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 김포 보름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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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산미술관 야외 산책로에 설치된 여러 모양의 석조상. 홍기웅기자

 

김포에 숲속 미술관이 있다. 김포시 고촌읍 수기로 100-78번지에 자리한 보름산미술관(관장 장다운)은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2009년 개관한 보름산미술관 덕분에 멋진 이름을 가지게 된 보름초등학교와 달빛유치원을 지나니 미술관을 알리는 노란 간판이 나타난다. 연둣빛으로 물드는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미술관은 동산에 보름달처럼 걸려 있다. 나무가 담처럼 둘러싼 미술관 마당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탑처럼 두 겹, 세 겹으로 쌓아 올린 장독이나 운치 있는 소나무 아래에 기도하는 듯 서 있는 돌사람 한 쌍이 정겹다.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는 고관대작의 무덤을 지켰을 법한 문인상과 무인상이 나란히 서 있다. 전시관과 카페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도 올망졸망 키 작은 돌사람들이 관람객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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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한옥 지붕 위에 올리는 기와인 망와를 각양각색의 형태로 전시중인 보름산미술관. 홍기웅기자

 

■ 망와, 집안에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는 조형물

 

장다운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망와(望瓦)가 전시된 상설전시관을 둘러본다. 전시관 입구에서 만난 붉은빛의 목어가 예사롭지 않다. 몸통은 물고기이지만 머리에 사슴뿔이 달렸으니 이무기인 듯싶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면을 가득 채운 수백개의 망와가 낯선 사람을 노려보는 듯하다. “기와지붕 용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인 망와에는 집주인이 바라는 희망이 문양으로 담겨 있습니다.” 문자와 기호, 연꽃과 국화, 당초문 같은 다양한 이미지를 정성스레 새긴 망와를 살펴보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벽면 중앙에 전시된 망와는 남녀의 얼굴이다. “어느 것이 남자일까요.”, “그렇습니다. 머리 위에 뾰족 솟은 것이 상투입니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망와에는 가족의 안정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흔했던 망와였지만 한옥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요.” 박물관에서 펴낸 안내서에 실린 망와를 소개하는 글이 감각적이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햇빛 아래서, 눈과 비가 폭풍으로 몰아치는 날에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사람과 망와에는 경외감마저 깃든다. 비에 젖은 돌사람과 망와는 표정이 살아나 더욱 아름답다. 얼굴이 나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닮은 것처럼 내가 만드는 물건 또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 역시 마음이란 좀처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개관 16년을 맞은 보름산미술관의 역사를 잠시 더듬어본다. 설립자인 고(故) 장정웅 선생은 1978년 충남 아산의 온양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몇 개의 망와를 보고 그 매력에 빠져든다. 전국을 누비며 300여점에 달하는 망와를 모은 그는 이 멋진 유물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전공을 살려 손수 미술관을 짓는다. 그 과정을 소개하는 글에도 설립자의 고운 마음이 느껴진다. “숲을 파헤치지 않고 나무를 베지 않고 지은 집은 산에 걸린 보름달처럼 혹은 나무에 걸린 보름달처럼 숲에 안겼다. 나무를 피해 오솔길이 생기고 비탈길에는 무너지지 말라고 돌덩이로 축대를 쌓아 올렸다.” 설립자는 망와에서 발견되는 회화적 요소를 전통 한지에 오방색으로 채색한 작품을 제작하고 이를 모은 작품집 ‘망(望)’, ‘바래기’, ‘지킴이의 노래’ 같은 책을 시리즈로 펴냈다. 망와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보름산미술관은 관람료가 따로 없다. 목가구와 도자기 같은 고미술품으로 장식한 2층 카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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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서 관람객을 기다리는 김포 보름산미술관의 전경. 홍기웅기자

 

■ 미술관이 말을 걸다

 

출판사이기도 한 보름산미술관은 꾸준하게 소식지를 펴내고 있다. 중견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을 가진 장 관장이 발행하는 소식지는 디자인이나 내용이 풍성하다. 소식지에 적힌 ‘54 을사년 경칩’은 무슨 뜻일까. 갑자, 을축으로 시작하는 60간지와 입춘, 우수, 경칩으로 이어지는 이십사절기로 발행일을 나타내는 방식도 재미있다. 짐작하듯 ‘54’는 발행 호수이고 ‘을사년 경칩’은 2025년 3월5일이 발행일이라는 뜻.

 

미술관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 중 설립자 이름 앞에 붙은 ‘故’란 한자에 눈길이 머문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매일의 같은 공간과 매일의 같은 시간에서조차 하루하루 생경함을 마주한다. 당신이 아침마다 미술관 문을 열고, 주변을 청소하고, 부서진 계단을 살피고, 웃자란 나뭇가지를 치던 자리…. 당신이 서 있던 자리 자리마다 하얗게 빈자리가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공간을 차지했던 당신이 사라지자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오래된 풍경에도 구멍이 뚫려버렸다.” 장다운 관장은 꼭 1년 전인 ‘갑진년 경칩’ ,즉 2024년 3월 펴낸 소식지 50호를 통해 미술관 설립자이자 아버지 장정웅 관장이 타계한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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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산 미술관 2층은 카페를 운영해 자연과 휴식을 선사한다. 홍기웅기자

 

■ “주황색 별이 희미해”

 

소식지 54호에 소개한 장혜경 작품전의 제목이 ‘주황색 별이 희미해’다. 그런데 그림을 살펴보니 뭔가 이상하다. 새는 줄에 묶여 있고 악어의 등에는 기둥이 세워졌다. 게다가 악어의 꼬리는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아닌가.

 

시의 한 구절처럼 느껴지는 제목과 꿈속인 듯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는 그림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 궁리해 보지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작가는 거대한 존재가 운명을 조작하는 세계를 상상합니다. 다른 차원의 눈을 빌려 현재 일상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의 근원을 찾고자 하지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떤 존재에 의해 서로 유기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여러 개의 세계가 각 차원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제작한 것입니다.” 장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장혜경 작가가 제작한 세계의 이름은 ‘시시블러디(嬉戏 / xīxì BLOODY)’다. 시시블러디는 ‘사람을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다. 이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 컴퓨터 포털을 타고 도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가의 다중우주 세계관 속 하나의 영역이다. 이에 작가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자의식의 결과인지도 의심하고, 두 세계를 오고 가며 양쪽의 시점에서 얻은 인간은 알 수 없었던 ‘우연의 관계점’을 소설과 그림으로 기록한다. 분홍색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가 그려진 커다란 그림 앞에 선다. 어쩐지 익숙해 생각을 더듬어 보니 미술관 입구에서 봤던 그 그림이다. 다시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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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서 관람객을 기다리는 김포 보름산미술관의 전경. 홍기웅기자

 

■ 교실과 숲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다

 

보름산미술관은 어린이들에게 창의력을 심어주는 미술교육에 정성을 쏟고 있다. 아이들이 체험하고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세모 교실’이다. 교실의 문은 늘 열려 있다. “아이들은 오래 앉아 있지 못합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밖에 들락날락하도록 하지요.” 교실 밖은 숲으로 연결돼 있다. 아이들은 숲을 산책하며 나뭇잎을 가져와 관찰하고 그림을 그린다. ‘보름산미술관 B.school’은 무엇을 가르칠까.

 

“B.school은 디자인 프로젝트 운영 방식에 기반한 사고를 바탕으로 참여자 각 개인이 직면한 문제나 어려움을 전공 분야별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과의 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해결해 보자는 취지로 설립됐습니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전공 및 일터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모아 새롭고 의미 있는 솔루션을 도출하는 전문 분야별 접근법이나 상호교류형 교육 프로그램이 신선하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 획득을 위한 문해력, 문제 해결을 위한 데이터 분석을 위해 필요한 수학, 나의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응원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한 영업력이 필요합니다.” 미술관이 이웃들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 돼야 한다는 설립자의 정신을 살린 보름산미술관 B.school의 목표는 선명하다. “실제 문제 해결을 통해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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