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딸, ‘대통령’이 돼 청와대로 돌아오다
흉탄에 부모 잃어…“전방에는 이상 없습니까”
박 당선인은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의 사이에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장충초교와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중·성심여고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그해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이후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해 서거한 1979년 10월26일까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다.
22세에 어머니를 잃고 27세에 아버지까지 흉탄에 잃은 그는 동생들(근령·지만)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옮겨 생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자마자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다른 애국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이 쓰던 돈’이라며 6억 원을 받아 이번 선거과정 중 야당의 비난을 받았으나, 박 당선인은 TV토론을 통해 “당시 아버지도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았다”며 “나중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막당사로 위기의 당 구해…대선주자 부각
박 당선인의 정계입문은 1998년으로,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서 당시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 이른바 ‘달성 대첩’을 이루며 당선된 뒤 18대 총선까지 지역에서 내리 4선을 했고, 올해 19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로 5선에 당선됐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선출직 부총재 경선에 나서 당선됐으나 이듬해인 2001년 정당 시스템과 정치문화의 변화 등 당 개혁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대표를 역임했으며, 그해 5월 방북해 김정일과 회담을 갖기도 했다.
연말 16대 대선을 앞두고 합당 형식으로 다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2002년 대선에 실패한 한나라당이 2004년 17대 총선을 한 달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전멸 위기를 맞자 당을 구할 대표 경선에 나섰다. 그는 대표에 당선된 뒤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당사를 마련하는 등 사죄하는 마음으로 총선을 진두지휘해 예상을 깨고 121석의 선전을 거뒀으며, 이를 계기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지방선거 피습…대선후보 경선탈락 ‘아름다운 승복’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을 당했다.
선거를 열흘 정도 앞둔 5월20일 신촌 사거리 유세 중 단상에 오르는 찰나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얼굴을 크게 베인 것이다.
11cm에 이르는 상처였지만 아슬아슬하게 안면신경을 피해가고 기적 같은 수술이 이뤄져 살아난 그는 이날로 인생의 2막이 시작됐다고 회고한다.당시 수술에서 깨어난 뒤 유세가 예정됐던 대전을 염두에 두고 “대전은요?”라며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투혼을 과시했다.
지방선거를 압승으로 이끌고 그해 말 대표에서 물러난 그는 2007년 첫 대선후보 도전에 나섰다. 경선 상대는 서울시장을 역임한 이명박 후보로, 최종 경선결과 박 전 대표가 당원·대의원·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이겼으나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에게 뒤져 대선후보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그는 깨끗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며 이 후보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아름다운 승복’의 모습을 보여줘 박수를 받았다.
18대 총선 공천 ‘친박’ 반발…탈당 ‘친박연대’ 구성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이계는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배제, 강한 반발을 샀다. 특히 박 당선인은 당시 공천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하는 등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서청원·홍사덕 등 친박계 인사들은 급기야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총선출마를 강행하거나 ‘친박 무소속 연대’로 대거 출마했다.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과 전국구 8석에서 당선됐으며,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됐다.
박 전 대표는 이들의 복당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며, 강재섭 대표가 물러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하면서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 의원들이 모두 복당했다. 이들의 복당으로 한나라당내 친박 의원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됐고, 친이계와 본격적인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친이·친박계 갈등은 이 대통령이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세종시 수정안은 친박계의 반대 등으로 인해 결국 폐기됐다.
19대 총선에서 다시 당 구하고 대선후보 선출
지난해 12월9일 홍준표 대표가 디도스 파문으로 인해 사퇴하며 당이 19대 총선 참패가 예상되는 등 위기를 맞자 한나라당은 박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 두 번째로 당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비대위원장을 맡은 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명하고 당을 환골탈태시키며 총선에 임해, 예상을 깨고 과반이 넘는 152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비대위원장에서 물러나고 황우여 대표(인천 연수) 체제가 출범하자 7월10일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이며,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후 김문수 경기지사와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김태호 의원과 경선을 벌여 전체 유표투표의 84%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선후보에 선출됐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여의주 물다
이번 대선에서 박 당선인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으로, “여성대통령의 탄생이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이자 쇄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선후보로 등록하면서 19대 의원직(비례대표)을 사퇴했으며, “이번 대선이 마지막 정치여정”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박 당선인은 대선 선거과정에서 ‘정권교체’를 주장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을 펼쳤다.
특히 문 후보는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와 단일화를 하며 맹추격전을 벌였고,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까지 막판 사퇴하며 ‘정권교체’를 주장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막판 문 후보 측의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등 잇단 네거티브 공세가 역풍을 맞으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 간 지지율이 좁혀지긴 했지만 끝내 문 후보가 박 당선인을 역전시키는데 는 실패했다.
박 당선인의 장점은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다. 세종시 문제와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박 당선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지 못한 100%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박근혜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은 이번에 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이 같은 약속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글 _ 김재민·김동식 기자 jm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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