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파주 한향림도자미술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도 가을이 깊었다. 갈색 연잎이 가득한 호수를 중심으로 조성된 통일동산 갈대광장공원을 지나 노을동산공원으로 걸음을 옮기니 언덕에 하얀 건물이 나타난다. 2018년 10월 개관한 한향림도자미술관은 국내 유일의 현대도예 전문 사립미술관이다. 이정호 이사장과 한향림 관장이 설립한 ‘Jay & Lim Collection’을 통해 1987년부터 수집해 온 1천여점의 국내외 현대도예작품을 중심으로 인문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도자예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만나 볼 수 있다. “1층과 2층의 전시실은 미술관 소장품과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주제별로 전시해 도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경혜 학예사의 안내로 미술관을 둘러본다.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건물답게 미술관 내부 공간의 분할과 연결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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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향림도자미술관 전경. 홍기웅기자

 

■ 도자예술의 첨단을 만나는 곳

 

황종구 작가(1919~2003)의 ‘청자상감운학문병’과 ‘청자상감불꽃문화병’은 한향림 관장이 주목한 작품이다. 구름과 두 마리의 학이 새겨진 늘씬한 청자의 자태와 활활 타오르는 불꽃 문양이 그려진 화병의 빛깔 또한 이제까지 봤던 청자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곳은 설립자 이정호 이사장과 한향림 관장이 신념을 갖고 30여년 동안 수집한 도화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입니다.” 모이를 쪼는 토종닭 한 쌍이 그려진 항아리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그 옆에 놓인 작품은 운보의 아내인 우향 박래현의 ‘청화백자 추상문 과반’이다. 월전 장우성의 ‘게가 그려진 화병’과 함께 전시된 작품은 뜻밖에도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마광수(1951~2017)의 작품 ‘집 그림이 그려진 술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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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상설전시관 내부 모습. 홍기웅기자

 

‘그릇에서 예술로’라는 제목이 붙은 공간에서 공동 설립자이자 관장인 한향림 작가의 작업 모습을 담은 사진과 미술관 입구에서 만난 산을 형상화한 도자 작품을 만난다. 스케치와 프랑스어로 빼곡하게 채운 작가 노트에서 작품 ‘산’에 담긴 사연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지는 다양한 전시물에서 도자에 담긴 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분방한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정점에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자리하고 있다. “피카소는 회화와 조각 작품 이외에도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이 담긴 도자기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완성품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자기 제작 과정은 노년의 피카소에게 새로운 창작 동기가 됐지요.” 피카소가 1947년부터 25년 동안 무려 4천여점의 도자기 작품을 생산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전시실에서 마주한 ‘얼굴’은 피카소의 자유분방한 예술혼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미국 작가 피터 볼커스(1924~2002)의 ‘더미-왕의 실내악’은 도자예술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거칠고 두텁게 처리한 도자의 표면은 도자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가볍게 파괴한다. 이어지는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천의 얼굴을 가진’ 도자의 변신에 거듭 놀란다. 악보가 담긴 상자를 왜 여기에 놓았을까. 허리를 숙이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 또한 도자로 만든 작품이다. 여선구 작가의 ‘포이즌 아이비’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는 작품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특별기획전 ‘장 샤를 프롤롱죠展’의 주제가 궁금하다. “연극 배우이기도 한 장 샤를 프롤롱죠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도예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960년부터 도예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4년부터 도자기로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 일에 몰두했는데 이번 전시는 자유로운 곡선에 의한 형태 속에서 얇을수록 극대화되는 긴장감을 통해 도자 재료가 주는 연약함의 미학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향림 관장의 스승이기도 한 프롤롱죠의 작품은 도자의 두께가 유리처럼 얇고 표면을 장식한 그림이 동양의 수묵화 혹은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단순함으로 감동을 끌어낸다. “도자기는 현대에 이르러 다른 장르와 결합하며 그릇의 용도를 벗어나 회화, 건축도자 등 상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예술로 변화하며 미래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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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열린 오제성 작가의 ‘로우파이 하이테크’전 작품들. 홍기웅기자

 

■ 흙과 디지털의 만남

 

한향림도자미술관은 올해 어떤 전시로 관람객과 만났을까. ‘갤러리H 특별전 박동엽 도예전-뿔 달린 주전자’(2월), ‘최아인 개인전-Frequency’(3월), ‘권희원 개인전-Pink Phobia’(4월), ‘emotion-도자 3인전 박한나 이은형 문지현’(7월), ‘천종업 개인전-Vibe Shift_흐름의 변화’(10월)로 이어진다. 11월에는 2024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박동엽 도예전-재인식의 미학’과 ‘파주시 시민 제안 우수프로그램-마음C 프로젝트’와 ‘장준호 개인전-도마의 환상’에 이어 ‘제11회 하모니 국제도예 프랜드십-하모니에 스며들다’를 열었다.

 

‘흙과 디지털의 만남, 하이브리드 원더랜드(Hybrid Wonderland)’ 세 번째 초대전인 ‘로우파이, 하이테크(LO-FI, HI-TEC)’ 오제성 작가의 개인전이 15일부터 진행되고 있다. 이 특별기획전에는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한향림 관장의 인사말을 들어본다. “2024년 한향림도자미술관은 발달하는 현대사회와 예술의 접점에 주목해 흙으로 만든 작품과 함께 디지털 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하이브리드 작품으로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세 명의 작가를 초대해 전시 및 다양한 활동을 펼칩니다.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디지털 세계로 나아가는 시대에 기술과의 협업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파주시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23일(토) 오후 1시부터 오제성 작가가 직접 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3D 출력 거푸집을 이용한 나만의 좌상 만들기’를 지도하고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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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상설전시관에 전시돼 있는 도예 작품들. 홍기웅기자

 

■ 도자, 흙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다

 

미술관에 들어설 때부터 궁금했던 작품이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 조각 작품이다. 작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살펴보니 여인의 허리가 없고 엉덩이도 이상하다. “위생도기를 사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빌마 빌라베르데의 작품입니다.” 2002년 제작한 ‘왕과 왕비’란 작품은 더욱 파격적이다. 변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을 발처럼 디디고 있는 왕비와 변기에 얼굴을 담은 왕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허리를 감싸고 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작품이지만 소변기에 ‘샘’이란 이름을 붙여 출품한 마르셀 뒤샹보다는 훨씬 친절한 작품이다.

 

1층 햇볕이 잘 드는 공간에 마련한 도자 전문 체험장을 둘러본다.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일일 체험과 월 단위의 정규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영상 강의와 세미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단체가 체험하기에 좋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던 이지희 교육사가 체험 공간을 소개한다. ‘도자 아카데미’는 흙을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창조의 공간이다. 일정한 비용을 내면 잠시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다. 특수 색연필로 도안을 그려 완성하는 ‘나만의 머그컵’과 물레를 돌리며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보는 ‘물레 체험’이나 코일링, 핀칭, 판성형 등 다양한 도자 기법을 응용해 캐릭터 접시를 만들어 보는 체험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로비에 있는 ‘갤러리H’는 작가와 전공자, 취미 활동 단체 등의 대관 전시로 운영된다. 미술관 3층에 있는 ‘카페 스카이’는 헤이리의 전경과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파주 헤이리는 한향림도자미술관과 한향림옹기박물관을 비롯해 백봉한국장신구박물관, 블루메미술관, 세계인형박물관,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 한국근현대사박물관, 화이트블럭 같은 품격 높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즐비한 예술마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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