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성원의 대중가요 NOW!> (22) 김민기 1집 음반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의 숨은 사연

지난 9일 1970년대 대표적인 저항가수이자 작곡가인 김민기가 “자신의 1집 음반을 음반저작권법 상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은 K씨 등 3명이 승낙도 없이 음반을 재발매하려 하고 있다”며 재발매하지 못하도록 서울중앙지법에 가처분신청을 냈다. 문제의 발단은 1971년 발매된 김민기 1집 음반기획에 참여한 K씨가 임의로 재발매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이 음반에 수록된 10곡 중 8곡이 김민기가 작곡·작사했고 나머지 2곡이 다른 사람 작품으로 K씨는 이들 2명한테 계약을 맺어 권리를 양도받아 다시 P음악출판사에 음반제작 권리를 양도하고 이것을 CD로 재발매하겠다는 내용의 e-메일을 음악출판사로 받았다. 필자는 당시 기자로 활동하면서 김민기 1집이 발매된 과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 그즈음 대한민국은 통기타 음악(포크음악) 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절로 명동 YWCA회관 청개구리홀에서 매주 ‘청개구리 모임’이 열려 서유석, 한대수, 양병집, 쉐그린, 투코리안스, 박인희, 양희은 등 1세대 포크가수들이 여기서 배출됐고 김민기도 도비두란 듀엣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방송이 ‘영840’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최경식 PD(가수 최양숙의 오빠)는 김진성 AD에게 김민기 이야기를 듣고 구경을 갔다 김민기에 반해 음반을 내주기로 작정하고 소개해준 음반사가 은하수레코드였다. 그러나 은하수레코드는 일명 ‘해적판’만 전문으로 만드는 불법 음반사였다.(‘해적판’이란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온 LP를 불법 복제해 제작한 제품). 아무튼 은하수레코드로서는 김민기 음반으로 크게 재미를 보는가 했더니 김민기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압수수색을 당해 마스터링 테입(레코드 제작에서 푸레스 작업을 하기 위한 최종 단계 테입)을 빼앗겨 소각됐고 음반사 허가는 취소당했다. 김민기 1집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아침이슬’을 비롯, ‘꽃피우는 아이’, ‘작은 연못’, ‘해방가’, ‘친구’, ‘내나라 내겨레’ 등 김민기 자작곡과 번안곡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 등이 수록됐다 그런데 이 음반이 문제가 된 건 처음에는 ‘아침이슬’이 아니라 ‘꽃피우는 아이’로 1972년 김민기가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받아 ‘꽃피우는 아이’를 부른 게 화근이 됐다. 겨레의 꽃 무궁화를 꺾는다는 내용이 발단이 되는 바람에 김민기는 이 일로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받았고 그는 이때부터 피신을 다녀야만 했다. 이어 ‘작은 연못’에서 노랫말 가운데 연못 속 금붕어 두마리가 싸워 한마리가 먼저 죽고 썩은 물로 나머지 금붕어도 죽어간다는 내용이 남북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불온한 가사라는 게 이유였고 뒤이어 ‘아침이슬’도 문제가 됐다. 반면 ‘친구’나 ‘내나라 내겨레’ 등은 군사정권에 의해 건전가요로 뽑히기도 했다. 이같은 사유로 이 음반은 판매금지가 되자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 은밀히 거래가 이뤄져 당시 음반 1장당 2천원인데 반해 김민기 음반은 암거래 시장에서 100만원에도 없어 팔지 못할 정도로 희귀 앨범이 됐다. 1987년 해금된 후 S레코드사가 한정판으로 단 한차례 재발매했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작자가 김민기의 허락을 얻지 않고 만든 불법 음반이었다. 통상적으로 음반의 소유권은 제작자가 갖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지만 제작자가 음반제작과정에서 스튜디오 사용료나 세션맨 연주비 등을 지불하지 않아 음반사에 채무관계가 있으면 소유권이 음반사로 넘어가고 때로는 제작자가 판권을 다른 음반사에 팔기도 한다. 그런데 김민기 앨범의 오리지널 음원(마스터링 테입)이 소각된 마당에 원 제작자가 음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고 오리지널 음원 없이 복각 음원으로 마스터링했다면 절도죄에 해당되며 여기서 당시 기획에 참여했던 K씨가 어떤 이유로 소유권을 얻게 됐는지가 애매하다. 김민기측은 1971년 음반 발매 당시 저작권법은 1957년에 만든 법에 적용받아 진행과 섭외만 담당한 K씨가 어떤 권리도 갖고있지 않다고 항변한다.참고로 1987년 제정된 현행 저작인접권은 과거 작곡·작사·편곡자들의 권리는 물론 가수·연주자 등을 포함한 모든 실연자들에게까지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아무튼 과거 음반제작자들은 가수·작곡·작사가들에게 소주 몇잔 사주고 권리를 독점해온 게 사실이다. 이번 김민기 1집 음반도 이런 전근대적인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제의 1차적 책임은 임의로 판권을 행사한 K씨에게 있고 P출판사도 K씨한테 김민기로부터 동의서 등 확인절차를 무시하고 섣불리 양도를 받은 잘못이 있다고 간주된다./대중음악 평론가

조용필 "난 선생님 아닌 영원한 오빠~"

(서울=연합뉴스) "난 선생님이 아니라 영원한 오빠지~." '오빠부대'의 원조 가수인 조용필(57)은 요즘 '선생님' '조 대표'로 불린다. 16일 저녁 서울 방배동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조용필은 자신의 호칭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부턴가 방송사 PD들이 저를 '선생님'이라고 하더군요. 또 가끔 골프장에 가면 조 대표로 불립니다. 듣기 싫은 건 아니지요. 순리대로 이런 호칭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래도 얼마 전 70~80대 분들이 '오빠'라고 불러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닉네임이 오빠 아닌가요?" 환갑을 바라보는 그가 음악인으로서 행하는 자기 관리는 철저하다 못해 존경스럽다. 가수는 공연 무대를 통해 자신을 노출하고 신비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략 15년 전부터 TV 출연도 안 한다. "88년까지 CF를 했어요. 제가 절 키운다고 생각하면 CF는 하면 안돼요. (가수는) 무대에서만 볼 수 있어야 해요. 궁금증이 생겨야 하죠. 아내와 결혼할 때 침대회사에서 왜 그렇게 CF를 하자며 전화가 오는지…. 허허. CF는 방송인이 하고 저는 무대에 서는 무대인으로 남아야 하니까…." "TV에 출연을 안 하니 TV를 안 보게 된다"는 그가 즐겨 보는 방송은 뉴스와 디스커버리 채널, 골프채널 정도다. 이제 막 데뷔한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그에겐 생소하다. '책을 내보자' '강의를 해달라'는 권유도 수 차례 받았지만 거절했다. "저는 음악인일 뿐이에요. 제 사사로운 걸 알릴 필요가 없죠." 이런 이유다. 조용필 재단을 만드는 것에도 "아직 만들진 않았지만 활동은 꾸준히 하고 있다"면서도 "언론에 알리는 게 싫다. 만들어도 조용히 하겠다"고 강조한다. 또 '화성시 조용필 생가 복원, 관광자원화 사업 추진'과 관련해 운을 떼자 "내가 3년 있으면 환갑인데 그때가 되면 나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화성시에도 '서둘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내년이면 데뷔 40주년이 되는 그는 강산이 네 번 변하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음악계의 큰 존재다. "이제 젊은 친구들이 날 알까"라며 묻기도 한다. 수많은 레퍼토리 중 아끼는 곡을 묻자 어려운 질문이라며 운을 뗀다. "모든 노래가 소중하지만 '꿈'과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남자들의 노래여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특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란 가사가 있죠. 제가 이 시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어서 좋아요." 후배들의 리메이크에 대해서도 너그러움을 표시한다. 젊은 가수들이 '광화문연가'를 이수영 곡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한껏 웃음도 짓는다. "어떤 후배 가수가 리메이크하겠다고 연락 오면 대충 '어떤 스타일로 하겠구나' 딱 알아요. 젊은 친구들이 감각을 갖고 재편곡하는 데 찬성입니다. '창밖의 여자'에 악기 소스를 바꾸고 클래식, 소프트 록으로 편곡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이 노래를 지금 들으면 싫어서 소름끼치죠(웃음). 옛날엔 그 시대가 '한의 시대'였으니…." 또 그는 "예전엔 '단발머리'에서 '뿅뿅뿅'하는 음향 대목이 신기했지만 지금은 유치한 것처럼"이라고 부연 설명도 곁들인다. 노래방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스스럼 없이 부르는 그는 '영원한 오빠'다.

<울산-日구마모토 400년만의 화해 악수>

(도쿄=연합뉴스) "400년 전의 적이 이제는 미래를 함께 하는 동지로!" 일본 남서부 규슈(九州) 지역의 구마모토(熊本)현 구마모토시와 울산광역시가 오는 24일 구마모토성(城)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열고 우정과 협력을 다짐한다. 구마모토와 울산광역시가 6개월여간의 준비를 거쳐 갖게 되는 이번 '한일 우정의 콘서트'는 두 지역이 역사적으로 고통스런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열렸던 다른 한류 행사들과는 차별화되는 의미가 있다. 400여년전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던 정유재란 당시 일본측의 선봉장이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 지방을 공략했던 것은 물론 퇴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마모토로 끌고 가는 바람에 울산 지역 사람들에겐 구마모토가 '원수'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구마모토성 바로 아래에는 울산마치(蔚山町)이란 마을이 아직도 존재한다. 당시 포로로 끌려간 울산 사람들이 많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의 특정지역 이름을 마을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또 일본의 3대성에 속하는 구마모토성의 축조 방법도 인근 오사카성(大阪城)과 달리 오히려 울산의 서생포 왜성과 거의 흡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사카성 등 당시 당시 일본에서 주로 사용한 축성 방법은 거대한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돌을 쌓은 때 돌 틈에 흙을 메워 넣고 성벽도 수직이 아니라 반달 모양과 흡사하게 곡선형으로 만들어 침입자들이 성벽을 기어 오르기 힘들게 만든 구마모토성의 축성법은 오사카성과는 다른 방식이란 것이다. 김재철(金在哲) 울산MBC 사장은 최근 행사 준비를 위해 도쿄를 방문한 자리에서 "당시 구마모토로 끌려간 제지(製紙) 기술자나 기와, 도자기 분야의 장인들, 또 축성(築城) 기술자들 대부분이 울산 출신이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구마모토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현지 역사가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유적은 울산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아픔의 역사인 셈이다. 그러나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를 뛰어 넘을 때 양측 모두에게 더 큰 발전과 도약의 계기가 된다는 생각에 울산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난 4월에는 울산광역시 대표단이 구마모토를 찾았고 이달 초에는 고야마 세이시(幸山政史) 시장 등 구마모토시 관계자들이 울산을 답방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도 무르익게 됐다. 양측은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400여년전 아픔의 역사를 뛰어 넘어 이제 화해와 친선의 도시로 새로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며 "오히려 서로의 아픔 흔적을 보듬음으로써 지리적 연관성이 뛰어난 두 도시가 협력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구마모토시측은 "가해자인 우리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하는데도 역사적으로 피해자 입장인 울산시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모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첫 문화교류사업으로 '한일 우정의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24일 구마모토성에서 열리는 콘서트에는 울산시립무용단의 공연과 타악기 공연, 재일 무용가 정명자씨의 장구춤과 살풀이춤 등 한국 전통문화를 선보이게 된다. 또 한류열풍으로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SG 워너비, 씨야 등도 인기몰이에 나선다. 특히 이번 콘서트는 '구마모토 축성 400주년 기념' 가을 행사의 메인 이벤트로 잡혀 있어 한국문화 홍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김재철 울산MBC 사장은 "그동안 한류를 내걸고 진행한 행사들은 대부분 기획사에서 주관했다"며 "방송사가 직접 나서서 행사 기획을 하며 공연 능력을 검증받게 된 점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지프 한 "DMZ에서 휴전선 넘어보고 싶다"

내한공연 앞둔 린킨 파크의 한국계 멤버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DMZ에 가서 휴전선을 넘어보고 싶다." 세계적인 록밴드 린킨 파크(Linkin Park)가 11월30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4년 만에 내한공연을 펼친다. 이 밴드에 소속된 한국계 멤버 조지프 한(Joseph Hahnㆍ30)은 내한공연을 앞두고 마련된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DMZ에 가서 휴전선을 한번 넘어보고 싶었다"며 "2003년 내한 당시 한국 팬들이 대단히 따뜻하게 환영해 줘서 그때부터 다시 (한국에) 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 밴드에서 샘플링과 DJ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밴드는 브래드 델슨(기타), 체스터 베닝턴(보컬), 마이크 시노다(보컬ㆍ키보드), 롭 버든(드럼), 피닉스 패럴(베이스) 등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2000년 1집을 발매한 후 '인 디 엔드(In The End)' '페인트(Faint)' '넘(Numb)' 등의 히트곡을 내며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2천만 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2003년 첫 내한공연 때는 20t이 넘는 무대 장비를 들여와 뛰어난 공연을 펼쳐 화제가 됐다.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그동안 작업한 새로운 음악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이번에도 많은 장비를 갖고 갈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라이브 공연의 매력에 대해 "라이브 무대는 관객과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며 "미숙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관객이 전하는 넘치는 에너지와 힘으로 연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음악 외의 다양한 예술 장르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단편영화 '더 씨드(The Seed)'의 감독 자격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곧 영화 제작도 할 계획입니다. 이와 관련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있는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요. SURU라는 의류 브랜드와 상점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패션과 미술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를 통해 욕구를 충족하죠. 음악의 경우 요즘은 스타일스 오브 비욘드(Styles Of Beyond) 등을 듣고 있습니다. CD 등 음악에 관련된 책도 많이 읽고 있어요." 한국 가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드렁큰 타이거와 다이나믹 듀오를 만난 적이 있다"면서 "매우 좋은 사람들이고 실력도 뛰어난 아티스트"라고 평했다. 린킨 파크는 올해 영화 '트랜스포머'에 삽입된 '왓 아이브 돈(What I've Done)'과 3집 '미니츠 투 미드나이트(Minutes To Midnight)'를 발표해 꾸준한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공격적인 록음악에 힙합 스타일의 보컬과 감성적인 멜로디를 더해 독특한 음악을 펼치고 있다. "우리 음악에는 메시지가 없어요. 우리의 솔직한 느낌과 감정이 담겨 있고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고 있습니다. '미니츠 투 미드나이트'에도 콘셉트는 없죠. 다만 어두울 수도 있는 세상에도 희망이 있다는 점 등을 전했습니다. 사실 준비과정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알지 못해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나온 150여 곡 중 가장 좋은 곡을 선택했죠." 그는 미국 사회에서 한국계로 성장해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면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늘 잃지 않았다. 인터뷰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 세상에 기여한 것들도 자랑스러워요. 그 한 부분에 내가 있다는 것이 또 자랑스럽죠. 예술 분야에서는 어떤 신분이든 성공하기 힘들어요. 사람들은 영감에 반응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충분한 영감을 줄 수 있다면 (피부색을 떠나) 관객을 확보할 수 있죠." 이어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아직 젊고 앞으로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