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화 배급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시네마 서비스가 올해 첫 프로젝트로 제작한 ‘불후의 명작’은 지극히 옛 정서에 기대어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초인’이 등장하거나 아니면 인간은 온데간데 없고 넘쳐나는 특수효과와 물량공세로만 무장한 요즘 주류 영화들에 아예 작정하고 반기를 든 셈. 외딴 산골로 놀러갔다가 차가 고장나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야 하는 연인들의 낯익은 에피소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신파조 삼각관계도 그래서 빠뜨리지 않았다. 인기(박중훈 분)는 유학파지만 생활고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로 비디오를 찍는 순박한 마음을 지닌 감독. 지금은 ‘마님 사정 볼 것 없다’ ‘박아사탕’같은 ‘벗기는’ 영화들을 찍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여경(송윤아)은 유명인사들의 자서전을 써 주는 대필작가. 자신의 처지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한번도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조만간 자신의 이름이 찍힌 소설집을 내겠다는 야망이 있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시키면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지만 뒤늦게 인기는 여경이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각박한 영화계 현실때문에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직접 영화로 만들지 못하고 선배에게 물려주게 되자 인기는 울부짖는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아픔을 간직한 사람만이 사실은 인생에서 불후의 명작을 만들 수 있다” 심광진 감독의 말이다. 냇가에 앉아 있는 두 남녀 사이로 반딧불이 반짝이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에 맞춰 춤을 추는가 하면, ‘사랑했지만 바라만 봐야 했던 당신’으로 시작하는 편지가 흐른다. 감독은 조금 ‘못난’두 남녀를 내세워 옛 정서를 공략하는 ‘촌스러운’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이 훈훈해지는 인간미보다 진부함과 지루함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특히 감독의 희망에 관한 집중적인 메시지는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느껴질 정도로 직접적이다. 23일 개봉.
일상의 작은 우연들을 하나하나 꿰맞추면 어떻게될까.정사의 이재용 감독의 신작 순애보는 도시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과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느끼게 되는 우연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우연이 인연으로 그리고 다시 운명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사실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감독은 데뷔작 정사에서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영상과 세밀한 연출력을 또다시 십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굳힌 것처럼 보인다.알려진 대로 본격적인 한일합작영화다. 한국의 쿠앤필름과 일본의 쇼치쿠영화사가 제작비를 반반씩 댔고, 촬영도 일본과 한국에서 각국의 스태프들에 의해 반반씩 진행됐다. 주연배우도 한국의 이정재(27)와 일본 여배우 다치바나 미사토(19)다.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잘 나뉘어진 이 영화는 한편의 잘 짜여진 그림 조각 퍼즐을 떠올리게 한다.동사무소 직원인 우인(이정재)의 삶은 문틈에 끼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통증조차 느낄 수 없는 그의 새끼손가락 마냥 무기력하기만 하다.밤마다 인터넷 음란사이트를 뒤적거리거나 화장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 사진 속의 알래스카 설원 풍경을 보며 공상에 잠기는 게 그의 유일한 낙. 집도 있는데다 생활도 넉넉한 그에게 동사무소 일은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비쳐지는 게 동료들의 시선이다. 어느 날 그는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팽개친 듯한 반항적 외모의 빨간 머리 소녀 미야(김민희)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는 코방귀조차 뀌지 않는다.비슷한 시간의 일본. 도쿄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아야(다치바나 미사토)는 입시학원에 다니는 재수생. 삶에 별 미련이 없는 그녀는 사람들이 어제 죽었는지 오늘 죽었는지 헷갈려 할 날짜변경선에서 숨을 참고 자살해야겠다는 황당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알래스카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 음란사이트에서 구두 신은 아사꼬라는 이름으로 모델 일을 시작한다.같은 비행기를 탄 두 남녀가 그 사실을 모른 채 앉아있는 마지막 장면은 정사의 그것과 겹쳐진다. 불륜을 넘어 본능을 찾아 떠난 정사의 주인공들의 목적지가 브라질이었다면, 무기력한 일상으로 부터 탈출을 꿈꾸는 순애보의 두 남녀의 비행기행은 알래스카인 셈.보는 이도 힘이 쭉쭉 빠질 정도로 리얼리티를 살려낸 일상 속에 가끔씩 튀어나오는 유머스런 장면이 극의 긴장 수위를 조절해 준다. 9일 개봉.
달라이라마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국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쿤둔’은 다섯살 나이에 ‘쿤둔’의 자리에 올라 신앙을 완성해가는 모습, 그리고 중국의 암살 위협을 피해 기나긴 망명길을 떠나야 했던 어린 소년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비열한 거리’, ‘분노의 주먹’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달라이라마 전기를 그린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을 때 모두 의아해 했다고 한다.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라고 평가받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게 티베트와 달라이라마는 어쩌면 너무나 생소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티베트로 눈을 돌려 생소한 그곳의 문화와 달라이라마의 성장 과정을 담아낸 ‘쿤둔’은 사실 그의 오랜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그것도 어린 소년이 비폭력과 평화주의적 방법으로 어른도 감내하기 힘든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가는 모습은 감독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영화에는 극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갈등이나 대립은 찾아 볼 수 없다. 심지어 티베트 침략을 주도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조차 깍듯한 예의를 갖췄던 신사적인 인물로 그려져있다.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 감독은 때와 장소를 뒤섞는 파격적인 편집을 시도했다. 또 티베트의 앞날을 상징하듯 토막난 시체를 독수리들이 뜯어먹는 모습이나 승려들이 집단 살해돼 누워있는 모습 등 평화로움과 대비되는 충격적인 영상을 간간이 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제 달라이라마의 조카가 달라이라마 ‘생모’역을 맡는 등 달라이라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주변 인물로 캐스팅됐다. 또 성인 달라이라마를 연기했던 텐진 듀톱차롱을 비롯해 단 한 명의 전문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형복기자 mercury@kgib.co.kr
물고기밖에 모르던 한 수족관 청소부가 우연한 기회에 ‘지골로’(남창)로 전업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과 사랑을 그린 코믹 영화다. 고수머리와 빈약한 몸매, 어리숙함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남창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주인공 듀스 비갈로(롭 슈나이더)는 여성 고객들을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대신 솔직한 인간미로 다가가 그들로부터 호감을 산다. 황당한 소재만큼 등장하는 캐릭터 역시 다양하다. 화면에 한 번도 전신이 등장하지 않는 2미터를 훨씬 넘는 키에 거대한 발을 지닌 장신의 여자.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육중한 몸매의 여자. 수시로 욕설을 내뱉는 ‘트랫 증후군’에 걸린 여자. 깜빡 깜빡 잠에 빠져드는 여자. 이들이 바로 듀스 비갈로의 주고객이다. 여기에 신체적 약점 때문에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파울러 형사(윌리엄 포사이스)가 시종일관 비갈로를 따라 다니며 괴롭힌다. 몸으로 웃기는 좌충우돌식 코미디와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가 수시로 등장해 배꼽을 쥐게 하지만, 마이크 미첼 감독은 웃고 끝나는 비슷한 류의 코미디 영화와 차별화를 시도한 듯 영화는 휴머니즘으로 가득차 있다. 여자들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사랑으로 포용한 비갈로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비록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순수한 마음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인 케이트(아리자 바레이키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28일 개봉.
슬프지만 배꼽을 쥐게하는 블랙코미디 ‘하면 된다’는 웃음뒤에 남는 여운이 꽤나 진하다. 삶의 부조리를 표현한 ‘조용한 가족’과 궤를 같이하는 박대영 감독의 두번째 연출작으로 기발한 상상력이 관객을 웃지 않고는 못배길 웃음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업실패로 차압딱지 붙은 집을 뒤로 하고 달동네 단칸방으로 내몰린 딱한 처지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엽기적인 자극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한바탕 소동뒤에 밀려오는 페이소스를 적절히 안배하고 있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가장 병환(안석환)이 길가에 주차돼 있는 트럭뒤에서 볼일을 보다 후진하는 트럭에 치여 뜻밖의 뭉칫돈을 움켜쥔 것이 계기가 돼 아내 정림(송옥숙), 딸 장미(박진희), 아들 대철(정준)이 모두 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불리기에 혈안이 된다. 그런 시도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자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된 병환네 가족은 내친 김에 뭔가 낌새를 채고 접근해온 남자 충언(박상면)과 먼 친척 광태(이범수)까지 ‘영입’하는 과감성을 마다하지 않는다. 점차 돈이 주는 안락함에 길들여진 이 가족은 반인륜, 반윤리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거를 내세우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잔혹함이 이성적인 판단의 한계를 넘고 있음에도 비명을 지르게 하거나 잔인해 보이기 보다는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처럼 보인다. 웃음 뒤에 씁쓰레한 느낌을 남기는 것은 돈에 혈안이 돼 있는 현대인들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지난해 내놓은 데뷔작 ‘연풍연가’에 이은 박대영감독의 두번째 작품인데 박 감독은 “욕심에 욕심을 더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돈이 갖는 속성”이라며 “돈과 가족에 대한 사회적 아이러니를 웃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8일 개봉. /이형복기자 mercury@kgib.co.kr
국내 영화계에서 지금까지 도외시돼온 ‘불’이란소재를 스크린에 담은 액션영화다. 그래서 ‘파이어 액션 블록버스터’란 이색적인 장르로 불리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터 스크린을 넘나드는 화마(火魔)의 위세가 시선을 끄는데서도 그런 장르의 새로움을 엿볼 수 있다. 할리우드의 기술력이 동원된 특수효과에 기대 적잖은 불거리를 제공해 준다. 실제 특수효과 부문에서 이름있는 ‘할리우드 스페셜 이펙트’社의 기술력이 동원됐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준우(신현준)와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행동을 중시하는 현(정준호), 이들 두 소방구조대원의 갈등과 화해, 애증관계가 영화의 축이다. 여기에 화재현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구해준 준우를 일편단심 사랑하는 예린(장진영)이 등장해 멜로 색채를 가미한다. 화재로 아내와 딸을 잃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형석(선우재덕)도 영화의 흐름을 좌우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실사와 미니어처의 합성으로 파이어 액션이란 새로운 시도에 걸맞은 영상을 스크린에 담아내는데는 성공했으나 준우의 극단적인 행동의 계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구성에 허술한 점이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일부 연기자들의 다소 경직돼 보이는 연기도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28일 개봉.
‘풍운’의 유위강 감독이 무술감독의 대명사 정소동, 배우 유덕화와 호흡을 맞춰 ‘홍콩 무협영화의 부활’을 꿈꾸며 내놓은 야심작. 음모와 배신, 사랑 그리고 무림 최고의 두 고수가 운명적인 대결을 벌인다는 무협영화의 낯익은 틀을 그대로 따랐다. 홍콩 영화계에 ‘SF 무협액션’ 바람을 일으킨 감독의 작품답게 손과 발을 쓰는 무술 대신 화려한 특수효과에 많이 기댄 작품. 유덕화, 정이건 두 주인공의 눈에 힘만 들어가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고, 건물이 폭삭 내려앉을 정도다. 1초에 100개의 방향에서 공격하는 무림 최고의 검술인 ‘천외비선’을 연출한 것이나 두 사람이 칼을 맞댈 때 뿜어 나오는 기(氣)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것등 볼거리는 화려하지만 정작 배우들의 실제 무술 연기는 별로 없다. 때는 명조, 황족의 혈통을 가졌지만 서자 출신이라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엽고성(유덕화)이 왕위를 노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 재야의 무림고수인 서문취설(정이건)은 백운성의 성주 엽고성으로부터 자금성에서 ‘결전’을 벌일 것을 제안받는다. 그러나 엽고성은 결전 당일에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내보내고 사람들의 관심이 이 싸움에 쏠린 틈을 타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다. 유덕화가 매번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며 환상적으로 등장하는 최고의 검객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과대 포장된 캐릭터 탓에 오히려 희화된 듯한 느낌. 정이건은 여전히 별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승부한다. 14일 개봉. /연합
올 베니스 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클린트이스트우드의 노련한 말년연기와 연출력이 돋보이는 SF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14일 개봉된다. 서부개척시대의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세기가 바뀌자 돌연 우주선에 몸을 싣고 우주의 카우보이로 분했다. 여기에 연출과 제작까지 맡았다. 그는 이 영화를 포함해 지금까지 22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15편의 영화를 제작한 경력이 있다. 1958년 미공군 정예조종사팀인 ‘데덜라스’ 멤버인 프랭크 코빈(클린트 이스트우드), 호크 호킨스(토미 리 존스), 제리 오닐(도널드 서덜랜드), 탱크 설리번(제임스가너)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돼 있다. 42년전 우주를 최초로 비행할 꿈에 부풀어 훈련에 몰두하던 동료들이다. 비록 새로 발족된 NASA(미항공우주국)로 우주탐험 프로젝트가 넘어가는 바람에 무산되긴 했지만. 이들에게 젊은 날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극적으로 찾아온다. 지구궤도를 돌고 있던 구소련의 통신위성이 아이콘의 유도체 시스템 고장으로 지구로 근접해 오고 있었던 것. 다급해진 NASA는 이 아이콘의 유도체를 설계한 프랭크를 찾게 되고, 프랭크는 과거 ‘데덜라스’동료들과 함께 가는 조건을 제시한다. 그렇게 다시 한자리에 모인 노년의 ‘데덜라스’멤버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비행훈련을 견뎌내고 우주비행에 나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직면한다. 일흔을 넘긴 노인들이 평생 가슴에 묻어둔 꿈을 실현시켜가는 과정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노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런 ‘황혼의 영웅’을 앞으로도 계속 그려가고 싶은 것 같다. 패기에 찬 젊은이들과 경험많고 노련한 노인들의 행동과 상황대처 능력을 대비시켜 애송이들과 그들의 지식의 한계를 조롱하는 대목을 영화 곳곳에 배치해 둔데서도 그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노년의 식을줄 모르는 열정, 푸근하고 넉넉한 위트와 여유가 영화에 넘쳐 나는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우주공간의 스펙터클은 또다른 볼거리. NASA의 존슨 우주센터와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촬영이 주로 이뤄졌다. 컴퓨터 그래픽도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이형복기자 mercury kgib.co.kr
‘육체와 마음중 어떤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순결한 것인가?’ 인간의 욕망에 관한 솔직한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이 ‘(부부간의) 정절’이란 의미의 영화 ‘피델리티’(Fidelity)에서 던진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답하려는 듯 꽤나 많은 인물군이 등장해 인간내면에 감춰진 선악과 질투, 독점, 욕망 등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을 내세운 가운데 줄랍스키 감독은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은밀히 감춰두고 있는 게 무엇이냐’며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폐부를 찔러댄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한때 그와 결혼해 5살된 아이까지 둔 소피 마르소가 주연을 맡아 진정한 순결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젊고 아름답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진작가 클레리아(소피 마르소)가 길모퉁이 꽃집에서 사진을 찍다 우연히 만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출판사 사장 클레베(파스칼 그레고리)를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큰 잡지사 회장의 여동생과의 정략결혼 약속을 깨고 클레베는 클레리아의 매력에 흠뻑 젖어 그녀와 결혼을 하고, 클레리아도 그의 순수함과 자상함에 반해 안정적인 결혼생활에 빠져든다. 그러나 클레리아는 남편과는 달리 거칠기 짝이 없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피사체의 대상으로 삼아온 연하의 사진작가 ‘네모’(기욤 카네) 를 알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흔들린다. 클레리아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네모’와의 관계를 끝까지 거부하지만, 클레리아의 사랑을 잃어버린 클레베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방황하다 불륜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녀에게 파파로치까지 붙이게 된다. 남녀의 사랑과 방황이란 소재로 ‘성적 순결’의 의미를 집요하게 짚어가는 줄랍스키 감독은 현대사회의 심장부를 파헤쳐 보이는 것도 역시 잊지 않는다. 실력있는 사진작가인 클레리아가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옐로 잡지인 ‘맥로이’와 타협하는 것에서부터 이윤획득을 위해 마구잡이로 사업을 확장하는 맥로이사, 돈벌이가 되지 않는 동화책 출판을 포기하고 맥로이에 합병되는 클레베의 출판사 등에 이르기까지 자본이 좌우하는 사회질서가 스크린을 들락거린다. 복잡하게 얽힌 등장인물간의 관계와 수시로 등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등이 겹쳐 있어, 예술성을 제대로 펼쳐 보이기 위해 프랑스로 망명한 폴란드 출신 줄랍스키감독 특유의 작품세계를 단박에 이해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30일 개봉. /연합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돼 한밤중에 택시를 몰며 도로를 질주하고 다닌다는 독특한 소재를 택한 ‘공포택시’는 재미있을 뻔한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관객들로부터 한번의 웃음도, 한번의 비명도 끌어내지 못한 채 긴 침묵 속에 막을 내린다.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의 연출부와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조감독을 거친 허승준 감독의 데뷔작. 택시기사 ‘길남(이서진 분)’은 백 한 송이의 장미와 반지를 싣고 여자 친구 ‘유정(최유정)’에게 청혼을 하러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숨진다. 죽어서까지 유정을 잊지못한 길남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병수(임호)’가 귀신들 사이에서도 무서운 존재인 ‘사마귀’(김원범)에게 영혼을 빼앗겨 유정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정을 보호하려고 한다. 여기에 영어를 남발하는 ‘오케이’ 귀신과 뺑소니 택시에 목숨을 잃은 어른 같은 소녀 ‘나리’, ‘덤 앤 더머’를 연상시키는 경찰 콤비 등 다양한 귀신 캐릭터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엮어간다. 그러나 신인 배우들의 어색하고 과장된 연기와 황당무계한 상황 설정 등에 가려 그 어떤 캐릭터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특히 사람의 머리가 땅에 꽂힌다든지 구더기가 가득한 햄버거를 먹는다든지 하는 지극히 만화적인 설정은 웃음을 자아내기보다 상상력의 일천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총알 택시의 속도감을 전달하기 위해 6㎜카메라로 공들여 찍은 잦은 질주 장면 역시 화면이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영화 감상에 오히려 방해가 될 듯. 그나마 자동차 추락신 등을 리얼하게 재현해냈다. 30일 개봉.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