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영화제서 한국 배우 위상은 여존남비?

전도연이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여배우들의 해외 영화제 도전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 한국 영화계가 해외 영화제에서 숱한 수상 기록을 쌓을 수 있었던 데는 물론 감독의 공이 적지 않았지만 여배우들의 활약상도 돋보였다. 특히 남자배우에 비해서는 월등히 좋은 성적을 올려 여성 파워를 과시했다. 여기에는 동양 여배우들에 대한 서양 심사위원들의 오리엔탈리즘이 깔려 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한국 여성 특유의 혼신을 다한 열정과 빼어난 연기력이 큰 몫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여배우 가운데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첫 낭보를 전한 인물은 강수연. 그는 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쥠으로써 세계 영화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그는 89년에도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당시 칸ㆍ베니스ㆍ베를린과 함께 4대 영화제로 꼽히던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월드스타로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강수연에 이어 1988년 신혜수가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고 91년에는 이혜숙이 같은 영화제에서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바통을 받았다. 이에 앞서 90년에는 심혜진이 낭트 영화제에서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여우주연상에 뽑혔다. 93년에는 상하이 영화제에서 오정해가 '서편제'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음으로써 임권택 감독은 강수연, 신혜수, 오정해 등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제조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94년 최명길이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으로 낭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을 끝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여우주연상 수상 행진은 2001년 김호정에 이르러 재개됐다. 김호정은 문승욱 감독의 '나비'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에 해당하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같은 해 김기덕 감독의 '섬'에 출연한 서정이 판타스포르토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을 전했고 이듬해 장진영이 윤종찬 감독의 '소름'으로 같은 영화제에서 수상 기록을 추가했다. 문소리는 2002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로 베니스 영화제가 그해 신설한 신인배우상을 받은 데 이어 2003년 '바람난 가족'으로 스톡홀름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원조 월드스타 강수연에 이어 월드스타 반열에 올랐다. 2004년에는 임수정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으로 판타스포르토 영화제에서, 2005년에는 이영애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로 시체스 영화제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올해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마침내 전도연이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것이다. 이에 반해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배우는 93년 윤삼육 감독의 '살어리랏다'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덕화를 비롯해 2000년 도빌 아시아영화제의 박중훈(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5년 뉴몬트리올 영화제의 아역배우 박지빈(임태영 감독의 '안녕, 형아'), 2007년 판타스포르토 영화제의 하정우(김기덕 감독의 '시간')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연합뉴스

전도연, 칸 영화제서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배우 전도연(34)이 27일 오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60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여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칸ㆍ베를린ㆍ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1987년 '씨받이'로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20년 만이다. 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동양계 여배우로는 홍콩 장만위(2004년) 이후 두 번째이고, 동양계 배우로 칸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은 배우는 모두 다섯 명이다. 전도연 이전 중국 배우 거유(葛優)가 1994년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Lifetimes)'으로 남우주연상을 탔으며 이후 홍콩의 량차오웨이(화양연화. 2000년)와 장만위(클린), 일본의 야기라 유아(아무도 모른다. 2004년) 등이 칸에서 주연상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이로써 전도연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에서 세계적인 여배우로 부상했다.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시상대에 오른 전도연은 "믿기지 않는다"고 말문을 연 뒤 "작품에서 열연한 여배우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 여배우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 자격과 영광을 주신 칸과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전도연은 "저 혼자서는 (여우주연상 수상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창동 감독님이 가능하게 했으며, (종찬을 연기한) 송강호 씨가 신애(전도연)라는 인물을 완전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도연은 "'밀양'을 환영해 주신 칸과 여러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감사드린다"는 말로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이날 여우주연상 시상은 프랑스의 미남배우 알랭 들롱이 맡았다.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밀양'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계 복귀작. 영화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두고 용서라는 화두 앞에 괴로워하는 피아노 강사 신애(전도연)와 그녀를 사랑하는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의 이야기다.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 '벌레 이야기'가 원작이지만 기본 얼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롭게 쓰였다. 전도연은 영화가 공개된 이후 현지 언론으로부터 연기에 대한 찬사를 받으며 줄곧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돼 왔다. /연합뉴스

역대 주요 국제영화제 수상 연혁

▲1961년 : '마부'(강대진) = 베를린 영화제 특별은곰상 ▲1987년 : '씨받이'(임권택) =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 ▲1988년 : '아다다'(임권택) = 몬트리올 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1989년 :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 ▲1989년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 로카르노 영화제 그랑프리 ▲1990년 :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 낭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ㆍ여우주연상(심혜진) ▲1991년 : '은마는 오지 않는다'(장길수) = 몬트리올 영화제 감독상ㆍ여우주연상(이혜숙) ▲1992년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 몬트리올 영화제 제작자상(도동환) ▲1992년 : '하얀 전쟁'(정지영) = 도쿄 영화제 대상 ▲1993년 : '살어리랏다'(윤삼육) = 모스크바 영화제 남우주연상(이덕화) ▲1993년 : '서편제'(임권택) = 상하이 영화제 감독상ㆍ여우주연상(오정해) ▲1994년 : '화엄경'(장선우) =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드바우어상 ▲1994년 : '장미빛 인생'(김홍준) = 낭트 영화제 여우주연상(최명길) ▲1996년 : '학생부군신위'(박철수) = 몬트리올 영화제 예술공헌상, 타슈켄트 영화제 그랑프리(1997년) ▲1996년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 밴쿠버 영화제 용호상, 로테르담 영화제 타이거상(1997년) ▲1997년 : '초록물고기'(이창동) = 밴쿠버 영화제 용호상 ▲1998년 : '모텔 선인장'(박기용) = 프리부르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1998년 :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 도쿄 영화제 감독상 ▲1998년 : '벌이 날다'(민병훈) = 토리노 영화제 대상, 테살로니키 영화제 은상 ▲1999년 : '조용한 가족'(김지운) =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작품상 ▲1999년 :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 케라라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1999년 : '송어'(박종원) = 도쿄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00년 :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 도빌 아시아영화제 대상ㆍ감독상ㆍ남우주연상(박중훈) ▲2000년 : '박하사탕'(이창동) =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00년 : '오! 수정'(홍상수) = 도쿄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00년 : '행복한 장의사'(장문일) = 카이로 영화제 신인감독상 ▲2001년 :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 시애틀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도빌 아시아영화제 대상 ▲2001년 : '나비'(문승욱) = 로카르노 영화제 청동표범상(김호정) ▲2001년 : '파이란'(송해성) = 리즈 영화제 신인감독상, 도빌 아시아영화제 대상(2002년) ▲2001년 : '섬'(김기덕) = 브뤼셀 판타스틱영화제 대상,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여우주연상(서정) ▲2001년 : '봄날은 간다'(허진호) = 도쿄 영화제 예술공헌상 ▲2002년 : '소름'(윤종찬) =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감독상ㆍ여우주연상(장진영) ▲2002년 : '낙타(들)'(박기용) = 프리부르 영화제 그랑프리ㆍ시나리오상 ▲2002년 : '마리 이야기'(이성강) =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랑프리 ▲2002년 : '취화선'(임권택) = 칸 영화제 감독상 ▲2002년 : '동승'(주경중) = 상하이 영화제 시나리오상 ▲2002년 : '전쟁 그 이후'(문승욱ㆍ스와 노부히로ㆍ왕샤오솨이) = 로카르노 영화제 비디오상 ▲2002년 : '오아시스'(이창동) =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ㆍ신인배우상(문소리) ▲2003년 :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 브뤼셀 판타스틱영화제 대상 ▲2003년 : '살인의 추억'(봉준호) =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 최우수감독상ㆍ신인감독상, 토리노 영화제 각본상 ▲2003년 : '바람난 가족'(임상수) = 스톡홀름 영화제 여우주연상(문소리)ㆍ촬영상(김우형), 플랑드르 영화제 감독상, 도빌 아시아영화제 대상(2004년) ▲2004년 : '송환'(김동원) = 선댄스 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2004년 : '목포는 항구다'(김지훈) = 유바리 판타스틱영화제 대상 ▲2004년 : '사마리아'(김기덕) =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2004년 : '장화, 홍련'(김지운) =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작품상ㆍ감독상ㆍ여우주연상(임수정) ▲2004년 : '노동자다 아니다'(김미례) = 프리부르 영화제 다큐멘터리상 ▲2004년 : '오세암'(양진철ㆍ성백엽) =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2004년 : '올드보이'(박찬욱) =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시체스 영화제 작품상 ▲2004년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 상하이 영화제 감독상ㆍ음악상(이병우) ▲2004년 : '빈 집'(김기덕) =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2004년 :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 도쿄 영화제 감독상ㆍ관객상 ▲2005년 : '인어공주'(박흥식) = 유바리 판타스틱영화제 그랑프리 ▲2005년 ; '송환'(김동원) = 프리부르 영화제 다큐멘터리상 ▲2005년 : '여자, 정혜'(이윤기) = 도빌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05년 : '길'(배창호) = 필라델피아 영화제 작품상 ▲2005년 : '사과'(강이관) =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 신인작가상 ▲2005년 : '안녕, 형아'(임태영) = 뉴몬트리올 영화제 남우주연상(박지빈) ▲2005년 :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 시체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이영애) ▲2006년 : '인 비트윈 데이즈'(김소영) = 선댄스 영화제 인디정신상 ▲2006년 : '안녕, 형아'(임태영) = 파지르 영화제 감독상 ▲2006년 : '혈의 누'(김대승) = 유바리 판타스틱영화제 그랑프리 ▲2006년 :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남기웅) = 유바리 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06년 : '피터팬의 공식'(조창호) = 도빌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 ▲2006년 : '왕의 남자'(이준익) = 케이프타운 영화제 작품상ㆍ각본상 ▲2006년 : '가족의 탄생'(김태용) = 테살로니키 영화제 대상 ▲2007년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박찬욱) =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드바우어상 ▲2007년 : '해변의 여인'(홍상수) = 마르 델 플라타 영화제 감독상 ▲2007년 : '괴물'(봉준호)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감독상 ▲2007년 : '시간'(김기덕) =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남우주연상(하정우) ▲2007년 : '왕의 남자'(이준익) = 도빌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 ▲2007년 : '밀양'(이창동) =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전도연) /연합뉴스

칸 영화제 수상작 '밀양'은 어떤 영화

한국 영화계에 3년 만에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작, 20년 만에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란 영예를 안긴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인간의 삶이란 과연 어떠한가'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감독이 1988년 이청준 씨의 단편 '벌레 이야기'를 읽은 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한 편의 장편영화로 만들어졌다. 그가 4년 만에 감독 복귀작으로 내놓은 '밀양'은 인간과 삶을 향한 그의 끝없는 질문이 한층 밀도 있게 그려져 있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극단의 상황에 맞닥뜨린다. 그리고 종찬(송강호)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묵묵히 지켜본다. 신애가 부딪힌 상황은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힘든 장면들이다. 남편이 죽은 뒤 세상의 전부인 아들과 남편의 고향 밀양에 찾아온다. 그 곳에서 신애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유괴당해 죽는 모진 고통을 당한다. 아들의 죽음은 어찌 보면 신애의 자만과 허영 탓. 낯선 사람들과 융화하기 위해, 혹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기 위해 부렸던 허세가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 신애가 밀양으로 온 첫날 만난 카센터 사장 종찬은 신애 곁을 맴돈다.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신애가 어느 날 갑자기 신에 의지해 교회를 찾을 때도 종찬은 그와 함께 한다. 신애가 신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며 아들의 살해범을 만난 순간, 신애는 자신이 생각했던 신의 구원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지 깨닫는다. 신에게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살해범으로 인해 신애는 인간과 신에게 절망하고 만다. 그는 일탈된 행동을 보이며, 결국 정신까지 놓고 만다. '밀양'은 그럼에도 신애가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또한 삶이라고 말한다. 고통도, 구원도, 용서도, 분노도 생이 지속되는 한 내내 안고 가야 할 삶의 편린일 뿐이다. '비밀스러운 햇빛', 혹은 '빽빽한 햇볕'이라 해석할 수 있는 '밀양'은 대한민국 보통의 소도시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런 상황을 맞을 수 있고, 대부분 그런 상황을 맞는다 해도 그저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밀양'에서 햇살은 아주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한다. 첫 장면 신애와 아들이 누워 바라보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 신애가 신에게 절망한 채 신에게 도전하는 순간 신애를 향해 정면으로 내려앉는 햇살, 그리고 마지막 장면 신애 집 마당에 비추는 한 조각 햇살까지.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해묵은 과제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연합뉴스

공포영화 ‘기담’ ‘아름다움 속 도사린 공포’ 와 만나다

현재와 가까운 과거일수록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힘들다. 1940년대가 주로 일제 강점과 독립투쟁의 소재로 소비돼왔던 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다양한 시대적 변주는 늘 새로운 소재를 찾는 제작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고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돼 왔다. 하지만 닫혀 있던 역사관과 선입견을 조금만 틀어 보면,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린 것처럼 흥미진진한 사건(소재)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잠시 시계추를 1942년 경성으로 돌려보자. 당시 경성은 전쟁의 포화와 신문물의 마구잡이식 유입이 절정을 이루며 '현대화'에 대한 무모한 경외와 혼란의 공존이 기묘함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또한 태극기를 품은 열사나 청산유수를 벗삼아 지내는 소시민이 전부일 거라 생각한 그곳에서도 애정의 도피 행각이나 낭만에 취한 청춘, 흉악한 살인 등 생각지도 못한 사건과 스캔들이 들끓었다. 자신의 간통을 숨기기 위해 조선인 하녀를 살해한 일본 간부 부인,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갓난 아기의 뇌수를 먹은 남자 등(경성기담-전봉관 중 발췌) 당시의 또 다른 사회상을 조명한 이야기들은 이를 증명하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영화 '기담'은 바로 42년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인 안생병원을 무대로 사랑과 죽음의 공포를 포개낸다.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증폭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새로운 질감의 공포로 형상화한 것이다. 영화의 우선순위가 '고증'이었다고 말할 만큼 '기담'은 시대를 주요한 무대로 삼는다. 지난 17일 경기도 남양주 종합 세트장. 이곳에 섬뜩하지만 매혹적인 공포의 무대인 안생병원 세트장이 마련돼 있다. 영화의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안생병원은 700여평 규모로 1년여간의 프리 프로덕션을 통해 탄생됐다. 이날 촬영은 난도질당한 채 발견된 일본군 시체를 부검하는 장면. 높은 천장과 타일로 촘촘히 메워져 있는 단조로운 공간이 음산함을 더하는 해부실. 굳게 닫힌 창문을 뚫고 비쳐지는 햇빛이 해부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의 시체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세 사람. 동경 유학 중 안생병원에 부임한 인영(김보경)과 보조역인 의대 실습생 정남(진구), 그리고 두 사람에게 부검을 의뢰한 아카야마 소좌(김응수)다. 비명이나 핏빛 공포가 주는 말초적 자극 대신 '기담'은 '아름다움 속 도사린 공포'로 감정의 극적 대비를 불러일으킨다. 원장 딸과의 정략 결혼으로 편안한 생활을 보장받았지만 점점 숨이 막혀오는 의대 실습생,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엘리트 의사 부부에게 숨겨진 충격적 비밀, 사랑하는 엄마에 멋진 새아빠까지 갖게 된 10세 소녀의 끔찍한 악몽이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과 섬뜩함을 선사하는 것. 연출을 맡은 정가 형제는 "기존 호러물에서 한 차원 다른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며 "비명이 아닌 감정으로 볼 수 있는 공포 영화, 기묘함과 아름다움, 공포와 슬픔, 서스펜스와 사랑이 공존하는 풍부하고 윤택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했다. '기담'은 무엇보다 철저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통해, 보는 이를 현혹할 만큼 마력 넘치는 볼거리를 완성해 낸다. 안생병원이 지어진 양수리 세트장을 중심으로 인영과 동원의 집, 일본 병원의 수술실과 박 교수의 집이 구현된 덕소 세트, 청태산의 피막 오픈세트와 부천의 화신백화점 세트 등 공간들이 들어선 별도 스튜디오를 합쳐 총 1천300평 이상의 세트 규모를 자랑한다. "한 번도 보여진 적 없는 오묘한 시대였기에 내가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싶었고, 당시에 찍은 영화들은 물론 외국 영화 속 여자 캐릭터들의 말씨, 제스처 등을 연구했다"는 김보경은 사랑하면서 처절한 공포에 떠는 신비스러운 여인 김인영 역을 맡았다. 그녀는 특히 "음향과 놀래키는 공포가 아닌 사랑과 시대를 품은 '기담'의 공포가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신인에게 볼 수 없었던 진중한 무게감으로 주목을 받아온 진구는 기존의 남성적인 이미지를 탈피, 내성적이고 유약한 성격의 2년차 의대 실습생 박진혁 역으로 분했다. 그는 "완벽한 시대 고증 속 신비한 매력에 이끌렸고 특별한 영화가 나오리라 기대한다"며 '기담'을 "기력이 없고 담력이 약해도 볼 수 있는 영화, 공포보다는 슬픔이 있고 슬프기 때문에 무서운 영화"라고 소개했다. 이밖에 존경받는 유능한 의사이자, 인영의 자상한 남편 김동원 역에 김태우, 병원의 궂은 일을 도맡는 노력파 전문의 이수인 역은 이동규가 각각 맡아 열연 중이다. 현재 70%가량 촬영이 진행 중인 '기담'은 8월2일 개봉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