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1월 PHOTO 경기 표지

[Issue]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

보수 대집결 직선제 첫 과반수 득표 박 위기극복 열망, 국민 마음의 승리 제18대 대통령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60)가 당선돼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준비된 여성대통령과 국민대통합을 내세운 박 당선인은 지난 12월 19일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향후 5년간 대한민국 호를 이끌어갈 새로운 선장이 됐다. 개표 결과, 박 당선인은 전국 4천50만7천여 명의 유권자 중 3천72만1천여 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1천577만3천129표(51.65%)를 얻어 1천469만2천632표(48.02%)에 그친 문 후보를 눌렀다. 박 당선인은 당초 초박빙이 될 것이란 예상을 깨고 무려 110만여 표 차이로 이긴 것이다. 박 당선인은 17개 시도(세종시 포함)중 13곳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문 후보는 서울과 호남 지역 4곳에서만 1위를 기록했다. 최대 승부처인 경기도에서는 박 당선인이 352만8천915표(50.43%)를 얻어 344만2천84표(49.19%)에 그친 문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눌렀고, 인천에서도 85만2천600표(51.58%)로 문 후보(79만4천213표, 48.04%)를 제쳤다. 박 당선인은 경기지역 중 특히 의정부동두천양주연천포천양평가평파주 등 북부지역에서 강세를 보였고, 인천에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에서 큰 표차로 앞서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은 당초 예상과 달리 경기인천지역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와대 행을 견인했다는 분석이다. 박 당선인의 승리 원인은 높은 대중적 지지도와 안정적인 리더십, 두 번째 대권도전을 하면서 철저하게 준비한 정책, 준비된 여성대통령 슬로건, 국민대통합과 정치쇄신 등에 대한 기대 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로써 박 당선인은 한국 정치사의 첫 여성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글 _ 김재민 기자 jmkim@kyeonggi.com

[Issue] 박근혜, 그는 누구인가?

흉탄에 부모 잃어전방에는 이상 없습니까 박 당선인은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의 사이에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장충초교와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중성심여고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그해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이후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해 서거한 1979년 10월26일까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다. 22세에 어머니를 잃고 27세에 아버지까지 흉탄에 잃은 그는 동생들(근령지만)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옮겨 생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자마자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다른 애국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이 쓰던 돈이라며 6억 원을 받아 이번 선거과정 중 야당의 비난을 받았으나, 박 당선인은 TV토론을 통해 당시 아버지도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았다며 나중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막당사로 위기의 당 구해대선주자 부각 박 당선인의 정계입문은 1998년으로,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서 당시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 이른바 달성 대첩을 이루며 당선된 뒤 18대 총선까지 지역에서 내리 4선을 했고, 올해 19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로 5선에 당선됐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선출직 부총재 경선에 나서 당선됐으나 이듬해인 2001년 정당 시스템과 정치문화의 변화 등 당 개혁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대표를 역임했으며, 그해 5월 방북해 김정일과 회담을 갖기도 했다. 연말 16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 형식으로 다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2002년 대선에 실패한 한나라당이 2004년 17대 총선을 한 달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전멸 위기를 맞자 당을 구할 대표 경선에 나섰다. 그는 대표에 당선된 뒤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당사를 마련하는 등 사죄하는 마음으로 총선을 진두지휘해 예상을 깨고 121석의 선전을 거뒀으며, 이를 계기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지방선거 피습대선후보 경선탈락 아름다운 승복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을 당했다. 선거를 열흘 정도 앞둔 5월20일 신촌 사거리 유세 중 단상에 오르는 찰나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얼굴을 크게 베인 것이다. 11cm에 이르는 상처였지만 아슬아슬하게 안면신경을 피해가고 기적 같은 수술이 이뤄져 살아난 그는 이날로 인생의 2막이 시작됐다고 회고한다.당시 수술에서 깨어난 뒤 유세가 예정됐던 대전을 염두에 두고 대전은요?라며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투혼을 과시했다. 지방선거를 압승으로 이끌고 그해 말 대표에서 물러난 그는 2007년 첫 대선후보 도전에 나섰다. 경선 상대는 서울시장을 역임한 이명박 후보로, 최종 경선결과 박 전 대표가 당원대의원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이겼으나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에게 뒤져 대선후보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그는 깨끗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며 이 후보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아름다운 승복의 모습을 보여줘 박수를 받았다. 18대 총선 공천 친박 반발탈당 친박연대 구성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이계는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배제, 강한 반발을 샀다. 특히 박 당선인은 당시 공천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하는 등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서청원홍사덕 등 친박계 인사들은 급기야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총선출마를 강행하거나 친박 무소속 연대로 대거 출마했다.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과 전국구 8석에서 당선됐으며,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됐다. 박 전 대표는 이들의 복당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며, 강재섭 대표가 물러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하면서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 의원들이 모두 복당했다. 이들의 복당으로 한나라당내 친박 의원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됐고, 친이계와 본격적인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친이친박계 갈등은 이 대통령이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세종시 수정안은 친박계의 반대 등으로 인해 결국 폐기됐다. 19대 총선에서 다시 당 구하고 대선후보 선출 지난해 12월9일 홍준표 대표가 디도스 파문으로 인해 사퇴하며 당이 19대 총선 참패가 예상되는 등 위기를 맞자 한나라당은 박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 두 번째로 당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비대위원장을 맡은 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명하고 당을 환골탈태시키며 총선에 임해, 예상을 깨고 과반이 넘는 152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비대위원장에서 물러나고 황우여 대표(인천 연수) 체제가 출범하자 7월10일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이며,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후 김문수 경기지사와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김태호 의원과 경선을 벌여 전체 유표투표의 84%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선후보에 선출됐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여의주 물다 이번 대선에서 박 당선인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으로, 여성대통령의 탄생이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이자 쇄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선후보로 등록하면서 19대 의원직(비례대표)을 사퇴했으며, 이번 대선이 마지막 정치여정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박 당선인은 대선 선거과정에서 정권교체를 주장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을 펼쳤다. 특히 문 후보는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맹추격전을 벌였고,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까지 막판 사퇴하며 정권교체를 주장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막판 문 후보 측의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등 잇단 네거티브 공세가 역풍을 맞으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 간 지지율이 좁혀지긴 했지만 끝내 문 후보가 박 당선인을 역전시키는데 는 실패했다. 박 당선인의 장점은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다. 세종시 문제와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박 당선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지 못한 100%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박근혜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은 이번에 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이 같은 약속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글 _ 김재민김동식 기자 jmkim@kyeonggi.com

[Issue]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요인과 과제

박 당선인의 승리는 선거 막판 보수층의 결집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보수 대 진보의 이념 대결로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 등 진보 진영의 연대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층이 대거 투표장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특히, 20~30대와 50~60대의 세대간 대결 구도 속에서도 그 응집력은 장년층이 더욱 공고했다. 여기에 사회적 고령화 현상, 박근혜 당선인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차별화, 박 당선자의 고정지지층 등도 주요 변수로 풀이된다. 이 같은 현상은 경기지역 표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17대 대선에서 112만여 명이던 도내 50대는 172만여 명으로 증가했고 60대 이상도 같은 기간 동안 40만 명 이상 늘어났다. 반면 문 후보의 주요 지지층인 20대와 30대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을 의식, 박 당선자는 이명박 대통령과 지속적으로 거리를 뒀으며 고정 지지층이 이탈하지 않고 오히려 결집력을 발휘, 시너지 효과를 고양한 점도 승리의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수도권에서 박 당선자의 열세가 예상됐으나 경기도의 경우, 서울보다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면서 유권자들이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은 정권연장에 성공했지만 이명박 대통령 시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시대로의 환골탈태가 불가피하게 됐다. 더불어 박 당선인은 5년 전인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 대통령에게 패해 분루를 삼켰지만, 5년 만에 두 사람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이는 지난 5년간 정국을 주도했던 친이(친 이명박)계가 몰락하고 앞으로의 5년은 박 당선인 중심의 친박(친 박근혜)계가 주도하게 됐다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당은 이미 19대 총선으로 친박계가 주도하며 공고한 결집력을 보이고 있고, 국회도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으로 새누리당이 과반을 넘는 154석의 여대야소 상황이어서 박 당선인의 정국 주도권과 장악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며, 정책공약 실현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됐다. 초미의 관심사는 국민대통합과 정치쇄신을 강조했던 박 당선인이 향후 인수위와 정부 부처 인사에서 대탕평 인사를 단행하고, 과감한 정치쇄신을 추진할 것이냐다. 박 당선인은 지역균형발전과 대탕평 인사로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지 못한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임기 초반에는 선대위에서 크게 활약한 옛 친이계 인사와 중도 성향 인사들을 대폭 중용 할 것이란 전망이다. 더불어 정치쇄신과 관련, (가칭)국정쇄신정책회의 설치 등에 속도를 낼 전망이며, 여야 지도자를 포함한 국가지도자 연석회의 구성도 공약으로 밝힌 만큼 야당과의 대화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이번 선거에서 재현된 영호남의 민심이반, 세대간의 갈등, 부의 양극화, 경제민주화 등이 시급한 해결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밖에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악화된 남북간 긴장국면의 해소도 과제 중 하나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미래연합을 창당할 당시인 지난 2002년 5월 북한을 방문, 김정일과 회담을 가진 바 있다. 국가관안보관이 투철하고 위기관리 리더십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만큼 남북한 문제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글 _ 김재민김동식 기자 jmkim@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장용준 기자 scchoo@kyeonggi.com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