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1.김포다도박물관

가을 햇살이 투명한 오후, 박물관 야외 조각공원의 잔디밭 곳곳에 중년의 여성들이 둘러앉아 있다. 바구니에 담긴 보자기를 풀자 하얀 찻잔과 찻주전자가 햇빛에 반짝인다. 한 여성이 익숙한 솜씨로 차를 따른다.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에서 운치가 느껴진다. 김포시 월곶면에 자리한 김포다도박물관(관장 손민영)에서 마주한 풍경이다. 2001년 개관한 김포다도박물관은 다도를 주제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이다. ■ 김포, 한국 차문화의 성지 ‘다반사’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차를 즐겨 마셨다. ‘삼국사기’에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으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차의 씨앗을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손수 차를 볶았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 귀족들이 즐겨 마시던 차는 조선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대학자 점필재 김종직이 하동군수로 재직할 때 차 종자를 구해 차밭을 재배해 임금께 올리는 공물을 충당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왜 김포에 다도박물관이 설립됐을까? 손 관장이 들려주는 사연이 흥미롭다. “김종직 선생님은 차를 무척 즐긴 선비였지요. 점필재의 수제자 한재(寒齋) 이목 선생(1471~1498)이 지은 ‘다부(茶賦)’는 초의선사의 ‘동다송’보다 무려 340년 앞선 것입니다. 동다송보다 분량이 풍부하고 내용도 독창적입니다. 우리 박물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선생을 기리는 한재사당과 묘소가 있어요. 1976년 사단법인 예명원을 설립해 전통예절과 다도를 교육했어요. 박물관이 필요해 자리를 찾고 있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김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김포다도박물관은 사단법인 예명원과 매년 6월 첫째 주 한재당에서 이목 선생께 헌다례를 올린다. 김포가 우리 차의 성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다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24세 문과 장원급제한 이목은 일찍부터 임금과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차가운 집’이라는 뜻의 ‘한재’라는 호에서도 느껴지듯 대쪽 같은 선비였다. 이목은 큰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영의정 윤필상을 탐관오리라며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고 왕과 당사자의 분노를 사기도 한다. 이목은 연산군 4년(1498년)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들이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다. 겨우 28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적지 않은 시문을 남겼다. 선조 대에 편찬된 문집이 있지만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198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승국 원장에 의해 ‘다부’의 존재가 알려진다. 손민영 관장은 인복이 많다며 두 스승을 소개한다, “청사 안광석 선생님과 최근덕 전 성균관 관장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은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지요. 예명원을 설립할 때 도움을 베푼 분들입니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조각공원과 팔도의 장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야외 전시장과 호젓한 정자, 생태 양어장과 거위들이 노니는 아름다운 연못을 갖춘 1만여평의 땅도 후원자가 마련해준 것이다. “포정문화재단 민경덕 이사장님은 다도박물관의 설립부터 운영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나는 박물관에 전시될 유물만 가지고 왔어요. 이사장님의 두 며느리도 저에게 다도를 배웠어요. 언젠가는 이 제자가 이 박물관을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박물관의 역사를 이어갈 후계자가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요.” 손 관장의 부모님도 다인(茶人)이었다. “서당 훈장이시던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머니가 차를 만들어 손님께 대접했는데, ‘쓴차’라 불렀지요. 부모님 덕분에 차를 일찍부터 가까이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차에 더 깊이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서당 훈장인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머니가 ‘쓴차’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손 관장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남편은 물론 시댁까지 자신을 지원해 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 보여주고 가르친다 우리 차의 역사와 문화는 풍성하다. 대학에 다도학과가 생길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우리 차와 예절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박물관에서는 관람객과 교육생들에게 우리 차를 어떻게 알려주고 있을까. “다도는 들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줘야 해요.” 다도를 어떻게 보여준다는 것일까? 48년 다도를 세상에 알린 명인의 교육법이 더욱 궁금해진다. 손 관장은 대학교 여성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교양으로 예절과 다도를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평생을 헌신한 대가에 대한 작은 보상이 주어졌다. 지난 5월 손 관장은 (사)한국박물관협회로부터 ‘제26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을 수상했다. 다도 경연대회, 세계 찻자리 전시 등을 운영하며 우리 차 문화의 역사와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또 지역사회와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다례 교육을 펼쳐 기관의 특성을 살린 고유한 공헌 활동을 추진해 지역민과 함께 상생하는 박물관의 모범적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20년째 학예사로 일하며 전시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안정아 국장의 안내로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선다. 전시실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다기류는 물론 최근 것까지 300여점이 진열돼 있다. 전시실 입구에 진열된 찻잔 100개를 살펴본다. 찻잔마다 담고 있을 사연을 상상해 본다. 이목 선생이 지은 ‘다부’를 새긴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을 담는 주전자와 차를 끓이는 화로, 뜨거운 물을 식히는 찻잔, 다례상 등 선조들의 손때 묻은 낡은 유물들이 더욱 반갑다. 이 찻잔은 누가 사용했던 것일까? 야외에 나가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목각함이 전시된 곳에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다. 목각함을 들고 양반을 따라나서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은 ‘다동화(茶童畵)’다.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던 동자는 누구보다 일찍 차 맛과 다도의 풍류를 터득했을 터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다도 도구를 유심히 살펴본다. 과연 우리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잠시 담아 두는 물 식힘 사발 ‘숙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양반사대부가 여성들의 안방을 재현한 공간이 멋스럽다. 자개가 박힌 장롱과 나비를 장식한 촛대, 달항아리를 갖춘 우아한 안방에서 차를 마시던 옛 여성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저 많은 유물과 자료를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을까. 차에 미치지 않으면 감히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문득 “다도는 먼저 보여주는 것”이란 말의 뜻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다구를 정갈하게 관리하고 가지런히 배열하는 것은 순수와 질서를 가르쳐 줍니다. 예절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차와 함께하며 행동과 태도가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어요.” ■ 다도가 선물하는 인간의 품격 지난 5월 사단법인 예명원과 공동 주관으로 ‘예절과 다도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예절과 다도 경연대회’는 올해로 27회를 맞았다. 세계 찻자리 대회, 전통문화큰잔치, 성년례가 열린다. ‘성년례’는 올해 성년이 되는 19~20세 해병들에게 전통 성년의식인 관례 의식에 따라 관을 씌워주며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박물관이 가장 정성을 쏟는 교육 대상은 유아들이다. 앙증맞은 아이들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사진 한 장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유치원 아이들이 다소곳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사진이다.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다도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 신비한 힘이 있다. 김포다도박물관은 가을 소풍 장소로도 안성맞춤이다. 한강 너머 북녘땅이 훤히 보이는 애기봉 전망대도 박물관에서 7분 거리에 있다. 사랑하는 이와 따뜻한 차를 마시며 깊어가는 가을을 음미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남양주 실학박물관

지금이야말로 실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점을 보고 가짜 뉴스에 휘둘린다. 지식은 늘어나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 고급 정보와 부는 소수가 독점하고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는 것일까? 왜란과 호란을 겪었지만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예송논쟁에 몰두하던 17세기 조선의 답답한 정치가 연상된다. 이러한 풍토를 개탄하며 백성들의 살림을 늘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추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부른다. 남양주 두물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곁에 자리한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학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의 숨결을 만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들의 뜨거운 숨결을 만난다.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며 시대를 앞서간 학자들의 고민을 떠올려본다. 잠곡 김육, 포저 조익, 연암 박지원과 환재 박규수, 혜강 최한기 같은 실학자들의 유물은 이를 소중히 간직했던 가문에서 기증한 것들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역시 그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송하한유도’는 얼핏 보면 동양화의 한 폭 같다. 사실 소나무 밑에 서 있는 사람은 대동법을 확대하는데 온 정성을 쏟은 김육이다. 인물보다 소나무를 더 크게 그린 이 독특한 구도의 초상화는 중국 화가의 작품이다. 그의 손자도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는데 독특한 눈썹을 가진 김석주의 초상화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 특별한 초상화가 또 있다. ‘양주팔괴’로 불리는 청나라의 화가 나빙이 그린 초정 박제가의 초상화 역시 강렬하다. 키는 작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박제가의 당당한 풍모를 잘 표현한 이 초상화가 실사구시를 주창한 추사 김정희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박제가의 초상화는 김정희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밝힌 일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다. 19세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유물도 빼놓을 수 없다. 최한기는 지구의를 만들고 세계지도와 ‘지구전후도’를 그렸으며, 세계의 자연·인문지리에 관한 책 ‘지구전요’를 저술한 만능학자였다.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대동여지도’만큼 주목해야할 지도가 또 있다. 그것은 대동여지도보다 100년 전인 1755~1757년 무렵에 제작된 ‘동국대전도’다. 그렇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백리척을 적용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정항령 부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에 전래된 세계지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제작한 ‘곤여전도’를 보면서 서양의 힘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바다를 개척한데서 비롯됐던 사실을 보여준다. 송이영이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1669년 만든 ‘혼천의’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파를 길어낸 인물로만 알려졌으나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하는 ‘평혼의’와 천문관측기구 ‘간평의’를 제작한 과학자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가장 주목한 유물은 무엇일까? 바로 실학자 유금이 1787년 만든 아라비아식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이다. 유금의 조카는 ‘발해고’를 지은 역사가 유득공이다. ■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 실학박물관 제3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펼쳐진다. 9월12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은 전통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첨단의 기술과 전시기법을 동원해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에 선정돼 마련된 이번 체험전은 실학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곤여만국전도’, ‘혼천시계’와 ‘혼개통헌의’ 같은 과학 문화재를 실감 나는 영상으로 감상하다 보면 미지의 세계와 정확한 시간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심과 지혜에 새삼 놀라게 된다. 특히 360도 원형의 대형 LED스크린에서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상은 환상적이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 같은 신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전설의 달부터 우주를 향한 꿈과 희망을 담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에 이르기까지 과학 발전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처럼 독창적인 발명품을 제작한 힘이 세종의 열린 태도였음을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구가한 세종시대는 물론 문화를 꽃피운 영정조시대의 실학도 만날 수 있다. 실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혼개통헌의’를 비롯한 실학시대 과학문화재는 이 시대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체험 콘텐츠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를 증강현실로 만나게 한다.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면서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우는 미디어테이블이다. ‘AR-혼천시계’는 박물관에 전시된 혼천시계의 형태와 세부 구조를 참고해 3D 데이터로 제작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유물 위에 증강된 혼천시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자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성인들도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혼천시계의 구조와 작동원리가 궁금하다. 쥐부터 돼지까지 열두 동물의 ‘십이간지’ 캐릭터, 혼천의 주변에 펼쳐지는 우주를 연출하는 효과도 대단하다. 특히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곤여만국전도를 3가지 체험 활동으로 재구성한다. 곤여만국전도에 숨겨진 사실을 알아보는 ‘곤여만국전도 알아보기’, 곤여만국전도에 그려진 대륙과 동물 퍼즐을 맞춰보는 ‘곤여만국전도 퍼즐’, 곤여만국전도를 지구본에 입혀 입체감 있게 만든 ‘빙글빙글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입체 지구모형을 돌려보면서 움직이는 동물과 배를 감상하고 현재의 지도와 고지도를 비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과학기술과 관련 문화재가 생각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실학의 관심사는 사람과 우주로 뻗어 있다 그동안 진행한 특별전과 기획전을 살펴보면 실학박물관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달력, 시간의 자취’, ‘유배지의 제자들, 다산학단’, ‘실학청연(實學淸緣),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18~19세기 국화 열풍과 실학자의 국화 애호’,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등 다양한 인물과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시와 연계한 학술회의도 주목된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대회 ‘다산 사상과 서학(西學)’과 2013년 성호 이익 서세 250주년 기념 특별전 ‘새로 보는 하늘 땅, 세계–성호 이익의 실학’ 같은 규모가 큰 학술대외가 잇달아 열렸다. 또 실학박물관과 파주시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율곡학과 경기실학’이나 가평군과 공동으로 주최한 ‘대동법 시행으로 조선을 살린, 잠곡 김육과 가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도내의 시‧군과도 협력해 실학정신을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을 대상으로 ‘밭으로 간 실학자’는 옷감을 생산하는 목화를 키우면서 실학의 실용적 가치를 몸으로 배우는 농사 체험프로그램이다. ‘생생! 실학여행’과 ‘실학자와 유물 하나’는 쉽고 재미있게 아이들이 실학적 자세를 터득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주말 상설 프로그램 ‘실~하게 놀자~!’는 홍대용의 혼천의, 박지원의 수레, 정약용의 거중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가을은 사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실학박물관을 찾아 시대를 앞서 고민했던 반계나 성호, 다산 같은 실학자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배우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파주 한길책박물관

“‘나나’도 읽었다. 테오야, 졸라는 확실히 제2의 발자크라 할 수 있지.” 1882년 7월23일, 빈센트 반 고흐가 아우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림에 미친 화가 반 고흐는 독서광이었다. “나는 책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마치 성장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공부를 통해 나를 향상시키고 싶어.” 독서의 유용함을 잘 알고 있었던 고흐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은 책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듯 말이다.” 독서에 대한 열망은 그림으로 옮아간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를 보고 크게 감동한 고흐는 벗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요전날 런던을 묘사한 도레의 작품을 전부 훑어봤지. 아, 그의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고상해.” ■ 독서광 반 고흐의 편지와 아름다운 책 그림을 만나다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에 위치한 한길책박물관(관장 김언호 박관순)은 1976년 창립해 인문학 출판을 선도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설립한 책 전문 박물관이다. 현재 이곳에서 ‘고흐가 사랑한 책’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23 경기도 박물관 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열리는 특별전이다. 고흐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그림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그 비결이 바로 독서라는 것을 확인한다. 반 고흐는 편지에 셰익스피어, 귀스타브 도레, 가바르니, 찰스 디킨스 등 여러 작가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소감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고흐를 만나기 위해 지하 전시실로 향한다. 유리창을 통해 푸른 나무가 보이는 창이 보여 환하다. 전시실 입구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살펴본다. 무릎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왼손으로 턱을 괸 ‘아를의 여인’은 무슨 책을 읽다가 감동한 것일까? 생각에 잠긴 여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고흐가 자신이 그림에 책을 그려 넣은 10여점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고흐의 예술세계로 빠져든다. 전시실 모퉁이에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 마련돼 있다. 그림으로 친숙한 ‘아를의 침실’을 재현한 체험 공간이다. “반 고흐는 아를의 침실이란 이름으로 세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그린 것이지요. 세 작품 이외에 고갱과 아우 테오에게 쓴 두 편의 편지에도 ‘아를의 침실’ 스케치가 들어 있어요. 관람객 중에는 침대에 누워보는 분도 있습니다.” 반 고흐는 생전에 똑같은 그림을 다섯 번이나 그린다. 1888년 그린 ‘아를의 침실’은 고흐에게 위로와 충전과 평안함을 선사한 둥지였다. 이유신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침실에 들어선다. 아를 침실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아주 훌륭하다. 꽃과 나무와 잎, 새 등 자연의 아름다운 생명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든 우아한 장식이 여러 점 전시됐다. 시인, 사회 운동가, 출판사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활동을 해 ‘토털 아티스트’라 불린 윌리엄 모리스가 1861년 완성한 실내 장식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 운동 ‘아트 앤드 크래프트’(미술공예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켈름스콧 프레스(Kelmscott Press)를 설립해 출판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 대중 잡지와 레코드판에 담긴 앤디 워홀의 열정 고흐도 사랑했던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실린 희귀한 고서를 소장한 한길책박물관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에서 출판된 아름다운 고서들을 비롯해 일러스트 잡지, 소설 ‘돈키호테’에 들어간 판화 등 희귀 자료가 무려 2만여점이나 소장됐다. 이 중 가장 소중한 유물은 무엇일까? “애서가이던 윌리엄 모리스가 가장 존경한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지요. 모리스는 자신이 설립한 켈름스콧 출판사에서 총 53종 66권의 책을 출판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이 1896년에 출판 ‘초서 저작집’입니다. 이 책은 ‘켈즈의 서’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책으로 꼽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앞에 선다. 양가죽으로 만든 장정과 본문에 공들여 새긴 그림과 활자에서도 품격이 묻어 난다. 윌리엄 모리스는 켈름스콧 인쇄와 서적 디자인도 크게 발전시킨다. 켈름스콧 출판사에서 제작한 53종 66권의 책 전질을 보유한 기관이나 컬렉터는 세계에서도 매우 희귀한 형편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애서가들도 초서저작집을 비롯한 켈름스콧에서 출판된 책을 보기 위해 한길책박물관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처럼 한길책박물관은 아름다운 책, 귀중한 고서를 소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곳에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될 줄이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술가로 평가받는 앤디 워홀은 책과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1층 전시실부터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가 펼쳐진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앤디 워홀의 젊은 시절의 작품세계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앤디 워홀이 상업작가로 활발히 활동한 1949년에서 1964년 사이 다양한 작업으로 책과 잡지 일러스트, 그리고 LP 커버를 소개하고 있지요.” 전시실에 들어서자 1960년 유행했던 팝송이 귀를 즐겁게 한다. 자유와 변화의 열기로 충만했던 1960년대 활력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누가 어떻게 수집했을까? “‘영 앤디 워홀’은 남다른 안목으로 귀한 자료를 모은 컬렉터 이돈수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전시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스콰이어’를 비롯한 대중 잡지에서도 앤디 워홀의 이름을 발견한다. ■ 책은 미래를 여는 상상력의 창고 한길책박물관은 책과 멀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책과 가까워지게 해 주는 공간이다. 1970년대부터 인문·예술학 출판을 선도해온 한길사 대표 김언호 관장은 아름다운 책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책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름다운’ 책에 관심이 많았던 김 관장은 소년 시절 화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고서는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보여주는 문화재다. 김 관장은 유럽의 책방을 순례하면서 운명처럼 19세기 영국의 예술가이자 위대한 출판인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와 만난다. 모리스는 출판인 김 관장의 영원한 스승이다. 아름다운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모리스의 정성과 열정을 박물관에서 확인한다. 모리스는 여러 가지 활자체를 디자인하고 고품격 출판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를 개발한다. 나뭇잎과 꽃봉오리들이 반복 배치된 문양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서체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삽화는 여전히 매력을 발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삽화를 그린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에 대한 김 관장의 사랑도 각별하다. 한길사는 삽화 228점을 넣은 ‘도레의 성서’의 복각판을 펴내기도 한다. 한 일간신문이 창간 70주년을 기념해 광복 이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을 선정했는데, 한길사에서 펴낸 책이 여러 권 선정됐다. 1위로 꼽힌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12위에 오른 ‘함석헌전집’은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이야말로 미래를 창조하는 원천입니다. 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 어떤 콘텐츠든 책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책의 소멸을 예견했으나 여전히 종이책이 중심이다. 김 관장의 생각을 들어본다. “인터넷에 들어가든지 스마트폰을 보면 웬만한 정보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종이책을 읽어야 합니다. 좋은 책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한길책박물관은 책방 ‘북하우스’와 연결돼 있다. 계단 없이 오르내릴 수 있는 완만한 경사길 벽면에 고객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가득하다. 서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앤디 워홀을 다시 만난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8.양평 잔아박물관

초가을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북한강 물빛이 검푸르다. 강 너머로 수종사를 품은 운길산이 우뚝하다. 두물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문학의 쓸모와 매력을 전달하는 잔아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 산책로를 걷다가 마주친 모자를 쓴 소녀와 잔디밭에 앉은 다섯 아이의 표정이 해바라기처럼 환하다. 흙으로 빚은 조각 작품들이지만 마치 살아서 말을 거는 듯하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아동문학까지 문학의 전모를 보여주는 잔아박물관(관장 김용만)은 1996년 5월 개관한 1종 전문박물관이다. 마지막 아이를 뜻하는 ‘잔아’는 설립자인 김용만 관장의 필명이다. ■ 꿈을 되찾고 가꾸는 공간 “잔아박물관은 어른들에게는 잃어버린 젊은 날의 꿈을 되찾아주고 학생들에게는 높은 이상과 지성의 정신을 길러주는 학습의 장입니다. 문학은 시나 소설 창작 말고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사업을 하는 데도 꼭 필요한 정서적인 기본 양식입니다. 세상 사는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보다도 신비나 환상 같은 감성적 느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소설 창작과 글쓰기 강의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용만 관장이 들려주는 말이다. 문학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노 작가의 신념은 역동적이다. 테라코타를 활용해 문학을 입체적으로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발상이 참신하다.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 관람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비결이 여기에 있을 듯싶다. “잔아박물관은 특히 어린이들의 관람을 환영합니다. 유치원생이라도 한글만 읽을 줄 알면 그들에게 톨스토이, 세르반테스, 카프카, 괴테, 헤밍웨이,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들을 소개합니다. 이분들의 이름만 기억하게 해도 어린 영혼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이나 문자메시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세계, 우주와 영원과 진리 같은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잔아박물관을 ‘글과 흙의 놀이터’라고 부르는 까닭이 궁금하다. “이곳이 문학과 테라코타가 어우러진 세계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글은 인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언어라고 볼 수 있지요.” 글이 김용만 작가를 상징한다면 흙은 테라코타로 문인들의 흉상을 제작하는 여순희 작가를 상징한다. 잔아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부부가 합심해 글과 흙으로 빚어내는 문학과 예술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 한국의 유명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다 테라코타를 활용한 전시실은 입체적이다. 전시실 구석이나 모퉁이에서도 뜻밖의 재미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성실하게 꾸몄다. 느긋하게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흉상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세르반테스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대표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그 앞에 놓인 세르반테스의 흉상과 작은 액자를 살펴본다. 작은 사진 액자는 세르반테스를 찾아 떠난 문학기행 때의 김 관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세르반테스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늦깎이로 등단한 김 관장의 본보기가 아닐까. 김남조, 신경림, 정호승을 비롯한 유명 시인의 친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신달자 시인이 2014년 7월 남긴 글을 소리내어 읽어 본다. “비가 오거나 햇살이 나거나 하는 날 잔아문학박물관에 왔네. 내 문학 속의 핏불이 아우성치네. 그리운 문인들이 와 가슴속으로 오시네.” 수첩과 증명서 같은 작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도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한 문학도가 걸어온 삶의 오롯한 흔적이다. 흙으로 빚은 물고기를 들고 웃고 선 함민복 시인 곁에 서 있는 여순희 작가의 모습도 푸근하게 다가온다. 한 장의 흑백사진이 한 편의 수필만큼 풍부한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오적’으로 권력층의 부패를 고발한 고 김지하 시인의 친필 원고가 있는 옆에 구약성서를 번역하면서 시인이 된 문익환 목사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는 글과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글씨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1960년대 초반 혜성처럼 문단에 등단한 ‘무진기행’의 소설가 김승옥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김 관장이 사귄 시인과 잔아박물관을 찾은 작가들이 무척 많았던 사실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표지는 낡았지만, 문학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희귀본 소설책과 시집도 여러 권이 전시돼 있다. 여순희 작가가 빚은 문인들의 테라코타 흉상의 부드러운 선은 따스한 색을 만나 깊고 그윽하다. 한 작가의 삶과 개성이 잘 표현된 상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까. 작가들의 흉상 앞에서 대표작품을 떠올려본다. ■ 책은 만져만 봐도 반은 읽은 셈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굴곡진 생애도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의학을 공부하다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아Q정전’을 지은 루쉰, 동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황무지’의 시인 T.S. 엘리엇과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 같은 대가들의 흉상 앞에서 박물관 관계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고 심어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 푸시킨,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헤밍웨이, 카프카, 빅토르 위고, 존 스타인벡,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등 세계 문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강아지 똥’의 권정생 작가를 비롯해 아이들에게 듬뿍 사랑받는 아동 문학가들을 만나는 공간에 들어선다. 동화책 속 익숙한 이야기 장면들이 벽화로 재미나게 꾸며져 있다. 테라코타로 한국 전래동화 속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재현한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책장에서 동화책을 꺼내 펼치도록 만드는 마력이 느껴진다. 문인들의 테라코타 흉상이 가득 놓인 방안에 들어선다. 세계적 문호들과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낯익은 얼굴이다. 황순원, 서정주 같은 작고 작가들은 물론 소설가 김연수, 시인 문태준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의 얼굴도 여럿 보여 반갑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책으로 탄생한 작가의 원고를 살펴본다. 작가의 묵은 원고에서 문학의 생명력을 체험한다. 작가의 친필 원고와 작가들이 어울린 한 장의 흑백사진, 작가의 흉상 테라코타는 멀어 보이던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심리적인 문턱을 낮추어 준다. ■ 소통과 공감의 열린 공간 오는 24일 ‘잔아박물관 가을 시낭송회’가 열린다. 올해의 초청 시인은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오세영 시인이다. 2012년 장석남 시인을 시작으로 정호승, 문태준, 문효치, 도종환, 김남조, 신달자, 함민복, 안도현, 나희덕 시인과 함께했다. 올해로 11회째를 맞은 잔아박물관 가을 시낭송회는 양평지역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낭송자 10여 명의 애송시 및 창작시를 낭송하고 색소폰 연주와 성악공연, 클래식 기타 합주 같은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박물관 야외 잔디정원은 빛과 소리가 어울리는 축제마당으로 변모한다. 잔아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은 최상급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지원사업에 올해 9년째 연속으로 선정된 것은 잔아박물관의 저력을 보여준다. ‘나는?너는?누구?’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길 위의 인문학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박물관 관람과 강연, 체험 교육이 11월까지 진행된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소현 학예사의 바람을 들어본다. “감정표현과 자아 성찰의 어려움을 함께 이해해보는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올바른 인간관계 형성과 긍정적 감정표현,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7.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삼성산 자락에 천년의 시공간을 아우른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에서 만난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은 고려 천년의 기억과 대한민국 건축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문화예술재단(이사장 최대호)에서 운영하는 김중업건축박물관은 2014년 3월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건축 전문박물관이다. 안양시가 설립한 공립박물관 두 곳이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이 1959년 설계한 유유제약 공장의 사무실을 구조 변경한 것이다. ■ 김중업의 흔적과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 1959년 완공해 2004년까지 사용된 이 건물의 문화적 가치를 주목한 안양지역의 시민과 건축가들이 유유산업의 부지와 건물을 안양시가 매입해 건축박물관으로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건축가와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안양시는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2014년까지 리모델링해 김중업건축박물관을 개관했다. 이러한 역사를 가졌기에 김중업건축박물관에 대한 안양시민들의 사랑과 기대는 각별하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 가려면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시대 삼층석탑부터 만나야 한다. 4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고려시대 안양사(安養寺) 명문기와가 출토된 현장을 둘러보며 박물관이 들어선 터가 그야말로 명당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안양이란 지명이 유래된 터전에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안양의 뿌리와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외관부터 독특하다. 갈비뼈처럼 밖으로 훤히 드러낸 외벽의 하얀 기둥과 2층 복도 좌우로 낸 세련된 창문은 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감각적이다. 멋진 산과 맑은 계곡을 품은 언덕에 자리 잡은 김중업건축박물관 앞에 서면 마음이 여유롭다. 건축가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장은 1층 ‘김중업, 건축예술의 문을 열다’와 2층 ‘김중업, 건축예술을 완성하다’로 구성돼 있다. 평양에서 태어난 소년 김중업이 한국의 대표 건축가로 성장하던 여정을 보여준다. 1부 ‘청년, 꿈을 키우다’는 시와 미술을 사랑했던 소년 김중업이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에서 수학하며 예술로서의 건축관을 다진 사실을 확인한다. 2부 ‘건축가의 여정과 도약’은 1952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대회’의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가 우연히 만난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문하에 들어가 활동한 내력을 살펴본다. 파리 ‘아틀리에 르 코르부지에’에서 동료들과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이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김중업은 세계의 여러 건축가와 교류하며 선보인 1950년대 건축 작품 전시회를 국내에서 연 사실도 놀랍다. 청년 김중업의 얼굴에서 넘치는 끼와 야망을 찾아본다. 3부 ‘한국 건축예술을 대표하다’는 서구 근대 건축과 한국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에필로그 ‘건축가의 길’은 당대에 출판된 건축 잡지와 서적에 실린 그의 말과 글을 통해 김중업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전시실 맨 끝에 쉴 수 있는 체험 공간은 쉼터다. 작은 책상에 앉아 색연필을 들고 김중업의 작품 도안에 색칠을 하며 숨을 고른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대가로 성장한 김중업의 작품세계가 산맥처럼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이르는 시기다. 김중업의 건축 설계도면과 사진을 활용한 권민호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 ‘도면의 춤’을 감상하며 건축이 종합예술임을 거듭 확인한다. 1부 ‘건축, 살아 있는 선’은 제주대학교 본관, 서산부인과 등 건축가 김중업이 부드러운 선의 이미지를 활용해 펼쳐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여준다. 2부 ‘건축, 시대를 이끌다’는 1971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날카롭게 비판해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받아 해외로 추방되기 전 설계한 고층빌딩 작품을 소개한다. 중년들의 기억에 여전히 살아있는 ‘삼일빙딩’은 이 시기 김중업의 대표작이다. 3부 ‘건축, 삶을 꿈꾸다’는 개인주택 설계 작품들이 중심이다. ‘집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구현된 작품들과 마주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4부 ‘건축. 세계로 나아가다’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에서 추방돼 프랑스와 미국을 떠돌며 생활하던 시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건축가의 열정과 노력을 보여주는 작품과 설계안을 보여준다. 5부 ‘김중업, 한국 건축에 새겨지다’는 김중업이 1979년 귀국해 작업한 작품과 1988년 작고하기까지 김중업건축연구소 직원들과 함께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층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건축과 예술의 생명력을 생각해 본다. 김중업 건축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복도를 활용한 에필로그 ‘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문학과 미술, 춤 등 국내외 예술가들과 교류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토지’의 작가 박경리를 찾아 원주에 갔던 사실을 기록한 친필 메모도 찾아볼 수 있다. ■ 70년 세월을 건너 온 ‘어느 건축가의 흔적’ 지난 6일 개막한 상설기획전 ‘어느 건축가의 흔적’은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2023 안양시 승격 50주년 기념전 ‘안양연화’를 둘러본 관람객들이 ‘어느 건축가의 흔적’을 감상하기 위해 야외로 몰려간다. 철근이 튀어나온 건물 기둥과 기둥조각, 테두리 보와 바닥재들 사이에 깃든 사연을 살펴보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 콘크리트 기둥이 서게 된 까닭이 재밌다. 2018년 주한 프랑스대사관 신축 계획으로 집무실 건물의 철거가 결정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중업건축박물관 관계자들이 서둘러 프랑스대사관을 방문해 특별한 협조를 요청한다. 이렇게 해 주한 프랑스대사관 집무실 건축부재 43점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날렵한 지붕 처마로 유명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작품으로 김중업은 1962년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1965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를 얻었으며 프랑스 공인 건축가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건축을 예술의 범주로 끌어 올렸다고 호평 받았던 작품의 콘크리트 기둥을 비롯한 건축부재들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안양사 주춧돌과 함께 공존하게 된 것이다. ■ 시민들이 되살린 역사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지난해 ‘육군박물관’으로 무애25년건축상을 수상한다. 2014년 제정된 무애25년건축상은 25년 이상 지난 국내 건축물 중 현대까지 건축-공공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을 선정해 한국건축가협회가 건축주와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수상작인 육군박물관은 김중업이 1982년 설계한 작품으로 당시 대한건축사협회가 주최하는 한국건축전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해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획전 ‘김중업, 건축예술을 완성하다’를 통해 김중업 건축의 전모를 살피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김중업건축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실시한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에서 안양박물관과 함께 인증기관으로 선정됐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연구사업 지표’에서 만점을 받아 2회 연속 인증기관에 선정된 것이다. 한편 박물관은 시민참여 교육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23 김중업건축박물관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어린이 건축학교’는 4주 동안 진행되는 어린이 전문 건축 교육프로그램이다. ‘어린이 건축학교’는 현직 건축가들과 함께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건축 이론을 배우고, 건축 공간을 직접 스케치하며, 목재를 이용해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보는 재미있는 시간도 가진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박물관으로 문의하기 바란다. 안양예술공원 언덕에 자리 잡은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성찰과 사색의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6.용인 백남준아트센터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야트막한 언덕에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백남준아트센터(관장 김성은)가 있다. 그랜드피아노를 닮은 이 건축물은 백남준(1932~2006)의 실험정신을 잘 보여준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검은 외벽은 백남준이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던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2001년 경기도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건립 부지를 확정했을 때 백남준은 토지계획도에 ‘백남준 오래 사는 집’이라고 서명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뉴욕 브룸가의 작업실 백남준스튜디오의 소장품 67점과 비디오 아카이브 2천285점을 확보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3년 430여명이 참여한 국제현상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독일 건축가 키르스텐 쉬멜과 마리나 스탄코비치가 함께 설계한 작품으로 2008년에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과 대한민국 토목건축기술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0월 백남준아트센터를 개관하고 이를 기념하는 페스티벌 ‘나우 점프’를 개최했다. 백남준이 직접 이름을 붙인 백남준아트센터는 국내 최초의 미디어 아트 전문 공공미술관답게 활기찬 행보를 시작한다. ‘작가들과 함께 바꾸는 미술관’을 지향하는 백남준아트센터는 ‘창작의 기운으로, 미술관을 생동하게’를 핵심가치로 삼고 있다. ■ 사과 씨앗 같은 것, 너에게 닿기를 백남준아트센터 왼편 모서리에 전시를 알리는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다. 지난 4월에 시작해 내년 2월까지 이어지는 ‘사과 씨앗 같은 것’과 8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열리는 ‘트랜스미션: 너에게 닿기를’이다. 건축물과 포스터에서도 예술적 상상력을 최첨단 과학 기술에 접목해 세계인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 백남준의 예술성이 느껴진다. 센터 안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TV 정원’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관람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백남준의 예술혼과 만나게 해 준다. 온갖 꽃과 풀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 속에 놓인 수십 대의 TV에서 보여주는 흑백 영상에서 백남준의 실험정신이 전달된다. 산책로처럼 낸 길을 걸으며 백남준이 관람객에게 건네는 메시지를 생각한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응집물인 로봇을 비롯한 전시물에서 백남준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1960년대 세상에 처음 TV가 사람들의 가정으로 보급됐을 때 일방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 소통하는 도구로 전환시켰으며, 세계인들이 공포로 맞이한 1984년에는 위성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펼쳐 세계인들을 안심시킨다. 모든 사물을 전복하고 변혁해 소통의 창으로 만드는 천재 예술가의 창조정신이 전시실에 펼쳐진다. 다양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어항 속 화면에는 몸과 손발을 꺾어 굴리는 안무가 머스 커닝엄의 모습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다 2020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코로나19는 현대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지만 한편으로 인류의 장래는 물론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상상하는 기회도 제공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코로나19로 관람객들의 발길이 줄어든 시기에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실험에 나선다. ‘백남준 63 전시 가상현실 체험 앱’을 개발하고, 온라인 전시 3종을 중국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캐나다 덴마크와 협업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실험은 TV를 비롯한 문명의 이기를 적극 활용해 새로운 예술로 재창조해 낸 백남준의 철학과 닮아 있다. 또한 이 기간에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를 구축하고, 온라인 협력 프로젝트 ‘다정한 이웃’(아르코미술관, 아트선재센터)을 진행했으며, 국제 협력전 ‘웃어’와 ‘오픈 코드’를 리투아니아와 독일에서 개최해 세계에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적극 알린다. 전시 ‘침묵의 미래’로 2021 올해의 박물관∙미술관 기획전시부문을 수상하고, 7회 국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이러한 활동의 보상인 셈이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했던 백남준 작가의 바람을 현실화한 것이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다. 이용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백남준의 비디오 아카이브에 접속해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는 전 세계 유일한 백남준의 비디오 아카이브를 웹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를 이루는 핵심은 백남준아트센터 비디오 아카이브에 소장돼 있는 영상들이다. 백남준의 싱글채널 비디오들의 다양한 편집 버전과 클립들, 비디오 조각과 설치에 사용된 소스 비디오들, 백남준과 동료 작가들의 인터뷰, 전시와 퍼포먼스의 영상 기록, 일상을 촬영한 기록, 방송과 싱글채널로 제작하기 위해 촬영한 푸티지 비디오들이다. 방송국의 프로그램으로 편성돼 송출된 이력이 있는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 인터뷰와 뉴스 비디오도 포함된다. 개관 후 10여년 동안 이뤄진 백남준 작업에 관한 다양한 연구 성과를 이미지와 문서로 제공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비디오 목록 저장 기능을 활용하면 나만의 비디오 서재를 만들 수 있다. ■ 도민과 창조적으로 소통하는 공간 백남준아트센터는 2014년부터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백남준이 1968년 쓴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을 발전시킨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학교’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교사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NJP 학교’와 동시대 예술가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예술 창작을 경험하는 창작 프로그램 ‘NJP 크리에이티브’도 호응이 좋다. 특히 ‘NJP 학교’는 학급 단위 초‧중‧고등학생 및 장애학생 단체와 교사를 대상으로 전시 연계를 통해 백남준과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감각을 깨우며 또래와 함께 생각을 나누도록 구성해 상생하는 미래사회를 꿈꾸도록 안내한다. ‘NJP 아카데미’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현대미술 강좌 프로그램이다. 백남준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예술세계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디어 아트가 어떤 흐름과 주제에 집중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총 6강(상반기 4월, 하반기 9월)으로 구성해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전문가들이 출연해 흥미로운 뉴미디어 아트에 대한 강의를 이어간다. 전문 자원봉사자 양성을 위한 ‘도슨트 양성’도 주목된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심화 교육을 통해 백남준과 예술에 대해 학습하고, 전문해설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전문가 양성 과정이다. 현대미술을 청소년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해설하는 과정을 통해 깊이 있게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심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다음 달 12일부터 11월30일까지 진행되는 ‘피드백’, ‘옹기종기 모아보면’, ‘백남준의 작업실 탐방’은 급변하는 세상을 이해하며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지혜와 자신감을 길러주는 프로그램이다. 매달 마지막 주 진행되는 ‘문화가 있는 날’에 펼치는 기획이 재미있다. “어쨌든,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지켜보기 바란다.” 1963년에 백남준이 관람객들에게 요구한 발언이다. ‘우리는 예술 작품 앞에서 얼마 동안 머무를까요?’는 백남준아트센터가 백남준이 제안한 감상법을 통해 관람객들이 보다 새롭게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빠르게 스쳐보던 작품을 천천히 관람하면 ‘볼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을 관람자 스스로가 경험하는 행복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백남준미아트센터에서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언덕으로 이어진 숲길을 잠시 걸으면 경기도어린이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으로 이어진다. 여유를 가지고 찾으면 누구나 들국화처럼 짙은 문화예술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 동두천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느끼고 즐기며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는 배움 놀이터가 있다. 소요산 자락에 터를 잡은 건물도 꿈을 상징하는 별 모양이다. 신라의 대학자 설총을 길러낸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깃든 경기도의 명산 소요산 자락에 어린이박물관을 세운 뜻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2016년 5월 개관한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동두천시 평화로 2910번길 46에 위치한 도립박물관이다. 동두천시로부터 2019년 말 경기도가 이관 받아 경기문화재단이 새롭게 단장하고 2020년 11월 재개관했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관장 김종길)의 상설전시 주제가 ‘숲에서 꿈꾸는 어린이’다. 어린이들이 몸으로 체험하면서 꿈을 키우라는 살뜰한 마음이 담겨 있다. ■ 몸으로 즐기며 느끼고 깨닫는 곳 브라키오사우루스 몸속을 탐험하며 체력을 기를 수 있는 클라이머존. 윤원규기자 1층과 2층의 상설전시 공간은 옥상정원으로 이어진다.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열린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기획전시와 신나는 체험이 이뤄진다. 1층에서 만나는 공룡존은 ‘공룡 숲으로의 초대-꼬마 브라키오와 함께하는 과거의 공룡 숲 탐험’이다. 거대한 초식공룡 브라키오가 있는 신체 발달 대형 놀이터인 ‘클라이머존’은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길러주고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36개월 미만의 영유아를 위한 ‘바닷속 놀이터’는 엄마의 배 속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공간이라 유아들의 노는 것을 지켜보며 부모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곳곳에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물이 있다. 숲생태존·계곡물존·오감숲존·교육존이 둥글게 펼쳐 놓은 2층 전시실은 눈과 귀, 코와 입은 물론 손과 발과 피부까지 우리 몸의 오감을 다 자극하고 활용하도록 구성돼 있다. 깊은 숲 ‘지혜의 나무’를 찾아서-커다란 개미굴과 함께 있는 현재의 숲 탐험을 하고 졸졸졸 신나는 계곡물-계곡물에서 놀면서 만나는 과학과 비밀의 연못 공간을 지나 오감 튼튼 숲속의 감각-박물관의 오감 캐릭터들과 함께 숲속의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을 지나 자연과 미래, 미디어 랩-생태계, 환경, 평화 등 자연을 주제로 한 미디어 교육실이 이어진다. 평소 의식하지 않던 감각 기관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어린이들이 ‘자연 놀이 숲’을 체험하며 꿈을 발견하고, 꿈을 키울 수 있는 프로그램들입니다. 주말에는 평균 1천200명의 어린이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습니다. 더 많은 아이를 받고 싶지만 공간과 인력이 허락하지 않아 아쉽지요.” 지난 2020년부터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종길 관장의 말처럼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경기 북부지역의 시민과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 공간으로 튼튼하게 자리를 잡았다. ■ 어린이들이 살아갈 지구의 생태계를 지키자 어린이들은 박물관에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예술의 멋을 느끼며 자신의 꿈을 찾고 상상력을 키우며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깊고 넉넉한 얼이 자라는 자연 놀이의 숲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들의 자연 놀이 숲이 되고 있다. 이달 초부터 오는 27일까지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여름 방학 프로그램 ‘체험으로 만나는 생태 이야기’를 운영하고 있다. 3종의 생태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체험으로 만나는 생태 이야기’는 멸종위기종 보호의 필요성과 생태 환경의 중요성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프로그램이다. ‘소중한 약속’에서는 ‘오감이 환경동화 작가전2’와 연계해 전시를 관람하고, 그림 그리기를 통해 사라져가는 멸종위기 동물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오감이 캐릭터 비누 만들기’는 친환경 재료를 사용해 직접 비누를 만들어 보고, 올바른 손 씻기를 체험한다. 그림책을 읽으며 '새'와 친해지는 ‘우리 엄마 못 보았어요?’도 진행된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ANTI-FREEZE : 얼어붙지 않을 거야!’는 다음 해 3월31일까지 이어진다. 박물관 전시실 2층 복도와 미디어랩과 중정, 옥상정원에 실험성이 강한 특별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어린이박물관의 정체성인 ‘숲’, ‘환경’, ‘생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태계’를 현대미술 작품으로 풀어낸 게 특징이다. “전시 제목인 ‘ANTI-FREEZE : 얼어붙지 않을 거야!’는 땅속 미생물부터 새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 생태계가 멈추지 않도록 지키기 위한 고민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태계의 어느 한 연결고리도 얼어붙어 멈추지 않도록, 지구인들이 생태계를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지요.” 위기의 생태계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은 무엇에 집중했을까? 먼저 만난 작품은 박물관 유리창에 수천 개의 점을 찍어 완성한 거대한 벽화다. 과연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해마다 약 800만마리의 새들이 유리벽과 창에 부딪혀 죽는다고 해요. 이것은 박수현 작가의 ‘산(散)’이란 작품인데, 새들의 유리벽 충돌을 막기 위해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 규칙’에 따라 ‘버드세이버’로 설계됐다고 합니다. 공공미술로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며 뮤지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지요.” 미디어, 설치, AR 등을 활용해 화단에 설치한 작품 ‘인공정원’은 소수빈 작가의 작품이다. 조금은 낯설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고 있거나 곧 만나게 될 풍경이다. “인공정원은 실제의 정원 식물과 함께 인공의 디지털 식물이 한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미디어와 아크릴로 제작한 식물은 살아 있는 식물과 함께 새로운 생태계를 이룹니다.” 박물관 야외 중정으로 이동한다. 유리벽과 회색빛 콘크리트로 이뤄진 중정에 거울 소재의 사람 모양 시트를 여러 개 붙여 놓았다. 장인희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관람객들이 작가의 작품들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도록 유도한 것이지요. 주변 환경과 자기 모습이 어우러져 변형되는 모습을 통해 생태계와 관계 맺고 있는 ‘나’를 발견하도록 한 것입니다.” 역시 관람객 자신이 주인공이 되면 더욱 주목하기 마련이다. 박물관 관계자가 박물관의 옥상정원으로 안내한다. 소요산 공주봉이 훤히 보이는 옥상에 작은 마을이 조성돼 있다. “피스오브피스(이연우, 천근성)의 작품은 관람객과 함께 완성해 가는 작품이죠. 작가들이 동두천 일대의 폐가구를 직접 수집하고 기부를 받아 가공해 조성한 식물 아파트 단지입니다.” 짐작했듯 옥상에 조성한 아파트 단지는 화분이다. “9월 옥상정원 및 박물관 야외공간에서 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는 ‘탐조 프로그램’과 ‘식물 아파트 분양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9월 10·17일 두 번에 걸쳐 시민을 대상으로 식물 아파트 분양할 것입니다. 옥상에서 작물을 키워보는 즐거운 경험이 일상으로 이어져 탄소배출을 줄이는 운동이 확산되면 좋겠습니다.” ■ 체험의 숲, 학교 너머의 학교 5월 초 시작된 ‘소중한 약속’(5월4일~8월27일) 전시도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노력이다. 오감이 환경 동화 시리즈 중 ‘정말로 소중한 건’(김희경), ‘바다와 약속해’(민승지)라는 동화를 통해 멸종위기 동물과 해양 오염을 알려준다. ‘탄소 중립’과 ‘탄소 발자국’에 대한 개념과 우리의 역할에 대한 ‘오감이 환경 동화 작가전 1’을 전시한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오감이 환경동화 작가전 두 번째 이야기’로 주제가 ‘소중한 약속’이다. ‘소중한 약속’은 환경오염으로 힘들어하는 멸종위기 동물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사라져가는 동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지구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소중한 약속을 끌어내는 것이 목표다. “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전달하지 못하는 것, 아직 시도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내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학교 이전의 학교가 되려는 것이지요.” 별들의 상상놀이터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이 보고 만지고 느끼는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이다. 소요산 자락에서 어린이들의 얼과 슬기가 소나무와 참나무처럼 쑥쑥 자라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4.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색 건물이 보인다. 직사각형의 평범한 건물인 듯 보였으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니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파주 출판도시에서 만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관장 홍지웅·홍예빈)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미술관 정원에서 만난 한국 특산종인 보라색 벌개미취 꽃밭도 뜻밖의 기쁨이다. 미술관의 이름인 ‘미메시스’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자회사인 예술 전문 출판사의 상호이기도 하다. 바깥의 직선과 안쪽의 부드러운 곡선이 어우러진 미술관 외관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설립자인 홍지웅 관장은 ‘출판사를 만들다 열린책들을 만들다’라는 책에서 “독창성을 가장 중시한다”며 이런 단서를 붙였다. “새롭되 그것대로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 ■ 건축의 시인, 안과 밖 경계를 허물다 2009년에 완공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건축의 시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것이다. 알바루 시자는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건축가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1992)을 비롯해 울프 예술상(2001),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2002, 2012)나 수상한 현대 건축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외부는 두 개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두 공간이 나비의 날개처럼 연결돼 있는 구조가 독특하다. 건축가는 물론 미술 작가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미술관의 자랑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것. 미술관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로비와 책방 겸 안내소를 지나 전시실로 이어지는 부분은 건물의 양 날개가 만나는 중심부에 자리하는데, 곡면의 큰 창을 통해 잔디와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의 풍경이 가득 들어온다. 미술관 두 공간이 만나는 모서리에 창문을 둬 무게감을 덜어낸 것도 참신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는 9월 24일까지 김찬송 작가의 개인전 ‘Border of Skin피부의 경계’가 진행된다. 김찬송 작가의 작품은 부드럽고 육감적이다. 손과 발을 포함한 여성의 몸과 푸른 식물이 관람객에게 부드러운 말을 건넨다. 부드럽게 굽은 하얀 벽면에 춤추듯 아래위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나뭇가지를 만지거나 머리칼을 감싸고 있는 여인의 손, 공을 딛고 선 날씬한 발, 웅크려 앉은 여인의 풍만한 몸은 멀리서 보면 경계가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경계가 허물어지며 모호해진다.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우연히 찍힌 자신의 몸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몸과 그 바깥의 사물,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경계와 흔적을 표현합니다. 사진을 캔버스 위에 옮긴 후 회화 작업을 통해 형태를 쌓고 무너뜨리며 장면을 만들어 간다고 하는데 화면 속에 불완전한 부분을 남겨둬 시선이 계속 스며들고 파고 들 수 있는 틈을 열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전시를 기획한 정희라 선임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작가의 손을 상상해본다. 흥미로운 장면이 또 눈에 들어온다. 푸른 나무와 풀들이 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 맞은편에 난 창 너머로 미술관 정원의 잔디가 펼쳐진 풍경이 그것이다. “우리 미술관의 가장 큰 자랑은 자연 채광이 가능하도록 디자인 됐다는 점입니다.” 천장과 벽을 올려 봐도 인공조명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알바루 시자의 설계가 얼마나 작가와 관람객을 배려하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철저하게 작가와 작품을 드러내도록 배려한 것이 알바루 시자의 건축 특징입니다. 벽을 보시면 면이 없이 곡선으로 연결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장을 보시면 자연광이 작품을 비추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축가 알바루 시자를 소개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마침 젊은 여성 두 명이 미술관 모형과 스케치가 부착된 공간에서 사진을 찍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흥미롭고 놀라운 공간을 만들어낸 시자를 꿈꾸는 건축학도들로 짐작된다. 건축가들이 많이 찾아오는 까닭을 알 것 같다. ■ 시간과 계절에 따라 펼쳐지는 빛의 축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대지 4천620㎡에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연면적 3천300㎡나 되는 대형 미술관이다. 다양한 크기의 여러 개의 전시 공간이 하나의 덩어리에 담겨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방식이 재미있다. “다양한 곡면으로 이루어진 순 백색의 전시 공간은 자연광을 끌어 들여 은은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낮 12시, 오후 3시나 5시 빛이 다 달라요. 물론 계절에 따라 또 달라집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빛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죠. 그래서 아직 와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찾은 사람은 없다고 해요.” 건축이 전시 이상의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니 더욱 유심히 공간을 살피게 된다. “개관하기 전부터 해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됐다고 해요. 국내외 건축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해요.” 이러한 강점을 가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중견 작가를 지원하는 사업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을 소개하는 역할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오는 9월 24일까지 진행되는 ‘2023 MIMESIS COLLECTION: 창문 너머 산책자’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들로 충만한 전시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소영, 최연 코디네이트의 ‘빛을 끌어들이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건축 구조는 건물의 ‘창窓’을 통해 완성’된다는 해석에 귀를 기울인다. “전시는 미술관의 창문 또한 미술관의 컬렉션으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의 소장품을 재해석해 건축과 미술 작품의 해석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창문의 역할은 무엇이며 산책자는 또 누구일까? “창문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외부를 바라볼 수 있고 그 너머의 공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건물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벽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틀 안에 프레이밍 된 풍경만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창문의 모순적인 기능과 성격은 건축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안과 밖을 은유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시는 ‘창 넘어가기’와 ‘창으로 바라보기’로 구성됐다. “건축물의 창은 공간이나 관념의 세계를 넘나들게 만들고 단절된 세계와 견고한 사회의 구조를 마주하게 하기도 합니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이라는 창을 통해 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갈지, 그 자리에 서서 관찰자가 될지 고민하게 됩니다.” 해설을 들으며 작가들의 상상력이 펼쳐진 작품을 살펴본다. ‘창문 너머 산책자’는 이혜승, 정직성, 박석민, 김효숙, 권영성, 황원혜, 윤새롬, 김태호, 이세현, 우정수, 박기일, 송수민, 이슬기, 이지영 14인의 젊은 작가들의 다양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한 자리에 선보인다. 밀리언셀러인 ‘그리스인 조르바’의 표지화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 찾고 즐기는 관람객들이 주인이다 1층 카페의 통유리로 들어오는 빛과 2층 발코니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1층 로비로 퍼지고 맞은 편 벽면에 반사돼 순백색의 곡면에 물결처럼 퍼진다. 넓고 아늑한 공간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펼치는 사람들의 몸짓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빛이 사람들의 어깨로 퍼져나간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미메시스 아트 뮤지움을 설립한 홍지웅 관장의 발언을 음미해 본다. “내가 느낀 것은 건축물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이미 건축주의 것도, 건축가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장소에 지어지든 한 건축물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얘기다.” 파주 출판도시 곳곳에 미술관과 박물관이 보석처럼 자리 잡고 있다. 출판도시를 찾아가면 햇살처럼 온몸으로 번져가는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속도와 경쟁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푸른 숲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3.광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1991년 8월14일, 김학순(1922~1997)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정말로 분해 죽겠어요. 우리 한국 여성들 정신 차리세요!” 이후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국내외에서 자신도 피해자임을 증언하는 여성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반 시민들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일본 고노 총리와 무로야마 총리가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 강제 동원한 사실과 군의 직간접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며 역사 교육을 통해 잊지 않겠다는 정부 차원의 반성까지 이어졌다. 2012년 12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8월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 아직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 광주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마당에서 할머니들의 흉상과 ‘평화의 소녀상’을 마주한다. 1991년 10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임시거주지 ‘나눔의집’이 마련되고, 이듬해 8월 ‘나눔의집’ 건립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독지가 조영자씨가 건립 부지 2천119㎡(642평)를 기증한다.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나눔의집’은 1995년 12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가새골길85 현 위치로 이전한다. 1998년 8월 개관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세계 최초로 성노예를 주제로 한 인권박물관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8년 제1역사관을, 2017년 제2역사관을 개관한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약 350㎡ 규모의 역사관은 기업체의 후원과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힘으로 설립됐다. 역사관에서 한국과 북한은 물론 중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괌, 네덜란드 등에도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제1역사관에 꾸며진 전쟁 유물과 위안소를 재현한 공간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진다. 일본군 ‘위안부’로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할머니들과 이 분들을 보살핀 ‘나눔의집’에 성금을 보낸 후원자들의 이름을 동판에 가득 새긴 감사의 공간도 잊을 수 없다. 이런 많은 시민들의 바람과 정성이 역사를 세우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리라. 제2역사관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알린 할머니들의 손때가 묻은 유품과 직접 그린 그림들을 마주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평화를 호소하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할머니들의 사진 앞에서 송두리째 빼앗긴 소녀시절의 꿈을 상상한다. ‘정신대’로 불리다가 ‘군 위안부’를 거쳐 ‘군대 성노예’로 불리기도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오랜 고통과 침묵의 역사를 깨고 진실을 밝혀 세계와 연대하도록 이끌어낸 분입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혔던 분은 배봉기님이지요.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일이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인권활동가이자 평화활동가로 거듭난 것이지요. 할머니들을 인권활동가로 불러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 할머니들이 남긴 뭉클한 사연과 만나다 오정임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제2전시장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생전 모습과 할머니들의 유품, 그리고 영상을 통해 그 분들이 남긴 육성을 들어본다.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한 공간에 들어서면 누구나 말을 잊게 된다.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1995년 그린 ‘그때 그곳에서’란 작품이 숨을 막히게 한다. 일본군 세 명이 저승사자처럼 서 있는 밤중에 벌거벗은 한 여성이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림이다. 나라를 빼앗긴 결과가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도록 지원한 한 김화선 할머니(1926~2012)의 사연은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누고 베풀며 사신 할머니의 표정이 평안하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추모하는 공간은 가장 높은 위치에 마련돼 있다.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들의 명단이 벽면에 가득 새겨져 있다. 눈을 감으니 수천 마리의 노랑나비들이 훨훨 꽃밭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추모공원을 찾은 관람객들이 정성껏 바람을 적은 종이들도 노랑나비처럼 보인다.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를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 소녀의 꿈, 소녀의 표상-위안부 피해의 역사 바로 알기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는 국적과 민족에 상관없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역사적 화해, 평화를 위한 인권교육’ 프로그램인 ‘평화의 길 peace road’를 연간 2회 실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7월부터는 ‘소녀의 꿈, 소녀의 표상(表象)’이란 주제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와 광주시의 지원으로 진행되는 ‘2023 박물관·미술관 지원 사업-소녀의 꿈, 소녀의 표상’은 위안부로 끌려가 소녀시절을 송두리째 빼앗긴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를 직접 글과 그림으로 표상함으로써 역사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총 24차로 10월까지 진행되는 교육은 1차 역사교육, 2차 창의표현활동으로 이루어져요. 역사교육에서는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의 지도로 ‘일본의 침략 전쟁사’와 매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 역사’도 배웁니다.”  성노예, 정신대, 위안부라는 용어를 풀이하며 위안부 피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시간도 가지고,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역사관에 전시된 조형물의 의미에 대해서도 배운단다. 7월15·22일 이뤄진 특별 순례 프로그램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고,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관람과 추모공원을 참배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마주하는 평화의 소녀상은 왜 단발머리를 했는지, 소녀상 어깨에 앉은 새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봅니다. 할머니들이 생전 남긴 말씀 중 기억해야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도 갖지요.” 특히 ‘창의표현활동’은 참여 학생들이 피해 할머니들에게 위로편지를 쓰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역사에서 배운 느낌을 표현하는 활동인데, 아이들의 상상력과 재능을 발휘하는 재미있는 시간이다. “이제까지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지은 가사를 대중가요나 민요 같은 노래에 붙여 노래를 만들 것입니다. 우수한 활동을 펼친 모둠을 오는 10월21일 역사관에 초청해 ‘소녀 아리랑’ 공연을 진행할 계획이지요.” ■ ‘위안부’할머니들 여성인권활동가로 거듭나다 일본은 현재도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왜곡한 논문을 발표한 하버드 램지어 교수 등을 내세워 강제성을 부인하는 주장을 국제사회에 퍼뜨리고 있다. 또 지난해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에 대한 서술을 지웠다. 광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리는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교육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졌으면 해요, 나의 인권과 타인의 인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소녀의 꿈, 소녀의 표상’은 좋은 호응을 받아 관내 초중고를 비롯해 지역아동센터, 홈스쿨링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말을 담은 스티커를 팔에 붙이는 시간도 가진다. “이 모든 것이 강요였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we must record these things that were forced upon us).” 역사관은 지난해 11월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방향모색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관계 전문가들과 토론회를 열어 역사관의 방향성과 전시체제 및 공간의 재구성을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롭게 출발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부디 지치지 않고 전진하기를 응원한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2. 광주 만해기념관

2023 경기도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만해 한용운! 무궁화로 피었습니다’가 진행되고 있는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에도 무궁화가 한창이다. 전보삼 관장은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무궁화를 가리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무궁화 품종 이름이 바로 ‘만해’지요. 만해라는 품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구해 심은 것입니다. 만해 품종을 개발한 분에게 ‘무궁화 심으과저’라는 만해의 시가 있다고 알려주니 그 사실은 몰랐다며 깜짝 놀라더군요.” ■ 남한산성에 깃든 만해의 독립정신 ‘…민족의 정기 빛나는 용맹한 청소년들아/ 캄캄한 밤하늘 푸른 눈동자들아/ 불의의 질곡을 깨트리고/ 세계의 중심을 당당하게 이끌어 나아가라// 겨울 설악산 서릿발 사나이가 옥중에서/ 홀로 부른 침묵의 노래가/ 민족의 성지 남한산성에/ 천만 송이 붉은 꽃으로 피어나게 하여라.’  만해기념관 입구에서 최동호 시인의 ‘꽃 한 송이 기리는 삼월의 노래’를 새긴 시비를 마주한다. 입구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흉상은 조각가 민복진의 작품이다. ‘나룻배와 행인’을 비롯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명시를 새긴 시비들이 있는 야외공원에도 무궁화 ‘만해’가 활짝 피어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네 나라에 비춘 달아 / 쇠창을 넘어 와서 / 나의 마음 비춘 달아 / 계수나무 베어 내고 / 무궁화를 심으과저.’ 만해가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민족 독립을 염원하며 지은 옥중 시 ‘무궁화 심으과저’의 첫 연이다. 이 시는 1922년 9월, 천도교단에서 펴내는 잡지 ‘개벽’ 27호에 실렸다. 옛 시인도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또 아침이면 피어나”라며 무궁화의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특별전을 여는 만해기념관 관계자의 말에도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사랑을 북돋우고, 조국 광복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이 사회를 이끌어갈 우리들에게 만해의 정신과 역사의식을 전달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올해는 3‧1절 104주년, 조국광복 7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는 조국 광복을 위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으로 21세기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됐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위업과 정신적인 면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지표로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번 전시에 담겨 있습니다.”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초암 이범석을 비롯해 운원 신현조 등 다양한 작가들이 그린 무궁화 작품 3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상징이었다. 태극기를 매다는 깃대의 끝을 무궁화 봉오리로 장식하고,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구절이 들어있듯이 무궁화는 우리 한민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무궁화와 태극기가 짝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월봉 조동희의 ‘삼천리금수강산’에도 한반도와 무궁화가 어우러져 있다. 파도가 철썩이는 푸른 바다에 바위섬 독도를 배경으로 활짝 핀 무궁화에 나비가 날아드는 환상적인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다. ■ 만해, 조선인의 가슴에 독립의 정신을 심다 ‘음빙실문집’, ‘영환지략’, ‘월남망국사’ 같은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들을 전시하고 있다. 선생이 평소 즐겨 읽었던 책을 살펴보면 만해가 얼마나 반골의 지사였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희귀본 ‘님의 침묵’ 초간본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님의 침묵’ 옆에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가 나란히 놓여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에서 축복한 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됐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만해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지은 시를 모아 1926년 펴낸 시집 ‘님의 침묵’은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만해의 탁월한 문학성은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조선인의 염원을 ‘님’이라는 동양정신과 한글의 운율로 표현한 데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동안 ‘님의 침묵’은 얼마나 읽혀졌을까? 전시실에서 만난 판본만 100여종이나 된다.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님의 침묵’을 통해 만해 문학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한국 불교의 죽비가 된 ‘조선불교유신론’이나 ‘정선 강의 채근담’ 초간본도 만날 수 있다. 상설전시실은 ‘뜻을 세우다’부터 ‘불교인으로의 지향’,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침묵의 미학’, ‘설중매화’, ‘심우장의 정절’, ‘만해가 떠난 그 후’ 등 7개의 주제로 만해의 일생을 온전하게 보여준다. 1920년 9월 동아일보 기사를 스크랩한 신문을 살펴본다.  ■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만해 한용운의 불꽃 같은 생애를 살펴본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27세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돼 불교계의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유신론’(1913)과 ‘불교대전’(1914)을 저술하고,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해 언론 활동을 통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다. 1919년 만해는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감옥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지어 인간의 기본정신인 자유 평등 평화사상에 입각한 독립은 당연한 민족의 자존심이라 주장한다. 한편 만해는 55세 때부터 조선총독부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에서 생활하다가 1944년 6월29일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한다. 만해의 투철한 정신과 삶의 자세는 독재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루고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1962년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만해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인생의 지혜와 삶의 여유를 배우는 놀이터 만해 한용운 선생은 천년의 전통을 가진 시조도 여러 편 남겼다. ‘남아(南兒)’란 시조를 읊조려 본다.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은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무제(無題)로 지은 14편의 연작 시조 중 첫 번째도 독립을 노래한다. ‘이순신 사공삼고/ 을지문덕 마부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하여 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 뿐인가 하노라.’ 무궁화 전시가 열리는 전시실에도 이 시조를 새겨 놓은 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만해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빼어난 시를 지었고, 논리가 탄탄한 논문을 지어 불교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명쾌하게 밝혔다. 우리 젊은이들이 만해의 삶에 주목하고 그의 사상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다. 죽기까지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 후세의 모범으로 울림을 주는 만해의 정신은 샘물처럼 청정하다. 만해기념관은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꾸준한 실행을 통해 만해의 정신이 한국인의 가슴에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도록 힘쓰고 있다. 매년 ‘한용운의 님 찾아가는 남한산성 인문학 캠프’ 만해학교를 열어 눈 밝은 시민을 길러내고 있다. 만해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시청하고, ‘만해의 님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한 특강을 듣고, 만해의 시를 노래로 배우고, 만해 시 낭송과 만해기념관 전시 작품을 관람하는 시간을 가진다.   남한산성에 조성된 한옥마을 돌담길을 따라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만해 한용운 선생과 관련된 수천 점의 소장품이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1호 문학관 만해기념관을 설립한 전보삼 관장의 바람을 들어본다. “만해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권합니다. 견고하고 끈질긴 만해의 철학과 정신은 지금처럼 쉼 없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더 큰 의미가 있고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만해기념관이 인생의 여유와 삶의 지혜를 배우는 많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1. 의정부 백영수미술관

우뚝한 도봉산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도봉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산이 훤히 바라보이는 언덕에 터를 마련해 화실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있었다. 의정부시 호원동에 자리 잡고 있는 백영수미술관은 도봉산을 사랑한 화가 백영수(1922~2018)가 1973년 손수 집을 짓고 화실로 사용하던 안말 터에 세운 하우스뮤지엄이다. 백영수·김명애 부부가 미술관 건립을 위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설립한 비영리재단법인 (재)백영수미술문화재단이 2017년 백영수미술관을 개관한다. 2018년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된 백영수미술관(관장 김명애)은 의정부시의 제1호 미술관이다. ■ 평생 동심을 일깨운 화가 미술관 새하얀 벽면에 백영수 화백이 창조한 모자상이 설치돼 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미술관이 아늑하다. 자작나무 몇 그루 서 있는 마당에도 모자상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경당’과 화가의 손길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짐작하시듯 미술관은 백영수 화백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집의 형태를 모티브로 설계한 것입니다.” 호원동 화실에서 책의 삽화나 표지화를 그리던 시절이나 프랑스 빌라 슐 바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백영수가 일관되게 붙들었던 주제는 소년과 모자(母子)다. 현재 ‘소년’을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구상 시인은 백영수를 이렇게 소개한다.  “동심의 세계를 한평생 오롯이 그린 화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백영수 화백은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무한한 시공을 우러르며 살지 싶습니다. 그의 그림이 흐려진 우리의 마음에 신비한 샘물이 돼 맑게 할 것을 바라고 믿습니다.”  시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백영수의 그림은 우리의 흐린 눈과 탁한 마음을 씻어준다. 전시실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백 화백이 말년에 매달린 ‘창’을 주제로 한 여백 시리즈다. 붉은 벽에 작고 까만 창이 달려 있는 단순한 구도의 그림이다. 창 너머에 있는 ‘소년’을 만나려면 가슴을 열고 그림 앞으로 다가서야 한다. ■ 소년이 살아 있다 탁자 안에 바지도 입지 않은 벌거숭이 아이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 종이를 오린 것인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같은 포즈를 취한 소년이 등장하는 그림은 색감이나 구도가 한편의 동화 같다. 소년의 뒤편에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해와 달처럼 보인다. 꽃과 집은 거꾸로 그려져 있다. 새로 도배한 방 벽에 낙서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그린 것으로 1998년 작품이다. 발가벗고 방안에 벌렁 드러누워 팔베개를 한 소년을 통해 어린 날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키 큰 해바라기 사이에 한 소년이 서 있고, 그 뒤로 집과 개와 나무가 있다. 바탕의 밝은 주황색이 소년과 해바라기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해바라기가 활짝 핀 여름날의 풍경을 떠올린다. 해바라기가 얼굴인 그림도 있다.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 소년의 곁에 새가 한 마리 있다. 피리를 부는 두 소년과 주위에 모여드는 일곱 마리의 새와 여윈 개가 한 마리 있다. 무슨 까닭일까?  1975년 전후 그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배경이 어둡다. 작은 연못가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 곁으로 새들이 다가온다. 소년의 그림자와 새 그림자가 연못에 또렷하게 비친다. 소년의 피리는 새를 불러 모으고 동무를 불러 모은다. 피리 부는 소년을 통해 희망을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남과 여’(1975)는 구도부터 독특하다. 피리를 부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새를 불러 모아 모이를 준다. 노란 바탕에 푸르스름한 색깔로 그려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새가 무척 평화롭다. 수백마리의 송사리 떼가 한쪽 방향으로 헤엄치는 ‘송사리’(1969)의 선도 경쾌하다. 그러나 이 무렵 그려진 대부분의 작품은 사춘기 소년의 표정처럼 무겁고 우울하다. 진한 황토색으로 놀란 표정의 소년과 우짖는 새를 그린 ‘새와 소년’이 대표적이다.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펼친 1975년은 한국 정치의 암흑기였다. 이 그림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암담한 정치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76년에 그린 ‘새’와 ‘새와 소년’ 그리고 1978년에 그린 ‘새’도 침울하긴 마찬가지다. 열 마리의 새들 중에서 한 마리만 날고 아홉 마리는 소년의 곁에 모여 있다. 하지만 피리를 부는 소년에 등장하는 새들과 달리 새들의 몸짓이 어수선하다. ‘새와 소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가족’(1978)에서 작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오른편의 모자는 아내와 딸, 왼편에 떨어져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백 화백 자신으로 보인다. 백영수 화백이 프랑스로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생활고는 물론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 320쇄를 돌파한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표지화에서도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피리 부는 소년은 희망을 찾는 몸짓으로 읽힌다. ■ 창 너머에 있는 숨겨진 풍경 백영수 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다. 1944년 귀국해 목포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1946년에는 천경자 등과 함께 조선대학교에 국내 최초의 미술과를 설립한다. 1947년 서울에 정착해 전시회를 열어 미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최초의 국전인 ‘조선종합미술전’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무렵 백영수는 수많은 책의 표지와 삽화를 그리고 많은 글을 썼는데, 광복과 6·25전쟁 시기 예술가와 작가들의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구상, 서정주, 유치환 같은 시인들과 이중섭을 비롯한 화가,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인과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백영수가 프랑스행을 감행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1977년 프랑스로의 출국 전후에 그의 작품에 ‘모자상’이 등장하는 것이 주목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그에게 모자상은 평생의 화두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 파리에 간 백영수는 요미우리 아트센터의 전속계약 화가로 활동하며 파리와 밀라노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22번의 초대전 및 단체전, 살롱전 등에 100여차례 참여한다. 김명애 관장은 유럽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림을 팔아 남프랑스 빌라 슐 바(Villars-sur-Var)에 별장을 갖고, 파리 근교와 노르망디에 아틀리에를 소유했으니 전업 작가로 성공했던 셈이지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백영수의 그림에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많다. 반짝이는 별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별’은 빌라 슐 바에서 별 보기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그린 작품이다. 추위에 떠는 아내를 위해 즉석에서 ‘해’를 그려 주기도 한다. 백영수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평생 유지한 특별한 화가였다. 박재용 학예연구사는 백영수 화백의 ‘선’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60여년을 같은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도 세련된 선으로 그린 적이 없습니다. 화백님은 에너지를 매우 효율적으로 쏟아낸 작가였습니다.” 백영수미술관은 작고 아담하다. 규모가 작은 대신 공간의 구성이 튼실하다. 김 관장이 평소 매일 기도를 하는 ‘경당’과 백 화백이 생전에 그림을 그리던 화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하다. 백 화백이 말년에 집중했던 주제가 바로 ‘창’이다. 푸른 바탕에 연두색으로 작은 창을 표현한 그림이 마음을 밝혀준다. 작은 창 너머에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 펼쳐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너머의 것도 보세요.” 미소를 머금은 은발의 화백이 관람객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다. 푸른 도봉산 아래 따뜻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한 백영수미술관이 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단단하고 날카롭게 보이는 주먹도끼가 서 있다. 이곳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검색한다. 지도를 조금씩 축소하자 박물관이 위치한 마을과 들판을 감싸듯 휘돌아 흐르는 한탄강 물줄기가 뚜렷해진다. 경기문화재단 전곡선사박물관(관장 이한용)이 위치한 곳은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 443번길 2이다. 숲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분홍 꽃을 활짝 피운 자귀나무 우듬지 너머로 둥글고 길게 이어진 은빛 건물이 살짝 모습을 보인다. 둥글고 기다란 은빛 건물은 두 개의 언덕을 잇고 있다.   ■ 주먹도끼 하나가 역사를 바꾸다 전곡선사박물관 로비에 들어서자 공룡의 배 속이나 동굴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전곡선사박물관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주는 ‘디지털 수장고’와 교육체험특별전 ‘산새들새’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디지털 수장고’는 1978년 한탄강에서 발견돼 고고학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주먹도끼를 비롯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과 호모 에렉투스 같은 인류의 조상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주먹도끼, 청동 검, 전동드릴 같은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360만년 전부터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1969년까지 도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다. 1층 상설전시실은 강이 흐르는 숲처럼 아기자기하다. ‘왜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까?’ 전시실에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질문이다. 인류가 시작된 곳은 아프리카 초원이었다. 원숭이처럼 나무 위에서 열매를 먹으며 생활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조상은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무성한 숲이 초원이 되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서 생활하게 된다. 앞발을 드는 일을 반복하면서 골반과 척추가 진화돼 두 발로 걷기 편한 체형으로 바뀌었다. 자유롭게 된 두 손은 도구를 만들고 음식을 운반하거나 자식을 돌보는데 사용했다. 처음 마주하는 유물은 ‘전곡의 주먹도끼’이다. 유리관 안에 전시된 다섯 개의 주먹도끼는 이 박물관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낸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만능도구였습니다. 주먹도끼는 큼직한 돌을 다듬어서 끝이 뾰족하거나 타원형으로 날을 만든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석기입니다. 주먹도끼는 모양이 나무를 쪼개는 데 쓰는 쇠도끼와 비슷해 지어진 것입니다. 주먹도끼로 나무 다듬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쉈지요. 이처럼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만능도구였던 주먹도끼를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지요.”  전곡리 주먹도끼는 흔히 아슐리안 내지 아슐리안 스타일의 주먹도끼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전곡리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들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서양에만 있었다는 모비우스 교수의 학설을 무너뜨리고 세계 구석기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한 획기적인 유물이다.  ■ 주먹도끼, 두 발로 걸으면서 시작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전시실의 중앙은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700만년 전 살았던 가장 오래된 화석인류 ‘투바이’는 물론 세련된 이름을 가진 ‘루시’와 ‘루시앙’도 두 발로 걸었다는 점을 빼면 원숭이와 구분하기 어렵다. 약 180만년 전에 출현해 최초로 석기를 사용한 ‘호모하빌리스’를 유심히 살펴본다. 털이 많이 줄어든 ‘호모 에르가스터’를 보니 원숭이와 달라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불을 사용한 흔적을 뚜렷하게 남긴 베이징원인 ‘호모 에렉투스’는 약 70만년 전부터 사냥꾼으로 살았고, 동굴에 멋진 채색화를 남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는 3만년 전까지 살았다. 이 무렵에야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는데, 한반도 후기 구석기 시대의 주인공이다. 뼈바늘을 사용하고 장례를 치른 흔적을 남긴 ‘산정동인’이나 1만년 전의 ‘만달인’은 체형에서 현대인과 별 차이가 없다. 인형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렇다. 모두가 두 발로 걷는 모습이다. 빙하기의 대형포유류 ‘매머드’ 와 얼룩말도 구석기시대의 주인공이다. 매머드의 다리뼈와 가죽으로 만든 움집이 원시시대의 풍경을 연출한다.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는 생존능력,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최고의 강점입니다.” 현생 인류가 전 지구에 퍼져 살기 시작한 후기 구석기시대에 예술 활동이 시작됐다. 인간의 역사는 곧 예술의 역사이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과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을 재현한 공간도 빠뜨릴 수 없는 과거로의 여행지이다. 아빠 손을 잡은 어린이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동굴로 들어간다. 화려하게 채색된 순록과 들소, 생동감 있게 그려진 말 그림들은 순식간에 원시시대로 인도한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왜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까? 동굴 벽화와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동굴이 주술적 장소, 특별한 무덤, 성년의식의 장소로도 사용됐던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안내하던 심경보 학예연구사가 동굴을 공연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준다. 전시장 곳곳에서 영상을 통해 구석기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화석만 남은 선사시대를 첨단의 기기로 역동성 있게 소개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털옷을 입은 원시인이 주먹도끼로 가죽을 자르고, 창을 들고 동물을 사냥한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원시인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영상 속 인물이 “아까부터 자네와 말하고 싶었네”라며 화답한다. 원시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레고로 제작한 모형들은 어린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많아 교육과 연계해 새로운 모형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 더 가깝게 다가가고 더 친절하게 맞아주는 박물관 “한탄강세계지질공원센터가 박물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지질답사팀들이 많이 관람하러 오십니다. 박물관이 길목의 초입에 위치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지요. 평소 이 지역을 이해하도록 지질 관련 영상물을 상영하지만, 이렇게 전자칠판을 설치해 강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로 옆에 지질연구자들이 기증한 화석을 전시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지난해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지나가기 좋도록 이동 공간을 넓히고 전시물의 높이를 낮춰 어린이들이 관람하기 좋도록 변화를 줬지요. 좀 낮아보이지만 일반인들이 관람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노후화된 시설도 약간의 변화를 주어 관람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미란 실장은 상설전시실 옆 공간의 활용에 대한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공간은 연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와 학생 등 지역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박물관 공간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시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 낭비를 줄이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지요.”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자세나 공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는 마음가짐이 훌륭하다. 지하1층 기획전시실에도 볼거리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산새들새’전은 전곡선사박물관 주변에 새가 많은 것에 착안한 생태 관련 전시다. 호랑지빠귀, 후투티 같은 예쁘지만 낮선 새는 물론 까치와 꾀꼬리처럼 익숙한 새들까지 다양한 새들을 만날 수 있다. 1993년부터 전국선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전곡리 구석기 축제’는 박물관의 자랑이다. 이러한 사업의 기획과 진행을 맡았던 이가 이한용 관장이다. 2011년 4월 개관한 전곡선사박물관의 학예팀장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는 박물관장으로 재직했는데, 최근 신임 관장 공개모집 절차를 거쳐 다시 연임됐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33년째 인연을 이어가는 이 관장의 꿈은 단단하다. “세계사를 뒤엎은 전곡리 선사유적의 가치를 더 널리 알리고, 도민과 지역사회, 나아가 전 세계와 소통하며 전곡선사박물관을 구석기 문화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긴 전곡선사박물관은 휴식과 충전을 위한 여행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 과천 추사박물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와 ‘추사체’로 불리는 독특한 글씨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추사가 생의 마지막을 과천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추사박물관(관장 신동선)이 자리 잡은 과천시 추사로 78(주암동)은 아버지 김노경이 1824년 조성한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던 곳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추사와 과천과의 특별한 인연은 1837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더욱 깊어진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 8월부터 생을 마감하는 1856년 10월10일까지 만 4년을 과천에서 살면서 학문과 예술을 꽃피운다. ■ 과천에서 꽃피운 추사와 후지츠카 부자와의 아름다운 인연 과천시는 1996년 ‘과천 추사 관련 유적 조사 보고서’ 발간을 시작으로 추사 김정희를 조명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활발히 벌인다.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가 수집한 방대한 추사 관련 자료를 그의 아들 아키나오(明直, 1912~2006) 선생이 과천시에 기증한 2006년부터 박물관 건립 논의가 본격화된다. 마침내 2013년 6월3일, 추사의 생신일에 맞춰 추사박물관을 개관한다. ‘추사가 보낸 편지전’, ‘추사묵연전’, ‘추사 글씨 현판전’, ‘다산과 추사 전’, ‘정벽 유최관 전’, ‘자하 신위 전’, ‘추사금석 전’, ‘추사가문의 글씨 전’, ‘추사서화파 전’, ‘추사의 성북동 나들이 전’, ‘추사중국전: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 ‘추사가 사랑한 꽃 전’, ‘추사한국전: 추사의 과천시절 전’, ‘소지도인 강창원 전’, ‘추사필담첩1: 1822년 김노경의 연행 전’, ‘다시, 봄: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실학자의 활동’, ‘추사필담첩2: 1809년 추사의 연행 전’을 거쳐 현재 진행 중인 ‘후지츠카 치카시와 난학’으로 이어진다. “추사박물관의 최상위목표는 추사 문집의 정본화 사업입니다.” 추사박물관을 준비할 때부터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는 허홍범 학예연구사는 추사박물관이 추구하는 것이 추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바탕이 되는 문집의 정본화 사업임을 강조한다. ■ 고난에서 피워낸 추사의 학문과 예술 2층 상설전시실은 추사의 생애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추사가 8세 때 아버지에게 올린 편지를 살펴본다. “장마와 무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라는 안부로 시작하는 맏아들의 편지와 “편지를 받고 보니, 어른을 모시고 글 공부하면서 두루 평안하고, 근래의 돌림병도 우선 면했다니 무척 위로가 되는구나”라는 생부 김노경의 답신이 한 장에 들어있다.  추사가 애용한 인장도 눈길을 끈다. ‘추사’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완당’을 비롯해 36마리의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을 뜻하는 ‘삼십육구초당’처럼 재미있는 내용을 새긴 인장도 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발견기’에서 금석학으로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혀간 김정희의 열정을 발견한다. 아우 명희와 상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 형제들과 돈독한 우의를 나눈 추사의 따뜻한 얼굴이 그려진다. 소치 허련이 제주도에서 유배를 살고 있는 스승을 생각하며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과 이한철이 그린 ‘추사영정’을 통해 추사는 외모가 수려한 미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부인 예안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드는 매력적인 유물이다. 한글인 데다 그 내용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건강 걱정, 자손 교육에 대한 고민 같은 추사의 인간적 면모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묵란도’를 비롯한 익숙한 난초 그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박물관 외벽을 장식한 ‘불이선란도’를 찬찬히 살펴본다. 추사체의 깊은 맛을 느끼려면 반드시 오래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의 유물도 있다. 청나라의 유명한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상’과 ‘월매도’는 후지츠카 치카시의 저서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에도 실려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준 그림 ‘세한도’에 얽힌 사연은 감동적이다. 이상적 사후에 민씨 일가로 넘어간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츠카 치카시의 손에 들어간다. 서예가 손재형이 ‘세한도’를 소장한 후지츠카의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가 양도해 줄 것을 간청해 끝내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후지츠카가 사용한 인장이 여러 점의 인장에서 한국인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인장을 발견한다. 유물에서 추사와 후지츠카와의 인연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지난달 3일부터 시작된 특별기획전 ‘후지츠카와 난학(蘭學)’은 추사박물관 10년의 내공이 응축된 전시다. 다음달 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은 후지츠카 기증유물을 중심으로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의 난학과 후지츠카 가문 자료, 후지츠카 치카시의 생애와 학문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일본 학자가 추사의 무엇에 매료됐을까? “좀 생소하겠지만 ‘난학’은 일본 에도시대에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된 서양의 의학과 과학 지식을 연구한 학문을 말합니다. 후지츠카 가문은 난학의 세례를 통해 신학, 의학, 금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성취를 이룩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후지츠카가 김정희를 발견했던 것이고, 추사를 연구하여 1936년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지요.”  “일본 실학인 난학이 일본을 근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난학에 바탕을 둔 일본의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은 번역으로 이어졌고, 일본이 근대화를 이룩하는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지요.” 특별전을 알리는 포스터에 ‘화란문전자류’라는 사전이 실려있다. 17세기 시작된 난학의 전통은 유럽의 서적을 번역하는 열풍으로 이어져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다. 반식민지가 된 중국과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후지츠카 치카시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추사에 빠져드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주목된다. 아버지 후지츠카를 따라 한국에 와서 5년 생활한 아들 아키나오도 한학자인데, 추사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한 장본인이다. ■ 지나온 10년, 앞으로 열어갈 100년 추사박물관은 서울시교육청 지정의 청렴 유적지이기도 하다. 추사박물관은 수준 높은 번역서와 논문집도 꾸준히 발간해 추사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역주 추사 암행어사 보고서’(2014), ‘역주 추사 친필 동몽선습’(2015), ‘탈초·역주 추사필담첩’(2021~2), 김정희, 김노경, 김명희, 박제가, 유득공 등의 ‘추사필담첩’은 주목되는 성과물이다. 특히 ‘추사필담첩’은 박제가와 유득공의 필담, 김정희 연행 필담, 아버지 김노경과 동생 김명희의 연행 필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추사학 연구의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이 필담첩에서 김정희가 “제 이름은 정희이며 자(字)는 추사(秋史), 호는 보담재입니다. 지난해 시월(10월) 진사가 됐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기록이 발견됐다. 김정희의 호로 알려진 ‘추사’는 본래 자(字)로 쓰였는데 점차 별호로 쓰였다고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를 쉽게 널리 전달하기 위한 추사박물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추사 김정희’를 제작하고 ‘스마트 추사박물관’을 구축해 추사를 알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2017년에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진로체험기관’으로 인증을 받았고, 올해 1월에는 ‘2022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제 우수인증기관’에 선정됐다. 3회 연속 우수인증기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새로운 유물을 발굴해 소개하는 수준 높은 학술회의와 콘텐츠 개발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과지초당을 찾아 “70년 동안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를 다 닳게 했습니다”라고 고백한 추사의 말을 떠올린다. 절망의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추사의 의연하고 투철한 자세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시 장흥면에 푸른 산과 맑은 계곡을 배경으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시립미술관 사이에 멋스러운 장흥조각공원까지 만든 양주시의 정책이 신선하다. 2014년에 개관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관장 이계영)은 장욱진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건축한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가족을 비롯해 나무와 아이, 새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를 즐겨 그린 동심의 서양화가 장욱진(1918~1990)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진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분단과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비롯한 환란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면서 탄생시킨 장욱진의 작품들에서 발견하는 흥과 웃음과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흥미로운 기획전이 마침 열리고 있다. 지난 4일 개막한 2023 기획전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들’은 앞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는 흥미롭고 풍성한 기획전이다. 오는 11월19일까지 열리는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들’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규상, 이중섭, 장욱진의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여섯 명은 순수미술동인인 ‘신사실파’에서 함께 활동하며 한국의 현대화단에 추상미술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들이지요.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20세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자유와 소통을 향한 전위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신사실파’에서 시작한 작가 6인의 도전과 실험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국의 추상미술을 해석하는 틀로 작용하고 있지요. 한국의 모더니스트이자 추상미술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이들의 작품은 한국적 추상의 시작점과 그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명훈 학예사가 장욱진의 작품이 가진 매력의 비밀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몇 개의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장욱진의 작품이 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요? 장욱진은 대상의 본질을 끌어내기 위해 장식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며 선을 단순화시켰던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순수한 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이지요. 내면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워냄을 의미합니다. 장욱진의 단순한 선은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의 결과입니다. 단순함 안에 담긴 다양함이야말로 서구 모더니즘과 차별되는 장욱진 작품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 여섯 작가의 화두 ‘사실을 새롭게 보자’ 장욱진은 1949년에 김환기, 유영국 등이 결성한 ‘신사실파’에 참여하는데 ‘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주제 의식을 작품에 충실하게 담아낸다. 장욱진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대담하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그의 말처럼 장욱진은 평생 자연 속에서 살면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단순하게 표현한 작가였다. 유명 작가 여섯 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한 자리답게 비가 내리는 궂은날이지만 관람객들이 붐빈다. 김환기(1913~1974)의 ‘산월’(1960)은 푸른 바탕에 검고 굵은 선으로 표현한 산이 품은 달이 짙은 청색이다. 산과 달과 들판까지 검고 푸르다. 무겁고 어두운 색깔은 혁명을 잉태한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백영수(1922~2018)의 ‘장에 가는 길’(1953)은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 아이를 업은 여인들이 길을 걷는 풍경이다. 백영수의 그림은 김환기와 달리 밝고 활기차다. 유영국(1916~2002)의 ‘바다에서’는 제목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이다. 대신 붉고 푸른색을 써서 답답하지는 않다. 이규상(1918~1967)의 ‘생태11’도 아주 단순하고 과감하다. 기호처럼 그려진 것이 빗방울과 눈으로 보이는 까닭 역시 작품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짙고 옅은 갈색만 사용한 것이 무척 흥미롭다. 피난처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렸을 이중섭(1916~1956)의 ‘애들과 물고기와 게’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에서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빛의 호박과 노란 호박꽃 역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려는 이중섭의 슬픈 눈이 그려진다. 몇 개의 선으로 그린 장욱진의 ‘얼굴’은 오랫동안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한 편의 동화처럼 그린 ‘집과 까치’(1986)도 붉은 해와 푸른 반달,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초가집 마당에 앉은 까치가 희망을 노래한다. ■ 가족 사랑과 열린 정신 2층 상설전시실에는 장욱진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 ‘채움의 방식’이 열리고 있다.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장욱진의 따뜻한 작품들을 만나는 시간은 행복하다. 마치 한옥의 안채처럼 꾸며진 전시실에 들어서면 장욱진이 어떤 방식으로 가족들을 사랑했는지 그려지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장욱진은 언제나 자신을 비우고 남은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웠던 심성의 소유자였다. ‘평상’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물론 작가 자신과 아내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아내와 아이들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강아지와 까치도 가족의 일원이다. ‘가족’은 장욱진의 영원한 주제였다. 그의 작품 앞에서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 그 소중함과 가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장욱진을 관람객들에게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한 미술관의 노력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2022SIMPLE ‘비정형의 자유, 정형의 순수’와 2022 기획전시 ‘선善도 악惡도 아닌’은 이러한 미술관의 생각을 전달하는 전시입니다.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심플’ 정신을 계승하고, 현대 작가들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연례기획전이죠. 심플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한’ ‘단순한’ ‘소박한’ 등인데, 심플은 엽서 정도의 크기, 30호 이내의 작은 캔버스에 사람, 동물, 자연을 품은 장욱진의 그림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나 어른 모두에게 쉽게 다가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매력입니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덜어내는 인고의 시간을 통해 사물의 정수만을 담아내었기에 열려있지요. 장욱진의 그림에 무위자연과 무욕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2023 기획전 ‘점 안의 우주’도 장욱진 예술의 단순함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 전시였다. 장욱진 예술의 대표적 화두인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뜻이다. 장욱진 작품의 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장욱진을 사랑하는 관객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 단순함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지혜 “장욱진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현재도 그의 심플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우리가 순수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장욱진에게서 단순함의 미학, 단순함이 선사하는 삶의 지혜까지 얻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장욱진이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라는 선불교의 ‘불사선’을 화두로 삼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가는 나와 대상이 갖는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대상의 진정한 가치와 직면할 때 우리는 욕망을 바탕으로 맺어진 관계로부터 오는 정신적 공허함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푸른 산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장욱진이 평생 화두로 삼은 ‘심플’의 철학을 느끼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사이에 자리 잡은 조각공원도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예술 작품이 전달하는 통찰과 즐거움은 물론 자연이 선사하는 여유와 신선함까지 두루 만끽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예술의 명당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용인 안젤리미술관

노란 해바라기가 작은 캔버스에 활짝 피어났다. 수채화 붓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내 완성된 그림을 담는다. 밑그림에 붓으로 색칠을 하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다. 문득 궁금하다. 대작을 완성한 전업 화가의 기분은 어떨까? ■ 커피향 맡으며 그림을 그리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용덕저수지 옆에 자리한 안젤리미술관(관장 권숙자)은 지난 2015년에 개관한 1급 사립미술관이다. 2천500평(8천264㎡)의 대지 위에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 교육실과 예술대화방, 회의실과 체험실을 두루 갖추었다. 미술관 2층 카페는 관람객들에게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화실로 활용되고 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카페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몰입’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유년 시절의 풋풋한 추억을 떠올리며 잊고 있던 자아와 만나는 행복한 시간이다. 안젤리미술관 건축물은 권숙자 관장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미술관은 하늘로 비상하는 새를 형상화한 것이다. 외벽을 장식한 네 개의 빨간 원모양의 구조물은 눈을 상징한다. 하얀 날개를 펼친 천사와 마당에 새긴 커다란 별이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것 같다. 두 마리 새와 젊은 남녀가 조각된 전시장 현관문도 멋스럽다. 미술관 안마당에 자리한 200평(661㎡)의 야외 공연장에 들어서면 천사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하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대형 벽화 ‘오월의 신부’는 관람객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미술관 곳곳에 권숙자 관장과 고인이 된 남편 곽안젤로의 사연이 숨어 있다. 그렇다. 안젤리미술관은 음악가 남편과 화가인 아내가 만든 공동작품이다. 꽃들이 활짝 핀 오월의 화원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묘사한 ‘오월의 신부’에 미술관의 탄생 이야기가 숨어 있다. ■ 미술관 곳곳에서 만나는 삶의 이야기 “젊은 시절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니스에 있는 샤갈미술관을 방문한 후 미술관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됐어요. 니스해변의 푸른 물빛처럼 푸른 색조를 이루고 있는 샤갈그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미술관으로 스며드는 찬란한 햇살이 미술관 바닥에 그림처럼 드리워지고 있을 때, 문득 미술관을 가지고 싶다는 강열한 욕구가 일어났어요. 그때 안젤리미술관의 태동이 됐던 것이지요.” 권 관장이 미술관을 개관하던 2015년에 펴낸 에세이집 ‘이 세상의 산책 안젤로의 전설’에도 그 특별하고 가슴 먹먹한 사연을 자세히 담아 뒀다. 건축을 시작한 이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예술가의 길을 걷던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이처럼 견디기 힘든 어려움을 겪었으나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여기까지 걸어온 저력은 무엇일까. 뜻밖에 들려주는 대답은 소박하다.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을 지역에서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혼자서 미술관을 운영하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사립 미술관 운영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겪는 어려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죠. 그래도 이 공간을 통해 지역 문화 확산을 이룬다는 사명만큼은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강남대 미대 교수로 37년을 재직한 권 관장이 사비를 털어 2015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 안젤리가 개관 후 지금까지 8년의 세월 동안 쌓은 결과물은 풍성하다. ■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깨닫는 공간 안젤리미술관은 지난달 말부터 이달 중순까지 특별기획전 ‘하늘, 사람, 땅’ 전을 열었다. 예술혼을 바치며 창작활동에 전념하는 32인의 작가들이 참여한 기획전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나 가치나 보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했었지요.” 권 관장이 들려준 말처럼 작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다.   만 3년 이어진 코로나19의 여파는 컸다. 전업 작가들이나 사립미술관이 겪은 고난은 상상 이상이다. 이 기간 동안 안젤리미술관은 특화된 전시 프로그램 개발에 집중한다. 체험학습에 다양한 연령층을 참여시키는 일, 레지던스를 이용해 젊은 미술가를 양성하는 일, 시니어 지망생에 대한 1대 1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 찾아가는 미술교실을 적극 운영하며 미술관의 외연을 넓혀왔다. 특히 레지던스를 이용한 젊은 미술가 양성 프로그램은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19라는 악조건 속에서 특화된 전시 프로그램을 개발한 안젤리미술관의 저력은 무엇일까. 강남대 미대 교수로 재직한 권숙자 관장은 대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경기여류화가 회장과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양화 심사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도 세종대 미대 동인인 ‘군자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전통 회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권숙자 관장은 작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여 대한민국 국전 우수작품상(1977·1978년)을 비롯해 독일 괴테문화원 초대전 최우수상(2010년) 등을 수상한 실력파 작가다. 이러한 권 관장의 풍부한 경험과 역량이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권숙자 관장은 미술 발전과 후학 양성에 헌신하고, 미술관 설립·운영 및 용인지역의 문화예술 진흥을 이끌며, 복합문화공간 조성과 신진작가 발굴·지원 선도에 기여한 공로로 ‘2022 대한민국 사회공헌 대상’을 수상했다. ■ 지역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편안하고 즐거운 미술관 올해로 7년째 ‘전국미술공모전’을 개최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정서함양·인성교육·창의력 신장·미술인재 발굴에 정성을 쏟고 있다. 2016년부터 시작한 안젤리미술관 어린이 공모전은 지역 대표 어린이 미술 대회로 자리 잡았다. 그는 돈과 명예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사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 믿고 있다. “사립미술관 운영이 어렵지만 누군가는 지역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요. 신진작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용인시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나에게 부과된 사명이라 생각하며 각오를 다져요.” 지난해 가을에는 미래의 꿈을 지니고 열정과 혼신을 다하는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대학·대학원 우수작품전 – 청년작가 발굴의 보고(寶庫)전’을 열었다.   안젤리(Angeli)는 이태리어로 ‘천사들’이란 뜻이다. 천사를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미술의 가치는 미의 역할만이 아니라, 선의 역할 또한 포함해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 미술관은 미와 선, 그리고 인간다움을 추구합니다.” 안젤리미술관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쟁이 아닌, 안락하고 평안함을 간직한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꿈다락토요문화학교 역시 공동작업을 통해 크고 작은 다양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 다른 도시에서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난해 여름에는 경기 꿈의학교 ‘유럽의 예술 거장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다음 달부터 12주간 진행했다. 경기도교육청에서 2015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학생이 스스로 기획·운영하고, 참여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 돕는 교육활동이다. 유럽의 예술거장의 작가 탐구와 작품 감상을 통해 유연한 사고와 미적 안목을 기르고, 다양한 미술 체험과 활동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알찬 프로그램이다. 올 여름에는 어떤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을까. “7세 이상의 아동을 대상으로 여는 ‘뮤지엄 아트스쿨’입니다. 환경교육과 미술관 산책, 돌과 타일로 설치 작품 만들기와 물감물총놀이도 해요. 선착순으로 모집하니 서둘러 신청하세요.” 미술관 너머 호수에 저녁놀이 물들고 있다.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순간의 시간이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파주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北으로 끌려간 사람들 ‘자유의 다리’에는 6.25전쟁이 시작되면서 멈춰 버린 열차가 전시돼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여덟 글자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평화통일의 과제를 압축하고 있다. 가랑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인데 외국인들이 더러 눈에 띈다. 분단의 상처를 훤히 드러낸 슬픔의 현장이 볼거리가 된 것이다. 지난 2017년 평화누리공원 곁에 건립된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납북자 및 그 가족들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국민들과 함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평화통일의 의지를 다지는 공간이다. ■ 잃어버린 사람들, 기억해야할 이름과 만나는 곳 한자로 납북(拉北)은 ‘끌려갈 납, 북녘 북’이다.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전시관은 제1공간 ‘납북의 배경과 원인’, 제2공간 ‘납북의 전개 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제3공간 ‘귀환의 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아픔’, 제4공간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구성돼 있다. 특별전시관에는 납북자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 1천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건물 중앙을 장식한 소용돌이 형상의 조형물 ‘포토 상들리제’는 전쟁으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간 납북자와 그 가족의 기구한 삶을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납북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46년 7월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 데 대해’라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납북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죠.” 그렇다면 누가 표적이 됐을까?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확보 및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남한 사회의 저명인사이자, 우익인사, 지식인 계층 2만4천여명을 계획적으로 납북합니다. 항공사, 운전사, 목사, 농업연구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기획 납북의 대상이 됐지요.” 김규식‧안재홍 선생은 대표적인 납북자로 꼽힌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1881~1950)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백범 김구과 38선을 넘나들었던 사람이다. 일제에게 여덟 번 체포돼 감옥에서 9년을 보내고 해방되는 날 출옥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안재홍(1891~1965)도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김규식, 안재홍 선생처럼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가 아닌 경우 어떻게 납북 대상자를 찾아냈을까? 기념관 관계자가 누렇게 변색된 카드를 가리킨다. “보시는 것처럼 김형관이라는 보고자가 작성한 카드에는 성명, 연령, 성별, 주소는 물론 조사 대상자의 행적과 약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상자 안종성은 보성전문 출신으로 만주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관동군에게 협력했으며 인민위원회에 협조를 하지 않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작은 가죽 주머니와 인장과 배지는 무엇일까? 설명을 보니 서울지방법원 판사 심동구가 사용하던 인장과 배지이다. 나방을 붙인 특이한 노트도 있다. 살펴보니, 수원시 서둔동 농사시험장 연구자로 근무하던 이봉우의 농법 관련 원고이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서 흘린 이별의 눈물 납치인사의 북송은 1950년 7월 중순부터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북송은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이뤄졌다. “그마저도 폭격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걸어야 했다고 해요. 북한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남한 주민을 연행하거나 동원하는 정책을 계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남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 의용군과 노무자로 동원했다가 북으로 끌고 가기도 했지요. 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의 전체규모는 대략 10만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천438명의 이름이 실려 있는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는 1950년 12월1일에 발행한 것인데, 서울 수복 직후 공보처 통계국은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까지 서울에서 발생한 피해 상황을 구별로 조사한 것이다. 당시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올린 ‘6.25사변 피랍인사명부’도 있다. 1952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는 정전회담에서 송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시군구별로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취합해 작성한 최초의 전국단위 명부인데, 총 8만2천959명의 납북자 명단이 수록돼 있다. 세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은 남루한 풍경이 등장한다. 1953년 정전 직후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불의 세계 최빈국이었다. 어머니와 남매만 있고 가장의 자리는 비어 있다. 빈자리에 놓인 밥그릇에서 가장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납북된 하격홍의 결혼사진, 그의 아내 성갑순이 빼곡히 쓴 일기장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손때가 묻은 재봉틀에도 남편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잠을 설쳤을 아내의 한숨과 고단한 사연이 묻어있다. 낡은 함석지붕 아래 오래된 라디오가 놓여 있고, 중년들에게 친숙한 대중가요가 실린 두 개의 앨범이 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가수 조용필이 부른 ‘일편담심 민들레야’란 유행가가 납북자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납북 사실을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한 유행가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라는 대목에 이르면 관람객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히기 마련이다. 납북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 ■ 슬픔을 씻고 화해와 상생의 길로 ‘100만인 서명 진정서’, 납북피해 가족의 구출대회가 열리는 사진에서 피맺힌 가족들의 아픔이 전달된다. “납북자를 구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현재까지 납북자들의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으니 참 안타깝지요.” 1953년에 작성된 ‘휴전협정에 의한 민간인 교환에 관한 건’은 정전 직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납북자 귀환을 논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1954년 3월1일부터 하루에 100명씩 실향사민을 남북으로 귀가시키는 데 합의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향한 인원은 19명의 외국인뿐, 북한은 남한으로의 귀향을 원하는 남한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통보한다. 납북자들의 명패를 모셔놓은 기억의 방에 들어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에 거쳐 납북자 신고를 받아서 납북자로 결정된 4천777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새긴 명패가 가나다순으로 전시돼 있다. 납북이라는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 민족의 숙제다. 주목한 것은 기념관에서 관람객을 대상으로 벌이는 다양한 교육활동이다. ‘1950년, 직업이야기’ ‘1950년, 여름이야기’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분단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달한다. 기념관 마중뜰에 있는 추모비 앞에 선다. “전시납북자와 그 가족의 명예회복과 아픔을 위로하는 기념물입니다. 납북의 길을 상징하는 ‘미아리 고개’를 모티프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 납북자들의 방향은 정북(正北)을 향해 있고, 미아리 고개 아래 돌아오는 귀환자의 발길은 정남(正南)을 향해 있지요. 오랜 그리움으로 다시 이곳에 납북자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을 담은 ‘귀환의 길’은 비극의 역사를 하루 속히 끝내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나와서 평화누리공원을 산책하며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납북자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의 세월을 생각한다. 임진강평화곤돌라를 타고 임진강 너머 북녘을 굽어보며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남북이 싸움을 멈추고 서로 협력해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5.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굳건한 의지가 건축물에 충실히 담겨 있다. 외적으로부터 성문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옹성처럼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당당하게 둘러싸며 여러 나라의 국기가 게양돼 있다. 1950년 6월25일에 일어난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으로 군대와 의료진을 파견한 나라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튀르키예, 필리핀,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독일까지 22개국이다. ■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와 평화 6.25전쟁부터 최근까지 군에서 사용하던 비행기를 비롯해 전차, 함선에 장착한 기관총 같은 대형의 무기 16점이 전시돼 있는 야외전시장에서 자유와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 지키는 것임을 깨닫는다. 5인치 2연장 함포, 3인치 단연장 함포, 40㎜ 2연장 함포, 105㎜ 곡사포, T-33A 제트기, M48A2C 전차, 8인치 곡사포, M577 지휘용 장갑차, T33A항공기, 해병대가 사용한 LVT 수륙용 장갑차도 있다. 몇 계단을 오르다 만나게 되는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의 ‘우리의 소원’ 노래비는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에게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뤄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자유수호평화박물관 건립취지문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시민들의 단단한 의지를 확인한다.   “동두천시민은 6.25전쟁의 참상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국군과 유엔군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전 세계에 널리 알려 민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고 나아가 온 국민의 안보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안보의 요충지이며 경기의 소금강인 아름다운 소요산 기슭에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건립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고귀한 참 뜻을 영원히 간직하는 한편 후손에게 전하고자 본 박물관을 건립하게 됐습니다.” 박물관 출입구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빙긋 미소를 짓는다. ‘벨기에 오줌 누는 소년상’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벨기에 용사들의 기부금으로 건립된 것이다. 박물관 곳곳에서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전시물을 만나게 된다. 2002년에 개관해 현재 21주년을 맞이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작은 변화의 새바람이 불고 있다. 출입구 공간에 친환경 실내 휴식공간 ‘스마트가든’이 조성된 것이다. 산림청 국고보조사업으로 실행된 ‘스마트가든’은 식물 자동화 관리기술을 활용해 휴게공간을 친환경적으로 디자인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실내 공기를 맑게 하는 사업이다. 비록 작지만 박물관이 변화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것이 전쟁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완전무장을 한 국군 장병의 힘찬 몸짓과 세계 평화를 표현한 상징물이다. 자유와 평화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싸워 쟁취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1층 실감콘텐츠 체험실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공간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침략군 비행기를 겨냥해 천으로 만든 공을 던져 맞추면 비행기가 파괴되면서 그 위로 숫자가 나타난다. 그 숫자는 관람객이 구해낸 사람의 수이다. 성인 관람객들도 박물관 로비에서 전투기를 조정하는 비행사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2층 주전시실은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22개 나라들이 전쟁 당시 무슨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파견한 나라 별로 병력부터 임무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전시한 것이 돋보인다.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형을 비롯해 주요 장비, 참전 규모와 주요 전투까지 참전국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올해는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6.25 전쟁이 벌어진 6월이다. 그래서인지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평소보다 많다. ■ 동두천에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세워진 까닭? 1950년 7월19일 동두천에 이동병원이 진료를 시작한다. 부상당한 국군과 유엔군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르웨이 적십자가 편성한 83명의 요원들은 민간인을 위해 외래환자진료소도 운영한다. 한편 덴마크는 최신 의료시설과 의약품, 의료진을 갖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파견한다. 1947년 8월에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 인도 역시 의료부대를 파견하여 야전병원을 운영하며 부상자를 치료한다. 이탈리아는 유엔 비회원국이지만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동두천시가 소요산 자락에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설립한 까닭이 궁금하다. 동두천은 언제부터 군사도시가 됐을까?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에 미군 제7사단이 동두천에 주둔하면서 군사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물론 군사도시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그늘도 엄연히 존재했다. 하지만 군대가 도시의 발전과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계단을 오르며 벽면을 채운 흑백사진을 살펴본다. 짐작하듯이 사진은 전시물 못지않게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실을 정직하게 알려준다. 노르웨이 의료진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첩은 전쟁의 참상과 생명의 소중함을 웅변해준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맺어진 휴전협정의 순간을 기록한 흑백사진은 오랫동안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포성이 멈춘 지 70년 만에 대한민국은 정치 민주화와 경제화를 동시에 이룩하는 기적을 이뤘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동두천은 수많은 생명을 구한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도시라는 사실이다. ‘한탄 이호왕 박사 기념관’은 또 하나의 역사이다. 의학과 미생물학을 전공한 이호왕 박사는 고려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동두천 송내동에 연구실을 두고 1976년 한국형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다. 동두천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이 박사는 WHO 유행성출혈열연구협력센터 소장과 한탄생명과학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수많은 생명을 살려낸다. 남북한 520만명이 희생될 만큼 한국전쟁은 비참했다. 특히 민간인의 사망은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달한다는 사실도 가슴 저리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러나 세계는 다시 양분되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남북의 대결 양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철없는 어른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일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남북 역시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휴전이 아니라 전쟁을 멈춘 상태 곧 정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분단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한 순간도 자유와 평화, 안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 가꾸고 지켜야할 자유와 평화의 동산 4층 기획전시실에 ‘제6회 아트플러스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 동두천지역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의 회화 작품에서 자유와 평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새롭게 단장한 휴게실에서 국군과 유엔군, 민간인들을 치료하던 야전병원이 있던 역사적 현장을 바라본다. 70년 전의 삭막한 풍경과 현재의 풍요로운 풍경을 대조해 보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당시 이름도 몰랐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인들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나라로 우뚝 섰다.   한편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은 경기소금강이라 불리는 소요산(587.5m) 자락에 있다. 고승 원효대사를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같은 명사들이 이 산자락을 자주 ‘소요’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답고 유서 깊은 소요산 기슭에 자유수호평화박물관과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4. 안산 ‘경기도미술관’

2023년 6월 현재, 경기도미술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미술관이 아닐까.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관장 안미희)에서 이건희컬렉션을 중심으로 한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 ‘사계’가 8일 개최됐다. 8월20일까지 이어지는 특별전 사계는 국민화가로 불리는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천경자를 비롯한 유명 작가 41명이 1927년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의 제작한 대표작 또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작품 90점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행복한 자리다. ■ 사계, 근현대 한국 미술의 뿌리와 줄기 사계는 경기도미술관이 개관한 이래 가장 큰 전시로 꼽히는 특별전이다. 사계는 지난 2021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가족이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여점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46점을 중심으로, 경기도미술관을 비롯해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가나아트센터 등 11곳의 소장품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전시의 제목을 비발디가 작곡한 사계에서 착안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통찰력 있는 묘사와 조화로운 구성으로 클래식 음악의 고전인 ‘사계’와 같이 참여 작가들은 한국 근현대미술에 수작을 남긴 분들입니다. 동시대 미술의 자양분이 된 이분들의 업적들을 이번 전시에서 다채로운 화음처럼 선보이고자 합니다.” 경기도미술관은 이처럼 대규모의 특별전을 열기에 최적화된 미술관이다. “4개의 전시공간은 순환 통로와 가변 벽을 둬 다양한 동선을 활용하는 전시를 구사할 수 있지요. 특히 8.5m 높이의 천창에는 개패의 조정이 가능한 천창 시스템을 둬 자연 빛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기도미술관은 자연과 호흡하고 대중과 소통하며 경기도민 모두에게 열린 문화 공간입니다. 이번 전시도 이런 미술관의 특성을 잘 살려 관람 동선을 구성했습니다.” 미술관 관계자의 조언대로 5개의 주제를 따라가며 각 개념의 구간마다 작가별, 시대별 차이를 비교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이 특별전을 가장 알차고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겠다. ‘새로운 계절’부터 ‘자연으로부터’까지는 동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여성 작가들을 집중 조명한 ‘또 하나의 계절’과 고향과 가족이 주된 소재인 ‘향수의 계절’은 오랫동안 발길을 잡아끄는 구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은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성찰하도록 이끌어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 새로운 계절, 자연으로부터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조선 화단은 서양의 기법을 체화해 동양의 기법 및 전통과 조화시키려는 모색이 이뤄진다. 1세대 서양화가인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인성의 ‘석고상이 있는 풍경’(1934)은 서양의 기법으로 조선적 색채와 주제를 탐구한 인상적인 작품이다. TV 화면에 비치는 부처를 바라보는 석불좌상을 등장시켜 깊은 사유로 이끄는 백남준의 ‘TV부처, 1974’(2002)는 새로운 계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물을 고전주의 화풍으로 표현한 도상봉,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술을 구현한 오지호의 ‘여수항 풍경’(1978), 산의 정기를 거친 터치로 그려낸 박고석의 ‘외설악’(1980), 역사적 고난에 대한 공감을 제주 풍광에 투영한 강요배의 ‘황파 1’(2002) 같은 작품들은 자연적 모티프를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 양상을 살필 수 있게 해 준다. ■ 또 하나의 계절과 향수의 계절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또 하나의 계절’로 구성해 남성 중심 화단에서 독립된 예술 세계를 이룩해 낸 소수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을 비롯해 국내 1세대 여성조각가 김정숙, 여성의 관점에서 조형성을 탐구하고 구현한 박래현과 천경자, 추상화가 방혜자의 작품들이다. 1928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은 시대의 우울을 담고 있는 듯 표정이 어둡다. 반면, 천경자의 ‘누가 울어2’(1989)에 등장하는 여성의 눈빛은 남성의 시선을 제압할 만큼 강렬하고 도전적이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수난의 시기에도 작가들은 예술혼을 불태웠다.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 주는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7)은 뜨거운 가족애를 화면에 가득 채운 이중섭의 ‘오줌싸개와 달과 개구리’(1950년대 전반)와 함께 관람객에게 빙긋 미소를 짓게 해 준다. 장욱진의 ‘까치’(1987)는 머잖아 반가운 소식이 들릴 것 같은 희망을 보여준다. 한국적 회화의 탐구 과정에서 민족의 혼에 다가선 박생광, 수행하듯 화면을 채운 김환기, 단순한 재현을 넘어 실존적 본질을 추구한 권진규의 작품들은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도대체 어디쯤에 있는 것인가? ■ 소통과 교육의 열린 마당 2006년에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다양한 전시와 활발한 교육 활동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하며 성장해 온 수도권의 대표 미술관이다. 경기도미술관은 그동안 무엇을 목표로 어떤 사업들을 벌여 왔을까? “경기도미술관은 경기도의 정치, 사회, 문화에서 출발해 주제를 심화하는 전시 기획인 ‘경기아트프로젝트’와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내용을 실험하고 글로벌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동시대미술의 현장’ 주제전이 핵심 사업입니다. 또한 ‘경기작가조명전’과 ‘청년작가전’ 등을 통해 경기도의 중견 작가를 지원하고 신진 작가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의 소장품을 다층적으로 담아내는 ‘상설교육전’은 소통과 교육의 장입니다.” “경기도 대표 공립미술관으로서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 문턱이 낮은 미술관을 표방하며 우수한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통해 도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역사적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쁩니다. 많이 찾아주셔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2019년 10월부터 경기도미술관을 책임지고 있는 안미희 관장의 말이다. 경기도미술관의 미션은 ‘도민과 함께하는 열린 미술문화기관’이며, ‘지역을 잇고, 함께 공유하는 모두의 미술관’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이 세운 목표는 기획의 새로운 도약, 혁신적 교육, 지역과의 협력, 미술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참여미술관의 실현이다. ■ 잘 지내나요?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터를 잡고 있다. 화랑저수지와 숲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며 멋진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맛도 일품이다. 최평곤 작가의 ‘가족’(2007)은 아이를 안고 좌우에 자녀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거룩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준다. 미술관의 외관을 화사하게 밝혀 주는 최정화 작가의 ‘꽃꽂이’(2008)는 거대한 꽃과 열매, 잎사귀들로 이뤄진 설치작품으로 가볍고도 딱딱한 재질의 플라스틱과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생명체의 형상을 대비적으로 어우러지게 한 작품이다. 이 밖에도 미술관 실내와 야외에는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으니 함께 감상하기 바란다. 현재 소장품전 ‘잘 지내요?’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모시는 글’에 경기도미술관의 설립 정신이 전달된다. “예술은 삶이 행복한 순간보다 우울하고 외로운 순간에 더 위로가 됩니다. 이번 전시 ‘잘 지내나요?’는 재난이 일상이 돼 버린 것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경기도미술관은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상처에 필요한 ‘위로’를 현대미술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경기도미술관은 이번 전시 ‘잘 지내나요?’가 관객들과 소통의 장을 넓히고, 예술이 동시대와 공감하고 관계 맺기 하는 ‘위로의 방식’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3. 오산 '유엔군초전기념관'

■ 카메라, 평화를 기록하다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에 위치한 ‘유엔군 초전기념관’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기념물과 마주하게 된다. 평화공원을 다 둘러보려면 지도를 참고해야 할 정도로 공간이 넓고 둘러봐야 할 기념물이 많다. 스미스 평화관과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 사이에 위치한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현재 ‘평화를 위한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기념관 외벽에 걸린 대형 포스터에 새겨진 글귀가 눈길을 끈다.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유엔군 초전기념관 개관 10주년/의미 있는 2023년, 국가보훈부 승격을 축하합니다. 대한민국 수많은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설립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전쟁을 충실히 기록하는 일. 포스터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가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의 상징 부조도 6·25전쟁 당시 두 명의 미군이 참호에 있는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특별전을 총괄 기획한 사무국장 고아라 학예연구사가 전시의 기획 의도를 들려준다. “이번 전시는 기록을 위한 시선과 그 시선으로 사용되는 도구 중의 하나인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글을 쓸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재능이 있다면 노래를 만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순간을 그대로 남기기에 제일 좋은 것은 사진입니다. 우리들도 일상에서 흔히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시된 카메라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인데, 과천에 소재한 한국카메라박물관에서 임차한 것이라고 한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흥미롭고 다양한 카메라에 담긴 사연도 풍성하다. “카메라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는 이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며, 어떤 것은 같거나 비슷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사실을 전달하고 역사를 남기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처음 소개하는 것이 ‘훔치기 위한 카메라’다.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기 위해 만든 카메라들은 모양부터 기상천외하다. 최초의 스파이 카메라는 신사의 조끼 속에 착용할 수 있는 둥글납작한 모양인데 셔터가 단추처럼 생겼다. 물론 숙녀의 핸드백 속에 장착한 카메라도 전시돼 있다. 반지나 회중시계에 숨겨진 카메라가 말해 주듯이 ‘훔치기 위한 카메라’는 상대의 눈을 속이는 것이 핵심이다. 포스터에 담배가 등장한 까닭도 밝혀진다. 담뱃갑이 카메라인 것이다. “담배 세 개비 중에서 가장 길게 나와 있는 것이 셔터입니다”. 그렇다면 ‘지키기 위한 카메라’는 어떨까? “‘KE-4(1) COMBAT 70MM’는 이름처럼 70㎜의 대형 전투 카메라인데, 포탄을 맞아도 몸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특수강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제작 연도가 1953년이니 6·25전쟁 때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 ‘항공기 기관총 타입 카메라 89’는 사격과 촬영이 동시에 이뤄지는 무시무시한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39년에 일본 코니카사가 제작한 것이다. “그렇지요. 스파이용이나 전쟁용 카메라를 가장 많이 제작한 나라가 전범국 독일과 일본입니다”. ■ 포화 속 뛰어든 종군기자들 “두 번째까지는 장비가 중심이지만 세 번째 섹션은 종군기자 네 분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종군기자는 런던타임스 소속으로 크림전쟁을 취재한 월리엄 하위드 러셀(1820~1907)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도한 그의 취재로 인해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이 군 간호사로 참전하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에요. 덕분에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에서 2%로 감소하는 기적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정말 놀랍죠”.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꼽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1913~1954)는 스페인 내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최전선에 섰던 기자다. 그는 종군기자의 자세를 이렇게 일갈한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고 미소 짓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뉴욕헤럴드트리뷴 소속의 마거릿 히긴스(1920~1966)는 6·25전쟁에 가장 먼저 도착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인데, 1950년 12월까지 6·25전쟁의 주요한 현장은 모두 그가 담은 것이지요. 이때의 활약으로 여성 종군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다. 왜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달려갔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위험한 곳이라도 당연히 가야 한다. 그것이 기자가 하는 일이다.” 그가 기자정신을 발휘한 덕분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참전한 지갑종(1927~2021)은 국방부 관계자의 요청으로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에 대해 기록하는 종군기자로 활동한다. 정전 후에도 기자로 활동하며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16개국을 순방보도하기도 했다. 스미스 부대원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1955년에 건립된 구 초전기념비 기단에 설치한 동판이 1963년에 사라졌다. 1977년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하와이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이 동판을 발견해 구입해 2014년 오산시에 기증한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6·25전쟁 당시 사진대 대장을 맡았던 임인식(1920~1998)은 총대신 카메라를 메고 참혹하고 처절했던 전쟁의 현장을 기록한다. 20세기의 역사적인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한 종군기자의 사연과 카메라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 죽미령 전투의 영웅을 기억하라 1950년 7월5일 오전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비를 맞으며 진지를 구축한다. 오전 7시, 수원 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를 확인하고, 8시16분에 드디어 유엔군과 북한군과의 첫 전투가 시작된다. 소련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과 6시간15분 동안 전투를 벌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30분 퇴각을 결정한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540명 중 18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데 북한군도 5천여명 중 15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다. 오산 죽미령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중요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 상설전시관은 영상과 전시물, 사진으로 재미있게 구성했다. 영상으로 ‘그들을 만나러 가다’를 시청하면 사진과 전시물을 통해 ‘6·25전쟁과 유엔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참전과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시 영상으로 ‘죽미령 전투’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 후, 지금의 우리’를 보여준다. 한국의 평화를 위해 싸운 ‘스미스 부대 540명 명판’이 새겨진 공간을 지나면 ‘스미스 부대원 기증유물’을 만나게 된다. 영상으로 읽는 ‘스미스 부대로부터 온 편지’와 ‘잊지 못할 그들에게’는 평화를 지킨 영웅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분단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전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평화를 위한 노력은 서둘러야 한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2. 성남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빌딩 숲에서 만난 어린이미술관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반갑다. ‘책’을 테마로 한 어린이미술관은 어떻게 꾸며졌을까? 성남시 판교에 소재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 MOKA(관장 노정민)는 2015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책을 주제로 그림책 관련 전시, 테마 교육, 열린서재 등을 통해 아이들에게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힘을 길러주는 특별한 미술관이다. 연면적 2천736㎡ 규모의 2개의 전시실과 3개의 교육실, 미디어룸, 아틀리에, MOKA 카페 등으로 구성됐다. 앉아서 쉬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징검다리 형식의 멋진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열린서재는 미술관의 자랑이다. 81가지의 키워드로 그림책을 분류한 열린서재 옆으로 늘어선 40여개의 거대한 기둥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통로를 걸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종이접기 형식의 교육실과 책꽂이 나무 아래 독서 공간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건축가 김찬중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개관 당시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인테리어 아키텍처 분야의 ‘뮤지엄 스페이스’ 본상을 수상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도록 설계한 열린 공간이 돋보인다. ■ 그림책에 담긴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보다 뛰어난 그림책 작가의 작업 과정을 관람객에게 입체적으로 온전히 보여 주는 것이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의 장기다.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그림책과 원화작품을 주제별로 분류해 보여줬고,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작가의 그림책을 소개했다. 그림책 속의 그림들이 온라인 플랫폼, 애니메이션, 현대미술 등 여러 방식으로 표현, 창작되고 있는 예술의 유형도 소개하고 미국의 대표 그림책의 70년 역사를 정리하고 칼데콧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을 탐구했다. 신진작가 육성을 위해 신진작가들의 다양한 작품과 작업과정을 소개하고,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 투표를 통해 2명의 작가를 선정해 작가의 작품에 독립 출판도 지원했다. ‘아티스트 인 북스’ 전시는 그림책을 통해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다시 만나보는 전시로,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재해석한 글과 그림, 그들의 일생과 작품세계 및 창작기법 등을 탐구한 것이다. 현재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대표 작가 ‘존 클라센 & 맥 바넷’전이 열리고 있다. 데뷔 초기부터 주목을 받아 칼데콧상,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보스턴글로브 혼북상을 수상한 두 작가의 첫 작품부터 발간 예정인 신작까지 살펴볼 수 있는 아이디어 스케치, 친필원고, 원화, 연계 프로젝트들이 최초로 선보인다.  전시실1에서는 존 클라센이 쓰고 그린 그림책의 작품과 맥 바넷이 글을 쓴 그림책의 작품이, 전시실2에서는 두 작가가 협업해 만든 그림책과 관련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이 드로잉, 글쓰기, 만들기, 연극놀이, 극장놀이를 통해 작가들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 역할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작가의 시선에서 글과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전시의 매력이다.  ‘키드 스파이’는 존 클라센의 모자 시리즈에 연결된 프로그램이다. 키드 스파이가 돼 단서를 찾고 미션을 풀어가는 놀이인데, 낮선 공간, 처음 보는 물건, 전시실 속 작품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감상하며 단서를 추리해 지령을 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모자를 보았어’는 친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경험하는 인성놀이 프로그램이다. 모자는 하나, 사람은 두 명, 게다가 머리에 맞지 않는 큰 모자, 아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취학 전의 어린이와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일 프로그램이다. 9월 초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 권의 그림책에 담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어린이 눈높이 프로그램 ‘창의력 쑥쑥’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이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프로그램 개발과 전파에 쏟는 수고와 정성은 각별하다.  “‘리틀 라이터스!(Little Writers!)’는 문학적 문해력을 다루는 미술관 시그니처 교육입니다. 다양한 이야기의 발상 과정을 경험하고 문학적 요소를 이해해 ‘나의 생각이 담긴 그림책’을 창작하는 문학 탐구 프로그램이지요. 현직 글 작가와 만나 작업 환경에 대해 들어보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그림책을 완성하며, 그림책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를 파악합니다. 어린이들이 작가와 함께 읽고-쓰고-표현하고-비평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그림책이 100권이 넘어요.”  미술관 관계자의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교육 현장에 참석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참여자들의 반응이 좋아 올해는 중고등학생 대상의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논픽션-‘역사’는 2019년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인 ‘에베레스트’의 작가 안젤라 상마 프랜시스와 함께하지요. 논픽션 그림책에 대해 탐구하고 자료를 편집,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그림책 제작 과정의 전반을 경험하며 나만의 책을 입힌 논픽션그림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리틀 아티스트!(Little Aritist!)’는 예술적 요소(시각적 문해력)를 다루는 교육입니다. 현직 예술가와 함께 소통하며 다채로운 실험과 탐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하지요.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거치는 사고의 과정을 경험하는 예술창작 프로그램인데, 지금까지 회화, 디자인, 건축 등 8명의 작가와 함께한 어린이가 2천700명이나 됩니다. 2016년부터 19년까지 4년에 걸쳐 ‘리틀 아티스트’ 교육에 참여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교육의 효과를 연구한 결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이해와 창의, 태도에서 역량이 증진됐음이 확인됐어요. 예술을 통한 교육으로 자기이해, 자기표현, 건강한 자아성장을 이루는 선순환적 구조를 갖추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는 꿈의 사다리 ‘그림책과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각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문화 탐구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18개 나라의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는데 태국, 인도, 폴란드, 헝가리, 파푸아뉴기니, 멕시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보츠와나, 뉴질랜드, 체코 등 6개 대륙을 모두 잇는 것입니다. 유네스코 공식 프로젝트 ‘MOKA 세계시민교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운영하고 있는 ‘MOKA와의 세계여행 Little Aritist!’은 어린이들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미래세대의 주인으로서 책임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교육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예술을 만나며 지속가능 발전목표와 환경을 주제로 한 다양한 교육이 운영되고 있답니다.”  버스에 MOKA ‘움직이는 미술관’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화예술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시골의 학교를 찾아가 어린이들에게 미술관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현대백화점 사회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행됐어요. 움직이는 미술관은 유네스코의 대표적인 교육의제인 ‘세계시민교육’을 어린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어요. 2019년의 경우, 여러 부족이 어우러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 인도를 주제로 선정해, 문화다양성과 세계문제를 탐구할 수 있는 3가지 전시 교육 콘텐츠를 선보였지요.”  미술관에서 개발한 그림책과 활동지 키트를 문화적으로 소외된 전국 곳곳에 전달해 수업을 비롯한 학교의 다양한 활동에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미술관을 나서며 미술관을 기획할 때부터 참여했다는 최원옥 책임학예사의 바람을 들어본다.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태어나 가장 처음 접하는 ‘예술’이자, 풍요로운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며, 다양한 세상과 만나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 속에서 읽고, 쓰고, 표현하며 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고,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바랍니다.” 교육 등록은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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