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지켜보기를 바란다.”
용인시 기흥구 용뫼산 자락에 자리 잡은 백남준아트센터(관장 박남희)의 개인전 ‘전지적 백남준 시점’은 친절하다. “4월10일 개관한 ‘전지적 백남준 시점’은 백남준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하는 시간을 다루는 전시입니다.”
■ 전지적 백남준 시점
박남희 관장의 소개말처럼 전시장 곳곳에서 백남준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미술관의 바람이 느껴진다. 카펫이 깔린 1층 로비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30여명의 사람이 학예사에 설명을 듣고 있다. 푸른 화초가 무성한 정원 곳곳에 텔레비전 모니터들이 보인다. 1974 제작한 ‘TV 정원’ 입구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 젊은 백남준을 만난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표정이 해맑다. 1960년대 선보인 ‘비디오 아트’는 백남준의 다른 이름이다. 1964년 첫선을 보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열두 개의 달이 있죠? 시간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하고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그가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밤하늘의 달을 촬영해 재생한 비디오가 아니라 흑백 텔레비전에 전자석을 부착해 전자빔의 흐름을 방해해 달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음악과 텔레비전에서 출발한 이 전시를 시작으로 백남준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예술가로 성장한다.
TV 정원 천장에 38개의 TV 모니터와 불이 켜진 작은 전구와 전선을 식물의 줄기처럼 늘어뜨려 놓은 이 멋진 작품은 1989년 제작한 ‘비디오 샹들리에 No.1’이다. 미디어 기술이 우리의 시공간을 장식한 시대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 대의 카메라 참여’(1969년) 앞에 모녀로 보이는 관람객이 한참 머물러 있다. 엄마가 카메라 앞에 서자 딸이 스마트폰으로 벽면에 세 겹으로 비친 알록달록한 엄마의 얼굴을 찍는다. 두 개의 마이크에 입을 대고 “후” 하고 길게 불자 앞의 모니터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던 리본 모양의 원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참여 TV는 작품의 제목처럼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던 백남준은 음악과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을 여럿 남긴다. 피아노 위에 12대의 텔레비전을 쌓아 놓은 ‘TV 피아노’의 모니터를 보니 연주하는 백남준이 등장하고 24개의 어항 뒤에 24개의 텔레비전이 놓인 ‘TV 물고기’(1975·1997년)에는 20세기 최고의 무용가 머스 커닝햄이 물고기와 함께 춤을 춘다. 한참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 젊은 작가들이 펼치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
2025년의 문을 여는 첫 전시가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이다. “2월20일 개관한 전시 ‘4.0’은 동시대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을 소개해 온 프로젝트의 네 번째 버전이란 뜻입니다.”
전시 제목이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선보인 ‘랜덤 액세스’에서 제목이 나온 것이란다. 규범화된 개념과 형식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방식을 선보여 관객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만들었던 백남준의 실험정신을 잇는 젊은 작가들의 이번 전시는 6월29일까지 볼 수 있다.
고요손, 김호남, 사룻 수파수티벡, 얀투, 장한나, 정혜선·육성민, 한우리까지 국내외 7팀(8명)의 작품 14점이 전시되고 있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지현 도슨트가 바닥을 모자이크로 장식한 작품 앞에서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작품이지만 여기 올라서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관람객들도 조심스럽게 작품을 밟아 보고 허리를 숙여 만져본다. 하늘색 철제 선반에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 있다. 그 둘레로 놓인 까만 선 위로 로봇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선반에 있는 물건 중에는 옮기지 말아야 할 예술품도 있다. 그러나 로봇은 물건을 가리지 않고 옮기는 일에만 충실하다. 그 물건 중에 백남준의 작품 ‘의자’도 있다. 고요손의 작품 ‘임채은의 오로라 여정기’와 ‘손정호의 미래의 일기’ 주변에 놓인 의자의 쓰임은 무엇일까. 작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의자는 관람객이 앉아 작품을 감상하도록 놓아둔 것이다. 작품과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 재미있다.
■ 백남준의 오래 사는 집
백남준아트센터의 다른 이름은 ‘백남준 오래 사는 집’이다. 2층에 백남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로 재현해 놓은 ‘메모라빌리아’는 세상을 즐겁고 놀라게 한 작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가구와 소품, 문서는 물론이고 벽과 창문도 똑같이 재현했다니 놓치지 말고 살펴봐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사진과 연표로 백남준의 일대기를 구성한 공간도 매우 훌륭하다. ‘1932~1957 음악을 사랑한 소년’, ‘1958~1962 괴짜 친구들’, ‘1963~1964 음악을 전시하다’, ‘1965~1971 움직이는 그림’, ‘1973~1977 인간과 기술과 자연’, ‘1977~1988 예술로 하나 되기’, ‘1989~1995 늘 새롭게 유목민’, ‘1996~2006 미래를 사유하는 예술가’로 구분하고 사진과 이력을 덧붙여 백남준의 일생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을까. “백남준이 경기도와 인연이 돼 만들어진 이곳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길 바랍니다. 백남준 선생은 한 집안의 3대가 주말에 슬리퍼를 끌고 와서 각자의 시각으로 예술을 즐기며 전시를 본 다음에 갈비를 먹으러 가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하셨어요.” 백남준이 지향했던 세계는 이해와 소통과 참여다. 미술관은 예술과 사람이 소통하고, 예술로 인해 도시와 도시가 소통하고, 우주가 소통하는 것이 백남준이 생각했던 방향이라고 전해준다. 백남준이 관객들에게 말한다. “네가 참여하면 예술이 완성되는 거야. ‘참여 텔레비전’이란 작품을 봐. 네가 목소리를 내는 것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이 보여. 그러니까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상호 작용하면서 만드는 거야.”
경기문화재단과 백남준아트센터는 2년마다 백남준 예술상을 시상한다. 2024년 제8회 수상 작가는 조안 조나스(미국)로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비디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등 여러 분야를 통섭하고 융합하며 다양한 현대미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에 대항하는 창작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며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탐구와 예술적 깊이를 더해 가는 작가다. 올 연말에는 그의 작품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는 백남준의 예술혼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 예술로 소외된 이웃과 소통하는 꿈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의미는 백남준의 작품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백남준과 미래의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이 늘 소통하고 싶어 했던 대중이 있는 공간이어야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될 것 같습니다. 백남준 선생은 너무나 유쾌하고 소탈하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매우 좋아했고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분입니다.” 선생의 바람대로 백남준아트센터는 이미 열린 공간이다. “우리 도민들이 열린 생각을 가진 이 공간에서 백남준을 더 오래오래 살게 만들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박남희 관장의 바람은 단단하다. 전시실을 꼼꼼하게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바람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 곳곳에 재미없는 세상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려 고민했던 유쾌한 천재 예술가의 번뜩이는 예술혼이 가득하다. 미술관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100m쯤 걸었을까.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도어린이박물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용인의 명당 용뫼산에도 싱싱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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