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말하다]국민웹툰 ‘미생’ 원작자 윤태호 작가

“소박하고 순도높은 노력 쏟는게 내 창작활동의 원동력이죠”

성남시 분당구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한 윤태호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허영만 선생이 “국내 A급 만화가의 작업실이 이 정도 수준”이라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던 그곳이다. 66㎡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방은 복층으로 이뤄진데다 윤 작가와 문하생 4명의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책장이 붙박이 식탁을 빼곤 유일한 가구였다.

만화, 소설, 인문학서부터 시나리오 작법 교재까지, 저마다 다른 책이 빼곡했다. 20대 시절, 이야기 공부를 위해 영화 시나리오 전집을 구해 읽고 드라마 대본을 베껴 썼다는 그. 새우잠을 자면서도 고래 꿈을 꾼다고 했던가. 누적 조회 수 4억건을 넘어선 ‘국민웹툰’, ‘미생(未生)’은 여기서 탄생했다.

■국민웹툰 ‘미생’의 뒷이야기

미생이 지난달 19일 1년 7개월의 대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미생은 바둑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연구생 출신 청년 ‘장그래’가 우여곡절 끝에 종합상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사회생활을 다룬 이야기다.

복잡다단한 대기업의 생리를 구체적으로 파헤치면서도 바둑만 알고 살아온 ‘외곬수’ 장그래가 사색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며, 회사에 일으키는 크고 작은 화학작용을 세심하게 다루면서 ‘직장인의 바이블’로 까지 불렸다.

사실 미생은 바둑의 고수가 일반 셀러리맨에게 카네기의 처세술을 알려주는 식의 이야기로 기획됐었다. 그러나 이 같은 출판사의 제안을 윤 작가가 현 방식으로 바꾸면서 3년 뒤에야 연재하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크게 잘났다는 느낌 없이 살아왔어요. 그래서 내 생각을 ‘이게 사실이니까 믿어’라는 식으로 말하기가 어렵죠. 자기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당당하고 그런 캐릭터는 잘 못해요. 그래서 방향이 바뀌었죠.”

그러나 20살 때부터 허영만 선생 등의 문하생으로 지내다 25살 데뷔한 이래 줄곧 만화계에만 있는 그가 회사생활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바둑은 관심만 있을 뿐이지 10급 정도의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회사 속에서 바둑 두듯 한 수씩 놓아가는 장그래의 행마를 따라가기 위해선 상당한 투자가 필요했다.

우선 작품을 시작하기 전 한국기원에서 바둑과 바둑기사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 본문 안에 기보를 넣고 사활 싸움까지 다루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지만, 본문 안에서는 바둑을 싹 드러내고 바둑 용어도 생활상을 나타낼 수 있는 정도로만 다뤘다.

‘바둑을 전면으로 내세운 만화와 영화, 소설이 모두 실패했으니, 바둑은 가급적 안 나오고 바둑의 향기만 존재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는 한국기원의 조언 탓이다.

연재가 되기 시작하면서 바둑기사의 꿈이 좌절된 연구생들이 직접 연락해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바둑 이야기는 일단락됐지만, 문제는 회사생활에 대한 묘사였다. 차장이 높은지, 과장이 높은지 직급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온 종일 스토리 작업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고, 종합상사 직원, 기업홍보 전문가, 중소기업 관계자 등을 두루 만나 한 에피소드당 6~7시간을 할애해 ‘취재’했다.

“워낙 모르니까 취재 나갈 때마다 스터디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장생활을 안 해봤기 때문에 세부사항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죠. 직장인에게는 당연한 일들도 제게는 모두 신기하고 생소했기 때문에, 안 다뤄야 할 것들까지 세세하게 챙기게 됐죠.”

‘리스크’와 ‘크라이시스’의 용어 차이를 알고 하도급업체에 절절매는 대리를 대하는 임원의 태도에 현실성을 주기 위해 밤 새 고민하다 새벽 5시가 되자마자 취재원들에게 “이 단어 써도 됩니까”라고 전화하기도 수차례다.

연재 내내 댓글도 꼼꼼히 챙겨봤다.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간다거나 어학연수를 떠나는 등 새로운 ‘모험’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평소에 귀 꽉 막고 살면서 내 노력을 알아달라고 하는 작가와 귀와 눈을 열고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은 작가는 다를 거로 생각해요. 지적이 있다면 그 지적이 공정한지 판단하는 능력도 필요하고요. 내게는 하나의 만화,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이잖아요. 그래서 장난하듯 만들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미생은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미생을 계획하며 회색 양복과 오피스룩 속에 빛을 잃은 샐러리맨에게 각각의 고유한 색을 입히고 싶었다는 그. 충격적인 사건이나 거대한 음모가 없음에도 미생이 많은 호응을 얻은 이유는 캐릭터가 저마다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인이 독자층이고 어차피 만화, 어차피 가상인데 여기서 사건이 터지고 해결된다고 해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가 핵심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캐릭터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뭘 느끼느냐, 그리고 이들이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투사가 되느냐가 핵심이죠. 만화를, 창작물을 본다는 건 그런 행위인 것 같아요”

■요새 제일 ‘핫’한 만화가? 강박과 고민을 달고 사는 워커홀릭!

미생 연재가 끝났으니 쉴 법도 하건만 그는 조금 과장하면 ‘분 단위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을 연재하고 있고 세종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에서 주 2회씩 5년째 강의한다. 방송과 신문, 관공서, 일반기업 등의 인터뷰와 강연을 하는 한편 부천만화영상진흥원의 이사 등 각종 직책도 안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최초의 만화비평웹진 ‘에이코믹스’를 창간하기도 했다.

성격상 거절을 못 하는 데다 워낙에 일 중독자라는 게 윤 작가의 설명이다.

“목적지향적이라고 할까, 강박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속을 잡거나 아무 일 없이 나가도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두르죠. 전작 ‘이끼’ 연재 전 아이가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탔는데 뒤에서 네 시간을 잡아준 일이 있어요. 긴 슬럼프 기간이었는데 뭐라도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요. 그날 보조바퀴를 뗐고 당시 3년간 그게 가장 잘한, 생산적인 일이었어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박은 그러나 그를 나아가게 했다.

시인 서정주를 키운 8할이 바람이었다면 만화가 윤태호를 키운 (적어도) 4할은 ‘강박’일 정도다.

무식에 대한 공포,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악건성 피부, 낯을 가리는 성격.

갖가지 콤플렉스를 안고 자신을 의심하고 줄기차게 고민하는 성향은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조심스레 발현하는 식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먼저 드러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외치기보다 사람들이 바라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려는 장그래는 목소리가 큰 사람보다 오히려 깊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은 말에 질려버린 것 같아요. 힐링이니 멘토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뭔 가르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아예 안 들어오는 거죠.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그저 소박한 건데…. 제가 뭐, 가르칠 자격이 있나요.”

소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직업의식이 프리랜서 만화가로서의 동력이라는 그는 작가 스스로 즐거운 작품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또 만화 외적인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만화에 몰입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순도 높은 노력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작가에게는 욕망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욕망이라는 게 남을 이기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는 거에요. 내가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면 꿈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 코앞에 있는 뭐부터 해야지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죠.”

윤 작가는 올해는 물론 후년까지 이미 ‘욕망 구현’을 위한 일정을 꽉 채웠다.

올 연말 극지연구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남극 세종기지에서 한 달 반가량을 머물며 작품구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내년 초에는 신안 앞바다 보물선 도굴꾼 이야기를 만화에 담고 가을에는 미생 시즌 2를 선보인다.

창작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한 윤 작가가 생각하는 창조란 과연 뭘까.

“자기가 그동안 쌓아왔던 익숙한 것들을 증명해내는 게 창작이지, 최초의 것을 만드는 게 창작은 아니죠. 그래서 창작하는 사람이 곧 창조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먼저 말한 사람들의 말을 잘 축적해서 그 위에 내 말을 덧입혀 내놓은 것뿐이죠. 먼저 말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것, 그러면 그게 이 시대의 창조가 되는 것 아닐까요?”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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