자체 강당을 개방, 최신영화를 무료상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안산상록경찰서는 지난 8일 '아버지의 깃발'(감독:크리트 이스트우드)을 첫 상영한 데 이어, 오는 22일 '센티넬'(감독: 클락 존슨), 다음달 5일 '4 브라더스'(감독: 존 싱클톤)를 무료상영한다. 경찰서에서 영화를 정기 상영하는 것은 안산상록경찰서가 처음이다. 상영장소는 210석을 갖춘 극장식 강당(상록회관)으로 대형스크린(가로 4m, 세로 6m)과 빔프로젝터, 첨담음향시스템을 두루 갖춰 웬만한 소형극장 시설을 능가한다. 상영영화는 직원과 전.의경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거쳐 예술성을 겸비한 흥행영화로 엄선한다. 상영시간은 매달 첫째, 셋째 목요일 오후 6시30분부터 9시로 정했으며, 직원 뿐 아니라 안산상록경찰서 관할지역인 상록구 주민은 누구나 공짜로 관람할 수 있다. 안산상록경찰서 관계자는 20일 "최신시설의 상록회관을 직장교육 장소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까워 영화상영을 기획하게 됐다"며 "유관기관의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영화 상영을 홍보하고 사회복지시설 등의 단체관람도 유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어찌 웃음에 대한 기대를 높이지 않을 수 있겠나. 차승원과 유해진이 등장한다는데. 그것도 말끔한 군수 차승원, 추레한 이장 유해진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데. 모델 출신다운 세련미를 자랑하는 차승원이 트레이닝 바지를 아무렇게나 걷어입고 남방이라고는 오직 하나인 듯한 전형적인 농부 이장이며, (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외모부터 '촌스러워' 보이는 유해진이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군수라니 그 용모를 상상하는 데서부터 웃음이 터져나오고 센 코미디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장과 군수'(감독 장규성, 제작 싸이더스FNH)에서 코미디는 관객을 극장으로 끌기 위한 장르적 미끼다. 연기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진지한 이 30대 후반의 두 배우는 억지 웃음 대신 나이만큼 진정성을 갖고 '싸나이들의 우정'을 그리고 싶어했다. '선생 김봉두' '여선생vs여제자' 등 휴먼 코미디를 만들어냈던 장규성 감독이 차승원과 다시 한번 손잡고 비슷한 장르를 내놓았다. 예전보다 웃음의 요소는 더 가벼워진 한편 메시지는 더 묵직하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던 듯.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 경박하다. 이장과 군수의 절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과 멋있는 몸매라는 여자의 말에 허겁지겁 셔츠를 젖히는 모습. 더욱이 유행에 가장 민감한, 그래서 아주 짧은 기간 인상적인 CF를 패러디해 극장에서, TV에서 오래도록 볼 수 있는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건 관객을 너무 쉽게 본 것이 아닐까. '공동경비구역JSA'가 진지하게 사용한 초코파이를 이 영화에서 또 봐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사람을 웃기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감독이나 배우가 모를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웃어야 하는 장면에서의 불편함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도 끈끈한 우정을 보는 감동을 깎아내린다. '선생 김봉두'에서 시골 마을의 정겨움을 내세워 도시민들의 그릇된 삶의 방식을 꼬집고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장 감독은 이번에도 시골을 배경으로 했다. 사회에서 늘 맞부딪히는 계급의 문제를 이장과 군수라는 의외의 권력으로 접근했다. 영화에는 어린 시절 위치와는 달리 커버린 어른이 된 현실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문제, 순수한 열정을 대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력들과의 충돌,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기댈 수 있는 건 사람 사이의 믿음이라는 걸 말하려고 한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춘삼(차승원 분)은 "이번에는 젊은 사람을 이장으로 뽑자"는 마을 어른의 한 마디에 난데없이 동네 이장이 된다. 이장직에 별 뜻이 없었던 춘삼 앞에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도맡아했던 춘삼의 '꼬붕'이었던 대규(유해진)가 군수가 돼 등장한다. 기분이 상한 춘삼은 대규에게 마을 길을 포장해달라는 등 친분을 이용해 민원을 넣는다. 대규 못지않은 이장이 되고 싶은 춘삼이 마을을 잘살게 하기 위해 고심 끝에 아이디어를 내 군수의 재가를 기다리는데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해 군 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여념이 없는 대규에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괘씸해 한다. 이런 춘삼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 군수 선거에서 대규에게 패한 예전 군수와 그를 후원해 이득을 챙겨왔던 부동산개발업자 백 사장(변희봉)이 방폐장 유치반대위원회 위원장으로 춘삼을 끌어들인다. 춘삼은 열정적으로 반대 운동을 펼친다. 백 사장은 춘삼을 이용해 대규에게 큰 타격을 미치는 사건을 조작하고, 이로 인해 대규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춘삼이 대규의 편에 서면서 두 사람의 해묵은 오해와 질시가 사그러든다. 결론을 도식적으로 내지 않았다는 점은 뜻밖이다. 이 때문에 최소한 감독과 두 배우가 의도했던 메시지는 훼손되지 않은 게 위로가 된다. 2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홍상수 감독이 '해변의 여인'으로 남미권 최대 규모 국제영화제인 제22회 마르 델 플라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가 밝힌 바에 따르면 홍 감독은 18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에서 막을 내린 이 영화제에서 감독상에 뽑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홍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해 국내 젊은 영화감독들의 모임 '디렉터스 컷'이 선정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해변의 여인'은 베를린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한편 이 영화제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양준 부집행위원장 겸 프로그래머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연합뉴스
영화 '블루프린트(blueprint)'의 제목은 유전정보(genetic blueprint)라는 뜻. 이 영화는 클론(Clone), 즉 복제인간 이야기다. 세계적 명성의 피아니스트 이리스(프란카 포텐테). 어느 날 언어ㆍ지각 장애 등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불치병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는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만은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피셔 박사를 찾아가 자신과 꼭 닮은 복제인간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복제인간이 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피셔 박사는 이리스와 함께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시리(프란카 포텐테)를 만들어 낸다. 이리스와 시리는 모녀지간인 동시에 쌍둥이 자매. 이리스는 이 같은 사실을 철저히 숨긴 채 어린 시리를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키워낸다. 그러나 피셔 박사는 천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리스와의 약속을 깨고 시리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폭로한다. 진실이 드러나자 모녀는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블루프린트'는 '글루미 썬데이'로 유명한 롤프 슈벨 감독과 '글루미 썬데이'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 독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복제인간을 다뤘지만 'A.I.' '아일랜드' 등의 영화처럼 화려한 미래사회를 볼거리로 제공하는 영화는 아니다. 복제인간 소재를 통해 애착이 강한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에 더 포커스를 맞췄다. 복제인간이란 소재는 모녀의 갈등을 더 깊게 하는 도구일 뿐 큰 의미는 없는 듯. 가장 인상적인 것은 1인2역을 소화한 프란카 포텐테의 연기. '롤라 런' '본 아이덴티티' '크립' 등의 영화로 국내 관객에게도 친숙한 포텐테는 우아한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복제인간이란 사실에 갈등하는 딸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포텐테의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이야기 얼개 자체가 큰 흡입력을 갖지는 못한다. 2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국내 대표적인 단편영화제로 꼽히는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장르의 상상력展' 출품작을 공모한다. 2006년 5월 이후 디지털 또는 필름으로 제작한 40분 이내의 영상창작물을 대상으로 한다. 접수기간은 21일부터 4월17일까지이며 영화제 홈페이지(www.mgff.org)에서 신청서를 내려받아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올해 영화제에도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 등이 집행위원으로 참여한다. ☎ 02-927-5696 /연합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향수’가 영화로 관객을 만난다. ‘롤라 런’의 톰 튀크베어 감독이 연출하고 더스틴 호프만·벤 위쇼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 ‘향수’는 천재적 후각을 가진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벤 위쇼)가 매혹적인 향기를 소유하기 위해 향수제조사 주세페 발디니(더스틴 호프만)을 만나 향수 제조 방법을 배우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작품으로 1985년 출판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톰 튀크베어 감독은 1999년 ‘롤라 런’으로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최근에는 알폰소 쿠아론, 구스 반 산트, 웨스 크레이븐 등 거장 감독 20명과 함께 ‘사랑해, 파리’에 참여했다. 이 작품에서 톰 튀크베어는 ‘생 드니 외곽’편을 맡아 배우 지망생과 시각장애인의 사랑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그렸다. 톰 튀크베어 감독은 ‘향수’를 영화화 하기 위해 시나리오 각색에만 2년을 쏟았다. 18세기 파리의 향수문화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촬영 전 배우들에게 당시 의상을 입고 생활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제작 KINO2)이 포스터를 공개했다. 어린 시절의 송화와 동호, 유봉의 걸어가는 뒷모습이 거목 사이로 비쳐지는 첫 번째 포스터의 압권은 제목 '千年鶴' 서체. 마치 학이 비상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서체에서 웅장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묻어난다. 이 서체는 하석 박원규 선생의 작품. 그는 '취화선'을 비롯한 임 감독의 최근 대부분의 영화에서 쓰인 모든 필체를 담당해왔다. 제작사 측은 "울창한 숲길은 임권택 감독이 세상을 향해 사람의 삶과 생명을 이야기하기 위해 선보였던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며, 거목들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의 웅장함과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고 밝혔다. 두 번째 포스터는 '시간, 믿음, 대중의 사랑과 존경, 그것이 名品'이라는 카피라이터가 인상적. 지난 50여 년간 관객의 믿음 속에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임 감독과 그의 100번째 영화인 '천년학'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진정한 명품이 어떤 것인지 되새기려고 한다. 영화 '천년학'은 4월12일 개봉한다. /연합뉴스
존 트래볼타가 지난 1978년 '그리스'에 출연한 이후 30년 만에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다. 그것도 몸매가 넉넉한 주부로 말이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존 트래볼타는 오는 7월20일 개봉 예정인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에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며 최근 극장주들의 큰 행사인 쇼웨스트에서 영화를 처음 선보였다. 트래볼타는 "지난 30년 동안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면서 "30년 전과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뮤지컬에 컴백하는 것이 스마트한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보다 더 좋은 역할을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밝혔다. 브로드웨이 히트 뮤지컬을 각색한 '헤어스프레이'는 볼티모어의 한 뚱뚱한 여성 트레이시 턴블레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1960년대 초 인권운동을 펼치는 그녀는 TV에 10대 댄스쇼를 포함시키기 위해 뛴다. 트래볼타는 신인 니키 블론스키가 맡은 트레이시 턴블레드의 뚱뚱한 엄마 에드나 역을 맡았다. 메가폰은 애덤 생크맨이 잡았다. 미셸 파이퍼와 퀸 라피타가 각각 에드나의 라이벌인 TV 방송국 사장과 레코드상점 주인인 모토마우스 메이벨로로 등장하고, 크리스토퍼 워큰이 에드나의 남편 역을 맡아 트래볼타의 뺨에 애정 어린 뽀뽀를 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연합뉴스
소설을 깊은 충격으로 대하면, 그게 어떤 작품이든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막연한 불안함, 심하면 거부감까지 갖게 된다. 읽는 이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있을 법한 세계'가 영상을 통해 눈앞의 현실로 그려지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결코 실체는 없으나 상상을 통해 각자의 마음 속에 그려낸 냄새까지 영화로 담을 수 있을까. 1985년 출간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콘트라베이스' '좀머씨 이야기' 등 인간의 고독과 존재감을 독특한 접근으로 풀어내는 쥐스킨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더 음산한 분위기다. 향기 자체의 묘사에 공을 들였던 원작과 달리 영화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과정에 집중했다. 또 파리 어시장부터 훑는 배경은 향기로운 향취보다는 역겨운 냄새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한번쯤 보고 느낄 만하다. 한 천재적인 인간(천재성은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두드러진다)의 집착이 가져온 크나큰 불행을 일반인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세상이 결코 평범한 이들로만 이뤄지지 않았으니. 소설에 대한 빚을 갚기에 충분한 영상이 담겨 있으며 소설만큼이나 간결한 문체가 영화에도 통용됐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벤 위쇼 분)는 파리 어시장의 버려진 내장의 쓰레기 더미 위에서 태어난다. 그의 첫 울음은 영아를 유기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참담한 생활을 해야 하는 고아원에서도 그의 목숨은 질기게 버텨나간다. 그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건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냄새를 맡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5년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가죽공장에서도 삐쩍 마른 몸으로 버티는 그르누이는 어느 날 배달을 나갔다 그를 온통 사로잡는 미묘한 향기를 맡게 된다. 그 향기를 따라가 보니 싱그러운 여인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그는 뜻하지 않게 그 여자를 죽이고 난 후 그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그르누이는 퇴락한 향수 제조자 발디니(더스틴 호프만)를 찾아가 당시 유행하던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보다 더 뛰어난 향의 조합을 이룬 향수를 만들어주는 대신 향수 제조법을 전수받는다. 발디니에게서 천상의 향수에 대해 듣는다. 파라오의 무덤 속 항아리를 여는 순간, 그 미묘하고도 강력한 향기가 퍼져나와 잠시라도 그 향기를 맡는 모든 사람들을 파라다이스로 데려다주는 향수다. 그 향수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의 원산지인 그라스 지역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희한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두 머리카락이 잘린 채 나체의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 그라스의 거상 안토인 리치스(앨런 릭맨)는 이 해괴한 살인마가 마지막에 자신의 아름다운 딸 로라(레이첼 허드 우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대사가 거의 없는 그르누이 역의 벤 위쇼는 영화의 분위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 걸음걸이, 눈으로 표현하는 표정과 대사 등이 완숙하면서도 풋풋함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반전에서 등장하는 군중신은 그 자체로 숨을 죽이게 한다. 그 장면은 되레 그르누이가 추구해 결국 구현한 향기가 결코 파라다이스를 경험하게 하는 건 아니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네덜란드 출신의 폴 버호벤 감독은 '원초적 본능' '스타쉽 트루퍼스' '로보캅' 등의 할리우드 흥행대작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영화인생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초창기에 만든 일련의 작품성 위주의 영화를 통해 가능성을 인정받긴 했지만 크게 주목을 받진 못했으며 특히 1985년에 제작한 '아그네스의 피'는 흥행에서 참패를 거뒀다. 다시 말해 대중이 알고 있는 버호벤의 흥행감독으로서의 이미지는 '로보캅' 이후 잇따라 히트를 친 일련의 작품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셈이다. 하지만 버호벤의 최신작 '블랙북'을 보면 그가 다시 '로보캅' 이전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서 실제 있었던 나치 레지스탕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원초적 본능'이나 '스타쉽 트루퍼스' 등에서 보여줬던 버호벤의 흥행 코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그동안 허다하게 만들어졌던 나치 레지스탕스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치가 장악한 네덜란드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 가족은 탈출 계획이 새나가는 바람에 탈출 도중 독일군에게 발각돼 모두 죽고 레이첼만 홀로 살아남는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레이첼은 나치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적군의 본거지로 침투할 스파이의 임무를 맡게 된다. 자신의 매력과 기지를 십분 발휘해 나치군 장교인 문츠(세바스티안 코치)의 연인이 되는 데 성공한 레이첼은 문츠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는 문츠의 방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스파이 임무를 수행한다. 레이첼은 중요한 스파이 임무 수행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갈수록 인간적인 문츠의 매력에 끌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문츠 또한 레이첼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그녀를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잔혹한 현실은 그들의 이러한 애틋한 사랑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레이첼이 동지들을 구출할 최후의 임무를 전달받게 되고 작전이 시작되던 날, 그들을 감싸고 있던 엄청난 음모가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영화는 뜻하지 않은 새로운 반전을 맞이하는데…. 영화는 결말부에 이르러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인물이 나치와 내통해 내부 정보를 팔아먹던 배신자로 밝혀지면서 반전(反轉)을 이룬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영화에 익숙한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의 반전인 데다 설사 누구인지 정확히 짚진 못하더라도 대충 예상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어서 다른 기발한 반전 영화들과 견주어볼 때 크게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다. 무명에 가까운 캐리스 밴 허슨은 소화하기 어려운 역을 맡아 나름대로 열연을 펼치지만, 무명급 배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는 것으로 유명한 버호벤의 안목이 이제는 녹슨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영화의 제목인 '블랙북'은 파급력 강한 1급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국가기밀 문서를 일컫는다. 29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