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 만나고싶었습니다] 채인석 화성시장

채인석 화성시장은 취임 이후 줄곧 자신을 화성시 대표사원이라 말한다. 53만 화성시민을 위해 일하는 1천400여 공직자 중 하나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 역시 시장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대표사원이라 부르곤 한다. 그런 채 시장이 지난 8월 23일 결연한 의지로 화성시청 내 브리핑룸으로 들어섰다. 해남 땅끝에서 여의도까지 522km의 국토대장정을 나서겠다고 선포한 것. 바쁜 시정업무에도 불구하고 작심하고 걷겠다는 채 시장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채 시장은 21일간의 국토대장정을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산을 오르며 체력을 다졌다. 집에서 화성시청까지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등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 53만 화성시민의 대표사원인 그가 두발로 한발 한발 왜 걸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9월 17일 채 시장을 만나 들어봤다. 길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 정말 맞다 채 여독이 풀리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21일간의 대장정은 생생했다. 인터뷰 중에도 마치 걷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길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딱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하하) 행군 내내 새벽 5시~6시부터 하루를 시작했는데 편한 잠자리와 따뜻한 식사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마을회관에서 자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곤 했습니다. 잠자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먹는 것도 눈에 맨 먼저 들어 온 식당을 이용하거나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손수 빨래도 다했으니 그야말로 고생길이었죠. 삼복더위에 왜 사서고생을 하셨느냐고 묻자, 더 물을 수 없을 만큼 명확한 답변이 돌아왔다. 세 가지입니다.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국비 지원, 화성호 수질보전을 위한 해수 유통 보장, 국립자연사박물관 화성 유치 관련 국책사업으로 사업의 정책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화성은 1천 년 전 실크로드의 종착점이 전곡항이었고, 일제강점기 제암리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다. 또 현대삼성기아를 비롯한 1만5천개의 기업체가 소재한 국내 성장률 1위의 도시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차별로 본의 아니게 화성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 채 시장의 판단. 그래서 전국 지방지치단체장으로선 처음으로 시위 아닌 시위를 하게 된 것이다. 필요한 국책사업 되찾아 오겠다 채 시장의 첫 번째 걱정거리는 화성시 매향리다. 625 전쟁 이후 55년간이나 전쟁의 아픔이 현실로 남아 있는 곳, 바로 쿠니사격장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시는 이곳에 평화생태공원을 조성키로 하고 발전종합계획에 반영했으나, 정부의 과도한 지방비 부담으로 사업에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에 채 시장은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용산공원 조성의 경우에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을 제정해 1조5천 억 원의 사업비 전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보다 지원이 절실하고 국가차원의 보상이 당연한 지역임에도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조성 사업비 2천18억 원 중 국비 지원은 고작 424억 뿐으로, 같은 미군반환공여지임에도 각각의 사업 추진에 있어 서로 다른 가치와 기준을 정해 또 다른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중앙 정부의 이중잣대 각성 촉구 21일간 대장정 동안 지지서명 동참 부탁 채 시장은 매향리 평화생태 공원 조성에 있어 용산공원 조성과 같이 특별법을 제정, 사업비 전액을 국비로 지원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시장은 또 화성호 담수화 결정 철회 및 해수유통 요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난 1996년부터 담수화를 시작한 시화호는 2000년까지 수질보전을 위해 4천500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2000년 담수화를 포기한 바 있습니다. 또한 새만금의 경우 지난 2011년까지 수질개선사업으로 1조 4천568억 원을 투자했으며, 오는 2020년까지 2조9천500억 원을 추가로 투입할 예정임에도 담수화 결정을 유보한 상태입니다. 실패한 정책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화성호의 수질보전과 생태계 보전을 위해 해수유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3가지 현안 중 마지막은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지 선정 문제다. 채 시장은 정치적 논리에 따라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세종시에 내정하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 화성시를 비롯해 서울 용산구와 노원구, 인천 강화군 등 지금까지 국립자연사박물관 유치를 희망하고 있는 자치단체들의 노력을 무시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특히, 경기개발연구원의 타당성 용역에 따르면 화성시가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의 최적지로 평가를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화성시는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그동안 경기도와 함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세계3대 자연사박물관과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업무협약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에 정치적 논리로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지를 선정하려는 중앙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채 시장은 최소한 지금까지 노력한 자치단체들이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절차적 타당성을 요구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토대장정을 두고 자칫 행정공백 속에 무책임한 눈요기성 이벤트가 아니냐 비난의 화살을 보내기도 했다. 채 시장은 개의치 않았다. 지방자치단체의 한계라는 벽을 허물고 화성시의 발전에 필요한 국책사업을 되찾아 오겠다는 본질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국토대장정 중 만난 사람들 채 시장은 지난 8월 24일 해남 땅끝마을에서 쉼 없이 퍼붓는 빗줄기 속에 첫 발을 내딛었다. 여의도까지는 522km. 하루 평균 20~30km을 걸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채 시장이 내건 화성시 3가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국토대정정 둘째 날인 25일 박철환 해남군수를 시작으로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임정엽 완주군수, 문규현 신부, 김완주 전북도지사, 황명선 논산시장, 성무용 천안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김문수 경기도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 지역 상관하지 않고 국토대장정의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며 지지를 부탁했다. 만남이 많아질수록 채 시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지역 단체장들도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별 현안사항은 다르지만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느끼는 시정운영의 한계가 있음을 서로 공감하게 됐습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출을 시작한지 만 17년이 지났으나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정책 결정과 예산집행 시스템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지방자치단체장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개선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부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토대장정 11일차에 충청남도에 진입했다. 일정의 반을 소화했다. 그런데 발에 생긴 물집과 근육통 등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채 시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작이 반이고 일정의 반을 소화했으니 완주가 멀지 않았다는 신념으로 걷고 또 걸었다. 국토대장정 18일차, 마침내 채 시장이 가장 보고 싶은 53만 화성시민이 살고 있는 화성시에 진입했다. 시민들이 반갑게 채 시장을 맞아주었다. 병점역 인근에 접어들자 300여 명의 시민들이 채 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겨운 고향의 농악가락과 시민들의 그간 힘든 이정에 수고했다고 보내는 박수소리에 잠시 울컥했습니다. 역시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내가 화성시민 모두의 바라는 바를 바로 알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구나 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채 시장의 걷기는 국토대장정 21일차인 9월 13일 오전 국무총리실을 찾아가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국비 지원 등 3가지 현안 해결을 위한 전국민 지지서명부를 전달함으로써 끝이 났다. 채 시장은 많은 시민들의 응원과 전국적으로 지지를 보내주신 국민 덕분으로 522km의 국토대장정을 완주할 수 있었다며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3가지 현안 해결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글 _ 화성강인묵 기자 imkang@kyeonggi.com

차창 너머로 추억이 지나간다

아버지 빛바랜 유언장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원산시 유동 101번지 주소를 들고 경원선 열차는 신바람이 난 듯 녹슨 목청을 돋우며 북으로 달려간다 (이하 생략) 경원선 신탄리역의 시인이 머무는 자리, 신탄리역 쉼터에 붙어 있는 김경문 시인의 시구다. 시인은 결국 철길이 끊겨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가지 못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역이 바로 경원선 최북단 종착역이다. 신탄리역은 1913년 7월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호장(철도역의 한 종류. 보통 여객이나 화물이 아닌 열차의 교행을 위해 설치된 역이나, 여객 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음)의 역할을 했다. 해방 전까지는 그렇게 유지됐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북한에 배속되었다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9월 28일 남한에 의해 수복되어 1961년 지금의 역 건물이 지어졌다. 역 건물이래야 예나 지금이나 아담한 간이역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 작은 역에 내려 인근 고대산에 오른다. 그러면서 고대산이 거친 남성미를 지녔다고들 한다. 어떤 남성미이기에 거칠다고 했을까? 신탄리는 본래 새숯막이었다. 옛날 숯을 구워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이 살았다. 철도가 생기자 더 크게 번창해 마을 이름도 한자로 바꾸어 신탄리가 된 것이다. 요즘 지명 바꾸기 운동도 한창인데 여기도 새숯막으로 환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역이지만 여러 가지 풍경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역 구내에 있는 작은 박물관이다. 이름하여 나의 살던 고향인데, 그렇다고 대단한 소장품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농기구들이 대부분이다. 신탄리역 이전은 대광리역이다. 이곳은 군인들이 많은 지역 특성상 사병들이 주 이용고객이다. 주말이면 자주 보이는 것이 면회 온 연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장면으로 예나 지금이나 애틋함은 똑같은 모습이다. 몇 년 전 역 앞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던 한 커플을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눴는데, 제대 후 홍대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서는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날려 왔다. 엄청 흐뭇했다. 역세권이라 말할 것도 없지만 대광리역 앞마을은 신탄리 보다는 크다. 맛집도 많고 다방도 많다. 특히 토끼탕과 보신탕 음식점들이 유명하다. 그런 대광리역이니 평일에도 나이든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의 맛있다는 음식점보다 값도 싸고 맛도 좋다. 왜 그런지 알아보려 근처 다방에 들리니 종업원들이 모두 늙수그레한 중년들이다. 우선 그것부터 왜 그러냐 물어보니, 그냥 요새 그렇단다. 그리고는 여기 와서 일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얘기는 꺼내봐야 헛일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근처 군부대에서 나오는 잔반 때문에 개 사육이 늘어나고 그래서 보신탕이 성업하게 되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에 방점을 두어야 할 듯. 그나저나 동네 어른들은 보신탕 드시고 어디다 힘을 쓰시는 건지? 잇따라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입가에 절러 미소가 돌았다. 글사진 _ 김란기(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이정환(미아리사진방 대표작가)

떠나자~ 하남 위례길로!

동부 수도권의 관문인 하남지역에 자연과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걷는 코스가 생겼다. 한강의 수려한 자연경관 감상은 물론 남한산성과 초기백제 도읍지 위례성(BC18~AD475년)의 숨결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등산(걷기) 코스다. 하남시는 총 연장 64㎞의 하남 위례길 4개 코스를 11억원을 들여 정비한 후 지난해 7월 15일 개방했다. 시는 4개 위례길 코스에 이정표 94개와 종합안내판 11개, 표찰 300개, 안내 리본 2천개 등을 설치했다. 총 64㎞ 4개 코스 시원한 한강 풍광구비구비 달콤한 사랑의 전설 1코스 _ 위례사랑길 산곡천~도미나루터~팔당댐 5㎞ (2시간 코스) 하남시 검단산과 한강 사이로 국도 45호선이 지난 2004년 개통되기 전에 창우동에서 아랫배알미를 오가던 옛길을 복원한 코스다. 한강을 따라 오가던 세미선과 상선이 머물던 창모루 나루터, 삼국사기의 도미부인 설화를 간직한 도미나루터 등이 있다. 창모루 나루에는 닭의 벼슬과 부리를 꼭 닮은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닭바위가 버티고 있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줄기가 합쳐져 살아가는 부부나무로 불리는 소나무 한 쌍의 연리목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미부인 설화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제격인 코스다. 정조를 지키고자 왕권에 도전한 도미부부의 사랑의 기려 로마 폰테 밀비오 다리와 비슷한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두는 이벤트 공간도 조만간 생긴다. 겨울에는 이 길목에 부부의 연을 맺으면 평생을 함께 사랑을 나누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큰고니가 많게는 100여 마리씩 날아와 장관을 이룬다. 옛날 한양을 떠나던 신하들이 절을 했다는 배알미를 지나 팔당댐에 이르면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를 구경할 수 있다. 2코스 _ 위례강변길 산곡천~경정장 공원~나무고아원~선동축구장 13.5㎞ (4시간 코스) 도도히 흐르는 한강의 풍경을 보면서 시원한 강바람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해마다 4~5월 쯤이면 수초가 있는 강 습지에서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수많은 잉어떼들이 산란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드넓은 둔치는 봄에는 벚꽃을, 가을에는 60만㎡의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이뤄 계절별로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1980년대 골재채취로 사라졌다가 퇴적작용으로 되살아난 12만㎡의 당정섬과 버려진 나무들의 새 삶터 28만㎡의 나무고아원은 도시 근교에서 보기 힘든 자연의 경이를 느끼게 해준다. 드넓은 호수와 잔디가 어우러진 130만㎡의 미사리 경정공원과 선사유적지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주변 미사리 카페촌은 덤이다. 3코스 _ 위례역사길 광주향교~이성산성~동사지 선법사 5.8㎞ (2시간 코스) 하남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는 코스다. 초기 백제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성산성(사적 422호)과 춘궁동 동사지(사적 352호)와 석탑(보물 12호와 13호), 선법사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981호) 등 유적이 즐비하다. 마애약사여래좌상 옆에는 온조왕이 마셨다는 어용샘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 최대 향교였던 광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 성현에게 존경심을 표해야 했던 하마비(下馬碑) 등도 전해 내려오는 등 옛이야기가 쏠쏠하다. 광주향교는 조선시대에 지금의 성남, 광주, 남양주, 강동, 강남, 송파를 관장하던 전국에서 제일 큰 향교였다. 현재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의 기능, 공자님과 그 제자 우리나라 선현께 제사를 드리는 제향의 기능, 지역사회에 공자의 도를 널리 알려 교화시키는 지방문화센터의 기능, 예절지킴이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4코스 _ 위례둘레길 덕풍골~남한산성~샘재 39.7㎞ (7시간30분 코스) 이성산과 금암산, 남한산성 연주봉과 성곽, 벌봉, 객산 등에서 지금의 하남과 옛 백제의 왕도를 한 눈에 느끼며 둘러볼 수 있다. 대부분 남한산성 축조 때부터 이미 만들어진 산길이며 걷기에는 대체로 평이하다. 이 길의 매력은 길을 따라 만나는 볼거리와 전설이다. 호랑바위는 옛날 덕풍약수터 동남쪽 20m 지점에 논자락을 끼고 있는 큰 바위를 말한다. 옛날 정서방이라는 아주 힘센 장사가 이 바위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영물을 잡은 죄로 관가에서 곤장을 맞았으나 호피를 관가에 바쳐 상금도 같이 받았다는 전설이 구전(口傳)으로 이어지고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 옆 봉암성에 있는데, 남한산성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공격할 때 이곳의 산봉우리로 아군이 피신했는데 갑자기 수없이 많은 벌이 날아와 청군을 쏘아 아군의 승리를 도왔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해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산행 길에 갈증을 풀어줄 샘과 하산 길에 배고픔을 달래줄 토속 맛집들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글 _ 하남강영호 기자 yhkang@kyeonggi.com

[경기초대석] 김정수 수원 권선구청장

여말선초 집현전 직제학이었던 이고(李皐)가 벼슬을 버리고 수원의 탑산(지금의 팔달산)에 은거하며 수원천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 것을 권했다. 그의 높은 인품에 감화되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착한 사람들과 착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동네가 바로 수원 권선구(勸善區)다. 관할면적 47.29㎦에(수원시의 39%) 33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권선구는 수원시 4개구 중 가장 넓은 지역과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한다. 그만큼 김정수 권선구청장의 임무가 막중하다. 지난 2월 14일 취임 후 정확하게 7개월이 되는 날인 9월 13일 오후 집무실에서 김 구청장을 만났다. 33만 권선구민의 새로운 파트너 김 구청장은 경기도 이천이 고향이다. 1977년 공직에 입문해 94년 4월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문화관광과장, 총무과장, 상수도사업소장, 행정지원국장을 지낸, 그야말로 수원통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업무추진력과 리더십을 갖춘 현장행정 전문가로 직원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특히 청소행정과장과 환경국장 등을 지내며 수원천 복원사업과 하수처리고도화시설, 숙지매탄 공원 조성 등 수원의 대표적인 친환경사업을 도맡아 했다. 염태영 수원시장과도 남다른 인연을 자랑한다. 염 시장이 삼성을 나와 환경운동을 시작할 당시 주무계장으로 만났다고 한다. 지금은 시장과 구청장으로 서수원권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며 뛰어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33만 명의 권선구민과 323명 공직자들의 새로운 파트너를 자처하며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권선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권선구는 신도시급 택지개발로 인한 주택공급 견인지역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 만큼 구청장으로서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올해 입주가 시작된 호매실 택지개발지역을 비롯해 세류1동 재건축사업 등 많은 현안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호매실 지역은 약 2만여 세대를 건립 중으로 2015년까지 입주예정이나 LH공사의 호매실 향토문화회관 건축이 불투명해지고 학교 건립 및 개교가 늦어짐에 따라 주민들의 불만이 예상돼 입주 종합대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김 구청장은 LH공사와의 지속적인 연석 협의를 통해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또 입주 시기에 앞서 현장 종합민원실 설치, 신속한 청소 해결 대책, 기동불편처리반 등 종합대책반을 운영하겠다는 복안이다. 단순한 전달 방식 복지서비스 거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체감복지 실천 섬세하고 정확한 맞춤형 복지행정 김 구청장은 보여주기식 행정과 생색내는 사업을 지양한다. 권선구의 경우 기초생활수급자가 2천844세대로 수원시내에서 가장 많은 세대가 거주하고 있어 복지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섬세하고 정확한 복지행정이 요구된다. 김 구청장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복지사각지대를 없애고 맞춤형 복지행정을 지향하고 있다. 구의 행정적 지원뿐 아니라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형식의 복지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는데 그 대표사례가 바로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나들이, 어르신들의 일거리로 연결되는 노인정 텃밭 가꾸기 등이 있습니다. 또 지난 2월 이마트 서수원점과 희망 나눔 프로젝트 사업 협약체결을 시작으로 4월에는 농협수원유통센터와 사랑채움 프로젝트 사업협약을 체결해 독거노인 주거환경 개선 및 도시락 지원, 희망나무 심기, 저소득층 김장 및 연탄 나누기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관 입장에서 전달 방식의 복지서비스가 아닌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맞춤형 복지를 선보이고 있는 것. 특히 도농복합도시의 특징을 감안해 세대 간의 화합과 공감대 형성을 위해 지난 4월 어린이집 21개소와 경로당 21개소가 1:1 결연을 체결했다. 어린이들이 경로당을 방문해 재롱잔치를 선보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안마를 해드리며 경로효친사상을 몸소 체험하는 사업도 반응이 아주 좋다. 또 취약계층의 사회적 소외감을 근절하고 구정참여를 위해 다문화가정 김치왕 선발대회, 외국인과 함께 하는 민간 치안조직 구성 등 다각적인 시책을 전개하고 있다. 민관 거버넌스 행정의 장 권선구는 청개구리가 서식하는 등 천혜의 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칠보산 그린벨트와 비행장 고도 제한 등으로 개발에 커다란 제약을 받아 주민들이 소외감을 크게 느끼는 지역이기도 하다. 구 도심권에 비해 복지문화사업과 녹지환경사업 등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 또 구민체육대회를 타 구에서 해야 할 만큼 여러 기반시설을 아직도 확충하고 있는 단계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 구청장은 권선구를 이름 그대로 착한 사람들이 모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동네로 만들기 위해 밤을 낮인 양 일하고 있다. 훈훈한 정마을의 전통 그대로 주민 중심 마을르네상스 사업 추진 권선구는 칠보산과 4개 하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수원의 미래를 위해 적절한 보전과 개발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충분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생태하천관리와 완벽한 재해 예방을 위한 민관 거버넌스 행정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단번에 도시의 기반시설이나 하드웨어를 확충할 순 없다. 그 와중에 권선구는 전통과 추억이 사라지고 있는 산업화 사회에서 훈훈한 정과 마을의 전통을 지키고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마을르네상스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염태영 수원시장의 역점사업인 마을 르네상스 운동은 주민 스스로 문화와 예술, 건축과 환경 등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삶의 공간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시민공동체 회복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매년 공모를 통해 주민들이 제출한 사업계획을 심사하고 선정해 각각 500만~4천만 원 정도씩 예산을 지원합니다. 권선구는 칠보산 마을신문 창간 사업으로 올해 마을 르네상스평가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김 구청장은 단기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대보름 소원을 비는 칠보산 달집축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고색동 코잡이놀이, 세류3동 주민들의 수원천변 축제 등 지역 전통문화를 살리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느끼는 소외감을 세심한 관심으로 스마트한 행정, 발 빠른 행정, 친절하고 신뢰받는 행정으로 채워드리겠습니다. 믿고 따라와 주시면 아직까지 환경이 열악한 서수원을 수원의 중심, 경기도 속 최고의 환경도시로 만들어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일하겠습니다. 김정수 구청장은 수원의 마지막 잠재력 보고로 통하는 권선구의 힘찬 비상을 위해 오늘도 현장행정으로 그 힘을 보태고 있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길을걷다] 인천 만석·화수·북성부두

부두는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고깃배들이 쉼 없이 드나들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사람냄새, 사람 사는 곳임을 진하게 풍긴다. 이곳은 어민들의 고단하고 거친 삶이 녹아 있다. 그래서 풍부한 어족자원은 그들에게 행복이고 희망이다. 인천을 대표하는 만석, 화수, 북성부두는 60~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어시장이었다. 연안부두가 생기고, 부두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어시장의 명성은 사라졌고 추억의 명소로만 남았다. 최근 한적하고 적적했던 이들 부두를 생활형 어시장으로 조성, 옛 영화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어부들이 만선의 노래를 부르고,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대는 부두의 영화가 멀지 않아 보인다. 만석부두활어냉동어류건어물 파는 수산물직매장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오가는 고깃배, 낚싯배, 화물선만이 적적한 바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60~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종도를 왕복하는 정기선이 다녔고 수없이 많은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펄떡거리는 고기들을 내놓으면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으로 부두는 늘 생기가 넘쳤다. 만석부두의 쇠락은 70년대 후반 어업은 축소되고 주변에 큰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부두 주변엔 레미콘 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고깃배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적어지면서 어부들은 더 이상 작은 포구를 찾지 않았고 연안부두나 소래포구로 어업의 터전을 옮겼다. 만석부두가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 지난 6월 수산물직판장이 생기면서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만석부두 수산물 직매장은 170㎡ 규모로 인천수협에서 운영한다. 이곳에선 냉동류, 건어물, 조기류, 선물용품을 판매한다. 품목도 김, 미역, 조기, 오징어, 냉동꽃게 등 90여 가지에 달한다. 11~12월 김장철에는 강화 새우젓, 덕적도 까나리액젓 등 지역의 특화상품도 판매할 예정이다. 미역, 멸치, 굴비 등은 이곳의 인기목록이다. 굴비의 경우 서해인근에서 잡아 전남 법성포에서 작업을 마쳐 선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저렴하다. 만석부두는 앞으로 어시장으로 꾸며 고깃배들이 잡아온 생선을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회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만석부두 수산물직매장은 현재 편의차원에서 공영주차장을 한시적으로 무료 개방하고 있다. 화수부두서해바다에서 갓 잡은 활어 경매 두산인프라코어, 일진전기 등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 벽을 끼고 한참을 들어가야 작고 아담한 화수부두를 만날 수 있다. 주변은 아직도 개발의 뒷전에 있었던 탓인지 옛 포구의 정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한때 인천 제2의 어항이었던 화수부두는 70년대 초 연안부두가 생기고 어시장이 들어서면서 추억의 부두가 됐지만 70년대만 해도 연평, 백령도 근해에서 잡은 생선의 집하 부두였고 새우젓 전용 고깃배들이 입항할 정도로 새우젓 시장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어선들이 늘 빽빽하게 들어찼고 만선의 기쁨을 누렸다. 화수부두도 70년대 조성한 연안부두가 시민들의 인기를 얻고 인천제철이 화수부두 앞 해면을 매립하면서 점차 어업기지로써의 기능을 잃어갔다. 화수부두를 살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지난 6월 화수부두에 수산물유통센터가 건립돼 서해 앞바다에서 잡은 꽃게, 생새우, 주꾸미, 우럭, 장어 등에 대한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수산물경매가 이뤄지면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두는 생기를 되찾고 있다. 화수두부도 어시장으로 조성한다. 야시장처럼 생선도 판매하고 좌판에 앉아 회도 먹을 수 있는 관광형 어시장이다. 화수부두에 어시장이 생기면 동구, 서구, 중구시민들은 소래까지 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싱싱한 물고기와 회를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구는 화수부두 활성화를 위해 부두로 들어오는 도로를 넓히고, 셔틀버스 운영, 공영주차장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북성부두파시처럼 배에서 싱싱한 물고기 직거래 북성부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가는 길엔 백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는 큰 공장이 육중하게 서 있어 공장 너머로 어디에 바다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두는 대한제분 뒷 편에 숨어 있다. 지금은 옛날부터 이곳을 아는 사람들과 이국적인 풍경을 찍는 사진작가들에게만 알려진 공간이 됐다. 북성부두에서는 바다에서 갓 잡아온 싱싱하고 펄떡거리는 생선을 현장에서 살 수 있다. 평일엔 10여 척의 고깃배들이 부두에 배를 대고 손님을 기다린다. 싱싱한 고기를 살 수 있다는 매력으로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바다의 향내를 가득 품은 생선은 맛이 달 뿐만 아니라 목에서 살살 넘어간다. 북성부두도 한때 꽤 규모가 큰 포구로 명성을 누렸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수산물공판장과 어시장이 들어선 뒤 1980년대까지 그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어시장이 이전하고 부둣가가 공장용지로 바뀌면서 사람이 찾지 않는 부두가 됐다. 북성부두는 아직까지 도심 속 어촌의 생생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뙤약볕 아래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과 파시처럼 배에서 물고기를 파는 장면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북성부두도 11~12월 김장철에는 젓갈시장이 열려 젓갈을 사려는 시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어민들의 값진 노동이 부두를 풍요롭게 한다. 글 _ 이용남 굿모닝인천 편집위원 사진 _ 안영우 자유사진가

[프리즘] 최승대 경기도 행정2부지사

경기도 북부청을 이끌고 있는 최승대 행정2부지사. 온화하고 강직한 성품의 최 부지사는 도시건축 등 기술 분야 다방면의 업무 경험을 토대로 기술직 업무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이다. 연세대 토목공학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0년 기술고시(15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경기도 건설본부장, 파주부시장, 화성부시장, 경기도 건설교통국장, 안산부시장, 용인부시장, 남양주부시장 등 관리자로서의 과정을 두루 거쳤다. 이 같은 경력을 높이 평가한 김문수 경기지사는 기능중심으로 변경된 북부청을 이끌 수장으로 그를 택했다. 9월 14일 오후 집무실에서 최 부지사를 만나 그동안의 북부청 살림 이야기를 들어봤다. 30년 공직철학은 국민을 위한 봉사도민 삶속에 정답 있어 현장행정 종결자 최 부지사의 30여 년 간 공직 철학은 국민을 위한 봉사이다. 국민봉사의 의미를 묻자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면서 그러려면 책상에만 있어서는 안 되고 현장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너무 평범한 답이 아니냐는 기자의 되물음에 책상에서의 행정과 현장에서 행정은 그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며 직접 보고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행정이 나올 수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태풍에 의한 집중호우로 연천 300㎜ 등 일부 북부지역에 물폭탄이 쏟아졌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최 부지사도 수해복구현장을 다니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는 취임식을 마친 다음날부터 수해복구 현장과 재난 예방시설, 산사태 취약지역 등을 중점점검하고 풍수해를 대비한 긴급회의도 여러 차례 개최해 상황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래서인지 최 부지사의 하루 평균 이동거리는 300㎞에 달한다. 현장행정 종결자라는 별칭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올해 유례없던 불볕더위는 도의 정책을 빛나게 했다. 도는 폭염특보가 발효된 7월 24일 이전부터 선제적 폭염대책을 수립, 실시했다. 민관협력 거버넌스를 만들고 노인정 등 무더위 쉼터를 방문했을 때 전기료 부담으로 냉방장치를 가동 못하는 사례를 확인하고는 긴급하게 전기료 지원을 확정하기도 했다. 최 부지사는 발 빠른 대응이 행정안전부의 전국적인 경로당 냉방비 지원을 이끌어 내는 결과로 이어졌고 특히 지난해는 경기도에서 39명의 인명피해와 하천범람, 도로유실 등이 발생하는 등 수해피해가 매우 컸는데 올해는 풍수해 인명피해 제로화(Zero화)를 이뤄냈다며 자긍심을 나타냈다. 북한이탈주민 공무원 채용 선도적 역할 경기도는 접경지역으로서 전국 북한이탈주민 2만3천 여 명 중 5천7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굶주림에 지쳐 빵을 찾아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최 부지사는 이들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최 부지사는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인 조기정착을 위해 취업지원, 사회적 인식개선, 생활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며 앞으로 통일전사가 될 북한이탈주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 가능한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도는 취업지원을 위해 맞춤형 취업지원과 함께 올해 신규로 탈북 구직자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매칭하고 사후관리까지 원스톱으로 책임지는 취업SOS반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 또 취업SOS반은 미취업 북한이탈주민에게 적성진단, 직업훈련, 일자리 매치,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취업 토털서비스를 제공해 인기다. 이와 관련 도는 정착의 기본인 고용안정과 확대를 위해 전국 최다인 18명의 북한이탈공무원을 채용했으며 올해 안에 58명으로 확대해 북한이탈주민의 공직 진입에 선도적 역할을 할 계획이다. 최 부지사는 남북한이 지리적, 이념적으로 단절된 만큼 사회적 인식개선이 힘들 것이라는 우려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전국 최초로 통일가족 만들기와 남북 청소년 우리 문화 알아가기 한마당 등을 추진하는 한편, 연중 도민들을 대상으로 북한바로알기 교육, 북한이탈주민을 위해 성공비전캠프, 문화창작대회 등을 개최해 성공 롤-모델과 정착 수기 등을 공유하는 등 북한이탈주민 정착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며 특히 북한이탈주민 돌봄상담센터는 증가하는 북한이탈주민 수요에 맞춰 의정부에 이어 수원에도 개설해 서비스 접근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도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사회에 빠르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쳐나간다는 계획이다. 경기북부 도로철도 등 기반시설 확충위해 국비 확보 총력 경기북부지역 교육도시 전환 올인 북부청 역할이 기능 중심으로 변경되면서 최 부지사의 역할 역시 더욱 중요해졌다. 이에 대한 견해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경기북부지역의 인구는 318만 명으로 도 전체 인구 1천232만명의 25.8%를 차지하고 전국 시도 중 서울, 경기 남부, 부산, 경남에 이어 5위에 해당합니다. 남북부 간 행정 중복기능을 최소화해 도민 행정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북부청을 기능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것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현재 북부청에는 평생교육국(2009년)비상기획관(2011년)이 신설되는가 하면 본청에 있던 교통건설국이 지난 2010년 올라오고 청사명칭도 제2청에서 북부청으로 변경됐다. 올해는 균형발전국과 축산산림국이 신설됐다. 이에 대해 최 부지사는 김문수 지사의 경기북부 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분석했다. 김 지사는 재선 취임식을 의정부 가능역에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무한돌봄센터와 찾아가는 도민안방을 도내 최초로 북부지역에 설치했다. 또 찾아가는 실국장 회의도 북부지역에서 50% 이상 개최하고 있다. 그럼에도 무늬만 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평생교육국의 꿈나무 안심학교는 교과부의 방과 후 학교사업 모델로 선정돼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경기도 내로 이전을 희망하는 13개 대학 중 10개 대학을 경기북부지역에 유치했다며 경기북부를 군사도시에서 교육도시로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했다. 또 올해 경기도 도로분야 자체사업비 1천989억원 중 북부지역에 50.2%인 1천억원을 집중 투자하고 있다며 도는 오는 2014년까지 경기북부지역에 17개 노선 102㎞를 추가로 건설한다고 북부지역의 기반시설을 확충할 계획을 밝혔다. 경기북부지역 발전방안에 대해 최 부지사는 지역 간 연계성 강화를 위한 간선 도로망 확충, 통일대비 평화철도 인프라 구축, 주한미군 반환공여구역 효율적 활용에 따른 지역발전 기반 구축, 접경지역을 통일시대에 대비한 신성장 동력 육성, DMZ일원 사업의 체계화와 DMZ 가치의 세계화 추진 등을 꼽았다. 최 부지사는 내년에도 경기도 재정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며 경기북부지역의 도로, 철도 등 기반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비 확보가 최우선이다. 국비 확보대책회의를 수시로 개최해 중앙부처 반영 현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있으며 북부청 중점 관리사업 중 아직 미 반영된 39개 사업 6천333억원의 국비를 받기 위해 간부는 물론이고 담당 공무원들에게 사업관련 지역구 국회의원, 도의원, 시도재정협의회, 중앙부처 등 모든 인맥을 활용해 찾아가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나 역시 국비 확보를 위해 수시로 국회와 중앙부처를 방문해 타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부지역 발전을 위해 국비를 확보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놓은 최 부지사에게서 진실성과 절실함을 엿볼 수 있었다. 글 _ 김창학 기자 chkim@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CEO성공스토리] 금속업체 25년 ‘철의 여인’ ㈜백양CMP 이정한 대표이사

팔자인 것 같아요. 여성이 기업 경영한다는 게 말이 쉽지. 5평 남짓한 구멍가게를 연매출 70억원의 중소기업으로 이끈 여성경제인, 이정한 ㈜백양CMP 대표이사(51)의 첫 마디치곤 좀 뜻밖이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금속업체를 운영해 온 25년 남짓한 세월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좋은 기억만 남더라는 이 대표는 성공한 여성 CEO의 그럴듯한 이야기 대신 시종일관 기름기 하나 없이 짧고 솔직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업체를 탄탄하게 다져온 경영 노하우가 진솔함이라는 사실이 배어 나왔다. 햇수로 3년째,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장까지 맡으며 여성 경제인의 어려움 덜기에 나선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어느 때보다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9월 중순, 이 대표의 분 단위 스케줄을 쪼개고 쪼개 시흥시 정황동 시화산업단지에 위치한 ㈜백양CMP를 찾았다. 1989년 안산서 금속원자재 판매로 출발 작업장 곳곳에서 금속 철판을 갈고 닦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빨갛고 파란 불꽃을 튀기며 직원들은 저마다 업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작업장 한편에 있는 사무실도 시끄럽긴 마찬가지.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업무 중이던 이 회장은 대장간이죠, 뭐라고 운을 떼며 익숙한 소음이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백양CMP는 1989년 안산에서 첫발은 뗀 금속가공회사다. 말이 좋아 회사지, 비철금속 등 원자재를 판매하는 도매상 수준으로 직원은 1명에 불과했다. 거래처에서 판을 접어 달라, 일부를 잘라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자 원판을 가공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10여 년 전부터 이 대표가 직접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업체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손으로 꼽을 정도였던 거래처는 100여 곳으로 늘어났고 우량기업체와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내실이 다져졌다. 현 직원은 43명, 지난해 매출 68억원으로 10년 만에 5배의 성장을 일궜다. 이력을 훑어보면 타고난 기업가 같지만 사실 이 대표의 꿈은 순수문학 작가였다. 글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여러 책을 탐독했고 학창시절에는 글짓기 대회 상을 휩쓸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노벨문학상을 타서 고향인 충남 아산 현충사 길을 카퍼레이드 하는 꿈을 꾸곤 했다. 70년대 후반 무협지가 성행하기 시작한 시기에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무협지 출판사에 취직했다. 글 솜씨를 인정받으면서 당시 6만~7만원 선이던 공무원 월급의 4배 정도인 29만원을 급여로 받았다. 1년여 후 글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국립극장에 새로 일자리를 얻은 후 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故 차범석 선생에게 7년여 간 드라마작법을 배우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과 작가 공부를 병행했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가 되풀이되면서 어려워진 살림 탓에 꿈을 접고 직접 사업에 나섰다. 89년,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여성 기업가 중에 살림이 넉넉하고 가정이 화목한데 사업을 시작한 일은 거의 없어요. 다들 우여곡절을 겪고 또 평지풍파 속에서 떠밀리듯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환경이 그러니까 오히려 단단해지는 게 있어요. 힘들고 어려우니까 어찌 됐건 다져지는 거죠. 그 과정은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요 어려서부터 가져온 꿈까지 접어가며 시작한 사업에 대해 이 대표는 자신의 말마따나 단단하고 겸허하게 답했다. IMF에 거래처 줄도산 속 부도위기신뢰 하나로 버텨 사업을 시작하긴 했지만 오는 손님만 받다 보니 매출 규모가 작아 아들 하나 키우기도 빠듯했다. 남편은 사업에 관심이 없었고 수줍음 많고 말수 적은 성격에 홀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남들보다 곱절은 어려웠다. 고집이 세고 참을성이 발군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70kg이 넘는 철판과 파이프를 트럭에 싣고 직접 운전하는 것은 물론 금속을 자르고 굽히는 일도 해야 했다. 손이 베이고 멍드는 게 일상이었다. 직원이 퇴근하고 나면 5살 난 아들을 조수 삼아 일하던 시기로 수면시간이 4시간을 넘은 적이 없었다. 업체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던 97년, 갑자기 찾아온 IMF에 거래처가 줄지어 부도를 맞으면서 회사도 부도를 맞을 위기에 처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더는 못 버티겠어서 바다를 찾은 적이 있어요. 뛰어들려는데 빚 갚으라며 돈을 빌려준 가족들, 예전 직장동료들이 떠올랐어요. 내가 죽으면 빚은 어떡하나, 이렇게 폐를 끼쳐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돌아왔죠. 이제야 그 빚도 다 청산했네요 그렇게 빚 지고는 못 사는 투철한 사업 마인드로 목숨을 건진 뒤 2000년대 들어선 직접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당시 직원 수 10명, 연매출 10억원 안팎으로 늘었지만 기업이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앉아서 오는 손님만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한 공격적 마케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팅약속을 잡고 가도 외판원 취급을 당하며 30분이 넘게 기다려야 했고 도면이나 볼 줄 아느냐는 비아냥거림은 예사였다. 직원들 식사 준비를 하다 앞치마 차림으로 영업에 나섰다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직원과 제품에 대한 신뢰였다. 여성이라서 홀대받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해요. 남성 위주의 기업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함께 일하는 직원을 믿고 제품의 질을 자신하지 못한다면 여성기업인으로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세일즈 할 때 제품이 맘에 안 들면 돈을 안 받겠다고 말하며 거래를 성사하곤 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온 거죠. 그의 사업장엔 불량제품은 만들지도, 납품하지도 않는다는 현수막이 크게 내걸려 있다. 단가를 낮추고 납기일을 준수하며 제품을 잘 만든다는 철칙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그의 경영 비결이다. 2014년 시화 MTV 단지로 확장 예정 ㈜백양CMP는 2003년 ISO 9001 품질경영시스템과 ISO 14001 환경경영 시스템 인증을 받으며 품질과 환경경영에 대한 검증을 받았다. 또 2007년에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과 유망중소기업 인증을 받은 데 이어 2008년에는 기획재정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9년에는 건설업등록을 통해 공개입찰의 참여 기회를 얻게 되면서 활로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 2014년에는 현재 규모(2천58㎡)의 두 배 이상인 4천958㎡ 규모의 시화 MTV 단지로 확장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이 대표는 업체 경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장으로서 여성 경제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3년째 앞장서고 있다. 남성, 여성 따져가며 경영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그 한계도 뚜렷하고요. 여성 경영인 업체의 제품을 살펴보면 섬세하고 꼼꼼한 여성 특유의 장점이 잘 살아나 있죠. 모두가 어우러져 같이 꿈꾸면서 불황을 타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성 CEO의 본보기로서 다른 여성 경영인의 견인차 역할까지 하는 이 대표.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구멍가게를 유망 중소기업으로 일으킨 그의 눈빛에서 여성 기업이 하나둘씩 도약하는 앞으로의 20년이 보이는 듯했다. 글 _ 성보경 기자 boccum@kyeonggi.com 사진 _ 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기업탐방] 현대제철 인간과 기술의 조화, 그리고 도전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현대제철은 국내 철강산업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역과 인재를 키우며 향토기업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현대제철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속에 유일한 자원이었던 철스크랩(고철)을 재활용하기 위해 1953년 설립한 대한중공업공사가 모태다. 철스크랩을 녹여 건설 자재인 철근형강 등 봉형강류 부문이 사업 초기 핵심 제품이었다. 녹색성장이 화두인 작금에 현대제철은 국내산 고철 55%, 수입 고철 45%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재탄생 시키며 환경 지킴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현대제철 인천공장은 자원 재활용을 기본으로 환경변화에 맞춰 선택과 집중으로 과감한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 1961년 인천 중형압연공장에서 ㄱ형강 생산을 시작으로 1965년 12월 전자 강판용 규소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968년 3월 국내 최초로 고장력 이형철근을 개발해 제품 다양화를 실현했다. 1980년대에는 H형강 제조사업과 주강, 단강 제조사업에 이어 1990년대에는 스테인리스 냉연강판 제조사업에 첫발을 내딛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강원산업 합병과 함께 중공업 사업에 뛰어들고 한보철강을 합병하며 열연강판 사업에도 진출했다. 인천지역 향토기업국내 철강업계 선두주자 현대제철은 세계일류상품을 선정하기 시작한 첫 해인 2001년에 H형강과 열간압연용 원심주조공구강롤(HSS Roll) 2개 제품을 세계일류상품 반열에 올려놨다. 이후 2005년 하반기 선미주강품, 무한궤도, 부등변 부등후 앵글, 강널말뚝 등 4개 제품이 세계일류 상품에 선정되면서 국내 철강업체 가운데 가장 많은 일류상품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 일류상품 중 특히 선미주강품은 대형선박의 선미(船尾)를 구성하는 구조물로 형상 및 강도 상의 유지를 위해 거의 모든 대형 선종에 사용되고 있다. 최근 컨테이너선을 중심으로 대형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주강품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선박 수주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또 다른 선박용 제품인 부등변 부등후 앵글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된 것으로, 대형선박의 선미(船尾)를 구성하는 구조물이다. 무한궤도는 굴삭기의 하부구조로 세계에서 26%가량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최근 인천공장에서 160톤급, 170톤급에 이어 180톤급의 초대형 라다혼(선미주강품) 생산에 성공, 120억 원의 수출 효과를 거두게 됐다. 이번 생산에 성공한 183톤 중량의 라다혼은 2pcs로 분할 제작 후 일체형으로 조립하기 위한 정밀한 치수검사, 품질적으로 완벽한 구조용접 등의 고도의 검사 및 용접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이다. 자원 재활용을 바탕으로 한 도전적인 신규 사업을 발굴하고 있는 현대제철은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등 신흥 시장의 철강재 수요 증가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신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자원재활용해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녹색성장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은 철강재 수요 선점을 위해 지난 7월 미얀마 국영 그룹 MEC(Myanmar Economic Corporation) 등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현지 수요가들을 방문하고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세계 최대 봉형강 수출업체인 현대제철은 이미 지난 2009년 미얀마 정부와 철도청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3천700만 달러 규모의 레일 공급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항상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며 성장을 지속해온 원동력이라며 앞으로도 다양한 신제품 개발과 수출 확대를 통해 인천 경제 중심축으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제철 인천공장은 인천지역의 대표적 향토기업으로 사회공헌에도 열심이다. 200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저소득층 건강보험료 지원사업은 인천공장의 대표적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하나다. 2005년 1천 만 원을 시작으로 매년 2천400만원씩 지원해 지금까지 총 지원액이 1억7천800만원을 넘어섰다. 약 2만 가구가 혜택을 받았고 7천 개가 넘는 기관이 지원협약에 참여하는 등 저소득층 의료복지 향상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재래시장 살리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2009년 3월 현대시장과 식재료 납품협약 체결을 시작으로 연간 3억 원 규모의 식재료를 납품받기로 협약을 맺었다. 주기적으로 재래시장상품권을 구매해 재래시장 장보기 행사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현대제철 인천공장은 2010년 인천시와 희망의 집수리 사업 협약을 체결해 동구지역 11개 동 40여 저소득층 가구에 대해 집수리를 진행했고 사랑의 책 나누기 행사도 매년 추진하고 있다. 임직원들이 뜻을 모아 2009년부터 시작한 사랑의 책 나누기 사업으로 지금까지 아동도서수필시 등 8천여 권의 도서를 모아 지역 도서관에 기증했다.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적극적이다. 2005년부터 동구지역 6개 초교를 대상으로 매년 3천 만 원씩 초등학교 급식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총 906명의 학생에게 4억2천 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앞으로도 사회 환원 활동을 더 확대하고 지역에 더 가깝게 다가서 인천의 대표적 향토기업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_ 장용준 기자 jyjun@kyeonggi.com 사진 _ 현대제철

[화보] 경기도 줌마탐험대 ‘히말라야 등반기’ 280km 끝에는 희망이 있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경기도의 위상과 한국 아줌마의 힘을 세계 만방에 떨치기 위해 지난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21일간 히말라야 마나슬루 등반에 도전했던 경기도 줌마탐험대가 마나슬루 5천150m 고지 등반에 성공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네팔 히말라야 마나슬루. 지난 8월 11일부터 28일까지 17일간 그곳을 오르내리며 15명의 줌마대원들이 걸어야 했던 거리는 자그마치 서울에서 대구까지 거리에 해당하는 280여km. 그곳에서 줌마탐험대 대원들은 40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지긋지긋하게 퍼붓는 소나기 속에서 모기떼, 거머리와 힘겨운 사투를 벌였고, 안 겪어보고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고산증의 압박을 이겨냈다. 또 소나기로 허물어진 아찔한 협곡을 뛰어넘었고, 흔들거리는 다리를 수십 개를 건넜다. 이처럼 힘겨운 관문을 모두 이겨내고 밟은 4천800m 베이스캠프와 5천150m 고지였기에 그 감동과 환희가 그토록 뜨거웠으리라. 너무나도 힘겨운 여정에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하는 대원들도 있었고, 다시는 이렇게 미련한 도전 따윈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대원도 있었다. 불가능은 없다 아줌마들의 힘 히말라야 마나슬로 등반 성공 하지만, 마나슬루와 이별한 지 20여 일이 흐른 지금 대원들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지긋지긋했던 마나슬루에서의 기억은 언젠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 벌써부터 마나슬루의 흙냄새를 그리워하고 있는 성질 급한(?) 대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힘겨웠기에 15명의 대원 모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환희를 선사했던 그곳, 마나슬루에서의 17일간을 화보에 담아봤다. 한편 경기도생활체육회가 주최하고 경기도등산연합회(회장 박흥석)가 주관한 이번 마나슬루 등반에는 고인정(경기도의원) 탐험대장을 비롯, 이병춘, 임정희(이상 수원), 강문자, 김미란(이상 부천), 강성숙, 안문숙(이상 평택), 김나현, 이병설(이상 용인), 임영복(양평), 엄영옥(가평), 장향란(오산), 주형옥(안산), 문미숙(파주), 이미재(이천) 총 15명이 참가했다. 글 _ (네팔 마나슬루)박민수 기자 kiryang@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허용선의 세계속으로 ⑨] 스리랑카 화려한 불교문화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는 많은 불교유적과 더불어 때 묻지 않은 우거진 숲, 저렴한 물가, 일 년 내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온화한 날씨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자연 상태에서 표범, 곰, 코끼리 등 많은 야생동물로 볼 수 있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과 동물의 살생이 금지돼 있어 규모가 큰 국립공원이 13개나 된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물은 코끼리다.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체격이 작은 편으로 주로 집단으로 이동하고 생활한다. 인공 저수지 근처에서 신선한 풀을 먹으며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한 반면 스리랑카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번성하고 있다. 인도 아쇼카 황제의 아들인 마힌다 왕자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한 후 불교는 스리랑카 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대중포교에 중심을 둔 대승불교와는 달리 계율엄수를 중요시 하는 소승불교이다.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수도로 현재와 과거가 잘 조화된 도시다. 시내에는 현대식 쇼핑센터, 다양한 종교건물, 서민들의 시장과 현대식 건물 등이 공존하고 있다. 국립박물관과 네덜란드시대의 박물관이 콜롬보 시내에 있어 과거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그리스인, 로마인, 페르시아인들은 콜롬보의 항구를 무역항으로 이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해안을 지배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656년 무자비한 포위공격으로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점령했으나 한 세기 반 뒤에 영국에 넘겨줬다. 1948년 2월 4일 스리랑카는 외세를 물리치고 비로소 독립국이 됐다. 스리랑카는 한반도 3분의 1 크기에 불과하지만 수려한 자연 경관과 2천5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스리랑카의 고대와 중세기 시대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대개 왕궁과 사원 그리고 저수지 등인데 이들 모두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거나 유적들이다. 5세기경에 세워진 시기리아는 사자 상이라고도 불리는데 정글 속 200m 높은 바위에 세워진 왕궁이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을 이용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주위를 둘러 해자가 있고 성채가 있으며 바위 양쪽에 정원이 있고 거대한 사자의 발톱이 정상을 오르는 계단에 수호 상처럼 버티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천년의 도시로 정교한 도시 계획과 정상에 왕궁을 건축한 기술은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정글저렴한 물가온화한 날씨 표범곰코끼리 등 야생동물의 천국 시기리아의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는 바위의 아슬아슬한 곳에 그린 페레스고 여인상들이다. 반나체의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담불러라는 사원은 기원 전 1세기경 산언덕 위에 위치한 바위 속에 세워졌다. 역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담불러는 시기리야에서도 볼 수가 있다. 다섯 가지 유물 중 기원전에 새긴 양각 글자들과 15m 크기의 와신 부처상과 150개의 불상, 그리고 내부 천정과 벽에 그린 여러 형태의 탱화가 있다. 담불러 석굴사원은 기원전 1세기에 신할라 왕 왈라감바후(Walagamba hu)에 의해 세워졌다. 왕은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서 타밀군의 침략으로 이곳으로 피신한 뒤 왕권회복을 꾀했다. 왈라감바후는 타밀 군을 무찌르고 다시 왕좌에 오른 후 감사의 뜻을 모아 이곳에 사원을 건축했다고 한다. 담불러 석굴사원은 하나의 바위 속에 동굴을 파서 만든 절이며, 석굴 사원 중 세계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5개의 석굴 면적이 2천㎡이고, 150개 이상의 부처상이 있으며, 길이가 14m나 되는 와불의 모습도 인상 깊다. 켄디는 아름다운 언덕 위의 도시로 포르투갈, 영국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는 1815년까지 수도였다. 아름다운 호수, 중세기 미술작품들, 강, 차 그리고 향료 농장 등이 있다. 부처님의 진신 치아를 보존하고 있는 달리다 말리가워는 이곳의 최고 유적지이다. 해발 500m가 넘는 산악 도시이며 싱할라 족속의 원래 모습과 전통이 남아있다. 캔디에는 모두 486개의 역사적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캔디는 매년 8월 열리는 페라헤라 축제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스리랑카의 국보 1호 달라다 말리가와 사원 근처에서 15일 동안 성대하게 열리는 축제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축제 기간에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한 코끼리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수백 명의 댄서들이 스리랑카 전통 춤을 선보인다. 역사적인 도시인 골이라는 중세기 도시는 현재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로 되어 있다. 해변 주위에는 전통적인 조각품과 보석 그리고 바틱 등을 비롯한 상품들도 많이 있다. 아유레다라는 전통적인 이 나라 고유의 약초를 사용하는 마사지도 있다. 해변을 걷다보면 붉은 태양 아래 드넓은 인도양 바다에서 외다리 낚시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외다리 낚시(스틸트 피싱, stilt fishing)는 얕은 바닷가에서 센 물결 때문에 장대를 박아놓고 거기 매달려 고기를 잡는 독특한 방식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외다리 장대에 매달린 늙은 어부의 모습이 처연하게 다가온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일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여행 칼럼니스트 허용선 중앙대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7년 전국대학미전 문교부장관상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보도 관련 공로 체육부장관상, 2004년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그 동안 9회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세계 90개국, 1천여 곳 이상을 취재했다. 사진작가가 겸 여행 칼럼니스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출간한 책만도 20권에 이른다. [Interview] 티샤 위제라트네 주한 스리랑카 대사 자연문화유산 보고 친절한 미소 큰자랑 티샤 위제라트네(Tissa Wijeratne) 주한 스리랑카 대사는 지난해 6월부터 주 스리랑카 대사로 근무하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국제경제관계학을 졸업하고 스리랑카에서 국제학 석사를 수료, 일본 도쿄 Foreign Service Training Institute에서 1년 동안 연수를 했다. 최근 한국어 공부에도 집중하고 있는 티샤 위제라트네 대사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주한 스리랑카 대사로 재직한지 14개월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친절함과 성실함, 그리고 부지런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다양한 인프라, 편리한 대중교통, IT, 및 통신수단의 발달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리랑카가 불교국가로 번성할 수 있는 요인을 무엇으로 보는지 인구의 70% 가까이가 불교신자이나 스리랑카는 실제로 불교 이외에도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종교인으로서 각자의 삶의 방식을 표현합니다. BC3세기에 불교가 전파된 이후, 왕조 차원에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함에 따라 자연히 불교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스리랑카는 불교문화권 사회이기 때문에 마을 마다 보리수나무가 불교 상징물들이 많고 아잔타(Ajantha)와 엘로라(Ellora)의 기념비들은 과거 불교문화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한국에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인들에게 스리랑카 불교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불치사에는 전 세계의 많은 불교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불치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가 모셔져 있습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8년에 성스러운 도시 캔디(Sacred City of Kandy)라는 타이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캔디가 세계유산이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치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리랑카의 자랑거리를 소개해주세요. 스리랑카는 자연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1년 내내 22~35도를 유지하며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해변이 아름다우며 백사장, 세계에서 가장 큰 고래도 3km만 바다로 나가면 관찰할 수 있으며 야생동물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1년 내내 축제가 끝이지 않아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축제를 즐길 수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해 시기리라와 같은 세계 8대 불가사의와 같은 역사적인 유물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스파(SPA)와 골프 코스 등도 자랑거리이며 무엇보다도 스리랑카 사람들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친절한 미소가 가장 큰 자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