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1. 수원화성박물관

소나무가 아름다운 박물관 입구에 ‘2024년 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임전필승! 조선의 무예서와 무예24기’를 알리는 깃발이 걸려 있다. 수원시의 한복판, 수원화성의 중심에 자리 잡은 수원화성박물관(관장 한동민)은 전국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 가운데 하나다. 평일에도 1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군자는 싸우지 않으나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정조가 즉위 초에 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정조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주도하고 최정예 부대 장용영을 창설한 임금이 아닌가. 특별전답게 볼거리가 풍성하다. ‘조선의 무관 선발과 무예’에 관련된 유물을 둘러보고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가 전시된 곳으로 이동한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 낭청 한교(韓嶠·1556~1627)가 편찬을 시작해 1598년 10월 완성한 무예제보는 국가유산 보물이다. 프랑스에만 있고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 귀중한 서적을 수원화성박물관이 입수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400년이 넘었으나 잘 보존돼 그림과 글씨가 선명한 것도 다행스럽다. 12년이 지난 1610년 최기남이 편찬한 ‘무예제보번역속집’을 비교해 본다. 1790년 펴낸 무예도보통지와 1785년 펴낸 ‘병학통’은 군대를 개혁하고 군사를 강화하기 위한 정조의 열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무예제보의 손자뻘인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관 백동수가 힘을 합쳐 편찬해 충실한 책의 내용 및 글씨와 그림의 아름다움이 최고 수준이다. ‘뎡니의궤’에 실린 ‘동장대시열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성 동장대에 친림한 정조가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이 그림은 조선의 군사훈련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말을 탄 장용영 친군위와 선기대가 학익진을 펼친 앞뒤로 원진(圓陣)과 방진(方陣)을 펼친 군사들의 모습에서 임전필승의 기운이 느껴진다. 평소에 보기 힘든 군사와 무예, 도검 같은 귀중한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즐겁다. ■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2층 왼편에 있는 상설전시관인 ‘화성축성실’로 향한다. 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입구 오른편에 백마를 타고 황금 갑주를 입은 정조대왕의 행차를 입체적으로 표현해 220여년 전 조선으로 안내한다. 정조 시대의 기록문화는 현대인들도 놀랄 만큼 상세하고 풍부하다. 공사 종합보고서라 할 ‘화성성역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더불어 기록문화의 백미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유럽에서도 화성성역의궤만큼 상세하게 기록된 공사보고서를 찾기 어렵다. 총 184권 100책이나 되는 문집 ‘홍재전서’를 남긴 정조는 출판문화를 한 차원 높였다. 63권에는 정조가 직접 지은 ‘성화주략’이 실려 있다. 정조는 성곽의 크기와 높이, 주요 재료, 해자와 참호의 규격, 터를 쌓는 방법 등 화성을 쌓기 위한 여덟 가지 기본 방안을 제시한다. 물건을 운반하는 수레 유형거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와 성벽 쌓는 방식까지 제시할 정도로 정조의 성격은 치밀하다. ‘수원화성 공사를 중지시키는 윤음(綸音)’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1794년 전국에 흉년이 들어 과연 공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한다. 신하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일꾼들을 위해 공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건의하지만 정조는 굶주린 백성 구제가 먼저라며 공사 중지를 결정한다. ‘윤음’은 어려운 백성을 향한 정조의 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호랑이 두 마리가 수놓인 흉배를 가슴에 단 무관의 모습이다. 화성 성역을 감독했던 수원 출신 무관 김후(1751~1805)의 초상화다. 1796년 화성이 완공되자 정조는 김후에게 길이 잘 든 말 한 필을 특별히 하사하는데 이를 기념해 이 초상화도 그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편찬한 ‘뎡니의궤’는 현륭원 행차와 혜경궁 홍씨의 잔치, 수원화성 축성 등의 내용을 날짜 순서대로 기록했을 뿐 아니라 채색한 아름다운 그림이 실려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 8일간의 화성 행차와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 화성문화실의 입구에 병풍 그림이 보인다. 1795년 을묘년 윤2월, 8일간 정조의 화성 행차와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을 보여준다. 을묘년의 8일간 화성 행차는 조선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흥겨운 축제였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한 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벌인다. 낙남헌에서 지역의 노인을 초대해 양로연을 베풀고 밤에는 횃불을 켜고 끄는 군사훈련을 민관군이 함께 벌이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연이어 벌인다.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의 무사들은 평소 무예와 진법을 익히고 선진 농법으로 국영 농장인 둔전을 경영한다. ‘봉수당진찬도’는 1795년 윤2월13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펼쳐진 혜경궁 홍씨의 성대한 회갑잔치 장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잔치의 주인공 혜경궁 홍씨의 자리는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조는 어디에 있을까. 병풍이 세워진 안쪽에 호피(虎皮) 방석이 깔린 곳이 정조가 앉은 자리다. 봉수당은 1795년 윤2월13일 조선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검무’가 공연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791년 73세의 번암 채제공 모습을 담은 ‘채제공초상 시복본’은 초상화의 백미이다. 화성 성역 총리대신으로 화성 축성을 이끈 주인공이며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직계 후손이 번암 선생의 유물을 기증해 박물관 건립의 초석이 됐다니 수원화성박물관은 복이 많다. 화려한 오사모에 분홍빛 단령을 입고 화문석 위에 앉아 있는 채제공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채제공이 자필로 ‘임금이 하사한 부채와 선추는 물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군주의 은혜’라고 쓴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채제공의 왼쪽 눈이 약간 이상하다. 초대 수원유수 채제공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임명한 내용의 ‘전령(傳令)’을 살펴본다. 산처럼 보이는 정조의 ‘수결(手決)’도 눈에 들어온다. 장용영 장관 오의상이 받은 ‘고풍(古風)’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담겨 있다. 장창과 등패를 비롯한 무예24기의 다양한 무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은과 백옥으로 장식한 ‘대모백은장 옥구보도’는 품격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보검이다. ■ 즐거운 배움터 1층 상설체험실과 정기교육실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교육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수원화성이 품은 옛이야기’를 비롯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백진주 학예연구사의 소개말을 들어본다. “2009년 4월 개관 때부터 유물 전시 위주의 운영을 넘어 전시와 교육, 체험이 어우러지는 박물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특히 어린이 관람객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이 최근 기획한 굵직한 전시회만 꼽아도 여럿이다. ‘번암 탄생 300주년 기념 수원화성박물관·실학박물관 공동기획전-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를 비롯해 ‘정조대왕 서거 220주기 기념 사진전-융건릉 원찰 수원 화산 용주사’, ‘테마전-1950년대 수원, 전쟁의 상흔과 또 다른 시작’, ‘정조대왕 탄신 27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독서대왕 정조의 글과 글씨’, ‘세계유산축전 기념 테마전-위대한 기록과 수원화성’ 등 주제와 내용이 다양하다. 공방거리에 있는 열린문화공간 ‘후소’의 전시와 운영도 박물관이 맡고 있다. 10대 공립박물관으로 선정되고 해마다 우수박물관으로 선정되는 수원화성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 파주 한국근현대사박물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남북이 분단되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2년 만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온 국토는 잿더미가 된다. 폐허의 나라에서 1950년대에 태어난 우리 앞 세대는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불과 40~50년 만에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 대국, 기술 강국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지난 50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 근현대 자료 7만여점을 테마로 엮은 입체형 박물관 우리 앞 세대가 살았던 그 시절이 궁금해 파주 헤이리를 찾았다. 헤이리 예술마을 4G 초입에 있는 붉은색 3층 건물이 ‘한국근현대사박물관’(관장 최봉권)이다. 짐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손수레를 끌고 미는 사람 형상의 조각과 ‘추억의 골목 동네 달동네’라 새긴 팻말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짐자전거부터 똥오줌을 담는 통 ‘장군’이 실려 있는 나무지게까지 1960~70년대 물건들이 연출하는 풍경이 재미있다. 1964~65년에 생산된 CT-85 경운기는 근현대사박물관의 설립 이념과 철학을 보여주는 특별한 유물이다.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에 선정된 유물인데 우리나라에 단 두 대뿐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모습을 한 유일한 경운기라고 합니다.” 최준호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안내문을 살펴본다. “농업 근대화의 역군이 된 경운기-낫과 지게가 전부였던 빈곤의 나라에서 1962년 경운기 도입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술 국가 대한민국이 되다.” 트랙터에 밀려났지만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경운기의 기능과 역할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근현대사 100년의 생활사관-한국근현대사박물관’이라 새긴 현판이 걸린 박물관 입구는 50년 전 과거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50여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은 매표소 옆에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1960년대 전후의 동네를 고스란히 재현한 지하 1층의 풍물관, 학교와 주변 등을 중심으로 문화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지상 1·2층의 문화관,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역사관과 추억의 소장품관은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6·25전쟁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풍물관’에 들어서면 상가가 쭉 늘어선 1960년대의 저잣거리와 달동네의 생활 풍경이 실감 나게 펼쳐진다. ■ 기술 강국으로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지게와 낫, 고무신이 전부였던 빈곤의 나라, 국민소득 60달러, 찬물에 보리밥 한 덩이 말아먹고 흘린 땀이 얼마던가. 그러나 자식들 키우는 보람에 힘든 줄도 몰랐지.” 현수막에 적힌 글귀가 그 시절 부모들의 마음을 대변해 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삶의 흔적들이 물지게와 물통, 박으로 만든 물바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엄마 등에 업힌 아이는 지쳐 잠이 들었고, 지게를 진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살펴본다. ‘솜틀집-이불 꿰매 줍니다’라 쓰인 글귀와 ‘말표신발’ 광고가 붙어 있는 전봇대와 일제강점기에 사용한 우체통이 반갑다. 문득 집배원의 자전거에 걸린 우편가방 속이 궁금해진다. ‘올해는 더 일하는 해-증산·수출·건설’이라 새겨진 간판 옆에 ‘멸공방첩’ 간판이 걸려 있다. ‘투약일 3월25일 오후 7시 다 같이 쥐를 잡자!’ 한날한시에 쥐약을 놓자는 농림부 포스터의 글귀가 흥미롭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란 유명한 구호,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부통령 후보 장면의 얼굴이 실린 벽보와 ‘나라 위한 팔십 평생 합심해 또 모시자’라는 구호와 ‘리승만’, ‘리기붕’이라 적힌 벽보도 눈길을 끈다. 두 개의 벽보는 4·19혁명과 직접 관계되는 역사적 유물이다. 시계나 반지 같은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전당포와 만화방을 구경하다 보면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추억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검정 고무신과 빨랫방망이, 풍구, 대패, 먹통 등 옛날 물건이 가득하다. 만물상 하나를 몽땅 옮겨다 놓은 듯싶다. 약속 장소로 애용되던 ‘역마차 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옛 노래가 들린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최갑석의 ‘고향에 찾아와도’는 1964년에 발표한 노래다. 청춘남녀의 데이트 장소였던 금촌극장에는 국산 만화영화 ‘쾌남 홍길동’이 상영 중이다. 영화관 매표소 앞 양철통에 연탄재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영화를 개봉한 시기가 겨울인 모양이다. ‘저 하늘에 슬픔이’나 ‘돌아오지 않는 해병’처럼 인기를 끌었던 작품의 포스터를 살펴본다. 그 시절 활약한 윤정희 같은 인기 영화배우가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을 뚝딱 만들어냈던 양장점 안을 들여다본다. ‘외상 사절’이란 글씨가 메뉴와 함께 붙어 있는 국밥집의 풍경도 연탄불처럼 따뜻하다. ‘점방’이라 불리던 구멍가게에 붙은 작은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서랍장 위에 올려진 이불과 베개, 앉은뱅이책상에 꽂힌 몇 권의 책과 라디오, 창틀에 끼워진 학생모, 입학식 날 어머니와 함께 찍은흑백 사진이 보인다. 밥상 위에 놓인 보리쌀로 만든 개떡이 담긴 그릇이 그 시절 서민의 고단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5일마다 열리던 장날의 풍경은 언제봐도 정겹다. 두부 한 모가 15원 하던 시절, 장날은 구멍이 난 그릇을 땜질하는 땜장이도 기다리던 날이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딱지만 치다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우는 아이 곁에 놓인 시루에는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있다. 가로등이 켜진 좁고 굽은 골목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자취방이 나온다. 연탄 몇 개와 세숫대야가 놓여 있는 출입구를 지나 머리를 조심하며 작은 방안을 들여다본다. 이소룡 사진과 쌍절곤이 걸려 있는 걸 보니 이 방의 주인은 청년이다. 겨울이면 연탄가스를 걱정해야 하지만 자취방은 꿈을 키워 가던 청춘의 소중한 공간이다. ■ 우리의 현재 모습을 성찰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곳 1970년대 초등학교 앞 풍경이 펼쳐진다. 문방구와 서점, 만화방이 들어서 있는 골목에는 풀빵 장수와 번데기 장수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교과서와 상장, 학원 수강증 등이 전시돼 있는 여자상업고등학교 교무실 옆 교실에는 책상마다 타자기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노래가 전시 공간을 더욱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나오는 곳은 새마을지도자의 집이다. 의자에 앉아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라는 글씨가 걸려 있는 새마을회관에도 가난을 극복하려는 열망이 가득하다. 역사관에서 고종과 김구,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까지 근현대사 주요 인물과 대통령 사진 및 관련 자료를 살펴본다. ‘추억의 소장품관’에서 1966년 금성사가 생산한 우리나라 최초 흑백 텔레비전을 발견한다. 저가 정책으로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과 경쟁하던 금성은 ‘엘지’란 이름으로 지금 세계 최고의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자제품 하나에 기술 강국으로 성장한 비결이 들어있는 것이다. 1960년대 전후의 도시를 통째로 옮겨 놓은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은 한 달 평균 1만여명의 관람객이 찾는 곳이다. 박물관을 천천히 돌아보면 우리의 지난날이 얼마나 궁핍했는지, 왜 졸업식 날에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었는지, 그 가난을 딛고 어떻게 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는지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은 지난날 우리 앞 세대들이 땀과 눈물로 이룩한 성공의 비결이 담긴 추억의 물건을 거의 모두 만나 볼 수 있는 놀라운 공간이다. “우리의 옛 모습을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설립자 최봉권 관장의 말처럼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통로가 되고 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여주박물관

남한강을 따라 천년 고찰 신륵사와 나란히 자리한 여주박물관은 하늘빛이 고운 가을에 찾으면 더욱 좋다.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출발해 1997년 문을 연 ‘황마관’과 2016년 문을 연 신관 ‘여마관’이 오누이처럼 정답게 마주 보고 있다. ■ 100년 만의 귀향-역사를 시민 곁으로 ‘검은 말’이란 뜻을 가진 ‘여마관’에 들어서자 ‘보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가 관람객을 반긴다. 3천230자로 된 비문에는 고려의 국사로 활약한 원종대사의 탄생과 출가, 당나라 유학 과정, 귀국 후 국사로 책봉돼 활동하다가 입적하기까지의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 높이 5.8m, 무게 4t이 넘는 이 거대한 탑비가 왜 박물관 안에 모셔졌을까. 조원기 학예연구사가 이 탑비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여주시 북내면 고달산 자락에 있는 국가사적 제382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원종대사탑, 석조대좌를 비롯한 불교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1915년 봄 원종대사탑비가 넘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졌는데 깨진 탑비를 서울로 옮겨졌지요. 여주박물관은 2010년부터 탑비를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합니다. 고달사지에는 비신을 복제해 탑비를 복원하고 원래의 비신은 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기로 문화재청과 합의한 것입니다. 비신이 해주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중국을 통해 북한의 해주석을 수입해 국가무형문화재 석장을 모셔 와 글자를 새긴 일은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2014년 8월에 완성된 비신을 귀부와 이수에 조립해 복원 사업을 완료하고 2016년 7월14일 신관 여마관 개관에 맞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비신이 100년 만에 여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주박물관이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펼친 이 사업은 문화재 복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 여강에 새긴 여주의 역사와 마주하다 2층 상설전시관에서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난다. 전시관 벽에 새긴 ‘여주, 강에 새긴 역사’라는 글귀는 남한강을 젖줄로 삼은 여주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만난 세 가지의 유물에도 사연이 풍성하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원향사지 청동소종’은 국내에 몇 점 없는 유물로 미술사적 가치도 높다. 은으로 만든 병과 잔에는 무슨 사연이 담겼을까. “여주 출신인 김좌근은 세도정치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그가 70세 됐을 때 고종이 하사한 것입니다.” 병 표면에 임금이 내려준 보물이란 뜻의 ‘어사지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주읍’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도자기는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술을 담았던 술병이다. 1872년 만들어진 ‘여주목지도’는 여주의 지리와 역사를 당대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다.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에서 찾아낸 불에 탄 쌀 한 톨에도 엄청난 사연이 담겨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여주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강가에 모여 반달돌칼을 만드는 모습, 들판에서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토기는 청자와 백자로 진화한다. ‘천년의 숨결을 심다’는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18세기 여주의 풍경은 어땠을까. 여러 척의 황포돛배가 강 위에 떠 있고 나루터에는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시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형 그림이다. 여강에서 잡히는 생선 중 으뜸이 ‘금잉어’이며 장터에는 가장 고가로 팔리던 상품이 ‘새우젓’이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 역사를 빛낸 인물들과 만나다 구름과 두 마리 학을 금실로 수놓은 흉배가 화려한 단령이다. 왕실 종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운학흉배의 주인공은 이연(1647~1702)이다. 전시된 단령은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 상태가 좋다. 선조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광해군 때 공신에 오른 윤승길(1540~1616)의 초상 앞에 선다. 쏘는 듯한 눈빛과 자연스럽게 뻗친 무성한 수염이 윤승길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성군 세종의 ‘영릉(英陵)’과 북벌의 군주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는 산천이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해 조선의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던 고장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왕비를 배출한 사실도 여주의 자랑이다. “조선 왕비는 8명, 통일신라와 고려까지 포함하면 14명이나 됩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고종황제비 명성황후 민씨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왕비들이다. 명성황후가 쓴 한글 편지를 살펴본다. 전시물 아래에 ‘한글을 사랑한 왕비-손편지 쓰기’ 코너를 마련해 둔 것도 재미있다. 여주를 빛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박물관은 임진왜란 육지의 영웅 원호장군, 조선을 감동시킨 여주의 효자 길수익, 한말 전국연합 의병부대 총대장 이인영, 일제강점기 여주의 자선사업가 이민응을 네 분을 소개한다. 영상물을 통해 네 분의 생애를 살펴보며 여주의 정신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도화서 화원 정수영의 작품으로 18세기 신륵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 배를 타고 강에서 그린 듯 우뚝한 전탑과 황마(黃馬), 여마(驪馬)가 나온 마암(馬巖)이 시원스럽다. 옛 그림으로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시간도 재미있다. ‘삶을 꽃피운 강 여강 예찬’이란 표현에서 여주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향심이 느껴진다. ■ 나라를 되찾고 역사를 바로 세운 여주 사람들 사각형의 가죽가방, 나침반, 휴대용 돋보기, 지갑, 이발 기구, 벼루, 주판, 여러 종류의 도장이 전시돼 있다. “독립운동가 청사 조선환 선생(1875~1948)의 유물입니다. 2020년 10월 선생의 손녀 조주현씨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지요. 청사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신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고 한국광복군 창설에 헌신하는 등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입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시절 중국에서 찍은 흑백사진에서 선생의 꼿꼿한 지조가 느껴진다. 1948년 10월7일 선생이 운명하자 임정 요인을 비롯한 동지들이 나서 장례식을 거행한다.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의 제문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무서워했다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친필로 된 만장도 있다. ‘우인(友人) 김창숙 통곡(痛哭)’이란 만장에 쓰인 글귀에서도 동지를 먼저 떠나 보낸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청사 동지야말로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진정한 애국자라 하겠나이다”로 시작하는 김구 선생의 제문도 감동스럽다. 여주가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여주박물관이 새롭게 밝혀낸 것이다. 이포에서 3천여명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복대리에서 1천600명, 복내면에서 1천여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등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한다. 일제는 이포의 만세운동을 ‘광포’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할 정도다. 황마관은 1층 ‘류주현 문학전시실’과 2층 ‘조선왕릉실’로 꾸며져 있다. 여주 출신의 소설가 류주현은 ‘조선총독부’와 ‘대원군’ 등 대하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소설가다. 류 작가가 사용한 작품 노트와 안경, 만년필 같은 유품과 작품집을 기증받아 꾸며진 전시실에는 선생이 수집한 고미술품도 볼 수 있다. 특히 김동리, 박두진, 황순원 같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글씨도 여러 점 전시돼 있다.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와 ‘열릉 참봉교지’ 같은 고문서를 전시하고 있는 조선왕릉실도 물론 찾아봐야 한다. 여주박물관은 ‘한글, 동요로 빛나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창작동요 ‘반달’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도시 여주에서 열리고 있으니 더욱 좋다. 하늘빛을 닮은 남한강의 물빛도 더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는 주말 전철을 타고 여주로 여행을 떠나 보면 어떨까.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8.김포 외할머니의 부엌

김포 대명항에서 시작되는 평화누리길 1코스는 ‘경기둘레길’이자 ‘염하강철책길’로도 불린다.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이 펼치는 여유로운 풍경을 즐기며 15분쯤 걸었을까. 어느새 ‘외할머니의 부엌’이다. 김포시 대곶면 덕포진로 103번길 95-7 언덕에 자리 잡은 생활사 박물관 외할머니의 부엌(관장 김홍선)은 백일홍, 개미취 같은 가을꽃들로 화사하다. 박물관 정원에 커다란 장독과 나란히 서 있는 석상 한 쌍이 정겹다. 박물관이 쉬는 월요일이지만 김홍선 관장이 특별히 시간을 내줬다. “커피 좋아하십니까.” 관장이 직접 내린 진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옛 생각에 잠긴다. 홍시가 달린 감나무가 장독대를 지키던 외갓집의 정겨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외할머니의 부엌에선 구수한 밥 냄새가 풍겼다. 유년의 행복한 시절로 안내하는 생활사 박물관 외할머니 부엌은 2016년 문을 열었다. ■ 행복한 밥상이 차려지는 곳 전시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간다. 문을 열자 4면 가득한 전시실에 항아리를 비롯한 옛 물건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공간에 비해 전시된 물건들이 좀 많은 듯 보이지만 깔끔하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정성이 상당한 듯싶다. 전시실 왼편에 꾸민 외할머니의 부엌부터 살핀다. 무쇠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는 어린 시절에서 봤던 친숙한 물건이 여럿 보인다. 호롱불보다 훨씬 밝아 신기하게 바라봤던 남포등이 걸려 있고, 쌀을 씻고 일어 건지는 데 쓰는 이남박과 그 곁에 여문 박을 햇볕에 말려 반으로 잘라 만든 바가지가 걸려 있다. 하얀 사기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찬장이 외갓집처럼 정갈하다. 부뚜막에는 나무로 만든 함지박과 물동이를 일 때 머리 위에 놓던 똬리와 돌을 골라내는 조리가 걸려 있다. 불을 붙일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풍구도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다. 불씨를 보관하는 불씨통은 아마 성냥이 보급되기 이전의 유물일 듯 싶다. 부엌에 놓인 물건들을 살피며 외할머니가 밥상을 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으셨을지 새삼 깨닫는다. 콩이나 녹두를 가는 맷돌보다 작은 것이 잣이나 깨를 가는 풀맷돌이다. 떡을 찌는 것을 시루라 하는데 도둑시루는 또 무엇일까. “무서운 시어머니 몰래 며느리가 떡을 숨겨 놓고 먹을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시루입니다.” 정교하게 만든 다식판이나 약과판은 골동품 수집가에게 인기가 많다. 물론 국수틀도 보기 어려운 유물이다. 눌러서 면을 뽑아야 했으니 국수 한 그릇을 만들려면 땀깨나 쏟아야 했을 것이다. 대나무를 촘촘하게 엮어 길쭉하게 만든 용수는 술독에 박아 그 속으로 괴어드는 맑은 술을 떠내는 도구다. 외할머니의 부엌에 가장 많은 전시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홍선 관장의 부인 이영선 여사가 수집한 옹기다. 알고 보면 옹기도 종류가 여럿이다. 부엌 한 귀퉁이에 둬 길어오는 물을 받아 놓고 쓰는 두멍과 장독으로 많이 사용했던 독은 가장 큰 그릇에 속한다. 배부른 독을 작게 만든 것을 항아리라 하고 항아리보다 크고 독보다 작은 크기의 오지그릇을 중두리라 한다. 물동이란 말에서 짐작하듯 동이는 물을 길어 나를 때 사용하는 그릇인데 한 말 정도 들어간다. 동이만 한 부피에 약간 얇고 넓적하게 만든 오지그릇을 자배기라 하고 기름 끼는 음식을 담아 먹는 조그만 오지그릇을 뚝배기라 부른다. 유물도 제 이름을 불러주면 더욱 정겹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봄날 쑥과 냉이를 담았던 반구형의 소쿠리조차 이제는 보기 어렵다. 싸리나 대나무 조각으로 채를 걸어 동이 모양으로 만든 바구니와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게 만든 조그만 바구니 따래끼도 있다. 식사할 때 물그릇으로 쓰는 크고 넓적한 그릇의 이름이 대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전시된 유물 중에서 금이 간 표면에 철사를 박은 독을 주목한다. 물건에도 생명이 깃든 것처럼 애지중지 아끼며 사용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 아빠! 외할머니의 부엌 가요 박물관 2층으로 이동한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맛있는 요리를 배우는 공간이다. ‘엄마는 브런치 만들고, 아빠와 나는 쿠키 만들기’는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김포시와 경기도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시민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요리를 즐겁게 배울 기회를 자주 만들었지요.” 2016년 10월,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우리 가족 요리대회’를 연 것이 그 시작이다. 앉은뱅이 밀국수를 이용해 가족들만의 특별한 요리법을 이웃과 공유하는 즐거운 행사였다. “박물관에서 제공한 앉은뱅이 밀은 아토피가 있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토종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우리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전통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였지요.” 힘들여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이웃과 나눌 때 기쁨이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엄마와 함께 열심히 요리를 만드는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이 그려진다. 김 관장 부부는 이날 부추전과 솔향 가득한 수육을 참가자들에게 선보였다. 이어 열린 제2회 가족 요리대회는 쌀 떡볶이 만들기였다. 영농조합 법인 ‘게으른 농부’가 제공한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쌀로 만든 떡으로 가족 요리대회를 연 것이다. 박물관은 이후에도 국내산 콩을 이용한 두부 만들기, 동지팥죽 만들기 같은 행사를 통해 올바른 먹거리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우리 땅에서 난 식재료는 물론이고 도마까지 국내산 소나무로 만든 수공예 작품을 사용할 정도로 준비가 철저하다. 박물관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경기도와 김포시가 지원하는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에 선정돼 ‘희망의 밥상 펼치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김포시종합사회복지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과 협력해 지원자에게 식재료를 제공하고 요리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족과 함께 줌(ZOOM)을 활용해 비대면으로 강의를 진행했지요. 희망의 밥상 펼치기는 김포시에 살고 있는 소외계층을 살피는 프로그램입니다. 선정된 재료를 미리 가정에 배송하고 각 가정에서는 화상으로 강사의 지도에 따라 만들었지요.”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고 함께 식사하면서 코로나19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기회가 됐다. ■ 밥상에서 나누는 위로와 화해의 시간 외할머니의 부엌은 잊혀 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 찰밥과 아홉 가지 나물로 한 상 차리기, 귀밝이술과 솔잎 수육 맛보기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모든 식재료는 100% 국내산이지요.” 특히 아이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붓고 있다. 아이들은 떡 만들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떡을 만들어요. 스마일 떡부터 딸기와 사과, 곰돌이 모양까지 먹음직스러운 다양한 떡이 탄생합니다.” 음식에 멋을 입히는 색도 천연색이다. 백 가지 질병을 고친다는 선인장꽃 백년초 가루로 붉은색을, 감기 예방과 기관지에 좋다는 치자로 노란색을, 시금치보다 칼슘이 11배나 높다는 보리잎으로 초록빛을 만든다. “아이들은 1층 전시실에서 옛날 부엌 살림살이를 견학하고 박물관 텃밭으로 나가 작물을 관찰합니다. 가지, 오이, 토마토, 콩은 우리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길러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만져볼 수 있어 좋아하지요. 때가 맞으면 아이들이 직접 농산물을 수확하는 경험도 가집니다.” 외할머니 부엌과 덕포진교육박물관은 가족 및 친구들과 추억을 더듬고 만들기에 좋은 박물관이다. 올가을에는 좋은 벗과 함께 김포 덕포진을 찾자. 평화누리길을 나란히 걷고 외할머니의 부엌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한겨울에 꺼내볼 따스한 추억 하나 만들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7.수원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

“전기의 발견부터 최신 스마트 기기에 이르기까지 전자산업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인류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왔습니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에서는 이러한 전자산업 혁신의 역사와 미래를 전시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엄의 명칭도 ‘Innovation Museum’으로 지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전자산업박물관인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SIM)’을 안내하는 글이다.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은 전자산업을 개척하고 주도하는 삼성전자의 성과와 의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삐삐를 사용한 ‘X세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에 태어난 ‘M세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경험한 ‘Z세대’까지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을 찾으면 이 모든 세대가 사용했던 시대별 전자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은 2014년 4월21일, ‘과학의 날’에 문을 열었습니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은 삼성전자의 역사는 물론이고 전기의 발견부터 최신 스마트 기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하는 전자산업의 역사와 혁신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입사 10년 차인 진호명 프레젠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은은한 조명을 받아 아늑한 전시실에서 처음 들려주는 것은 전기에 관한 이야기다. ‘삼성전자’라는 이름에서도 확인되듯 전기는 이 모든 전자제품의 시작이자 바탕이다. ■ 세계 최초의 제품을 만든 비결을 찾아내다 “1880년,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에디슨은 일본의 마다케 대나무를 이용해 1천200시간 지속되는 탄화섬유 필라멘트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은 1879년 발명한 최초의 백열등입니다.” 다섯 개의 꽃술처럼 생긴 필라멘트가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우리의 삶을 바꿔준 발명가의 집념과 혁신적인 발명품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게 이어진다. 모양이 조금씩 다른 백열등이 여러 개 진열돼 있다. 밝고 오래가는 전구를 만들기 위한 발명가들의 열망과 집념이 빚어낸 흔적이다. 특이하게 생긴 저 병은 무엇일까. “1744년 발명한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용기인 레이던병입니다. 레이던병은 지금 사용되고 있는 콘덴서의 원형이라 할 수 있지요.” 미국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다는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의 초상이 반갑다.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피뢰침을 발명했으니 이 공간에서 첫 번째로 만나야 할 인물이다. 1808년 최초의 전기등인 ‘아크등’과 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을 차례로 만난다. 1900년대에 생산된 백열등 여러 점도 전시하고 있다. 1관 ‘발명가의 시대’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바꾼 발명품과 발명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관은 ‘기업혁신의 시대’를 다루고 3관은 ‘삼성전자 역사관’이다. 최초의 세탁기 앞에 선다. 1874년, 미국의 월리엄 블랙스톤이 아내의 생일 선물로 고안한 기계식 세탁기다. 손으로 돌리는 수동이지만 수고하는 아내를 위한 남편의 갸륵한 마음이 느껴지는 멋진 발명품이다. 약 30년이 지난 1911년, 미국의 메이텍이 판매가 가능한 전기세탁기를 출시한다. 물론 월풀이 개발한 자동 세탁기도 만날 수 있다. 1920년 출시된 진공청소기, 냉장고의 모양이 재미있다. 1930년대 라디오를 비롯해 희귀한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흑백사진, 광고전단도 과학의 발전을 알려주는 유물이 재미를 더해준다. 안대를 두른 여성이 손으로 냉장고를 만져보는 그림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옆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사의 냉장고 광고 그림에도 가족 사랑이 깃들어 있다. 기술의 발전은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시킨다. 세탁기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발명한 덕분에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전자산업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 인류를 위한 혁신 이야기를 보고 듣다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은 몇 대나 남아 있을까. ‘TELEVISOR’이라 새겨진 글씨,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이 재미있다. “당시 사람들은 TV로 무엇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링을 비추는 화면에 권투선수와 심판의 모습이 보인다. “스포츠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권투와 축구 같은 스포츠를 가장 보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삼성은 언제 TV를 생산했을까. “삼성 최초의 TV는 일본 산요와 합작해 개발한 제품입니다. 이 제품은 생산한 지 두 달 만에 해외에 500대나 수출했다고 합니다.” 문을 여닫도록 디자인된 ‘삼성이코노TV’는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좋은 유물이다. “컬러TV, 세상에 색을 입히다”라는 광고문구가 신선하다. 최초의 컬러TV를 유심히 살펴본다. 부피가 크고 가격대가 너무 높아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컬러TV는 부의 상징이었다. 드디어 삼성이 ‘최초’의 제품을 많은 만든 회사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존의 TV가 보여주지 못했던 1인치 더 보여주는 획기적인 제품, ‘명품 플러스 원 TV’도 있다. 이때부터 전시된 TV의 특징이 뚜렷하다. 화면은 커지고 몸체는 얇아지는 것이다. 이제 통신기술과 함께 발전한 모바일의 역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워키토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것으로 1943년 제작한 제품이다. 통신장비를 짊어진 병사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2차 대전을 겪으며 무선통신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64년 개발된 이동전화는 가방에 들어있다. 1983년 등장한 세계 최초로 상용 휴대전화다. 10여 년간 1억달러 이상을 들여 개발한 이 휴대전화는 8시간을 충전해 30분간 통화할 수 있었다니 흥미롭다. 삼성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국내 최초로 휴대폰을 시장에 내놓는다. 삼성의 자체 기술로 개발된 ‘SH-100’은 제품이 전시실 가운데 놓여 있는 까닭이다. 1994년에는 드디어 ‘애니콜’이라는 자체 상표를 생산하는데 한국의 산악지형에 최적화된 제품이다. 2010년 출시된 스마트폰 ‘갤럭시 S’는 세계에 삼성을 알린 제품으로 1천만대 이상 팔렸다. 손목시계형 휴대폰도 삼성이 세계 최초로 생산한다. 1999년, 세계 최초로 TV를 시청할 수 있는 폰을 선보인 것도 삼성이다. 2003년에는 안테나를 내장한 일명 ‘벤츠폰’을 개발하고 2006년에는 세계 최초로 1천만 화소의 고해상도 카메라폰을 선보인다. 영화 ‘매트릭스 2’를 위해 디자인된 휴대폰도 눈길을 끈다. 전시된 모바일 제품은 삼성전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온라인으로 박물관을 둘러보며 전자산업의 역사를 배운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은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전자산업과 기초과학을 학습하며 삼성전자의 브랜드, 철학, 기술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로그램과 지역사회와 소통, 교류하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 참여 방법은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 홈페이지 예약 혹은 이메일 신청으로 진행되며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온라인으로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을 둘러보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전자산업에 관해 배울 수 있는 ‘전시물 해설사 LIVE 투어’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전기와 조명, 디스플레이 그리고 통신의 역사를 배워보는 초등학생 대상 ‘어린이 연구소’와 청소년을 위한 ‘전자산업 클래스’도 호응을 얻고 있다. ‘찾아가는 과학 교실’은 외딴섬이나 산간지역 분교 학생들을 위해 운영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청소년을 위한 진로 강의도 진행하고 있으니 박물관 홈페이지 상단에서 ‘교육’을 클릭하면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고 예약할 수 있다. 평일에 박물관을 찾으려면 미리 신청해야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는 평균 60분이 걸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토요일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삼성전자 정문 주차타워에서 연결되는 전용 입구로만 입장이 가능하니 사전에 동선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찾아도 좋은 박물관이다. 김준영(다시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6. 파주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Time & Blade Museum)’을 찾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박물관 외벽 중앙에 새겨진 문장에 어떤 뜻을 담았을까. 시간을 통제하는 왕의 얼굴, 칼날처럼 강인한 독수리의 날개와 사자의 다리를 가진 상상의 동물 형상이지만 신기하게도 조화롭다. 입구에 3시5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등에 둘러맨 근육질의 사나이를 부조한 것도 박물관의 설립 이념을 담고 있는 듯하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타임앤드블레이드박물관은 세계적인 명품 시계와 명검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이름난 곳이다. ■ 살아있는 유물과 만나다 전시실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도 멋스러운 벽시계가 가득 걸려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기름이 묻은 장갑을 끼고 작업 중이던 이동진 관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가득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전시실은 조용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시된 시계 대부분은 ‘밥을 줘야’ 작동되는 기계식 시계들이다. 태엽을 감아주면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시계’란 뜻이다. 멋과 품격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시계 사이에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인물과 마주한다.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을 입증한 찰스 다윈의 초상이 갈라파고스의 거북 등뼈로 케이스를 만든 ‘파텍필립’ 회중시계와 나란히 있다. 프랑스의 백옥으로 조각한 사자상 탁상시계, 당초무늬에 달리는 말을 조각한 회중시계는 시계공의 예술적 감각과 소유주의 품격이 물씬 풍기는 유물이다. 이 또한 기계식이니 태엽을 감으면 바로 작동하는 살아 있는 시계다. 15세기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였음을 아는가. 세계의 명품 시계들 사이에서 세종의 명을 받아 이순지가 발명한 해시계 ‘앙부일구’와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발견한 것은 뜻밖의 즐거움이다. 중세 스위스 시계공이 사용했던 제작 공구를 전시해 관람객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시계 공방을 재현해 놓아 관람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스위스가 시계의 나라로 불리게 된 역사가 궁금하다. “기계식 시계의 역사는 300여년이 됐지요.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는 프랑스와 독일의 시계 기술자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6세기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신교의 칼뱅파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인 쥐라산맥을 넘어 보석과 금 세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에 정착한다.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한 신교도들의 주요 직업이 시계공인데 이곳에 소규모 공방을 만들고 시계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명품 시계를 제조하는 스위스를 비롯한 외국의 경우 브랜드별로 된 박물관이 따로 있다고 한다. 유럽에는 타임앤드블레이드처럼 한 번에 여러 제품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은 없기 때문에 스위스 시계 기술자들도 이곳을 부러워한다며 뿌듯해한다. ■ 시계가 품은 흥미로운 역사와 풍성한 문화 역시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다. “제네바에서 바젤로 이어지는 쥐라산맥 일대를 ‘워치밸리(Watch Valley)’라 부르는데 전 세계 시계회사의 70% 이상이 이곳에 모여 있지요.” 이 관장은 신혼여행을 워치밸리로 떠났고 매년 바젤에서 열리는 시계박람회에 참석할 만큼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부친께서 광복 직후에 매입한 적산가옥 창고에서 도검 두 자루와 시계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지요. 196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빈티지 시계 2개를 구입한 것을 계기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시계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 작동 원리를 알아가며 시계의 매력에 빠져들었지요.” 우연한 동기와 세계여행을 즐기다가 유물 수집을 시작하게 됐다는 사연이 흥미롭다. 이 관장은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모두 돌아봤을 정도로 고대 유적지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지에서 스위스 여성들이 결혼할 때 오르골이 달린 시계를 예물로 들고 갔다는 ‘뮤직 시계’를 찾아내고 오후 4시 티타임이 되면 벨이 울리는 영국의 ‘티 시계’를 구입한다. 인류가 최초로 달을 탐사할 때 암스트롱이 가져갔던 오메가 시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사용했던 탁상용 시계도 주목된다. 실제 그 시계가 아니라 스위스 시계 회사가 한정판으로 제조·판매한 제품이지만 박물관의 열정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 역사와 시간을 가르는 검 2층 전시실은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전시실은 날카로운 검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베고 자르고 찌르는 도검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모양과 길이도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전시품이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의 유적이 풍성한 튀르키예를 비롯해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시아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금속 산업이 발달한 스페인 같은 나라를 여행하며 수집한 검으로 역사와 이야기가 깃든 유물이다. 페르시아, 그리스, 중동, 몽골, 일본 등 나라별, 지역, 문화별로 색다른 칼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환도’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검도 만날 수 있다. 한 자루의 칼에 깃든 역사와 문화가 풍성하다. 십자군전쟁 당시 이슬람 군대의 ‘다마스쿠스검’은 전시된 수많은 검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칼날의 빛깔이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신비롭다. 승리를 가져다준 검답게 날과 손잡이에서도 이슬람 전사의 강인한 기개가 느껴진다. 반달처럼 휘어진 단검은 초원을 호령했던 칭기즈칸 부대의 상징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는 전사들의 손에 들렸던 단검의 칼집에 꽂혀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휴대용 젓가락입니다. 단검에 꽂힌 젓가락은 칭기즈칸 전사들의 정복의 역사와 몽골인의 유목문화가 담긴 유물이죠.” 도검이 간직한 또 다른 세계를 엿보기 위해 지하 1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박물관 지하 1층에 직접 검을 만들 수 있는 대장간이 설치돼 있다. “시리아에서 칼 제조법을 직접 배워와 이 시설을 만들었지요.” 칼 동호회 모임인 ‘블레이드클럽’ 회원이기도 한 이 관장은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정기모임에 참석해 박물관에서 자신이 제작한 칼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좋은 검에 대한 박물관의 열정이 뜨겁다. 그렇다면 시계와 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시계와 칼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칼과 시계 둘 다 철로 만드는데 열에 강해야 하고 녹이 슬지 않아야 해요. 달나라에 오메가 시계를 차고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금속 제조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죠. 특히 시계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어요.” 질문을 예상했던 듯 박물관 이름을 ‘타임앤드블래이드’로 지은 까닭을 들려준다. “시계가 아닌, 타임(Time)을 쓴 것은 관람객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죠.” ■ 유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전시관을 이어주는 통로에도 아주 특별한 유물이 전시됐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당시 홍범도 장군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권총이다. 2020년 6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전시됐던 사실을 알려주는 전단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비폭력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찼던 시계를 비롯해 레이건 전 대통령 퇴임 기념으로 제작된 시계도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얼굴이 새겨진 시계, 축구 스타 베컴이 홍보하는 시계를 가까이서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계의 역사와 구조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스위스제 시계 모형과 설계도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초등학교 교실에 이런 시계 모형과 설계도를 두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니 스위스의 저력을 새삼 느낀다. 예술과 과학이 빚어낸 명품 시계와 명검은 생명력이 길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도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고, 정교한 시계도 긴 세월이 흐르면 멈출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생에 정답이야 없겠지만 주어진 하루하루를 즐겁고 충만하게 채워가는 삶이 최선이 아닐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안산산업역사박물관

넓은 호수와 푸른 산을 배경으로 돔형의 건물이 우뚝하다.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265에 자리한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이다. 안산, 산업, 역사에 거듭 등장하는 자음 ‘ㅇ’과 ‘ㅅ’을 동그라미와 삼각형으로 변형한 타이포그래피가 참신하다. 초록, 파랑, 주황의 색깔 배합도 매우 인상적이다. 박물관 입구에 왜 버스를 세워 놓았을까. 궁금증을 안고 박물관에 들어서니 기계음이 들린다. 커다란 팔을 가진 로봇이 자동차의 앞좌석을 설치하고 있다. 로봇으로 상징되는 첨단 산업의 중심에 안산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시가 ‘인사이드 카 INSIDE CAR’인데 부제가 ‘자동차는 부품으로 완성된다’다. ■ 안산의 과거와 현재를 보며 미래를 상상하다 친구의 손을 잡은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4D 영상체험실로 이동하고 있다.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밝은 표정은 로봇을 비롯한 기계와 부품들이 가득한 박물관 전시실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오늘의 안산을 있게 한 산업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대한민국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산업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오은석 학예연구사의 설명에 공감하며 박물관을 둘러본다. 조개를 잡고, 소금을 굽던 어촌마을 안산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도시로 성장했을까. 경기도 최초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산업박물관이 이곳에 설립된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상설전시실1로 향한다. ‘산업, 도시를 만들다’와 ‘도시, 산업을 키우다’라는 소주제를 통해 한적한 어촌마을에서 도시로 변모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최초로 시도된 ‘뉴우타운’ 전원적인 환경을 조성’이라는 머리기사와 ‘5천억 투입 87년 완공’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1977년 3월30일자 동아일보가 눈길을 끈다. ‘반월 신공업 도시건설 기공식’이란 글씨가 선명한 사진에 등장하는 여러 대의 굴착기와 식장을 가득 메운 인파가 산업 대국으로 성장하려는 당대 한국인의 열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비포장도로에 시내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흑백사진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안산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그 시절 반월단지 노동자들의 발이 돼준 유물이 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새한자동차 BF101’이다. ‘반월’이란 이름은 이제 조형물로만 남고 기억에 남아 있지만 대한민국을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견인차였음을 기록사진과 신문 기사와 빛바랜 설계도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나의 일터, 나의 삶터’라고 새겨진 공간에 수십명의 얼굴이 등장한다. 안산을 첨단 산업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숨은 주역들이다. 기술자와 사장, 공무원과 간호사, 이주노동자도 보인다. ‘도시의 숨소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도시의 생명력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안산시를 상징하는 ‘녹지’, ‘희생’, ‘공동체’, ‘환경’, ‘이주’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1세대는 생존 때문에 안산에 왔어요. 지금은 2세대가 안산의 미래를 위해 결정을 짓고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할 타이밍이에요.” 공인중개사 목창균씨의 말처럼 안산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안산산업역사박물관 오늘부터 1일’이라는 코너도 참신하다. 게임과 가상현실(VR)로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고 휴식도 취할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2전시실로 이어지는 길이 멋지다. ‘전시 공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주는 고리 형태의 전시 둘레길’이라는 안내처럼 어느 층에서나 화랑유원지의 시원한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 대한민국의 성장을 뒷받침한 뿌리산업 장난감 조립품 같은 물건이다. 자세히 살펴봐도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래 설명을 보고야 고개를 끄덕인다. 수도꼭지를 만들기 위해 제작한 ‘금형’이다. “이처럼 금형을 비롯해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기술같이 자연 소재를 부품으로 생산하거나 부품을 완제품으로 생산하는 등 제조업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술을 ‘뿌리기술’이라 합니다. 안산은 뿌리산업을 바탕으로 첨단 기술과의 융합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첨단 산업기지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1970년대 말에 생산된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 컴퓨터 등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유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과 30~40년 전의 물건이지만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한때 판매율 1위를 자랑하던 삼보컴퓨터, 국내 최초의 컬러 텔레비전인 아남 ‘크리스탈’ 컬러 텔레비전 CK-1666 모델도 있다. 동전을 넣은 구멍과 숫자 아래 난 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번호를 돌리던 공중전화기도 유치원 아이들에겐 신기한 물건이다. “소규모 운송업자와 배달업자에게 인기를 끌었던 ‘기아 경 3륜 트럭 T-600’(문화재 5호)은 경기도등록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용달 트럭입니다.” 등록문화재는 더 있다. ‘동주염전 소금 운반용 궤도차’(10호)와 ‘목제 솜 틀기’(11호)가 그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기업과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각종 유물 450여점이 전시됐다. 상설전시실3에는 제지인쇄산업, 섬유염색가공산업, 화학산업과 관련한 제품과 제조용 기계를 전시하고 있다. 참고서로 유명한 동아출판 안산공장에서 사용됐던 재단기, 활판인쇄기, 자모조각기, 활자주조기 같은 인쇄출판 기계도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유물이다. ■ 시민과 함께 자부심과 긍지를 전파하는 박물관 ‘시민 아카데미’는 박물관의 대표적인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지역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박물관 식구들의 고민에서 비롯된 시민아카데미는 유아, 청소년, 지역 대표 세 가지 유형으로 문화관광해설사, 학예연구사와 함께 박물관을 관람 후 단체 유형별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어린이들에게는 4D 영상 관람과 포장기계 및 스티커놀이 등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은 1980년대 안산시를 누비며 반월공단 근로자들의 발이 됐던 시내버스의 탑승 체험과 모형 만들기가 진행된다. 성인들을 대상으로는 박물관 콘텐츠를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방안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시민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유아부터 성인까지를 아우르는 친숙한 문화공간으로 다가서고 있다. 박물관의 또 하나의 자랑은 ‘옥상팝콘’이다. 화랑유원지가 훤히 보이는 박물관 옥상에서 음악회와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 시민들의 호응이 높다. 9월6일 금요일 오후 7시에 열린 옥상팝콘은 마술공연과 영화 ‘알라딘’을 감상하는 흥겨운 자리였다. 이처럼 박물관은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장래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아이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키우는 공간이 되고 있다. “안산시의 시작은 대한민국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의 발자취와 함께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지금,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안산시가 있었고 안산의 시작과 지금엔 바로 산업이 함께 했습니다.” 한국인의 자부심과 안산시민의 긍지를 전파하는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화랑유원지와 함께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선정됐다.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넉넉하다는 뜻이다. 화랑호수 너머에 도립 경기도미술관이 있다. 안산은 18세기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과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일제강점기 아동 교육에 헌신한 상록수 최용신 등 우리 역사에 그 이름이 우뚝한 인물들이 살았거나 활동했던 역사의 도시다. 성호박물관, 김홍도미술관, 최용신기념관을 비롯해 안산어촌민속박물관, 맥아트미술관과 유리섬미술관, 이플실내정원, 정문규미술관, 종이미술관, 안산향토사박물관 같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안산의 웅숭 깊은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준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4.의왕 철도박물관

당신은 ‘기차여행’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설레는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라는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2004년 3월까지 운행된 ‘통일호’ 열차도 처음에는 요금이 가장 비싼 급행열차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누구나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기차에 대한 추억을 더듬으러 의왕으로 향한다. ■ 대한민국의 역사와 추억이 공존하는 공간 전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에서 의왕 철도박물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난다. 철도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거리의 이름이 ‘철도박물관로’다. 박물관 주변에 코레일 인재개발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국립 한국교통대가 모여 있다. 박물관 입구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를 표현한 조각을 만난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기차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고전미를 풍기는 박물관 본관의 외관 문양이 독특하다. ‘우리 철도는 나라의 대동맥으로서 한 세기를 힘차게 달려왔으며, 오늘에 이르러 지나온 철마의 발자취를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여기 철도교육단지 머리에 철도박물관을 짓고 이 기념비를 세워 감격을 새겨 기리노라. 미당 서정주는 글을 짓고 최기덕 철도청장은 삼가 이 기념비를 세우다.’ 1988년 1월에 세운 ‘철도문화전당’ 기념비의 기단에 새겨진 글이다. 오후 2시, 서둘러 ‘철도모형 디오라마실’부터 찾는다. 여러 대의 모형 열차가 빌딩 숲을 이룬 도시를 가로지른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 “출발!” 기관사 복장의 직원이 한창 해설 중이고 맞은편 관람석에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달리는 기차를 보며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비둘기호 출발!” 진행자의 선창에 어린아이와 젊은 부부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출발!”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새마을호와 KTX도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린다. 대한민국 철도의 과거와 현재를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전달하는 진행자의 말솜씨에 빠져든다. 이번에도 진행자의 선창을 따라 한목소리로 외친다. “정차!” 불을 켜고 레일 위를 달리던 1호선 열차, KTX가 속도를 줄이더니 제자리에 멈춰 선다. 철도모형 디오라마실은 평일에는 오전 11시30분, 오후 2시 두 차례, 주말에는 오전 11시30분, 오후 1시30분, 3시30분, 5시 등 네 차례 운영한다. 밖으로 나오자 두 분의 문화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1기 김은희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관람을 시작한다. 중앙홀 맞은편 벽에 걸린 대형 흑백사진이 눈길을 끈다. 1899년 9월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으로 촬영한 일자는 1897년 3월22일이다. 갓을 포함한 조선 관리들의 의관이 모두 백색이다.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를 비롯한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명성황후의 국상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차 모형에서 수증기를 뿜어낸다. 사람이 탈 수도 있었다는 파시 1-4288호 모형을 배경으로 철도박물관을 방문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그 위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조형물이 설치됐다. “지구를 가로지른 세 개의 레일과 기차가 보이지요. 철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열차는? ‘역사실’은 철도의 역사를 보여 주는 공간이다. 증기기관차는 근대의 산물이며 제국주의와 깊이 관련돼 있다. 철도부설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강대국들이 경쟁했던 역사가 있다. 앞에서 봤듯이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은 1900년 7월 비로소 전선이 개통된다. 경인선을 달린 열차의 이름이 ‘모갈’이고 1906년 4월 개통되는 경부선을 달린 열차의 이름은 대한제국의 연호를 딴 ‘융희호’다. 1946년 5월, 서울과 부산을 잇는 열차 ‘조선해방자호’에 담기 사연이 특별하다. “일제는 철도 고급 기술을 한국인에게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패망해 그들이 모두 일본으로 떠나가 한동안 열차가 멈추게 됐는데 9개월 만에 우리가 기술을 터득해 열차를 달리게 한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바꿨던 열차는 누가 발명한 것일까.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인 리처드 트레비식(1771~1833)과 조지 스티븐슨(1781~1848)의 초상을 보며 같은 시대 조선의 현실이 어떠했나 생각해 본다. 1930년 우리나라 지형에 맞게 설계·제작된 파시1형 증기기관차 모형을 어린이들이 관찰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조선에 철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1877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기수(1832~?)였다. 1877년 주미 대리공사 이하영은 귀국하면서 움직이는 기관차와 객차 등 정교한 철도 모형을 가져와 철도의 편리성과 중요성을 고종과 관리들에게 알리고 철도 건설을 건의했다. 고종이 철도 건설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894년 6월 의정부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설치하고 1896년 3월 경인선 건설을 결정한다. X자 모양으로 국토를 가로지른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은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나라의 대동맥이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도 철도를 잇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선진국을 상징하는 KTX를 개통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을 보며 새삼 한국인의 저력에 감탄한다. 전시실 곳곳에서 가슴 뿌듯한 감동적인 사연과 마주한다. ‘차량실’은 우리나라 철도차량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동력차와 객차, 화차의 모형과 부속, 제작 공구 같은 철도차량 유물 하나하나에 깃든 이야기도 흥미롭다. 열차 운전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운전 체험을 하려면 500원 동전을 미리 준비하셔야 해요.” 그러나 동전이 없다. 단돈 500원으로 기관사가 될 기회를 놓쳐 아쉽다. 열차 운전석에 앉으면 속도감을 느껴볼 수 있다니 다시 박물관을 찾을 때 500원 동전을 몇 개 준비해야겠다. 본관 2층으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중앙에 설치된 조형물을 자세히 살펴본다. 레일을 달리는 열차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미래의 열차는 어떤 모습일지, 현재와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하다. 특별전시실, 전기실, 시설실, 수송서비스실, 영상실로 이어진다. 야외전시실은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멀찍이 유물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 안으로 들어가 살펴볼 수 있으니 체험에 가깝다. “대한민국 철도 거리의 기준점이 되는 지점을 표시하는 ‘철도기점 표지석’입니다. 1972년 2월15일 서울역에 설치했던 것을 2004년 서울역이 신역사로 이전되면서 기존에 사용되던 표지석을 옮겨 전시한 것이지요.” 분단되기 전에는 언제나 갈 수 있었던 평양, 신의주, 나진에 기차로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자~ 떠나자! 역사와 추억이 숨 쉬는 철도박물관으로 등록문화재인 ‘협궤동차’에 깃든 사연도 재미있다. 1965년 철도청 인천공작창에서 협궤 디젤동차 6량을 제작해 수려선과 수인선은 최대 시속이 55㎞였다. 수원과 여주를 잇던 수려선은 1972년 3월, 수원과 인천을 잇던 수인선은 1995년 12월 폐선됐다. 협궤란 궤간 거리가 표준인 1천435㎜보다 좁은 궤도를 말하며 수인선과 수려선이 762㎜의 협궤 구간이다. ‘비둘기호’ 객차에 오른다. 1959년 서울공작창에서 국산 객차 시범에서 제작한 차량과 같은 차량이다. 1962년 인천공작창에서 제1호차로 제작된 것인데 보통 급행열차로 운행되다가 1967년부터 완행열차 비둘기호로 운행됐다. 차량 내부에는 118개의 좌석이 있으며 고정식 의자와 1열에 3명씩 앉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통일호 객차도 반갑다. “이 차량은 1965년 인천공작창에서 경량객차 시범 차량으로 제작된 것인데 최고 120㎞의 급행열차 통일호로 운행됐던 것입니다.” 등록문화재 제419호 대통령전용객차도 타 볼 수 있다. 광복 이전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이어주던 최고급 침대 객차를 개조해 국가원수 전용차량으로 사용한 것으로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했던 차량이다. 철도박물관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을 숲처럼 풍성하다. 한낮엔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이 왔다. 철도박물관 가까운 곳에 아름다운 유원지도 있으니 1호선 전철을 타고 마음에 드는 벗과 아무 때나 찾아도 좋은 곳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3. 파주 영집궁시박물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 선수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10연패를 달성한 여자 양궁팀, 3관왕을 차지한 김우진·임시현 선수가 활을 쏘는 모습은 너무나 멋졌다. 정말 한국인에게는 활쏘기에 특화된 유전자가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찾았다.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에 있는 ‘영집궁시박물관’(관장 유세현)은 지난 5월부터 ‘재미있는 정조의 활 이야기’ 특별전을 열고 있다. 11월3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의 주인공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다. 정조는 청소년 시절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고 왕위에 오른 후 활쏘기로 신하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한 군주였다.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꼽히는 정조와 대를 이어 궁시장 보유자를 배출하는 파주는 인연이 깊다. ■ 5대로 이어지는 궁시장 부자가 만든 박물관 성곽을 닮은 영집궁시박물관은 아늑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 정원에는 보랏빛 매발톱을 비롯한 여름 들꽃들이 한창이다. 영집궁시박물관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 고 영집(楹集) 유영기 기능보유자가 2000년 설립한 활 화살 전문박물관이다. “아버님은 고향 가까이에 선인들의 슬기와 지혜가 담긴 활과 화살을 모으고 지어서 전통의 활쏘기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 설립하셨지요.” 2022년 부친을 이어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유세현 관장의 집안은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맥을 잇고 있다. 박물관에 증조부 유창원의 초상화와 조부 유복삼, 부친 유영기(1935∼2023)의 사진이 걸려 있는 까닭이다. 조부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기 이전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화살 제작 장인이었고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보유자로 지정받은 부친 고 유영기 관장은 많은 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돼 202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이 가슴 뭉클하게 한다. 작고한 유영기 보유자와 유세현 관장, 아들과 딸이 둘러앉아 화살 만드는 모습이 평화롭다. 이처럼 영집궁시박물관은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현장이기도 하다. ■ 더 멀리 빠르고 정확하게 유호상 전수생의 안내로 전시관을 둘러본다. 입구에서 마주한 그림이 낯익다. 230년 전인 을묘년(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화성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상세하게 묘사한 ‘반차도’다. 시선을 압도하는 반차도를 배경으로 ‘영전(令箭)’과 ‘신전(信箭)’이 전시돼 있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듯 영전과 신전은 일반 화살보다 깃도 크고 색깔도 누런색이다. 반차도를 살펴보니 일반 병사들은 총을 들고 있으나 말을 탄 장교와 장관들은 활을 착용하고 있다. 정조가 재위한 18세기 후반 장용영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조선 군대에서 장교 이상은 여전히 활을 사용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활은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익숙해지면 조총보다 훨씬 빨리 쏠 수 있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렇다.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19세기 중반까지 활을 사용했다. 전시된 활과 화살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시위를 푼 활의 모양이 ‘ㅇ’처럼 말려 있다. ‘부린활’이다. 각궁의 강한 탄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둥글게 뒤집힌 활을 바로 펴 시위를 걸면 화살을 멀리 쏠 수 있습니다.” 활만큼이나 화살의 종류가 다양하다. 끝이 날카롭고 뾰족한 ‘세전(細箭)’과 버들잎을 닮은 유엽전은 익숙한 화살이다. 그러나 촉이 집게처럼 벌어진 것, 도끼날처럼 생긴 것도 있다. 쇠 대신 나무를 깎아 촉을 만든 ‘박두(樸頭)’와 소리를 내는 화살인 ‘효시(嚆矢)’도 여러 점 전시돼 있다. “대장이 효시를 쏘아 병사들에게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요.” 우리 조상들이 활이나 화살이 낡거나 부서지면 해체해 재활용했던 까닭에 오래된 유물이 많지 않다. 전시된 화살은 대부분 유 관장의 부친과 유 관장이 복원한 작품이다. 아주 짧은 화살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역시 복원품으로 ‘조선의 비밀병기’로 알려진 편전이다. ‘애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을 넣어 쏘는 ‘통아’는 바늘과 실처럼 짝이다. 화살의 길이가 짧아 빠르고 훨씬 멀리 날아가는 것이 편전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굵고 검은 화살은 ‘철전’이다. “철전은 너무 무거워 쏠 때 앞으로 달려 나가며 쏴야 합니다.” 철전 곁에 전시한 김홍도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풍속화를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물론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도 활이 등장한다. 갓을 쓴 한량이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야릇한 그림인데 그가 들고 있는 화살이 유난히 굵고 크다. 앞에서 봤던 ‘철전’이다. 왜 철전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조선시대 무과의 필수과목이기 때문이다. 화약을 사용해 쏘는 로켓 화살인 신기전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불에 타다만 25대 임금 철종의 어진 속에 우리 활쏘기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 자세히 살펴보니 철종의 엄지손가락에 ‘깍지’가 끼워져 있다. 활시위를 당기는 엄지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소뿔을 깎아 만든 도구 ‘깍지’도 두 종류가 전시돼 있다. 밋밋하게 생긴 암깍지와 볼록 튀어나온 수깍지가 있는데 전투에 사용되는 강궁을 당길 때는 수깍지를 사용한다. 정조가 활을 쏘고 신하들에게 선물을 준 기록 ‘고풍(古風)’도 눈길을 끈다. 고풍을 통해 정조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장혁’과 곤장에 사용하던 ‘곤(棍)’도 과녁으로 사용했던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 화살 하나에 깃든 예술혼 화살은 만들 때 어떤 재료와 도구를 사용할까. ‘살대’ 혹은 ‘시누대’라 불리는 대나무를 비롯해 쇠심줄, 꿩 깃, 민어 부레 같은 재료가 나란히 놓여 있다. 민어 부레가 전통시대에 가장 뛰어난 접착제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풀로 깃과 쇠심줄을 붙였기 때문에 공방에는 부레풀이 끓기 마련이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상사와 오늬칼, 졸대 같은 공구도 눈길을 끈다. 먼저 대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곧게 펴고 껍질을 벗기고 불에 구워 진을 빼내야 한다. 명장의 손길이 닿아 반짝반짝 빛나는 도구들은 활과 화살 못지않은 전시물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는 것이 역시 재미있다. 중국 활과 몽골 활은 우리나라 활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다. 물소뿔을 사용하는 한국의 각궁과 달리 일본의 활은 무척 길지만 사정거리는 오히려 짧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인도,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용했던 활과 화살도 전시돼 있어 한국과 외국, 또는 동양과 서양의 활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활과 화살의 종류가 한국처럼 다양한 나라는 달리 찾기 어렵다. 성능은 물론이고 아름다움에서도 한국 활이 으뜸이다. 역시 한국은 활의 나라다. ■ 한국인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공간 박물관 야외에는 한국의 전통 활쏘기를 체험할 수 있는 작은 활터가 있다. 올 초에 문을 연 아담한 공방도 갖추고 있어 재미난 체험과 여유로운 휴식이 가능하다. 박물관은 매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기획전 ‘살장이전’과 ‘지홍전’을 열고 있다. ‘영집’이 부친 유영기 선생의 호이고 ‘지홍(知弘)’은 유세현 관장의 호다. 영집궁시박물관은 다양한 기획전과 교육프로그램으로 한국 활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꾸준히 알리고 있다. ‘KB국민은행과 함께하는 박물관 노닐기’와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과 꿈다락 토요문화 학교’도 꾸준하게 열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이다. ‘휘파람을 부는 화살’, ‘신기전~달리는 불에서 귀신들린 화살까지~’, ‘옛 그림으로 보는 활 이야기’ 등 매년 새로운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한국의 활과 화살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청소년 권장 사이트로 선정한 영집궁시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영집궁시박물관을 찾으면 오천년을 면면히 이어온 한국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영집궁시박물관이 자리한 파주 헤이리는 대한민국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2. 김포시 덕포진교육박물관

김포시 대곶면 덕포진로 103번길 90에 자리한 덕포진교육박물관(관장 김동선·이인숙)은 교육을 주제로 1996년 6월 문을 연 사립 박물관이다. 설립자 부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1950년대의 교육 관련 유물을 비롯해 전통문화와 농경문화 유물까지 두루 갖춰 같은 해 9월 경기도 테마박물관(제96-5호)으로 지정됐다. 교육을 주제로 한 대한민국 최초의 박물관인 데다 설립에 얽힌 특별한 사연을 가진 까닭에 개관 초에 KBS 9시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크게 주목받았다. 인성교육에 초점을 맞춘 기획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은 교육전문가들의 호응과 관심을 끌어낸다. 서울교육대를 비롯해 초등도덕교육연구회, 한국민주시민연구회 같은 단체와 협력해 교육을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수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 3학년 2반은 아직도 수업 중입니다 교육박물관이 자리한 덕포진은 150여년 전에 일어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시련을 꿋꿋하게 이겨낸 역사를 보여주듯 무궁화꽃이 활짝 핀 정원 풍경이 평화롭다. 박물관 입구에 책보를 허리에 낀 소년상과 방문객을 환영하는 듯 두 팔을 치켜든 할아버지 모습의 조형물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초록의 숲에 자리한 붉은 벽돌 3층 건물이 박물관이다. 1866년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를 양헌수가 지휘하는 조선 군대가 기적처럼 물리친 후 대원군의 명으로 세운 척화비는 박물관이 자리한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덕포진박물관의 무지개 스토리’가 펼쳐진다. 젊은 부부 교사의 단란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개관식 사진 사이가 까맣다. 이인숙 관장이 사고로 시력을 잃은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제가 사고를 당했을 때 3학년 2반 담임을 맡고 있었지요.” 이 관장을 따라 ‘3-2’ 간판이 붙은 교실로 들어선다. 갑자기 1950년대 초등학교 교실이 나타난다. ‘정직한 어린이 협동하는 어린이’가 3학년 2반의 급훈이다. 삼각자가 놓인 칠판에는 분필로 또박또박 쓴 ‘과수원 길’ 노랫말과 교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 위에 쌓아둔 찌그러진 도시락이 정겹다. 수십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건너뛰게 만드는 연출이 재미있다. 풍금 앞에 앉은 이 관장이 ‘반달’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1절은 따라 불렀으나 2절은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흥얼거리며 불렀지만 즐겁다. “이 노래는 1924년 윤극영 선생님이 작사 작곡했어요.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치던 방정환 선생님과 나라를 빼앗긴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부르게 하자며 만든 것이지요.” 능숙한 몸짓과 밝고 낭랑한 목소리 때문일까. 이 관장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아이들에게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열심히 하라고 강조해요. 노래 많이 불러 마음에 꽃바구니를 많이 만들면 나쁜짓을 안 한다고 가르치지요.” ■ 한국 교육의 역사와 전통문화의 풍성함을 마주하는 시간 김동선 관장의 안내로 ‘학창시절 체험관’을 둘러본다. 부창부수랄까. 목소리에 힘이 있고 자세가 꼿꼿해 여든이 넘은 노인이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까만 교복과 교련복을 입은 학생 사진이 실물 크기로 세워져 있다. 관람객이 즐겨 사진을 찍는 곳이다. 빛바랜 학생증과 커다란 상장, 잉크로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작성한 성적표를 살펴보며 책보를 메고 학교에 다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수업을 받지만 소녀의 표정이 야무지다. 장마에 물이 불어 바지를 둥둥 걷고 시내를 건너는 학생들의 발걸음도 씩씩하다. 바로 이들이 민주화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2층 ‘교육사료관’은 자료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1800년대 후반 서당의 풍경을 담은 사진부터 당시 학동들이 익힌 천자문을 비롯해 당대 유물들이 한국인들의 학구열을 잘 보여준다. 조선어학회에서 펴낸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나 정음사에서 펴낸 ‘중등말본’ 같은 책은 민족의 얼을 짓밟는 일제에 맞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려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한 자루의 큰 칼이 유리관 안에 전시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사들도 칼을 차고 있었지요.” 함께 전시된 ‘소화실업수신서’는 일본어로 된 교과서다. 국어는 ‘일본어’이고 우리말은 쓰지 못하도록 탄압했던 어두운 시대를 지나 광복을 맞이한 후 펴낸 교과서를 살펴본다. 광복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교육환경은 세계 최악의 수준으로 추락한다. 누런 갱지에 인쇄된 책, 철필로 글씨를 새기고 잉크를 발라 시험지를 만들었던 ‘등사기’가 보인다. 1966년 펴낸 4학년 2학기 ‘표준수련장’의 표지가 재미있다. 남녀 어린이가 아버지가 일하는 배추밭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쥐를 잡자’, ‘불조심’, ‘자연을 보호하자’ 같은 글이 새겨진 리본도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등교 전 구호가 새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가던 1970년대 학교 앞길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딱지치기와 땅따먹기 같은 즐거운 놀이가 골목길에서 벌어졌던 재미난 사실도 알려준다. 1980년도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 월급은 얼마였을까? 본봉과 수당과 연구비를 포함해 집으로 가져간 월급은 25만2천515원이다. 호랑이와 함께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누볐던 표범 박제를 만난 것은 뜻밖의 즐거움이다. 3층에는 세 개의 주제로 손때 묻은 정겨운 유물이 전시됐다. ‘전통문화실’은 자개농과 다듬잇돌이 놓인 ‘할머니방’과 화로와 주판이 놓인 ‘할아버지방’을 비롯해 볼거리가 가득하다. ‘농경문화실’은 잔치 때면 펼쳤던 멍석과 가마니 같은 1970년대 농촌 마을을 방문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당대의 거의 모든 유물을 만날 수 있다. ■ 휴식과 충전의 공간 덕포진교육박물관은 교육 프로그램에 정성을 쏟고 있다. 일반인 및 초중학교 단체를 대상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박물관협회가 후원하는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을 비롯해 경기도와 김포시의 후원으로 진행하는 ‘경기도 지역문화 예술플랫폼 육성사업’은 지역의 문화자원과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사랑받고 있다. KB국민은행과 한국박물관협회 후원으로 진행되는 ‘KB박물관노닐기’와 진학을 고민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진로교육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음악과 시가 함께하는 ‘노래하는 인문학 수업’은 아주 인기가 많다. 인근 군부대 장병을 대상으로 인성교육, 유치원 대상 졸업여행 등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맞춤형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4년 박물관의 최고 영예인 ‘최우수 박물관’(대통령상)에 선정된다. 김동선 관장의 외조에 힘입어 이인숙 관장은 ‘경기도박물관인상 대상’(2006년)과 ‘김포시문화상’(2018년)을 수상하고 ‘아름다운 이화인상’(2014년)도 수상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사실은 김승태 학예실장이 2021년 전국 박물관인대회에서 한국박물관협회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 젊은 부문을 수상한다. 박물관 설립 때부터 함께했던 김 학예실장에게 보람됐던 일을 물어본다. “박물관을 설립하신 관장님 부부의 뜻을 잘 이어받아 성인들에게는 추억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게는 창의적인 인성교육이 행해지는 휴식과 충전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덕포진교육박물관은 휴식과 충전의 공간이다. 박물관 옆에 ‘외할머니의 부엌’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생활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 함께 찾아보면 좋겠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초가을 덕포진교육박물관을 찾아 추억을 소환하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이 나라를 지켰던 사적 덕포진이 있는 ‘서해랑길’을 천천히 걸어보면 어떨까.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1. 남양주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모카가든

놀이터와 정원과 도서관이 모여 있다. 남양주시 다산순환로 50 현대프리미엄아울렛 A관 3층에 자리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모카가든(MOKA GARDEN)’은 도심의 ‘숲’이다. 자연을 주제로 한 2천여권의 책을 볼 수 있는 ‘모카라이브러리’와 40여종의 식물과 동물 조각작품이 어우러진 ‘하이메 아욘 가든’, 즐거운 놀이터 ‘모카 플레이’가 숲속으로 난 오솔길처럼 이어진다. 총 1천653㎡의 넉넉한 공간에 자리를 잡은 ‘모카가든’은 여름에 찾기 좋은 공간이다. ■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허무는 어린이미술관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모카가든(관장 노정민)은 2020년 11월 문을 열었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하이메 아욘 가든은 아이보다 어른이 더 애용하는 공간이다. 실내놀이터 ‘모카 플레이’는 어른들도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자연 주제 그림책과 교육공간 에듀랩이 있는 모카 라이브러리 역시 어른과 아이가 함께 활용하도록 설계됐다. 세 공간은 늘 열려 있다. 매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개관부터 함께했던 김도연 학예사는 모카가든을 이렇게 소개한다. “모카가든은 연간 약 80만명이 찾을 만큼 사랑받는 문화 공간이지요. 고객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예술적 상상력은 책과 정원과 놀이터를 아우른 모카가든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림으로 가득한 어린이책을 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 그림에 열중하는 아이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여유롭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도서관의 디자인이다. 자연을 주제로 한 어린이도서관답게 부드러운 곡선과 밝은 색깔이 눈에 띈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장식한 벽면과 천장의 조각과 그림도 관람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8월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안내지를 한 장 꺼내 살펴본다. 정기 프로그램은 ‘작은 식물학자’와 ‘모카와의 숲여행’이다. “대부분 교육프로그램은 도서관과 옆에 붙어 있는 하이메 아욘 가든에서 이뤄집니다.” 정원에 자라는 식물을 관찰하고 식물의 특징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모카가든의 가장 큰 자랑이다. 모카와의 숲여행은 온라인으로도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참고하면 좋겠다. ‘탐험 프로그램 식물 감상법’과 ‘얼굴을 찾아라’, ‘아트북 독후감’ 등 셋은 매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펼쳐 나무를 공부하고 곁에 있는 정원으로 이동해 나뭇잎을 만지고 관찰하는 것이 모카가든의 자랑이다. ‘마스터의 제안’과 ‘그린마스터와의 만남’은 전문가와 함께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전시와 연계한 프로그램 ‘모카와의 세계여행’도 있다. 이름처럼 아이들의 생각과 시선을 세계로 넓혀주는 교육프로그램이다. 현재 진행 중인 특별전 ‘체코의 어린이 책’과 연계한 ‘체코 작가 워크숍’도 마찬가지다. ■ 아이들의 생각을 넓고 깊게-체코의 어린이 책 “바나나 상자에 책을 담은 덕분에 체코의 어린이책이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포장을 풀고 운송에 쓰인 상자에 담긴 모습으로 전시될 수 있습니다.” 골판지 상자를 활용해 전시회를 여는 이처럼 멋진 발상은 누가 했을까? “체코가 체코슬로바키아였던 시절의 출판사 아르티아가 팝업북을 만들어 외국으로 수출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책에 붙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지며 공간이 확장되는 팝업북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신한 발상이다. 이 분야의 선구자인 루돌프 루케쉬(1923~1976)와 보이테흐 쿠바슈타(1914~1992)가 만든 입체적이고 감동적인 어린이책을 살펴본다. “이번 전시는 도쿄에 이어 열린 순회 프로젝트입니다.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체코 어린이책을 통해 책과 함께 보이는 독특한 표현 방식을 주목하면 더욱 특별하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난 수십년간 만들어진 체코의 어린이책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겠다.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징을 여덟 가지로 분류해 전시 공간을 구분한 방식이 재미있다. 종이상자로 전시실을 꾸민 것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참신한 발상이다. ‘입체적으로 만들기’를 시작으로 ‘부드럽게 만들기’와 ‘덧대어 붙이기’로 이어진다. 체코 어린이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시각적 발명품’과 ‘변신하는 아코디언북’, 그리고 ‘책 속의 작은 건축’은 이름이 암시하듯 입체적이다. 책이란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과감한 시도가 신선하다. ‘책과 놀이의 만남’과 ‘스크린 속 책’은 스마트폰 시대에도 생존할 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3차원의 입체적 조형물을 결합한 책을 실물로 만나는 경험은 뜻밖의 즐거움이다. 책장을 넘기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한 아이가 조심스레 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본다.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의 맑은 눈빛이 사랑스럽다. ■ 책과 정원에 샘솟는 창조적 상상력 이런 멋진 공간을 설계한 디자이너는 누구일까. 모카가든을 디자인한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은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술이 판치는 세상에서 인간의 감각을 가미한 예술품을 만들어야 한다. 규칙을 깨고 미래의 아이디어를 소개해 주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일에 질문하고 여행하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카가든은 2022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알려진 것처럼 이 상은 미국 IDEA 어워드, 독일 iF어워드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힌다. 아욘에게서 240여년 전 한강의 배다리와 수원화성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도서관을 나와 옆에 있는 정원을 산책한다. 정원 중앙에 있는 커다란 얼굴로 향한다. 가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조각상은 원형의 의자처럼 활용돼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원 곳곳에 서 있는 조각 동물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정원으로 난 작은 길이 여유롭다. 이 특별한 정원의 이름은 앞에서 소개한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하이메 아욘 가든이다. 휴식 공간인 정원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학습공간으로도 변신한다. 7월28부터 8월25(일)까지 어린이 식물학자 ‘식물의 생존전략–꽃’이 진행된다. 식물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자라는 40여종의 식물을 가꾸고 돌보는 일과 식물의 이야기를 통해 감수성을 키운다. 지난 7월의 주제는 ‘식물의 생존전략-꽃의 형태’였다. 뿌리기-움트기-싹트기로 이어 체험하고 느끼는 프로그램이다. 8월 주제는 ‘식물의 생존전략-꽃의 색깔’이다. 곤충들에게 꽃은 어떻게 보일까? 꽃들을 유혹하기 위해 특별한 색으로 자신을 꾸미는 곤충의 전략을 알아보고, 꽃의 색에 담긴 비밀을 벗겨본다. 꽃을 사랑한 정원의 일꾼, 꿀벌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 ‘꿀벌’을 감상하고 ‘꿀벌 안경’을 만들어 꿀벌의 눈으로 가든 속 아름다운 꽃의 색을 감상한다. 싹트기에서는 색을 바꾸며 자라는 꽃 ‘란타나’ 화분을 완성한다. 어린이 식물학자가 돼 볼까? 집으로 돌아가 식물을 돌보고 관찰일지를 작성하며 식물에 필요한 환경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다음은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놀이터의 벽면이 화려하다. 인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벽화는 그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미술관이다. 동물을 닮은 놀이기구들도 재미있다. 모카가든은 어린이들의 건강한 꿈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우는 ‘책’을 주제로 한 어린이 미술관이다. 풀과 나무와 아름다운 조각품을 통해 자신과 이웃, 자연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즐거운 놀이터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 고양로봇박물관

로봇시대,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일까. 2022년 기준 국가별 산업용 로봇 밀집도 현황이 놀랍다. 1천12대의 한국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위 싱가포르 730대, 3위 독일 415대, 세계 평균이 151대다. 인공지능(AI)까지 장착한 로봇이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있다. 식당에는 로봇이 음식을 나르고 집 안 청소를 담당하고 있다. 동물과 사람, 로봇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공간이 있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로에 위치한 ‘쥬쥬랜드’가 바로 그곳이다. 생태동물원 ‘쥬쥬랜드’는 동물과 사람, 그리고 로봇을 주제로 하는 가족형 종합 테마공원이다. “동물과 어울리고 미래 첨단기술을 한곳에서 두루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는 양희준 팀장의 소개말이 이어진다. “2002년 문화관광부에 국내 유일의 민간 동물박물관 252호로 등록한 쥬쥬랜드는 관람 중심의 동물원에서 벗어나 동물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평생학습의 장으로 활용돼 고양시의 나들이 명소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멸종위기종 보존에 힘을 쏟아 2015년 12월, 국내 최초로 오랑우탄 순수 혈통 번식에 성공한 일은 쥬쥬랜드의 큰 자랑이다. 동물박물관인 쥬쥬랜드에 로봇박물관을 설립한 것은 2020년 8월이다. 개관 4주년을 맞은 고양로봇박물관(관장 소순희)은 작지만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21세기를 주도할 미래산업인 로봇은 이미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세대인 어린이들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로봇의 과거와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즐거운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 동물원에서 로봇 친구랑 놀자 고양로봇박물관은 전시보다 직접 로봇을 조종하면서 체험하는 프로그램 중심이다. 작은 로봇들이 로봇박물관 마당을 지키고 있는 로봇박물관으로 들어서니 타원형의 작은 무대가 나타난다. 맨 먼저 로봇들의 춤 공연을 감상한다. 6대의 댄스 로봇은 인간을 모델로 한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음악이 흐르자 자그마한 로봇들이 가슴에 불빛을 반짝이며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음악은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뽀로로, 겨울왕국, 터닝메카드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주제가는 물론이고 케이팝과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한 로봇들의 댄스공연이 이어진다. 공연 중 넘어지거나 동작에 방해를 받아도 스스로 일어나 춤동작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안정성을 갖춘 댄스 로봇이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얼굴 로봇과 같이 공연 중이다. 다음은 철봉 로봇이다. 철봉에 매달린 로봇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츰 동작이 커지더니 한 바퀴를 돌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로봇의 활달한 춤사위는 관람객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자동차 경주용 로봇 등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멋진 재주를 펼친다. 20분간 이어지는 로봇 공연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밌다. 로봇 공연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에는 세 번, 주말에는 여섯 번 진행된다. 예술가처럼 모자를 쓴 로봇은 또 무엇일까.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로봇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키를 누르니 카메라가 얼굴을 촬영한다. 잠시 후 로봇 팔에 달린 펜이 움직이며 관람객의 얼굴을 그려 나간다. 카메라로 얻은 정보를 이미지의 선을 인식해 최단 거리를 파악하는 로직을 활용해 재빠르게 초상을 완성한다. 화가 로봇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돼 있어 체험자와 대화할 수 있다. 완성된 초상은 기대에는 살짝 못 미쳤지만 로봇이 그려준 특별한 것이라 기념으로 간직한다. 로봇박물관의 규모가 좀 더 크고 전시물이 좀 더 많아지고 콘텐츠의 구성이 좀 더 보강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로봇과 사람, 동물이 어울리는 복합문화공간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은 칭찬받을 만하다. 8천평의 자연환경에서 동식물과 교감하며 첨단 과학 기술과 자연의 조화 및 공존을 생각하게 이끌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역할이 작지 않다. 전시실에는 무엇이 전시돼 있을까. 격투 로봇, 스키 타는 로봇, 자동차 경주용 로봇, 장애물을 피해 다닌다는 물고기 로봇 등 다양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로봇으로 각종 운동경기를 해 볼 수 있고 증강현실 체험도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자연과 과학의 융합을 통해 어린이들의 꿈과 정서가 풍성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은 로봇 코딩과 프로그래밍 교육기관도 만들 예정입니다.” ■ 소외된 이웃과 함께 여는 미래 고양 로봇박물관은 2022, 2023년 경기도와 고양시가 지원하는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을 통해 고양 로봇박물관은 지역의 문화소외계층인 다문화가정, 지역아동센터, 장애우 어린이를 월 2~3회 초청해 문화학습체험 기회와 100여종 360여마리의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동물원 관람을 함께 진행했다. 로봇 공연과 4차산업 증강현실에 기반 한 VR스케치북, 미니코딩 체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울러 110여종의 다양한 야생동물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동물원 투어도 함께 진행했다. “지역 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에 작으나마 이바지할 기회를 가져 기쁩니다. 앞으로 장애인, 아동복지시설 등 문화소외계층으로 사업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싶습니다.” 공연과 체험은 재미가 있었지만 박물관의 규모나 전시물이 많지 않은 점이 아쉽다. 로봇박물관을 단독으로 이용할 수 없고 쥬쥬랜드 입장권을 사면 로봇박물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로봇박물관을 나서니 8월의 푸른 숲이 눈부시다. 무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실내동물원에는 도마뱀. 뱀, 거북, 사막여우, 기니피크, 토끼, 앵무새, 악어 등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빛난다. 모양은 쥐, 크기는 토끼와 비슷한 기니피크와 햄스터 같은 작고 귀여운 동물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작은 동물에게 먹이를 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화려한 빛깔의 앵무새도 아이들의 손바닥에 올려진 씨앗을 쪼아 먹는다. 새와 아이가 하나 되는 순간이다. 실내동물원을 지나면 야외동물원이다. 염소와 산양, 라마, 말이 산다. 카페에 들어와 더위를 식히는 새끼 양은 아이처럼 장난꾸러기다. ■ 사랑과 연민을 배우는 곳 동물과 어울리며 첨단 정보기술(IT)과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을 체험하는 고양로봇박물관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생명의 신비를 밝힐 수 있을까. 로봇은 인간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까. 생명과 첨단기술의 공존과 조화를 위해 무엇을 서둘러야 할까. 대여섯 살 여자아이와 어울리던 새끼 양의 장난스러운 몸짓이 춤추는 로봇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겹친다. 로봇의 역사를 훑어보며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할 2050년대를 상상해 본다.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필요한 것은 토끼처럼 연약한 생명체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새끼 양에게 먹이를 전해주던 여자아이의 선한 눈빛이 떠오른다. 고양시는 경기도에서도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장 많은 도시에 속한다. 한국인의 유전자를 형성한 쌀의 역사를 알려주는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향긋한 꽃 향기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장천꽃박물관도 가까이 있다. 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손때 묻은 유물로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배다골민속박물관과 유진민속박물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물을 소장한 중남미박물관도 빠뜨릴 수 없다. 주제를 가진 국립여성사전시관과 증권박물관도 마땅히 찾아야 할 곳이다. 고양아람미술관을 비롯해 고양어린이박물관,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 항공우주박물관을 찾으면 무더위도 잊을 것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부천은 만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도시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만화를 산업으로 예술로 승화시키는 기관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만화도서관’이 있다. 한국 만화 100주년에 맞춰 2009년 개관한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명소다. 우리 만화 유산의 가치를 발굴하고 보존하며 다양한 전시를 통해 만화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고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은 ‘오감으로 즐기는 만화천국’이다. ■ 오감으로 즐기는 만화 천국 종이책 대신 스마트폰으로 전달 매체가 바뀌었을 뿐 만화의 인기는 여전하다. 젊은 직장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드라마 ‘미생’이나 2020년 3월 수도권에서 18.3%라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일본 넷플릭스 순위 1위에 올랐던 ‘이태원 클라쓰’ 역시 원작이 웹툰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만화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지난 5월부터 국립민속박물관과 진행하는 K-Museums 공동기획전 ‘만화로 만나는 힙합’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만화와 힙합은 어떻게 만났을까. 전시를 기획한 박혜원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만화를 매개로 음악과 영상, 미술로 확장되는 융복합 전시를 통해 K-컬처 한국 힙합이 지닌 역동성과 자유로운 감성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했습니다.” 1부는 한국 힙합의 역사를 보여준다. “한국 힙합은 1989년 발표된 홍서범의 ‘김삿갓’을 원조로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를 거쳐 1999년 드렁큰 타이거가 등장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2010년이 되면 힙합은 한국의 가장 뜨거운 대중음악 장르로 올라서지요.” 세계가 주목하는 케이팝 산업의 흐름을 한국 힙합이 이끌고 있다는 설명이다. 2부는 자유분방한 ‘거리의 예술’로 불리는 그래피티를 소개한다. 작가 심찬양의 작품은 선과 색, 무엇보다 소재가 강렬하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는 심찬양의 작품에 흑인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보랏빛 수국꽃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의 옆모습이 매혹적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 소녀가 턱을 괴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 앞에 선다. 소녀 곁에 배치한 호랑이의 눈빛도 마주 선 이를 향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누가 한국인이냐?”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통해 작가가 생각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율한다. 스프레이로 이토록 섬세하게 사람의 얼굴, 생기가 도는 눈동자를 표현할 수 있다니 그 놀라운 재능에 다시 감탄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 전시실로 이동한다. 3부는 더 편하고 재미있다. 김수용, 이빈, 김재한 작가가 참여한 3부는 만화에 담긴 힙합의 정신을 친절하고 흥미롭게 전달한다.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을 작품의 주인공 입을 빌려 전달하는 작가의 발언이 단호하다. “그런 건 내가 결정해.” ■ 만화의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 한국만화박물관은 ‘아빠의 추억과 아이의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누구나 만화는 세대를 뛰어넘어 함께 즐길 수 있는 매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층에는 만화영화상영관과 체험마당,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와 수유실까지 갖추고 있다. 2층에 오르면 만나는 만화도서관은 만화를 맘껏 볼 수 있는 넓고 쾌적한 공간이다. “약 4만권의 만화가 진열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입니다.” 이미정 박물관 팀장의 안내를 받아 시설을 둘러보며 공간의 규모에 압도된다. “매달 두 차례 신간이 들어온다니 언제 찾아오셔도 따끈한 신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반열람실과 영상열람실, 아동열람실까지 갖춘 만화도서관은 ‘최고’라는 자랑이 지나치지 않다. 전문가 100명이 엄선한 ‘한국 만화명작 100선’과 이달의 추천 만화를 소개하는 오픈 라이브러리 ‘꿈바라’는 빠뜨리지 말고 챙겨봐야 하는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면서 만화박물관 1층과 2층의 내부를 내려다본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동행한 가족 단위의 관람객은 물론이고 혼자 찾은 듯한 중년 관람객도 많이 보인다. 세대와 성별을 떠나 누구나 즐기는 만화의 특성을 다양한 유형의 관람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층에 마련된 상설전시관은 볼거리가 가장 많은 공간이다. 상설전시관에 들어서는 관람객은 피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만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만화가와 학자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 ‘크로스오버 디지털 병풍’은 산수화 속에 만화 주인공을 등장시켜 만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그 영역을 확장한다. 만화의 명장면으로 이뤄진 ‘만화의 벽’을 통과하면 반가운 이름과 마주한다. ‘만화가게’와 ‘보물섬’, ‘아이큐점프’와 ‘윙크’ 등 옛날 만화 잡지가 가득하다. 공간을 디자인한 방식 또한 만화처럼 재밌다. 만화가 200여명의 펜이 전시된 유리관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강창욱 고우영 화백을 비롯해 200여명의 유명 작가가 사용한 펜이 전시됐다. 작가의 성품과 개성을 드러내듯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펜의 모양과 색깔과 길이도 제각각이다. 천계영 작가의 마우스와 최규석 작가의 드로잉패드는 시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젊은 여성의 손목이 ‘주먹대장’보다 더 굵다. 1909년 6월 창간된 대한민보 1면에 시사만평인 ‘삽화’를 연재한 이도영 작가의 선이 굵고 힘차다. 항일 구국정신을 고취하던 그의 만화 연재는 1910년 8월31일 대한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면서 마감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책은 무엇일까? 1946년 출판된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만화책으로 표지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최장 기간 연재된 김성환의 ‘고바우영감’ 원화(1951~2000년)와 발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1958년), 그리고 한국 현대 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1953~1954년)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만화는 전국 방방곡곡 마을로 스며든다. 상설전시실은 만화가 왜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전시관 밖에도 볼거리가 넘친다. 벽면을 장식한 그림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대표 만화 캐릭터로 만든 ‘만화가 명예의 나무’입니다. 만화가의 꿈을 키워주는 전시물이지요.” ■ 3대가 어울려 소통하는 곳 1970년대는 일간지 극 만화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고우영의 삼국지’가 신문 구독자 수를 크게 늘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 만화계의 황금기인 1980년대에 창간된 ‘보물섬’은 만화 잡지의 대명사였다. 이런 잡지를 통해 이수정의 ‘둘리’와 ‘하니’ 같은 유명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체험 전시관이 있는 4층은 특히 인기가 많다. ‘만화가의 머릿속’은 만화가의 작업 공간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꿈꾸는 만화가의 머릿속은 거울 미로로 구성됐다. 작품을 구상하고 마감 시간에 쫓기는 만화가의 일상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물론 만화박물관이라 해서 의자에 앉아 만화책만 보는 곳이 아니다. 만화 속 캐릭터가 돼 체육 활동이 가능한 ‘스마트 체육관’도 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를 배경으로 한 야구 체험을 즐기고 있다. 만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볼 수도 있다. 관람객은 자신이 원하는 만화 장면을 직접 선택해 촬영하고, 즉석에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만화 특별시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은 화장실에서도 만화를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만화 천국’이다. 만화의 재미에 풍덩 빠지면 한여름 무더위도 금세 지나갈 것 같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8. 파주 콩세유미술관

용미리 공원묘지가 있는 파주시 광탄면에 자리한 콩세유미술관(관장 정미애)은 이름부터 ‘타인지향형’이다. “프랑스어 ‘콩세이(conseil)’는 조언, 상담, 충고의 뜻을 가진 단어이고 뒤에 붙은 ‘유(you)’는 ‘너’라는 의미를 담았지요. 즉, 콩세유는 ‘너에게 조언한다, 너를 도와준다’라는 뜻입니다. 예술가로 세상을 혼자서 살 수 없듯이 예술로 사람들에게 충고도 듣고, 조언도 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미술관의 설립 이념과 운영 철학이 ‘콩세유’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미술관 이용진 학예사의 안내로 현재 진행 중인 초대전 ‘여행에서 두고 온 풍경’을 감상한다. 이달 31일까지 진행하는 초대전의 작가 나윤찬 화백은 팔순의 고령이지만 국민은행, 삼성생명, 제일은행 등 달력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느낀 감동과 행복을 가득 담은 작가의 작품은 색과 선과 공간 모두 여유롭고 편안하다. 전시실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정면에 배치한 그림을 감상하며 빙긋 미소를 짓는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의자 앞에 배치해 청량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주 전시실 주변으로 작은 전시실에서도 수준 높은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각으로 유명한 고암 정병례, 한국화가 최창봉 등 유명 작가의 수준 높은 작품을 만난다. 갤러리 1층 카페도 전시실과 별다름이 없다. 특히 카페 전면에 걸린 대형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바라기와 장미가 가득한 화면 중앙에 하얀 산양이 바다 한가운데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 산양은 작품과 미술관 곳곳에 등장한다. 출입문에 그려진 그림도 산양이고, 미술관 입구에 있는 조각 작품도 산양이다. “그 산양은 ‘미미’란 이름을 가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입니다. 미미라는 이름은 아름다울 미(美)와 산양 미(未)가 더해진 것이지요.” 소나무 숲에서 길을 잃고 잠에서 혼자 깨어난 미미가 가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정미애 관장은 열정적인 현역 작가다.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어렸을 때부터 붓을 잡고 놀았어요. 버스로 10시간 걸려 인사동까지 가서 아버지가 물감을 사다 주시고, 직접 데려가서 그림 구경을 시켜 주시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22세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는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미국, 프랑스 등 다양한 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그러다 2005년 ‘여인’ 연작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입지를 다진다. ■ 금강송과 산양 ‘미미’가 들려주는 이야기 금강송이 유명한 경북 울진이 고향인 정 관장은 울진의 명물인 금강송과 산양을 즐겨 그린다. 금강송 사이에서 뿔이 달린 하얀 산양을 발견한다. 금강송과 산양이 등장하는 작품 속에 정 작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투영돼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어린 딸을 소나무 숲에 데려가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아이가 길을 잃은 채 잠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어떤 집에 와 있더라. 그 아이가 양부모의 도움으로 훌륭하게 자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중학생이 됐을 때 드디어 알게 된다. 이야기 속의 어린아이는 바로 아버지 자신이라는 사실을. 딸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나무 숲에서 산양을 보곤 했는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산양이 마치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다. 현재 작가는 이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있다. “내 유년의 추억은 소나무 숲에 머물고 나는 지금도 그 숲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정미애 작가가 ‘춤추는 소나무’ 연작을 전시할 때 한 말이다. 2층 전시실에서 만난 ‘소광리 숲’(2018년)은 쭉쭉 곧게 뻗은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서 솔향이 풍겨나는 듯하다. ‘노을진 솔숲’(2019년)은 붉은 솔밭 중앙으로 태극처럼 난 길이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석양에 붉게 물든 솔숲의 환상적인 풍경이 음악처럼 펼쳐져 춤추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화면 구성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삼 일깨운다. 작가 아버지의 유년 경험을 담은 듯 ‘집으로 가는 길’은 꾸불꾸불한 미로여서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2018년의 작품인 ‘달과 함께 춤을’에 등장하는 달과 소나무도 춤추듯 어우러져 있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늘 봐왔던 어린 시절의 소나무는 내 애정의 시작점이자 작품의 원천이 됐다.” 연작 ‘숨바꼭질-산양아 어디있니’에는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내 그림 속의 산양은 그리움이고 사랑이다.” 이처럼 정 관장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소녀와 산양은 유년의 체험과 그리움이 깊이 스며 있다. 우리나라 산양은 현재 멸종위기 1급 동물로 개체 수가 1천마리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사냥하던 일제강점기에도 용케 살아남았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동물이다. 소나무 숲에서 길을 잃어버린 소년의 체험을 바탕으로 멸종위기 동물인 산양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업실에서 반추상적인 덧칠 기법으로 그린 800호 대작 ‘춤추는 소나무’(2019년)와 마주한다. 소나무 숲에 진달래가 피어 있고 언덕 너머로 초가집 마을이 보이는 봄날의 풍경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진 굵은 소나무들이 마치 바람을 받아 춤을 추는 듯하다. 소나무 숲에 노란 황톳길이 강줄기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하얀 짐승은 물론 산양이다. 작품의 구성도 재미있다. 작품 아래나 위로, 왼편이나 오른편으로 연결해도 구성이 자연스럽다. 작가 역시 사연이 많다. 미숙아로 태어나 살 가능성이 희박했던 작가를 아버지가 각별하게 보살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는 딸에게 꿈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작가는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2017년부터 제작을 시작한다. 어릴 적 소나무 숲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그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딸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함께 소나무 숲을 거닐며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려준다. 버려진 아이도 삶을 살아갔듯이 얼마든지 그 아이처럼, 산양처럼 잘 살 수 있다는 걸 어린 딸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캔버스에 담겨 있다. 그림은 다시 음악으로 진화해 애니메이션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 이웃과 더불어 지역과 함께 콩세유미술관을 개관한 2020년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미술관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10월 개관 기념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 ‘송환아 초대전’을 비롯해 10여 중견 작가의 초대전을 열었다. 또 ‘강록사 고려불화재현전’, ‘With 코로나: 소장품전’, ‘1종 미술관 등록기념 초대전-공존’, ‘무병장수: 호랑이 세화전’, ‘초대전-봄’, ‘오진윤 오정 2인전: 단색화 & 달항아리’, ‘혜음령 토끼 이야기’, ‘악의 꽃’, ‘파주 평화를 품다’, ‘에너지 페인팅’, ‘수채캘리전시회’, ‘화인전 그룹 초대전’을 열었다. 한편 지역민을 위한 미술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2022년 여름, 파주 우수 프로그램 사업의 일환으로 8주간 ‘그림을 통한 나의 재발견’을 주제로 파주 적십자 봉사원을 대상으로 미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가을에는 이들과 함께 김치와 반찬을 만들어 이웃에 나누는 ‘희망나눔, 반찬나눔’에 후원하고 동참한다. 지난해에는 파주시 5060 신중년 프로그램을 통해 가죽공예, 아크릴 페인팅을 시민들에게 지도해 큰 호응을 얻었다. 콩세유미술관은 그 이름처럼 지역과 이웃에 위로와 격려가 되는 문화예술의 푸른 숲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 양평 구하우스미술관

훌륭한 예술작품은 사람들의 생각은 물론이고 삶의 태도까지 바꿔 준다. 다산 정약용을 길러낸 청계산과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곳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관이 있다. 북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양평군 서종면 무내미길에 자리한 구하우스미술관(관장 구정순)은 도시적 외관을 가졌으나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미술관 출입문에 인형처럼 귀여운 푸들 ‘융’을 소개하는 안내문과 지붕 위에 올라앉은 고양이 조각 사진이 붙어 있다. 2016년 7월 문을 연 구하우스미술관은 현재 ‘개관 8주년 기념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미술관 곳곳에서 관람객을 지켜보는 고양이 조각 여섯 마리를 찾아 사진을 찍어 7월 말까지 댓글로 올리면 8명을 추첨해 경품을 준다고 한다. 미술관에서 개와 고양이를 동시에 만나다니! 문득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흥미로운 조언을 떠올린다. “신비한 영감을 원한다면 고양이를, 사랑을 원한다면 개를 키우라!” ■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미술관 첫 번째 방부터 미술관의 통념을 통쾌하게 부순다. 사방이 붉은 작은 방은 아이들 방 같다. 아이들이 방바닥에 놓인 인형과 블록을 가지고 놀거나 오토바이와 세발자전거를 타 볼 수도 있다. 옷걸이로 사용하는 붉은색 상자는 포르투갈 출신의 조아나 바스콘셀로스의 설치작품이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스타스키 브리네스의 우스꽝스러운 그림도 재미있다. 동심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은 다른 방에서도 만날 수 있다. 카페 ‘융’에는 관람을 마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고 어디에서 만날까 궁금했던 융이 카페에서 공을 굴리며 놀고 있다. 장식장에 전시된 소품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 방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지개 터널처럼 연출한 직선의 복도를 지난다. 복도에 놓인 수십개의 의자도 물론 훌륭한 예술품이다. 미술 서적이 가득 꽂혀 있는 서재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안경을 낀 대머리 사나이는 20세기 건축 혁명을 일으킨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이다. 그에게 헌정한 이 조각은 프랑스 출신의 자비에 베이앙의 작품이다. 그 옆에 놓인 의자는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유일하게 집에 둔 가구로 알려진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이다. 안내하던 정민찬 학예연구사가 유명 연예인들이 이 의자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하우스미술관의 상설 전시되는 작품 중 가장 주목되는 회화는 역시 데이비드 호크니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이다. 폭이 873㎝에 달하는 이 작품은 작가 호크니의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작가와 관계 맺은 여러 인물의 모습을 총망라해 2018년 제작한 것이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함축해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작가는 현재 80대 후반의 노인이지만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만큼 생각이 젊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의자에 앉아 이 놀라운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도 각별하다. ■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현대 미술과의 유쾌한 만남 구하우스미술관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매년 3~4회의 기획전을 열고 있다. 5월1일부터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구하는 ‘유쾌한 Fake’전을 진행하고 있다. 8월25일까지 열리는 ‘유쾌한 페이크-반전과 위트의 미학’전을 둘러보며 현대미술 작가들의 기발한 상상력과 참신한 기법에 거듭 감탄한다. 김경환, 김기찬, 다니엘 피르망, 마크퀸, 모현서, 소피칼, 이태수, 이광호, 토니 마텔리, 푸크예 플레르 등 주목받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특별전답게 관념의 틀을 부수는 신선한 작품과 마주한다. 서도호 작가의 ‘Gate-Small’은 한국 전통건축물의 문을 반투명의 비단 천으로 만들어 자유롭게 공간을 옮겨가며 전시할 수 있다. 피르망은 청바지를 입은 금발의 젊은 여성을 창조했다. 분홍색 옷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벽을 짚고 서 있는 여성의 불안한 뒷모습이 너무나 정교해 진짜 사람이 아닌지 관람객의 눈을 의심케 한다. 열서너 개의 붉은 사과를 주렁주렁 단 사과나무는 또 어떤가. 씨 킴의 조각 작품 ‘사과나무’ 아래 생쥐 한 마리가 숨어 있다. 차고 단단한 쇠로 한입 베어 물고 싶은 탐스러운 사과와 눈을 반짝이며 먹이를 찾는 쥐를 탄생시킨 작가의 손이 궁금하다. 호크니의 멋진 그림 옆에 왜 바위를 설치했을까? 푸른 정원이 훤히 비치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부석사 바위처럼 붕 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태수 작가의 ‘Stone Composition 006’이란 작품이다. 가까이서 아래를 보니 육중한 바위를 지탱하는 것은 얇은 유리판이다! “스티로폼과 포맥스로 실재 돌처럼 보이도록 극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조각 작품입니다.”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반바지 차림의 후드티를 입은 여성 모자에 화살이 박혀 있다. 모현서 작가의 작품은 쇠에다 숨을 불어넣은 듯 부드러운 피부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테이프가 붙어 있는 세 개의 종이가방도 철판으로 만든 조각이다! 너무나 정교해 말하지 않으면 조각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 함께 나눠요-예술품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 구하우스미술관 설립자는 한국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구정순 관장이다. ‘예술품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구 관장의 그림 사랑은 20대 젊은 날에 시작된다. 다니던 MBC 계열 광고회사가 마침 인사동에 있어 구 관장은 점심시간이면 주변에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어느 날 점심식사 후 전시장에 들렀다가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그림 한 점을 사면서 미술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국내 유명 기업의 CI를 진행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던 구 관장은 33세 젊은 나이에 미국 회사 디자인포커스의 한국지사장이 돼 KBS와 KB국민은행, 쌍용, 카스 같은 국내 기업의 CI를 제작해 명성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된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사회사업을 시작한다. 교육기관을 마음에 두기도 했으나 미술관 설립으로 방향을 정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찾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수집한다. 국내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작가보다는 창의성을 갖고 새로운 작품을 실험하는 작가를 더 주목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권대훈, 서도호, 데이비드 호크니, 구사마 야요이, 펠리스 바리니, 토비아스 레베스거, 데미언 허스트, 다니엘 뷔렌, 막스 에른스트 등 20세기 미술사에 거론된 작가부터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을 수집한다. 한편 구 관장은 소장 작품을 건물 안에 설치하면서 공간과 작품이 어울리는 방식을 깊이 궁리하다가 ‘집 같은 미술관’을 구상한다. 이러한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건축상을 받은 조민석 건축가에게 미술관 설계를 맡겨 마침내 ‘집 같은 미술관’을 완성한다. “구하우스미술관은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인 공간으로 표현됐지요. 외부는 직선과 곡선, 내부는 직각과 예각, 둔각의 코너와 오목하거나 볼록한 공간들을 만들어 내 상자형의 전시 공간들 속에서 다양한 공간 경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짐작하듯이 ‘구하우스’라는 독특한 이름은 설립자인 구정순 관장의 성과, 집을 뜻하는 영어 ‘하우스’(house)를 조합해 만든 것이다. ‘집 같은 미술관’을 표방하는 구하우스미술관은 이름에 걸맞게 예술과 디자인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2층 전시실까지 관람한 후 라운지를 통해 밖으로 나서니 사방이 온통 초록빛이다. 야생화가 가득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조각 작품을 감상하다가 문득 올려다본 별관 지붕에서 고양이 조각을 발견한다. 구하우스미술관이 자리한 양평군 서종면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린 ‘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과 한국문학 및 세계문학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잔아박물관이 이웃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여주시 미술관 아트뮤지엄 려

‘여강’으로 불리는 남한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주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풍성한 문화유산으로 이름이 높다. 여주시 명품로 370 여주프리미엄아울렛 안에 자리한 ‘아트뮤지엄 려’는 여주시가 직영하는 공립미술관이다. 2019년 11월 개관한 여주시 미술관 아트뮤지엄 려는 짐작하듯 여강(驪江)과 관련이 깊다. 한글로 흘려 쓴 ‘려’라는 서체에서 신륵사를 품은 여강의 짙푸른 물줄기를 떠올린다. ‘려’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이 숨 쉬는 여주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붓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일인데도 아트뮤지엄 려를 찾는 관람객이 적지 않다. “20여회의 공모 선정 작가 전시와 상·하반기에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지요. 전시와 연계한 창의 체험 교육프로그램과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다양하게 기획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평균 두 번이나 되는 전시를 기획하려면 얼마나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할까? 교육을 담당하는 박소희씨의 안내 말에서도 아트뮤지엄 려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예술과 관람객 간의 활발한 소통과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려는 관계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고맙다. 7월 현재 아트뮤지엄 려는 어떤 전시로 관람객을 유혹할까? ■ 사계절 부는 민화의 바람 아트뮤지엄 려는 지난 7월5일 ‘제8회 여주민화협회·(사)한국민화협회 여주지회 회원전’을 열었다. “2016년 창립한 여주민화협회는 매년 정기 회원전을 진행하고 있지요. 오는 2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민화의 사계(四季)’를 주제로 총 22명의 작가가 참여해 작품 50여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전통민화를 충실히 재현한 작품을 비롯해 민화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창작 민화 등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민화의 매력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뜻 봐도 회원들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가들은 작품에 어떤 소망을 담았을까? 지금 한창 은은한 향기를 주위에 퍼뜨리고 있을 분홍빛 연꽃이 소담스럽다. 민화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경옥 작가의 작품 ‘춤추는 연꽃’이다. 다섯 봉우리와 해와 달이 그려진 서지원 작가의 ‘일월오봉도’ 앞에 선다. 짙푸른 소나무와 출렁이는 파도, 시원하게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수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산과 바다에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가득하다. 여주의 특산품인 쌀을 연상시키는 안비경 작가의 ‘일월풍요도’는 관람객에게 빙긋 여유로운 웃음을 선사한다. 푸른 바탕에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용의 자태가 늠름하다. 이경미 작가의 ‘운룡도3’를 보며 대한민국의 국운이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기원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전수진 학예실장의 친절한 해설을 들으며 전통에 더한 새로운 기법에 주목한다. 장민정 작가의 ‘큐알코드 책거리도’는 민화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민화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까닭을 넉넉히 알 것 같다. “전시가 열리는 기간 전시 연계교육 ‘민화 우드 씨어터 만들기’를 통해 관람객들이 직접 민화를 만들고 그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민화를 경험할 기회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사계절이 지닌 아름다움과 민화의 매력을 새롭게 느끼고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트뮤지엄 려는 미술관의 문턱을 낮췄다. 다양한 기획과 실험을 통해 현대미술의 낯설고도 흥미로운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와 분야를 아우르는 통섭으로 현대미술의 여러 얼굴을 보여 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실무자의 말처럼 아트뮤지엄 려는 예술로 관람객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이를 위해 전시와 연계한 풍성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해 관람객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지난 3월 열린 아트뮤지엄 려의 상반기 특별전은 ‘봄·채·비 展’이었다. 40년 넘게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선과 색’의 14명 작가와 여주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7명이 참여해 ‘보다’, ‘채우다’, ‘비우다’라는 의미를 담은 ‘봄·채·비 展’은 아트뮤지엄 려의 면모를 충실히 보여줬다. “아트뮤지엄 려는 장르와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의 통섭을 추구합니다. 최고의 전시기획을 통해 지역의 우수한 작가를 발굴 지원하고 체험 중심의 교육 기획을 통한 양질의 미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창작의 산실 2019년 11월15일 개관기념 특별전 ‘동(童). 동(動). 동(同)’을 시작으로 아트뮤지엄 려는 현재까지 폭 넓고 다양한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미술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2024 아트뮤지엄 려 아카데미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3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하는 ‘현대민화’는 늘 수강생이 몰리는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4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개인과 단체,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2024 융합예술 교육 ‘아트&뮤직 려’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하는 대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전시관 맞은편에 있는 교육실로 향한다. 한창 교육 중이라 교육실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잠깐 엿본다. 밖에서도 수강생들의 열기가 느껴진다. 예술은 여전히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무엇이다. 체험보다는 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예술은 보는 것보다 체험하고 창작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 풍성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예술의 즐거움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보람된 일이다. “전시 연계 체험 교육프로그램 ‘나의 작은 아뜰리에’는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참여자는 다양한 미술 재료를 다루며 미술작가가 돼 볼 수 있지요.” 2024년 상반기에 진행한 교육은 백드롭 페인팅, 수채화, 석고, 아크릴물감, 도자기, 민화 등 7개다. 성인 미술 강좌 ‘아카데미’는 1년의 긴 호흡으로 미술 이론 및 미술 실기를 배울 수 있는 알찬 프로그램이다. “현대민화를 비롯해 소묘, DSLR사진, 수채화, 유화 총 다섯 강좌가 개설돼 있습니다. 30주 과정을 마치는 12월에는 수강생 작품으로 ‘아카데미 수강생 전시’를 엽니다.” ‘생각이 말랑말랑, 미술관 나들이’는 유아 대상 교육프로그램이다. 2024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신설된 이 프로그램은 여주지역의 어린이집, 유치원이 단체로 참여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미술관 관람 예절과 미술관에 대해 입체적으로 배운다. 전시 감상을 도와주는 활동지와 미술 재료를 사용한 미술 체험도 진행한다. 어린 시절 미술관에서 경험한 체험은 소중하다. 미술관을 즐겁고 친숙한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 ‘공존’을 지향하며 문턱을 낮춘 미술관 아트뮤지엄 려는 지난 4월 여주시 신륵장애인보호작업장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장애인 대상 미술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동이 어려운 점을 고려해 매주 목요일 신륵장애인보호작업장을 찾아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장애인들에게 문화예술을 누릴 기회를 제공하고 숨겨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여주시의 정책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전시와 음악을 함께 즐기는 ‘아트&뮤직 려’가 진행된다. 미술관의 작품과 클래식부터 가곡, 재즈, 탱고 등 매월 다양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흥겨운 시간이다. 아트뮤지엄 려에서 진행하는 모든 교육프로그램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여주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지역작가들이 교육 강사가 돼 교육 참여자를 만난다는 점이다. 시민에게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작가에게는 지역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는 상생의 문화가 아름답다. “문턱이 낮은 미술관을 지향하는 아트뮤지엄 려는 ‘공존’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합니다. 우리 미술관을 찾으면 다양한 세대가 어울려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5.성남 디자인코리아뮤지엄

유럽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비싸게 팔리는 TV와 냉장고가 한국산이다. 휴대전화와 자동차도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제품의 성능은 물론이고 디자인도 빼어나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이제는 한국 제품을 평가할 때 ‘K-디자인’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한국의 제품이 어떻게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성남시 분당구 양현로 322에 있는 ‘디자인코리아뮤지엄’(관장 박암종)은 그 역사와 비결을 알려주는 곳이다. 디자인코리아뮤지엄의 전신은 2008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열었던 ‘근현대디자인박물관’이다. 2019년 6월 성남시 분당구에 자리한 코리아디자인진흥원은 ‘디자인으로 강해지는 대한민국 경제’를 추구하는 공립기관이다. 디자인진흥원 지하 1층에 디자인코리아뮤지엄이란 새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연 박 관장은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전달한다. “코리아디자인진흥원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공간을 제공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정부나 지자체가 공간을 제공하고 사립 박물관이 콘텐츠를 채우는 좋은 사례라 할 것입니다.” ■ 태극기부터 2002년 월드컵 축구공까지 역사적 가치가 높고 희귀성이 있는 유물 1천600점을 전시하고 있는 디자인코리아뮤지엄 곳곳에는 설립자의 정성과 반짝이는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밤하늘을 수놓는 북두칠성을 본떠 전시 공간을 일곱 개로 나눈 것도 마찬가지다. 국내 근현대 디자인의 발전 및 변화 과정을 개화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40여년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첫째 공간은 ‘태동기’라 이름한 1876년 개항부터 일제에 나라를 잃은 1910년까지다. ‘세계 근대 문화의 유입과 디자인 개념의 태동’을 보여주는 이 공간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희귀한 근대 유물로 가득하다. 최미홍 학예사의 안내로 한국디자인의 역사를 살펴본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과 순종 및 영친왕의 사진이 인쇄된 액자에서 금박의 태극 문양을 발견한다. 태극기는 언제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게 됐을까? “1882년 미국에서 펴낸 해양 국가를 소개하는 책자에 태극기가 처음 실렸습니다.” 우리나라 디자인의 시작을 알리는 태극기가 최초로 실린 역사적인 책을 다시 꼼꼼히 살펴본다. 1873년 일본에서 펴낸 ‘지구국명’이란 책도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조선국기’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태극 이전에는 청룡이 우리나라를 상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82년 이후 태극 문양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1896년 창간한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제호 ‘독립’과 ‘신문’ 사이에 태극기를 넣었고 1908년 최남선이 창간한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에도 태극 문양을 사용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와 국한문 혼용의 최초 농서 ‘농정촬요’, 그리고 민간인에 의해 출판된 최초의 근대 출판물인 ‘충효경합벽’, 대한제국 학부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정 미술 교과서 ‘도화임본’도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전시실에는 ‘최초’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유물이 가득하다. “우리 박물관은 개화기부터 2000년대까지 최초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여러 가지 전시하고 있지요. 전체 7개 섹션으로 1876년 개항부터 2002년 월드컵까지 중요한 키포인트가 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룩한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면 민족성을 지키면서 문화적 적응력을 가지고 활동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유물에서 발견하는 한국인의 미감과 창조성 두 번째 공간은 1910~1945년 일제강점기를 다루는데 ‘정체기’라 표현했다.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식민시대의 디자인은 어떤 모습일까. 검은빛이 감도는 유리병에 ‘활명수’란 글자와 쥘부채 문양이 선명하다. 활명수는 1897년 민병호가 국민 보급을 위해 궁중의 비방과 서양 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국내 최초의 양약이다. 활명수에 새겨진 쥘부채는 1910년 국내 최초로 특허국에 등록한 최장수 상표이기도 하다. 식민의 어두운 시대에도 한국인의 창조성은 빛을 발휘한다. 1930년대에도 짝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당시 여성들에게 ‘박가분’은 인기 만점의 상품이었다. 진열장에 나란히 놓인 ‘박가분’과 ‘촌가분’ 통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박(朴)과 비슷한 한자 촌(村)을 사용한 ‘촌가분’은 짝퉁입니다.” 설명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비로소 구분된다. 촌가분보다 발전된 디자인을 보여주는 ‘한양분’을 거쳐 ‘설화분’에 이르면 디자인도 창조적으로 진화한다. 고무신 의장등록증, 춤추는 남녀의 다리와 오선지가 그려진 성냥갑 같은 유물은 1930년대 식민지 문화를 충실히 증언하고 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온 천지를 뒤덮었던 일본어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글의 시대가 열렸음을 민의원 선거 벽보나 반공 포스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깡통을 잘라 만든 호롱불과 유리통에 심지를 넣은 남포등은 분단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고단한 시절을 증언한다. 이런 궁핍한 시절에도 ‘사상계’를 비롯한 다양한 잡지가 발행돼 지식의 갈증을 풀어줬다. 안내하던 최 학예사가 라디오 앞에서 멈춰 선다. 이 작은 라디오는 무슨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 라디오인 ‘금성 A-501’입니다. 우리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유물이지요.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출시한 국산 1호 진공관 라디오인데 기적처럼 탄생한 가전제품입니다.” 유럽인들의 안방을 점령한 TV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의 시작을 알리는 유물을 다시 들여다본다. ■ 유물로 쓴 한국 디자인 140년의 역사 천재 시인 이상이 디자인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 의학박사 공병우의 세벌식 한글 타자기, 최초의 가로쓰기 월간 잡지 ‘뿌리깊은나무’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고 도입됐던 다양한 디자인 사료들은 잘 챙겨봐야 할 유물이다. 국내 최초 가전제품 체신 자동 1호 전화기, 금성사 냉장고 GR-120, 금성사 텔레비전 VD-191, 삼성 휴대전화 SH-100도 만나볼 수 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던 교수가 한국 근현대사가 담긴 디자인 유물을 30년간 수집한 계기는 무엇일까. 여러 인터뷰를 참고하면 화봉문고 여승구 회장과의 인연으로 수집에 나선다. 어느 날 여 회장이 월력이 그려진 목판화 두 점을 구해 그중 하나를 박 관장에게 선물한다. 박 관장은 자신을 수집가의 길로 이끌어 준 여 회장에게 깊이 감사한다. 아무튼 이런 인연으로 박 관장은 30년에 걸쳐 국내 라디오, 타자기,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맥주병, 소주병 등 디자인이 가미된 ‘최초’의 산업재를 수집한다. 수집은 시각디자인 전공자인 박 관장을 한국 디자인사 전문가로 거듭나게 한다. 1995년 월간 디자인 편집장의 제의로 ‘한국디자인 100년사’를 6회에 걸쳐 연재하고 박사학위 논문도 디자인사를 다뤘다. 디자인의 가치에 주목하고 사비를 털어 박물관을 설립한 박암종 관장의 활동이 궁금해진다. 선문대에서 디자인을 가르친 박 관장은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장, 서울시박물관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상임고문과 한국사립박물관협회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 디자인계의 중진이다. 박 관장에게 앞으로 계획을 들어본다. “우리나라 디자인사의 중요 유물을 꾸준히 찾아내 소장하고 연구해 상설전과 특별전을 통해 우리 생활에서 디자인의 가치와 유용성을 인식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정부의 박물관 활성화 정책에 발맞춰 인증제에 대비한 소장 유물의 디지털화를 구축하고 학생 체험프로그램도 더욱 풍부하게 마련할 계획입니다.” 디자인코리아뮤지엄을 찾으면 디자인 한국의 미래를 예감할 수 있다. 이 여름 우리 생각의 물길을 시원하게 열어줄 디자인코리아뮤지엄을 찾아 성남으로 나들이를 떠나보자.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4.오산 유엔군 초전기념관·스미스 평화관

“전쟁의 시작이었던 곳에서 평화의 시작을 함께해요.” 지난 2013년 개관한 유엔군초전기념관이 관람객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2024년 6월 현재, 남과 북의 대결 상황은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 6·25전쟁 74돌을 맞아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알려주는 곳,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을 찾았다. 평화공원에 자리한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스미스 평화관이 나란히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특별전 관람에 앞서 무장애평화숲길을 걸으며 죽미령의 특별한 지형을 살피고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무장애평화숲길은 어린이는 물론이고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 몸이 불편하거나 취약한 사람들도 편리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고 조경이 아름다워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다. 흥미로운 점은 어린이와 동행한 젊은 부부들이 유난히 많다는 뜻밖의 사실이다. ■ 전쟁이 시작됐던 곳에서 꿈꾸는 평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선발대로 파병된 미국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의 지휘관이 스미스 중령이다. 인류가 참혹한 전쟁을 통해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산시가 유엔군 첫 전투지와 지휘관의 이름을 딴 기념관과 평화관을 죽미령 평화공원에 세운 것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다. 평화공원을 산책하며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느끼도록 설계됐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540개의 돌로 쌓아 올린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 및 6시간15분 동안 벌어진 죽미령 전투와 참전 용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계 및 햇살 모양의 조형물을 비롯해 평화공원 내에는 조형적으로도 멋진 기념물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한 스미스 부대는 105㎜를 주력 무기로 삼아 T-34 전차 33대 및 인민군 5천여명과 맞서 싸운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전차 6대를 파괴하고 북한군 127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적잖은 병사가 포로가 됐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을 잠시 늦추고 적군의 전투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 죽미령 정상에 올라 지형을 살피면 누구나 스미스 부대가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 까닭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는 죽미령 정상을 지나면 쌍안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스미스 중령이 나타난다. 스미스 중령의 동상 옆에 서니 오산시의 전경이 훤하게 펼쳐진다. 특별전을 보기 전에 죽미령을 탐방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참전의 용기와 평화의 의미를 ‘동감’ “이번 특별전 ‘동감(同感)’은 개관 이후 개최되는 첫 소장품 전시입니다. 죽미령에서 발견돼 유엔군초전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투의 흔적들과 개관 후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수집해 온 소장 자료를 통해 참전의 용기와 평화의 의미에 대한 참전 용사의 마음에 동감해 보자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특별전을 기획하고 준비한 유엔군초전기념관 고아라 국장의 안내로 전시실에 들어서니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6·25전쟁 당시에 전투를 벌인 부대의 군기(軍旗)들이다. 6·25전쟁 때 헌신한 노무단, 학도의용군, 여군, 반공유격대, 철도 종사자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숨은 영웅들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죽미령 전투를 다룬 미국 잡지가 눈길을 끈다. 전시 공간 세 곳에 설치된 도장을 모두 찍으면 삼색으로 된 이파리 모양의 24사단 부대 마크가 새겨지도록 한 것도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다. 대한제국 광무 1년, 즉 1897년 제정된 우리나라 최초의 무공훈장이 ‘자응장’이라는 사실도 이곳에서 배운다. 시선이 고정되는 전시물이다. 죽미령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은 그날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북한군이 사용했던 따발총 탄창에는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총알이 온전한 모양으로 꽂혀 있다. 생각 없이 지나칠 만한 유물도 있다. 자세히 보니 앞부분과 뒷부분이 끊어진 낡은 신발이다. 낡은 허리띠와 허리가 잘린 해진 신발에도 전쟁의 아픔이 묻어 있다. 보존 상태가 좋은 대검도 보이는데 기념관 근처 외삼미동에 거주하는 시민에게 기증받은 사실을 들려준다. 푸른 바탕의 유엔기, 붉은 바탕에 별을 넣은 북한기 및 낫과 망치와 별을 새긴 소련기가 나란히 전시됐다. 평양을 탈환했을 때 참전 용사가 발견한 것이라는데 기념관의 대표 유물에 속하는 것이다. 두 장의 사진은 충격적인 사연을 들려준다. 포로가 된 스미스 부대원들이 총으로 무장한 북한군의 감시를 받으며 군중대회에 동원된 모습이다. 날짜까지 뚜렷하다. 전투를 치른 지 3일이 지난 1950년 7월8일, 서울시청 앞에 대열을 지어 앞줄에 앉아 있는 스미스 부대원들의 불안한 표정이 읽힌다. 해병대나 맹호부대, 백마부대는 익히 들었지만 맹호부대가 수도사단이고 백마부대가 보병 제9사단이라는 사실도 특별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 1950년 9월6일 창설된 여군의 활약상,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활약한 학도의용군, 노무자부대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기념관이 제시한 ‘숨은 영웅을 위한 군기를 만들어 보아요!’라는 체험은 관람객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유엔군초전기념관의 특별전 ‘동감’의 공간의 구성이 독특하다. 작은 공간을 채운 것은 스미스 부대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념품, 죽미령에서 발굴한 유물이 전쟁의 흔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6·25전쟁 당시의 숨 막히는 상황을 작은 공간을 채운 흑백사진을 통해 체험한다. 잠시 사진을 응시하면 사진이 말을 걸어온다. 7월5일, 그날 이곳 죽미령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스미스 부대원들의 평화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칠면조가 그려진 1949년 가을 추수감사절 카드, 그날 만찬 음식을 만들었던 취사병들의 활짝 웃는 모습, 2차대전을 끝내고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순간을 기대했을 병사들의 표정은 들떠있다. 갑자기 수송기를 타고 이름도 낯선 코리아 부산으로 실려와 대전을 거쳐 오산에서 적을 막기 위해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도 보인다. 1950년 7월 5일, 그날을 기억하는 오산 이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영상으로 들으며 분단 현실과 전쟁 불감증에 걸린 한국인들의 오만을 떠올린다. ■ 그들이 바라던 내일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기념물이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다. 전투 시간을 형상화한 평화 시계와 스미스 부대원들의 행진 모습을 형상화한 미러 폰드, 540명의 병사 이름이 새겨진 기념물과 그들이 타고 온 C-54 더글러스호도 평화의 소중함을 전달하는 기억의 소재다. 카페 ‘평화’에 들러 차를 마시며 주변의 풍광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화공원 안에는 유아들의 놀이터가 있다. 유엔기가 펄럭이는 ‘평화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스미스평화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오산 죽미령 전투, 6·25전쟁, 유엔군 참전용사, 평화의 소중함에 대한 다양한 주제와 만난다.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 전시실이 스미스 평화관의 특징이다. 부산에 상륙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원들이 기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하는 과정을 비롯해 다양한 체험을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첨단 장비로 다양한 체험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놀이터를 갖춘 유아휴게실과 수유실을 갖추고 있는 카페 ‘평화’도 쉼터로 훌륭하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도한다. 평화는 우리 민족이 서둘러 반드시 이룩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3.연천 백학역사박물관

길 옆 삼각형 기둥을 왜 먼저 보여주는 것일까? “삼각형으로 보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사실은 육면이지요. 아래 윗면까지 합해 팔면이 되도록 만든 것은 3·8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백학역사박물관 금가현 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평범하게 보이던 마을 길이 새롭게 다가온다. 광복을 맞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북을 나누는 금단의 표지를 세웠던 현장을 지켜봤을 연천군 백학면 주민들은 1945년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 숨은 영웅 지게부대와 아침해를 기리는 백학마을 백학마을이 간직한 특별한 역사와 마주하기 위해 백학광장부터 찾는다. 백학은 ‘제1호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이다. 광장에 설치된 한반도 모형과 펄럭이는 태극기가 이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6월1일 이곳 백학광장에서 ‘의병의 날’ 행사가 열렸지요. 경기도 최초의 일입니다.” 광장 중앙에 병풍처럼 장식한 조형물에 새긴 ‘숨은 영웅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금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대리석에 새긴 그림과 안내문을 살핀다. 아침해(Reckless) 생애: 1946년 7월~1968년 5월 3일. 복무기간: 1952년 10월26일~1959년. ‘미국 제1해병사단에서 군마로 활약하면서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 미 해병대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지게에 포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지게부대’의 활약상을 알리는 글을 새겨 놓았다. 그렇다! 이름도 낯선 지게부대와 군마 레클리스가 바로 ‘숨은 영웅들’이다. ■ 주민들의 정성으로 세운 마을박물관 백학역사박물관 입구에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박물관이 있는 건물 1층은 ‘DMZ마을여행사’다. 때문에 박물관 안내를 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용맹한 사람들의 후예’ 담당자의 연락처를 적어 놓았다. 박물관의 전시실이 초등학교 교실 한 칸 정도만큼 작은 것도 놀라운데 그마저 지하다! 박물관 출입문 앞에 연두색으로 그린 백학면 지도가 한반도를 닮았다. “지도 한가운데로 점선과 좌우 두 개의 선이 지나가는 것은 휴전선이 백학면을 통과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도 앞에는 숨은 영웅들이 사용했을 법한 낡은 지게에 녹슨 탄약통이 실려 있다. 백학면 100년의 역사를 담은 그림으로 채운 박물관 벽면이 인상적이다. 태극기를 들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연하다. “1919년 3월21일, 두일리 장날에 2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연천지역 만세운동은 백학면 두일리장터에서 시작됐지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그림이 또 등장한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을 묘사한 그림 속의 사람들 표정이 밝고 환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림은 바탕 색깔이 어둡고 침울하다. 분단된 지 2년 만에 3·8선이 지나가는 백학마을은 격전지가 됐다. 전투기가 날고 포탄이 터지며 집이 부서지는 참혹한 광경, 지게에 포탄을 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과 인민군의 탱크에 맞서 바주카포를 쏘는 국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광장에서 보았던 영웅 ‘레클리스’가 포탄을 메고 산을 오르는 그림도 있다. ■ 낡은 철모와 수통에서 찾아낸 자유와 평화 수색대대 병사들이 사용했던 식기와 반합,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듯 흙이 켜켜이 묻은 탄약통과 수류탄이 보인다. 갈현리에서 발견된 박격포탄을 기증한 사람은 주민 주윤기 씨, 60㎜ 포탄의 기증자는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금 관장이다. 개머리판이 사라진 소총과 녹슨 탄피, 영국군과 미군이 사용했던 철모도 있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으니 이 철모의 주인은 아마도 전사했으리라. 삐라로 불리는 전단도 여러 점이 전시됐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개로 묘사한 그림과 ‘각을 뜨자!’란 구호가 새겨진 삐라는 자세히 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야전삽과 곡괭이와 호미는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들이 호를 파거나 진지를 구축할 때 사용했던 유물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3·8선 부근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의 실상을 알려주는 특별한 유물이다. 이러한 전쟁 유물을 발굴해 마을에 기증한 수색대대 지휘관의 마음이 갸륵하다. 1950년대의 담배 ‘학’과 낡은 성냥갑도 지나간 세월을 알려준다. 지게부대 부사관으로 활약한 금동훈 유공자가 남긴 말이 가슴에 먹먹하다. “지게부대가 군복 없는 군인들이었지. 서른부터 뽑는데 난 열일곱에 들어갔지 뭐야. 밥도 못 먹고 하루에 오십리를 걸어 다녔는데 포 떨어지면, 배 뒤집히면 옆이고 앞뒤고 그냥 다 죽는 거야. 명예도 군번도 없었어.” 금 관장이 가리키는 흑백사진을 자세히 살펴본다. 지게를 진 소년병이 전쟁과 배고픔을 경험한 적 없는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한 끼 밥이,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 낡은 손목시계와 휴대전화, 통제구역을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이 온몸으로 전쟁을 겪고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간 한 사람의 고단한 일생을 증언하고 있다. 출판사 봄봄에서 펴낸 ‘달려라, 아침해’는 2015년 세종도서에 선정된 동화책인데 6·25전쟁의 숨은 영웅 레클리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두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순겸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6·25전쟁에 참전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강중기 유공자까지 16분의 숨은 백학 출신 영웅의 사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미 해병대가 영웅 레클리스와 찍은 사진이다. 통신 전선을 말 안장에 매단 사진 아래에 이런 설명문이 붙어 있다. “이 작은 망아지는 열 명의 해병대원보다 더 많은 양의 통신 전선을 감을 수 있었다.” ■ 아침해와 함께 통일을 꿈꾸는 마을 제주에서 태어난 암컷 경주마 ‘아침해’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두 달 정도 훈련을 받고 미 해병대에 소속된다. 아침해의 활약은 모두의 상상을 넘어섰다. 차가 갈 수 없는 험한 길을 달리며 포탄을 실어 날랐고, 한두 번 동행하면 혼자 보내도 길을 찾아냈을 정도로 영리했다. 산길을 오를 때는 물자를 실어 날랐고, 내려올 때는 다친 병사들을 데리고 복귀했다. 특히 1953년 3월 연천지역에서 중공군과 벌인 ‘네바다 전투’에서는 닷새 동안 쉼 없이 물자를 옮기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이때 미 해병대는 아침해에게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다’는 뜻의 ‘레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레클리스는 5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1959년에는 최초로 하사로 진급한다. 1997년 미국의 ‘라이프’지는 레클리스를 워싱턴과 링컨, 마더 테레사와 함께 100대 영웅으로 선정한다. ■ 2천600명 주민 모두가 주인공 2021년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사업으로 마련한 DMZ백학문화활용소 역시 훌륭한 전시실이다. 문화활용소 벽에 백학마을 주민 모두의 이름을 새긴 2천600개의 명패가 붙어 있다. 2017년 우수마을기업 경진대회에서 수상한 상패, 따복공동체 활성화 유공 표장 등 지난날의 시간을 추적할 수 있다. 2018년부터 백학중학교와 DMZ백학문화마을사업단이 함께 2003년에 5호를 펴낸 ‘백학마을 이야기’도 현재 진행형이다. 마을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다문화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레클리스 카페’도 백학역사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커피를 마시며 카페를 둘러본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과 찍은 레클리스 사진, 백학을 찾아 방한했던 미국 참전 용사들의 자필 서명, 연천군 출신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물도 전시됐다. “영웅마 레클리스를 알리기 위해 2014년부터 ‘아침해 기념사업회’를 결성했지요.” DMZ백학문화마을사업단은 백학면 적십자와 지역 군부대, 주민들의 도움으로 레클리스 일대기를 20여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아침 해맞이길’도 만들었다. 이처럼 백학역사박물관은 지역의 여러 문화공간을 전시실로 삼고 있는 아주 특별한 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2.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유월의 화성시 제암리 풍경은 평화롭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먹이를 찾는 하얀 백로의 몸짓이 여유롭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니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나타난다. 3·1운동의 정점에서 일어난 ‘4·15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5주년을 맞은 지난 4월15일 문을 연 기념관은 대지 2만1천322㎡(6천450평)의 너른 대지에 세워져 있다. ■ 미래를 여는 3·1운동 순국유적지 역사문화공원과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 설계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출입구로 향하는 길이 독특하다. 길게 이어진 콘크리트 벽과 바닥에 깔린 수백만개의 자갈돌이 자연스럽게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밝은 햇빛과 자유의 소중함을 관람객에게 알리고 싶어서일까? 기념관을 지하에 배치한 건축가의 생각이 문득 궁금하다. 김나은 학예사의 안내로 상설전시관을 둘러본다. 오른편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전시실, 왼편이 상설전시실이다. 통유리 천장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긴 복도를 환하게 비춰준다. 전시실이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현실을 상징하듯 어둡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남녀를 표현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독립의 염원-구국의 빛이 되다’라는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보흥학교, 전곡사숙, 제하여학교는 화성 사람들의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준다. 만국기가 걸린 향남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줄다리기하는 가을운동회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은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화성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네 개의 무궁화꽃이 역동성을 살린 태극 문양이 선명한 이 유물은 1902년 대한제국의 홍문관 제학 문임이 작사한 애국가를 담고 있다. 남양지방금융조합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해 1908년 5월부터 9월까지 기록한 공문서에는 무슨 비밀이 담겨 있을까? 이 문서를 작성한 금융조합의 일본인 이사 이로카와는 남양 보흥학교를 아동에게 배일사상을 주입하는 ‘폭도양성소’라 하고 남양군 지역을 예부터 배일사상이 가장 격렬한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르 쁘띠 주르날’에 실린 채색 그림이 참혹하다. 하얀 도포에 갓을 쓴 장정이 칼을 뽑아 들고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고 있다. 그는 곧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미 그 옆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여럿 쓰러져 있다. 무기력했던 정부와 달리 조선 민중들의 저항은 질기고 거셌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화성인의 역사가 빛바랜 종이 속에 담겨 있다. 1908년 작성된 화성 출신 ‘의병 김선여 유성구 진희서 판결문’이나 화성의 역사를 기록한 ‘남양관계서류’가 그것이다. 화성인들도 무장투쟁을 벌이고,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를 설립하며,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펼친다.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노예가 됐지만 아주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누르기 위해 총검을 든 헌병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감행한다. 10년의 세월을 숨죽여 살았던 한국인의 분노는 1919년 3월 폭발한다. ■ 마침내 떨쳐 일어서다 3월21일 동탄에서 시작된 화성의 3·1운동은 송산, 서신, 우정, 장안, 향남, 팔탄 등 화성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화성의 성난 시위 군중은 일제 식민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부수거나 불태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순사를 때려죽이기도 한다. 격렬한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에 그림을 곁들인 일제의 기록물을 살피며 저들의 철저함을 확인한다. 그러나 화성 사람들은 용감하고 의리가 있었다. 김 학예사가 상소문처럼 길게 펼쳐진 문서에 담긴 사연을 들려준다. “이 문서는 순사부장을 때려죽인 주모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문상익, 홍준옥 두 분을 구출하기 위해 송산면민이 연명한 탄원서입니다. 송산면장 홍달후를 비롯한 면민 33인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것이지요.”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 못지않은 사연에 감동이 밀려온다. “홍면옥 선생님은 송산면에서 3일 동안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죄목으로 체포돼 15년의 형기를 살았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에게 내린 최고 형량이 3년입니다. 선생이 받은 15년은 독립투사에게 내려진 가장 긴 형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 모진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날을 기념해 찍은 사진을 다시 살펴본다. 두 개의 기왓장과 글자가 새겨진 은주전자와 은술잔에는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검정 두루마기에 손에 꽃을 든 홍헌 선생이 이 유물의 주인공이다. 일제의 방화로 졸지에 집을 잃은 이웃들에 자신의 산을 개방해 목재를 나눠줘 집을 짓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은 물품을 제작해 전달한다. “은주전자에 새겨진 글자 ‘홍헌군정’은 ‘홍헌 선생께 드립니다’라는 뜻이지요.” ■ 간장독과 낡은 궤짝에 담긴 항쟁의 역사 전시실 곳곳에서 당시의 상황과 사정을 알려주는 이미지와 영상물을 만날 수 있다. 독립운동을 알려줄 유물은 거의 사진과 문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영상물을 감상한다. 화사하게 봄꽃이 활짝 핀 봄날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비친다. 꽃잎이 지고 어둠이 몰려오더니 천둥과 벼락이 친다. 사방을 벽으로 막더니 문이 닫히고 총성이 울리며 벽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불이 모두 태워버린다. 1919년 4월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벌어진 참혹한 현장을 보여주는 영상물이다. 그날 꽃잎처럼 쓰러져 간 순결한 넋들은 하늘로 올라가 어둠을 비추는 별이 된다. 두렁바위라 불리기도 했던 제암리예배당에서 벌어진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증언하는 사진을 살펴본다. 남편과 집을 잃고 넋이 빠진 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인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외국인들의 초상이 보인다.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프랭크 스코필드, 연희전문학교 교수 호러스 언더우드, 제4대 이화학당장 룰루 프라이, 미국 연합통신 임시특파원 앨버트 테일러의 사진이다. 일제가 화성에서 벌인 끔찍한 만행은 이들의 사진과 글을 통해 세계로 전파된다. 3부 ‘3·1운동 이후 화성사람들의 독립운동’은 독립을 향한 화성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만세운동 이후에도 화성인들의 독립 의지는 뜨겁게 불타 올랐다. 1927년 10월 결성된 신간회 사진을 통해 화성 청년들이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사실을 확인한다. 화성의 독립운동가 이름을 벽에 새겼다. ■ 독립의 영웅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 특별기획전 ‘어느 독립운동가의 삶과 일상’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오래된 장롱과 책, 항아리는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물건들이다. 관람객을 놀라게 할 특별한 전시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 전시가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병헌 기증의 ‘독’이 놓였다. 이 커다란 독은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일제가 마을을 방화하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진화에 나섰습니다. 이때 최진성의 집 장독대 독 안에 있던 간장을 퍼서 불을 껐다고 해요.” 불탄 자국이 남은 기와와 독 파편들도 살펴본다. 낡은 궤짝에도 사연이 가득 담겼다. “유영순님이 기증한 것인데, 역시 그때 집이 모두 불탔으나 유일하게 남은 물건이라고 합니다. 소중하게 보관하다가 기념관에 기증하신 것이지요.” 어린이전시실은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의 자랑이다. 체험을 중심으로 설계한 것이라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상설전시 안내문에 적힌 글이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목적과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독립은 몇 사람의 영웅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두려움과 고난을 무릅쓰고 일어섰던 바로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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